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三首 서역법왕(西域法王) (75/113)

第三首  서역법왕(西域法王)

-미륵 나타나다.

비약이 나타나니 죽음이 함께하다.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졌다.

 이따금 후두둑거리긴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그친 것과 같았다.

 대신 빗물이 안개를 불러일으켜 물막이 걷힌 대신에 뿌우연 밤 안개가 세상을 온통 뒤덮었다.

 그 안개를 뚫고서 한효월은 다시 향적사로 돌아왔다.

 갈 때는 혼자였지만 올 때는 유성과 함께였다.

 이미 한 무리의 번승들이 절 내부를 차지하고 있음을 잘 알기에 한효월은 소리도 없이 후원을 통해서 안으로 스며들었다. 유성이 긴장된 빛으로 그 뒤를 따랐다.

 후원으로 들어선 한효월은 후원 승방(僧房)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주변의 어둠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유령과 같아 누구도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제길! 그새 더 따라가기 힘들게 변하셨네…….'

 그 뒤를 따르는 유성이 숨이 턱에 차 이를 악물었다.

 무조건 속도만 내서 쫓아가는 거라면 이미 헥헥대면서 죽는다고 소리를 쳤을 터이다. 하지만 은밀히 움직이는 거니 뭐라고 말도 못할 형편이었다. 그저 이를 악물 수밖에.

 그러던 중 후원 승방에 이른 한효월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숨이 턱에 닿았던 유성으로서는 천만다행.

 그런데 뭐가 달랐다.

 한효월이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끓고 앉아 뭔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시체?'

 유성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붉은 옷을 입은 라마. 그 라마 하나가 땅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무슨……."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던 유성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한효월이 손을 들었던 것이다.

 그는 유성에게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한효월이 라마를 뒤집자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있다. 눈에 흙이 들어가 있지만 그는 눈을 감지 않았고 입과 코에서 흘러나온 피는 눈에서까지 흘러나와 굳어지고 있다. 가공할 내가중수(內家重手)에 내부가 온통 다 터져 버린 형상이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다…….'

 한효월은 굳은 얼굴로 대웅전 쪽을 바라보았다.

 비가 그쳐 가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공연한 느낌인 것일까?

 향적사는 갑자기 쥐 죽은 듯 조용해진 듯했다.

 라마의 무공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런데 별로 싸운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를 죽인 상대가 상대하기 어려울 만큼 고강하며, 과감하게 잔인한 손속을 가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득 한효월의 신형이 허공을 부유하듯 훌쩍, 날아올라 앞에 있는 승방을 들여다보았다.

 승방이라는 것은 절에 마련된 승려들의 숙소다.

 출가라는 것 자체가 세상의 모든 것에서 떠나고자 함이라 승방은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해서 넓고 크지도 않다. 그저 몸을 누일 만한 공간이면 된다. 이곳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너무 오래 버려져 있었기에 거미줄과 먼지로 퇴락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퇴락한 정도는 극심해 문짝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부서져 버릴 듯했다.

 그러므로 굳이 안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부서진 창문이나 문을 통해 안을 보는 것으로 모든 것이 다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효월은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가 가득한 방 한쪽 구석에 붉은빛 사람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다.

 또 한 사람의 라마가 쓰러져 있었다.

 그도 죽어 있었다. 죽은 모습은 앞의 라마와 다르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그때 밖에서 유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다 죽은 거 같은데요?"

 한효월은 불끈 몸을 솟구쳐 유성에게로 날아갔다.

 승방은 절의 규모를 말하듯 매우 커서 수십 칸이나 되었다.

 유성은 이미 몇 군데를 뒤져 본 듯 굳은 얼굴로 한효월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또 시체가 있더냐?"

 "예, 하나가 더 있더군요. 다 뒤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 몸을 숨기고 누가 오는지 잘 살펴봐라.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바로 연락을 해라."

 "어딜 가시게요?"

 '앞쪽으로 가서 그들을 살펴보겠다. 흉수는 지금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니 절대로 방심하면 안 된다!'

 대답을 전음을 보낸 한효월은 바람처럼 대웅전 쪽으로 향했다.

 몸을 솟구친 그는 발끝으로 지붕과 나뭇가지를 밟으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그림자가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정말 강해지셨군……. 좀 전에는 나 때문에 전력을 다 하신 게 아니었군 그래."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곤 감탄한 유성이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유성이 돌연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 풀썩 앞으로 쓰러져 버렸다.

 앞으로 쓰러진 유성은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

 갑자기 주위에 적막이 달려왔다.

