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首 봉황문주(鳳凰門主)
-신비인 나타나다.
난세에는 늘 영웅(英雄)이 나타나니 언제라고 예외일 것인가.
한효월 등이 배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천추성주와 북벌후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늘 제천교에서 참가한 고수의 숫자는 일이백이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전적으로 한효월을 잡기 위해서 투입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효월은 믿기지 않게도 미꾸라지처럼 그들의 그물을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다.
"무슨 이따위 일이……."
천추성주는 이를 갈며 발을 굴렀다.
한효월이 펼쳐 놓은 진세를 살피다 돌아온 북벌후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지 못했다.
이미 실각한 적이 있는 그는 그저 천추성주의 명대로 따르는 신세에 불과했던 것이다.
"놈이 뒤로 빠져나가는 걸 왜 막지 못한 것이오?"
"이미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람들을 파견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한효월과 좌백의 무공이 너무 강해서 막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성주가 나에게 말하길, 한효월은 중상을 입어 힘을 쓸 수 없다고 하셨는데…… 상황이 전혀 달랐소이다. 그를 잡으려면 더
강력한 고수가 필요했고 독왕께서 그를 잡을 때까지 계셨어야 했소."
"지금 나를 질책하는 것이오?"
천추성주의 눈빛이 싸늘히 굳어졌다.
"전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뒤에 나타난 노승과 좌백의 무공은 우리의 상상 이상이었소이다. 특히 독고해의 세 제자 중
진공 실력은 가장 떨어진다고 알려진 좌백의 무공이 왜 그렇게 급증했는지는 전력을 다해 조사해야만 할 일입니다."
"도대체 이 일은……!"
천추성주가 다시 발을 굴렀다.
그는 강호에 나오면서 마음만 먹으면 천하를 휩쓸 수 있다고 자부했었다. 제천교의 힘을 생각할 때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효월을 만나면서 모든 것이 조금씩 틀어졌다. 놈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계획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놈을…….
작정을 했음에도 또 실패를 했다.
놈은 저렇듯 유유히 자신의 눈앞에서 아침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놈…… 그렇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천추성주는 북벌후를 바라보았다.
"신호를 보내시오."
"알겠습니다!"
북벌후가 고개를 숙였다.
깍듯하기는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태도.
어쨌든 상관은 없다.
'왜 교주께서는 직접 오시지 않은 건가!'
원래는 교주가 직접 와서 모든 것을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오지 않았다.
대신 실패하면 신호를 보내라는 전언(傳言)만 보내왔을 뿐이다.
설마 실패할 것을 이미 예측이라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 직접 오지 않은 것일까.
와와-!
싸움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적의 기세는 심상치 않을 정도로 강력한 듯했다. 이처럼 밀리는 것을 보면…….
'개방 따위가 이런 힘을 가졌단 말인가?'
믿기지 않는 듯 천추성주는 시선을 돌렸다.
* * *
아침 안개가 가득한 동정호.
그 동정호를 가르며 배 한 척이 조용히 전진하고 있었다.
작지 않은 그 배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타고 있다. 한효월과 감천형과 좌백 등 십여 명이 거기에 타고 있는 것이다.
빠르게 호심으로 미끄러져 나온 배는 이제 방향을 잡고 물살을 헤치면서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들이 떠나온 곳을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는 한효월.
아침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펄럭인다.
뒤에서는 좌백이 감천형에게 낮은 음성으로 지난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말이 진행됨에 따라 감천형의 얼굴에는 놀란 빛이 역력히 떠오른다. 이따금 전음으로 말을 전달하기도 하여 말소리는 낮고 드문드문하다.
문득 한효월이 뒤를 돌아보았다.
"행적을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나는 여기서 헤어져야겠다."
"어, 어디로? 저는요?"
유성이 대뜸 고개를 디민다.
"가서 같이 있도록 해라. 물건을 찾아서 나도 바로 돌아갈 테니."
