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六首 광해일주(狂海一舟) (78/113)

第六首  광해일주(狂海一舟)

-모험은 계속된다.

변화는 위기(危機) 속에서 끊임이 없다.

 한참 동안이나 발광하듯 주위를 헤집던 독왕은 마침내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그렇게 떠나가는 그의 모습을 한효월과 좌백, 유성은 숨을 죽이고서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간 것도, 어디로 숨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몸을 낮춘 채로 숨을 죽인 채 있을 뿐이었다.

 "어, 어떻게 된 거죠?"

 그가 떠난 걸 확인한 유성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자신의 바로 옆으로 독왕이 눈을 부릅뜨고서 지나갔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냥 미친 듯 돌아다닐 뿐, 자신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진세가 발동된 것뿐이다."

 한효월이 말했다.

 "진세라니? 그럼 수하들이 만든 것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좌백이 다시 물었다.

 "맞아. 그들이 제대로 해주어서 다행이었지."

 한효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

 한효월은 감천형과 만나고 나서 좌백, 유성과 같이 그 자리를 떠나왔다. 그런데 그를 따름에는 선후가 있어서 한효월과 유성은 바로 향적사로 갔지만 좌백은 한효월의 지시에 따라 가는 길 도중에 두 군데에다 작업을 하고는 수하 둘을 데리고 향적사로 향했었다.

 그 작업이라는 것은 일종의 진지를 만든 것이었다.

 돌을 옮기고 흙더미를 쌓고 초목을 몇 군데 만진 것…….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거창한 무엇은 아니었다.

 대체 왜 그걸 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쓸데없는 일을 할 사람이 아님을 잘 알기에 좌백은 묵묵히 그 일을 마치고 한효월을

 찾아갔었다.

 그런데…….

 "이것은 간단하면서도 매우 효과가 높은 환영진세(幻影陣勢)다. 내가 중조산에 있을 때 고안한 것으로 소규모의 팔진도라고도 할

 수 있지. 다른 위력은 없고 사람의 시야에 착시 현상을 일으켜 진세 내에 있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한다."

 "그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안 보인다는 겁니까?"

 좌백이 물었다.

 "물론. 그렇지 않으면 독왕이 그대로 떠나 버렸을 리가 없겠지……."

 주변을 돌아보아도 보이는 것은 그대로다.

 그런데 자신들이 보이지 않는다니…….

 홀린 듯 한효월을 쳐다보고 있던 좌백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 진세가 발동된 겁니까? 저희가 말씀하신 대로 돌을 옮기고 설치를 할 때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는데……."

 "발동되지 않았으니까."

 한효월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더니 말했다.

 "이 환영진세는 유사시를 대비한 포석이었기 때문에 누구에게 미리 발각되면 안 되지. 그래서 진세는 그대로지만 발동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진세의 발동은 바로 이 돌 하나로 이루어졌지……."

 한효월의 말에 따라 유성과 좌백의 눈길이 한효월의 발치로 향했다.

 그의 오른쪽 발 밑에는 주먹만한 돌 하나가 옆으로 밀려가 있었다.

 "나는 일부러 풀포기를 뽑아 흩날려 독왕의 시선을 끌었지. 하지만 풀포기는 진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발로 이 돌을 움직여 진세를 발동시키기 위한 눈속임이었던 것이지……."

 "그럼…… 그 돌을 움직여서 우리 모두가 독왕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겁니까?"

 좌백이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맞아."

 "……."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좌백은 눈만 꿈벅거렸다.

 이 나이 어린 사숙은 도대체…….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진세를 설치하거나 움직이려 했다면 독왕 같은 절세고수가 속을 리가 없었겠지. 더욱이 술법이니 뭐니

 해서 그를 헷갈리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하지만 내가 너무 태연하게 그의 앞에서 사라지니 그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 설마 하니 여기에 내가 미리 수작을 부려놓았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일일 테니까."

 "그렇군요……."

 좌백은 맥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이 자리를 떠나도록 하지."

 "그가 돌아옵니까?"

