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풍운연의 8
第一首 황사번승(荒寺番僧)
-부해옥을 만나다.
폐찰에는 라마가 때를 기다리다.
"멈춰라!"
"갈 수 없다!"
다급한 호통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뒤를 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그 외침이 의미가 없었음을 증명하듯 한 사람이 허공을 가로질러 그들의 머리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백의를 펄럭이면서 날아든 사람은 바로 한효월이었다.
한효월은 갈대를 밟으며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그는 저지하는 자들을 뚫고 날아들다가 배 위에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대경실색했다.
바지를 내린 채 등을 보인 자 하나.
그리고 그 밑에 깔린 나신의 여인. 놀란 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얼굴은 바로 독고경의 것이 아닌가!
"감히! 비키지 못할까!"
노성과 함께 한효월은 먹이를 보고 덮치는 매와 같이 밑으로 떨어져 내리면서 일장을 쳐냈다.
나타난 것이 누군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약자가 아닌 부해교는 장소성에 이어 강력한 기운이 자신을 엄습해 오자 다급한 소리를 토해내면서 독고경을 끌어안고 있던
손으로 뱃전을 쳤다. 아주 간단한 반동이지만 순간 그의 신형이 바람처럼 일 장여 옆으로 비스듬히 날아갔다.
남은 것은 독고경.
다리를 벌리고 누운 그녀의 눈부신 나신이 달빛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한효월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쳐 갔다.
허공에서 그의 신형이 빙글 선회하는 순간, 그의 손짓에 따라 배에 떨어져 있던 부해교의 금삼이 날아들어 독고경을 덮었다.
그것과 함께 한효월은 지풍을 쏘아내어 독고경의 전신을 제압했다.
독고경은 놀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섬뜩한 기운이 소리도 없이 엄습한다.
파앙!
한효월이 빙글 돌면서 소매를 젓자 그 공세는 옆으로 튕겨졌다.
"너, 너는!"
경악한 외침이 들려왔다.
한효월을 공격했던 부해교가 놀라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명가의 자제가 여인을 간(姦)하려 하다니……."
그를 알아본 한효월이 뜻밖이라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닥쳐라! 네놈이 무엇을 안다고 감히……."
그렇지 않아도 한효월을 백방으로 찾고 있던 그였다.
눈에 핏발을 세운 그는 이를 갈면서 만보풍운선을 휘둘러 한효월에게로 덮쳐 갔다.
하지만 엉거주춤 바지를 겨우 추켜 올린 상태에서의 공격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리 없다.
"물러가라!"
한효월이 소매로 그의 만보풍운선을 감아 떨쳐 버리자 그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물속으로 풍덩! 빠져 버렸다.
육지라면 달랐겠지만 물 위에서는 중심을 잃으면 제아무리 고수라도 재간이 없는 법이다.
제아무리 물에서 살아온 소용왕 부해교라 할지라도.
그때 한효월은 뭔가 괴이한 느낌에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찰나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을 보게 되었다. 마치 명장(名匠)이 옥을 깎아 만든 듯 투명한 빛을 뿌리는 너무도 아름다운 손을.
"명옥수!"
한효월은 다급하게 외치며 손을 들었다.
분명히 혈도를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독고경이 일어나 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 눈부신 나신을 드러내 놓고 명옥(明玉)과 같이 빛나는 손을 휘둘러 그를 쳐오고 있는 것이다.
한효월이 손을 들어 가슴을 막자 독고경의 일장이 그와 맞부딪쳤다.
팡!
강렬한 파장이 일며 배가 뒤집힐 듯 흔들렸다.
물보라가 하늘을 가릴 듯 일었다. 한효월이 천근추의 신법으로 배를 안정시키지 않았다면 배가 뒤집힐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산산조각이 나버릴 충격이었다.
"경아……."
흔들거리는 배 위에서 한효월이 신음을 흘렸다.
놀랍게도 독고경은 그 경풍(勁風)을 타고 둥실 하늘로 떠올라 있었다. 나신에 걸친 침의를 펄럭이면서. 달빛을 등지고 날아오른 그 모습은 실로 괴이하기 이를 데 없어 사람의 넋을 뽑아놓기에 충분했다.
한효월과 그녀의 시선이 허공을 두고 맞부딪쳤다.
"……."
일순 그녀의 눈 속에 괴이한 빛이 한데 어우러져 굴러갔다.
묘한 웃음과 일그러진 얼굴이 한데 뒤섞이는 듯싶더니 갑자기 그녀가 미친 듯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한 가닥 괴로운 빛이 스쳐 갔다.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가운데 그녀가 돌연 양팔을 휘저으며 날아올라 찰나간에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어딜 가는 거냐? 게 섯거라!"
