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五首 용봉회집(龍鳳會集) (77/113)

第五首  용봉회집(龍鳳會集)

-독왕 나타나다.

절대의 고수들이 죽음의 함정에 들어서다.

 "어떤 놈이냐!"

 서역법왕은 대노하여 불광대수인을 펼쳐 그를 공격했다.

 그는 이미 전신공력을 끌어올린 상태였기 때문에 공력을 토해내는 것은 격렬했고 또한 신속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명노승 또한 그자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 그처럼 평범해 보이는 그였지만 무명노승은 공력의 수발이 자유로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또 한 명의 절세고수였다.

 나타난 사람이 거세(擧世)의 공력을 가졌다 할지라도 절세고수 둘의 합공을 태연하게 받아넘길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는 껄껄 웃으며 한 손을 들어 긴 소매를 쓸어냈다.

 강풍이 일며 서역법왕이 쏟아낸 불광대수인과 맞닥뜨렸다.

 펑!

 폭음.

 거기에 무명노승이 당도했다.

 그는 그물과 같이 양손을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는데, 그 형상이 심히 기이하여 중원에서 볼 수 없었던 무학이었다.

 하지만 나타난 사람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서역법왕과 부딪치자마자 그 힘을 이용하여 뒤로 튕겨져 날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그는 서역법왕과 힘으로 맞설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경력을 쏟아내면서 오히려 인자결(引字訣)로써 상대의 힘을 끌어당겼고 서역법왕이 이상함을 눈치 챘을 때 그는 이미 신형을 그 반탄력에 싣고서 그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찰나간에 벌어진 일이라 누구도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움마니반메훔……."

 그때 긴 진언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팡팡파파팡-

 폭죽을 터뜨리는 듯한 굉음이 잇달아 터지면서 그가 튕겨져 나와 몸을 뒤집으면서 땅 위에 내려섰다.

 "서역 천룡사에 십대존자가 있어 세상을 오시한다고 하더니 거짓이 아니었군……."

 땅 위에 내려선 그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중얼거렸다.

 금포(錦袍)를 입은 그는 은은한 금광이 번뜩이는 구량관을 썼다. 마른 체격이지만 가슴에 새겨진 두 마리의 용은 그를 떠받치는 듯했고, 눈빛은 전광과도 같이 어둠 속에서 강렬했다. 기도는 당당하며, 나이는 사오십 대 정도나 될까? 길게 늘어진 검은 수염이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십대존자와 부딪치고 퇴로를 차단당해 내려선 그이지만 어디에서도 낭패의 빛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미 십대존자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오만한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보고 있을 따름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상대의 기도가 범상치 않음을 깨달은 서역법왕이 물었다.

 금포인은 그 말에 답하지 않고 수중에 든 봉신지약을 쳐다보았다.

 오금빛이 어린 용의 형상. 봉신지약이란 이름이 붙지 않았다면 묘한 생김의 비녀처럼 보일 그 열쇠는 정말로 그의 손에 놓여 있었다.

 "좋아, 좋아! 정말로 세상에 나타났군! 그래…… 으핫하하하하……."

 그가 광소를 터뜨렸다.

 "누구냐고 물었다."

 서역법왕이 딱딱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제서야 금포인은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태산을 보고도 알지 못한다면 자신의 안목이 떨어짐을 탓해야 할 것. 궁금하면 스스로 알아보는 것이 어떠한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실로 광망(狂妄)하기 이를 데 없다.

 "감히…… 그런……."

 서역법왕의 눈빛이 싸늘히 빛난다.

 십대존자가 그의 손짓에 따라 서서히 거리를 좁혀왔다.

 "당신의 손에 든 것은 본불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말고 내놓는다면 그냥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

 "하하하…… 말은 고맙지만 난 누구보다 이놈을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안다고?"

 "물론이지. 이놈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본왕이 왜 여기까지 왔을까?"

 그때였다.

 "그는 남해용왕이오……."

 신음에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남해?!"

 서역법왕의 눈빛에 놀람이 떠올랐다.

 남해용왕의 나이는 이미 고희를 넘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저렇듯 젊다니, 그것만으로도 그의 무공이 어떤지를 알고도 남음이 있었기에 서역법왕은 긴장하는 것이다.

 말을 한 사람은 한효월이었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고서 향적사의 담장에 의지하여 일어나고 있는데, 입가에서는 선혈이 한줄기 흘러내려 이미 간단치 않은 내상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그를 보고 남해용왕은 뜻밖인 듯 멈칫하더니 껄껄 웃었다.

