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四首 무명노승(無名老僧) (76/113)

第四首  무명노승(無名老僧)

-노승 나타나다.

세월이 흘러도 은원(恩怨)은 변함없다.

 서역법왕은 한효월이 대뜸 달려들자 미간을 찡그렸다.

 한효월이 자신에게로 내민 그 손, 조금 오므린 그 손에서 뻗어 나오는 지력이 얼마나 가공무비한 것인지를 이미 경험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저것이 무슨 무공인지 그로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결코 경시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는 슬쩍, 옆으로 한 걸음을 내딛으면서 일장을 쳐냈다.

 너무 평범한 느낌.

 그러나 그 한 동작에는 무궁한 현기(玄機)가 숨어 있었다.

 그와 같은 고수가 손을 쓰면 산을 밀어내고 바다를 뒤엎는[排山倒海]의 위세가 일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미풍도, 산들바람도 일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 한효월의 일장에 맞서갈 따름이다.

 한효월은 가슴이 섬뜩했다.

 도무지 상대의 허실을 짐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단 한 번 맞닥뜨렸을 뿐인데 상대는 이미 자신을 쉬운 상대로 보지 않고 전력을 다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자신을 우습게 보는 듯한 말과는 달리.

 하지만 이 상태에서 변초를 하면 기선을 잃을 수밖에 없다.

 쉬익!

 그의 신형이 더욱 빨라졌다.

 6, 7장에 이르렀던 두 사람의 거리가 반 장 거리로 가까워졌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거의 찰나간에 지나지 않았다.

 쉭!

 한효월의 손이 펴지면서 수인지력이 쳐 나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이 서역법왕의 얼굴에 번져 갔다.

 그 웃음보다 빠른 것은 그의 손이었다.

 내민 손바닥이 흔들린다 싶은 순간에 찬란한 금광이 그 손에서 쏟아졌다. 마치 금가루가 그 손에서 쏟아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카캉!

 날카로운 음향.

 한효월의 수인지력과 법왕의 금광수가 맞부딪치자 터져 나온 소리는 강철이 세차게 부딪치는 것보다 더 날카로웠다.

 순간 한효월이 빙글 돌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인지력을 쳐내면서 신형을 옆으로 뉘었다가 옳은 표현일 터이다. 그리고 그는 옆구리에 끼었던 유성을 땅바닥에다 굴려 버렸다. 그 서슬에 유성의 등에 메어 있던 장검을 그가 빼 든 것은 보기에 너무도 자연스러울 정도였다.

 한 수의 충돌, 그 충격은 그가 몸을 비틀면서 흘려 버렸다.

 처음부터 정면충돌하여 그를 이겨보기 위해서 그를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전력을 다해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하기 힘든 상대.

 그를 도와줄 사람은 없는데 적에게는 서너 명 이상이 모이면 그에게 위협을 줄 십대존자가 따르고 있다. 아니, 얼마나 더 많은 숫자가 있는지 모를 상태인데 서역법왕과 자웅을 결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길을 택했다.

 서역법왕은 수인지력과 맞부딪친 순간에 한효월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일단 좀 전처럼 지력을 연속으로 쏟아내지 않았을 뿐더러 그 위력도 훨씬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직감을 증명하듯이 한효월에게서 검광이 일어 그를 덮쳤다.

 "@#$%!"

 서역법왕은 뭔가를 소리치면서 뻗어낸 손을 휘둘렀다.

 금광을 뿜어내는 손이 배 이상 커지면서 주위를 휩쓸었다.

 콰아아아-

 흙먼지가 하늘을 가리며 일었다.

 땅! 따다다다- 따앙!

 고막을 치는 날카로운 음향.

 한효월이 쳐낸 검광과 금광수가 맞부딪치자 엄청난 불똥이 일며 한효월의 검끝이 부러져 나갔다.

 한 번이 아니었다.

 부딪침은 끝없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조금씩 검끝이 깨져 나갔다.

 밑동이 뚝, 부러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끝에서부터 조금씩 부서져 나가는 것은 실로 보기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검의 끝이 조금씩 부서져 나갈 때마다 굉음과 함께 주위로 퍼져 나가는 강풍은 실로 엄청나 태풍이 이는 것만 같았다.

 …….

 한효월은 천천히 몸을 세웠다.

 그 손에 들린 검은 거의 삼 분의 일만 남았다.

 얼굴도 조금쯤 창백해진 듯 보였다.