"좀 전에 노승이 말하셨던 그곳으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좌백이 물었다.
"음. 상황이 급전하고 있으니 자칫 무슨 변화가 있을지 몰라. 일단 그것을 손에 넣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별다른 일은 없을 테니 모두 돌아가 있도록 하지. 특히 좌백은 지금부터 섭생을 잘해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 다녀오는 거라면 소질도 같이 가겠습니다."
"같이?"
"예. 지금이라면 사숙께 짐이 되지 않을 겁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사숙 혼자라면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 제가 곁에 있다면 모든 일을 쉽게 풀어갈 수도 있겠지요."
"그럴 필요는 없다."
"사숙!"
"감 사질."
"예, 사숙."
"좌 사질을 잘 붙잡아두도록 해. 지금은 감상으로 움직일 때가 아니다. 제천교주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이 확실해. 천하십왕 중 다섯이 이곳에 있고 어쩌면 더 많은 수가 와 있을지도 몰라. 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큰일이 진행되고 있어. 개방과 연락을 하면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내야만 해."
"뭔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음을 저도 감지하고 사람을 풀었습니다. 동정어은께서 수로(水路)의 사람들과 같이 움직여 정세를 탐문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께서 같이 오셨겠지요. 해서 그분의 조카뻘인 수교(水蛟) 정 형이 지금 배를 몰고 있습니다."
선미에서 묵묵히 배를 몰고 있던 대한이 비로소 한효월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한 대협을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수교 정일로(丁一路)입니다."
탄탄한 체구에 얼굴이 햇볕에 탄 모습은 전형적인 뱃사람이다.
"폐를 끼쳤습니다."
"무슨 말씀을, 언제라도 필요하시면 말씀만 하십시오. 한 대협께서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동정호 내에서는 어디든 배를 몰겠습니다!"
그가 당황한 빛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정 형께선 이곳의 지리를 잘 아시겠군요?"
"샅샅이라고 장담은 하기 힘듭니다만 웬만한 곳이라면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말은 겸손하지만 표정에서는 어디든 모르는 곳이 없다! 라는 자신감이 역력히 묻어 나오고 있었다.
"혹시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천운사라는 절을 아십니까?"
"천운…… 아, 압니다!"
그는 안개 속으로 가물거리는 호변을 보면서 말했다.
"저쪽으로 가서 갈대 숲을 지나 십여 리가량 뭍으로 올라가면 있습니다. 큰 절은 아니고 작은 절입니다. 향화객은 그리 많지 않고 절에 있는 중들도 다 해서 네다섯 명 정도일 겁니다."
"그렇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한효월이 포권을 하자 그는 당황하여 노를 놓고 급히 마주 포권을 하였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노가 호수에 빠질 뻔해서 심소옥이 참지 못하고 킥! 웃음을 터뜨렸다.
한효월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넌 개방으로 돌아가서 상황을 알려드리도록 해라. 지금 저들과의 충돌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아보고, 알겠지?"
"난……."
"또 따라올 생각은 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
한효월은 미소 띤 얼굴로 말했지만 심소옥도 할 말이 있었다. 그러나 그걸 그냥 두고 볼 유성이 아니었다.
"너 때문에 하마터면 우리 모두가 죽을 뻔했어! 알아? 너만 아니었으면 우린 들키지 않고 놈들을 감시하면서 편하게 있을 수도
있었단 말이야. 만에 하나, 너를 구하려고 공자께서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넌 죽어서도 죄를 씻지 못할 거야!"
유성의 비꼬는 말에 심소옥이 입을 삐죽였다.
그러나 다른 건 다 코웃음 치면서 받아주겠는데 자신으로 인해서 한효월이 잘못된다면 그건 곤란했다.
한 가닥 바람이 일었다.
"한 대가!"