 "세상이 한효월을 일러 기남자(奇男子)라고 하더니 과연이로구나! 그 상태에서 나의 광도내경(狂濤內勁)을 맞고서도 살아 있다니……."

 "세상이 당신을 일러 위군자(僞君子)라 한다더니 맞는 것 같군요. 나는 당신이 이미 거기 숨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당신의 신분으로 암습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거늘……."

 미간을 찡그린 한효월.

 그가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질책하자 남해용왕은 멈칫하다가 껄껄 웃었다.

 "입도 매섭군! 세상의 일을 어찌 너와 같은 후생소배가 다 짐작할 수 있겠는가? 이 봉신지약에 걸린 사안은 너무도 중차대하니 무슨 말을 들어도 다 받아들일 수 있지."

 "당신은 어떻게 여기 온 것이오?"

 서역법왕이 물었다.

 "다 방도가 있지. 본왕이 중원으로 들어오면서 아무런 힘이나 단서도 달지 않고서 무작정 들어왔겠는가?"

 "좋아, 좋아……."

 문득 서역법왕은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도 십왕의 하나라면 십성(十聖)의 후예일 테니 자격이 있지! 하지만 정말 자격이 있는지는 목숨으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말과 함께 십대존자가 일제히 남해용왕을 덮쳐 갔다.

 좀 전에 한효월을 공격했던 바로 그 십방참마오행진(十方斬魔五行陣)이었다.

 "서역의 괴공(怪功)이 세상을 놀라게 한다고 한들, 어찌 감히 명월의 앞에서 반딧불이 잘난 척하려는 것인가!"

 남해용왕은 껄껄 웃으면서 다시 소매를 쓸어냈다.

 그의 무공은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온 사람답게 모두가 바다와 싸우면서 일구어낸 것이었다. 전래해 오던 무공을 넘어서는 깨달음을 얻었기에 그는 세상을 오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식으로 십대존자와 부딪쳐 보자 그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괴이한 진세에 휘말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서역법왕마저도 거기에 가세하니 그는 금방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대저 진세에는 반드시 법칙이 있어서 더해도 안 되고 덜해도 안 되는 법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괴이하게도 서역법왕이 가세하자 진세의 위력은 단숨에 배가되는 느낌이었다.

 "십왕의 이름을 가진 자가 합공이라니!"

 남해용왕이 노해 부르짖었다.

 "움마니반메훔∼!"

 하지만 들려온 것은 육자진언뿐이다.

 서역법왕의 진언은 단순한 진언이 아닌 듯 그 말과 함께 진세가 변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가공할 경기가 회오리바람처럼 일면서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마치 용권풍(龍捲風)을 보는 듯한 그 경기의 소용돌이는 진세를 중심으로 점점 조여갔고 그 회오리바람에 휘말린 것은 마치 거짓말처럼 모래 알로 으스러졌다.

 "모두 나서거라!"

 다급해진 남해용왕이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일단의 무사들이 바람처럼 여기저기에서 날아들었다.

 남해용왕도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대격전이 벌어졌다.

 콰쾅! 콰콰콰…….

 그 혼란의 와중에 무명노승은 시선을 돌려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안색의 한효월도 등을 담장에 기댄 채로 그를 보고 있었다.

 "괜찮으시오?"

 "아직은 견딜 만합니다."

 한효월이 답했다.

 하지만 가슴을 움켜쥔, 창백한 얼굴의 그 모습은 누가 봐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더 있어봐야 좋은 일은 없을 것이오."

 "대사께서는?"

 "노납은…… 노납은 이곳에서 상황을 지켜봐야겠소……."

 "봉신지약에 생각이 있으십니까?"

 쓴웃음이 무명노승의 얼굴에 번졌다.

 "노납의 세수가 이미 구십이오. 앞으로 얼마를 더 산들, 또 기보를 손에 넣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소? 설사 백 년을 더 산다 하더라도 결국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거늘…… 신외지물에 욕심을 내어 무엇 하겠소이까?"

 "그렇다면 여기 계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저와 같이 이곳을 떠나시지요."

 "그건……."

 무명노승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바꾸었다.

 "먼저 떠나도록 하시오. 노납도 곧 뒤를 따르리다."

 "꼭 부탁드립니다. 반드시 여쭤볼 일이 있습니다."

 노승은 잠시 한효월을 쳐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알겠소이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럼."

 한효월은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장내의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업보로고, 업보야!"

 경천동지의 대결을 보면서 연신 장탄식을 터뜨리는 무명노승만이 남아 그의 떠남을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다.

