第三首 영호재회(英豪再會)
-후일을 부탁하다
천하(天下)의 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으니
심소옥의 강권에 의해 탕약과 죽을 먹은 한효월은 종일 앉아서 운공에 몰두했다.
다른 많은 일들이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알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유성에게 얼핏 들은 것으로는 여기가 아주 은밀한 곳인 듯했다.
그것은 적의 눈을 피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만에 하나, 적에게 발견된다면 위험하다는 의미. 그것을 벗어나는 길은 본신의 진력을 회복하는 길밖에 없었다.
지금 상태라면 그의 무공은 일진매일진(日進每日進)이라 할 수 있어서 마지막 순간에 이르면 그 진경은 아마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일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럴수록 마지막 순간은 빨리 다가오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한효월은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기력을 되찾으면서 기혈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그러자 잠복해 있던 독기도 점점 더 위세를 더해갔던 것이다.
원래 한효월은 요광성주에게 숨겨진 함정을 이미 짐작했었고 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삽혈고의 형태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능력으로는 삽혈고를 능히 통제할 수 있었다.
그때 고질만 발작하지 않았다면…….
그런 상황에서 몸으로 퍼진 독기는 만만하지 않았다.
약선 백장주와 같은 의도성수가 손을 쓴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움직일 수도 없는 물건이 바로 삽혈고였다.
천기선생 공일도가 반드시 한효월을 죽이기 위해서 수배한 물건이니 그 지독함은 말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상당 기간, 아니, 어쩌면 당분간 해독이 불가능할런지도 몰랐다.
"언제까지 무리를 해야 하나……."
생각에 잠겨 있던 한효월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을 굴려봐도 해독제가 없이는 해독이 쉽지 않은 독이었다. 공력으로 쉽게 누를 수 있는 독이 아니었다. 보통의 독처럼 삼매진화를 일으켜 태우기도 어려웠다. 핏속에 들어가서 동화(同化)되어 돌기 때문에 전신의 피를 갈아내고 해독제를 복용해야 했고 고수들이 그 과정을 도와줘야만 했다.
그런 상황을 벗어나려면 목숨을 건 무리를 해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자칫 실수하면 개죽음을 해야 하니.
'또 방심이란 말인가?'
그 정도의 독기는 충분히 자신의 공력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사실이었지만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자 답답하기만 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서둘렀지만 그것이 오히려 화가 되어 시간을 깨먹고 있으니 어찌할 것인가.
답답할 수밖에 없다.
그가 처음 깨어난 시간은 아침 무렵이었다.
그리고 창밖으로 희미하게 스며드는 빛줄기는 지금이 저녁 무렵임을 말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답답해진 한효월은 몸을 일으켰다.
운공을 하여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다음이니 움직임에는 지장이 없었다. 내부가 어떻게 되었든.
문을 열자 작은 마루[小廳] 하나가 나타났다.
거기 의자 하나가 놓여 있고 유성이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한효월이 문을 열고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심소옥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공자!"
"시끄럽게 하지 말거라."
한효월은 가벼이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가셔도 됩니까?"
유성이 급히 옆으로 붙어 서면서 물었다.
"그럼 언제까지 누워만 있으란 말이더냐?"
한효월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계속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섰다.
작은 농가였다. 그러나 일반 농가보다는 조금 커서 부농(富農)의 집인 듯했다. 주변은 숲으로 둘러싸였다.
싸리 담으로 둘러싸인 집 뒤는 제법 짙은 숲이 우거진 야산이다. 농가의 아래쪽으로는 서너 채의 농가가 더 있다.
그 모두가 숲을 등졌고 앞으로 논밭이 조금 보였다.
실개천이 흐르는 건너로는 다시 작은 농가가 몇 채 있는 듯했다.
"모두 개방에서 관리하고 있답니다. 어디로 공격해 오든 다 보이죠. 퇴각할 시간이 충분한 거죠."
유성이 설명했다.
"감 사질을 보지 못했느냐?"
"한 번 다녀가셨습니다."
"왔다 갔다는 말이냐?"
"예, 저쪽 뒤에 있는 농가 한 채를 빌려 좌 당주를 돌보게 하고는 공자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까 다시 어디론가 급히 가셨습니다. 대단히 초조한 모습이셨는데……."
감천형은 지금 무림맹, 아니, 제천교를 상대하기 위한 조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가로이 한곳에 머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효월을 몰라라 하고 다른 곳으로 돌아다닐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인가 중대한 일이 있다는 의미일 터이다.