심소옥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 찰나간에 한효월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안개가 희미하게 일렁이는 가운데 아직 동정호변임에도 불구하고 한효월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등평도수의 절정경공으로 물을 밟으면서 갈대밭으로 날아갔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좌백은 바라보고 있었다.
* * *
배를 떠난 한효월은 갈대밭을 밟고서 바람처럼 달렸다.
과연 십여 리를 지나지 않아 작은 야산이 있고 거기에 절 하나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천운사(天雲寺).
아직 아침 해는 찾아오지 않았다.
희미한 안개 속에 자리한 편액은 낡았지만 그가 제대로 찾아왔음을 말해 주고도 남았다.
문을 두드려 내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할 필요는 없었다.
무명노승은 천운사에 잠시 묵었지만 거기에다 물건을 맡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효월은 소리도 없이 천운사의 담을 넘었고 기척도 없이 천운사의 후전으로 갔다. 어차피 그가 온 곳이 천운사의 뒤쪽이었기 때문에 그가 움직여야 할 거리는 그리 먼 것이 아니었다.
절에 있는 승려들은 대개 축시에서 인시 사이에 일어나 조과(朝課)에 들어간다. 축시라면 그야말로 한밤중이고 인시라고 하면 승려들이 거의 일어날 시간이다. 굳이 그들을 경동시킬 이유가 없으니 그가 다녀간 흔적을 남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막 대웅전 뒤로 해서 대웅전으로 들어가려던 한효월은 흠칫 뒤로 물러섰다.
"아아……."
한 사람.
육순은 되어 보이는 승려가 길게 기지개를 켜면서 대웅전으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모니불에게 정성껏 합장을 하고는 그 앞에 꿇어앉아 촛불을 켠다. 그리고는 목탁을 찾는 모습이 대불정수능엄신주(大佛頂首楞嚴神呪)나 대비주(大悲呪)를 외우기 시작할 태세다. 막 목탁을 치켜들던 그 승려는 문득 그대로 굳어졌다.
눈은 졸려서 감겨드는 모습으로.
한효월은 그의 마혈과 수혈을 가볍게 짚어두고는 소리도 없이 대들보 위로 올랐다.
대들보 위로 오른 그는 주변을 살폈다.
과연 거기에 있었다.
기름종이로 싼 문건(文件) 하나가 대들보에 난 틈에 끼어져 있었던 것이다.
무명노승은 자신이 얻었던 것을 거기에 숨겨두었고, 한효월에게만 그 정확한 장소를 전음지성으로 알려주었었다.
문건을 꺼내 간직한 한효월은 지력을 날려 승려의 혈도를 풀어주고는 대웅전을 벗어났다.
혈도가 풀린 승려는 깜박 존 듯한 느낌에 괴이하였지만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이내 아무 일도 없는 듯 조과를 시작했다.
똑똑! 또르르르…….
목탁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그 독경 소리를 뒤로하고 한효월은 천운사를 벗어났다.
동정호 일대는 이미 용담호혈로 화한 지 오래였다. 무림과 관계없는 곳에 오래 머물다가 자칫 적의 눈에 띠게 되면 애꿎은 사람에게 피해가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한 장소에 오래 머물지 않으려고 했다.
천운사를 벗어난 그는 그 야산의 위쪽으로 올라갔다.
시야가 트인 곳에서 주위를 살피면서 마침내 얻어낸 문건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의 짐작이 맞다면, 이것이 신안금조 조건이 남긴 것이 분명하다면 이 문건에는 당세무림의 큰 비밀이 담겨 있을 것이 분명하였다.
그런데 야산의 정상에 오르던 한효월은 문득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묘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누구요?"
그가 걸음을 멈춘 채 조용히 물었다.
…….
답이 없다.
갑자기 묘한 기운이 감돈다.
한효월은 한곳을 바라보았다.
아침의 기운이 야산을 감돌고 숲에 스며들고 있지만 고송이 잔뜩 밀집된 그곳에서 보이는 것은 어둠뿐.
