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首 마녀각성(魔女覺醒)
-마성이 눈을 뜨다.
세상을 공포(恐怖)로 떨게 만들 겁난 시작되다.
큰 배는 아니다.
사공도 하나이고 노도 하나.
작은 배는 물길을 따라 둥실둥실 소리도 없이 흘러가는 중이었다. 어차피 흐르는 물길에 배를 맡겨두면 동정호에 이르게 되어 있었다.
한효월은 배 위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한효월의 눈빛은 깊은 생각으로 복잡했다.
조금 전, 유성이 보낸 신호를 보았다.
예정대로 미행자를 잡았다는 신호였다.
'내 뒤를 따르는 자가 있었다는 것은, 내가 제천교주의 행방을 알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일부러 흘려보냈다는 의미. 그가 자신의 행적을 나에게 흘린 것은 나를 그곳으로 유인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봉신지비를 미끼로 한 죽음의 함정을 파둔 것인가?'
한효월의 눈빛이 침잠히 가라앉았다.
함정이라…….
그다지 신빙성있는 추측인 것 같지 않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신의 행방을 짐작하고 수하를 보냈던 중조산에서 전력을 기울여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 더 확실했을 터이다. 한효월의 무공이 아무리 대증(大增)했다 할지라도 중과부적의 상태가 되면 방법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를 제천교주일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그를 동정호로 유인하려고 했을까?
'내가 감으로써 그에게 유리한 국면이 전개된다는 것인가?'
어떻게?
아무리 생각해도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된 마당에 동정호로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개방의 방주가 그곳으로 갔고 주자미마저 남행하고 있었다. 과연 이 일과 그 일들이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되, 무조건 아니라고 따로 떼어 생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함정일지라도 가야만 하는 길.
그러나 자신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적이 모두 알고 있도록 할 수는 없었다. 비록 자신의 목적지를 적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언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그것이 그간 버려두었던 미행자를 처리한 이유였다.
미행자를 처리하는 것도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했다. 그래야 상대방이 혼란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과연 제천교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아낼 차례였다.
가능한 주자미와는 빨리 만나야 했다.
마교의 대법은 너무도 무서워서 지금 이 순간에도 명옥대법은 진행이 되고 있을 것이니, 어떻게 하든 독고경을 만나 그녀를 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연락이 닿지 않으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일.
바로 그때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한효월의 눈이 빛났다.
우연히 강변 쪽에서 갈대가 흔들리고 있음을 본 것이다.
그냥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앞쪽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쏠리는 형상.
무엇인가가 갈대 숲을 뚫고 놀라운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다.
그것이 절고한 경공술을 가진 자가 달리고 있는 것임을 직감한 한효월은 천천히 숨을 들이키고는 그쪽으로 의념(意念)을 집중했다. 남의 눈을 거리끼지 않고 저렇게 달릴 수 있다는 것은 화급한 일이 있다는 의미일 것으로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서 빛이 일었다.
선창에 앉아 있는 그인지라 강변에서는 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은?'
갈대 숲 사이로 얼핏 보이는 인영을 알아본 한효월의 눈이 빛났다.
날렵한 무복에 검 한 자루.
초상비(草上飛)의 절고한 경공을 시전하여 바람처럼 앞으로 내닫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용천성, 주자미의 수신호위였던 것이다.
그처럼 찾아도 만날 수가 없더니…….
"……."
막 그를 부르려고 했던 한효월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 남의 눈을 거리끼지 않고 급박하게 달리고 있음은 무엇인가 심각한 일이 발생한 것임을 짐작한 까닭에 생각을 바꾼 것이다.
"음? 아니……."
노를 젓고 있던 뱃사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효월에게 뭔가를 물어보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한효월의 모습이 홀연 사라져 버렸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배에서 7장가량 떨어진 강변으로 날아간 한효월은 용천선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용천성이 가는 길은 무창 방면, 오던 길을 되짚어가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채 얼마를 가지 않아 그들의 앞에 배 한 척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저 배는…….'
한효월이 배를 알아보고 중얼거렸다.
석양이 급격히 내려앉아 주위는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석양을 등에 이고 우뚝한 그 거선이야말로 한효월이 황학루에서 보았던 커다란 범선이었던 것이다.
용천성은 바로 그 배의 앞에서 지키는 사람과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관원들로 보이는 자들이 그와 함께 급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 안에 형수님이 계신 건가?'
한효월은 잠시 망설였다.
저 배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둠이 찾아들고 있는 가운데 정박하고 있는 커다란 범선.