 "돌아오겠지. 천하십왕이란 자리에 오를 사람은 결코 바보일 수가 없어. 모두 절세의 재지를 지닌 천재들이지. 절세의 재지를

 지니지 못했다면 결코 최고의 무공을 연수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 그가 돌아오지 못할 경우는 뜻밖의 일이 생겼을 때뿐일 거야.

 그가 돌아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는 게 좋아."

 "그런데……."

 유성이 문득 입을 열었다.

 "지금 내상이 심한 건 아니시죠?"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는 유성을 보고 한효월은 문득 미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보이느냐?"

 "겉보기로는 무척 심해 보이는데…… 아무리 봐도 아닌 거 같아요. 정말 상세가 심하세요?"

 "네가 본 게 맞았다. 내가 입은 상세는 가장한 것일 뿐, 실제로는 별게 아니다."

 "역시 그런 거 같더라니……."

 유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좌백은 또 얼떨떨해졌다.

 거의 몸도 가누지 못하는 한효월을 돌보면서 숲을 통과했다. 그 바람에 그는 죽을힘을 다해서 한효월을 보호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내상을 입지 않으셨다고요?"

 "적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내가 적과 동수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만약의 경우에 숨겨놓은 패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지금 우리는 모든 게 적에게 뒤지니 무엇이건 적을 속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서 적을 혼란케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지."

 '허…….'

 머리가 복잡해졌다.

 냉철하다고 소문난 그였는데 도무지 이 나이 어린 사숙은…….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무엇 때문에 이처럼 급하게 피하시는 건지……."

 유성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힘을 가지고서도 왜 이렇게 상갓집 개처럼 꼬리를 말고 죽을힘을 다해서 도주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천하십왕 중 다섯이 이미 향적사로 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게 우연일 수는 없다. 함정을 꾸민 것이 제천교라면 그들은 이 일을 통해 큰 것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하십왕을 상대로 함정을 꾸민다면 득보다 실이 많을 수 있다. 중원무왕이라던 사형을 상대하기 위해서 그들은 심혈을 기울여야 했었는데 천하십왕을 한두 사람도 아니고 다섯 이상을 불러 모았다면 자칫, 잘못되면 제천교의 기반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그들이 이 일을 추진했다는 것은 정말 큰 의미가 숨어 있을 수 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저들은 나를 이 일의 선봉에 세우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니 봉신지약이 내 손에 들어왔을 테지."

 유성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럼, 그게 제천교에서 갖다 놓은 거란 말씀인가요?"

 "그럴 가능성이 높다."

 "말도…… 대체 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래서 내가 망설이지 않고 봉신지약을 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 버렸지. 만약 거기에 의미가 있었다면 그 바람에 일이 틀어지게 될 테니 필시 나를 막는 자가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놈들이 막은 것은……."

 "들어오는 자는 막지 않고 나가는 자는 막는…… 전형적인 매복의 형상이야. 내가 뜻밖에 빨리 물러가자 매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어쨌든 지금은 이곳을 빨리 벗어나서 저들이 무슨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는 게 좋겠다."

 은밀한 가운데 어둠 속에서 여기저기 적들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었다.

 한효월이 갑자기 사라져서 당황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 모두 내가 알려준 대로 곧장 앞으로 직진해. 자칫하면 독왕이 남겨둔 독기에 중독될런지도 몰라."

 한효월의 명에 따라 좌백과 유성은 바람처럼 앞으로 쏘아갔다. 두 사람은 몸을 낮춘 상태였지만 그 움직임은 바람과 같이 빨랐다.

 한효월은 그들이 몸을 날린 직후, 옆에 있던 돌 하나를 발로 밀고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 단순한 동작으로 그가 설치한 진세는 사라져 버렸다.

 어둠 속에서 몸을 낮춘 채 십여 장을 전진하자 목적했던 곳이었다.

 바위가 여기저기 우뚝하고 갈대도 무성하다. 시선을 돌리면 동정호이지만 동정호에 이르려면 호변을 거쳐야만 가능하다.