그리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복부를 움켜잡은 손가락 사이로는 피가 흘러 굳었다.
일그러진 얼굴. 그처럼 당당했던 모습에서는 피폐한 모습이 역력하지만 아직도 그의 전신에서는 강력한 패기가 흘러넘친다.
'남해용왕…….'
그를 본 한효월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봉신지약을 찾으러 왔느냐?"
남해용왕이 그를 쏘아보면서 사나운 기색으로 으르렁거렸다.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같군요."
"맞다! 다른 자에게 넘어갔지……."
"당신의 능력으로 자신이 가진 물건을 남에게 빼앗기다니, 뜻밖이로군요."
"본왕이 독왕에게 중독되지 않았더라면 어찌 하잘것없는 잡배들이 본왕의 수중에서 물건을 빼앗아갈 수 있었을까! 흥! 비록 중독되었다고 할지라도 천하십왕 중 둘이 합공을 하지 않았다면……."
남해용왕이 두 눈을 부릅뜨고서 이를 갈았다.
오만한 기색은 그 상태에서도 여전했다.
"당신이 입은 중독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듯하군요.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고 쓸데없이 기혈을 충동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런지도 모릅니다. 그만 돌아가서 조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네놈이 감히, 감히 본왕을 훈계하려는 것이냐?"
그가 눈을 부릅떴다.
발동하지 않음에도 주변 기운이 격탕 치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떨어진 나뭇잎들이 휙휙 날아올랐다.
"나 같으면 쓸데없는 위세를 보이기보다는 스스로를 돌보겠군요. 혹시,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습니까?"
한효월의 말에 남해용왕은 안색이 굳어졌다.
그의 눈초리가 주위를 살피는 것을 본 한효월은 침착히 말했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면 당신은 실패한 것 같군요."
"무슨 소리냐? 그럼 놈들이 이미……."
그는 불안한 기색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하…… 상갓집 개처럼 도주하더니 여기서 허장성세라? 어디 또 어디로 갈 것인지 말해 보시오."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반대쪽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와룡선(臥龍扇)을 휘적휘적 부치며 나타난 사람에게서는 남해용왕과는 달리 여유가 보였다.
"네놈이 감히 여기까지……."
"이빨 빠진 상어는 지나가던 개도 무서워하지 않는 법이오. 하물며 그 상어가 이미 뭍으로 올라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면 누가 두려워하리오?"
나타난 사람이 하하 웃었다.
동파건에 학창의, 너무도 익숙한 모습의 사람. 그는 바로 봉황문의 문곡이었다.
'저 사람이 어떻게?'
그의 출현에 한효월은 조금 안색이 달라졌다.
문곡의 비웃음에 남해용왕은 대노하여 발로 땅을 굴렀다. 그의 신분으로 어찌 이와 같은 비웃음을 생각이라도 해본 적이 있으랴.
"노옴! 감히……."
순간, 그의 신형은 바람을 가르며 문곡을 덮쳤다.
파파팡!
문곡의 좌우에서 십여 명의 그림자가 날아들어 남해용왕을 가로막았다.
"크핫하하하…… 감히 반딧불이 태양과 밝음을 비교하려 들다니!"
남해용왕은 크게 웃으면서 양손을 빗겨 쳐냈다.
광풍과도 같은 장세가 일었다.
폭음과 더불어 잇달아 신음이 일면서 늘 문곡의 주변을 맴도는 무영도객들이 튕겨져 나갔다. 그처럼 날카로운 그들의 도세도 압도적인 남해용왕의 기세 앞에서는 파도에 쓸린 모래성과 같았다.
과연 천하십왕은 불가일세였다. 그처럼 심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여전히 그가 보여주는 위력은 절세했다. 그런 가공할 남해용왕의 기세 앞에서 문곡의 처지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태연자약했다.
