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풍운연의 9
第一首 백척간두(百尺竿頭)
-함정에 빠지다
배신(背信)은 늘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서
멀리 새소리가 들린다.
아침 안개에 묻힌 천지는 온통 우윳빛 광채에 묻혀 있다.
저 멀리 한 가닥의 빛줄기가 아침 안개를 비집고 번져 오고 있는 까닭이다.
싱그러운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풀잎 끝에 매달린 영롱한 이슬이 안개 속에서 반짝인다.
평화롭기 이를 데 없는 광경.
새벽은 그렇게 고요 속에 밝아오고 있었다.
장원(莊院).
아침 안개에 묻힌 장원은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하다. 최소한 겉보기로는.
하지만 그 후원 서재에서 잠든 사람은 없다.
누가 감히 이 순간에 잠은커녕, 눈이라도 깜박일 수 있을 것인가.
천기선생 공일도.
한효월.
그리고 그 뒤에 선 좌백.
세 사람은 석상처럼 상대를 바라보고 있다.
제각기 다른 눈빛을 담고.
…….
질식할 듯한 침묵이 서재를 누르고 있었다.
-내가 제천교주다!
천기선생 공일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참으로 놀랍기 이를 데 없었다.
당금 천하에서 가장 신비한 사람.
모든 것이 비밀에 가려져 아무도 그 정체를 알지 못했던 바로 그 사람, 그가 천기선생이라니!
다른 사람이 아닌 천기선생 공일도라니,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한효월의 얼굴도 납덩이처럼 굳어진 채였다.
짐작을 하고 묻긴 했으되, 너무도 쉽게 나온 대답에 그도 일시지간 뭐라고 입을 열지 못했다.
누구도 먼저 말을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고 있을 뿐.
먼저 입을 연 것은 천기선생 공일도였다.
"뜻밖인가?"
"아니라고 하면 믿겠소?"
"글쎄……?"
"결국 당신은 한 손으로 천하를 가린 셈이로군. 제천교로 세상을 뒤흔들고 봉황문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연극까지……
역대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지도 못한 정말 대단한 연기였군.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소?"
천기선생 공일도는 피식, 여유있게 웃었다.
"세상에는 남들이 모르는 많은 일들이 있지.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너에게 굳이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겠나?"
"그렇군……."
한효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혜도 선사가 남긴 번천지회에서 언급된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군. 당신이 그를 조종하여 무림맹에 균열을 일으키고 암중에
천하의 분란을 만들어내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그 일을 하고 있는 듯 착각을 일으키게 했으니…… 정말 대단하오."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 그도 편하군. 역시 바보들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피곤한 일은 없어."
천기선생 공일도는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말한다.
한가롭기 이를 데 없는 모습. 과연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저런 모습으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당신이 독고 사형에게 피해를 보고 은퇴했다는 것도 이 일을 꾸미기 위한 포석이었을 테니 결국은 천하가 당신에게 놀아난 꼴이군.
하긴 나 또한 당신의 그 출중한 심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그게 나무만 보는 자와 숲을 보는 자의 차이점이지. 어차피 너는 조각 맞추기를 위한 소모품에 불과했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소모품은 역할을 다하면 버려지기 마련이고 이젠 그 때가 된 셈이니까."
"때가 되었다?"
"……."
천기선생 공일도는 말없이 고개만 가벼이 끄덕였다.
"그럼 당신이 생각하던 나의 역할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게 무엇이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당신의 그 무대에서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소만?"
한효월의 물음에 천기선생 공일도는 미미하게 웃었다.
"그걸 알 필요가 있을까?"
"난 당신의 함정에 걸린 사람. 어차피 헤어나지 못할 텐데, 그 정도는 알려줘도 괜찮지 않겠소?"
천기선생 공일도는 머리를 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 것 같지 않군. 정 필요하면 저승에서 알아보면 되겠지. 난 함정에 걸린 제물 앞에서 잘난 척, 네가 이렇게
해서 이렇게 당하는 거야! 라고 으스대고 싶은 생각 따윈 꿈에도 없으니까 말이지……."
"아직도 내가 이곳에서 벗어날까 두려운 것이오?"
"말장난을 하고픈 생각은 없다."
문득 그가 정색을 한다.
"슬슬 끝낼 때가 되었지……."