 그 앞에 선 서역법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서역에 밀종반선수(密宗般禪手)라는 절학이 있음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이 대수인(大手印)과 결합하여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군."

 한효월의 중얼거림에 서역법왕의 눈에 놀람의 빛이 드러났다.

 "견문이 넓군……."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언뜻 보기에 그것은 웃음처럼 보이지만 거기에 깃든 것은 살기.

 "그 나이에 그런 능력을 가진 것이 아깝다만…… 본불의 제자들을 무차별 도살하였으니 어찌 두고 볼 것인가!"

 그가 손을 휘둘러 한효월을 쳐왔다.

 금광이 크게 일며, 전과는 달리 무수한 손 그림자가 하늘을 가리면서 일어났다. 수십, 수백 개의 손 그림자가 햇무리처럼 일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미 말하지 않았소? 나는 당신의 제자들을 해한 적이 없다고!"

 "그걸 변명이라고 한단 말인가? 불광대수인(佛光大手印)까지 받아낼 수 있는지 보자!"

 모습이 사라진 서역법왕의 음성이 밤하늘을 때리듯 울러 퍼졌다.

 쿠쿠쿠…….

 거대한 경기가 한효월을 짓눌러왔다.

 '정말 강하군!'

 한효월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피할 수도 없는 상태. 유성이 뒤에 있으니 그가 움직인다면 유성은 저 가공할 경기에 피떡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방금 그는 벽뢰일검(劈雷一劒)을 시전했었다.

 이 일검은 그가 오래전에 사부에게서 물려받아 익히지 않았던 것이었고, 공력이 모자라 시전하지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감천형의 뇌정도 또한 거기에서 비롯되었었다. 그런 절세무공이니만큼 그는 그 일격으로 서역법왕을 물러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내심 생각했었다.

 그럼 그때 유성을 데리고 숲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너무 강해서 그의 벽뢰일검을 수장(手掌)으로 막아내고는 이제 이렇게 그를 몰아세우는 것이다.

 아니,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반드시 죽이겠다는 살기가 느껴졌다.

 한효월은 삼 분의 일만 남은 검을 비스듬히 내려그었다.

 다시 벽뢰일검을 시전하는 것이다.

 벽뢰일검은 직선이면서 사선을 긋는다.

 번개를 쪼갠다는 의미의 벽뢰는 무섭게 빠르다는 의미다. 그런 일검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가공할 빠르기가 필수다. 한효월이 그 벽뢰일검을 굳이 익히지 않았던 것도 그의 성정(性情)과 잘 맞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런 무서운 검식도 서역법왕은 하나하나 풀어서 막아냈다.

 그래서 좀 전처럼 그렇게 검이 토막났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효월이 또다시 벽뢰일검을 시전함은 서역법왕의 불광대수인을 깨뜨리겠다는 의미다.

 그 일검에 생사를 걸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서역법왕과 같은 고수가 어찌 그 의미를 모를 것인가?

 시작하자마자 이처럼 대뜸 생사를 걸고 대들 것을 서역법왕은 짐작치 못했다. 더구나 상대는 그가 아무렇게나 볼 하수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와 거의 비슷한 능력을 보이고 있는 고수인 것이다.

 유리한 상태에서 상대와 목숨을 내놓고 싸울 사람은 없다.

 그런 면에서는 서역법왕도 예외는 아닐 터였다.

 하지만 사태는 전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렀다.

 서역법왕이 움마니반메훔을 외치면서 오히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왔던 것이다. 공포스러운 금광수는 뚜렷한 형체를 이룬 채로 한효월의 벽뢰일검을 향해 정면으로 마주쳐 왔다.

 누구도 더 이상의 변화를 거부한다면 상황은 오직 하나다.

 맞부딪치는 것뿐.

 콰쾅!

 강력한 폭풍과 폭음이 터져 나왔다.

 한효월이 쥔 유성의 장검은 석 자 길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 자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한 자 길이의 검은 지금 반 장이나 되게 길어져 가공할 검광을 토해내고 있었다.

 마치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과도 같이 벼락 같은 위세를 가지고서 서역법왕에게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그것은 놀랍게도 천지를 가득 채운 서역법왕의 불광대수인을 뚫고서 그를 쳤다.

 어깨에서부터 시작하여 비스듬한 사선으로 허리에 이르는 선.

 서역법왕은 단숨에 두 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검이 그를 갈랐음에도 그는 두 조각이 나지 않았다.

