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首 용화지회(龍華之會)
-전설은 아득하다.
신(神)이 되고자 하던 초인들의 이야기는 전설로 묻히다.
진세 밖에 있는 적의 수효는 얼마나 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일이십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방에 적이 깔려 있을 것이었다. 그런 적을 뚫고 나가려면 상당한 희생을 각오해야 할 터였다. 한효월과 같은 고수 혼자라면 몰라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가려면…….
하지만 종적이 드러난 이상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한효월의 원래 계획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암중에 진세에 은신한 채로 그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면서 과연 그들이 무엇을 획책하는지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난데없는 심소옥의 출현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녀가 어떻게 되든 못 본 체하면 되는 일이기는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기에.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에 적진에 혼란이 일었다.
비명이 들려오고 싸움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먼 곳에서도 가까운 곳에서도 고함 소리와 싸우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는 것으로 보아 매복이 강적을 만난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 매복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엇! 그분이네!"
유성이 그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날듯이 달려오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무명노승이었다.
그는 한효월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에게서는 초조함이 느껴졌다. 이미 부상을 당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달려오고 있는 쪽은 한효월이 있는 방향이니 저항이 클 수밖에 없어 싸움은 격렬했다.
"아는 분입니까?"
한효월의 기색을 본 좌백이 물었다.
"가서 저분을 모셔오게. 힘을 적절히 조절함을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좌백이 대답과 함께 땅을 박찼다.
쉬익!
그의 신형이 삽시간에 십여 장을 날았다.
좌백은 원래 경공에 심혈을 기울였었다. 암기는 눈과 경공, 이 두 가지가 뛰어나지 못하면 효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가 경공을 중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가 최선을 다해 몸을 날린다면 6, 7장이 고작이다. 사실은 고작이 아니라 강호상에서 손꼽히는 절정의 경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한순간에 십 장을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설마 했다가 그런 상태가 되자 좌백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착지 지점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무작정 돌진한 꼴이 되자 적의 도검이 무섭게 번뜩이면서 그를 휩쓸어왔다.
잘못하면 힘도 못 써보고 횡액을 당할 판이다.
좌백은 황급히 신형을 옆으로 차돌리면서 손을 비스듬히 뻗었다.
소맷자락이 펄럭이면서 가공할 내가진력이 쏟아졌다.
펑!
"크윽!"
답답한 신음.
그에게 공격을 하던 자들 둘이 허우적거리듯 뒤로 물러나다가 기우뚱 쓰러졌다. 칠공에서 피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공격을 받은 자들이 즉사를 면치 못한 것이다.
땅 위에 내려선 좌백의 손에는 어느새 그를 공격하던 자의 장검이 옮겨와 있었고 그는 그 장검으로 적을 시살(弑殺)하면서
질풍처럼 진격하기 시작했다.
"여깁니다!"
그가 소리치자 무명노승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좌백이 진격하는 앞에 있던 흑의인들이 마치 추수(秋收) 낫질에 쓰러지는 볏단과 같이 줄줄이 무너져 내렸다.
"저럴 수가?"
천추성주가 그 광경을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저놈은 천수단혼 좌백인 듯한데, 대체 언제 저렇게 강해졌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 어떻게……?"
북벌후가 신음을 하더니 손짓을 했다.
그의 손짓에 따라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연달아 일어났다.
그 호각 소리에 반응하여 흑의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부는 물러나고 일부는 그쪽으로 움직여 진세가 변형을 꾀하는 것이다.
"저쪽으로 가십시오!"
무명노승의 전신이 피투성이인 것을 본 좌백이 소리쳤다.
흑의인들이 파도처럼 덮쳐 왔다.
펑! 퍼펑!
좌백이 손 안의 검을 휩쓸어내자 굉음이 터져 나왔다.
바위라도 두 동강이 나면서 피보라가 일어야 할 텐데 흑의인들은 주춤하더니 그대로 다시 좌백을 덮쳐 왔다.