또 무슨 일이…….
주위는 고요했다.
오가는 사람도 없고 간들거리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가는 새들의 지저귐만이 이따금 귓전을 울린다. 들리느니 천뢰(하늘에서 나는 모든 소리, 바람 소리 등)요, 느끼느니 지뢰(땅에서 나는 소리)이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자연.
만뢰구적하여 조용한 밤은 아니지만 자연의 소리는 있는 그대로 시끄럽지 아니하고 편안하기만 하다. 왜 이 가운데에서 그처럼 서로를 죽이면서 싸워야 하는 것일까.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서 생각을 굴리던 한효월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근래에 들어 자주 회의가 든다.
그냥 무우곡에서 고요를 즐기다가 가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산을 내려와 한 일이라고는 생면부지의 남을 죽여 피를 본 것밖에는 없는 듯했다. 비록 정의를 위해, 세상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이었을까? 선과 악이 하나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세상이 흘러가니 그것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선이 이긴다 할지라도 언젠가 악이 득세할 것이며, 그 악 또한 언젠가는 선에게 밀려 순환함이 세상의 이치가 아닐까?
이렇듯 자신이 독상(毒傷)을 입어 헐떡이고 있음도 그런 인과응보가 아닐런지…….
"후우……."
긴 한숨.
한효월은 깊고도 깊게 진기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가 수련한 주천무애신공은 이미 최상의 경지에 이르러 진기를 한숨 돌리자 들떴던 심신은 고요히 가라앉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힘있는 자들이 스스로의 길을 가다가 부딪쳐 싸우는 것을 뭐라고 할 수야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싸움으로 인해 무고한 생명이 초개와 같이 스러지는 것은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 일장공성(一將功成)에 만골고(萬骨枯)라 함은 그러한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예(例)에 다름이 아니다.
하루하루 그날의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그는 자신을 위해 산을 내려온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들을 위해서, 힘없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마지막 삶을 살아가고자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움직이셔도 괜찮으시오?"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를 본 유성이 흠칫, 옆으로 물러났다.
각진 얼굴의 사나이. 허름한 옷의 그는 바로 개방방주인 황엽이다. 산책이라도 나온 듯 걸음을 옮겨 다가오는 그의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침착하다.
"덕분에."
그를 본 한효월이 공수하여 예를 표했다.
마주 손을 잡은 황엽은 굳은 표정으로 말하였다.
"백 의선을 만나고 오는 길이오. 왜 이렇게 무리를 하시오?"
"걱정을 끼쳐 드렸군요."
변명도 없다.
그 한마디에 황엽은 모든 것을 알아듣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힘든 상태라고 들었소. 잠시라도 쉬면서 몸을 돌봄이 어떠하시겠소?"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보다는 좌 사실의 상태는 어떠한지, 제가 가서 볼 수가 있겠습니까?"
"좌 당주의 용태는 그리 좋지 않소이다. 의선께서 손을 썼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오.
어떻게 독고 맹주 쪽 사람들은 하인(何人)을 막론하고 도무지 자신을 돌보질 않는 건지……."
"정신을 차렸다고 들었는데……."
"정신을 차리긴 했는데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한 공자의 용태만 물어보고는 그걸로 끝입니다. 사형인 감 당주에게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런가요……."
한효월은 말끝을 흘렸다.
"한 공자께서 괜찮다면 여기서 이야기나 합시다. 성아, 주변을 좀 지켜주겠느냐?"
황엽은 옆에 있던 바위에 그냥 주저앉았다.
유성이 숲 속으로 몸을 날렸다. 날렵한 것이 하루하루 발전하는 모습이다.
표면상으로는 유성의 움직임뿐이지만 실제로 그들의 주위는 나는 새도 스며들 수 없도록 암중에 천라지망이 생겨난 다음이다.
한효월과 마주 보는 황엽은 정색을 했다.
"제천교주를 보셨소?"
"봤습니다."
"정말이오?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아냈소?"
황엽이 놀라 다그쳐 물었다.
"알아내고 말고가 아니라, 소생이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아, 알던 사람이라니?"
어이없는 듯 되묻던 황엽은 한효월의 이어지는 말에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 그런! 정말 처, 천기선생이란 말이오?"
"맞습니다. 그였습니다. 그가 사칭한 게 아니라면 그의 입으로 자신이 제천교의 교주라고 하였으니까요."
"그, 그런 일이…… 그가 죽음을 가장하고 그런…… 으음……!"