 두 조각은커녕, 한효월의 손에 들렸던 검은 그를 잘라내는 대신에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으로 터져 버리고 말았다. 한효월의 검강지기로 이루어진 그 검조차 두 사람의 진공대결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 버린 것이다.

 그 순간에 서역법왕의 불광대수인은 한효월을 쳤다.

 "윽!"

 한효월이 쿵쿵쿵, 뒤로 물러났다.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얼굴.

 그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서역법왕을 바라보았다.

 그가 베었던 서역법왕의 상체.

 옷이 베어져 너울거린다. 하지만 금광이 은은한 서역법왕의 몸에서는 핏방울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금강신(金剛身)……."

 한효월이 신음을 흘렸다.

 금강불괴(金剛不壞)라는 말이 있다.

 불가에서 말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바로 금강(金剛)이다. 그 금강은 영원히 부서지지 않고 무엇으로도 해할 수 없다 하여 금강불괴라 한다. 금강불괴는 바로 그렇듯 그 무엇으로도 상해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사람을 별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단순히 검으로 그은 것도 아니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검강지기로 공격했음에도 서역법왕을 벨 수 없었다.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불광대수인까지 막아내다니, 정말 쉽지 않군, 쉽지 않아……."

 서역법왕이 감탄한 듯 말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쉬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한효월을 따라가면서 계속해서 불광대수인으로 한효월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광대수인은 단순히 신공장력(神功掌力)만은 아니다.

 일초삼식에 불과하지만 그 일초삼식은 서역법왕의 필생 무공정화가 깃들어 있어 무궁한 변화가 가능하여 일반 무공 백팔십초보다 더 복잡하고 현묘했다.

 쿠콰쾅!

 한효월이 땅을 박차고 날자 그가 있던 자리, 아니, 그가 있던 곳 뒤에 있던 담장과 아름드리 나무가 괴성을 지르면서 부서졌다.

 "지옥에 가서 참회하라! 움마니반메훔-!"

 서역법왕의 체구를 보면 거의 둥근 공과 같다.

 굴러다니지 않는다면 혼자서는 움직이기조차 힘들 것 같아 보이는 몸집이다. 그런 몸이니 교자를 타고 다니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움직이자 그 움직임은 믿기 힘들 정도로 신속무비했다.

 한효월은 그가 양손을 휘두르면서 계속 덮쳐 옴을 보고 침중히 소리쳤다.

 "정말 막무가내로군! 나는 라마들을 죽이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다고 죄가 사라질 것 같은가!"

 대답 대신 천지가 금광으로 가득 찼다.

 전신이 거대한 망치의 아래 들어가 짓눌리는 것만 같다. 기세만으로 이럴진대 정말로 타격을 받게 되면 어떨 것인가.

 쾅쾅쾅…….

 두 사람의 대결은 천지개벽과도 같았다.

 그 가공할 힘의 대결에서 한효월은 계속해서 뒤로 밀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온통 흩어져 날렸다.

 "정녕 생사를 결할 작정이라면……."

 한효월이 길게 숨을 들이켰다.

 그도 양손을 움켜잡아 앞으로 내밀었다.

 연환수인지를 전력을 다해 전개하려는 것이다.

 그는 지금껏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든 그와 싸우기보다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내면에는 무리를 하면 안 되는 그의 몸 상태가 감안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돌볼 것이 없었다.

 이대로 간다면 목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아미타불…… 손을 멈추시오."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과 함께 굳건한 힘 한줄기가 한효월의 옆으로부터 밀려왔다.

 그 힘은 거대한 파도처럼 도도히 밀려와 서역법왕의 불광대수인을 쳤다.

 쾅! 콰콰콰…….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막강한 회오리바람이 그 폭음과 함께 일어났다.

 한효월은 몸을 날려 튕겨지는 유성을 감쌌다. 이미 스스로를 돌보기 힘든 유성이 경풍에 휘말리니 어찌 견딜 것인가.

 "괜찮으냐?"

 "전 괜찮아요. 이 정도야……."

 유성이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망할! 이런 게 아니었는데 간만에 따라나서서 이렇게 짐이 되다니……. 유성은 내심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괜찮으신가?"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유성을 뒤로하고 고개를 든 한효월.