"그놈들이구나!"
좌백의 눈에 은은한 공포가 떠올랐다.
화산에서 만났던 그 무서운 놈들!
그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검을 휘둘러도 암기를 박아 넣어도 끄떡없던 괴물들…… 바로 강령루의 괴인들인 것이다.
'눈을 노려!'
전음이 들려왔다.
일시 주춤 물러났던 좌백은 빙글 몸을 돌려 그들의 공세에서 벗어나면서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리는 자들에게 연달아 삼검을 퍼부었다.
쾅쾅!
폭음과 함께 그들의 손에 들렸던 도와 검이 부서져 나갔다. 그들의 신형이 충격으로 주춤거렸다.
동시에 좌백은 손을 쳐냈다.
쐐애앵!
"크악!"
"크아악!"
괴인들이 얼굴을 감싸 쥐고 나가떨어졌다.
좌백이 쏘아낸 암기가 그들의 눈을 꿰뚫고 아예 뒤통수로 튀어 나가 버렸으니 어찌 견뎌낼 것인가.
'저, 정말 대단하군…….'
좌백이 신음을 흘렸다.
자신이 한 일을 자신이 믿을 수 없었다.
그만큼 그가 보인 위력은 초인적이었다. 보고 감탄했던 한효월이 보였던 그 신위(神威)!
이제 강시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가장 존경했던 사부가 보였던 그 신위를 그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비해서 손색이 있었지만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 일이 자신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무리하지 말고 어서 돌아와!'
한효월의 전음지성이 다시 들려왔다.
보니 무명노승은 이미 한효월이 있는 진세에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그제서야 힘의 배분을 신경 쓰라는 한효월의 당부가 생각난 좌백은 노승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단독으로 그를 막을 사람은 장내에 아무도 없었다.
"상처가 심하군요……."
한효월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진세 안으로 들어온 무명노승의 상세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한쪽 팔은 팔뚝에서부터 잘려 있었고 대강 지혈을 했던 것 같은데 다시 터져 피가 멈추질 않았다. 그 외에도 몇 군데 깊은 상처를 입어 그런 몸으로 이처럼 적진을 돌파하여 이곳까지 올 수 있었음은 그의 본신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삶과 죽음이 하나인데 이런 상처야 무슨 의미가 있겠소? 죽기 전에 소시주를 보게 되었으니 짐을 하나 덜 수 있겠구료……."
무명노승은 자애한 웃음을 머금었다.
"대체 누가 이런……."
"노납이 스스로 팔을 잘랐소."
"스스로?"
"맞소. 독왕의 무형지독에 당해 독기를 팔에 몰아넣고는 노납이 그 팔을 잘랐소이다. 그 정도로 다행이지……."
"독왕이 그곳에 갔었습니까?"
"독왕뿐 아니라 고려검왕과 요동권왕 등 천하십왕 중 다섯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었소. 그들 모두는 봉신지약을 노리고 싸웠으니 근년에 이르러 아마도 가장 격렬했던 천하무림의 최고 성회(盛會)라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오."
"결과가 쉽게 나지 않았을 텐데 그곳을 떠나온 걸 보면 뜻밖의 사태라도 일어난 것인지……?"
"독왕이 암중에서 독을 푸는 바람에 모두가 중독을 면치 못했소이다. 노납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 그와 충돌하다가 이 모양이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바람에 경각하게 되어 깊은 중독은 피할 수가 있었을 것이오."
"그럼 그들은 지금 어디에?"
"처음 남해용왕의 손에 들었던 봉신지약이 고려검왕의 공격을 받고 떨어뜨리게 되자 틈을 노린 노납의 사제에게 들어갔는데 다른 사람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소. 그런 상태에서 독왕이 나타나 모두 그 자리를 떠나게 되면서 노납만 시주와의 약속대로 이쪽으로 오게 되었으니 그 뒤로는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소……."
