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七首 장계취계(將計就計) (69/113)

第七首  장계취계(將計就計)

-수뇌를 만나다.

함정(陷穽) 속에 다시 함정이 숨어 있다.

 한효월은 무거운 마음으로 천운곡을 벗어났다.

 이처럼 급하게, 마치 쫓기듯 천운곡을 떠난 것은 두 여인의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는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서문운하를 만난 것은 너무도 뜻밖, 그녀가 무우곡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한효월은 그녀의 신분이 범상치 않음을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강호삼괴와 같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그녀를 보호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갈 곳이 없어서 무우곡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답은 하나.

 그곳에서 그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그것은 너무도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미인의 호의(好意).

 오죽하면 미인은 영웅의 무덤이라는 말까지 있을까.

 한효월이 서둘러 그녀를 천운곡으로 소개(疏開)하고 다시금 그곳을 떠나온 것은 바로 그녀의 그러한 호의가 두려웠던 까닭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고, 한효월 또한 그러한 것을 모를 바보가 아니다.

 조용한 생활에 익숙해 있던 그였다. 그러나 사부의 행방을 찾고 사형의 유업(遺業)을 계승할 생각으로 나갔던 강호.

 그곳은 하루하루, 한 순간순간이 칼날 위의 곡예와 같았다. 적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그를 죽여야 했다. 어제까지, 아니, 조금 전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을…….

 손이 피로 물드는 것을 보면서 내심 수많은 회의가 일었다.

 그렇기에 무우곡에 앉아 하늘을 보자 문득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런 그이기에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면, 그것을 뿌리칠 자신이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무우곡에서 그렇게 고요히 보내고 싶기도 하였다. 하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욕심으로 그녀를 잡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운명을 너무도 잘 아는 그였기에, 설사 그녀가 원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하지만 그렇게 떠나는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만 같아서 한효월은 애써 신법을 전개하여 바람처럼 앞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미 밤은 깊어 어둠은 온 산을 휘감았고 그 깊은 밤을 뿌리치면서 저 멀리에서 희미한 새벽의 그림자가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한효월이 달려온 곳은 뜻밖에도 다시 무우곡이다.

 그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신형을 솟구쳐 무우곡의 입구에 있는 거대한 암벽을 차고 오르기 시작하였다.

 까마득한 암벽.

 어둠 속에 십여 장이나 높은 그 암벽을 오르자 뜻밖에도 그 위치는 매우 은밀했다. 주위를 모두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으며, 우거진 고송(古松)에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누가 알아보고자 해도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거기에 한 사람이 있었다.

 형형한 눈빛을 빛내면서…….

 "그간 무양하셨습니까?"

 어둠 속에 버티고 있던 거한은 한효월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나이는 한효월보다 많다. 그럼에도 그의 태도는 정중하고 깍듯하다.

 천무(千武).

 지난날 맹주부에서 홀연히 사라졌던 거령신권 천무.

 건곤무적 독고해의 셋째 제자이자 무림맹의 무공교두였던 그였다.

 산과 같던 거구는 여전하다. 하지만 다시 보면 그는 전혀 달랐다. 전의 그는 움직이면 산악이 움직이는 듯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움직이지 않아도 태산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세가 달랐다. 어찌 보면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가 갑자기 나타났음에도 한효월은 조금도 놀란 빛이 아니었다. 마치 그가 거기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태도.

 "좋아 보이는군."

 한효월이 그를 보면서 웃어 보였다.

 어둠 속에서 흰 이가 친근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덕분입니다."

 "연공(練功)은 예정대로 되고 있나? 탈락자는 없었던가?"

 "모두가 죽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진도가 조금 떨어진 자가 셋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이 빠른 것일 뿐, 그들도 예정된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행이군! 출관 날짜는 언제쯤 될 것 같은가?"

 "대공을 이루려면 반년.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두 달 이내면 가능합니다."

 "반년이라……."

 한효월은 나직이 중얼거린다.

 "반년을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급박합니까?"

 굳은 얼굴로 천무가 묻자 한효월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오른다.

 "아무리 급해도 출관을 앞당길 수는 없지. 그건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 될 테니까. 일당백의 고수가 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네. 힘을 얻었을 때에만 이 숨겨진 패는 의미가 있게 되겠지……."

 숨겨진 패(牌).

 그것을 위해서 한효월은 천무와 자질이 뛰어난 무림맹의 위사들을 선발하여 이곳, 바로 무우곡에서 잠수(潛修)하도록 안배를 했었다. 그럼에도 이심환이나 서문운하가 그들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 것은 그들이 수련하고 있는 곳이 무우곡의 뒤에 위치한 내곡이었기 때문이다.