 그는 정말 뜻밖의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앞에는 노승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용문에서 보았던, 그가 찾아갔던 바로 그 사람. 운수(雲水)를 떠났다던 그 무명노승이 한효월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서 있을 뿐 아니라 그 위급한 순간에 나타나 그를 도와주기까지 했다.

 얼떨떨하여 그를 쳐다보던 한효월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진인(眞人)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더니, 소생은 진인을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군요……."

 그 말에 무명노승은 자애한 웃음을 머금었다.

 "별말씀을…… 사람의 모습이란 것은 있는 그대로인 걸 무에 그리 따질 것이 있겠소이까? 보이는 그대로 보고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이 피안이며 극락인 것을……."

 그때였다.

 "서, 설마……."

 불신에 가득 찬 음성이 옆에서 날아온다.

 서역법왕.

 그가 한효월 못지 않게 놀란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다. 아니, 더 놀란 표정,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무명노승이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그간 강녕하시었는가?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사제(師弟)의 그 폭급한 성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료."

 "마, 말도…… 당신은 죽었, 죽었었는데……."

 믿을 수 없다는 듯 서역법왕은 연신 머리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충격이 큰 것을 알아보기에 족했다.

 "그날 이후, 찰도극(刹圖克)은 죽었고 무명만이 남았네.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 지난 일이 무슨 문제가 되겠소?"

 "정말…… 정말이란……."

 그래도 믿기지 않는 듯 서역법왕이 신음을 흘렸다.

 "사제는 원하던 대로 교중의 지존이 되었으니 무엇이 부족하오? 원하던 모든 것이 그대의 손에 있거늘, 왜 만리타역까지 와서 이런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이오?"

 "……."

 서역법왕은 침중한 얼굴로 무명노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효월은 그들이 이처럼 서로 잘 알고 있을 줄은 상상 밖이었다. 더구나 무명노승이 서역법왕을 사제라고 부르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무명노승은 서역에서 왔다는 말일까? 아니, 어쩌면 더욱 큰 내밀(內密)한 것이 있을 수도 있을 듯했다.

 한효월의 의문은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십대존자들까지 놀란 눈으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음을 보면 그의 출현은 서역법왕 등에게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였다.

 "혀, 혈불(血佛)…… 찰도극라마……."

 "도,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었는데……."

 한효월은 서장로 중얼거리는 그들의 불신에 가득 찬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거기에 가득 찬 그 경악스러운 표정은 무슨 의미일까.

 "본불의 일에 간섭을 할 작정이오?"

 묵묵히 무명노승을 바라보고 있던 서역법왕은 머리를 저었다.

 "간섭이라니…… 불제자로서 살생이 잘못됨을 알려주려 할 뿐이었소. 아미타불……."

 "말도 안 되는! 저자는 본불의 제자들을 살해하고 물건을 탈취해 갔는데, 그걸 그냥 두고 보란 말이오?"

 "봉신지약을 말함이오?"

 그 말에 서역법왕의 전신에 경련이 달려갔다.

 "그걸 어떻게?"

 "후우우…… 사제는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단 말이오?"

 무명노승은 길게 탄식을 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본불은 당신의 말에 따를 수 없소! 지금은, 지금은…… 세월이 흘러 세상이 바뀌었소."

 미미한 웃음이 무명노승의 얼굴에 번져 갔다.

 "세월이 흘렀는데 탐욕은 그대로란 말이오? 탐욕까지 세월과 함께 흘려보냈으면 사제가 이처럼 만리타역까지 달려오지는 않았을 것이 아니오?"

 "하하…… 천하의 혈불(血佛)이 그런 말을 하다니……."

 차갑게 웃은 서역법왕은 눈을 부릅떴다.

 "왜 저자를 변호하나 했더니 이제 보니 한패였던 모양이군. 그래…… 하긴 그래야 다시 돌아올 수 있겠지?"

 "저런, 저런…… 노납은 다시 서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네, 사제."

 "사제라고 부르지 마시오!"

 "어떻게 부르든 달라질 건 없네. 저 소시주와 나는 일면식이 있긴 하나 이곳에서 우연히 만났을 뿐이니 오해는 마시게. 그리고 저 소시주는 라마들을 죽이지 않았네."

 "그걸 본불이 믿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무명노승이 미미하게 웃었다.

 "노납이 평생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사제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

 그 말에는 서역법왕도 입을 다물었다.

 "노납이 이곳에 온 것은 사흘 전쯤이네."

 "사흘?"