그 범선은 보통의 배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조금만 더 컸더라면 이런 강물로 운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
그런 만큼 배 안의 규모도 컸고, 그 중심부라 할 자리는 일반 서민들이 생각하기 어렵도록 크고 호사스러웠다.
"정말 뜻밖이군. 태감(太監)이 여기까지 직접 올 줄은……."
태사의에 앉은 주자미가 입을 열었다.
그의 앞에 앉은 사람이 미미하게 웃었다.
그는 당금 조정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황상께서는 이 일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소관(小官)은 그분의 뜻에 따라 잠시 살펴보러 온 것일 뿐이지요."
"아직 해외에 있을 줄 알았는데 언제 돌아온 건가요?"
남삼의 중년인은 다시금 웃었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 배 또한 그때 타고 갔던 배……. 황상의 명을 받고 경사에서 다시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마마께서 하시는 일은 어떻게 되고 계신지 황상께서 매우 궁금해하십니다."
"아직…… 명확하지 않아요. 제천교가 저들과 연관이 있다는 증거는 아직까지 어디에서도 찾아내지 못했어요."
남삼인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북원(北元)의 잔당들이 움직이고 있어 황상께서는 많이 신경을 쓰고 계십니다. 게다가 소관은 아직 맡은 바 책무를 다하지 못한 상태라 부담이 큽니다. 마마께서 이쪽을 맡아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주자미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그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나요?"
그녀는 황실의 군주였다.
그런 신분의 그가 일개 환관에게 말을 놓지 못하고 있음은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이 환관이 평범하지 않음을 웅변하고도 남음이 있다. 환관의 신분으로 군주의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다는 자체가 평범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죽었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만에 하나라도 그가 살아남아 정통(正統)을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모으면 나라가 분열됩니다. 북원 또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테니 내우외환(內憂外患)이 되겠지요."
"해외에서 그의 행적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말을 끊은 남삼인은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하다가 말한다.
"소관의 생각으로는 만약 그분이 살아 계신다면 해외로 도피했다기보다는 대륙 어디엔가 계실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후일을 도모할 생각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주자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밖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마마, 용 시위가 급한 일로 뵙기를 청합니다!"
문이 열리고 용천성이 급히 들어와서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마!"
"무슨 일이냐?"
"소, 소저께서……."
"무슨 소리냐? 설마 경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이냐?"
주자미의 안색이 달라졌다.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주자미의 눈이 커졌다.
"사라지다니? 어떻게?"
"그걸…… 알지 못하겠습니다."
"알지 못하다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한단 게냐?"
주자미가 대노하여 탁자를 쳤다.
연약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손이지만 그 손의 내려침에 펑! 탁자가 그대로 반쪽이 나 내려앉았다.
"죽여주십시오!"
용천성이 머리를 떨구었다.
"자세한 상황을 말해 보라. 그렇게 말하면 상황을 알 수 없지 않은가?"
남삼인이 상황을 눈치 채고 진화(鎭火)에 나섰다.
주자미는 급한 연락을 받고 급거 남하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녀가 지금 만나고 있는 남삼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직접 움직였다는 것은 사안의 중대성을 의미하기에 그녀로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황제의 조카라 할지라도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그러나 일이 묘하게 꼬여 한효월과 만나지를 못했다.
독고해와 합류한 그녀는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는 독고경을 데리고 움직이기가 거북했다. 그녀를 용천성에게 맡겨두고 그 자리에 독고해를 남겨 그녀를 지키도록 한 주자미는 이곳으로 와 남삼인을 만났다.
그런데 그사이에 그녀가 사라지다니?
용천성과 독고경이 있던 곳은 멀지 않았다.
같은 무창성이었다. 객점은 외부의 눈길을 끌 수도 있고 하여 아예 무창성의 객관(客館)에 들어 관병들로 보초를 세웠다. 이렇게 되면 일반인들은 그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된다.
객관이란 곳이 공무차 오는 관원들을 묵게 하는 일종의 영빈관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들려왔던 피리 소리가 다시 들려온 것이다.
긴장한 용천성은 급히 사람들을 배치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독고경에게서도 아무런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피리 소리가 들려오자 용천성은 불안하여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위를 순찰했다.
그런데…….
"경아가 다시 움직였단 말이냐?"
"소관이 방으로 들어갔을 때 소저는 이미 계시지 않았습니다."
"없었다니? 언제 어떻게 사라진 것인지도 모른단 말인가?"
"예. 이부자리도 그대로 있고 누가 들어온 흔적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같이 있지 않았단 말이냐?"
"시녀를 같이 두었었습니다만,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잠을 잤다니?"