일순간 멈칫했던 한효월이 그녀의 뒤를 따라 신형을 뽑아 올렸다.
바로 그 순간이다.
촤아악!
물기둥이 치솟아오르면서 한효월을 공격했다.
파앙!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 한효월은 그 물기둥과 한차례 격돌하는 힘을 빌어 오히려 더욱 빠르게 독고경을 쫓아 사라졌다.
"이, 이런……!"
일그러진 얼굴로 출렁이는 배 위로 내려서는 것은 바로 소용왕 부해교였다. 그는 평생을 바다에서 살면서 수공(水功)을 단련했으니 물속이야 제 집과 같았다. 그는 독고경에게 홀려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었다. 그러던 그는 물속에 처박히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상황을 깨닫자마자 생각난 것은 바로 한효월.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필생 소원인 독고경을 품에 안았다. 그런데 그것을 훼방놓다니! 천참만륙(千斬萬戮)을 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그는 동해용궁의 절기인 수룡경(水龍勁)을 일으켜 물속으로 한효월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한효월이 그를 상대하지 않고 그대로 가버리자 그마저 허탕.
"내 네놈과 하늘을 같이 이지 않겠다!"
소용왕 부해교는 이를 갈면서 그 뒤를 따랐다.
그것은 한 폭의 신선도(神仙圖)를 방불(彷佛)케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기잡이를 끝낸 어부들은 평생을 두고 용녀(龍女)의 이야기를 했고, 그 이야기는 살에 살을 더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갔다.
거대한 물줄기가 하늘을 꿰뚫으며 날아오르는 가운데, 선녀 하나가 날개옷을 날리며 강물을 밟고 날아간 그 광경을 모태로 하여 전설은 그렇게 뒤를 이어갈 터이다.
'놀랍군!'
한효월은 놀라 내심 신음했다.
소용왕 부해교의 공격을 이용했다고는 하지만 잠시 주춤한 사이에 독고경은 이미 강물 위를 십 장여 앞으로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달마(達摩)의 일위도강(一葦渡江)은 강호의 전설이다.
그러나 한효월의 경지에 이른 고수라면 갈대 잎이 아니라 강물을 차면서 강을 건널 수가 있었다. 일신 무공이 부력을 이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기 때문이다.
하나 누구라도 계속 강물 위에 머무르기는 힘들었다.
독고경은 등평도수(登萍渡水)의 절정경공을 연성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경공을 전개하여 강을 건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물을 차면서 강을 건너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강물을 밟고서 강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유령이 바람을 타고 너울너울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상궤(常軌)를 벗어나는 경공신법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럴 수가?"
이를 갈면서 한효월의 뒤를 쫓아 나선 부해교의 입이 딱 벌어졌다.
남해에서 그녀를 따라다닌 세월이 얼마였던가!
그는 독고경의 무공 수위를 익히 알고 있었다. 물론 약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저런 경공이라니! 아무리 기연을 만났더라도 그사이에 저렇게 가공할 신법을 전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그처럼 쌀쌀맞던 그녀가 자신을 유혹한 것 또한 괴이하다.
하나 방금까지 자신의 품속에 있던 그녀의 그 느낌은…… 그 순간을 어찌 꿈에서라도 잊을 수 있으랴.
그는 그 순간을 방해한 한효월의 삼대(三代)를 저주하면서 달려오던 배 위로 올라섰다.
"소주(少主)!"
몇몇 회의인이 다급히 달려왔다.
"저들을 쫓아간다! 모두 출발시켜, 지금 당장!"
부해교가 고함쳤다.
* * *
한효월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가 선 곳은 호변(湖邊) 갈대밭.
전력을 다해서 독고경을 쫓았지만 호수를 가로지른 그녀는 밤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갈대밭은 머리를 넘는 크기로 호변을 뒤덮고 있어서 누가 숨어 있다면 찾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한효월은 사람의 눈을 감안하지 않고 몸을 날려 하늘거리는 갈대의 끝에 선 채로 주위를 살폈다.
제아무리 은밀히 움직인다 할지라도 움직이기만 하면 찾아낼 자신이 있었지만 밤바람에 갈대가 서로 부딪는 소리가 요란하니 마음처럼 그 일이 쉬울 리가 없다.
이미 일대를 돌아보았지만 그 찰나간에 독고경의 모습은 깊은 물에 빠진 듯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괴이하군! 왜 나를 보자마자 도주해 버린 걸까?'
