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首 천외전신(天外傳訊)
-소식이 날아오다.
봉황이 대막(大漠)에서 날아드니 그 이름을 대막사왕이라 하다.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긴장이라고 해도 좋았다. 아니면 말을 잃어버렸다고 해야 옳을까? 장내에서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한효월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봉황문주 완일도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억겁의 침묵이 영원이란 이름으로 찾아든 것만 같다.
"그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한효월이 입을 열어 물었다.
"알고 있소."
봉황문주 완일은 서슴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 무엇도 그에게는 장애가 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소. 자신의 수신호위들과 같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라면 충분히 자웅을 겨뤄볼 만하오. 거기에 변수 하나가 끼어든다면."
"변수라면?"
"한 공자요."
"나?"
한효월이 그를 바라보았다.
"한 공자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변수가 될 수 있소. 잘 알고 있듯이 보통의 고수들과 절세의 고수는 차원이 틀리오. 일반 고수라면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아낼 수 없다는 중과부적의 논리가 통하지만 절세의 고수라고 불리게 될 사람이라면 이미 그 범주를 벗어나서 한 사람이 만 명의 고수와도 상대할 수가 있게 될 것이오. 어차피 갓난아이가 십만 있어도 어른 하나를 상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니. 그러니 한 공자의 가세는 천군만마의 가세와 같소."
그는 힘주어 말했다.
"한 공자가 가세한다면 나는 더 이상의 준비를 갖추지 않고 바로 그를 치러 떠나겠소!"
"지금 말입니까?"
"그렇소. 지금!"
그는 힘주어 말했다.
"공격의 기본은 적이 준비하기 전에 치는 것이오. 적이 모든 준비를 갖추어놓고 있는데 덤비는 것은 바보 짓이오. 피차간에 전면전으로 가면 수많은 희생을 각오해야 하고 이겨도 정말 큰 대가를 치러야만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니…… 군사(軍師)나 장수된 자는 정말 불가피한 때가 아니라면 기병(奇兵)의 묘를 살리는 것이 최선이오."
"그가 어디 있습니까?"
"멀지 않은 곳에 있소."
"밝힐 수 없습니까?"
봉황문주 완일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바람에도 귀가 있는 법이오.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소. 한 공자가 참가하지 않는다면 알려드릴 수 없소."
잠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한효월이 물었다.
"정말 자신은 있습니까?"
"으핫핫하하……!"
그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의 앙천대소는 실로 가공할 능력이 있어서 한효월의 앞에 있는 바위가 단숨에 쩡 하고 갈라졌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주위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이것은 사방을 음파로 뒤집어 버리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의 공력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맞소. 내가 봉황문주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나를 따라나서긴 어렵지. 그만한 능력을 보여줘야만 나를 믿겠다는 말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오. 하지만 어릿광대처럼 굳이 여기 한 공자의 앞에서 춤사위를 보여주는 것도 객쩍은 일이니 한 가지만 더 말하도록 합시다."
그는 한효월을 보면서 씨익, 웃었다.
"내겐 또 하나의 신분이 있소. 봉황문주를 맡기 전까지, 아니, 그분 천기선생이 내게 굳이 그 자리를 물려주기 전부터 지금까지 내가 앞으로도 결코 버릴 수 없는 신분. 그건 바로 내가 대막의 절대자라는 것이오."
대막(大漠)의 절대자?
"설마?"
"맞소. 내가 천하십왕 중 하나인 대막사왕(大漠沙王)이오!"
너무 뜻밖의 말.
한효월은 그 말에 멍청해졌다.
봉황문주가 또 하나의 신분을 가졌고 그것이 다름 아닌 천하십왕 중 하나인 대막사왕이라니!
…….
한효월이 묵묵히 있자 봉황문주 완일은 껄껄 웃었다.
"믿어지지 않소?"
"아닙니다. 이해가 가는군요. 그래서 남해용왕 부 선생이 그처럼 심하게 무너질 수가 있었군요. 그래서……."