*   *   *

 어둠은 조금도 흔들림없이 향적사를 덮고 있었다.

 하늘에는 어스름한 달빛이 흩어지는 구름 사이로 바람에 흔들리지만 금방이라도 빗줄기가 다시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쏴아, 쏴아아…….

 불어오는 바람에 못 이겨 나뭇잎들이 담고 있던 빗방울을 후두둑 뿌려낸다.

 한효월은 창백한 얼굴로 향적사를 나서고 있다.

 "사숙!"

 어둠 속에서 좌백이 나서 그를 맞았다.

 "왜 아직 가지 않았느냐?"

 "사숙이 나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상처를 입으셨습니까?"

 "괜찮아. 어서 가자."

 한효월이 서둘자 좌백은 그의 곁으로 붙으면서 낮게 말했다.

 "상황이 조금 심상치 않습니다."

 "……."

 한효월이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좌백이 말을 이었다.

 "명백히 드러나지는 않는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그래서 정탐을 하러 수하를 보냈는데 돌아오질 않습니다. 벌써 두 명이나…… 사숙이 오실 때를 기다리느라고 제가 직접 가보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앞쪽으로 가서 알아볼 테니 사숙께서는 뒤를 따라오십시오."

 "아니."

 한효월은 머리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같이 가자. 한바탕 악전(惡戰)을 각오해야 할 것이니 세력이 분산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악전이라니요?"

 좌백이 멀뚱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오늘의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 보면, 오늘 이 향적사는 역시 누군가가 만들어낸 함정일 가능성이 높다."

 "함정?"

 "어쩌면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었던 것인지도 모르지……."

 한효월은 길게 한숨을 내쉬곤 물었다.

 "성아는?"

 "저 여기 있어요."

 그들의 앞쪽에서 유성이 폴짝 뛰어나왔다.

 거의 기식이 엄엄하던 것과는 전혀 달리 생생했다. 얼굴은 조금 창백했지만 반쯤 죽어가던 모습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넌……."

 "그놈의 늙은이가 너무 강해서…… 그냥 죽은 척하고 있었죠. 일어나 봤자 한 대 더 얻어맞을 거 같아서요. 대신 틈을 봐서 한 방 먹여주려고 했었는데, 쩝!"

 안타깝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는 유성을 보며 한효월은 쓰게 웃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정색을 하고 낮게 물었다.

 "준비는?"

 "거의 다 되었을 겁니다."

 좌백이 대답했다.

 "가지."

 한효월의 말에 그들 일행은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향적사에서 채 십여 장을 벗어나기 전이었다.

 좌백이 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에 쓰러진 시체를 보았기 때문이다.

 좌백의 수하였다.

 "만지지 마라."

 한효월이 그를 제지했다.

 "중독되어 죽었다……."

 한쪽 무릎을 굽힌 채로 그를 살펴본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중독?"

 "모두 조심해. 독기가 아직 없어지지 않은 듯하다."

 한효월의 말에 좌백과 유성은 숨을 멈추었다.

 한효월은 서너 걸음 앞 땅바닥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떨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미 명재경각이라 가늘게 발만 떨고 있을 뿐,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형상은 앞으로 갈수록 더 심해져서 죽어 있는 토끼까지 보였다. 여우도 있고 아직 죽지 못한 뱀까지 꿈틀거리다가 천천히 늘어지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마치 죽음의 사자가 숲 속을 온통 휩쓸고 지나간 것만 같았다.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숲의 나무들까지도 죽어가고 있는 듯 보였다.

 "대체 이게……."

 "호흡을 조심해라. 독분(毒粉)이다."

 "독분이요?"

 유성이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 몇 군데를 조사한 한효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독분을 나뭇잎에다 뿌려두었구나. 바람에 날려가게…… 다행히 비가 오는 바람에 씻겨 내려가 제 위력을 발휘하긴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런 위력을 발휘한 것을 보면 함정을 설치한 자가 많은 생각을 한 듯하다. 가자!"

 한효월이 앞장섰다.

 숲은 그리 깊지 않았다.

 향적사 일대는 야산인데다가 앞쪽으로는 동정호를 보고 있었고 주변 또한 평야 지대나 구릉 지대였기에 태고의 삼림이 펼쳐져 있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팅팅!

 갑자기 앞서 가고 있던 한효월이 소매를 펴 저었다.

 뭔가가 튕겨져 나감을 보고 좌백이 좌우를 살폈다.

 "암기다. 암습을 조심해."