 서역법왕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렇네. 노납은 이곳에 머물면서 라마들이 온 것도 보았고 저 소시주가 온 것도 보았네. 그리고 그들이 죽는 것까지……."

 "그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무명노승은 머리를 저었다.

 "아니, 오해는 말게. 내가 잠시 바깥을 다녀오는 틈에 일어난 일이었다네. 내가 오니 라마들은 이미 죽어 있었지.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저 소시주가 오고 사제가 당도한 것이네."

 무명노승의 얼굴이 굳어졌다.

 "노납이 이해하기 힘든 것은, 라마들을 죽인 자들의 행동이네. 무엇 때문에 라마들을 죽이고서는 조용히 사라져 버린 것인지…… 죽은 라마들의 무공이나 능력은 간단한 것이 아닌데……."

 "……."

 잠시 침묵하던 서역법왕이 물었다.

 "당신은 왜 여기에 온 것이오?"

 "……."

 이번에는 무명노승이 침묵했다.

 그리고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봉신지약을 찾기 위해서였네."

 그 말에 한효월도 흠칫하여 그를 보았다.

 "이곳에 봉신지약이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난 사흘 간 향적사 내부를 뒤져 보던 중이었네. 하지만 라마들이 오면서 제약이 많아 찾지는 못……."

 "으하하하하……."

 서역법왕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런가? 말만 그렇지, 역시 생각이 있었더란 말이지?"

 "오해는 말게. 내가 봉신지약을 찾았던 이유는 그것을 없애 버리기 위함이었으니."

 "뭐라고?"

 그의 말이 전혀 뜻밖이었던지 서역법왕은 눈을 크게 떴다.

 "천하십왕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힘드네. 용화회(龍華會)의 전설이 세상에 드러난다면, 누가 그 힘을 얻게 된다면 세상은 피에 잠기게 될 거네. 그런 힘은 없어지는 게 낫지. 그게 바로 노납이 여기에 온 이유라네."

 "마, 말도……."

 어이없는 듯 서역법왕이 머리를 저었다.

 "왜 말이 안 되겠나? 세상은 운(運)과 명(命)에 따라 고요히 흘러가는 것이 순리라네. 몇 명의 절대자들이 만든 굴레로써 천하를 얽어매려는 것은 옳지 않으니, 차라리 그것이 세상에서 사라짐이 가장 좋지 않겠나? 용화회의 전설은, 봉신의 전설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옳네."

 "닥치시오!"

 서역법왕은 눈을 부릅떴다.

 "당신이 아니라, 누구라도 본불의 행로를 막을 순 없소! 본불은 이번에 중원으로 오면서 십대존자를 비롯하여 교중의 고수를 모두 대동하였으니 누구든지 본불을 막는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나무아미타불……."

 무명노승은 길게 불호를 외었다.

 "어찌할 테냐?"

 서역법왕은 한효월을 돌아보았다.

 묻는 의미야 뻔했다.

 한효월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품에 갈무리했던 목갑을 꺼냈다.

 갑자기 장내에 긴장이 감돌았다.

 목갑의 뚜껑이 떨어지는 소리가 어둠을 뚫고 울렸다.

 목갑마저 버린 한효월의 손에는 그 속에 들어 있었던 철갑이 들려 있었다. 봉신지약이라고 쓰인 바로 그 철갑이었다.

 그 철갑에 손을 가져가던 한효월은 눈을 들어 서역법왕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이겁니까?"

 "그렇다!"

 서역법왕은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만 물어보지요. 당신은 여기에 이것이 있음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본불이 그걸 왜 답해야 하나?"

 한효월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이 물건을 파괴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오."

 "뭣이? 네가 감히?"

 "한 걸음만 더 움직인다면 후회하게 될 것이오!"

 한효월의 외침에 서역법왕은 걸음을 멈추었다.

 미륵불처럼 보였던 그 얼굴은 일그러진 채로 한효월을 쏘아보고 있었다.

 "서역에서 이곳까지는 너무도 먼 곳이오. 단서가 없다면 결코 이곳까지 직접 찾아오지 않았을 터. 무슨 단서로 여기까지 온 것인지 말해 주시오."

 "말해 준다면?"

 "사실대로 말해 준다면 이 철갑을 줄 수도 있소."

 "정말인가?"

 "그렇소."

 "소시주!"

 무명노승이 침중히 소리쳤다.

 "그럼 스님께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누구든 먼저 말한 분께 드리도록 하지요."