한효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같은 천하십왕의 계열이 아니라면 누가 있어서 그를 그처럼 참혹하게 만들 수가 있었겠는가. 누구라도 일 대 일로는 서로를 이기기 쉽지 않지만 만에 하나 균형이 무너진다면 누구도 다른 천하십왕 중 하나를 상대할 수 없다.
그것이 천하십왕의 능력이고 위치였다.
하지만 그래도 봉황문주가 다른 사람이 아닌 대막사왕이었다니, 그것은 정말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천하제패 따위 관심이 없소. 설사 제천교를 무너뜨린다고 해도 그 힘을 나를 위해 이용하거나 하는 따위의 일은 없을 것이니, 그런 부분에서 한 공자는 전혀 신경 쓸 일이 없소. 일이 끝나면 나는 다시 대막으로 돌아가서 내 할 일을 할 것이니까."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해보시오."
"천기선생 공 선생과 문주와는 어떤 사이셨습니까?"
"그게 궁금한 게로군. 별로 복잡할 게 없는 관계요. 그분은 내게 삼촌이 되는 분이오."
"삼촌?"
"그렇소. 아버지의 동생이 아니라 어머님의 동생이라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는데 어느 날 내게 연락이 왔소. 봉황문을 나에게 맡기겠노라고, 그래서 그분에게 문제가 생긴 것을 알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중원에 들어오지 않았소. 대막에서 할 일도 많았지만 사실상, 문곡이 나보다 더 일을 잘하니까."
그의 추어주는 말에도 문곡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다.
전혀 자신과 관계없는 남의 말을 듣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대강 이해가 갔다.
주인이 없는 채로 지내왔으니 봉황문이 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필요도, 그럴 상태도 아니었으리라. 더구나 그 문주가 된 사람은 대막의 절대자. 이곳까지 오지 않아도 그곳에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전대 봉황문주의 복수를 하기 위함일런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낸 표면상의 이유일런지도 모르지…….'
한효월은 내색하지 않고 생각을 굴렸다.
상대는 보통이 아니었다.
단순히 보통이 아니라는 정도가 아니라, 겉보기로는 호탕하여 작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바늘 끝만큼의 잘못도 용납하지 않을 사람임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그의 앞에 나타났다는 것은 정말 상당한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무엇이 어떻게 되든…….
그는 이번에 이곳으로 온 주목적.
제천교의 교주를 만날 수 있다는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혹시나 했던 그 목적, 제천교의 교주를 제지하여 제천교의 뿌리를 뒤흔들어 버릴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생긴 상태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한효월은 손에 들었던 술잔을 바위에다 내려놓았다.
그가 손바닥으로 술잔을 누르자 술잔은 소리도 없이 고요히 바위 속으로 파묻혀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일어섰다.
"지금 가도 되겠습니까?"
미미한 웃음이 봉황문주 완일의 얼굴에 흘러갔다.
"물론이오."
그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좌백."
"예, 사백."
"이야기를 들었겠지?"
"예."
"난 제천교주를 만나보러 간다. 가서 감 사질에게 그렇게 전해라."
"사숙을 모시고 가겠습니다."
"시간이 안 된다."
"만에 하나, 사숙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로서는 평생을 두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사부께서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서까지,
자신의 시신을 버려서까지 제지하고자 했던 자를 찾으러 가는 길입니다. 부디 저를 제지하지 말아주십시오. 문제가 생기면 제
스스로 물러서겠습니다."
"……."
잠시 좌백의 눈을 바라보던 한효월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꺾을 수 없는 고집을 읽은 탓이다.
평소 냉철한 그였기에 이런 고집을 부린다면 단순한 만용만은 아닐 것이니 제지하기 쉽지 않았다.
'좋다. 하지만 한 가지만 약속하자. 한 시진 이내에는 무리하면 안 되고 힘들면 바로 돌아가기다.'