그녀의 지금 성정으로 보자면 이해하기 어렵다.
제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그를 피하지 않을 것이요, 아니라면 살심이 가득한 상태일 그녀가 아직까지는 큰 낭패를 당하지 않았던 한효월을 이처럼 피해 달아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연심(戀心)과 살심(殺心)의 충돌로 곤혹스러워진 독고경이 그를 피해 도주했음을 한효월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제아무리 천재라도 여심(女心)까지 헤아릴 수는 없는 것이기에.
정신을 모아 주위를 살피고 있던 한효월이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어디선가 묘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음을 경각한 것이다.
얼핏 들으면 피리 소리인 듯했지만 자세히 귀를 기울여 보면 단순한 피리 소리가 아니다. 마치 안개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것 같은 어떤 기괴(奇怪)한 느낌이 머리 속에다 속삭이는 것 같은, 뭐라고 말하기 힘든 정말 기이한 피리 소리였다.
그것이 단순한 피리 소리가 아님은 분명했다.
'설마 호혼지곡(呼魂之曲)?'
한효월의 얼굴이 굳어졌다.
언제인가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그 소리…….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은? 납덩이 같은 얼굴로 한효월이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가늠하고 있을 때였다.
"으악!"
밤하늘을 찢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뜻밖에도 한효월의 뒤쪽이었다.
"그새 그쪽으로 돌아갔단 말인가?"
잠시 방향을 가늠한 한효월은 괴이한 빛으로 중얼거렸다.
그 비명이 호혼지곡이 들리는 방향과 전혀 다른 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뭇거릴 여가가 있을 리 없다.
휙!
한효월이 바람처럼 갈대를 차고 날아올랐다.
갈대 숲을 지나 20여 장가량 떨어진 호변.
거기에 어부인 듯 보이는 사람 하나가 엎어져 있다.
30대 후반의 중년인. 그는 공포로 눈을 부릅뜬 채인데, 목이 반쯤 뜯겨서 쏟아져 나오는 피가 호수로 흘러들고 있었다. 그로 인해 어둠 속에서 호수 물은 무심한 달빛 아래 검붉은 핏빛으로 물들고 있어 괴기하다. 살펴보니 아직 피를 빤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흡혈을 하는 것도 아닌데…….
"사람을 마구 해친단 말인가?"
한효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람의 목숨에 존귀(尊貴)가 어찌 따로 있을 것인가.
그런데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그녀의 손에 이슬처럼 헛되이 스러져 간다면, 그녀를 빨리 찾지 못한다면 어쩌면…… 그는 그의 손으로 그녀를 없애야만 할는지도 몰랐다.
한효월은 굳은 눈길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대로 그녀를 방치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 그녀를 놓친다면 천추의 한이 될런지도 몰랐다.
시체의 주변을 살피던 한효월은 미미한 흔적을 발견해 냈다. 보통의 땅이었다면 없었을 미세한 흔적. 그것은 경공이 높은 자가 그 자리를 떠나면서 남긴 듯 보였다.
흔적은 갈대밭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흔적을 따라가려던 한효월은 갑자기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땅을 박찬 그는 번개처럼 허공에서 거꾸로 곤두박질쳐 뒤쪽에 있던 갈대밭을 덮쳐 갔다.
"나오너라!"
말과 함께 그의 손에서는 막대한 잠경(潛勁)이 일어났다.
상대가 독고경이라면 이미 경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쏟아낸 경력의 위세는 실로 대단하여 태풍이 갈대밭을 휘저어놓는 것만 같았다.
찰나.
"멈춰요!"
갈대 속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 외침과 함께 여인 한 사람이 갈대밭에서 튀어나왔다.
"누구요?"
한효월은 손을 거두며 물었다.
그 찰나간에 그처럼 강력하게 뿜어내던 경기를 거두어내는 것을 보고 여인은 놀란 빛을 떠올렸다.
'이 사람은 듣던 것보다 더 고수로구나!'
그녀는 영롱한 눈망울로 한효월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급박한 순간에 나타난 것이 독고경이 아님을 알고 겨우 힘을 분산시킨 한효월은 나타난 여인이 자신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굴리면서 자신을 살펴보고 있자 미간을 굳혔다.
"누군지 답하지 않는다면 부득이 손을 쓸 수밖에 없소."