 풀벌레의 울음소리, 산새들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듯했다. 질식할 것만 같은 침묵이 일대를 온통 휘감아 눌렀다.

 그렇게 반 식경가량의 시간이 지났다.

 "성아!"

 다급한 음성.

 한효월이 날아들었다.

 "어떻게 된 거냐?"

 한효월은 땅에 엎어진 유성을 부축하면서 다급히 그의 맥을 짚었다. 너무도 뜻밖의 사태에 그의 얼굴은 납덩이와 같았다.

 그런데…….

 "에헤헤헤……."

 유성이 헤벌레 웃으면서 눈을 뜨지 않는가?

 "너……."

 얼떨떨해진 한효월이 웃고 있는 유성을 보면서 눈을 꿈벅였다.

 다음 순간.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게냐?"

 한효월은 엄한 얼굴로 그를 꾸짖었다.

 유성이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장난이 아니라…… 주위를 잘 살펴보라고 말씀하셔서 땅에다 귀를 대고 기척을 살피고 있었어요. 뭐……."

 "그……."

 어이가 없어진 한효월의 말을 뒤로하고 유성은 계속해서 말했다. 정색을 한 그의 눈이 반짝인다.

 "실제로는 누가 숨어 있나 해서 유인을 해봤던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흘러도 나오는 놈이 없는 걸 보면 어떤 놈인지 흉수는 이미 여기를 떠난 거 같아요."

 "녀석……."

 한효월은 그 엉뚱함에 기가 막혀 머리를 저었다.

 "그런데 앞쪽은 어떤가요?"

 유성의 물음에 한효월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앞쪽에 있던 라마들도 모두 죽었다."

 말과 함께 그는 승방의 끝 쪽으로 걸어갔다.

 "몇이나 죽은 거지요?"

 "열은 넘을 게다. 이곳에 있던 자들이 모두 죽었다면……."

 "음……."

 "설마!"

 한효월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땅을 박찼다.

 향적사는 산문을 들어서면 대웅전이 있고 그 대웅전 뒤로 극락전(極樂殿)이 있다. 그 극락전 뒤가 후원이고 승방이 늘어서 있었다.

 한효월은 한달음에 극락전에 이르렀고 그 극락전 문짝이 부서져 있음을 발견한다.

 오래되어 부서진 것이 아님은 한눈에 드러난다.

 그 문짝에 붉은 가사를 입은 라마가 머리를 들이박고 쓰러져 있었으니까.

 더구나 나지막한 신음 소리까지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한효월은 바람처럼 극락전 안으로 날아들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격렬한 드잡이질이 있었던 것을 말하듯이 극락전 안은 온통 엉망이었다. 극락전은 본존으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곳이다. 좌우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脇侍)한다. 그 불보살들이 태풍을 만난 듯 부서지고 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한 사람의 라마가 불단에 반쯤 걸쳐서 꿈틀거리고 있음이 보인다.

 한효월은 이미 안으로 들어서면서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쓸어본 다음이었다. 그를 제외하고는 사람은 없었다.

 "당신……."

 그에게 다가서면서 손을 내밀던 한효월이 훌쩍 옆으로 물러섰다.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던 그 라마가 갑자기 벼락처럼 몸을 튕겨 올려 한효월을 공격했던 것이다.

 가공할 경풍이 그 손에서 일어났다.

 "어이쿠!"

 유성이 깜짝 놀라서 옆으로 토끼처럼 튀었다.

 그는 2장가량이나 떨어진 입구 쪽에 있었는데 라마의 공세는 유성이 있던 곳을 지나쳐 극락전 벽을 때렸다.

 쾅!

 폭음과 함께 벽이 터져 나갔다.

 "무지하게 사납네……."

 유성이 인상을 썼다.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은 그 라마가 일장을 격출하고는 비틀하곤 그대로 나뭇등걸처럼 쓰러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입에서 토해진 핏줄기가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공자……!"

 "죽었다."

 한효월이 말했다.

 엎어진 라마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 눈에는 분노와 공포, 불신 등의 복잡한 감정이 가득했다.

 "마지막 힘으로 공격을 했던 거군요. 그렇다면 이 라마의 일신 공력은 정말 대단했겠는데요?"

 "밖을 경계하거라."

 말과 함께 한효월은 어깨를 움찔하는 사이에 한 덩이 구름처럼 떠올라 대들보 위로 올랐다.

 '뭘 하시려는 거지?'