한효월이 전음지성으로 말을 전달하자 좌백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 말을 전음으로 전달한 이유는 봉황문 쪽에다 이쪽의 허실을 보이지 않기 위함임을 그도 즉감했기 때문이다.
"의논이 끝났다면 지금 출발해도 되겠소?"
봉황문주가 물었다.
"그렇게 하지요."
한효월의 답에 문득 그의 얼굴에 급한 빛이 떠올랐다.
"그럼 갑시다. 그사이에 어디로 가버렸다면 다시는 이런 기회를 잡기 어려울런지도 모르니."
그가 앞장서 몸을 날렸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듯 아니면 능력을 숨길 의도가 없는 듯 절세의 경공을 그대로 선보여 일단 발동하자 옷자락이 세차게 펄럭이는 가운데 단숨에 숲을 뚫고 사라졌다.
"한 공자를 시험해 보시려는 모양이오."
문곡이 말했다.
따라가라는 의미다.
쓴웃음을 머금은 한효월은 할 수 없는 듯 땅을 박찼다.
그의 신형이 찰나간에 한줄기 바람과 같이 봉황문주 완일의 뒤를 따라 사라져 갔다.
그 뒤를 좌백이 따랐다.
"뜻밖이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문곡이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좌백이 한효월에 별로 뒤지지 않는 경공을 발휘하여 사라지는 것을 보고 놀랐던 까닭이다.
"천수단혼 좌백의 무공이 저처럼 높았더란 말인가?"
그는 뜻밖인 듯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세차게 내렸던 어젯밤의 비로 인해 동정호 전체는 온통 안개로 휘감겼다. 아침이 되는 듯하지만 그 짙은 안개로 인해서 언제 해가 뜨는지 알기 힘들다. 하지만 해는 떠오르고 누구라도 저 동녘이 밝아지고 있는 것이 떠오르는 해 때문임을 안다.
우윳빛 광채가 뿌옇게 동녘을 물들이고 있을 때 감천형은 초조한 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사제 좌백이 굳이 고집을 부리고 사숙의 뒤를 따라나섰기 때문이다. 전과는 달리 그렇게 강력하게 이야기를 하여 막지 못했었다.
그러나 막상 좌백이 떠나고 나니 불안하기 그지없다.
지금 그의 상태가 어떤지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성은 운기조식에 들어가 있었다. 들어가면서 한 말, 운기조식을 끝내는 대로 찾아갈 거예요.
하긴 몸이 정상이라도 도움이 되기 힘든 판에 부상을 입은 몸으로 간다면 도움은커녕,
짐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영악한 유성이니 당연한 일이다.
반면에 심소옥은 한효월이 떠나자마자 즉시 그 뒤를 따라 나갔다.
경공에 차이가 나서 뒤를 따라가지는 못하겠지만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감천형은 일단 사람들을 풀었고 들려오는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고, 멍청한 사람도 아니었다.
한효월이 워낙 뛰어나서 그렇지 그는 천하무림맹을 움직이던 실력자였다. 사람들을 조직하고 부리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고 사부인 독고해도 그것을 인정했었다.
무림맹에서부터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아직 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 중 절반은 이 동정호 쪽으로 와 있었고 그들은 동정어은의 도움을 받아 동정수채의 수적(水賊)들과 연계하여 동정호 일대를 샅샅이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그 외 지금 그가 가장 중점 두고 있는 일은 바로 무림맹에서처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세를 불리는 일이었다.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아 그의 주변으로는 계속해서 은밀히 고수가 모여들고 있었다.
그 힘은 이미 일개 문파에 버금갈 정도였다.
역시 사부 독고해의 후광이 컸고, 그의 살신성인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족했다. 뿐만 아니라 그 뒤를 이은 사실상의 주인공인 한효월의 활약 또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제천교는 단순히 무림맹을 쳐부수고 전통의 구대문파를 쳐부수어 악의 집단으로 매도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실 구대문파가 강호에 군림하고 있는 것은 매우 오래되었다.