"그렇게 되었군요……."
한효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그는 떠나오면서 지난날 용문에서의 일에 대한 것을 물었었고 상황이 바뀌어 떠나게 되면 이쪽으로 오도록 방향을 알려주었었다. 그렇기에 노승은 이쪽으로 달려와서 그와 만나게 된 것이다.
"저로 인해서 쉬지 못하고 오히려 강적들과 싸워 이처럼 상처를 입으셨으니 죄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허허…… 별말씀을. 노납이 맡은 물건은 원래 소시주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이니 인연의 이어짐은 너무도 당연한 일. 더구나 노납의 지난날을 생각한다면 살아도 너무 오래 살았으니 무슨 여한이 있으리오?"
무명노승은 태연히 웃어 보였다.
그 웃음 속에는 이미 삶을 초월한 깨달음이 역력하다.
"대사께서는 이미 득도하신 상태인데, 이 정도 상처에 어찌 그리 쉽게 삶을 포기하십니까?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을 제도(濟度)하실 수 있으실 텐데 이즈음에서 삶을 버리시려 하면……."
무명노승은 머리를 저어 한효월의 말을 만류했다.
"노납은 오래전에 많은 죄를 지었소. 그런 몸으로써 아직까지 살아 있었던 것은 노납의 뒤를 이은 사제의 업과(業果)가 아직 소진되지 않아 그 업장(業障)을 노납이 지고 있었기 때문이오. 이제 그가 중원에 들어와 세속에 휩쓸려 자신의 죄업을 돌려받을 터이니 노납이 굳이 세상에 남아 있을 까닭은 없다오. 가능하다면 서장으로 다시 돌아가 업(業)을 바로 세울 수 있다면 더 바랄 원(願)이 없겠지만…… 나무관세음보살…… 그 또한 욕심일 것이오."
그의 얼굴에 문득 쓸쓸함이 스쳐 갔다.
혈불(血佛) 찰도극(刹圖克).
그는 서장 천룡사의 제자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룡사에 거두어져 그 뛰어남을 인정받아 천룡사의 절학을 전수받았다. 근 백 년 이래 그의 능력을 따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하루가 다르게 그의 능력은 절대하게 커갔다. 하지만 그는 장문제자(掌門弟子)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장문제자는 따로 있었고 그는 무승으로만 인정되었다.
찰도극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천재답게 모든 것을 완벽하게 꾸민 그는 반대파들을 모두 숙청하기 시작했다. 말이 숙청이지 실제로는 그의 무공으로 그들 모두를 죽여 없애는 일이었다.
서장 천룡사는 마의 집단이 아니다.
불(佛)을 숭상하고 법(法)을 지키는 라마들이라 이처럼 참혹한 일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수많은 라마들이 그로 인해 죽어갔지만 그에게 굴하지 않았고 그런 그들을 찰도극은 단 한 명도 용서하지 않고 모조리 다 죽였다.
피…….
그리고 또 피…….
그리하여 그는 서장 제일의 위치에 섰다.
사람들은 그를 혈불이라 불렀다.
누구도 그를 거역할 수 없고, 거스를 수 없었으며 그의 앞에서는 어떤 자라 할지라도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수백이 넘는 동료와 사형, 사제들을 죽여 없앤 그는 피의 절대자였다.
서역이 모두 숨을 죽였다.
그런데, 그 어느 날 혈불이 사라졌다.
그의 사제였던 타뢰(陀雷)존자가 그를 암습하여 죽여 버린 것이다. 타뢰존자는 혈불 찰도극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였다. 서역을 피로 쓸기 시작할 때부터 그는 찰도극과 함께 움직여 혈불 찰도극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런 타뢰존자가 혈불을 암습했다.