 나직한 신음이 그들 사이로 흘렀다.

 "노납이 여기에 오게 된 것은……."

 순간 서역법왕이 말을 가로챘다.

 "봉신지약은 숨겨진 비밀을 풀기 위해 필요한 열쇠다. 하지만 너무 오래되어 과연 그것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래서 전설로 화했던 것이지. 봉신의 약속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봉신지약을 찾는 것은 숙원(宿願)이라 할 수 있지!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 봉신지약을 찾아서 헤매고 있다. 그 봉신지약은 본 사에서 세상에 내보낸 제자 중 한 사람이 천신만고 끝에 찾아내어 숨겨놓은 것이다. 그러니 그것의 주인이야말로 본불이다."

 "당신의 제자가 왜 이걸 여기에다 숨겨놓았다는 겁니까? 여기 숨겨놓고 당신이 찾아올 바에야 그냥 가지고 갔다면 되었을 텐데?"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 제자는 돌아오지 못했다. 적에게 쫓기고 있다는 말과 함께 이곳에다 숨겨두겠다는 말만 전해왔을 뿐이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본불이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게 언제입니까?"

 "본불이 소식을 받은 것은 석 달이 못 되었지만 보내온 것을 감안하자면 서너 달은 족히 되었겠지."

 "음……."

 한효월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흘렀다.

 자신을 잡기 위한 함정으로는 너무 오랜 세월이다.

 그렇다면 이 봉신지약이 정말 그 제자가 찾아서 숨겨둔 것이란 말인가? 하긴 그 오랜 세월을 감안한다면 불단 아래 그렇게 방치했다는 것은 너무 허술해 보이기도 했다.

 "자, 이제 그것을 내놓아라!"

 서역법왕이 손을 내밀었다.

 잠시 그를 보던 한효월이 갑자기 소리쳤다.

 "좌 사질!"

 "옛!"

 난데없는 대답과 함께 한 사람이 솟구쳐 나왔다.

 천수단혼 좌백이었다.

 한효월의 뒤를 따른 그는 한효월보다는 조금 늦게 도착해 있었지만 세심히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지만 한효월의 명에 따라 나서지를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성아를 데리고 가거라."

 "알겠습니다."

 좌백은 망설이지 않고 유성을 부축했다.

 "누구 마음대로 떠난단 말이냐?"

 서역법왕이 눈을 부릅떴다.

 "당신의 관심은 이것일 텐데, 저 아이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한효월의 물음에 서역법왕이 싸늘히 웃었다.

 "물건은 내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지시오."

 한효월은 미련없이 철갑을 그에게 던져 주었다.

 그러한 행동은 너무도 갑작스러워 서역법왕이 멈칫했을 뿐 아니라 무명노승까지 놀라게 했다.

 "안 돼!"

 무명노승이 소리치며 몸을 날렸지만 철갑은 이미 서역법왕의 수중으로 빨려들고 말았다.

 비대한 그 몸체에 비해 그의 신법은 정말 날래기 이를 데가 없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몸을 날림과 동시에 섭물신공(攝物神功)으로 철갑을 빨아들이기까지 했으니 뒤늦게 출발한

 무명노승이 그것을 막아낼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허탕을 친 무명노승은 암담한 빛으로 발을 굴렀다.

 "어쩌자고 저걸 함부로 내준단 말이오?"

 "원래 제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보물은 임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오. 특히 저 봉신지약은 천하십왕에게 가서는 안 될 물건이오."

 "왜 그렇습니까?"

 "그건……."

 그는 난감한 안색으로 발을 구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말합시다. 그리고……."

 그는 말을 끌면서 서역법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제…… 그것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오. 헛된 욕심 가지지 말고 없애 버리는 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유성을 데리고 떠나려던 좌백이 십대존자와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보니 십대존자가 늘어서서 좌백을 막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 몇 가지 암기가 흩어져 있고 좌백이 만면에 분노의 빛을 머금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차례 부딪쳐 손해를 본 듯했다.

 "저건 무슨 뜻이오?"

 한효월이 물었다.

 "누구도 이 자리를 떠날 순 없다!"

 "약속을 어기겠다는 말이오?"

 "약속이라구? 누가 약속을 했단 말이냐?"

 한효월은 그의 대답에 미간을 찡그렸다.

 "으음…… 당신의 신분으로 허언을 한단 말이오?"