 그 내곡은 출입구마저 달랐다.

 "바깥은 어떻습니까? 사형들께서는……."

 잠시 망설이던 천무는 궁금함을 참을 수 없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끝나지 못했다. 한효월이 그 말을 잘랐기 때문이다.

 "외부의 일은 신경 쓰지 마라. 지금은 오로지 연공만을 생각할 때이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정말 필요하면 내가 지급호출령을 발동할 테니, 그때까지는 모든 걸 잊어버리고 수련에 전념토록 해."

 말을 끊은 한효월은 그를 보았다.

 "강호에 다시 나간다면…… 전과 달라야 하지 않겠나?"

 그 말에 천무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눈에서는 신광이 이글거리면서 쏟아져 나왔다.

 "명심하겠습니다."

 하루하루를 뼈를 깎는 수련으로 지낸 그였다.

 무치(武痴), 무광(武狂)이라고까지 불리던 그였다.

 그렇듯 자부심을 가졌던 무공이 적에게 허물어질 때, 그가 가진 모든 것은 산산이 부스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기회가 바로 한효월이 만들어준 수련이었다.

 한효월은 시시각각 생의 위협을 받고 살아온 사람이다.

 이 세상의 어떤 누구도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효월은 그 자신이 보기 드문 천재였던 만큼,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수많은 연구를 했었고 인간의 잠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 밤잠을 설쳤다.

 그런 결과가 바로 무우곡의 내곡에 숨겨져 있었다.

 비록 그것들이 한효월의 생을 보장해 주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범인이라 할지라도 단시일 내에 가공할 존재가 될 힘이 그곳에 존재했다.

 그것을 아는 것은 한효월과 유성, 두 사람뿐이었다. 굳이 더 있다면 실종된 사부인 경월선인 정도일까. 하지만 경월선인조차도 그 상세한 내막은 알지 못한다. 그저 한효월의 노력이 가상하고 안타까워 모른 척하며 상관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심환이나 서문운하도 무우곡에 내곡이 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가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모두 좋아할 텐데……."

 천무가 다시 물었다.

 미미한 웃음이 한효월에게 스쳐 갔다.

 "다음에, 모두가 완성된 다음에 보기로 하지. 그보다 갔던 일은?"

 한효월이 정색을 한다.

 천무의 얼굴 또한 정색으로 바뀌어졌다.

 "놈들을 쫓아가 있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임시 거처는 사십 리 밖에 있는 숲 속 사냥꾼들의 마을이었고 지금 거기 있습니다."

 "다른 움직임은 없나?"

 한효월이 물었다.

 "놈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사냥꾼들의 마을까지 퇴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잠시 쉬면서 전열을 정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서 전서구를 날려 연락을 했는데…… 그게 바로 이겁니다."

 천무가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놈이 나타났음. 공격 실패. 현재 받은 타격 회복 불능. 전교(傳敎)를 기다림.>

 "이걸 가져오면?"

 "제가 베낀 겁니다. 전서구는 다시 놓아주었으니 상관없습니다. 전서구의 뒤를 추적하고 있으니 곧 간 곳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한효월의 얼굴에 웃음기가 피어났다.

 "과연 사형의 자랑스러운 제자로군."

 천무는 쓴웃음을 지을 뿐 말을 돌렸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로 그곳으로 가보겠다. 이 일에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의미가 숨어 있는 것 같으니까 가면서 생각해 볼 작정이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어둠 속을 바람처럼 가르는 두 인영이 있었다.

 한효월은 자신의 앞에서 몸을 날리고 있는 천무의 뒷모습을 보면서 암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천생무골(天生武骨)이군.'

 무림맹을 떠날 때와는 분명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오랜 시일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이런 정도의 진경(進境)을 보일 수 있다면 그간 그가 얼마나 각고정진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일.

 한효월은 무우곡을 공격하던 자를 놓아주면서 암중에 신호를 했었다.

 그들이 무우곡에 나타나는 순간에 그들은 이미 천무의 감시 하에 놓여 있었다. 별도의 명이 없는 한 모든 것을 두고 보기만 하라고 해서 그냥 있었을 뿐, 서문운하와 무림삼괴가 나타나 무우곡에다 둥지를 트는 것까지도 그는 다 알고 있었다.

 내곡은 무우곡의 후면에 위치하지만 비밀 통로를 통해서 자유로이 바깥으로 출입이 가능한 곳이다. 그런 천무였기에 한효월의 신호를 받자 바로 행동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산자락을 타고 넘어가자 어둠에 짙게 묻힌 숲이 나타났다.