 한효월은 말과 함께 앞으로 덮쳐 갔다.

 "큭!"

 수풀 사이에 숨어 있던 자가 쓰러졌다.

 그것을 필두로 나무 사이, 바위 사이는 물론 땅거죽 속에서까지 매복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과 한효월과의 차이는 너무 컸다.

 비록 그들이 발동시킨 암기가 무섭다고는 할지라도 그들의 힘으로는 한효월의 앞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수준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애꿎은 수하들만 희생시키고 정작 본인은 나설 용기가 없나?"

 한효월이 우뚝 선 채로 말했다.

 "하하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숲의 그늘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한효월은 그가 천추성주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역시……."

 그를 본 한효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에서 본 이후 처음인가? 행색이 어째 말이 아니군?"

 천추성주의 말에 한효월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교주는 어디 있나?"

 "하하…… 너 따위 후생소배가 감히 교주님을 찾다니…… 본 성주가 그것을 말해 줄 것 같으냐?"

 "교주가 나를 만나보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그게 아니라면 왜 여기에다 함정을 치고 나를 기다린 것이지?"

 "그……."

 천추성주는 한순간 멈칫거렸다.

 "어차피 너로서는 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교주를 데려오지 못하겠다면 네가 굳이 살아 있을 필요는 없겠지? 개를 잡으면 주인은 당연히 나올 테니……."

 말과 함께 한효월이 천추성주를 덮쳐 갔다.

 그가 이처럼 대뜸 자신을 덮쳐 올 것임을 미처 생각지 못한 천추성주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감히!"

 그는 노성을 터뜨렸다.

 그것과 함께 그의 손에서는 검광이 뻗어 나와 한효월을 엄습했다. 신속무비한 쾌검이었다.

 쨍! 쨍그렁…….

 날카로운 음향이 터져 나왔다.

 "으윽……."

 나직한 신음과 함께 천추성주가 급급히 뒤로 후퇴했다.

 놀랍게도 한효월의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장검은 반쯤 부러졌다. 어깨에서도 핏자국이 번지고 있었다.

 일거수로 그를 패퇴시킨 한효월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격하여 그의 목을 취하려고 했다.

 쉭! 쉭쉭-

 그런 그를 향해 날아드는 암기.

 어느새 십여 명이 천추성주의 앞을 가로막았다.

 "명월이 왜 반딧불과 밝기가 틀리는지 모르는군!"

 한효월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와중에도 그의 진격 속도는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비명과 함께 두어 명의 적이 쓰러졌다.

 그의 뒤에는 좌백과 유성이 바짝 따랐다.

 좌백의 손에서 발휘되는 암기 또한 만만히 볼 것은 아니었다. 적의 입장에서 보면 호랑이를 피하면 여우가 달려드는 격이었다.

 갑자기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앞을 가로막던 자들이 모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희생으로 천추성주는 한효월의 수중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천추성주로서는 혼비백산할 일이었다. 그는 결코 약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한효월에게 그처럼 어이없이 당할 줄이야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 것인가.

 "윽……."

 그들이 사라지자 한효월이 문득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노한 호랑이처럼 설치던 한효월이 가슴을 부여잡자 좌백은 대경실색하여 그를 부축했다.

 "사숙?"

 "괜찮다. 내색하지 말고 빨리 이곳을 벗어나자!"

 좌백은 명민한 사람이었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유성에게 눈짓을 했다.

 유성은 아무 말도 없이 그들 둘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기척도 없이 매복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발동할 것이며 어떻게 싸울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매복이 간단치 않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

 어느 순간인가 고요가 숲을 덮었다.

 그 고요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아보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검은 옷. 어둠보다 더 짙은 장포를 걸친 괴인들이 한효월과 좌백이 가고 있는 길에 석상처럼 우뚝 서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령루……."

 그들을 본 한효월이 신음을 흘렸다.

 좌백의 얼굴도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저들의 위력이 어떤지는 이미 화산에서 뼈저리게 경험을 한 다음인 까닭이다.

 얼핏 둘러보아도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들의 숫자는 한둘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만 다섯이 넘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암기로는 처리할 수가 없다."

 "암기가 안 되면 다른 방법이라도 써야지요."

 "정면 돌파보다는……!"

 갑자기 한효월이 입을 다물었다.

 "독이다! 섭생루도 같이 왔나 보다. 가자!"

 말과 함께 좌백의 어깨에 한쪽 팔을 올리고 있던 한효월이 갑자기 맹호처럼 앞으로 뛰쳐나갔다.