 한효월은 그들의 뒤를 따라 그곳에 이르자 다시 몇 군데 돌무더기를 옮겼다. 그 동작은 그야말로 눈부시도록 빨라서 그가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이 아님이 분명했다.

 시선을 돌려보자 좌백과 유성, 그리고 그 자리에 대기하고 있던 좌백의 수하 고수 다섯의 모습이 보였다. 납작 엎드린 그들에게서는 긴장된 모습이 역력하다.

 "특별한 것은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둠 속에서 놈들이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만 보이고……."

 그들의 보고를 들은 좌백이 한효월에게 말했다.

 "그런데 여기도 놈들이 보지 못하나요?"

 "반쯤은 그렇다."

 "반쯤이요?"

 "그래. 이곳에 펼친 진세는 전도환영진세(顚倒幻影陣勢)라 출입에 어려움이 있게 되지만 사람의 시선을 완벽히 차단하지는 못한다. 공을 들여서 제대로 설치한다면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그때, 펑펑! 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싸움 소리 같군요……."

 귀를 기울여 본 유성이 말했다.

 "본격적으로 시작이 된 것 같구나. 성아, 나를 도와다오. 좌 사질은 주위를 잘 살펴주게."

 "알겠습니다."

 한효월은 몸을 움직여 진세를 보강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얼마나 더 있어야 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진세를 좀 더 강하게 만들어두는 것이 수성에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세를 보강한 다음, 그는 주위를 살펴볼 작정이었다.

 "맙소사! 저게 누구야?"

 한효월을 도와 진세를 구축하고 있던 유성이 입을 벌렸다.

 "무슨 일이냐?"

 "저거 좀 보세요…… 쟤가 왜 여기에……."

 유성이 가리킨 곳을 본 한효월도 난감한 빛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소리없이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지형지물을 이용하면서 앞으로 빠르게 나아가고 있는 그 모습은 흡사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삵쾡이와 같다.

 "빌어먹을,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그놈의 절간은 보이지 않는다.

 가르쳐 주려면 제대로 가르쳐 주던가.

 하긴 좀 더 물어봤다면 눈치를 채고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을 테지. 하마터면 느닷없이 나타난 궁가방인가 뭔가 그 괴상한 물건들에게 잡혀서 나오지도 못할 뻔하기도 했다.

 "여기서 숲을 통과해야 한다는 건가? 망할……."

 주위를 둘러보던 그림자는 문득 전신이 굳어졌다.

 사람 하나.

 아니, 차가운 눈길이 그를 쏘아보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멀리라면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었다. 바로 눈앞, 바위에 몸을 붙여 주위를 살핀 다음에 주위를 살피려 살그머니 고개를 내미는데 거기에 그 얼굴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찌 놀라지 않을 것인가!

 "으악!"

 놀란 그림자는 벌렁, 뒤로 넘어졌다.

 남자의 소리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그림자야말로 개방의 교호 심소옥이니 남자 소리가 날 리가 없다.

 벌렁 넘어졌던 심소옥은 황급히 몸을 굴렸다.

 스팟!

 그녀가 넘어졌던 곳을 검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슈각!

 대도 하나가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몸을 굴렸던 그녀는 튕기듯 일어나 등 뒤로 그 대도를 흘려보냈다. 그리고는 손에 들었던 타구봉으로 대도를 치면서 훌쩍 몸을 날려 옆으로 반 장가량 물러났다.

 어느새 검은 복면을 한 자들이 서너 명이나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디서 기어나온 거야?"

 심소옥이 비명을 질렀다.

 장도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빡!

 그녀의 타구봉이 상대의 머리를 세차게 쳤다.

 바위라도 부서져야 했다.

 그런데 휘청한 상대는 눈을 부릅뜨고서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지난날 화산에서의 그 끔찍한 기억을 되살린 심소옥은 공포에 질려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처럼 무서운 자들이 매복하고 있을 것임을 그녀는 생각지도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소리도 없이 섬광이 날아들더니 심소옥에게 달려들던 자들을 베어냈다. 그 속도는 전광과도 같고 위력은 날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스팟!