새로운 신공을 참오하기 위해 혈불이 폐관에 들었을 때 그를 암습했고, 세상은 모두 그가 죽은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죽기에 혈불 찰도극의 무공은 너무 높았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 사지를 빠져나왔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기는 했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 원래의 무공을 회복하는 데에는 오랜 시일이 필요했다. 더구나 겨우 살아난 그가 서역을 전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너무 참혹하였다.
처음부터 장문제자로 선택된 것이 그였으며, 그는 시일이 지나면 자연히 서역의 법통을 잇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비틀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사제인 혈뢰존자였다. 사형인 찰도극을 천하의 악마인 혈불로 만들고 그를 해치고서 그 자리에 자신이 올라가기 위한 계획을 짠 것이 바로 사제인 타뢰존자였음을 안 찰도극은 너무 어이가 없어 치가 떨렸다.
복수!
그날부터 그는 복수를 위해 천하를 전전했다.
서역에서는 그를 증오하는 서역인들로 인해 숨어 있을 수가 없어서 천하를 떠돌다 결국은 중원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무공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행각승으로 이리저리 떠돌던 혈불은 어느 날 정말 뜻하지 않게 깨달음을 얻게 된다.
용문에서 도도히 흘러가는 물결을 바라보면서 참선에 들어 있던 그는 복수라는 것이 얼마나 하잘것없는가를 알게 된 것이다. 더불어 자신이 살아왔던 지난 세월이 이미 예정된 행로였다는 것도 꿰뚫어 알게 되었다.
그 숱한 고난이 바로 이 한순간의 깨달음을 위해 준비된 것임을.
그는 돈오!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은 돈오가 아니라 점오였다. 이 순간을 위해 그처럼 오랜 세월, 수많은 인과를 거쳐서 비로소 만들어낸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이니 삶과 죽음에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다.
"노납이 천기를 보건대 노납의 열반은 얼마 남지 않았소. 그 시간 내에 만날 수 있을는지 몰라 소시주가 원하는 것은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천운사(天雲寺)에 놓아두었소."
"소생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때 용문에서 소시주가 찾던 것…… 그것 때문에 노납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소?"
"맞습니다. 정말 그때 얻으신 것이 있었습니까?"
"그렇소. 간단히 살펴본 결과, 한 건의 문서였는데 내용은 보지 않았소. 노납은 당시만 하더라도 사물을 꿰뚫어 볼 힘이 지금 같지 않아 소시주를 보면서도 물건을 건네지 못하였었오. 그날의 상황으로 보아 그것이 심상치 않은 내용을 담고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우연히 노납의 사제가 중원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에 놀라 그곳을 떠나면서 그 문건도 같이 가져오게 되었었소……. 언젠가는 소시주가 그곳으로 찾아올 듯하여 맡겨둘까도 생각을 했었소만 천기를 짚어보니 소시주와 인연이 아직 다 하지 않은 듯하여 이곳까지 가져오게 되었구료……."
그때, 앞쪽에서 격렬한 고함 소리와 싸우는 소리가 났다.
제천교도들이 전열을 정비하여 밀려오고 있었다.
좌백과 유성, 심소옥과 좌백의 수하들까지 나서서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대대적인 공세였다.
무명노승은 몸을 일으켰다.
"어쩌시려고?"
"저들은 쉽지 않은 상대들이오. 노납이 막을 터이니, 모두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같이 가시지요."
한효월의 말에 무명노승은 미미하게 웃었다.
"소시주의 명운(命運)이 그리 길지는 않으나 아직은 할 일이 남아 있을 터이니, 어찌 이곳에서 그 힘을 다 쓰려 하시오? 아미타불…… 앞을 보기보다 뒤를 조심함이 차후 닥칠 위험을 피할 수 있으리니 부디 잊지 마시오."
"성아! 수방(水方)을 목(木)으로 전도시킬 수 있겠느냐?"
한효월이 앞서 나간 유성에게 물었다.
"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아. 지금 하거라."
한효월의 말에 유성은 옆에 있던 바위를 밀어냈다.