"잠을 잘 시간이 아닌지라 살펴보았으나 수혈(睡穴)을 짚이거나 어떤 약물에 중독된 증상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은 자신이 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밖에서 안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알지 못하다니……."
주자미는 발을 구르고 일어섰다.
"가시겠습니까?"
남삼인의 물음에 주자미는 입술을 물었다.
"가봐야지요. 이야기는 다시 하도록 해야겠군요."
"알겠습니다. 소관도 같이 가보도록 하지요."
"태감이 직접 말씀인가요?"
"다른 사람이 아닌 마마의 일이니……."
남삼인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게 해서 남삼인과 주자미는 급거 그 배를 떠나 육지로 올랐다.
주위는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거리끼지 않고 용천성과 더불어 십여 명이 날듯이 그곳을 떠났다.
'저 사람이 어떻게?'
그런 그들의 모습을 한효월은 놀란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사태가 급박하여 주자미가 금세 밖으로 뛰쳐나온 까닭도 있었지만 그녀의 뒤를 따른 남삼인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한효월이 황학루에서 만났던 바로 그 사람.
그러고 보니 간단한 사람은 아니었던 듯했다.
하긴 무창부의 지부가 접견을 청해도 간단하게 퇴짜를 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보통 사람일 리가 있을까.
'관부의 사람이란 건가?'
생각은 하면서도 한효월은 갈대 숲을 따라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한 식경가량을 달려 당도한 것은 무창성 내의 객관.
가장 먼저 당도한 것은 주자미와 용천성이었고 남삼인과 그를 호위하는 사람들은 조금 뒤에야 당도할 수 있었다. 주자미가 성내에 들어와서도 남의 눈을 거리끼지 않고 경신술을 전개하여 지붕 위로 달려온 때문이다.
객관은 관병(官兵)들로 물샐틈없이 늘어서 있었다.
"멍청한……."
그들을 사납게 흘긴 주자미는 그녀를 맞는 사도준을 스쳐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무창성은 대시진인만큼 객관도 컸다.
그것은 주자미 일행의 숙소 또한 크고 넓다는 의미다.
대청 두 개에 방이 여덟이나 딸렸다. 거기에 정원이 있고 높은 담장이 있어 다른 곳과 격리된다. 요소요소에는 관병들이 관솔불을 밝히고서 번을 서고 있으니 경계가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럼에도 그 내실에 있던 독고경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텅 빈 침상, 사색이 된 시녀가 구석에 얼어붙은 듯 서 있다.
침상은 누가 정돈이라도 해놓듯 깨끗했다.
"주변을 수색 중이고 무창지부에게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협조는 무슨 협조! 당장 모든 관원들을 다 동원하여 수색에 나서도록 시켜. 어떻게 하든 찾아야만 한다. 찾지 못하면 책임을 묻겠다!"
사도준의 말에 주자미가 차갑게 꾸짖었다.
그야말로 서릿발 같은 서슬인지라 사도준은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때 남삼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들키지 않고 안으로 들어서기 힘든 곳이로군요."
방에 들어선 그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처음 뱉어낸 말.
"그렇다면 그 아이가 저절로 나갔다는 말인가요? 그건 불가능해요. 창밖에 두 명의 고수가 번(番)을 서고 있고 그 좌우로 다시 관병들이 늘어서 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을 피할 순 없어요."
"그렇긴 하군요……."
그때였다.
밖으로 나갔던 사도준이 튀어 들어왔다.
"한 공자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한 공자라니?"
주자미의 눈이 커졌다.
방으로 안내된 한효월이 그녀에게 포권한다.
"길이 엇갈려서 예정보다 늦게 뵙게 되었습니다."
"여길 어떻게 알고?"
"우연히 강변에서 용 시위를 보고 따라왔습니다."
"그렇군요. 하아,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바람에 일에 차질이 생겼으니 어찌하면 좋을지……."
"소생이 한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짚이는 것이 있어서……."
"경아의 일에 관해서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녀의 의혹에 찬 얼굴을 뒤로하고 한효월은 옆에 있는 남삼인에게 포권을 해 보였다.
"다시 뵙는군요."
"그렇소. 이렇듯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남삼인이 마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는 사이인가요?"
의아한 빛으로 주자미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낮에 황학루에 올랐다가 잠시 뵌 적이 있었습니다."
한효월의 대답에 남삼인은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린 통성명도 하지 못했구료. 나는 정화(鄭和)라고 하오."
"한효월입니다."
한효월의 말에 정화는 놀란 빛을 떠올렸다.
"음, 강호에 새로운 영웅 한 사람이 나타났다고 하더니 그 사람이 바로…… 허허, 난 그것도 모르고 기우가 헌앙한 선비인 줄만 알았군."