 심소옥에게 달려들던 세 명의 흑의복면인들이 그대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가자!"

 나타난 사람은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놔! 네가 누군데……."

 소리치던 심소옥의 얼굴이 환해졌다.

 "가, 가가! 당신이군요……."

 "소리 내지 마라."

 한효월이 머리를 저었다.

 말과 함께 그는 심소옥의 팔을 잡고는 바람처럼 몸을 날려 눈앞에 있던 바위를 넘어 들어갔다.

 그곳까지의 거리라야 불과 4, 5장이지만 주변 시야가 넓게 퍼져 있어서 사람의 눈을 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가 왜 급하게 서둘렀는가는 금세 드러났다.

 좌우에서 급하게 호각 소리가 들리더니 금세 이쪽을 향해 좁혀왔던 것이다.

 그리고는 이내 몇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는 천추성주의 모습도 보였다.

 "무슨 일이지?"

 "천마각의 살수들이 셋이나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죽어 넘어진 자들을 살펴보던 자들이 보고했다.

 "한꺼번에 말이냐?"

 "예, 상대가 무서운 듯 반항조차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

 천추성주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둠에 잠긴 주위는 쓸쓸하기만 하고 또 어찌 보면 고괴(古怪)하여 공포감이 들 만큼 조용하다.

 "이 일대를 봉쇄해. 그리고 북벌후에게 연락해라."

 "알겠습니다!"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주위로 번져 갔다.

 "흥! 한효월, 꼬리를 드러낸 이상,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들으라는 듯 그는 소리 내어 중얼거리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사방에서 흑의인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하나둘이 아니라 열스물, 그런 단위로 흑의인들의 모습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망할 계집애 같으니…… 너 때문에 다 죽게 생겼다!"

 유성이 투덜거렸다.

 "내가 뭘?"

 심소옥이 눈을 부릅뜨고서 대들었다.

 "쓸데없이 계집애가 이런 곳에는 왜 기어 들어오냐? 너만 아니었으면 우린 들키지 않았을 거야!"

 "누가 참견하래? 난 다른 볼일이 있었단 말이야……."

 강변을 하지만 목소리에 기운이 잦아든다.

 그녀를 구한 것은 한효월이었다.

 한효월을 본 그녀는 뛸 듯이 기뻐했지만 그때부터 유성에게 시달려야 했다.

 어찌어찌 옥면무영이 있는 곳까지 찾아가기는 했는데 어떻게 찾아왔느냐고 구박만 잔뜩 받았다. 그곳을 뛰쳐나와 알아본 결과 향적사라는 곳에 대해서 조사했음을 알게 된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내달렸다. 조심만 하면 무슨 위험이 있겠는가!

 하지만 상황은 너무나 달랐다.

 "어라? 너……."

 문득 유성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뭐?"

 "냄새도 덜 나네? 흐음…… 그러고 보니, 세수도 한 거 같군? 머리도 묶었고? 거 별일이네? 거지계집애가 몸단장을 했네그랴?"

 유성이 신기한 듯 그녀의 가슴팍에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본다.

 "뭐 하는 짓이야!"

 "으악!"

 유성이 개구리처럼 엎어졌다.

 심소옥이 유성의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박은 것이다.

 "이 거지계집애가……."

 "조용히."

 한효월이 나직이 말했다.

 그 말에 실린 무게로 인해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녹삼(綠衫)을 걸친 문사 차림의 사내 하나가 장내에 나타나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흑의인 하나가 그의 옆에서 뭔가 상황 설명을 한다. 잠시 그에게 뭔가를 들은 녹삼문사는 주변을 살펴보다가 천천히 한효월 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 빌어먹을 놈이 무슨 냄새를 맡고 이곳으로 곧장 오는 거지?"

 유성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는 제천교의 북벌후다. 얼마 전에 죄를 받아 잡혀 들어갔었는데 다시 나온 모양이구나. 진세 부분에는 높은 조예가 있으니 이상한 것을 느낀 건 당연한 일이겠지……."