그것을 보자 한효월 또한 옆에 있던 바위를 옮겼다. 그가 바람처럼 몇 개의 바위를 옮기자 신기하게도 한 가닥 안개가 피어 오르면서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난석강으로 쳐들어온 흑의인들이 주위를 분간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하다가 모두 쓰러졌다. 좌백의 무공은 그들이 당적할 수준이 아니었고 더더구나 한효월이 가세하자 견뎌낼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진세는 파괴된 줄 알았는데……."
좌백이 돌아오면서 한효월을 보았다.
"마지막을 위한 변수가 있었지……."
한효월이 답했다.
그가 밖으로 나가 싸우지 않고 진세 안에 남아 있었던 것은 저들에게 이곳의 허실을 알려주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였지만 실제로는 진세를 변화시키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만약을 위해서 이곳을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곳은 수기(水氣)가 접하는 곳인데 진세를 화(火)로 진행시키니 물과 불이 만나 안개가 피어나는구료. 정말 신묘하오. 이처럼 간단히 진세를 바꿀 수가 있다니…… 시주의 능력이 참으로 놀랍구료."
안개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보고 있던 무명노승이 찬탄을 금치 못한다.
"과찬이십니다."
한효월은 우왕좌왕 움직이고 있는 흑의인들의 모습을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제가 여기에 다시 진세를 설(設)한 것은 이곳을 물러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저들의 이목을 혼란하게 하면 이곳을 벗어나기가 좀 쉽게 되겠지요. 덜 싸워도 될 것이고……."
바깥을 건너보던 한효월이 쓴웃음을 짓는다.
"역시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들이로군요."
좌백 등이 보니 흑의인들이 퍼져서 동정호 쪽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북벌후의 지시에 따라 흑의인들이 여기저기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여기 그냥 있을 거예요?"
그간 입을 닫고 있었던 심소옥이 물었다.
"잠시만…… 저들이 준비를 할 동안만 있으면 되겠지."
"준비를 할 동안 있다니?"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심소옥이 묘한 표정이 되어 되물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적을 분쇄할 압도적인 전력이 아니라면 이곳을 뚫고 나가는 것이 최선일 것인데, 그러자면 적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가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적이 준비를 할 동안 기다리라니 기가 막히는 소리였고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이기도 했다.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잠시만 기다리도록 하거라."
"도대체 무슨 소린지……."
심소옥은 난감한 듯 한효월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문득 웃음 지었다.
"그러지 뭐. 기다리라면 언제까지라도……."
그녀는 한효월의 옆에 털썩, 주저앉더니 품에서 건량을 꺼내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급하게 오느라고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배가 고파 뒤질 거 같네……. 왜? 좀 줘?"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인 유성에게 씹던 건포(乾脯)를 내밀었다.
"더럽게……."
"더럽다니, 백옥 같은 아가씨가 씹던 건데……."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한효월이 시선을 무명노승에게로 돌렸다.
"잠시의 시간을 이용해서 질문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만……."
한효월의 기색에 무명노승은 담담히 말을 받았다.
"봉신에 관한 것이오?"
"맞습니다."
"이제 와서 무엇을 숨기겠소? 어쩌면 그 전설이 지금의 천하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고…… 또 앞으로의 무림에서도 영향을 미칠 터이니 소시주라면 알아야 할는지도 모르겠소이다."
"감사합니다."
"감사라니…… 하지만 노납이 아는 것은 한계가 있소. 노납은 활불의 지위에 제대로 올라가기 전에 사제에게 당해 쫓겨났기 때문에 대강의 사정만을 알고 있을 뿐이오. 그 봉신에 관한 것은 당금 천하에서는 천하십왕만이 그 사정(事情)을 가장 명확히 알고 있다고 보면 맞을 것이오."
"하지만 소생은 사부님으로부터 그 내용을 듣지 못했습니다."