 약속이나 한 듯이 그 뒤를 좌백과 유성이 따랐다.

 한효월이 움직이자 흑포괴인들도 같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보다 한효월의 움직임이 훨씬 더 빨랐다.

 번쩍, 하는 순간에 한효월은 이미 그들의 앞에 당도하고 있었고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흑포괴인 둘에게 양손을 나누어 쳐내고 있었다.

 쇄액! 쇄애애액!

 귀청을 찢는 파공음과 동시에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한효월의 양손이 활짝, 펼쳐짐과 동시에 흑포괴인 둘이 허깨비처럼 튕겨져 날아갔다.

 둘이 없어지자 길이 열렸다.

 그 길로 좌백과 유성이 달렸다.

 한효월 또한 몸을 날려 그 뒤를 따랐다.

 "가히 만부막적(萬夫莫敵)의 위세로군…… 정말 믿기지 않는……."

 한 사람이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신음을 흘렸다.

 그의 가슴에는 바로 조금 전에 한효월에게서 입은 상처에서 흐른 피가 말라붙어 있다.

 "대체 이것이 무슨 무공이기에 아무것도 당적(當敵)이 불가능하단 말이지?"

 천추성주는 격한 고통이 아직 남은 어깨를 어루만졌다.

 단 한 수에 패배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패했다.

 "저런 지공(指功)은 들어본 적도 없다……."

 그는 머리를 저었다.

 거대한 불칼로 양초를 베는 것 같은 위력이었다. 그 앞에 선 것은 모두 활활 타오르는 불칼 앞에 선 양초와 같이 녹아내렸고 거꾸러졌다.

 문득 옆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미처 준비가 완성되지 않았는데…… 이러다 놈을 놓치는 게 아니오?"

 앞쪽에 복면인 하나가 초조한 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럴 리는 없소. 어차피 곤룡복마대진세(困龍伏魔大陣勢)는 이 일대를 모두 덮었으니, 들어오는 자는 저항을 받지 않겠지만 나가려면 격렬한 진세의 저항을 뚫어야만 할 것이오. 저항이 이는 곳으로는 본 교의 정예가 집중될 것이니 누구도 살아남을 수는 없을 거요."

 "하긴 교주께서 직접 지휘하신 일이니……."

 그 복면인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렵구료. 교주님의 신산(神算)은 아직까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는데 왜 한효월이 혼자 그 자리를 떠나온 것인지? 예상대로면 그는 봉신지약을 지키기 위해서 향적사에서 생사결을 벌이고 있어야 할 텐데 말이오. 그랬다면 우리의 곤룡복마대진은 완벽하게 완성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놈이 뭔가 눈치를 챈 것인지도 모르지."

 천추성주는 다시 말했다.

 "그렇다고 대국에 차질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오. 교주님께 상황을 보고하고 유시를 내려주시도록 청해주시오."

 "알겠소."

 말과 함께 복면인은 사라졌다.

 그때 앞쪽에서 낮은 피리 소리가 들리더니 급속히 높아졌다.

 천추성주는 굳은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더니 명했다.

 "어떤 자가 오길래 이렇게 빨리 접근할 수가 있지? 앞으로 이동한다. 강령루에서 앞을 막도록 신호를 보내라."

 어깨를 움켜쥔 채로 천추성주가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으로는 서너 명의 고수가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도 천추성주를 따라 앞으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당분간은 그들이 이 거대한 진세의 축이기 때문에 소홀할 수가 없는 것이다.

 "헉헉……."

 좌백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유성은 그 옆에서 한효월의 주위를 경계한다.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비릿한 내음이 쉬지를 않는다. 계속해서 피가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성은 잠시라도 쉴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가 보호하고 있는 한효월에게 큰일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맹호처럼 용감하던 한효월은 강령루의 흑포괴인 둘을 처리하고는 급격히 그 힘을 잃었다. 선착의 효(效)를 지키지 못했다면 그들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숲은 거의 벗어났지만 바로 저 뒤에서 흑포괴인들이 쫓아오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호각 소리가 호응을 하더니 좌우에서도 좁혀오고 있는 기척을 느낄 수가 있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될 텐데…….'

 좌백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 바램은 너무 어려워 보였다.

 어둠보다 더 짙은 먹물 같은 옷을 입은 그들이 일제히 덮쳐 오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앞쪽에서 잇달아 비명과 호통, 굉음이 들려오더니 무서운 기세로 한 사람이 어둠을 뚫고 앞으로 내달아왔다.

 "멈춰라!"

 좌백이 그를 향해 양손을 쳐냈다.