그의 말에 불타는 듯한 홍의를 입은 여인. 나이가 제법 된 듯도 하고 20대 초반인 듯도 하지만 생글거리는 눈에는 풍정(風情)이 가득하여 교태롭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등 뒤로 삐죽 고개를 내민 두 자루의 보검은 그녀가 강호의 여인임을 보여준다. 하긴 보통 여인이라면 어찌 한효월의 일장을 피해 갈대밭 밖으로 튀어나올 수가 있었을까.
홍의여인은 한효월의 말에 피식, 눈웃음을 쳤다.
"세상에 전하기를 백의유협 한효월은 군자요, 여인을 아낄 줄 아는 영웅이라고 하던데…… 이제 보니 세상의 소문은 잘못 전해진 모양이죠?"
"나를 아시오?"
그녀의 말에 한효월이 되물었다.
"호호호…… 당금 천하의 가장 풍운아(風雲兒)인 한 공자를 모른다면 말이 되지 않죠!"
"……."
잠시 말없이 그녀를 쏘아본 한효월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세상이 어떻게 전하건, 그건 소생이 알 바 아니오. 소저께서 누군지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면 사정이 사정인만큼, 부득이 손을 쓸 수밖에 없소!"
한효월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가 자신을 쏘아보자 강력한 기세가 바람벽처럼 형성됨을 홍의여인은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세는 마치 거대한 암벽과 같이 일어나 그녀의 숨을 막히게 했다.
'정말 강하군! 어쩌면 할아버지만큼이나 강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한효월은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런가요? 천하의 한 공자께서 여인을 이렇듯 윽박지르다니…… 힘없는 여인이니 어찌하리! 죽인다면 원혼이 될지언정, 처분에 맡길 수밖에."
말과 함께 그녀는 오히려 한 걸음을 나서면서 어디 죽여보라는 듯 가슴을 불쑥 내밀었다.
그 태도에 한효월은 어이가 없어졌다.
그가 강호에 나온 이래, 이처럼 당돌한 여인은 만난 적이 없다.
얼핏 보기에는 천박한 하오문(下午門)의 사람 같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르게 어딘지 묘한 기품이 서려 있어 필시 명가(名家)의 훈도(訓導)를 받았음을 알아볼 수 있으니 더욱 기이했다.
명가의 자제라면 여자로서 저 나이에 저런 태도를 보일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우……."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한 발을 굴렀다.
순간, 그의 신형은 누가 잡아당긴 듯 불쑥!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가 이처럼 갑자기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던 홍의여인은 일순 멍청한 빛이었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독고경을 쫓는다면, 그쪽이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는 가공할 흡력이 있었다.
이미 저만치 갈대밭을 날아가고 있던 한효월이 휘청, 하는 듯하더니 그대로 되짚어 제자리로 돌아왔던 것이다.
고무줄이 튕겼다가 돌아오는 것 같았다.
"당신은 누구요?"
그녀의 앞으로 돌아온 한효월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단순한 물음이 아니었다.
이젠 그냥 돌아가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그 물음을 통해 여인에게로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기세에 이미 압도당하여 얼굴빛이 질리고 다리의 힘이 풀어지고 말았을 터이다.
그러나 홍의여인은 흠칫, 했을 뿐 이내 다시 웃음을 떠올렸다.
"나는 부해옥이라고 해요. 사람들은 운중연(雲中燕)이라고도 하죠."
그 말만으로는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을 리 없다.
'부씨라면…….'
얼핏 생각을 굴린 한효월은 한 생각에 뜻밖인 듯 되물었다.
"혹 남해용왕 부 선배와 관련이 있으시오?"
그의 물음에 부해옥은 활짝, 웃었다.
"맞아요! 그분은 제 할아버지 되시죠. 그리고 지금 열받아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부해교가 제 동생이죠!"
운중연 부해옥.
그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그렇군요. 몰라뵙고 실례를!"
가벼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 한효월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그런데 좀 전에 한 말은?"
그의 물음에 부해옥은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정색을 했다.
"우연히 이곳에서 한 공자에게 쫓기는 그녀를 보게 되었어요. 하지만 저 사람을 죽인 것은 경아가 아니에요. 아! 우린 서로 아는 사이에요. 남해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죠. 저 어부를 죽인 자는 한 공자가 쫓아가려는 쪽으로 흔적을 남겨두고서 배를 타고 떠났어요."
"배를 타고?"
그사이에 배를 타고 한효월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어불성설이다.
"그래요. 그는 어부를 죽이고 배를 띄우자마자 그대로 물속으로 자맥질을 해서 사라졌어요. 바로 저 배예요."
갈대밭에서 조금 떨어진 호숫가에 주인없는 배 하나가 떠 있었다. 작은 어선이었다. 한효월도 그것을 보았었지만 죽은 어부의 배라고 생각하여 더 조사해 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대로라면 상황이 다르다.