채 말이 끝나지 않아 서리가 내린 듯 순식간에 방 안이 한기로 가득 찼다. 실제로 한기라기보다는 살기가 일어나 상대를 압도한다는 것이 옳으리라.
"끝내기 전에 하나만 더 물어보겠소."
한효월은 상대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 말을 이었다.
"그렇게 철저하고 내 앞에서 잘난 척하고 싶지도 않다면서…… 무엇 때문에 나를 당신 앞으로 힘들게 데려온 것이오?
가짜 대막사왕까지 등장시키면서까지……. 그냥 처리하는 게 더 나았을 텐데?"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저런, 난 가짜가 아니라네."
그리고 봉황문주 완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열린 창문 밖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창밖에 우뚝 서 있었다.
"가짜가 아니라면 당신이 정말 대막사왕이란 말이오?"
"맞아. 내가 당대의 대막사왕이지."
"한심하군……. 대막사왕이 이렇게 졸렬한 자라니."
한효월의 신랄한 매도에 봉황문주 완일은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할 말이 없군. 나 또한 이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네. 자네처럼 마음에 드는 사내를 만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야……."
쓴웃음을 지은 그의 난감한 얼굴은 그가 한효월에게 보여주었던 호탕함이 가식이 아니었음을 느끼게 한다.
그런 그가 무엇 때문에 천기선생의 명을 듣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의 무공이라면 천하의 그 누구도 그를 발 아래 두기 힘들 것인데. 설마 거기엔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진실을 어느 정도 보여주지 않으면 적을 속여 넘길 수 없는 법이지. 사실 저 친구까지 네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었는데…… 네가 만들어놓은 덫을 자꾸 피해가는 바람에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어서 널 이리로 직접 데려오게 한 것이다."
천기선생의 말에 한효월은 그를 바라보았다.
"덫을 피해간다?"
"그렇지. 원래 넌 향적사에서 죽었어야 했다. 그런데 봉신지약을 그처럼 쉽게 버리는 바람에 차질이 발생했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계속해서 나타나는 고수들과의 싸움으로 체내의 독기가 발동했을 텐데……. 그럼 모든 게 다 예정대로 되었을 테지."
"체내의 독기……."
"그렇다."
"역시 요광성주가 내게 온 것은 당신의 장난이었군."
천기선생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한효월을 본다. 그 눈빛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역시…… 짐작을 하고 있었던 게로군. 그래서 얻은 봉신지약을 그처럼 쉽게 버렸어. 그 바람에 그렇게 심혈을 기울였던 계획에 치명적인 차질이 벌어졌고!"
그는 짜증이 이는 듯 의자의 손잡이를 내려쳤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너를 굳이 이곳까지 데려오지 않았을 텐데!"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한효월은 냉랭히 말했다.
"바보가 아니라면…… 그런 기밀을 지니고 달려온 사람이 천간만난(千艱萬難)을 겪으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쉽게 믿을 수야 없겠지. 더구나 당신처럼 교활한 자의 수중에서."
천기선생은 한효월이 그를 매도(罵倒)하는 말에도 태연했다. 대신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흠…… 그런 생각을 할 것을 대비해서 몇 가지 안배를 첨가했는데도 그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었더란 말이지? 과연이로군!"
말이야 편하게 하지만 그가 기울인 심혈은 간단하지 않았었다.
거짓을 연달아 보여주면서 거기에 다시 또 진실과 거짓을 섞어 한효월에게 내보였다.
그는 자신을 한효월이 유인하고 있음을 한효월과 같은 천재라면 충분히 짐작할 것으로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실제로 한효월은 그의 감시 하에서 사라지면서 그가 보낸 추적자들을 흔적도 없이 처리하기도 했었다. 그렇기에 그는 거기에다 다시 요광성주를 투입했던 것이다. 그녀의 죽음은 한효월을 다시 한 번 확실히 유인하기 장치였고 더 중요한 것은 한효월에게 일정 시간 후에 독이 발작하도록 하독(下毒)하기 위해서였다.
요광성주야말로 독의 매개체였으니까.
그녀의 죽음은 한효월의 뛰어난 지혜를 무디게 할 수 있을 것이고, 그사이에 섭혼대법으로 세뇌된 그녀는 한효월에게 하독하기로 되어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그녀가 한효월과 입맞춤한 것은 바로 그러한 안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한 심모(深謀)는 그가 한효월을 그만큼 크게 보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잠시간 침묵.