황엽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인 듯 깊은 신음을 흘려냈다.
한효월은 천기선생 공일도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남김없이 황엽에게 들려주었다. 단지 좌백에 관한 일만 빼고서.
"한 공자의 생각대로 구대문파에 치욕을 가져다 주었던 암중 주재인이 바로 그자였구료. 거기다 봉황문까지……. 도대체 그자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런…… 대막사왕이 정말 봉황문주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로군! 그렇다면 그 양반의 말이 모두 맞다는
이야기인데……."
"……."
누구 이야기냐는 듯 한효월이 그를 바라보자 황엽이 첨언했다.
"정화, 정 대인 이야기요. 내가 그곳에 간 것은 정 대인으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었소. 그는 이미 제천교주의
행적을 파악하고 있었고 그를 잡기 위해서 고수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소. 보구회의 군주께서 도착하는 것이 조금만 빨랐더라도
독고 맹주가 가세하여 놈을 잡을 수가 있었을 텐데 말이오."
황엽이 하는 말은 한효월을 놀라게 했다.
"정 대인이 그의 행적을 파악하고 있었더란 말입니까?"
"그렇소.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소."
황엽이 풀어내는 것은 놀라웠다.
원래 정화가 이곳으로 온 것은 황제의 특명을 받고서였다.
황제의 명을 받았으니 그렇지 않아도 권신(權臣)인 그의 권세는 황제가 친림한 것과 같았다. 그는 그러한 힘으로 강화의 정세를 샅샅이 훑고 있었는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정화는 황엽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당연히 세부적인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만을 알려주었을 뿐이다.
하나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도 놀라웠다.
개방은 그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여러 가지를 알아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고 그들만이 가진 정보도 있었다.
"정 대인은 제천교를 상대하기 위해서 강호에 나온 게 아니었소. 그는 북원의 잔존 세력과 그분을 찾기 위해서 온 것이오."
"그분이라면?"
"지금의 황상, 그분의 조카이신 전 황상 말이오."
전의 황상이라면 바로 당금의 황제인 영락제에게 쫓겨난 건문제(建文帝)를 말한다. 그는 영락제에게 쫓겨났지만 환란 중에 그의 시신이 보이지 않아 두고두고 세상의 억측을 낳았다.
"그…… 분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일반적으로야 돌아가셨다고 알려졌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어디론가 피신하신 것으로 보는 관측이 많은 것도 사실이오. 만약 그분이 살아 있어 다른 곳으로 가서 기병을 하게 되면 당금 황상께서는 여러 가지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오. 해서 지금까지 백방으로 그분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고 일설에는 정 대인이 해외로 다니는 것도 그분의 행적을 찾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소."
"음…… 그런데 그게 제천교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혹 그분이 제천교에 계시다는……."
"아니, 그건 모르겠소. 하지만 정 대인이 제천교주를 공격한 것은 제천교가 북원과 무슨 선이 닿아 있다고 의심하기 때문인 것 같소. 만약 그렇다면 절대로 좌시할 수 없는 일일 테니 그처럼 전력을 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오."
"제천교가 북원과……."
한효월이 중얼거린다.
"한 공자의 말대로라면 그는 대막사왕과 한편이니 그 말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소?"
"……."
한효월은 침음한다.
단순히 무림의 일만이 아니다.
나라와 나라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인가?
그것도 패퇴한 원의 잔영(殘影)이 연관되어 있단 말인가?
"이 일을 정 대인에게 알려주면 정 대인은 군대를 움직여 제천교를 칠 거요. 그럼 제아무리 제천교가 강력하다 할지라도 버틸 수가 없게 될 테니 우리들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소."
제아무리 강력한 문파라 할지라도 나라 전체와 싸워서 버틸 수가 없다. 위정자(爲政者)들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국가 기조(基調)를 위협하는 자들은 남겨두지 않는다. 설사 그것이 잘못된 일임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일을 함에 주저함이 없다.
스스로 선택받은 자로 남기 위해서.
그렇기에 중국의 황제들은 스스로를 일러 천자(天子), 하늘의 아들이라 칭하는 것이다. 물론 그 명칭조차도 고대의 어떤 기원에서 비롯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리 쉽진 않을 겁니다."
이어지는 한효월의 말에 황엽은 의아한 빛이 되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군대가 움직여 제천교를 공격하려면 그들의 근거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든 거점이 비밀일 뿐 아니라 수시로 이동을 하고 있어서 군대가 움직이면 군대가 당도하기 전에 자리를 옮겨 버리고 말 것입니다."