 문가로 이동하여 기둥에 은신한 유성이 한효월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효월은 마치 고양이처럼 대들보 위를 오가면서 뭔가를 찾는 듯했다. 그리고는 잠시 후 내려오더니 라마가 엎어져 있던 불단으로 갔다.

 그 불단은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한 듯 한쪽이 깨져 있었다.

 "역시 여긴가……."

 한효월이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소매를 젓자 불단 한쪽이 소리도 없이 내려앉았다. 아무리 오래된 나무라고 할지라도 소리도 없이 주저앉는다는 것은 그가 힘을 기울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유성은 그가 불단 안쪽에서 무엇인가를 꺼냄을 보았다.

 나무로 된 갑[木匣]이었다.

 가로 한 자가량. 세로 일곱 치 정도.

 '복장(腹藏)인가? 하긴 부처님 뱃속이 아니니 복장이라고 하기도 좀 뭐하네. 그럼 뭐지?'

 그것을 보고 유성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갑은 봉인(封印)이 되어 있었다.

 한효월은 그 봉인을 바라보다가 손바닥으로 봉인을 쓸었다. 고대의 봉인이란 것은 무슨 특별한 잠금 장치가 아니다. 그저 진흙과 같은 재료에다 도장을 찍어 흔적을 남기는 것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이고 이 목갑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진흙을 훑어낸 한효월은 망설임없이 목갑을 열었다.

 목갑 속에는 작은 철갑(鐵匣)이 하나 들어 있었다.

 어둠 속이지만 이미 공력이 허실생동(虛實生同)의 경계에 이른 한효월은 그 철갑 위에 새겨진 글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봉신지약!>

 너무도 놀라운 의미를 담은 네 글자가 거기 있었다.

 "봉신지약…… 봉신의 열쇠란 말인가?"

 한효월은 망연한 표정으로 그 철갑 위에 쓰인 글자를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그가 강호에 나온 이래 끊임없이 맴돌던 신비로운 단어.

 하지만 아직 명확한 의미도 모르는 그 단어, 봉신(封神)!

 그런데 그 봉신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이 자리에 그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극락……."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부르짖었던 말.

 요광성주의 마지막 말, 거의 들리지도 않았던 그 마지막 말이 생각나 극락전으로 왔었다.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 중에는 승(僧)이란 말도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승방으로 갔었고 다음에는 극락전을 찾았었다.

 그런데 정말 여기에 그것이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생을 바친 대가로서…….

 한효월은 가늘게 떨리는 손길로 목갑 속에 든 철갑에 손을 가져갔다.

 바로 그때였다.

 쿠와앙∼!

 고막을 찢고 심금을 떨어울리는 굉음이 극락전을 울렸다.

 극락전 전체가 마치 지진을 만난 듯이 뒤흔들렸다. 흙먼지가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다 못해 기둥이 뒤뚱거렸고 문짝이 사방 여기저기에서 무너졌다.

 "윽!"

 문가에 서 있던 유성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괜찮으냐?"

 한효월이 찰나간에 유성의 곁에 이르러 물었다.

 "괘, 괜찮아요. 그런데 이게 무슨……?"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열던 유성이 입을 다물었다.

 덜커덩…….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겨우 달려 있던 문짝이 널브러지는 순간에 어둠에 묻혀 있던 극락전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달빛이 고개를 내민 까닭인가?

 라고 생각하기에는 그 빛이 달랐다.

 "아……."

 밖을 내다본 유성이 부지중에 신음을 내뱉었다.

 극락전의 앞에 조금 전에는 없었던 것이 있었던 것이다.

 거창한 가마 하나.

 지난날 한효월은 귀왕의 귀왕여를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가마는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크기는 그와 비슷한 것도 같지만 전체가 황금빛으로 찬란하고 사방의 장식은 모두가 불가(佛家)의 것이었다.

 얼핏 보면 마치 부처를 모시는 교자(轎子)와 같았다.

 그런데 얼핏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그 교자에는 미륵불 한 좌(座)가 모셔져 있었다.

 전신에 금칠을 한 미륵불.

 비대한데다 배까지 불룩한 그 모습은 어김없는 불상. 하지만 머리에는 기이한 형상의 황금 관(冠)을 하나 썼다.

 그것이 다였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저 거창한 교자를 가져다 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런 교자를 움직이려면 최소한 네 명, 일반적이라면 여덟 명 이상이 되어야 움직일 수 있을 터이다.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 않다니?

 설마 하니 저 교자가 혼자 이곳까지 날아왔을 리는 없지 않은가.

 교자의 미륵불은 자상한 미소를 띤 채로 한효월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

 문득 기이한 느낌이 전신을 달려간다.