그때 굉렬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와하하하하…… 꼬리를 말고 도주하더니, 여기에서 힘 자랑을 하고 있단 말인가?"
쾅!
강렬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가공할 경기가 폭풍처럼 일어나 십여 장 일대를 마구 소용돌이쳤다. 아름드리 나무가 휘청거리고 작은 나뭇가지는 뚝뚝 꺾여서 날아갔다. 바위가 움찔거리다 굴러갔다.
엄청난 격돌이었다.
"크으으으……."
남해용왕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주춤거리면서 밀려났다.
그 광경을 한효월은 묵묵히 보고 있었다.
그는 휘몰아치는 경기에 옷자락을 펄럭이며 조용히 서 있다. 그는 별빛 같은 눈동자로 돌변하는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맞은편.
봉황문 문곡의 앞에는 한 사람이 나타나 있다.
당당한 체구에 고리눈. 장비의 환생을 보는 것 같은 30대 후반, 혹은 40대 초반의 사나이. 생김은 장비의 환생처럼 보이지만 눈빛은 날카롭기 이를 데 없어서 묘한 기풍을 가졌다.
황포(黃袍)를 두른 그는 다른 사람보다 커 보이는 두 손을 줘락펴락하면서 웃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남해용왕을 힘으로 격퇴시키면서 나타난 것이다.
"……."
한효월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기도의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들은 기억은 아무래도 나지 않는다. 이런 정도의 사람에 대해서 아무런 소문도 나지 않았다면 무엇인가 이상한 일이다.
"좋군, 좋아! 세상이 한효월이 천하의 기남자라고 하더니 과연 헛소문이 아닌 것 같군……."
황포중년인은 그런 한효월을 바라보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껄껄 웃었다.
"네놈은……."
밀려난 남해용왕이 믿기지 않는 듯 상대를 쏘아보았다. 그 눈에는 경악과 당혹의 빛이 역력했다.
"그처럼 헐레벌떡 쫓기면서도 아직 나를 모르다니, 역시 물을 떠난 고기는 신선도를 잃어버리는 모양이군! 당신은 남해의 파도 속에서나 호가호위(狐假虎威)하였어야 했을 위인인데, 왜 욕되게 대륙으로 나왔단 말이오? 애석하군, 애석해……."
"그럼 본왕을 암습한 놈이 바로 네놈이란 말이냐?"
"암습?"
황포중년인은 코웃음을 쳤다.
"당신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를 내가 말인가? 난 이미 당신에게 흥미를 잃었다. 당신보다는 훨씬 더 흥미로운 상대가 나타났으니 말이지……. 문곡."
그의 부름에 문곡이 깍듯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예."
"남해용왕에게 기회를 줘라. 그래도 대접은 해야지."
"알겠습니다."
다시 고개를 숙여 보인 문곡은 남해용왕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공연히 본 문에 시비를 걸고, 제자들을 상해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당신과 싸우지 않았을 것이오. 본 문은 오늘부로 제천교와 상대하기로 작정을 한 상태이니 이 정도에서 싸움을 접는 것이 어떻겠소? 어차피 제천교는 공동의 적일 텐데?"
"……."
그 말에 남해용왕은 눈매를 조금 가늘게 했다.
과연 무슨 생각인지 가늠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본인은 완일(阮日)이라 하오."
황포중년인은 이미 남해용왕에게 신경을 끊은 듯 그들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성큼성큼 한효월에게로 다가오면서 말을 걸었다.
완일?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사람이 무명일 리는 없다.
"들어보지 못한 것이 당연할 것이오. 나는 강호초출이니까! 핫하하하……!"
그가 다시금 크게 웃었다.
거리끼는 것이 없다. 눈앞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듯 방약무인한 모습이다. 얼핏 생각하면 꼴 보기 싫은 모습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호탕하고 사내답기 그지없었다.