 한효월이 설명했다.

 좌백이 한효월의 명을 받아 만들어놓은 이 진세는 너비가 대략 3장 정도의 원형이었다. 뒤로는 암벽 형태의 집채만한 바위가 있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는 갈대밭이다. 갈대밭 앞으로는 동정호이지만 거리로는 이십여 장이 족히 넘는다.

 어떻게 보면 외딴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향적사로 가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만 할 요충이었다.

 다시 천추성주가 나타났다.

 그가 북벌후에게 뭔가를 묻는 듯하자 북벌후는 한효월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난석강(亂石崗)? 이곳이 진세의 중추를 위협할 만한 곳이라면서 그렇게 버려두었단 말이오?"

 천추성주가 갑자기 크게 화를 냈다.

 "이곳은 외곽에 위치한 곳이라 실상 크게 효용이 없었던 곳이오."

 "그런데 어떻게 진세의 중추를 위협할 수 있단 말이오?"

 "여기에 한효월이 있다면 그렇다는 뜻이오."

 "뭐요?"

 "한효월의 능력이라면 이곳에서 계속해서 진세를 어지럽힐 수 있을 테니 자칫 진세의 축을 끊어버릴 수도 있을는지도……."

 "그런 곳을 그냥 버려두었단 말이오? 대체 무슨 일을 그 따위로 하는 거요?"

 천추성주가 북벌후를 질책하는 소리가 높이 들려온다.

 북벌후는 일그러진 얼굴로 뭔가를 변명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유성이 웃었다.

 "잘한다. 네놈들끼리 실컷 싸워라……."

 그때 천추성주가 머리를 끄덕이자 북벌후는 손가락으로 몇 군데를 가리키면서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바람처럼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좌백."

 "예, 사숙!"

 "저들이 가까이 와서 진세를 건드리려고 하면 바로 공격해. 추호도 사정을 보지 말고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좌백은 수하들에게 손짓을 하고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북벌후는 진세 앞 2장이 채 못 되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고 달려온 십여 명의 수하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앞의 바위를 향해 두어 명이 일제히 손을 썼다.

 펑펑!

 폭음이 일었지만 바위는 끄덕도 없다.

 "역시…… 옆의 바위를 옮겨라."

 그것을 보던 북벌후가 명령했다.

 흑의인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윽!"

 "으악!"

 흑의인들이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진세에 의해 시야가 차단당해 불과 반 장 앞에 있는 좌백 등이 보이지 않았다. 반면에 좌백과 그 수하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기습을 가한 셈이었고 흑의인들은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했다.

 좌백이 땅에서 솟구치듯 불쑥 나타나자 천추성주의 눈에 놀람이 드러났다. 설마 하니 정말로 거기에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좌백과 그 수하들의 수는 여섯에 불과했다.

 진세에 의지한다고 할지라도 적의 수는 압도적으로 많았다.

 "소옥, 네가 나가야겠다."

 한효월의 말에 심소옥은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요?"

 "그래. 겁나니?"

 "아니, 겁이야 안 나지만서두……."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가거라."

 한효월의 재촉에 심소옥은 쭈뼛거리다가 유성과 눈이 마주치자 입맛을 다시곤 폴짝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보여준 신위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나가자마자 대뜸 앞에 있던 흑의인 하나를 패대기치고, 그녀에게 시선이 쏠린 두 명의 흑의인들을 차례로 쓰러뜨렸다. 묘한 움직임이었는데 신묘한 변화가 깃든 것인지 흑의인들은 그녀의 손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멈칫하던 심소옥은 신바람이 나서 다시 두 명의 흑의인을 쓰러뜨리곤 앞쪽에서 놀라 눈이 둥그런 북벌후를 향해 혀를 내밀어 보이고는 의기양양하게 진세 안으로 후퇴했다.

 좌백도 이미 후퇴한 뒤였다.

 "아하하…… 짜식들, 별거 아니네……."