 "누가 장난을 하고 계시오?"

 한효월이 침중한 어조로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잡인(雜人)이 감히 불가의 지보(至寶)를 탐해 사찰에서 살인을 하다니…… 그 자리에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하겠는가!"

 조용하지만 천둥이 치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음성에 깃든 힘은 강력무비하여 고막이 터지는 듯했고 지면에서 먼지가 풀풀 날아올랐다.

 쿠쿠…….

 한효월과 유성이 있는 극락전이 그 음성에 다시금 전신을 떨었다.

 한효월은 얼떨떨한 빛으로 앞의 미륵불을 바라보았다.

 "서, 설마? 말소리가 저 부처님에게서 나오는 거 같은데요?"

 뒤에서 유성이 눈이 동그래져서 중얼거렸다.

 한효월은 말없이 눈앞의 미륵불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다.

 "아무려면 그럴 리는 없을 테고, 대체 어떤 놈이 장난질이야!"

 유성이 투덜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한효월이 말했다.

 "귀하는 뉘시오?"

 "감시 서천(西天)에서 온 본불(本佛)을 앞에 두고서도 딴전을 피울 것인고?"

 "……."

 한효월은 묵묵히 눈앞의 미륵불을 바라보았다.

 미륵불도 한효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음을 머금은 채로.

 한효월이 입을 열었다.

 "서천이라……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서역법왕(西域法王)이오?"

 그의 눈은 기이하게도 정면의 미륵불상을 향한 채였다.

 그때였다.

 "움마니반메훔!"

 강력한 육자진언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무례하도다! 감히 활불의 법신(法身)을 알현하고서도 그 존호(尊號)를 함부로 부른단 말인가!"

 극락전의 좌우에서 붉은빛이 담장처럼 솟아나기 시작했다.

 좌우에 각기 다섯 명씩.

 나이는 얼마인지 알기 힘들다. 하지만 그들의 깊게 패인 주름과 그 그늘진 눈 깊은 곳에 깃든 신광을 보노라면 그들이 평범하지 않음은 직감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유성이 물었다.

 "본좌들은 활불 좌하(座下)의 십대존자로다! 우리의 신분을 알고서도 아직도 감히 그 자리에 서 있단 말인가!"

 노라마 하나가 손에 든 금강저(金剛杵)로 땅을 찧으며 꾸짖었다.

 '정말 서역법왕이 벌써 온 것이란 말인가?'

 눈앞의 미륵불이 서역법왕이라면 누구의 예측도 뛰어넘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때 유성이 어이없는 듯 피식, 웃더니 물었다.

 "당신들이 서역의 무슨 법왕이라 합시다. 그런데 서쪽 변두리 사람들에게 내가 왜 주눅이 들어야 하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중원무왕의 호법동자이며, 그 뒤를 이은 천하일존(天下一尊)의 수호사자(守護使者)이거늘 어찌 서역의 잡배들이 그 앞에서 고두를 하지 않는단 말이시?"

 눈까지 부라리면서 그들을 쓸어보자 노라마가 미간을 찡그렸다.

 "처, 천하일존?"

 그의 한어(漢語)는 어딘지 어색한데 다른 자들은 눈을 부릅뜨고서 조용함을 보아 아마도 한어를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가 살쩍까지 늘어진 백미를 찡그리며 곤혹스러운 빛을 떠올리자 유성은 눈을 부릅뜨고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렇소! 천하십왕이 모두 모여서 제일존으로 추대한 분이오. 그런 분을 앞에 두고서 감히……."

 "처, 천하십왕이?"

 "아하, 당신들이 모시는 저 가짜 부처가 서역법왕이라고 했소? 그럼 저 사람도 천하십왕 중 하나가 아니오? 그럼 당연히 천하일존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해야지 어디서 감히……."

 의기양양해서 떠벌리던 유성이 갑자기 말을 삼켰다.

 무서운 기세가 자신을 덮쳐 누르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피할 수조차 없었다.

 팡!

 폭음과 함께 유성의 앞을 한효월이 막아섰고, 맹렬한 경풍이 사방을 휘감았다.

 '뭐, 뭐지?'

 무엇도 자신을 공격함을 알지 못했던 유성은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서천의 부처가 어찌 어린 소년에게 살수를 쓰는 것이오?"

 한효월이 침중히 꾸짖었다.

 "하하하하하…… 살수라? 본불 좌하의 제자들을 그처럼 도살하고 물건을 빼앗아가고서도 감히 그 따위 짓거리란 말인가?"