'누군가가 내 주의를 끌기 위해서 이곳에서 사람을 죽였단 말인가?'
누가?
왜 그런 일을?
지금 이 순간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 한효월이 독고경을 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궁금하지만 그것 때문에 독고경을 쫓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경아가 어디로 갔는지 봤습니까?"
"한 공자께 쫓겨오는 것은 봤지만, 저 어부를 죽이는 자를 보는 사이에 저 갈대 숲 쪽으로 사라져 버렸어요. 정말 빠르더군요. 대체 어떤 경공이길래 그런 모습인 건지……."
그녀가 가리킨 곳은 한효월이 있던 갈대 숲 쪽이다.
암중의 흉수가 한효월의 주의를 돌리려고 했다면 그것은 성공한 셈이라 할 것이었다.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부탁이라면?"
얼떨떨한 빛으로 그녀가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누가 한 짓인지 좀 알아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지금 시간이 없어서……."
"그건……."
"부탁드립니다. 그럼!"
그녀를 향해 포권을 해 보인 한효월은 바람처럼 그 자리를 떠나갔다.
"하, 한 공…… 자아……."
그가 이렇듯 불쑥 떠날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그녀는 얼떨떨해 그를 부르다가 씨익,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한효월의 신형은 이미 달빛 속에, 안개 속으로 묻혀들고 있었다.
"따라가려고 했더니……."
그녀는 묘한 눈빛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본다.
세간에 이름 높은 사람이라 흥미롭게 생각했더니 이건 느낌이 다르다. 한 번도 남자를 제대로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렇기에 오히려 남자들을 우습게 대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를 앞에서 보자 뭔가 다른 것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호기심을 동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좋아! 결정했어."
무슨 의미인지 그녀는 손바닥을 짝, 치더니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버려진 배 쪽으로 몸을 날렸다.
호수 면 저 멀리에서 수많은 배들이 벌 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부해교의 배들이 뒤늦게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 *
달빛은 무심히 강물을 비춘다.
그 달빛 아래, 강변에 한 사람이 엎어져 있었다. 의관은 뭉개지고 전신이 괴이하게 비틀려 있어 그 모습은 심히 괴이하다. 살아 있다면 그런 모양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후우……."
한효월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독고경을 쫓아왔건만 결국 그녀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는 그녀 대신 이 자리에서 발견한 것은 또 하나의 시신이다.
이곳은 호수로 흘러드는 강변. 이 사람의 모습 또한 저녁 호수 면을 바라보면서 한 수 시(詩)라도 읊조리며 거닐었던 것 같은 선비. 30대가 되었을까 말까 한 그는 공포의 빛이 역력한 눈을 부릅뜨고서 죽어 있었다.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가?'
한효월은 다시금 길게 입술을 물었다.
근래에 들어서는 중조산에 있을 때와는 달리 심기가 안정되지 못하여 천기(天機)를 읽는 것도 그리 만만하지 않다. 천기를 읽는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심신(心身)이 안정되어야 하며 때와 장소에 구애를 받기도 하고 막대한 심력(心力)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지금의 한효월은 그러한 투자를 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아니, 시간이 없다는 것이 옳은 말일까.
그때였다.
"경아는? 경아는 어디 있어요?"
다급한 외침과 함께 한 사람이 날아들었다.
나타난 것은 주자미였다. 그가 보낸 신호를 보고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녀의 뒤로는 용천성을 비롯한 시위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놓쳤습니다."
한효월이 몸을 일으키면서 답했다.
"노, 놓치다니……."
주자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바람에 이 부근에서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 시체를 보건대, 아직 멀리 가지는 않은 듯한데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이 시체는?"
주자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한효월의 앞에 엎어져 죽은 시신은 선비의 차림인데, 목에서 피를 쏟아내고서 죽은 상태였다.
"서, 설마 경아가 흡혈(吸血)을?"
"목을 물어뜯은 것 같긴 하지만 피가 흐른 양을 봐서는 빨아먹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뭔가가 방해를 한 듯하기도
하고……."
"방해를 하다니 뭐가 말인가요?"
"모르겠습니다. 스스로가 제어를 한 것인지, 다른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지만 저에게 쫓기고 있는 와중에도 사람을 살해한
것을 보면 심성(心性)은 이미 변해 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스스로가 제어를 한 것이라면 일말의 희망이라도 남아 있을 것이지만……."