'그는 세상에서 삼보태감(三保太監)이라고 부르는 당금 황상의 권신(權臣)이에요. 그는 이번에 모종의 일로 직접 황상의 명을 받고 이리 왔어요.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에요.'
주자미의 전음을 받은 한효월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삼보태감 정화.
그는 운남(雲南) 사람으로서 원래의 성은 마씨(馬氏)였다.
태감이 된 다음 받은 사성(賜姓)이 정(鄭)이라 정화라 한다. 그는 성조 영락(永樂) 3년(1405)부터 출사하기 시작하여 선종(宣宗) 선덕(宣德) 7년(1432)까지 전후 27년 간 모두 7차의 해외 항해로 유명한 인물이다.
정화의 함대는 당시로써는 천하제일이라 할 만했다.
명사에 남은 기록에 근거하면 그 함대의 기함은 길이가 44장(132미터)이나 되고 폭이 18장이나 된다 하였으니 당시 서양 어디에서도 그런 거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한번 항해할 때마다 거느린 인원이 적게는 2만에서 많으면 3만이나 되어 행해 도중 교역국과 문제가 발생하면 언제라도 전쟁을 수행할 수가 있었다. 실제로 몇 군데에서는 전쟁을 일으켜 교역국의 국왕을 사로잡고 아예 그 나라의 왕을 바꾸기도 하였었다.
그런 그이니 이따금 돌아오더라도 다시 출항할 준비에 바빠 다른 일을 돌보지 못했고, 그에 대한 황제의 신임은 두텁기 이를 데 없어서 누구도 감히 그를 거스를 수 없는 막강한 권력자였다.
정화의 해외 항해는 영락제의 치적 중 가장 돋보이는 것 중 하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느닷없이 여기에 나타나다니.
"조정의 고관(高官)이심을 미처 몰랐었군요."
한효월이 다시 포권하자 정화는 가볍게 미소를 띠었다.
"한운야학과 같은 무림의 협사에게 조정의 고관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사형이신 독고 맹주와도 그렇게 지냈으니 서로 편히 지내면 좋겠소이다."
여기에서 독고해가 언급될 것임은 미처 생각지 못한지라 한효월은 내심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명을 받들도록 하지요."
말을 하면서도 그의 눈은 침상에서 바닥 등을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말.
"역시 경아는 천장을 통해 밖으로 나갔군요."
그 말에 주자미가 놀라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당시와 오늘날의 천장은 다르다.
지금은 천장이 편평한 상태로 막히지만 옛날에는 서까래와 대들보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렇기에 양상군자(梁上君子)라는 말이 생길 수 있었다.
"여기 침상 쪽에 보면 미세한 먼지가 떨어져 있습니다. 침상에는 거의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 아래로 보입니다. 이런 곳에서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을 리 없는데 이렇게 먼지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 가져왔다는 의미일 텐데, 먼지를 가져올 사람이 있겠습니까?"
말과 함께 한효월은 한 덩이 구름처럼 그대로 천장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소리도 없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주자미와 정화의 눈에 놀람의 빛이 드러났다. 이런 청운직상(靑雲直上)의 고절한 경공신법은 세상을 놀라게 하고 남음이 있는 것이다.
가볍게 날아올라 대들보 위를 살펴본 한효월은 거미가 떨어져 내리듯이 조용히 그 자리에 다시 내려섰다.
"역시 그렇군요. 사람이 디뎠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침상을 보면서 설명했다.
"경아는 깨어난 뒤, 침상에서 스스로 날아올라 지붕을 통해서 밖으로 나간 것 같군요. 사실은 제가 이미 지붕 위에서 기와가 벗겨지고 사람이 나온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
주자미는 놀란 빛으로 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쭉 우리 뒤를 따르고 있었다는 말씀이오?"
"용 시위를 보고 대인의 배까지 따라갔었습니다만 그 자리에서 나타나기가 좀 이상해서 이곳까지 따라왔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주변을 조사해 보았을 따름입니다."
"과연 명불허전이군! 정말 감탄했소이다."
정화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 만약 그 아이가 누군가에 이끌려 나갔다면 몰라도…… 스스로 일어난 것이라면 시녀를 그냥 두고 나갔을 리가 없을 텐데……."
"용 시위,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한 공자."
용천성이 허리를 굽혔다.
"그 당시 사형께 무슨 다른 동정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전에 한번 비슷한 일이 있어서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는데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역시…… 제 추측이 맞는 것 같군요. 경아는 스스로 깨어난 겁니다. 그리고는 누구에게 들키기 싫어서 조용히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절대로 움직일 수 없도록 금제를 가했고, 더구나 사지대맥(四肢大脈)에는 금침자혈(金針刺穴)까지 되어 있는데……."