좌백이 말을 꺼냈다.
"그럴 것이오. 그 일은 워낙 비밀하여 본인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으니……."
백 년 이전.
천하에는 참으로 막강한 고수들이 있었다.
세상은 그들의 이름을 알기도 하고 혹은 모르기도 했다. 세상이 그들을 알든 모르든 간에 그들이 각기 천하제일이라는 점에서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일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 그들을 일러 천하십성(天下十聖)이라 한다.
"십왕이 아니라, 십성이란 말입니까?"
"그렇소. 십성이라고 불린 그분들은 바로 천하십왕의 전배(前輩)로서 이미 전설로 화한 분들이오. 기록에 따르면 그분들의 능력은
이미 사람 이상이라 처음에는 관심을 가졌던 세상의 지배나 무림제패 등의 일에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고 하오."
"그런……!"
모두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천하십성은 하나둘 서로를 알게 되고 마침내는 모임까지 가지게 되었소. 그리고는 정말 소문대로 각자의 능력이 모두 경천위지하고 남을 정도임을 알게 되오……."
그렇게 만난 천하십성은 끊임없는 만남을 가지다가 장난 삼아 그들의 모임에 명칭을 부여하였다.
그 이름은 바로 용화회(龍華會)라고 하였다.
"용화회?"
"용화회라면 미륵보살이 성불한 다음에 중생을 위해서 용화수 아래에서 설법을 한다는…… 그거 아닌가요?"
심소옥이 눈을 반짝였다.
"맞다네. 어린 여시주가 불법을 많이 아는군……."
"하하…… 제가 좀 유식……."
심소옥은 말끝을 흐렸다.
유성이 사납게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자꾸 말을 끊지 않는 게 좋겠다."
한효월까지 가세하니 심소옥은 완전히 찌그러지고 말았다.
"암 말도 안 하께요."
어쩌면 장난스럽게 출발한 용화회.
하지만 몇 번의 만남이 이루어지자 그들은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졌다.
세상을 뒤집는 일 따위는 그들의 성에 차지 않았다.
언제라도 한 사람만 하산하면 이룰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세상을 뒤엎은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다른 아홉 명이 건재함을 알고 있으니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깨달음 자체가 이미 높은 경지에 있어서 작은 것에 얽매일 상태가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뛰어나 누가 원하지 않아도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용화회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렇게 이루어졌다.
용화회의 주축인 천하십성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신들의 청정(淸淨)을 방해함을 저어하여 그들로부터 떠났고, 용화회를 이루었던 사람들은 천하를 헤맨 끝에 천하십성의 행방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아냈다.
-봉신(封神)!
놀랍게도 사람이되, 이미 사람의 경지를 벗어난 그들은 산 채로 신(神)이 되고자 서원(誓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는 신이 되기 위한 수련에 들어 있었다.
그런 그들의 맹서(盟誓)를 일러 봉신지서(封神之誓)라 이름하며, 그들이 신이 되고자 한 맹서를 남긴 곳을 일러 봉신방(封神榜)이라 한다.
"보, 봉신방…… 화, 정말 대단하……!"
부지간에 입을 연 심소옥이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당연히 그런 그녀를 유성은 죽일 듯 쏘아보고 있었다. 의형상인의 경지에 이르렀더라면 심소옥은 무사하지 못했을 눈빛이었다.
'봉신방이라면 강태공 나오는 옛날이야기 책인디…….'
심소옥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유성을 마주 째려보았다.
"천하십왕이 그 천하십성의 후예라…… 그렇군요. 그럼 봉신지약은 바로 그 봉신방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렇소. 봉신지약은 천하십성이 맹서한 곳, 봉신방에 이르는 지도 겸 열쇠라오. 봉신지약을 얻어 거기에 이른 사람은 천하십성이 남긴 모든 것을 얻을 수가 있게 된다는 전설이 남아 있소."
"천하십성이 남긴 모든 것……."