 이곳이 어딘지는 한효월도 잘 안다.

 몇 번 여기에 사는 사냥꾼들과 마주친 적도 있었기에.

 아마도 그들을 다그쳐서 무우곡이 있음직한 곳을 알아냈을 것이리라. 만약 그렇다면 본의 아니게 그들에게 큰 피해를 끼쳤을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셈이다.

 그들의 눈앞에 드문드문 몇 채의 초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아 겉으로는 깊은 잠에 든 듯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을 한효월은 직감할 수 있었다.

 단순히 잠들었다고만 보기에는 너무 고요했던 것이다.

 타호(打虎).

 이 사냥꾼들의 마을 이름이다.

 모두 해서 십여 호가 있는 타호촌의 사람들은 순박하지만 또한 타호라는 이름대로 매우 용맹한 사냥꾼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마을에 저들이 진을 쳤다면 충돌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한효월은 무거운 얼굴로 마을의 동정을 살폈다.

 '놈은 저 집에 있고 나머지는 집 주위에 은신하고 있습니다.'

 옆에서 천무가 전음으로 알려왔다.

 그가 가리킨 집은 타호촌의 촌장 집이었다.

 나이 60에도 범 같은 눈빛을 한 촌장의 얼굴이 뇌리를 스친다.

 바로 그때.

 푸드득 소리를 내면서 비둘기 한 마리가 그 집으로 곧장 날아들었다.

 창문으로 비둘기가 날아들자 휘장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밖으로 불빛이 새 나가는 것을 휘장으로 막고 있는 듯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한효월에게서 혼비백산 도주했던 흑포중년인이었다.

 그가 나서자 이미 명령을 받은 듯 어둠 속에서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그를 따라나섰다. 그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도울 일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게.'

 한효월이 전음으로 천무에게 지시했다.

 '사숙께선?'

 '난 지금 바로 저들의 뒤를 따르겠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지금은 힘을 기를 때라는 걸 잊지 마라.'

 "……."

 천무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한효월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길게 심호흡을 하고는 타호촌으로 들어갔다.

 피가 끓었지만 지금은 참아야 할 때임을 알기 때문이다.

 흑포중년인은 주위를 살피면서 빠른 속도로 중조산을 벗어났다.

 그렇게 그가 밤바람을 가르며 달려간 곳은 원곡(垣曲).

 황하 변에 위치한 시진(市鎭)이다.

 일반인이라면 아침 해가 솟은 다음에 도착할 거리였지만 그들은 경공을 전개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 한 시진 만에 원곡에 도달했다. 성문은 닫혀 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밖에 있는 장원(莊園)으로 갔다.

 장원은 그 지방 토호의 것인 듯 제법 커 보였다.

 잠시 주위를 살펴본 흑포중년인은 장원의 후원 담을 날아 넘었다.

 그는 담을 넘자 손에 쥐고 있던 영패(令牌)를 들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 때문인지 그를 막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후원 정자에 이르자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부천각의 수풍령(隨風令)이 당도했습니다!"

 그 음성이 들리자 흑포중년인을 비롯한 그 수하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주위는 그야말로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토호(土豪)의 장원인 듯한 이곳의 규모로 보자면 적어도 백 명 이상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사람이 있는 기척조차 없다. 아무리 깊은 밤이라 할지라도 개 짖는 소리조차 나지 않으니 설마 이 큰 장원이 텅 빈 것인가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

 후원의 정자 주변은 더욱 조용하다.

 심지어는 벌레들의 울음소리조차 없었다.

 정자의 주변은 제법 신경을 써서 조경을 한 모습이 역력하다.

 기암괴석을 쌓아 만든 가산(假山) 자락에 위치한 정자는 옆으로 제법 큰 연못 하나를 등진다. 그리고 정자에서 후원 누각까지 길게 바닥에다 대리석을 깔아 밤에도 달빛을 받아 뿌옇게 빛나니 장원의 주인이 재력을 가진 사람임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청풍헌(聽風軒).

 그렇게 이름된 이 정자에는 지금 한 사람이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연못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손에 팔보선(八寶扇) 하나를 들고서 달을 감상하는지 연못을 감상하는지 정자로 흘러드는 달빛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채 묵묵히 서 있다.

 흐르는 것은 고요한 기품.

 그를 향해 흑포중년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수풍령주, 각주(閣主)를 뵙습니다!"

 그의 말에 따라 나머지 수하들도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말해 보라. 실패한 이유가 무엇이지?"

 낮은 음성이 정자에서 흘러나왔다.

 "너무 강했습니다."

 흑포중년인이 머리를 숙인 채로 말했다.