 "허언이라니? 본불은 네가 봉신지약을 파괴한다기에 네 말대로 이곳에 오게 된 배경을 설명해 주었다. 그 외에 무슨 약속을 했더란 말이냐?"

 교묘한 트집이다.

 하지만 말로만 따지자면 하자가 없다.

 "그래서 우리를 여기에 붙잡아둘 작정이오?"

 "이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서역법왕은 태연히 대꾸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웃는 낯이라서 가히 소리장도(笑裏藏刀)에 다름이 아니다. 누가 저 부처와 같은 모습, 얼굴에서 저런 소리가 나올 것임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으랴.

 "살인멸구라, 서역의 법왕이 아니라 마왕이로군……."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허허허…… 어차피 고해에 가득한 생이거늘 조금 일찍 간다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내 너의 운세를 짚어보니 삶이 그리 길지 않을 터이니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해도 그다지 서러울 건 없으리라."

 득도한 고승대덕과도 같은 말에 한효월은 웃었다.

 "내 운세가 시원찮아도 여기서 요절할 상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그보다 당신은 지금의 형세를 주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오? 아니, 나만 죽여 입막으면 이 모든 것이 덮어질 것으로 생각하오?"

 그는 머리를 저었다.

 "전혀! 절대로 그렇게 되는 않을 것이오. 당신의 제자들을 죽인 자가 과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고 사라졌을 것 같소?"

 "……."

 서역법왕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누군가가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을 거요. 지금 이 순간도…… 바로 당신의 뒤에 있을지도 모르지."

 서역법왕의 미간이 조금 찡그려졌다.

 "당신은 차도살인지계에 쓰인 도마 위의 칼에 불과할지도 모르오. 하긴 지금 이 순간에 그게 중요한 건 아닐 것이오. 어차피

 당신은 얻고 싶은 것을 가진 게 아니니까."

 한효월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서역법왕을 보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흠칫, 하는 빛이 서역법왕의 눈에 떠올랐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그것을 내가 말해 줘야만 하겠소?"

 한효월의 반문에 그는 급히 수중에 넣었던 철갑을 바라보았다.

 거무튀튀한 색깔의 철갑은 어둠 속에서 은연하다. 무슨 이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한효월과 같은 고수라면 철갑을 열지 않고서도 충분히 안의 내용물을 파괴할 수 있었다. 종이를 사이에 두고서 종이 뒤에 있는 철판도 파괴할 수 있는 내가신공을 불러일으킬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천하십왕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었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서역법왕은 황급히 철갑을 열었다.

 철갑은 잠근 곳이 없었다. 그러나 열 수 있는 곳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열릴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실제로는 열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철갑은 서역법왕의 손에 의해 열렸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아래위를 잡아당겼고, 떵! 하는 소리와 함께 내부 고리가 파괴되면서 열리고 만 것이다.

 "이……!"

 철갑 안을 들여다본 서역법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얼굴이 그렇게 일그러진 것은 나타난 이래 처음이었다.

 철갑.

 그 안에는 특이한 형태의 홈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홈에는 분명히 무엇인가가 끼어 있었을 텐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빈 철갑일 뿐이다.

 쾅!

 그가 내팽개친 철갑이 땅바닥 깊숙이 박히며 비명을 질렀다.

 한효월을 쏘아보는 서역법왕의 눈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무섭게 이글거리는 분노의 불길!

 "감히…… 본불을 속이다니!"

 우두둑! 우두둑…….

 그의 몸에서 뚝뚝 뼈마디 마주치는 소리가 나더니 금광이 불벼락처럼 그의 눈 속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로 금으로 만든, 성난 미륵을 보는 것 같았다.

 "속였다고? 무엇을 속였단 말이오?"

 하나 그를 보고 있는 한효월의 모습은 태연하기만 하다.

 "나는 당신에게 분명히 물었소, 당신이 원하는 게 이거냐고. 당신은 그렇다고 대답했고 나는 당신에게 그것을 주었소. 뭐가 잘못된

 거요?"

 "그 따위……."

 서역법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가 그 따위란 말이오? 당신은 나에게 분명히 그 물건이라고 하면서 그 철갑을 가리켰소. 그 말대로 철갑을 주었는데 무슨

 잘못이 있는지 어디 한번 말해 보시오."

 "이……."

 서역법왕의 눈에서 무서운 금광이 폭출되었다.

 동시에 그가 손을 들었다.

 찰나.

 "손을 쓰고 싶소?"