한효월이 부지중에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천하십왕의 선대들.
그 천하십성이 남긴 모든 것을 한 사람이 얻는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물어보지 않아도 너무 뻔했다.
천하십왕들이 눈에 불을 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소생이 보기에 천하십왕은 뭔가 제약에 걸려 있는 듯하던데…… 지금 말씀대로면 별로 제약이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제약이 있소."
무명노승은 간단히 말을 잘랐다.
"천하십왕은 봉신지비가 풀리기 전까지는 세상에 나서지 못하게 강요받고 있소. 그것이 선대의 약속이니까. 누구라도 봉신지비를 푼 사람에게 굴종해야 하며…… 사실, 이 부분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봉신지비를 푼 사람에게 대항할 방도가 없을 테니 어찌 반항할 수 있겠소? 당년의 천하십성은 오늘날 천하십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지의 거인들이라 하였으니……."
"비교할 수 없는 거인들이라구요?"
참지 못하고 유성이 물었다.
"그렇다고 들었지. 노납 또한 잠시나마 그 자리에 있었지만 천하십성의 능력은 그때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날 정도였다니……
자연히 천하십왕과는 차이가 나지. 천하십왕은 그들이 남긴 유진(遺眞)을 얻었을 뿐, 그들의 진전(眞傳)을 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태라……."
"세상에……."
유성이 입을 딱 벌렸다.
넌 왜 말을 해? 하고 따졌어야 할 심소옥조차도 따질 말을 잊어버렸다.
너무 엄청난 말이기 때문이다.
천하십왕!
당대의 전설.
그 절대한 존재들…….
그런 그들이 천하십성의 진전을 이은 것이 아니라니…….
인간이면서도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사람들, 그들이 정말 신이 되었다면, 신이 되고자 하여 수련했던 그 길을 알게 된다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한 권의 비급을 두고 세상이 각축을 벌인다.
그런데 어쩌면 세상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어쩌면 삶을 초월한 존재가 될 수 있을는지도 모르는 그러한 것이 실재한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마음이 동하지 않을 것인가.
한효월의 안색은 어두웠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천하제일!
누가 원하지 않을 것인가.
그런데 그 절대의 비밀을 손에 쥐고서도 제천교주는 그 비밀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왜 그랬을까?
가짜라든가, 아니면 다른 것으로 속일 수는 없다.
한효월을 속일 수는 있을지라도 천하십왕마저 속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혹시 경월선인이란 분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경월?"
"예, 제 사부님이시고 중원무왕인 제 사형의 사부이시기도 합니다."
"아니오. 들어본 적이 없소."
한효월은 다시 미궁에 빠졌다.
천하십왕은 천하십성의 후예들이다.
그런데 사부는 천하십성의 후예가 아니었더란 말일까?
……그럼에도 이 사부는 봉신(封神)의 서약(誓約)에 의해 네게 아무것도 말해 줄 수가 없구나. 만에 하나라도 내가 봉신의 서약을 깨뜨린다면 천하는 즉각 회생 불능의 상황에 빠지고 말 터이니…….
사부가 남긴 글…….
그 글로 미루어 생각한다면 사부 또한 용화회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한효월은 부지중에 자신의 목을 어루만진다.
거기에는 목걸이처럼 걸어놓은 것이 있었다. 바로 사부가 그에게 남긴 금낭이었다. 아직 그 금낭은 그의 목에 매달린 채였다.
자신의 생사에 의문이 생기면 물어보라고 하였었다.
그런데 경월선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과연 지금이 때일까, 아닐까?
그때였다.
갑자기 외곽에서 격렬한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심소옥 등이 고개를 빼자 한효월이 몸을 일으켰다.
"갈 때가 된 것 같구나."
"누구? 누가 오기로 했었던 겁니까?"
유성이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다가 물었다.