그녀의 말에 한효월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명옥대법의 무서운 점은 모든 금제에서 자유롭다는 점입니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할지라도 경아가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을 겁니다. 제가 이 시녀에게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한쪽 구석에서 파랗게 질려 서 있던 시녀가 겁먹은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그녀의 나이는 17, 8세가량으로 예쁘장한 생김이었다.
"겁내지 말고 내 말에 답만 하면 된다. 아무도 너를 탓하지 않을 것이니.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혹시 잠이 들기 전에 뭔지 알 수 없는 아득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지."
"아득한…… 느낌이요?"
"뭔가를 보고 그 뒤로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잘 생각해 보아라."
"……."
입술을 물고 눈을 깜박거리던 시녀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맞아요. 소비는 침상 위의 아가씨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까마득해지면서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아요. 깨어보니……."
손뼉이라도 칠 듯 말을 하던 그녀가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렸다.
주위의 무거운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시녀라는 신분이 눈치로 사는 것이니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한효월이 굳은 얼굴로 주자미를 보았다.
"아무래도 명옥대법이 절정(絶頂)에 이른 것 같습니다."
"저, 절정이라니?"
주자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었을 겁니다. 눈빛으로 시녀를 잠들게 하고, 조용히 이 자리를 벗어난 것은 아직 움직이기 거북한 상태였다는 뜻이고 그녀를 해치지 않은 것은…… 아직은 제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 그럼……?"
한효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흡혈을 하게 되면 인성을 상실하게 되는 마지막 단계가 될 겁니다."
"흐, 흡혈이라니? 피를 마신단 말이오?"
주자미의 얼굴에서 아예 핏기가 사라졌다.
"……."
한효월은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찌 흡혈뿐이겠는가.
명옥마녀가 되면 인성을 상실한다.
남자를 후려 그 정기를 흡취하는 채양보음(採陽補陰)까지도 전혀 서슴치 않게 된다. 말 그대로 마녀가 되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모든 것을 버리게 되니 마녀라고 불리는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황제의 명이 추상과 같다 할지라도 그 자리를 떠나오지 않았으리라.
그래도 설마 그렇게까지야 했었는데…….
"저도 나가서 경아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효월이 굳은 표정으로 주자미에게 말했다.
"바, 방도가 없겠어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다급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 고고한 그녀라 할지라도 자식을 괴이는 어머니의 마음이 다를 리 없다.
"흡혈하기 전에 찾아야만 합니다. 만약 피를 마신 다음이면……."
한효월은 말끝을 흐렸다.
"태감!"
주자미가 정화를 돌아보았다.
다음 말이야 듣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이 마당에 그 말을 다 들어야 한다면 둔하거나 무슨 목적을 가지고 상대와 흥정을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예, 마마. 장백호(章百戶)!"
"부르셨습니까?"
그의 부름에 문밖에 서 있던 청삼인이 안으로 상반신을 내밀었다.
"사람들을 모두 풀어라. 무슨 뜻인지 알겠지? 가기 전에 용모파기를 얻어가도록 하거라."
"옛!"
깊숙이 허리를 굽힌 그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제가 데려온 사람 중에는 금의위도 포함되어 있으니 그들이라면 뭔가 성과를 얻어낼 겁니다. 그들이야 사람 찾는 것이 전문이니……."
지금까지 그의 모습은 사람 좋은 이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일단 수하들 앞에서 명을 내리자 당당한 모습이 드러난다.
금의위는 당시 관리들에게 공포의 상징이었다. 그런 금의위를 간단히 부릴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알고도 남음이 있게 하는 대목.
한효월은 방을 벗어나자 용천성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
용천성이 한효월을 쳐다본다.
'일대에 죽은 사람들이 있는지 찾아보도록 하시오. 특히 체내의 피를 모두 빨린 사람이 있는지…….'
"그……."
용천성이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하자 한효월이 머리를 저어 보였다.
주자미가 남아 있는 방 쪽으로 한효월이 시선을 던짐을 보자 그 의미를 알아챈 용천성이 굳은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그때였다.
한 사람이 다급히 달려 들어왔다.
바로 사도준이었다.
"무슨 소식이라도?"
그의 기색을 본 용천성이 급히 물었다.
"침의를 입은 사람이 하늘을 날아갔다는 목격자 몇을 찾아냈소……."
* * *
어둠이 짙어졌다.