그 힘이나 뿌리가 너무 강해서 다른 문파가 커 나가는 것에 은연중에 방해가 됨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어디에서나처럼 기득권과 신흥 세력 간에는 갈등과 마찰이 일어났다.
그런 쪽에서는 구대문파의 어려움을 속으로는 기뻐했다.
어느 놈이건 강한 놈이 이기면 된다…….
네놈들만 강하란 법 있느냐는 것이 그들의 속내다.
그런 면에서 사파라는 이름 하에 문파를 만든 자들은 은연중에 제천교를 종주(宗主)처럼 떠받들기도 했다.
그런 상태에 제동을 건 것은 바로 제천교 자신이었다.
그 가공할 능력.
그 엄청난 힘을 가지고 바로 무림을 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특정 몇 군데를 아예 재기 불능으로 짓밟았다. 뿐만 아니라 전체 무림을 상대로 독을 퍼붓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단숨에 목숨을 빼앗아 버리는 독기에서 서서히 발작하는 독까지, 제천교에서 살포한 독의 종류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서 방비하기조차 어려웠다.
하긴 수원에다가 독을 풀어버리는데 누가 당할 것인가.
독에 의해 사람이 죽고, 사람이 죽으니 장례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원활치 못하면 그로 인해서 전염병이 돌았다.
피해는 무림인들만 보는 것이 아니었다.
제천교의 등장은 놀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제천교는 공포와 의혹으로 가득했다.
천하무림에 군림하고자 하는 시도는 정말 끊임없이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시도도 무림을 말살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나 지금의 제천교는 무림 자체를 말살하고 말 것처럼 보였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무림을 말살하고 무림을 새로 만들 작정일까?
아니면 무림에 무슨 원한이 있어서 아예 무림을 없애 버리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추측은 무성해도 누구도 그 답을 알지 못했다.
지난번 화산 참사 이후 이루어진 일이다.
그로 인해 곤혹스러운 것은 감천형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동정호의 한 어촌이다. 얼마 전까지 있었던 갈대 숲 은거지에서 이곳으로 옮겨왔지만 이곳도 내일이면 옮겨갈 곳이었다.
그렇게 움직이면서 그는 제천교가 뿌리는 독을 해독하기 위해 팔방으로 사람을 놓아 명의를 찾았다. 사천당가를 찾았고 해독성수들을 찾아 움직였다.
화산에서 벗어나면서 그는 예전의 감천형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비로소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짓인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잔잔히 밝아져 오는 동정호를 바라보던 감천형은 문득 중얼거렸다.
"천하를 적으로 삼고는 아무리 힘을 가졌다 할지라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누구도 그렇게는 버틸 수 없지……."
문득 그의 눈빛이 조금 굳어졌다.
급하게 문을 향해 달려오는 발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수의 발걸음이라 뛰어온다고 일반인들과 같을 수는 없다. 하나 저런 발걸음이라면 급한 일이 있다는 의미다.
"무슨 일인가?"
한 사람이 급히 문 앞에 나타남을 보고 그가 물었다. 30대 중반의 검수인데 이 일대의 경비 책임자 역할을 하는 옛날 호맹위대의 조장이었던 반룡검(盤龍劒) 위도라는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나타나서 한 공자를 찾습니다."
"한 사숙을?"
"누군데?"
"모르겠습니다. 한 노인인데…… 빨리 한 공자를 만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가 여기를 어떻게 알고?"
"그, 그건……."
"그가 어디 있소?"
"지금 밖에…… 엇!"
말을 하던 위도는 안색이 돌변했다.
감천형은 이 어촌의 가장 끝에 있는 집에 있었다. 그 집은 역삼각형의 형태로써 좌우의 두 채는 안쪽에 있는 집을 호위하는 형세라 감천형은 그 안쪽에 있는 집에 있었다. 반룡검 위도는 당연히 앞쪽에서 달려 들어왔다.