 "강했다?"

 "예……."

 흑포중년인은 떨리는 음성을 가다듬어 그때 상황을 자세히 말하였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흑포중년인은 불안하고 초조하여 침이 말랐다.

 "알겠다. 물러가라."

 "옛?"

 뜻밖이라는 듯 흑포중년인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번 일은 문책하지 않겠다. 그만 물러가라."

 흑포중년인은 그 말에 황망히 고개를 조아리고는 쫓기듯 그 자리를 떠났다.

 "한효월의 진경(進境)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군요."

 정자안에서 예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정말 사상 유래를 찾기 힘들 것 같군……."

 뒤를 이어 전혀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바로 그 정자 안에서.

 정자 안에는 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연못을 향해 놓인 그 의자에는 비단으로 된 검은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앉아 있다. 그의 뒤에 선 것은 부천각의 수풍령주에게 등을 보였던 바로 그 사람. 팔보선을 든 그가 우뚝 서 있어서 의자에 앉은 사람은 정자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의 능력으로 볼 때, 이런 속도라면 일 년만 지나면 누구도 그를 당해내지 못하게 될런지도 모릅니다. 이번에 그를 잡았어야 했는데……."

 "지금 그는 어디 있나?"

 "아직은 무우곡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는 한효월 외에 또 다른 자가 있는 듯한데 아직 누군지 확인은 하지 못했습니다. 감시를 하고 있으니 곧 연락이 올 것입니다."

 "사사건건 말썽이군!"

 톡톡, 의자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면서 그가 혀를 찼다.

 그의 뒤에 선 사람은 부천각주.

 부천각은 제천교의 눈과 귀와 같다.

 각주 아래로 다섯 명의 영주가 있고 수풍령 또한 그중 하나였다. 그 지위는 낮지 않아 수뇌부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의자에 앉은 그의 뒤에 서 있다.

 "인원을 모두 풀어 그의 종적을 놓치지 않도록! 만에 하나라도 그가 이번 일을 눈치 채도록 하면 안 될 테니까……."

 잠시 말을 끊었던 그는 조금 짜증스러운 빛으로 말을 이었다.

 "만에 하나, 한효월이 이 일에 끼어들어 또다시 초를 치게 된다면 이 일을 맡은 부풍각주 또한 책임을 벗기 힘들 것이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부풍각주가 굳은 얼굴로 답했다.

 연못 쪽에서 드러난 그의 얼굴은 뜻밖에도 펑퍼짐했다. 둥근 호떡과도 같은 얼굴에 성근 팔자수염이 전혀 정보를 관리하는 사람답지 않다. 날카롭고 이지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게다가 덩치 또한 크다. 오죽하면 의자에 앉은 사람을 가릴 정도일까.

 나이는 50대 후반.

 그러나 길게 가늘게 찢어진 두 눈만은 그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리 차갑고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퐁! 퐁!

 갑자기 정자 앞의 연못에서 물결이 일더니 잉어 한 마리가 퍼덕거리며 튀어나왔다.

 잉어는 눈이 휘둥그레서 몸부림을 쳤다.

 놀랍게도 잉어는 퍼덕거리면서 계속해서 위로 솟구쳐 올랐다.

 다섯 자, 일곱 자, 열 자…….

 의자에 앉은 흑의인은 무심한 눈길로 잉어를 바라본다.

 "어떻게 잡아 올릴 것인지 두고 보겠다."

 흑의인의 어조에 비수가 날을 세워 번뜩였다.

 "부풍각은 어차피 눈과 귀와 같은 존재. 그의 소재를 파악하는 것이 임무이니 나머지는 이교주님께서 하교(下敎)하여 주시길."

 공중에서 퍼덕거리는 잉어를 바라보면서 부풍각주는 침착히 대꾸한다.

 '이교주?'

 숨어 있던 한효월은 놀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있는 자리에서 청풍헌이란 정자까지는 대략 8, 9장이나 떨어졌다.

 내공을 모아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말을 알아듣기 힘든 거리다. 겉보기에는 잠든 듯 보이는 이 장원은 실제로는 수많은 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한 걸음도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가 지금 자리한 가산 귀퉁이의 암벽 틈으로 스며드는 것도 실제로는 대단히 큰 모험을 감수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매우 전망이 좋았다.

 연못 건너 정자가 바로 눈앞에 보이고 의자에 앉은 사람도 정면에서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밤인데가 너무 먼 거리라서 기실 거의 의미가 없었겠지만 천조신안이란 특이한 공력을 펼칠 수 있는 한효월인지라 그들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말소리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들은 그들의 신분은 뜻밖에도 대단했다.