 "도살?"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제서야 그는 정말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의 저 황금 미륵불이 사람임을, 그리고 그가 천하십왕 중 하나인 서역의 법왕임을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서역 천룡사(天龍寺)에 있다는 서역 제일고수. 무공보다 서역 일대에서는 활불의 현신으로 여겨진다는 전설적인 존재. 그가 나타난 것이다.

 방금 한효월은 미륵불이 은밀히 발출해 낸 잠경(潛勁)을 막아냈었다.

 그가 막아내지 않았더라면 유성은 죽거나 크게 다쳤을 터였다.

 의형상인(意形傷人)!

 무림인이라면 누구라도 바라는 그 꿈의 경지를 미륵불은 이루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반쯤 인간이 아닌 셈이었다. 하긴 천하십왕의 무공을 두고 어찌 평범한 인간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무슨 도살이란 말이오? 여기 죽어 있는 라마들은 내가 손을 쓴 것이 아니오."

 "아니라? 흐하하하하……."

 긴 웃음소리.

 미륵, 아니, 서역법왕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한효월에게 말했다.

 "그럼 누군가? 누가 본불의 휘하의 제자들을 이렇듯 한순간에 몰살시켰다는 것이지? 말해 보라."

 "나도 누군진 모르오. 하지만 나는 아니오."

 "아니다……. 손에 든 물건은 무엇인가?"

 "이것은……."

 한효월은 말끝을 흐렸다.

 상대가 서역법왕이라면 그는 오로지 이 물건을 위해서 서역에서 이곳까지 달려온 사람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이 물건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이것을 넘겨준다면 요광성주의 희생을 헛되이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무엇인지는 당신이 알 필요가 없소."

 말과 함께 한효월은 목갑을 갈무리했다.

 "어차피 상관없겠지…… 달라질 것도 없고……. 한데, 너는 누구인가? 너와 같은 나이에 그런 경지에 이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의 물음에 한효월은 잠시 그를 보다가 답했다.

 "내 이름은 한효월이오."

 "한…… 효월, 한효월이라? 네가 요즘 천하에 이름 높다는 그 한효월이란 말인가?"

 그의 물음에 한효월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한효월이오."

 "그래? 네가 한효월이란 말이지?"

 "그렇소. 내가 한효월이오……."

 한효월은 계속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군…… 네가 한효월이란 말이군……. 한효월이라……."

 미륵불, 서역법왕의 음성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의 음성에는 기이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소…… 내가 한효월이오……."

 한효월의 음성이 조금 나른해졌다.

 "고, 공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유성이 앞으로 나섰다.

 한효월을 보자 그의 그 별빛과 같던 눈빛이 몽롱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공자!"

 유성이 다급하게 부르짖었다.

 그가 급히 한효월의 손을 움켜잡는 순간에 서역법왕이 소리쳤다.

 "무릎을 꿇라!"

 그 말에 따라 한효월은 망설이는 듯하더니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공자!"

 "감히 네 따위가 어디서!"

 호통.

 그리고 유성은 무서운 기세가 자신에게로 날아듦을 직감했다.

 "으악!"

 참담한 비명과 함께 유성이 극락전 안으로 튕겨졌다.

 "이리 오너라!"

 서역법왕이 명령했다.

 "……."

 주춤, 한효월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괴로운 표정으로 움찔거릴 뿐, 눈앞의 서역법왕에게로 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감히 반항을 하려는 것인고!"

 서역법왕이 호통을 쳤다.

 "한효월!"

 그가 다시 소리쳤다. 그 음성에는 괴이한 울림이 있었다.

 그가 부르는 사람의 이름은 단순한 호명(呼名)이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듣고 대답을 하는 순간에 그의 혼백은 흩어져 버리고 꼭두각시가 되어버리고 만다.

 가공할 탈혼섭백(奪魂攝魄)의 위력!

 하지만 그럼에도 한효월은 움직이지 않았다.

 굳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망연한 듯하기도 하고 곤혹스러운 듯하기도 한 표정.

 "……!"

 순간 서역법왕은 무엇인가 소리쳤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그 외침과 동시에 좌우에서 십대존자가 날아들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질풍과 같고 일사불란했다.

 서역에서는 가히 절세라 이름하는 고수들이 십대존자다.

 그들이 일제히 손을 쓰자 가공할 강기의 그물이 한효월을 덮었다. 피할 수도 대항할 수도 없는 엄청난 기세였다.

 고수는 하수들과 같이 손을 쓰고 발을 날려 육박전을 벌이지 않는다. 손이 움직이면 기가 따르고 발을 구르면 땅이 울린다. 그것이 절세라는 이름을 붙일 고수라면…….