하늘엔 구름 몇 점이 보이긴 하지만 어둠은 이제 충분히 하늘을 덮고도 힘이 남아 대지를 누를 수 있었다.
금빛으로 출렁이던 물빛도 푸르다 못해 먹빛으로 잠들었다.
출렁이는 강물은 밤이든 낮이든 상관없이 흐른다.
강변에 우거진 버들의 우람한 그늘이 갈대의 흐드러진 숲으로 변해도 강은 그저 흐를 뿐이다.
주인 잃은 배 한 척도 그러한 물길의 흐름을 따라 출렁출렁 흘러간다.
노도 없다.
그저 흘러갈 뿐이다.
그 주인이 저 앞쪽에서 흰자위가 사라진 눈을 부릅뜨고 강물에 얼굴을 처박고 있음을 배가 알 리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물속에다 얼굴을 담근 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를 배가 알 필요가 없거니와 그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핏줄기가 강물을 붉게 물들이는 것조차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그저, 공포로 물든 그의 마지막 모습만이 거기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것이 천하를 떨게 한 공포의 서막(序幕)이었음을 죽은 사람조차 알지 못했다.
* * *
머리가 깨어질 것만 같다.
하지만 어느 사이인가, 아픔은 사라지고 몽롱하기만 하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희미한 기억 속에서 한 사람이 그녀를 측은히 바라보고 있다.
나이답지 않게 우뚝한 사람. 수려하다는 말로도 부족하여 잘 깎아 명공이 다듬어놓은 옥과도 같은 사람.
그의 눈빛이, 그의 얼굴 모습이 점점 또렷하게 자리한다.
"사숙……?"
그녀가 문득 신음을 흘렸다.
몽롱하던 정신이, 어딘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여 뭔가를 해야만 풀릴 것 같았던 갈증이 조금 약해지면서 정신이 든다.
갈대 숲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갈대 숲 밖으로 흘러가는 강물이 보일 따름.
자신의 행색을 내려다본 그녀는 아연해졌다.
하늘거리는 비단 침의.
그나마 흙이 묻고 아래쪽은 강물에 젖어 늘어졌다.
옥과도 같이 투명히 빛나는 다리가 허벅지까지 드러나 고혹적인 빛을 뿜고 있다.
"대체 이게?"
놀란 그녀는 황급히 옷깃을 여미다 안색이 돌변했다.
손에 묻은 피…….
어디서, 왜 묻었는지도 알 수 없다.
선혈이 그녀의 투명하리만큼 아름다운 손을 물들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그녀, 독고경은 창백한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배 한 척 위에 앉아 있었다. 어선은 아니고 앞쪽이 날카로운 것으로 미루어 빨리 달릴 수 있는 쾌속선이다. 이런 배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일 리가 없고 배를 버릴 리도 없다.
문득 무엇인지 불쾌한 기억이 뇌리를 엄습한다.
달려들던 사내들의 모습들이 몽롱한 꿈처럼 떠오른다.
"뭐야, 뭐야! 이게 뭐야……."
그녀는 머리를 움켜쥐고서 갑자기 소리쳤다.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똑똑한 여자였다.
영웅인 아버지와 뛰어난 어머니의 소생인 그녀가 둔할 리가 있을까, 제압당한 상태로 있으면서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대강 짐작케 되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왜 여기 혼자 이렇게 이러고 있단 말인가.
"사숙이 온다고 했었는데……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독고경은 자신에게 말하듯 다시 중얼거렸다.
꿈이라면 깨어버리길.
바로 그때였다.
"저기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철썩거리는 물살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배 몇 척이 나타났다.
아주 빠르게 물을 가르며 달려오고 있는 배의 생김은 지금 그녀가 앉아 있는 배와 아주 흡사했다.
'그래, 저들에게 물어보면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알런지도…….'
독고경은 꿈을 꾸듯 몽롱한 자신의 정신을 다잡으려고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네가 본 왕자의 수하들을 죽였느냐?"
그녀의 뒤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내심 깜짝 놀란 독고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섭선을 쥔 금삼의 청년 한 사람이 흔들리는 갈대 위에 우뚝 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를 타고 오던 그가 몸을 날려 갈대를 밟으면서 이리 달려왔다는 것은 그가 고절한 경공을 펼칠 수 있는 고수라는 의미다.
"당신은……."
그를 본 독고경은 그가 어디선가 본 듯함을 깨닫고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금삼의 청년 또한 그녀를 보고 묘한 빛이 되었다.
"설마……?"
그는 자신의 눈을 확인하려는 듯이 그녀를 다시 살펴보았다.
"혹시…… 독고 사매?"