 제천교의 모든 정보를 찾아내는 이목인 부풍각주에다가 이젠 이교주. 이교주라면 교주의 바로 아래 직책, 한효월이 만난 제천교의 최고위급 인물인 셈이다.

 파닥, 푸드득!

 아닌 밤중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물 아래에서 잠자다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에 잡혀 올라간 잉어는 죽을힘을 다해 공중에서 퍼덕거린다. 그러나 죽을힘을 다해도 무형의 힘은 점점 더 잉어를 높이 들어 올릴 뿐이다.

 "책임 회피인가?"

 무심한 눈길로 그 잉어를 바라보면서 이교주가 말했다.

 "어찌 감히…… 스스로의 능력을 잘 알고 있기에 드리는 말씀일 뿐이지요. 이미 한효월은 본 교의 대적(大敵)이 되었습니다. 만에 하나 실수를 하여 적을 놓쳐 본 교의 대업에 차질을 빚게 된다면 그 죄를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문득 나직한 웃음소리가 이교주에게서 흘러나왔다.

 "제천각주(齊天閣主)가 뛰어나다고 하더니 부풍각주 또한 명불허전이군."

 부풍각주가 앞의 이교주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퐁!

 이교주가 앞으로 내밀었던 손을 내리자 허공에서 퍼덕거리던 잉어가 일직선으로 연못으로 직하(直下)하여 사라졌다.

 "교주께서는 지금 어디 계신가?"

 "향적사(香積寺)로 이미 출발을 하셨습니다."

 "음…… 직접 가셨다는 말인가?"

 "수신호위와 고수들을 대동하셨다고 하는데 교주님 신변의 모든 것은 아시다시피 비밀인지라……."

 부천각주가 말끝을 흐렸다.

 이교주의 모습은 어둠에 가려 한효월로서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체구는 별로 크지 않았다. 몸에 걸친 것도 헐렁한 비단 장포라 특징을 찾기 힘들었다.

 그 장포를 벗어버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머리는 반백인데 동곳으로 찔러 그 모습은 그야말로 평범했다.

 조금 마른 듯한 그 인상, 그 눈매는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은 듯도 하지만 거리가 멀어서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한효월의 기억력은 천재적이라서 한 번 본 것이라면 절대로 잊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이 나이에 지금과 같은 성취를 이룰 수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 10년 걸려서 해야 할 일을 그는 1년이면 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늘의 축복이기도 했고, 재앙이기도 했다.

 그런 잠능(潛能)을 쓸 수 있는 대신 그만큼 수명을 단축시킨 것이기에.

 '내가 아는 사람일까?'

 그렇게 생각하자니 이해되지 않는다.

 그가 아는 사람이 어떻게 제천교의 이교주가 될 수 있을까?

 "이번 일이 봉신지비(封神之秘)와 관계된 것이 분명한가?"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이교주가 물었다.

 "재하(在下)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하긴 그 일이 아니라면 교주가 직접 나설 리는 없겠지……."

 이교주가 말끝을 흐렸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의자에 몸을 묻은 채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습관인 듯하였다.

 '봉신지비라고?'

 정신을 기울여 말을 엿듣고 있던 한효월은 내심 대경했다.

 당금 천하의 인과(因果)는 어쩌면 그 봉신지비와 말에 연관되어 있을런지도 모른다고 한효월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봉신지비 때문에 신비에 쌓인 제천교의 교주가 직접 나섰다는 것인가?

 한효월의 마음은 절로 다급해졌다.

 '향적사가 어디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이름으로 보아 절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름만 가지고 어떻게 찾을 수가 있을 것인가. 천하에 이름 높은 절은 무수히 많고 또 같은 이름을 가진 곳도 많다. 돌아다니는 것도 힘들겠지만 허탕을 치는 사이에 교주를 놓친다면 그것이 가장 큰 낭패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자리에서 손을 쓸 수는 없다.

 적이 너무 많았다.

 이교주란 자의 능력이 어떤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판이다.

 결국 기다렸다가 그들이 이곳을 떠난 다음에 뒤따르면서 기회를 보는 것이 최선일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손을 쓸 것인가?

 아무래도 이교주보다는 정보를 총괄한다는 부천각주가 아는 것이 많을 터이다. 그를 장악할 수만 있다면 신비에 쌓인 제천교의 내부를 파헤칠 수 있을런지도 몰랐다.

 한효월이 갈등하고 있는 동안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곳에서는 이 일을 알지 못하나?"

 "아직은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이번 화산의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으니까, 수천 리 밖 동정호 쪽에서 벌어진 일까지 알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긴 워낙 극비에 부쳐진 일이니……."