 한효월이 뭔가를 들어 보이면서 물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에 서역법왕은 끌어올려 내쏟으려던 경기를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의 주위에 갑자기 폭풍처럼 경기가 휘몰며 일었다.

 그러한 공력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것은 그의 무공이 어떤 지경인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그건……."

 서역법왕은 눈을 부릅떴다.

 한효월의 손에 들린 것은 어둠 속이지만, 오금(烏金)처럼 검게 빛을 반사해 내고 있는 반 자가량 크기의 열쇠였다. 용을 방불케 하는 생김을 가진 그 열쇠는 한효월의 손에서 빛을 뿜고 있는 듯 보였다.

 "봉신지약……."

 서역법왕이 신음을 흘렸다.

 "이게 봉신지약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여기에 봉신(封神)이란 두 자가 예전(隸篆)으로 쓰여 있고, 내가 이것을 그 철갑 속에서 꺼낸 것만은 틀림없소."

 한효월이 망설임없이 말했다.

 "그, 그런…… 교활한……."

 서역법왕이 이를 갈았다.

 처음의 그 당당하던 모습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듯 보인다.

 탐욕이 그를 망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일행을 내보내 준다면 이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정말이냐?"

 "정말인지 아닌지는 시험해 보면 알지 않겠소?"

 "……."

 서역법왕은 금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한효월을 노려보았다. 과연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것인지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아니 되오, 소시주. 봉신지약을 그에게 넘겨주면 천하십왕이 모두 세상에 나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천하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지게 될 것이오. 절대 아니 될 일이오!"

 무명노승이 손을 내저었다.

 "제가 주지 않더라도 그냥 돌아갈 사람이 아닌 것 같군요. 하지만 이것을 가진다면 생각이 조금 달라지겠지요. 어떻게 하겠소? 내가 이것을 파괴하길 바라시오? 아니면 이것을 가지고 우리 일행을 보내줄 것이오?"

 "……."

 서역법왕은 한효월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물론, 당신의 명예를 건 약속이 필요하겠지만."

 한효월이 말을 덧붙이자 서역법왕은 손을 내밀었다.

 "약속하마."

 "좌백."

 "예, 사숙!"

 "가거라. 누구든 너를 막는 자가 있다면 이 열쇠는 부서질 테니."

 "알겠습니다."

 좌백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선 십대존자를 한번 흘겨보고는 바람처럼 그 자리를 떠났다. 성질대로라면 한바탕 어울리고 싶었지만 쉽게 상대할 자들이 아니었다.

 그의 암기는 이미 준비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공격을 받자마자 바로 발동해서 적을 공격했고 하나도 실수하지 않았다. 그런데 목의 인후를 맞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암기는 모두 무력했다. 적의 피부는 질긴 가죽을 덮어놓은 듯 도검이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서역의 유가기공(瑜伽氣功)은 예로부터 기괴(奇怪)함으로 이름 높았었다. 이들은 나이로 보나 신분으로나 그중 최고수일 테니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좌백은 조용히 떠났다.

 내심 이를 갈면서…….

 좌백이 사라짐을 보고 한효월은 다시 물었다.

 "내가 이것을 주면 당신은 나를 어떻게 하겠소?"

 "너의 동료가 이미 떠났는데, 널 잡아두어 무엇을 할 것이냐?"

 서역법왕이 한효월을 쏘아보았다.

 "좋소. 그럼!"

 말과 함께 한효월은 미련없이 그 열쇠를 서역법왕에게로 던졌다.

 "아미타불……!"

 무명노승이 몸을 날렸고 서역법왕 또한 몸을 날렸다.

 한효월과 그들의 사이는 3, 4장 정도였다.

 한효월은 봉신지약을 서역법왕에게로 던졌다.

 무명노승이 몸을 날렸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서역법왕이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변고는 한효월이 막 서역법왕에게 봉신지약을 던지려는 순간에 일어났다.

 한효월은 무너진 담장을 넘어 숲으로 들어가는 향적사의 후원에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제멋대로 자라난 나무들이 있었는데 바로 그 고송(古松) 중 하나에서 한 사람이 뛰쳐 내린 것이다.

 그는 바람처럼 한효월을 공격했고 한효월은 미처 그의 공격을 피해내지 못했다.

 "으윽!"

 신음 소리와 함께 한효월은 비틀거리며 연달아 뒤로 물러났다. 그가 던지려던 봉신지약은 그자의 손에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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