 쾅!

 폭음과 함께 경풍이 무섭게 일었다.

 그 가공함을 웅변하듯 극락전이 기우뚱거렸다.

 라마승들이 비틀거리며 두어 명이 물러섰고 나머지가 괴이한 외침과 더불어 안쪽으로 덮쳐 갔다.

 그 순간, 굉음과 함께 극락전 앞쪽이 무너져 버렸다.

 그리고 연신 고함 소리와 격렬한 부르짖음 소리가 이어졌다.

 어둠 속에서 뭐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라마들이 노한 외침과 함께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무너진 극락전 안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보일 뿐.

 한효월은 극락전 불단을 넘어 뒤쪽으로 난 문을 통해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 움직임은 말 그대로 질풍과도 같았다.

 하지만 문을 나서면서 몸을 날리던 한효월은 우뚝, 굳어지고 말았다.

 눈앞을 가로막는 황금빛.

 서역법왕의 교자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마치 거짓말처럼, 아니,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서역법왕의 그 큰 교자는 한효월의 앞에서 그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활하구나……."

 여전히 울림을 가진 서역법왕의 음성이 들려왔다.

 보고 있음에도 과연 그가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기 힘들었다.

 원래 한효월은 그의 섭혼대법에 현혹되지 않았었다.

 그가 지금까지 수련했던 것이 양생(養生)과 수심(修心)이었으니 그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섭혼대법에 당한 듯 보이면서 일방 유성에게 기회를 봐서 도주하도록 일러두었었다. 영리한 유성은 일격이 날아오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극락전 안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가 서역법왕의 명을 잘 듣지 않고 머뭇거리자 수상함을 느낀 서역법왕은 십대존자에게 그를 잡도록 명했다. 그들이 덮쳐 오자 한효월은 그들의 공세에 막강한 장세를 쳐내어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유성과 같이 뒤로 퉁겨졌다.

 그러면서 좌우로 손을 휘저어 가공할 공력으로 극락전의 기둥을 부러뜨리니 극락전이 그대로 무너질밖에. 그것이 바로 그 찰나간에 이루어진 일의 경과였다.

 "과찬의 말씀을. 불(拂)과 법(法)을 믿는 법왕께서 사술을 쓰시는 것에 비한다면 어찌……."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한효월은 서역법왕에게로 덮쳐 갔다.

 아무런 기세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내민 조금쯤 둥글게 말아 쥔 오른손을 보고 만만하게 여길 사람은 아마도 당대 무림에는 없을 터였다.

 "감히……."

 처음으로 서역법왕이 손을 들었다.

 덮쳐 오는 한효월을 향해 손을 쳐든 것이다.

 의형상인, 뜻이 일면 사람을 한 매에 쳐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그였지만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한효월의 공격은 위협적이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기에.

 그가 손을 들자 손에서 금광(金光)이 일었다.

 그 금빛은 찬란한 빛으로 뻗어났고 놀랍게도 사람의 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냥 몸의 진력을 뿜어내어 장풍을 쏟아내는 것이 아닌 형상을 이룬 경지가 거기에서 드러났다.

 앞으로 내민 한효월의 손이 활짝 펼쳐졌다.

 그리고는 세찬 경기가 손가락 끝에서 매섭게 앞으로 쏘아졌다. 붉은 빛이 번쩍이는 그것이야말로 연환수인지에 다름이 아니었다.

 누구도 물러나거나 변화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팡! 파파파파파-

 고막을 찢는 음향!

 그리고는 칼날과도 같은 경풍이 그 금광수와 수인지의 격돌에서 일어났다.

 한효월의 신형이 훌훌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한 수에 패퇴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반탄력으로 날아가고 있음을 서역법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무서운 위력을 가진 지력(指力)이 하마터면 그의 대금광수를 깨뜨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한효월을 쫓지 않았다.

 왜인지는 바로 드러났다.

 한효월이 날아가던 쪽에서 붉은빛이 담장처럼 다시 솟구쳤던 것이다.

 '십대존자!'

 한효월은 그들이 나타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서역법왕을 비롯한 그들과 맞서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슨 자존심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가 강호에 나온 것은 무도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닌 까닭이다.

 더구나 음모의 냄새가 짙은 마당에 여기서 서역법왕과 사생결단을 할 이유는 없다.

 그가 양손을 펼치자 몸이 빙글 돌았다.

 그리고는 그 탄력으로 그의 신형이 찰나간에 일 장여를 불끈 더 솟구쳤다.