말끝을 흐리던 한효월은 정색을 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경아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녀가 완전한 명옥마녀가 된다면 그 자신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세상은 끔찍한 공포를 맞이하게 될 겁니다."
"차, 찾으면? 찾으면 그 아이를 돌려놓을 방법이 있겠어요?"
"최선을 다해봐야지요."
잠시 머뭇거리던 한효월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경아를 찾는 대로 개방을 통해 저에게 연락을 해주십시오."
주자미의 안색이 달라졌다.
"설마, 여길…… 떠나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건 안 돼요! 한 대협이 없으면 누구도 그 아이에게 손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절대로 그건 안 돼요!"
한효월은 강경한 그녀의 태도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떠나고 싶지 않지만……."
한효월이 전음으로 제천교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주자미의 얼굴이 곤혹으로 일그러졌다.
당금 천하 분란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제천교주.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가야만 했다. 그녀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때 정화가 당도했다.
그의 움직임은 예사롭지 않아 일신에 평범하지 않은 무공을 익히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정예고수들이라 스스로 알아서 바람처럼 흩어졌다. 수색을 시작한 것이다.
한효월은 정화와 주자미에게 자신을 유인하려던 자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유의를 부탁했다.
그리고는 두 사람에게 포권을 해 보인 다음 그는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나는 것을 보고 있던 정화는 납덩이 같은 주자미의 얼굴을 보면서 입을 떼었다.
"그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못했습니까?"
"할 여가가 없었어요. 그는……."
주자미는 전음지성으로 한효월이 지금 제천교주를 찾아가고 있음을 설명했다.
"그자가 나타난다면……."
잠시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그는 주자미를 바라보았다.
"소관(小官)도 그쪽으로 가봐야 할 듯싶습니다. 우리가 조사한 대로 놈들이 적당(賊黨)과 관계가 있다면……."
* * *
호남(湖南)과 호북(湖北)이라는 말 자체가 동정호의 남쪽과 북쪽이라는 것에서 의미하듯이 동정호는 실로 광대한 면적을 자랑한다. 말 그대로 바다와 같은 호수다. 일단 호북성에 도달하면 사방으로 뻗은 물길과 계속해서 연이어진 호수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다만 그 호수의 거대함이 보통 호수를 보듯 원형이 아니라 초승달과 같은 형상으로 길게 누워 있어 동동정호(東洞庭湖), 서동정호(西洞庭湖), 남동정호(南洞庭湖), 이런 식으로 이름할 정도로 크다는 점이 다를 뿐.
갈수기에 500리, 만수가 되면 그 너비가 800여 리라고 하니 더 말해 무엇 할까? 바다와 같은 호수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
그 거대한 호수에 한효월이 도달한 것은 다음날 정오 무렵.
사람들의 눈을 피하면서 경공을 전개하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효월은 악양성 외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만났다. 평범한 차림의 농부인 그는 한효월을 한 농가로 안내했다.
거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옥면무영 호일랑이었다.
"방주님은?"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한효월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원래 그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창밖으로 바깥을 살핀 호일랑이 답했다.
"오고 계시는 중입니다. 중간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일이라면?"
"정체불명인 자들과 충돌이 일어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의 말에 한효월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전력에 타격이 있는 겁니까?"
"뜻밖의 일이라서……."
호일랑이 말끝을 흐리자 한효월의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정체불명이라면 제천교가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들과 부딪친 다음,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정도라면 상당히 심한 타격을 입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방주께서 움직인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비밀이 걸린 일이라고만 들었습니다."
'비밀…….'
한효월은 내심 미간을 찡그린다.
"그보다, 부탁하신 향적사란 곳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다가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심상치 않다면?"
* * *
개방의 제자들이 동원되어 조사한 결과, 동정호 일대에서 향적사(香積寺)라는 이름을 가진 절은 모두 세 개가 있었다.
한효월은 지금 그중 한곳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호변 외딴 숲 속에 자리한 그 사찰의 규모는 대단히 컸다.
그러나 돌림병으로 수십 년 전에 절에 있던 승려들이 모두 죽고, 그 뒤로는 버려진 절이 된 곳이다. 승려들의 원혼이 떠돈다 하여 귀신 나오는 절로 알려진 다음부터 인적이 끊어졌다고 하였다. 인적이 끊어지니 잡초가 우거지고 곳곳에 담장이 허물어져 짐승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개방 분타의 고수들은 세 군데의 절을 살펴보다 이곳에서 출몰하는 자들을 발견하고는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로서는 건드리기 어려운 고수라는 것이 그 이유.