 "멈춰. 적이 아니다!"

 그를 본 한효월이 나직이 소리쳤다.

 하나 좌백이 쏘아낸 암기는 다시 되돌릴 수가 없었다. 암기라는 것이 특수한 몇몇을 제외하다면 쏘고 난 다음에 다시 물릴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타난 사람은 암기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한 손을 흔드는 사이에 좌백이 쏟아낸 암기를 무력화시키고는 그들 앞에 섰다. 부릅뜬 눈에서는 신광이 폭출하여 마치 어둠 속에서 등잔을 켜둔 듯 보였다.

 "막 선배……."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정말이었다.

 나타난 사람은 갈의를 걸친, 바로 요동권왕 막풍이었다.

 그는 이미 한바탕 악전을 치른 듯 옷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낭자하다. 그러나 신색은 평정하여 그 피가 자신의 것이 아님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누가 널 그렇게 만들었느냐?"

 막풍은 한효월의 모습을 보고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제천교에서 일대에 매복을 깔아두었습니다."

 "그렇다고 네 능력으로 그런 모양이 되었단 말이냐?"

 "……."

 한효월은 쓰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쩔 수 없어요! 서역법왕에다가 그 사제, 남해용왕까지 천하십왕이 줄줄이 몰려들고…… 뿐만 아니라 제천교까지 끼어들어 사방에서 암습을 해대는데 우리 공자가 아니셨다면 이 정도가 아니라 이미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옆에서 유성이 편을 들었다.

 유성과 친하게 지낸 적이 있던 막풍은 피식, 웃더니 정색을 했다.

 "그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조금 떨어져서 버려진 절이 있습니다. 향적사라고…… 가시렵니까?"

 "가야지!"

 막풍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마십시오. 향적사는 함정인 듯싶습니다. 어쩌면 제천교에서 천하십왕을 노리고 만들어놓은 덫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동권왕 막풍의 안색은 단호했다.

 "어떤 덫이라도…… 가봐야 한다."

 "봉신지약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쿵!

 한효월과 좌백, 유성 등 세 사람은 요동권왕 막풍의 전신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요동권왕 막풍의 수양으로 그처럼 격렬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그 말이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었다.

 "봉신지약이라니? 그게 정말 있더냐?"

 그는 한효월의 멱살을 움켜잡고 다그쳐 물었다.

 눈에서 신광이 불길처럼 일고 있었다.

 "제가 향적사 내에서 찾아냈습니다."

 "저, 정말 있었군! 어, 어디 보자! 어디 있느냐?"

 요동권왕 막풍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지금은 없습니다."

 "어, 없다니?"

 "서역법왕이 달라고 해서 주려는데, 남해용왕이 가로채 갔습니다."

 요동권왕 막풍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그런……!"

 그는 한차례 발을 구르더니 재우쳐 물었다.

 "놈들이 아직 그 절에 있느냐?"

 "그럴 겁니다. 가지 마십시오. 저들의 준비는 간단치 않을 테니 정말 흉다길소(凶多吉少)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단 이곳을 저희와 같이 물러난 후……."

 그때였다.

 용음(龍吟)과도 같은 긴 여운을 가진 장소성이 들리더니 어둠 저 멀리에서 일진 싸움 소리가 일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일순간이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한효월 일행은 어둠을 가르며 나는 섬광 한줄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이 향하고 있는 쪽은 바로 향적사였다.

 "어검비행(御劒秘行)!"

 그것을 본 한효월이 신음을 흘렸다.

 "고려검왕도 왔군……."

 중얼거린 요동권왕 막풍은 땅을 박차고 신형을 떠올렸다.

 "막 선배!"

 "가거라! 봉신에 관한 것은 너무도 중대하니, 내 목숨을 버릴지라도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너라도 먼저 떠나거라! 과연 어떤 놈들이 천하십왕을 상대로 도박을 하는지 낯짝을 봐야만 하겠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한 가닥 질풍만이 남았다.

 "후우……."

 한효월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대체 봉신(封神)이 뭐지?

 좌백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의문을 삼켰다.

 그것은 유성도 마찬가지였지만 한효월조차 그 내용을 모르고 있음을 알기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가자."

 한효월의 말에 좌백이 앞장섰다.

 아니, 앞장을 서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한효월이 좌백의 손을 잡았다.

 "……?"

 "……."

 한효월은 굳은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미 숲을 뚫고 나와 백여 장 밖으로는 동정호가 보이고 시선을 돌리면 산등성이 보이는 갈대가 성글게 자란 곳까지 나와 있었다. 주변은 황량하고 척박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만이 드리워 있을 뿐.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한 사람이 거기 있었다.