 심소옥이 두 손을 탈탈 털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나 견딜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녀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한효월이 물었다.

 "방금 상대한 것은 하급무사인 듯합니다. 강령루나 섭생루의 고수들이 오면 오래 버티기 힘들 겁니다."

 좌백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죽을 때까지 싸우면 되지 뭐가 그렇게 겁이 나누?"

 심소옥이 삐죽거리자 유성이 패 죽일 듯한 모습이 되어 그녀를 쏘아보았다.

 "지가 잘한 건 줄 아나 보네. 넌 방금 공자께서 도와주신 것도 모르냐?"

 "뭘?"

 "네가 놈들을 죽일 때마다 공자께서 먼저 손을 쓴 거란 말이다!"

 "그……."

 심소옥은 한효월을 돌아보았다.

 "……."

 한효월은 묵묵히 북벌후와 천추성주를 바라보았다.

 천추성주가 손짓을 하자 흑의인 몇 명이 다시 달려왔다.

 좌백이 다시 달려나갔다.

 "놈들이 인해전술로 나올 모양이군요……."

 유성이 중얼거렸다.

 "넌 어서 운기조식하여 힘을 비축하도록 해라."

 "예……."

 유성이 답을 할 때 좌백 등과 어울려 싸우던 7, 8명의 흑의인들에게서 갑자기 변고가 일었다.

 "피햇!"

 쾅! 콰콰앙!

 그들의 몸이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싸우던 상대가 갑자기 화탄처럼 폭발을 하자 누구라도 피할 재간이 없다.

 그나마 좌백이 눈치 빠르게 몸을 굴리며 소리쳤기에 다행.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낭패를 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둘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듯 보였고 좌백과 나머지 셋도 부상을 면할 수는 없었다.

 적이 다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등에 심지가 달려 있습니다. 몸에 화탄을 두르고 있는 것 같으니 살펴보십시오."

 몸을 굴려 안으로 들어온 좌백이 말했다.

 과연 달려오는 흑의인들의 뒤에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타 들어가는 심지인 듯한데, 흑의인들은 자신이 폭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듯 명령을 받자 곧바로 진세를 향해서 달려왔다.

 "제정신이 아니군……."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그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저들이 알지 못하게 숨어서 저들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필요한 시기에 움직일 생각이었었다. 그런데 심소옥이 나타나는 바람에 정체가 드러나고 말았다.

 방법을 바꾸어야 했다.

 잠시 그들을 살펴본 한효월은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면서 옆에 모아두었던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휙휙!

 날카로운 음향이 귀를 찔렀다.

 "윽!"

 잇달아 신음이 들리며 달려오던 서너 명의 흑의인이 쓰러졌다.

 절세고수의 손에서 날아가는 돌팔매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쓰러진 자들은 버둥거리다가 그대로 폭발했다.

 쾅! 콰쾅!

 그 폭발은 조금 전보다 더 강력했다.

 팔다리가 날아가고 내장이 흩어졌다. 사람의 머리가 굴러가는 그 형상은 정말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사람을 저렇게 만들다니…… 나쁜 놈들……."

 심소옥이 치를 떨었다.

 흑의인들의 숫자는 점점 불어났다.

 한효월은 그중에 강령루를 비롯한 제천교의 고수들이 모인 것을 알아보았다. 생각보다 저들은 더 많은 인원을 이곳에 모은 것이 분명한 듯했다.

 "좌 사질, 이 자리에서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 같다. 혹시…… 모험을 해볼 생각이 있나?"

 "무슨……."

 화탄에 상처를 입은 채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좌백이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내게는 지병(持病)이 있다."

 "지병? 무슨……."

 좌백은 물론 심소옥까지 눈이 동그래졌다.

 '이 사실은 우선은 감 사질과 좌 사질만 알고 있도록 해. 나는 오래 살지 못한다. 그래서 만에 하나 내가 일을 끝내지 못하고

 없어진다면 그 뒤를 다른 사람이 이어주어야 한다.'

 전음이 좌백에게로 날아들었다.

 '그게 무슨?'