 순간적으로 일 장이 넘는 높이를 솟구친다면, 그것도 허공에서의 상황이라면 그를 공격해 오던 사람들은 모두 허탕을 치고 말아야 했다. 아무리 경공의 고수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 상대는 달랐다.

 두 명이 앞섰고, 세 명이 뒤에서 날아올랐던 그들은 뒤의 세 명이 움찔하는 순간에 앞선 두 명의 어깨를 밟고 날아 한효월의 앞을 철벽처럼 막아섰던 것이다.

 단순히 막기만 했을 리가 없다.

 그들이 손을 떨치자 눈앞이 온통 검게 변했다.

 어떤 술법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손에서 염주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긴 염주가 어찌 한두 개일 리가 있겠는가?

 세상이 온통 염주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

 쐐애애-액!

 염주가 허공을 찢는 파공성이 고막을 찢을 듯했다.

 염주는 보통 보리자(菩提子)라는 나무 열매로 만들지만 철로 만든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가 있다. 그 무엇이든 나뭇잎을 날려 바위에다 꽂을 수 있는 고수가 그것을 사용한다면 그 하나하나가 죽음과 입맞춤하고 남을 위력을 가진다.

 더구나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의 고수가 던져 낸 것이라면……

 제아무리 호신강기가 막강하다 할지라도 지금처럼 창황 중에 호신강기로 그것을 다 막아낼 수는 없다. 일반 고수라면 몰라도 저들과 같은 고수라면.

 "타앗!"

 한효월이 낭랑한 호통을 내질렀다.

 양소매를 펼쳐 강기를 펼친다. 그리고도 모자라 몸을 팽이처럼 돌리면서 그의 신형이 밑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탕! 타타타앙…… 타앙…….

 마른하늘에서 우박이 쏟아지는 듯한 굉음이 폭죽 터지듯이 일었다.

 …….

 한효월은 말없이 앞을 노려보았다.

 그의 소매는 걸레처럼 너덜거렸다. 그의 앞에는 금강저(金剛杵)와 복마추(伏魔錐) 등의 불구(佛具)를 든 십대존자가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효월이 내려서는 것을 보고서 조금도 망설임없이 그를 공격해 왔다.

 콰아아!

 금강저가 엄청난 경풍을 동반한 채로 한효월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복마추가 그의 가슴을 찔러온다. 항마령(降魔鈴)이 심금을 치는 외침을 토하면서 울어댄다.

 그렇게 일어난 세찬 경기가 폭풍처럼 주위를 감쌌다.

 한순간에 수십 초의 손 바뀜이 일고 거기서 일어난 경풍은 회오리바람처럼 점점 강력해져 주변의 모든 것을 날려 보냈다.

 개개인이 절세고수라 할 수 있는 십대존자들은 기괴한 진세를 시전하여 한효월을 옭아매고 있었다.

 오행(五行)에 오방(五方)이 더해져서 한 사람이 움직이면 그림자처럼 또 한 사람이 움직였다. 다섯 명을 상대하는가 싶으면 찰나간에 열 명이고 열 명인가 싶으면 다섯으로 변해 힘으로 눌러온다.

 진세가 너무 강력하여 한효월조차도 일시지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무공은 기괴하여 중원의 것과는 달랐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각도에서 팔이 꺾이고 몸이 비틀어졌다.

 그때마다 한효월은 그들과 정면으로 맞서야 했다.

 쾅! 쾅…….

 그때마다 터져 나오는 폭음.

 한효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머리카락까지 이미 산발이 된 상태라 누가 봐도 그의 상태는 풍전등화처럼 보였다.

 "내가 살수를 쓰기 전에 존자들을 물리시오!"

 한효월이 고함쳤다.

 "이미 본불의 제자들을 도살한 악도가 이제 와서 불심이 생긴 것인고?"

 서역법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는 그 웃음을 멈추어야 했다.

 "크으……."

 "으아악!"

 비명이 뒤를 잇는 순간에 십대존자 중 둘이 뒤로 튕겨져 나가고 있음을 본 까닭이다.

 먼저 당한 것은 진세의 변화를 일으키던 존자 하나.

 그는 한효월의 권세(拳勢)가 날아옴을 보고 밀종대수인(密宗大手印)으로 막으려고 했다. 그 순간에 그의 뒤에 있던 다른 존자가 참마종(斬魔鐘)으로 한효월을 공격할 것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서역의 절학, 밀종대수인으로 한효월의 공세를 막는 순간에 권세는 순간적으로 지력으로 돌변했다.