 키는 오 척을 조금 넘는다.

 맨발이다.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았고 겨우 걸친 그 옷도 소매가 길고 몸에 제대로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반들반들한 대머리가 아니었다면 그를 발견하기가 그리 쉬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왜소한 모습이다. 그러나 맨발로 땅을 딛고 선 그 마의노인의 눈은 괴이할 정도로 투명했다. 녹색이 은은한 그 눈은 너무 맑아서 오히려 아무런 색도 느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특이한 것은 그의 전신 여기저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주머니들.

 '저 사람은…….'

 그를 발견한 한효월의 전신에 긴장이 흘렀다.

 좌백을 제지한 그는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그것을 보고 있던 마의노인이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웃는 것 같기도 했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기 힘들었다.

 "한, 효, 월?"

 딱딱 끊어지는 음성으로 그가 물었다.

 "당신은?"

 한효월이 되묻자 마의노인은 대답없이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다 해보라는 것처럼 보였다. 괴이하게도 죽기 전에 그 말 정도는 들어주겠다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되게 기분 나쁜 늙은이로군……."

 유성이 투덜거렸다.

 "사정을!"

 한효월이 소리쳤다.

 동시에 그가 한 걸음 나서면서 손을 쳐들자 한효월과 마의노인 사이에서 맹렬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대머리의 마의노인.

 그의 눈에 묘한 빛이 흘러갔다.

 츠츠츠츠…….

 한효월의 앞 2장 거리에서 그를 중심으로 반월형으로 초목들이 말라비틀어지면서 급격한 조락의 모습을 보인다. 죽음이 삽시간에 주위를 덮어버린 듯한 모습으로 모든 것이 죽어갔다.

 그를 지켜보는 한효월의 얼굴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무형지독…… 당신이 묘강독왕입니까?"

 그 말에 좌백과 유성은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방금 한효월이 손을 쓰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중독이 되어 죽어갔을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소문, 믿지 않았는데…… 명불허전(名不虛傳). 본왕, 손을 써도 부끄럽지 않다. 자격이 있군."

 조금 어색한 음성으로 대머리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은 자신의 신분을 시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처럼 소문이 무성하던 묘강독왕이 드디어 한효월의 앞에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설마 하니 묘강독왕이 자신을 상대하러 직접 나섰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한효월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세간에 듣기로 묘강의 지존인 독왕은 묘강의 전설과 같은 존재로서 누구도 그를 이용할 수 없다고 하던데, 당신의 신분으로 제천교의 주구가 되다니…… 정말 내가 목도하지 않았다면 믿기 힘든 일이로군요."

 한효월이 질책하듯 말하자 묘강독왕은 고개를 저었다.

 "본왕이 제천교를 돕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 누가 감히 본왕 부릴 수 있나?"

 "당신도 봉신지약 때문에 제천교를 돕습니까?"

 "봉신지약……."

 침잠하던 묘강독왕의 눈에서 빛이 일었다.

 "그렇다고도 할 수가 있지. 십성의 후예, 누가 그것을 탐하지 않을 것인가."

 "십성은 누굽니까?"

 "본왕은 너를 죽이러 온 사람. 네 의문을 풀어주는 사람 아니다……."

 묘강독왕이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은 무림 선배로서 반항할 힘이 없는 후배를 공격할 작정입니까?"

 "힘이 없으면 죽는 것은 자연의 법칙. 스스로의 능력이 모자라 죽음에 무슨 한이 있나."

 한효월의 질책, 하지만 묘강독왕은 태연히 말하면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순간.

 스스스스-

 기이한 음향이 일면서 그의 앞쪽으로 수풀들이 급격하게 시들기 시작했다.

 '독기!'

 그것을 보자 좌백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천하제일의 독공고수!

 그 이름은 과연 헛된 것이 아니었다.

 숨결만으로도 수천 마리의 소 떼를 몰살시킬 수 있다는 공포의 존재. 그가 다가오고 있으니 어찌 가슴이 떨리지 않을 것인가. 감히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언제 중독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극도의 긴장이 엄습한다.

 저들 제천교의 고수들도 중독의 공포를 벗어날 수 없는지, 독왕이 나타난 이후로는 멀리서 어른거릴 뿐,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한마디만 해도 되겠습니까?"

 한효월이 손을 들었다.

 그의 얼굴은 조금도 변함없이 침착했다.

 "……?"