"으음…… 그것도 그렇긴 하군."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효과가 있긴 하겠지요. 승부는 어차피 그들의 무차별한 독 공세를 어떻게 차단하는가에 달려 있을 겁니다. 진척은 있으십니까?"
"흐음……."
문득 황엽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무리를 하는 게요?"
"무리하는 건 없습니다. 그렇게 해야 할 때라고 느껴서 그럴 뿐이지요. 어차피 제 몸은 제가 잘 알기 때문에."
"못 말릴 고집이군!"
황엽이 머리를 저었다.
약선 백장주가 이곳에 있는 것은 개방에서 가장 큰 비밀 중 하나다. 세상을 덮고 있는 제천교의 무차별 독 공세를 차단하기 위해서 해독약을 만들고 있는 곳이 바로 여기였다. 약선 백장주의 지휘 아래 수많은 의도성수들이 모여 해독약을 연구하고 있는 곳이 여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비곡(秘谷)에 숨겨져 있었다. 한효월의 상태가 위중하지 않았다면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만큼 이 일은 중요했다.
한효월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한 목숨보다야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더 중한 것을 잘 알기에. 그리고 그 일이 촌각을 다투는 시간 싸움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영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보았다면 쓸데없는 고집이라 할 만큼 억지를 부려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뿌린 것이라면 이미 해독이 끝났을 것이오. 하지만 상대는 독왕이오. 약선께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시간이 문제라고 들었소. 독기라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 해독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어려운 시기에 도움을 드리진 못하고 폐를 끼치다니……."
한효월의 중얼거림에 황엽은 어이없는 빛을 떠올렸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로 한효월은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종적을 찾아낸 것이 정 대인이라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뒤를 쫓고 있을 텐데?"
"맞소. 하지만 일단 스스로를 숨긴 이상, 다시 찾는다는 게 그리 쉬울 리가 있겠소? 본 방에서도 사방에 인마를 풀어서 백방으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쉽지 않소. 그보다는 동정호 일대의 정세가 심상치 않아서 그게 더 걱정스러운 상태요."
"십왕들의 다툼 때문입니까?"
"알고 있었소?"
멈칫, 한효월을 바라보았던 황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직접 부딪친 사람이 한 공자이니 모를 리가 없었겠지. 십왕뿐 아니라 정체를 알기 힘든 자들이 속속 출몰하고 있는데 상황이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소."
"그들이 노리는 것이 모두 봉신지약입니까?"
"그런 듯하오."
황엽은 서슴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으로 봐서 그는 봉신에 대해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하긴 그의 능력으로 보아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지금에 와서 그가 모른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리라.
"지금 봉신지약이 누구 손에 들어 있는지 아십니까?"
"서역법왕의 손에 들어 있는 것 같소. 하지만 그들 전체가 한데 얽혀 돌아가고 있어서…… 지금 상황에서는 어떻게 변했는지를 예측하기가 힘든 상황이오."
"남해용왕은 어떻습니까?"
"그는 자신의 용선(龍船)으로 돌아가 움직이지 않고 있소. 아마 부상이 간단치 않은 것 같은데 암중으로 고수들을 소집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소."
"그렇겠지요."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이오?"
"상세를 돌본 다음에 결정을 하겠습니다. 나머지는 감 사질을 만나본 다음에 정하기로 하지요. 제가 지금 좌 사질을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일이오. 상세는 많이 나아졌소만……."
문득 그가 말끝을 흐렸다.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혹, 좌 사질에게 무슨……."
"다른 문제는 아니오. 다만 상세가 때를 넘겨……."
"무공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그렇소."
황엽이 머리를 끄덕였다.
"으음……."
한효월이 신음을 흘렸다.
가장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도전음양대법은 극도의 위험을 동반한다. 물론 기재인 한효월이 손을 썼기 때문에 그 위험을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좌백은 위험 선을 넘길 때까지 무리를 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효월을 위해서 스스로 위험함을 알면서까지.
잠시 침음했던 한효월은 문득 황엽을 보았다.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 황엽은 무슨 의미냐는 듯 한효월을 마주 보았다.
"방주께서는 뜻이 있으십니까?"
황엽은 움찔, 한효월을 다시 보았다.
"……."
잠시, 그들은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의미요?"
"무림패권."
한효월은 한마디로 잘라 말한다.
"패권이라……."