 이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정호!'

 그 말을 들은 한효월의 눈에서 빛이 일었다.

 그 말은 향적사가 동정호 부근에 있다는 의미다. 비록 동정호가 수백 리에 이르는 거대한, 바다 같은 호수이기는 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찾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좋아. 천하가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동안에 봉신지비는 본 교의 것이 되겠군……."

 이교주가 나직이 웃었다.

 '천하가 공포에 질려 떤다고?'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렸다.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기에 천하가 공포에 질려 떤다는 것일까?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부천각주가 말했다.

 "무슨 일인가?"

 "이번 섭생루의 고수들이 움직여 전 무림을 쓸어버리는 것은 일면 효율적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모두를 죽여 버리면 나중에……."

 "그런 쓰레기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 같은가?"

 "……."

 "당대 무림의 모든 것을 무너뜨려 버린다고 할지라도 무슨 문제가 있겠나? 본 교의 능력이라면 십 년 이내에 모든 걸 회복할 수가 있을 텐데!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는 게 교주님의 생각이다. 군림이 우선이지…… 독고해의 사후, 너무 오래 기다렸다고 생각지 않나?"

 "알겠습니다."

 "섭생루의 고수들에게 중요한 것은 약재다. 그들의 움직임에 차질이 없게끔 부천각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알겠습니다. 섭생루주께서 이미 직접 움직이고 있으니……."

 한효월은 갑자기 다급해졌다.

 그들이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천하를 중독시킨다는 서문운하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한효월은 이교주와 부풍각주가 헤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들이 헤어지면 둘 중 하나를 따라가서 덮칠 생각이었다.

 당금 무림에서 지금 그의 무공으로 기습을 한다면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만약 그들 중 하나를 잡아 제천교의 내막을 들을 수 있다면 큰 보탬이 될 것이 확실하였다.

 첫 번째 목표는 부풍각주였다. 그가 정보를 다루는 자이니 아무래도…….

 그런데 그렇게 때를 기다리던 한효월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하필이면……!'

 그때 정자의 두 사람이 두런두런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더니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것을 보면서도 한효월은 조용히 그 자리에 있었다.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린다. 금방이라도 서버릴 듯 그렇게 심장이 힘겹게 숨을 몰아쉰다. 이마에 땀방울이 솟아났다. 그 형상은 마치 심장 마비가 일어난 사람을 보는 듯했다.

 한효월은 이를 악물면서 숨을 다스렸다.

 여기에서 자칫 종적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만사휴의(萬事休矣).

 생명조차 보장받지 못할 것이었다.

 하필이면 이때, 발작이 일어난 것이다.

 먼저 떠난 사람은 이교주였다.

 그를 배웅한 부풍각주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도 그 자리를 떠났다.

 한효월은 그것을 보면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고수들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이때, 만에 하나라도 종적이 드러난다면 모든 것이 끝일 터이니 숨조차 크게 쉴 수가 없었다.

 한효월이 그 정자를 떠난 것은 그로부터 반 시진이나 지나서였다.

 그 장원을 벗어나는 한효월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다.

 그의 발작은 전과 달랐다.

 전에는 발작을 하기 전에 어떤 기미가 느껴졌었다.

 처음에는 발작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저 잠시 어지러웠을 뿐이었었다. 그리고 공력이 흩어져 버리는 증상. 그런데 그것이 점점 심해져 이젠 한동안 움직일 수조차 없게 변해 버린 것이다. 심장이 멎을 듯 숨을 쉬기조차 어려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런 식으로 발작이 계속된다면 곧 혼수상태에 빠지는 발작을 보게 될런지도 몰랐다.

 대적(大敵)을 앞에 두고 마음이 무겁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은 이내 평온을 회복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세상을 위해 쾌척함도 좋지 않은가?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정리한 까닭이다.

*   *   *

 새벽 안개 속에 우뚝한 삼층 누각.

 한효월이 있던 곳에서 천 리 멀리 떨어진 곳.

 그 삼층 누각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방. 갖가지 장식으로 호화로운 그곳에는 한 사람이 용좌(龍座)에 앉아 있었다.

 그는 방금 날아든 비둘기의 다리에 묶였던 동관(銅管)에서 빼낸 쪽지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동정(動靜)에 관한 지급 보고서였고 그가 기다리는 것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한효월은 원곡의 행소(行所)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부풍각 수풍령주의 뒤를 따라 행소에 도달했고 이교주와 부풍각주의 대화를 엿듣고 두 사람이 떠난 다음, 반 시진 후에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의 뒤를 계속 추적할 예정입니다……. 무흔(無痕).>

 간략한 쪽지에는 실로 놀랄 만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은밀하기 짝이 없었던 한효월의 움직임이 실제로는 일목요연하게 거기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치 모든 것을 예측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그는 깊은 눈빛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이 읽은 그 보고서를 읽어 내렸다.