"나는 강호에 나오면서 줄곧 한효월이란 이름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소. 그래서 생각했었지…… 만에 하나 만나보고 헛된 소문이라면 말똥에다 거꾸로 박아버릴 거라고 말이야. 핫하하하…… 그런데 척 보니 알겠소! 한효월에 대한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말이오."
상대가 이렇게 나오는데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기도 난감하다.
한효월은 미미하게 웃음 지은 채로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리고 입을 연 말.
"나와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음?"
그 말은 실제로는 거두절미한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다.
한효월이 그렇듯 물어올 줄은 몰랐던 듯 완일이란 황포중년인은 눈을 크게 뜨고서 한효월을 바라보다가 박장대소했다.
"크핫하하하…… 좋아! 이래야 이야기할 맛이 나지. 맞소, 맞아……. 나는 한 공자와 할 이야기가 있소. 여우들과는 할 이야기가 없으니 장소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소?"
그 말에 엉거주춤한 남해용왕은 썩은 감을 씹은 표정이 되었다.
살려줄 테니 가라고 한다고 그냥 가자니 모양이 말이 아니고, 그렇다고 남아 있자니 무슨 영화를 볼 것인가. 졸지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이런 대우를 받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귓구멍에서 연기가 날 상태가 되어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보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얼마든지."
"그간 봉황문에는 문주가 없었습니다. 아니, 있는데 나타나지 않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지 의심도 들었었습니다만……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완일이란 황포중년인은 묘한 표정으로 눈을 꿈벅이면서 한효월을 쳐다보았다.
그리곤 그는 피식, 웃었다.
"정말 멋진 물음이군. 난 말주변이 별로 좋지 않아 그렇게 고차원적으로 답변을 할 수 없으니 단순히 답을 하겠소. 맞소! 내가 바로 당대의 봉황문주요!"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누구라도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효월은 부지중에 다시 한 번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쥐새끼가 있군!"
완일. 스스로를 봉황문주라 밝힌 그는 나오지 못할까! 호통을 치면서 큰 바위를 향해 일장을 날렸다.
쾅!
폭음과 함께 사람이 팔을 벌려서 안아야 할 큰 바위가 단 일 장에 산산조각 박살이 나서 흩어졌다.
한 사람이 거기에서 튀어나왔다.
"흥! 나의 용권풍(龍捲風)을 피하다니, 한 수가 있긴 하군! 어디 또 피할 수 있는가 볼까?"
봉황문주 완일은 재차 일장을 쳐내려 했다.
바로 그때, 그 앞을 한효월이 가로막았다.
"내 사질입니다."
"사질?"
봉황문주 완일이 손을 멈추었다.
나타난 사람, 그는 뜻밖에도 좌백이었다.
그가 봉황문주 완일의 공격을 피해 몸을 날려 한효월의 곁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왜 여기에 있는 게냐?"
자신에게 포권하는 좌백을 보고 한효월이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숙을 혼자 계시게 할 수가 없어서 따라왔습니다."
"넌……."
한효월은 난감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 앞에서 좌백의 처한 상황을 말할 수도 없고, 그를 꾸짖을 수도 없었다. 말 그대로 난감할 따름.
"한 공자의 사질이라면 그렇군. 천수단혼 좌백, 좌 대협이겠군! 반갑소, 나는 완일이라고 하오!"
봉황문주 완일이 성큼성큼 걸어가 좌백에게 공수해 보였다.
그의 이런 태도는 가히 파격이라 좌백은 얼떨떨한 빛으로 같이 공수하여 예를 갖추었다.
"하하…… 내 평생에 가장 사나이답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중원무왕 독고해, 독고 대협이었소. 그분을 살아 생전에 만나보지 못한 것이 평생의 유감인데, 그 제자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다시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그는 한효월을 돌아보았다.
"같이 가도록 합시다."
한효월은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문주와 잠시 이야기하고 갈 테니 먼저 가도록 하거라."
"옆에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좌백의 태도는 의외로 완강하다.