그리고.
"내가 당신의 생각대로 중독이 되었을 것 같소?"
한효월이 입을 열어 물었다.
그때 좌백은 한효월에게서 전음이 들려옴을 들을 수 있었다.
'싸울 수 있겠나?'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난 다음이다.
자칫 무리한다면 채 힘도 쓰기 전에 쓰러져 버릴 것이기에 미리 물어본 것이다.
'가능합니다.'
좌백이 은밀히 답했다.
그때 천기선생이 말했다.
"시험해 보면 알겠지. 중독이 되었는지 아닌지……. 하긴, 크게 싸우지 않았더라도 지금까지 삽혈고를 지닌 채로 버티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긴 하군. 그러나 나를 만난 이상, 너의 운수는 그것으로 다되었다."
"과연 그럴까? 당신 혼자서 우리를 당할 수 있겠소? 바깥의 당신 하수인은 아마 당신을 도와줄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오."
"핫하하하……."
그 말에 천기선생은 낭성대소를 터뜨렸다.
"도울 필요가 있을까?"
그는 웃음을 그치며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웃음기가 돌고 있었다.
창밖의 봉황문주 완일은 여전히 태연하게 팔짱을 낀 채였다. 서재 안의 일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태도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읍시다. 사형의 부인, 그분과 당신은 무슨 관계요?"
"봉설란 말이냐?"
"그렇소. 봉황문이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그 봉황문에 기대어 있던 그녀 또한 무관할 리는 없을 것이 아니오?"
"그건 지옥에 가서 알아보는 것이 좋겠군. 거기 독고해가 있을 테니까 말이야. 거기 가서 물어보게."
말과 함께 천기선생은 몸을 일으켰다.
바퀴의자에 앉아서 겨우 움직이던 그는 조금도 망설임없이 몸을 일으켜 우뚝 섰다.
그것을 본 한효월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으음…… 세상에 보인 것이 단 하나도 진실이 아니었군."
그런 그를 보면서 우뚝 선 천기선생은 웃었다.
"진실이란 그렇게 멀리 있는 게 아니지. 네가 그 자리에 쓰러지면 무엇이 진실인지 알게 될 것이다!"
"누가 쓰러질 것인지는 봐야겠지!"
차갑게 소리침과 동시에 한효월은 한 손을 앞으로 쳐냈다.
칙, 치익!
강렬한 소리와 함께 그의 손가락에서 차례로 다섯 줄기의 지풍이 폭사되어 천기선생에게로 날아갔다. 바로 거세무비의 연환수인지력이다. 그 속도는 전광석화와도 같아 두 사람 사이의 일 장 정도의 거리를 찰나간에 뚫고서 날아들었다.
"아직도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한 모양이군?"
천기선생은 차갑게 코웃음 쳤다.
그리곤 그는 수중의 섭선을 빙글 한차례 돌리더니 그 사이로 일장을 쳐냈다.
웅장한 장세가 마치 거대한 항아리처럼 일었다.
파파파팡!
장세와 지력이 마주치자 격렬한 기세가 소용돌이치면서 일어났다.
쇠라도 뚫고 들어가는 연환수인지력! 그 지력과 장세가 마주치면 당연히 넓게 퍼지는 장세를 송곳 같은 지력이 뚫고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한효월과 천기선생과 같은 고수들이라면! 그런데 천기선생의 장세와 부딪치자 한효월의 그 절세무비한 연환수인지력이 그대로 흐트러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팍팍!
사방의 기물이 모조리 뒤집어지고 부서져 나갔다.
가공할 태풍이 방 안을 온통 헤집어놓았다.
그것을 이기지 못하는 듯 한효월도 주춤, 덮쳐 가려던 기세를 멈추어야 했다. 천기선생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고수라서 능히 한효월과 맞설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와 맞부딪친 한효월의 눈에서는 자신감이 일었다. 가히 촉(蜀)의 제갈량이 환생한 듯 놀라운 심계를 가진 천기선생이었지만 그 무공이 자신과 비교할 때 한 수 손색이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이번 일격을 쳐내면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전력을 다한 건곤일척의 공세를 위한 선도 탐색이 바로 이번 일격이었다. 상대의 반격에 의한 강한 반탄력을 느끼자 한효월은 마치 퉁기듯이 천기선생을 덮쳐 가려 했다.