 칙! 치이익!

 평소보다 두 배는 커졌던 그의 손바닥에 구멍이 뚫렸고 심혼(心魂)을 옭아매는 소리와 함께 뒤이어 날아들던 참마종도 부서졌다.

 십방참마오행진(十方斬魔五行陣)은 열 개의 방위를 시전자 모두가 엇갈리면서 돌아간다. 그 회전력은 시간이 갈수록 가공해지며 진세에 갇힌 사람은 자신의 힘도 써보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게 된다. 무섭게 회전하는 그 속도로 인해서 늘 한 점에서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열 명과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들 열 명이 받는 공격은 십 분의 일로, 아니, 더 이하로 줄어들게 된다. 그들이 돌면서 만들어낸 강기의 벽이 그 힘을 미끄러뜨리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진세의 축을 무너뜨리자 일시지간 혼란이 일었고 그들 개개인으로서는 한효월이 전개하는 절세의 수인지를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한효월이 그들 둘을 쳐내는 순간에 갑자기 폭음과 함께 장내에 연막이 터져 일었다.

 "법왕의 제자들을 죽인 것은 내가 아니오……."

 한효월의 음성이 그 연막 속에서 멀어졌다.

 "감히! 쫓아라!"

 서역법왕이 서장어로 소리쳤다.

 나타난 이래 처음으로 그의 음성에는 분노가 깃들었다.

 "여기예요!"

 담 위에서 유성이 손을 흔들었다.

 한효월은 연막을 빠져나와 유성에게 손짓하면서 담을 넘었다.

 담을 넘자 후원이다.

 후원의 담은 여기저기가 부서지고 무너져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오래 돌보지 않은 나무들은 제멋대로 우거지고 하늘을 가리며 자랐고 삭막하고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왜 이런 위험한 짓을 한 거냐? 너부터 먼저 떠나라고 했는데!'

 한효월은 유성을 뒤따르며 꾸짖었다.

 유성이 날름 혀를 내놓으면서 웃었다.

 준비는 했다 하더라도 좀 전에 극락전에서 도주하면서 타격을 받은 듯 얼굴이 창백했다. 좀 전에 연막탄을 터뜨린 것은 바로 유성이었다. 그 연막탄은 십리무(十里霧)라고 하여 강적을 만났을 때 그 자리를 피할 수 있도록 한효월이 유성에게 만들어준 것이었다.

 그런데 그 덕을 보다니…….

 "무지하게 빨리 쫓아오네?"

 힐끔 뒤를 돌아본 유성이 혀를 찼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자욱한 연막을 뚫고 십대존자가 무섭게 달려오고 있었다. 열이 아니라 일곱이라는 것이 틀렸지만 나머지 셋도 조금 떨어져서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아닌 듯했다.

 얼핏 돌아본 한효월과 유성이 막 무너진 담장을 넘어갔을 때였다.

 "이쪽으로 가면…… 앗!"

 앞서 달려가던 유성이 비명을 질렀다.

 후원 담을 나서면 바로 숲이다. 그곳은 유성과 한효월이 이 향적사로 들어온 경로이기도 했다. 그런데 숲으로 들어가려던 유성이 비명과 함께 튕겨져 나온 것이다.

 "성아!"

 한효월이 몸을 날려 유성을 받았다.

 "고, 공자……."

 유성은 신음을 흘렸다. 입에서 선혈이 뭉클거리고 쏟아져 나온다. 별다른 타격이 아닌 듯했는데 실제로는 심대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고개를 든 한효월의 앞으로 한 사람이 모습을 보인다.

 서역법왕이었다.

 처음으로 교자가 아닌 자신의 발로 선 그를 보자 그의 체구는 참으로 컸다. 키도 보통 사람보다 조금 큰 듯 보였지만 실제로 그의 체구는 정말 거대했다. 팔뚝 하나가 장정의 허벅지와 같다. 가공할 만큼 뚱뚱해서 부풀어 오른 진빵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런 몸에서 금빛이 나니 현신한 미륵불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감히 본불을 기망하고 도주할 수 있을 듯하더냐?"

 서역법왕이 꾸짖듯 말했다.

 "싸우기 싫을 뿐이오."

 몇 군데 혈도를 짚어 유성이 일단 견딜 만한 상태를 만들어놓은 한효월이 대답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아직 십대존자는 이르지 않았다.

 자리를 피하려면 지금이 가장 적기였다.

 그렇지 않고 유성을 돌보면서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기는 정말 힘들 터이다.

 한효월은 망설이지 않고 공격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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