 '왜 두 사람 중 하나의 뒤를 따라가지 않은 것일까?'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의 상황이 그가 예측했던 범위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한효월의 능력이라면 반드시 두 사람 중 하나를 선택했어야 했다. 그것이 정상이었다. 그리고 그의 예측대로라면 한효월이 노릴 상대는 부풍각주여야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효월은 누구도 노리지 않았다.

 더구나 그곳에서 반 시진이나 보낸 다음에 그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왜 그 자리에서 반 시진이나 머문 것일까?

 '설마, 뭔가 눈치를 챈 것일까?'

 그는 곤혹스러운 중얼거리면서 손을 움켜쥐었다. 손 안의 쪽지는 한 가닥 연기를 피워 올리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럴 리는 없을 텐데…… 대체 뭘 생각하기에? 역시 그냥 버려두기에는 위험한 존재……."

 침음하던 그의 눈 깊은 곳에서 살기가 드러났다.

 곤혹스럽던 그의 눈빛에서 서늘한 살기가 일기 시작했다.

 그가 죽이고자 해서 죽이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건곤무적 독고해마저 그렇게 쓰러뜨린 그였다.

 "말살지계(抹殺之計)가 시작되면 굴러가는 혈륜(血輪)을 그 누구도 멈출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진정한 번천의 의미를 알게 될 때는 모든 것이 끝난 다음일 테지."

 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은 얼음보다 더 차가웠다.

 사람들은 그를 일러 제천교주라 하였다.

*   *   *

 맑은 물.

 푸르다 못해 투명하기조차 한 그 물은 옥돌로 만들어진 욕조에 담겨 찰랑거리고 있었다.

 그 물에 잠긴 것은 뿌연 우윳빛 나신(裸身) 하나.

 수초처럼 흐느적거리는 머리카락은 물에 젖어 흐드러졌다. 감은 눈에서 길게 뻗은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이 영롱하고 부드럽게 흘러내린 어깨에 이어진 젖가슴의 풍성함은 숨이 막힐 듯하다. 유륜에 둘러싸인 탱탱한 그 앞가슴의 출렁임은 한 번도 아이를 가지지 않은 여인의 것. 물속으로 흘러내려 하늘거리는 아랫배가 그러하고 꿈틀거리는 두 다리 사이로 은은히 드러나는 검은빛은 희디흰 몸매와 어울려 눈부시다.

 여인의 것으로 조금은 크다 싶은 손은 가늘고 길어 아름답다. 그 손이 황소의 목을 단숨에 부러뜨릴 괴력을 가졌음을 누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찰랑찰랑…….

 물을 튀기면서 마치 애무하듯 물속에 잠긴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는 손. 반쯤 물속에 잠겨 있는 풍만한 가슴을 훑어 내리던 그 손은 물속을 미끄러져 자신의 아랫배로 향한다.

 마치 무슨 의식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모습.

 조금씩 가쁜 숨이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온다.

 그때 다른 손 하나가 불쑥, 그녀의 손을 덮었다.

 그 손은 우악스럽게 그녀의 손을 밀쳐 내고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풍만한 가슴이 물속에서 헐떡이면서 이즈러진다.

 "음……."

 여인의 입에서 나직한 교성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때가 된 듯하군."

 그가 말했다. 힘이 깃든 중년인의 목소리.

 "그런가요……."

 그녀가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손을 들어 그녀가 그의 손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녀가 눈을 떴다.

 그 앞에 그가 있었다.

 그처럼 뇌쇄적인 나신의 아름다움을 보면서도,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음에도, 그의 눈빛은 차갑게 느껴진다.

 "언제 움직이죠?"

 "지금."

 그가 말했다.

 그 말과 함께 여인이 갑자기 일어났다.

 요란한 물소리가 들리며 물줄기들이 그녀의 나신에서 욕조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중년에 이른 지금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격렬하고 요염하기조차 했다.

 "여전히 아름답군."

 그가 말했다.

 나신을 드러낸 채, 아니, 도발적으로 가슴을 내민 채로 그녀가 농염히 웃었다.

 "아직…… 날 사랑하나요?"

 남자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물론!"

 말과 함께 두 사람은 욕조로 쓰러졌다.