 좌백의 눈이 더 커졌다.

 한효월은 간단히 자신의 상태를 설명해 주었다.

 '그런 상태에서…… 적과 싸우신단 말씀입니까?'

 '뭐 산속에 들어가서 조용히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면 좋겠지……. 하지만 그렇게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죽은 다음에야 마찬가지가

 아니겠나? 나의 죽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맞바꿀 수 있다면 그것도 의미있는 일일 테니 좋겠지.'

 한효월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러나 듣는 좌백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렇듯 태연한 한효월의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그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괴이하달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로 한효월을 바라보고 잇을 따름이었다.

 격동에 찬 신색(神色)!

 늘 신비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미미한 웃음을 머금은 저 초연한 모습을 보는 그는 가슴이 뭉클하게 저며옴을 느껴야 했다.

 냉철한 사람들은 대개 냉정하다. 그래서 감동이라는 것을 잘 하지 않는다. 좌백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으로 느끼기 전에 머리로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말문이 막혀 말이 나오지를 않는 것이다.

 "그 바람에 여러 가지 의도에 대해서 연구를 할 기회를 얻게 되었지. 사람의 잠력을 이용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한효월은 폭발로 구덩이가 생긴 앞쪽을 바라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사람은 누구나 잠력을 지니고 있다. 무공을 익히고 수련함은 그 잠력을 이끌어내는 것에 다름이 아니지.

 후천적으로 신체를 단련함은 그 잠력을 끌어내기 위함이지만 그중에 자연의 기를 이용하여 자신의 잠력과 동조시키는 것들이 있어

 그것들은 상승의 내가신공이 되지……. 나는 오랫동안 그것을 연구하여 한 가지 성과를 얻었는데 바로 잠력을 순간적으로 끌어내어

 본신의 능력을 단숨에 배증시키는 것이었어."

 "배증이라면 단숨에 능력이 배가(倍加)된다는 의미입니까?"

 "그렇게 봐도 무리가 없겠지."

 "와아…… 그런 방법이 있다니, 그거 어떻게 할 수가 있어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금방 고수가 될 수가 있는 거죠?"

 심소옥은 눈이 동그래졌지만 좌백은 굳은 얼굴로 물었다.

 "후유증이 있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만?"

 "맞아. 보통 이런 잠력격발지술(潛力激發之術)은 후유증이 크지. 과도하게 사용할 시에는 목숨을 잃을 수 있어. 그 효과도

 잠시뿐이고 차후 오래 후유증이 남아서 정상으로 회복되지도 않는 경우도 많아."

 "그럼 뭐 별게 아니네……."

 심소옥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내가 만들어낸 방법은 조금 달라. 보통의 잠력격발지술은 삽시간에 잠력을 서너 배 이상 쓰게 만들지만 이 방법을 쓰면

 배증하는 정도만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후유증도 금방 나타나지는 않아. 어쩌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지……."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 도전음양대법(倒顚陰陽大法)은 잠력을 격발시켜 그 사람의 무공을 한순간에 배증시켜 주지만 한 가지 후유증이 있을 수 있다.

 바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오 년에서 십 년 사이에 잠력의 고갈로 무공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다."

 "무조건 그렇습니까?"

 "아니,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나로서는 무엇도 장담할 수가 없는

 일이라 모험을 해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잠력의 격발 시간은 얼마나 갑니까?"

 "한 시진가량…… 잘 나누어 쓴다면 세 시진까지도 가능하다."

 "저, 그럼 그 대법이 성공하면 어느 정도의 위력을 보일 수 있나요?"

 심소옥이 물었다.

 "좌백의 능력이라면 공력만 따질 때 나와 비슷한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초식의 운용이나 다른 면에서는 그 공력을 자기 것으로

 해서 써온 사람과는 틀려서 조금 서툴겠지만……."

 "하겠습니다."

 좌백이 말했다.

 "후유증이 발생하면 무공이 전폐될 수도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좌백의 얼굴이 비장함을 가득 찼다.