그런데 바로 자신의 뒤에 그 노인이 서 있음을 보았으니 어찌 말이 막히지 않겠는가.
"어, 어떻게 여기에?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소? 경비대가 막았을 텐데? 그들을 어떻게 한 거요?"
반룡검 위도가 맹렬히 검을 뽑아냈다.
감천형은 그 노인을 보았다.
작달막한 키에 얼굴은 홍안(紅顔)이다.
나이가 칠순은 족히 되어 보이지만 얼굴에는 주름살도 잘 보이지 않는다. 머리는 백발이지만 실제로 머리카락은 몇 가닥 남아 있지 않고 겨우 그 몇 가닥으로 머리에 널어놓은 수준에 불과했다.
회색 옷을 입었는데 신발과 버선에 소복이 앉은 먼지로 보건대 먼 길을 달려온 것이 일견해 분명해 보였다.
게다가 그 얼굴에는 은연중에 다급한 빛이 보인다.
"난 자네와 장난할 시간이 없네. 그 아이들은 잠시 재웠으니 가서 깨우면 별 탈 없이 일어날 거야."
회의노인은 말하면서 감천형을 바라보았다.
"뉘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누구? 혹시 패도 감천형인가?"
회의노인이 물었다.
그를 향해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만나기 쉽지 않다.
"당신은 감히……."
반룡검 위도가 노해 달려들려고 했다.
"위 대장은 물러가시오."
"당주님!"
"괜찮소. 가서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주위 경계를 최대로 올리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음을 안 반룡검 위도가 물러났다.
"뉘신지 알지 못하여 감 모의 대접이 소홀했습니다. 뉘신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누군지 알기 전에는 아무것도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무언의 시위와 같은 물음이다.
노인은 머리를 흔들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노부는 용화회에서 나온 사람이오."
"용…… 화회?"
감천형의 눈이 커졌다.
그도 이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안다.
좌백이 간단히 말했고, 그 뒤에 유성이 자신이 들었던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용화회에서 나온 사람이라니.
"노인께서 용화회에서 오셨단 말입니까?"
"그렇소. 그런데 용화회를 아시오?"
"조금 압니다."
"음……."
노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한효월은 어디 있소?"
"잠시 볼일을 보러 갔습니다만."
"얼마나, 혹…… 다른 곳으로 간 것은 아니오?"
"아닙니다. 금방 이곳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거의 올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만……."
"잠시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들어오십시오."
감천형이 옆으로 비켜 길을 만들었다.
회의노인은 서슴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초조한 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정말 한효월이 곧 돌아오는 것이오? 정확히 말하시오. 아니면 그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감천형의 안색이 굳어졌다.
"더 이상 말할 수는 없소……. 노부는 용화회의 심부름으로 그를 만나러 왔소. 앞으로 반 각 이내에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것을 그에게 전해주시오."
회의노인은 봉서 하나를 꺼내 감천형에게 주었다.
봉서는 얇았다.
그것은 안에 든 것이 긴 내용이 아니라는 의미다.
"가시려는 겁니까?"
"그렇소."
"사숙께서는 곧 돌아오실 겁니다."
"노부가 이곳에 온 것은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이오. 용화회는 세상에 알려질 필요가 없는 곳이니…… 후우, 이 모든
것이 다 하늘의 뜻일지니 초조한다고 하여 달라질 것인가!"
그가 발을 굴렀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노선배!"
감천형은 다급히 그를 따랐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이미 그곳을 떠난 다음이었다.
"삶과 죽음이 모두 인연에 따르니 어찌 억지로 그것을 좌우할 수 있을 것인가……."
알 수 없는 화두(話頭)와 같은 음성만이 노인의 흔적을 말한다.
"대체 이게……."
감천형은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봉서를 본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봉서.
그것만 없다면 한바탕 꿈이라도 꾼 듯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