그 기세를 천기선생이 읽지 못할 리가 없다.
자신만만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지만 실제로 그는 이번 일격에 그가 가장 자신하는 와선금류장(渦旋金流掌)을 전력을 다해 사용한 상태였다.
그 일격을 한효월이 받아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모든 판단을 이미 끝낸 다음이었던 것이다.
한데 충격을 받고 물러나는 듯 보였던 한효월이 그토록 무서운 기세를 뿜어내자 그는 한효월에 대한 모든 평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할 수가 있었다.
이미 그는 한 수를 잃어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실기(失機)!
변고는 바로 그때 일어났다.
쾅!
한효월의 등에서 엄청난 폭음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막 앞으로 덮쳐 가려던 한효월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날아갔다.
그 충격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는 온몸으로 벽에 부딪쳐 벽을 반쯤 부수고 처박혔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들었다.
땅을 짚고 몸을 일으키는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입가에서는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무공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이처럼 핏물을 줄줄 흘려내기는 힘들다. 그런 경지에 이른 고수라면 이미 자동적으로 외부의 위험을 감지하고 호신강기를 일으키는 경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치명적인 상태가 되기 힘들다.
하나 반대로 그런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 현재 한효월의 상태가 치명적인 상태라는 반증이기도 했다.
"어, 어떻게?"
고개를 든 한효월은 자신의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일그러진 얼굴에 두 눈을 부릅뜬 그의 눈에는 정말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 그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좌백이 우뚝 서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정말 믿을 수 없게도 방금 등 뒤에서 그를 친 사람은 좌백이었다.
실로 믿기지 않는, 누구도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가 배신할 것을 누가 생각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처럼 믿고 있었기에 무방비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배후를 신경 쓰지 않고 천기선생을 상대로 전력을 다하려던 한효월은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놀랐나?"
비웃는 듯한 천기선생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득의한 웃음을 띤 채로 한효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손 안에 들어온 고기.
그는 실로 완벽한 그물을 쳐놓고서 한효월을 몰아온 것이다. 절대로 헤어날 수 없는 그물.
"어, 어떻게?"
한효월이 다시 말했다.
말을 하자 핏물이 입에서 왈칵, 쏟아진다.
비틀거리면서 한효월은 부서진 벽을 짚고서 일어선다.
"너, 너도…… 너도 간세(奸細)였더냐?"
"……."
좌백은 납덩이처럼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한효월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은 언제라도 명령이 떨어지면 한효월을 공격하겠다는 의사 표시로 보이는 것은 왜일까?
대답은 천기선생이 했다.
"저 아이는 최후의 패였지. 사실 거의 쓸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패였는데 결국은 너를 위해서 쓰게 되었군."
"믿을 수 없어……. 그동안 얼마든지 배신할 기회가 있었지만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는데. 어떻게? 이건…… 이건……."
한효월은 머리를 저었다.
문득 그는 비틀거렸다.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은 듯한 몸짓. 비틀거리면서 등을 벽에 기대자 좀 전에 부서졌던 벽이 쿨쿨 반쯤
허물어진다. 그런 그의 얼굴에 갑자기 검붉은빛이 떠올랐다.
그것을 본 천기선생이 음산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야 독기가 발작하는 모양이로군……. 삽혈고는 공력으로 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절세고수에게는 그에 걸맞는 대접을
해야지. 너는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독고해를 처리할 때를 제외한다면 너 또한 그에 못지않은 심려(深慮)를
해야 할 존재였었고 천기를 짚어본 결과, 너를 더 이상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저 아이까지 탈을 벗게 한
것이지."
"무슨 이야기…… 요?"
"저 아이는 최후의 패다. 마지막 순간에 쓰기 위해서 어떤 경우에도 명령이 있기 전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도록 명령받았지.
그러니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맹주부의 일원일 수밖에. 그것은 바로 이런 순간을 대비해서 안배된 것이다. 처음에는
독고해를 겨냥해서 만들어둔 패였는데 너를 위해 쓰게 될 줄이야."
무섭다는 말.
그 말 외에 또 다른 무엇으로 그것을 형용할 것인가.
천기선생의 심모원려(深謀遠慮)는 세상을 놀라게 하고 남음이 있었다.
"그랬던가? 네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모든 것들이…… 다…… 위장된 것이었단 말이지……."