"무림에 몸을 담은 사람으로서 천하제일의 자리에 우뚝 올라 주위를 굽어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일통강호(一統江湖)의 뜻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하……."
황엽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구대문파가 몰락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천교에 농락당하여 그들이 가진 가장 큰 무기인 저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저력을 회복하려면 해독을 하고 안 하고가 아니라, 잃어버린 신망(信望)은 가까운 시일 내에는 회복하기 힘들 겁니다. 그렇다면
강호는 신흥 세력, 혹은 피해를 입지 않은 힘이 두각을 나타내게 되겠지요."
"제천교를 앞에 두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오?"
"향후 강호 정세를 두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한효월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개방은 오랜 세월을 두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제대로 된 길을 걸어왔습니다. 말씀드리기 그렇습니다만, 한낱 거지의
문파가 정파(正派)라는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요.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나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눈치만
보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구라도 함부로 입을 열기 힘든 소리였다.
아무리 친한 상대라고 할지라도 맞대놓고 쉽사리 할 수 없는, 어쩌면 상대를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소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끄러미 한효월을 보던 황엽은 피식, 웃었다.
"상당히 각박한 추궁이군. 궁가방 때문이오?"
"……."
한효월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황엽도 얼굴을 굳혔다.
"내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요?"
"아무것도. 그저 있는 그대로를 듣고 싶을 따름입니다."
"막무가내로군. 설사 내게 그런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그걸 이 자리에서 말할 바보가 어디 있겠소?"
"전 그저 방주의 생각을 듣고 싶은 겁니다."
"허참……."
황엽은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
"사내라면, 야망을 가진 남자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군림을 꿈꿀 것이오. 나도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이오.
개방이 세상을 호령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나는 구천에서라도 자랑스러울 것이오."
세상이 놀랄 소리.
"하나 나는 세상을 잘 알고 있소. 마음은 있되, 바탕이 틀리다는 것을! 거지는 거지일 때 거지가 되는 것이지, 거지가 통치자가 되면 거지일 수가 없소. 이미 다른 신분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거지는 사라지게 될 것이오. 나는…… 개방을 중흥시킬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개방을 말소시킬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진 않소. 바램이 있다면 그들을 지금보다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싶다는 것. 욕심은 있지만 능력이 모자라오."
그 말에 한효월은 말없이 일어나 그에게 포권하면서 허리를 굽혀 보였다.
"무례를 범한 점 사과드립니다."
그의 이러한 변화무쌍한 행동은 매우 상궤(常軌)를 벗어났고, 평소 한효월과도 달라 황엽은 괴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슨…… 일이 있으시오?"
"황 방주께서 아무런 욕심이 없다고 하셨다면, 아마도 소생은 황 방주를 의심했을 겁니다. 사람이라면 욕심이 없을 리가 없으니까요. 다만 스스로 그 한계를 정할 수 있느냐 아닌가가 중요할 따름이겠지요."
말과 함께 한효월은 품속에서 봉서 하나를 꺼냈다.
단단히 밀봉된 그 봉서는 아예 종이로 감았다. 찢기 전에는 안의 내용물을 읽어볼 수가 없는 모습이다.
"이것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게…… 뭐요?"
난데없는 봉서에 황엽은 그 봉서를 받으면서 얼떨떨한 빛으로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감 사질은 영웅의 자질이 있지만 아직은 힘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황 방주께서는 대인의 기품을 가졌고, 흉금이 넓어 세상을
포용할 만합니다. 후일, 아마…… 그리 멀지는 않을 겁니다만 소생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감 사질과 함께 그
봉서를 뜯어보시고 소생을 찾아와 주십시오."
"무슨 일이라니?"
"지금은 그렇게만 알아주십시오."
한효월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입을 닫았다.
휘이이…….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그들을 휘감는다.
나뭇잎들이 부딪는 소리가 스산하게 일대를 울렸다.
갑자기 깊은 가을 속에 모든 것이 침잠하는 것만 같았다.
황엽은 물끄러미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보기 드문 기재.
관옥과 같은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병색이 떠올라 있다.
그러나 그는 천하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얼마 남지 않았을 자신의 생명을 하루하루 갉아먹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자신을 희생하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과연 무엇 때문에?
왜 그래야 하는 것일까?
황엽은 갑자기 묘한 기분이 되어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또한 천하를 위해서 뛰고 있음에도.
…….
침묵이 소리없이 그들 사이를 떠돌았다.
잔양(殘陽)이 흐느적거리면서 그 침묵 사이를 비집어도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