믿기지 않는 듯 금삼의 용포청년이 그녀를 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그를 보는 독고경의 눈에 의혹의 빛이 어렸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사매가 어떻게 여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모습……."
그가 말끝을 흐리자 독고경은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그제서야 자신의 처경(處境)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잠자리 옷, 그것도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으니 벗은 것이나 진배없다. 제아무리 무림의 여인이 활달하다 하더라도 이런 마당에는 몸둘 바를 모르게 되는 것이 정상.
하지만 몸을 돌린다고 나신과 다름없는 몸이 가려질까.
잘록한 허리에 풍만한 둔부의 곡선이 더 선명하게 눈을 찌른다.
'으음…….'
금삼의 청년은 내심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에 욕정의 빛이 순간적으로 스쳐 갔다.
하지만 상대의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감히 그것을 드러낼 수야 없다.
상대는 남해 관음초 절진 신니의 제자, 자신은 남해용왕의 손자인 신분. 우연히 관음초에 들렀던 그는 독고경을 보고 반해 몇 번이나 찾아가 구애(求愛)를 하였지만 성정이 차가운 독고경은 그를 본 척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저런 모습의 그녀를 보게 될 줄이야!
"모두 물러가거라!"
금삼청년, 소용왕 부해교가 갑자기 소리쳤다.
갈대 숲을 헤치며 다가오던 물질 소리가 멎고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아무 일 없으십니까?"
소용왕 부해교의 신형이 훌쩍 솟구쳐 갈대 위로 올라갔다.
하늘거리는 갈대 위에 올라선 그는 다가오던 수하들에게 준엄하게 소리쳤다.
"너희들은 이 자리를 물러나 주위를 경계하여 잡인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해라! 알겠느냐?"
"존명!"
급히 갈대밭에서 배들이 뒤로 빠져나갔다.
한 수 능공답위(凌空踏葦)의 상승경공을 시전하여 보인 부해교는 슬쩍 몸을 날려 뱃전에 올라섰다.
그가 올라섰음에도 배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사매가 여기에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날 보지 말아요!"
날카로운 질타.
찔끔한 소용왕 부해교는 아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하들을 시켜서 옷을 구해오도록 하겠소. 그때까지 우선 아쉽지만 내 옷이라도 걸쳐 몸을 가리도록 하시오."
그는 허리띠를 풀고 금삼을 벗어 그녀에게로 던져 주었다.
철썩…….
물살이 배를 흔든다.
등을 돌린 독고경과 그녀를 보고 선 부해교.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른다.
일단 그의 금삼(錦衫)을 받아 위에다 걸쳐 위는 대강 가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래까지 가릴 수는 없어 종아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 그것을 보는 부해교는 가슴이 뛰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죠?"
독고경이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어떤 여인이 수하들에게 독수를 쓴다고 하여…… 그런데 그것이 사매라니……."
"내가 말인가요?"
"그럼 아니란 말이오?"
"그래요."
"아니라고?"
얼떨떨한 빛으로 부해교가 그녀를 보았다.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건가요?"
"그, 그럴 리가! 내가 어찌 사매의 말을 믿지 않겠소?"
독고경은 미간을 찡그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당신과 나는 아무런 사승(師承) 관계가 없어요. 나를 사매라고 부르지 말아요!"
"하하, 당신의 사부이신 절진 신니와 우리 할아버님은 오랜 친구 사이니 사승 관계와 뭐가 다른 점이 있겠소? 양가(兩家)는……."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사숙이라고 불러야겠군요."
독고경의 빈정거림에 부해교는 태연히 웃어 보였다.
"정식 사승 관계가 아니니, 서로의 나이로 따짐이 옳지 않겠소, 사매?"
"……."
그를 쏘아보던 독고경은 문득 미미하게 웃음을 떠올렸다.
눈이 웃는다. 입술 끝에서 흐르기 시작한 선의 움직임은 얼굴 전체로 번져 갔다. 희다 못해 빛을 뿜는 치아가 붉은 입술 사이로 살짝 드러난다. 아름답다 못해서 요기롭기조차 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 부해교는 숨이 가쁘고 가슴이 진탕되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전신이 공중에 붕 뜬 듯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천지지간에 그녀가 웃는 얼굴만이 가득 찼다.
"사, 사매……."
부지간에 가쁜 숨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온다.
"나를 좋아하나요?"
문득 독고경이 물었다.
"그, 그렇소.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이야기하지 않았소?"
"그렇던가요?"
감미로운 음성과 함께 독고경은 가슴팍을 여미고 있던 손을 놓았다. 금삼이 그녀의 발 아래로 흘러내렸다.