"좋다. 같이 가자."
한효월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좌백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되어 어쩔 수 없이 승낙을 하고 만 것이다.
* * *
금세 자리가 마련되고 술이 나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런 자리를 준비했던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커다란 바위 위에다 자리를 마련하고 보니 그들이 자리한 곳은 천하의 명당이라 할 만했다.
천천히 아침 해가 떠오르고 싱그러운 아침 공기가 가슴을 맑게 한다. 이슬이 나뭇잎에서 구르고 새소리가 여기저기에서 귀를 간질이며 들려오니 머리가 맑게 개이는 것 같았다. 더구나 눈을 들면 저 멀리 동정호가 보이고 뒤로는 숲이니 경치 또한 일품이었다.
"좋군!"
주위를 둘러본 봉황문주 완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한효월, 그리고 좌백과 문곡. 이렇게 네 사람이 거기 있었다. 문곡은 아랫사람임을 자처하여 앉지 않으니 좌백도 앉기 거북했다. 해서 엉거주춤.
"대막(大漠)은 황량하지. 일 년 내내 물을 구경하기 힘들고 본다 할지라도 끝없는 모래바람 가운데 잠시 나타나는 물 웅덩이뿐이니, 누가 저 바다와 같은 호수를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하하…… 하긴 천산(天山)에 가면 또 다르지. 거대한 빙하(氷河)가 밀려가는 모습은 여기와는 또 다른 장관이니까!"
그는 손에 들었던 술잔을 한 번에 훌쩍 마시고는 한효월에게 내밀었다.
"한잔하시오."
"그럼."
한효월은 사양하지 않고 잔을 받았다.
묘한 매력이 있는 사나이였다.
그것은 좌백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는 묘한 눈길로 봉황문주 완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태도는 방약무인한 듯하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을 가졌다. 바로 그의 사부인 건곤무적 독고해. 그를 보는 듯하기에 좌백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졸졸…….
술이 술병에서 내려온다.
무림의 고수에게는 거의 불문율이 있다.
서로 술잔을 나눌 때는 힘 겨루기가 있다는. 그래서 밀고 밀리기도 하고 술잔은 깨지고 술만 남아서 공중에 떠 있기도 한다.
그런데 아니었다.
봉황문주 완일은 그냥 술을 따랐을 뿐이다.
그리고 한효월도 그냥 술을 받았을 뿐이다.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듯한 두 사람이었다.
한줄기 산들바람이 두 사람의 옷자락을 날린다. 저 멀리서 아침 해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한 공자를 초청한 것은 한 가지를 알려주기 위해서였소."
한효월이 술잔을 받음을 보고 봉황문주 완일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지요."
"나는 오랫동안 대막에서 생활해 왔소. 해서 여러 번의 요청이 있었지만 굳이 중원으로 들어오지 않았었소. 그래야 할 만한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본신의 무공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소. 내가 이번에 중원으로 들어온 것은 본 문의 전대 문주의 사인에 대한 조사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오."
"전대 문주의 사인이라면?"
봉황문주 완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에게 봉황문을 물려주신 전대 문주 천기선생 공일도. 그분의 사인을 밝혀낸 것이오."
"그렇습니까?"
"그렇소. 당대 무림에서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가 하는 예측은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니었지만 실제로 과연 그런가를 밝혀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소. 더구나 왜 그런 일을 했는지도 알아내야 했기 때문에 그것이 명확해질 때까지 우리의 입장 표명은 유보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었소."
봉황문주 완일은 문곡에게 눈짓을 했다.
"그간의 사정은 한 공자도 잘 알고 계실 테니 굳이 길게 말을 할 필요는 없을 듯하군요. 예측대로 전대 문주이신 천기선생을 모살한 자들은 바로 제천교였소."
문곡이 입을 열었지만 한효월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습니까?"
한효월의 밋밋한 대답에 봉황문주 완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전혀 놀라지 않는군. 하긴 뭐, 놀랄 일도 아니지……."