 한효월의 얼굴을 지켜본 독왕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래 봤자 한 걸음을 내딛은 채로 한효월을 보고 있을 따름이니 언제라도 발동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더구나 그와 한효월과의 거리는 채 4장이 모자란다.

 그들과 같은 절대고수에게 있어 지척과도 같은 거리였다.

 "보다시피 난 부상을 당했습니다. 아마 당신과 싸우기 쉽지 않겠지요. 그러나 나에게는 한 가지 술법(術法)이 있어 언제라도 당신의 눈앞에서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어떻게 하든 나를 죽일 수 없습니다. 그래도 굳이 나와 싸워야겠습니까?"

 "……."

 잠시 한효월을 바라보던 독왕의 얼굴에 묘한 꿈틀거림이 일었다. 웃음이라 이름할 움직임이었다. 그의 얼굴은 주름이 너무 많아서 마치 고목과도 같아 공포스러웠다.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다?"

 "그렇습니다."

 한효월은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세 걸음만 걸으면 언제라도 이곳에서 사라질 수 있으니, 당신은 나를 죽이려고 해도 결코 죽일 수 없을 겁니다."

 "시간을 끌어보자?"

 독왕이 묘한 웃음을 흘렸다.

 "시간을 끄는지 아닌지는 내가 세 걸음을 걷는 걸 보면 알게 되겠지요."

 "좋다. 어디 한번 해보지?"

 독왕도 흥미가 동한 듯했다.

 한효월이 과연 자신의 눈앞에서 세 걸음 만에 사라질 수 있는지를 지켜보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세 걸음이라야 뻔한 것이니 제아무리 신묘한 무학이라 할지라도 그걸로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더구나 무학이 아니라 술법이라?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하는 독공만이 아니라 절세의 무공까지 아울러 지닌 독왕이니 흥미를 느끼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일 터이다.

 한효월은 그를 보았다.

 "내가 만약 당신의 앞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무슨…… 소리냐?"

 "내가 당신의 앞에서 사라지고, 당신이 나를 찾지 못한다면…… 그럼 당신은 나를 더 이상 쫓지 않기로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왜 그래야 하지?"

 "난 당신이 보듯 정상이 아니라서…… 이 소신대법(消身大法)을 전개하고 나면 남과 동수할 힘이 사라져 버릴 겁니다. 며칠 후에나 겨우 깨어날 수 있을지 모르지요. 그런 나를 당신이 쫓아온다면 나는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 자리에서 당신과 맞부딪치는 것이 나을 테니 하는 말입니다."

 "……."

 잠시 한효월을 지켜보던 독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생각이 많았지만 과연 한효월이 세 걸음 만에 자신의 앞에서 사라질 수 있는지 궁금해서 승낙을 하기로 한 듯했다. 어차피 그럴 수는 없을 테니까…… 라는 자신도 있었으리라.

 독왕이 승낙하자 한효월은 몸을 굽혀 바닥에서 한 움큼의 풀을 뽑았다.

 그 풀을 뿌리면서 한효월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 걸음을 따라 풀잎이 바람에 하늘하늘 흩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세 걸음……. 걸음을 옮기면서 그는 나직이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좌백과 유성은 숨을 죽이고 바라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음?"

 문득 독왕이 눈을 크게 떴다.

 세 걸음째 옮기는 한효월에게서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세 걸음을 막 뗀 그 순간에 주변 경물이 흔들리는 듯하더니 감쪽같이 한효월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정말 소신(消身)이란 말 그대로 몸이 사라져 버렸다.

 '이럴 수가?'

 독왕은 눈을 부릅뜨고서 몸을 날렸다.

 한 걸음을 내딛자 그의 신형은 단숨에 십여 장을 갈랐다.

 한효월이 방금 있던 곳을 지나친 것은 물론, 좌백과 유성이 있던 자리까지 모두 지나쳤다.

 그런데, 그런데 없었다.

 한효월은커녕, 유성과 좌백의 모습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마, 말도 안 돼! 이런 사술(邪術)이……."

 독왕은 묘강어로 뭔가를 소리치더니 사방으로 손을 내저었다.

 주변 수풀들이 미친 듯 비비 꼬이면서 녹아들었다.

 가공할 독기였다.

 그래도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금까지 있었던 한효월과 좌백, 유성의 모습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와아악!"

 괴성과 함께 독왕이 양손을 휘둘렀다.

 쿠콰콰콰…….

 가공할 경력이 일며 땅거죽이 뒤집어지고 독기가 주변을 휩쓸어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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