 "저는 사부께서 돌아가신 후에, 지금까지 자책감에 사로잡혀 지냈습니다. 그분의 무공을 잇고도 아무런 역할을 못하고 그저 보통의

 무인으로서 시간만 축내고 있다는 자괴감에…… 늘 괴로웠습니다. 사숙의 그 방법이라면 오 년 동안 그 힘이 지속된다면 무엇을

 주저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이 무공으로는 오 년이 아니라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는데……."

 "좋다……."

 한효월이 머리를 끄덕였다.

 "저희도 가능하겠습니까?"

 옆에서 좌백의 수하들이 물었다.

 "아무에게나 마구 베풀 수는 없는 방법이오. 근골이 견뎌주지 않는다면 갑자기 커진 힘을 주체할 수 없어서 스스로 무너질 수도

 있소. 여러분들에게는 조금 힘을 더하는 시술을 해줄 테니 좌 사질이 힘을 다 쓰고 쓰러지면 그를 감 사질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는 임무를 맡도록 하시오."

 "힘을 다 쓰면 쓰러집니까?"

 "그렇게 되겠지. 하루 정도 쉬고 나면 회복되어 격발된 잠력의 절반 정도는 계속해서 쓸 수 있을 거네. 그 힘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의 노력에 달렸지."

 "알겠습니다."

 한효월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좌백에게 시술을 하기 시작했다.

 한 손가락 손가락이 마치 비수처럼 정좌한 좌백을 찔렀다. 그 찌름의 방법은 매우 기묘하여 좌백의 혈도와는 닿을 듯 말 듯했고 그 한 번의 찌름마다 좌백의 전신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떨렸다. 한효월의 손길은 매우 느렸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좌백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옷자락은 바람이 별로 불지 않음에도 세차게 펄럭여 그의 전신에서 진기가 충일하게 차 오르는 것을 곁에서도 느낄 수가 있을 정도였다.

 대신 한효월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힘이 드는 모습이 역력했다.

 콰쾅!

 폭음이 터져 나왔다.

 또다시 화약을 몸에 두른 자들이 달려와 폭발한 것이다.

 그들이 폭발하면서 진세를 이루고 있던 바위 하나가 반쪽으로 갈라졌다.

 "이런?"

 심소옥이 혀를 찼다.

 기문진식을 잘 모르는 그녀였다.

 그런데도 갑자기 뭔가 허전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문을 열어놓은 느낌이랄까?

 북벌후가 손짓을 하면서 뭐라고 하자 사방에서 흑의인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크, 큰일 났네!"

 그것을 본 심소옥이 다급해 얼굴이 창백해졌다.

 "걱정하지 마. 진세는 깨졌어도 여기는 전략적 요충지라서 적은 숫자로 놈들을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어."

 운기조식에 들어갔던 유성이 일어나면서 말했다.

 좌백의 수하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바위 뒤에 바짝 붙었다. 언제라도 뛰쳐나갈 태세.

 "그냥 두고 이리 오시오."

 그때 한효월의 음성이 들려왔다.

 한효월은 부상이 심하지 않은 세 명의 등 뒤를 차례로 치면서 말했다.

 "같이 앉아서 운기조식하시오. 이 자리는 우리가 맡을 테니까."

 그때 좌백이 몸을 일으켰다.

 "괜찮나?"

 "좋습니다."

 좌백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에서는 신광이 칼날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머지않아 날이 밝을 텐데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듯하군……."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예측대로라면 이렇게 공연히 시간만 보낼 일이 아니었다. 무슨 다른 변수라도 생긴 것일까?

 "그렇다면 더 이상 기다릴 것 없이 이 자리를 뚫고 나가도록 하지."

 한효월이 말했다.

 "소질이 앞장서겠습니다!"

 좌백이 말했다.

 바로 그때, 날카로운 비명과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향적사 쪽입니다!"

 유성이 고개를 돌려보곤 소리쳤다.

 이어 흑의인들 쪽에서 혼란이 이는 듯하더니 한 사람이 어둠을 뚫고 달려오고 있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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