한효월은 가슴을 움켜잡은 채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좌백은 냉정한 얼굴로, 아니,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기만 했다. 아무런 답도 없이.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너를 처리하면 저 아이의 패는 계속 유효할 테지.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하긴, 네가 가고 나면 누가 있어서 나를 막을 수
있겠느냐? 세상은 다시 위대한 푸른이리……."
득의한 빛을 떠올리던 천기선생은 말을 멈칫하더니 정색을 했다.
"더 이상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겠지?"
그의 눈짓에 따라 좌백이 한효월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참혹함이 한효월의 눈에 떠올랐다.
어찌 그렇지 않을 것인가. 천하를 눈 아래로 둘 무공을 지니고서도 이렇듯 함정에서 허무하게 모든 것을 끝내야 하다니.
"싱겁게 끝이 나는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봉황문주 완일이 중얼거렸다.
"싱거운 게 아니지.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에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다. 하물며 한효월은 결코 토끼가 아니다. 자칫 우리의
대업을 망칠 수도 있는 존재라는 판단이 섰기에 내가 직접 나선 것이다. 그의 성취는 무림 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을 뿐
아니라 늘 나의 예측을 뛰어넘……."
천기선생의 말이 채 끝나기 전이었다.
갑자기 바깥에서 낮은 비명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격렬한 싸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사태였다.
"누구와 같이 왔느냐?"
천기선생이 봉황문주 완일을 바라보았다.
"우리 셋만 왔는데……."
괴이한 표정으로 봉황문주 완일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누가 이곳을 알고?"
천기선생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싸움 소리는 심상치 않았다.
외곽에서 들리는 것 같던 싸움 소리는 좌우로 범위가 급격하게 확대되었고,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타난 적이 이쪽보다 강하다는 의미였다.
"처리해!"
천기선생이 명했다.
변고가 생긴 이상 길게 끌어서 좋을 일은 없다. 그것이 일 처리의 가장 기본이었다.
순간 좌백이 한효월에게 덮쳐 가면서 일장을 가했다.
쳐든 손에서 강력한 바람이 일고 있었다. 그와 한효월의 거리는 거의 지척인지라 치명적인 타격을 당한 한효월로서는 피할 수조차
없었다.
쾅!
폭음과 함께 좌백의 일장이 한효월을 쳤다.
그가 있던 자리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흠?"
천기선생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한효월이 아슬아슬하게 몸을 피해 버렸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과 같은 몸놀림은 아니었고 겨우 옆으로 몸을 틀면서 피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좌백은 그것을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덮쳐 가는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고 다시금 일장을 가했다.
쾅!
미처 피해내지 못한 한효월이 그 일장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피분수를 뿜어냈다.
그는 거대한 망치에 맞은 듯 방금 전 좌백의 일장에 반쯤 부서진 그 등 뒤의 벽을 완전히 부수면서 튕겨져 나갔다.
좌백이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랐다.
벽의 뒤쪽은 다른 방이었다.
한효월은 이미 의식을 잃어버린 듯 팔랑개비처럼 돌면서 뒹굴고 있었고 그런 그를 좌백이 덮쳐 가고 있었다.
누구도 그를 구할 수 없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은 천기선생뿐이었다.
천사만려(千思萬慮) 끝에 마련한 함정에 빠졌으니 한효월로서는 도저히 헤어날 방도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은 그때 또 일어났다.
널브러지는가 싶었던 한효월이 튕기듯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가 버린 것이다. 멈칫했던 좌백이 사납게 그 뒤를 따랐다.
와장창!
너무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천기선생마저도 멀뚱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어떻게 아직도 저놈이 저런 힘을 쓸 수가 있단 말인가?
"과연 마지막까지 한 수가 있군……."
그 광경을 보고 봉황문주 완일이 감탄한 듯 머리를 저었다.
"흥! 그래 봤자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든 격이다. 창밖이 아니라 방문을 박차고 뛰쳐나갔으니 내 수신호위들의 품에 뛰어든 것과
마찬가지. 마지막 발악일 따름이지."
그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바깥을 건너보았다.
싸움 소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놈들이 쳐들어온 것인지 알아보도록 해. 난 한효월을 처리하고 이 자리를 떠나겠다."
"그러지요."
봉황문주 완일의 신형이 찰나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천기선생도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