"사, 사매……."
부해교가 신음을 흘렸다.
하늘에는 달이 떠 있다.
그 달빛 아래 독고경이 조용히 서 있었다.
옷을 입었으되, 젖은 침의는 없는 것보다 못하여 어깨의 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가슴의 풍만한 선도 뚜렷하고 곤두선 유두가 올연(兀然)하게 눈을 쏘아온다.
그 모습으로 그녀는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나를 가지고 싶은가요?"
"그, 그런……."
일순 당황한 빛이 부해교의 얼굴에 드러났다.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말이 독고경의 입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독고경은 손을 들어 부해교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그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에다 올려놓았다.
뭉클 하는 감각이 부해교의 전신을 전뇌(電雷)와 같이 관통했다.
바로 그 순간, 독고경이 팔을 뻗어 그의 목을 휘감더니 앵두 같은 입술을 열어 그의 입을 덮쳤다.
"욱?"
부해교의 눈이 다시 커졌다.
그의 입술을 빨던 독고경이 그의 입술을 깨물었기 때문이다.
통증과 함께 피가 흘렀다. 그 피를 독고경은 소리도 없이 조용히 빨았다. 아주 맛있다는 듯,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그 눈은 요기롭게 웃고 있었다.
"사, 사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 부해교가 그녀를 밀어내려 했다.
그때 독고경이 그의 귀에다 속삭였다.
"나를 가지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 말은 참으로 괴기하고도 끔찍한 힘으로 그의 뇌리를 온통 휘저어버리고 말았다.
"사매!"
괴성과도 같은 신음. 그가 그녀를 덮쳤다.
그에게 깔린 채 그녀가 뒤로 넘어졌다.
배가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이 출렁거렸다.
깔깔깔!
그녀의 웃음소리가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낮게 깔렸다.
피가 흐르는 입술로 부해교는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그녀의 침의를 좌우로 잡아당겼다.
그까짓 잠옷이 무슨 힘이 있으랴. 가벼운 소리와 함께 그녀의 우윳빛 상반신이 달빛 아래 그대로 드러났다.
드러난 그녀의 유방이 부해교의 손 안에서 뭉개졌다. 떨리는 부해교의 손이 그녀의 옷을 밑에서 걷어 올렸다.
독고경이 미끈한 두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사, 사매……."
격한 숨이 부해교의 입에서 토해졌다.
그의 떨리는 손은 그녀의 고의를 벗겨내는 중이었다.
침의 속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장애물.
독고경은 그에게 자신을 맡겨놓고서 눈을 감았다. 차마 눈을 뜨지 못하겠다는 듯. 부해교의 손길이 사납게 그녀의 전신을 헤집었다.
"사매, 사매! 사랑하오. 난, 사매가 이처럼 나를 사랑하고 있는 줄 몰랐소. 사매……."
부해교는 중얼거리면서 입술을 미끄러뜨려 그녀의 유방을 물었다.
찰나, 독고경의 전신이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떨림이 인다.
그녀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 눈에 서린 것은 경악(驚愕)과 불신(不信)의 빛.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다는 그런 빛인 듯싶었다. 자신의 앞가슴을 빨고 있는 그의 모습에 그녀의 눈에 분노가 폭염(暴炎)처럼 일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찰나간의 일로 끝났다. 이내 그 눈에서는 사악하고도 섬뜩한 웃음이 요기롭게 피어나 그것을 대신했다.
그녀는 입가에 묻은 피를 혀로 핥았다. 소름이 끼치는 모습.
그리고 그녀는 손을 뻗어 그를 감싸 안았다.
다리를 벌렸다.
"사매!"
부해교의 눈에서 핏발이 섰다.
잠옷은 그녀의 팔에만 걸쳐져 있을 뿐, 활짝 젖혀져 이제 그녀의 나신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적나라한 모습을 내려다본 부해교는 미친 듯 바지를 까 내렸다.
배가 출렁거렸다.
그녀의 발 끝에 걸렸던 고의가 떨어졌다. 출렁이는 뱃전 아래, 강물 위에 떠 있던 달이 그 고의에 이지러졌다.
바로 그 순간이다.
"휘이이익∼!"
긴 휘파람 소리[長嘯]가 들려와 뱃전을 친다.
장소성의 위력은 놀랍도록 강해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어질 듯 파도가 일었다.
마지막 순간으로 가려던 부해교의 전신이 흠칫, 굳어졌다.
"경아! 경아-"
낭랑한 음성이 저 멀리서 들려왔다.
그 소리에 독고경의 전신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대풍운연의』 제8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