'정말 말씀대로 놈들의 교주가 이곳에 나타난다면, 놈을 호위하기 위해서 교중의 고수들이 깔릴 테니 고수들이 출몰하는 건 당연하겠지요. 그 보고를 듣고 모두 철수시키고 멀리서 감시만 하고 있습니다.'
한효월의 곁에서 옥면무영 호일랑이 전음으로 설명한다.
나머지 다른 곳도 은밀히 조사를 해봤으나 의심 가는 곳은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묘한 지세로군…….'
절 주위를 살펴본 한효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순한 폐찰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 주변을 훑어보면 그 규모가 제법 굉대(宏大)하였고 뒤쪽으로는 벌판과 숲이 한데 어울렸고 앞으로는 멀리 동정호를 바라보고 있지만 좌우에서 솟은 야산이 기운을 지탱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소위 말하는 명당의 모습이었지만 군사적으로 보자면 고립된 곳과 같았다.
왜 하필이면 저런 곳에다 절을 지었을까?
의문이 일었다. 하긴 그러니 절이 저처럼 무너져 버리고 만 것일지도 모르지…….
내심 의혹을 떨쳐 버린 한효월은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가능하면 개방의 고수들로 멀리서 일대를 감시하도록 호일랑에게 부탁한 한효월은 그가 떠난 후, 나무 위에 숨어 해가 지기를 기다리면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어두워지면 은밀히 안으로 들어가 조사를 해볼 심산이었다.
저곳에 무엇인가가 있다면 분명히 살피는 눈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운기조식에 들었던 한효월은 무엇인가 괴이한 소리에 눈을 떴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숨을 죽이고 소리의 근원을 찾던 한효월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그 소리는 바로 향적사 내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한효월은 잠신둔형(潛身遁形)의 경공술을 전개하여 소리없이 향적사의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이경 무렵이라 어둠이 세상을 덮은 다음이었다.
향적사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담장 안은 겉에서 보기보다 더욱 황량하였다. 잡초가 무성한데다 얽히고설킨 갈대와 덩굴들이 무너진 담장과 건물을 덮었다. 웅장했을 전각 지붕까지도 잡초가 무성하여 초가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한효월은 조용히 숨을 골랐다.
괴괴한 달빛 아래 석탑과 잡초들의 틈으로 석등이 보인다. 대웅전이 옛날의 영화를 말하듯 우뚝하고 그 좌우로 몇 채의 전각들이 괴물처럼 웅크린 채 숨을 죽이고 있다.
'괴이하군…….'
주위를 돌아보는 한효월의 미간은 굳어 있었다.
좀 전에 그가 들었던 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소리 정도가 아니라 이처럼 잡초가 우거졌음에도 풀벌레의 울음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것이다.
너무도 고요하여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러니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문득 잡초들이 미친 듯 온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 여기저기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문이 덜컹거리는 소리,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 한바탕 굿사위가 벌어진 듯 요란한 소리가 찰나간에 모든 정적을 산산조각으로 부숴 버리고 말았다.
하늘이 온통 먹구름으로 가득 찼다.
일진 광풍(狂風)이 무서운 기세로 구름을 밀고 왔다. 그것은 지상의 모든 것들을 날려 버릴 듯 그렇게도 사납게 향적사를 휘감았다.
번쩍!
새파란 번갯불이 어둠을 찢으며 암천(暗天)을 갈랐다.
꽝! 콰콰콰…… 쾅!
천둥이 고막을 쳤다.
방금까지도 멀쩡하던 날은 삽시간에 사납게 일그러졌다.
빗줄기가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효월의 눈이 빛났다.
어둠 속에서 대웅전 안쪽으로 무엇인가가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은밀하였다. 때마침 전광(電光)으로 인해 사위(四圍)가 순간적으로 밝아지지 않았더라면 발견하기 힘들었을 것이었다.
한효월은 대웅전으로 몸을 날렸다.
벽과 어둠을 타고 이동하는 그의 신형은 바람과 같아 누가 옆에서 보고 있었더라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대웅전은 보기보다 더욱 지독하게 퇴락해 있었다.
거미줄에다 안쪽까지 무성한 잡초, 쓰러진 불상(佛像)…….
"……."
한효월이 주위를 살폈다.
바람 소리 때문에 어떤 기척을 찾아내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 기괴(奇怪)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웅전 안쪽이었다.
마음대로 자란 잡초에 은신한 채로 살펴보니 무너진 대웅전 안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 움직임은 극도로 은밀한데다 어둠 속이라 그가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거의 발견할 수 없었을 정도였다.
'라마?'