"그들이 전대 문주를 모해한 것은 호랑이는 산에 있어도 호랑이며, 만에 하나 호랑이가 산을 벗어나면 통제가 어려워지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으로 조사되었소. 결국 독고 맹주가 사라지고 나면 그 뒤는 자연히 천기선생이 맡게 될 것으로 판단되어 화근을 미리 잘라내는 차원에서 시행되었고 제천교의 천마각에서 책임을 지고 일을 시행했었던 것이 확인되었소."
문곡의 말에 한효월은 봉황문주 완일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봉황문은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독고 맹주의 부인이셨던 봉 공봉(鳳供奉)께서 본 문에 요청을 하신 바도 있지만, 아! 독고 부인께서는 임시로 본 문의 공봉으로 계시오. 어차피 저들이 본 문을 건드린 이상, 본 문도 그냥 있을 수는 없소. 더구나 내가 중원으로 들어온 이상 저들의 발호를 더 이상은 묵과하기 어렵기도 하고…… 해서 본 문은 전력을 다해 저들과 맞설 생각이오."
"다행입니다."
한효월이 말했다.
누가 보아도 진심이라는 표정, 자칫 잘못 말을 하면 묘한 느낌이 들 수 있는 상태였지만 그의 얼굴을 보고 그렇게 말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렇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기실 나는 잘 움직이지 않소."
봉황문주 완일이 입을 열었다.
그의 눈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일단 움직이면 절대로 다른 사람이 반격할 여지를 주지 않소. 완벽하다는 자신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오."
"지금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단순히 조사가 끝나서가 아니라, 제천교를 부술 수 있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까?"
"그렇소."
봉황문주 완일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말은 아주 간단하다.
하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당금 천하를 주름잡는 제천교.
대체 그 힘이 어디까지인지조차 가늠하기도 힘든 제천교. 그 제천교를 부술 수 있는 자신이 있다고 지금, 한효월의 앞에서 봉황문주 완일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믿기지 않소?"
봉황문주 완일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한효월이 말꼬리를 흐렸다.
봉황문주 완일은 손에 든 잔을 바라보았다.
급히 마련해서 보통의 탁주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술은 푸른빛이 맑게 가라앉아 술이 있는 듯 없는 듯하여 보기 드문 명주임에 분명하였다.
그가 잔을 바라보자 술은 금방 아지랑이로 아른거리는 듯하더니 술잔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술이 아니었다.
본신의 극고한 내가진력으로 술을 단숨에 기화시켜 버린 것이다.
그렇게 올라간 술이 변한 아지랑이는 아른거리면서 그의 눈앞에서 서서히 뭉치는 듯하더니 허공에서 다시 술이 되어 나타났다. 액체가 되었지만, 담는 그릇이 없지만 술은 쏟아지지 않았고 둥근 공처럼 뭉쳐서 빙글빙글 돌았다.
남의 일을 보듯이 봉황문주 완일은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잘 담근 술도 불순물은 섞여 있지. 그러나 진정한 명주는 그 불순물로 인해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기도 하오. 술을 이렇게 해서 마시면 모든 불순물이 사라져 버리지만 그 술 고유의 맛은 사라져 버리고 말게 되오. 그저 향기롭고 맑은 술 한 잔이 되어버리지. 그래도 가끔은 마실 만하긴 하지만……."
말과 함께 그는 입을 벌렸다.
허공에 뜬 채 빙글빙글 돌고 있던 술이 분수처럼 그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적을 잡으려면 장수를 잡아야 싸움은 끝이 나는 법. 어떻소? 나와 함께 제천교의 교주를 잡으러 가보지 않겠소?"
그의 말에 한효월은 놀란 빛으로 그를 보았다.
좌백의 눈에서도 일순 긴장의 빛이 일었다.
"언제 말입니까?"
"지금!"
그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