안개가 스멀거리며 피어 오르는 난석 바깥으로는 소리없이 흑의인들이 움직이고 있다. 좀 전까지의 모습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당황하는 빛이 역력하다.
"개방에서 왔을 것이다. 이런 난리가 났는데 그대로 있다면 개방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일이 되겠지……."
"뭐야? 그럼 개방에서 올 때까지 그냥 기다렸단 말이에요?"
"그럼 뭘 기다렸느냐?"
"난, 난……."
심소옥은 말을 더듬었다.
그냥 이 자리에서 사라진다던가…… 뭔가 기발난 것을 기대했었다고는 차마 말을 하기 어려웠다.
진세 뒤쪽으로 가던 한효월은 무명노승이 조용히 앉아 있음을 보자 물었다.
"같이 가지 않으시렵니까?"
"먼저 가시오. 노납은 따로 길을 가겠소."
"알겠습니다. 부디……."
한효월은 그에게 정중히 포권하고는 몸을 날렸다. 지금까지 적들과 싸우던 것과는 정반대. 바로 동정호가 있는 쪽이었다.
적의 진세는 혼란스러웠다.
비록 북벌후가 미리 경계하여 그쪽으로 흑의인들을 배치해 두었지만 한효월과 좌백이 앞장서서 뚫고 나가자 그들로서는 저지할 수가 없었다.
"가려면 우리 개방이 오는 쪽으로 가야지, 왜 반대쪽이에요?"
심소옥이 뒤따르면서 소리쳤다.
"넌 그럼 그쪽으로 가라!"
유성이 소리쳤다.
"저 물건은 정말……!"
심소옥이 사납게 유성을 노려보다가 혼비백산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진세 밖으로 나서서 진세를 벗어나자 물밀듯이 흑의인들이 달려오고 있어서 자칫 한순간만 늦으면 일행과 헤어져 혼자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망할, 좀 기다려 주면 어디 덧나나!"
팽팽히 당겨진 천을 찢듯 한효월과 좌백은 양날의 가위처럼 흑의인들을 돌파하여 동정호 쪽으로 내달렸다.
난석강은 동정호에서 그리 멀지 않아 그들과 같은 경공의 고수들이 내달리자 금세 눈앞으로 다가왔다.
날이 밝으려면 얼마 남지 않았다.
뿌연 안개가 동정호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첨벙거리면서 갈대밭을 달려간 좌백과 일행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한효월은 반대로 돌아서서 쫓아오는 흑의인들을 상대했다.
"뭐예요? 어디로 가요?"
숨이 턱에 차서 쫓아온 심소옥이 갈 데가 없자 소리쳐 물었다.
"물에 뛰어 들어가서 헤엄쳐!"
유성이 소리치자 멈칫한 그녀는 인상을 쓴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장난하니?"
바로 그때다.
철썩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개를 헤치고 배 한 척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 배의 선수에는 감천형이 우뚝 서 있었다.
"사형!"
"무사하냐?"
감천형은 좌백을 발견하자 훌쩍 몸을 날려 그들의 옆으로 날아왔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떻게 알고 여기에?"
"나도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만 사숙께서 이 시간에 맞춰서 배를 몰고 이곳으로 오라고 하셔서…… 오래 기다렸느냐?"
"아닙니다. 지금 왔습니다……."
좌백은 감천형의 물음에 대꾸를 했지만 놀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한효월의 능력이 빼어남은 누구라도 다 알고 있었다.
언제라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미리 안배를 할 수가 있었단 말인가?
설마 하니 그는 앞일을 모두 내다볼 수라도 있단 말일까?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했다.
좌백을 시켜서 이곳에다 미리 진세를 설치하여 둔 것도 그러했고, 감천형에게 일러 시간에 맞추어 배를 몰고 오게 한 것은 정말
신기막측(神機莫測)이란 말 외는 다른 말로는 형언할 길이 없었다.
현세에 나타난 제갈무후를 보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은 유성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