잠시 그 움직임을 살피고 있던 한효월이 묘한 빛을 떠올렸다.
뜻밖에도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라마의 복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마교는 원대(元代)에서부터 성한 종교다. 하지만 원대에 나타난 심한 폐해로 인해 명대에 들어서는 그 세가 급격히 위축되어 그들의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더더구나 이쪽 지방에서는.
그런데 제천교도가 아닌 라마가 여기 있다니?
하지만 라마라고 하여 다 서역(西域)의 사람은 아니다. 이쪽 사람들도 있어 과연 그가 어디서 온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제천교가 라마와도 손을 잡았단 말인가?'
한효월은 굳은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라마는 어둠 속에서 묘하게 움직인다.
잠시 그를 살펴보니 그는 연신 단순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웅전 구석구석을 세심히 살피고 심지어는 벽에서 바닥까지 뜯어보고 있어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엇을 찾는 것이지?'
어둠 속.
그것도 불도 켜지 않고서 이 악천후 속에서 무엇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제천교의 교주가 나타날 것이라던 곳에 있는 라마들이 찾는 것이라면?
'제천교주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개방에서 발견했다는 자들이 저들이란 말일까?'
잠시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던 한효월은 문득 숨을 죽였다.
그의 뒤쪽에서 또 한 사람의 라마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대웅전 안에 있는 라마와 일행인 듯 서슴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장어로 뭔가를 이야기하는데 한효월은 간신히 몇 마디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중조산에서 수행할 때 장어도 배웠지만 혼자 글을 깨친 것이라 악천후 속에서 낮게 이야기하는 것을 제대로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그가 들은 장어는 곧 도착이라는 것이었는데 그 말대로라면 누군가가 이곳으로 온다는 의미인 듯했다.
'정말 서역에서 온 라마란 건가?'
한효월은 다시금 곤혹스러운 빛이 되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기괴한 음향이 들려왔다.
무엇인가 웅얼거리는 듯한 심혼(心魂)을 흔드는 묘한 소리. 바로 조금 전에 한효월이 들었던 그 소리였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그 소리는 절 바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좀 전에는 잘못 들었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 소리는 악천후를 뚫고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면서 절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대웅전에 있던 라마들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그들도 괴이한 소리를 흘려내기 시작했다.
바로 한효월이 좀 전에 들었던 그 소리였다.
"옴마니반메훔…… 움마니반메훔……."
'저 소리였었…….'
한효월은 그제서야 그가 들었던 것이 무슨 소리인지를 알게 되었다.
가장 유력하다는 육자진언(六字眞言).
라마교에서 신성시하여 밤낮으로 읊조리는 바로 그 관세음보살의 육자대명왕진언이었다. 저들이 라마인 이상, 그 진언을 외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 음조(音調)가 중원의 것과 다른 것 또한 너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말 자체가 다르니까.
쏴아아…….
쏟아지는 빗줄기는 더 굵어졌고 바람은 거세 빗발이 사방으로 소용돌이치며 날았다.
하지만 그들의 진언은 끊이지 않았고 그 소리에 끌리듯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악천후를 뚫고서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빛 가사를 걸친 그들은 중원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모습의 불구(佛具)를 들고서 미끄러지듯이 대웅전을 향해 다가왔다.
바라를 든 자도 있지만 소리를 울리지는 않았다.
옴마니반메훔…… 진언을 외면서 그저 조용히 대웅전을 향해 다가오고 있을 따름이다.
십여 명의 무리를 이룬 그들은 나와 있던 라마들을 지나쳐 대웅전 안으로 소리도 없이 들어갔다. 그들을 기다리던 라마도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갔음은 물론이다. 그리고는 진언 소리가 잦아들었다.
…….
'뭘 하는 건지 모르겠군?'
잠시 숨을 죽이고 있던 한효월은 그들이 대웅전 안으로 들어선 다음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음을 보자 의혹에 잠겼다. 저들의 행색으로 보아 가까운 곳에서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와서는 저렇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때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한효월이 공력을 극도로 돋우고 있지 않았다면 듣기 힘들 정도로 낮은 소리였다.
"……내일 도착……."
들려온 장어는 그것뿐이었다. 낮은데다가 빨리 말을 해서 장어에 익숙지 않은 한효월로서는 더 이상 들을 방법이 없었다.
'내일…… 누군가 여기로 내일 온다는 것인가?'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효월은 그 자리를 떠났다.
저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일 누군가가 온다면 그때를 대비하는 것이 옳을 듯했다. 어쩌면 개방에서 이들과 관련한 어떤 소식을 알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