 욕조는 두 사람을 담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 크고 호화로웠다. 그럼에도 욕조의 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모조리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가쁜 숨을 내쉬는 여인의 나신이 활처럼 휜다. 그녀의 몸을 탐하는 사내의 눈빛에는 이미 욕정이 보이지 않는다. 육체는 짐승처럼 헐떡이고 있음에도, 자신의 아래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인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디차다.

 거기에 사랑은 없다.

 세찬 육체의 파도만이 요란할 뿐.

*   *   *

 장원을 벗어난 한효월은 바로 황하를 건넜다.

 원곡에서 강을 건너면 망산(邙山)을 눈앞에 두게 된다.

 낙양의 북쪽에 있어 북망산이라 불리는 그 망산.

 강을 건너자마자 한효월은 조금도 쉬지 않고 낙양으로 달려갔다. 낙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필연코 망산을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둘러가야 하는데 한효월과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망산을 질러가는 것이 훨씬 빠를 수밖에 없다.

 동녘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을 때 한효월은 망산을 넘어 낙양을 바라보게 되었다.

 성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장사꾼들부터 많은 사람들이 벌써 성문을 오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민초(民草)들의 삶은 어느 시대에나 고단했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사람들은 이렇듯 일찍 움직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서는 생기가 느껴졌다.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삶의 기운이랄까.

 한효월은 물끄러미 그들을 보면서 차례를 기다렸다.

 어쩌면 저들의 저러한 모습이 가장 사람다운 것이 아닐까…….

 그의 상념은 채 일각도 지나지 않아 깨어졌다.

 약간의 소란스러움이 일며 줄이 흐트러지면서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십여 명의 눈빛이 날카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한껏 거드름을 피우고 있던 백호(百戶)가 황급히 그들을 맞았고, 아무런 관복도 입지 않은 그들은 백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차례를 무시한 채 바로 성문을 통과하여 사라졌다. 그들 모두가 무기를 지녔고 걸음이 날렵한 것을 보아 보통 관원일 리는 없을 터이다.

 그들이 사라지자 주위는 다시금 정상을 되찾았다.

 누구도 그들을 생각지 않는 듯했고 백호도 다시 거드름을 되찾았다.

 그렇게 한효월은 차례대로 성문을 통과하게 되었다.

 성문 앞으로 쭉 뻗은 대로변.

 그 옆으로 난 골목에 거적을 깔아놓고 앉은 거지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듯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면서 가슴을 긁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긴 했는데 도무지 잠이 깨지 않는 모습이다.

 그를 스쳐 지난 한효월은 대로 옆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섰다.

 거지는 그가 지나간 후, 마침내 견디지 못한 듯 졸기 시작했다.

 몇 군데의 골목을 지나게 되자 한효월은 문을 연 국수집을 보게 되었다.

 길가에 차린 국수집이니 시설이야 볼 것이 없었다.

 하지만 빈속에 뜨끈한 국수 한 그릇은 말 그대로 시장이 반찬.

 후후- 국물을 불면서 단숨에 들이키다시피 하는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배가 고픈 사람에 다름이 아니었다.

 "한 그릇만 더 주시겠습니까?"

 한효월의 말에 뚱뚱한 주인 노파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저런, 배가 많이 고프신 모양이군요?"

 자신의 국수를 맛있게 먹어주어서인지 그녀는 김이 피어 오르는 국수 그릇에다 몇 가지를 더해서 한효월의 앞에다 내려놓았다.

 그녀를 향해 가볍게 웃어 보인 한효월은 다시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겉보기와는 달리 실제로 그는 그의 뒤에 앉아 있는 사람과 전음지성으로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첫 번째 거지부터 시작해서 이곳은 개방의 거점(據點) 중 하나였고 노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누가 노파를 다그친다고 해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었다. 이곳은 임시 거점이라 노파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장사를 할 뿐인 것이다.

 '지금 바로 방주님을 만나야겠는데 언제 가능하겠소?'

 '방주께서는 이미 화산을 떠나셨습니다. 저희로서는 그 행적을 알 수 없으니 바로 연락을 취하여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알겠소. 화산대회에 참석했던 고수들은 어떻게 되었소?'

 '그들 대부분은 중독에서 회복되었고 일부는 화산을 떠나고 일부는 아직 화산에서 부상을 치료하고 있는 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한효월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국수를 우물거렸다.

 '아, 그리고 혹시 관부에 무슨 움직임이 없는지? 오다 보니까 관부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 같던데?'

 '이 며칠 낙양은 물론이고 이 일대에 관부의 고수들이 은밀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공공연히 움직이고 나머지는 뭔가를 획책하고 있는데 상대가 관부라서 함부로 염탐을 하기 어렵습니다. 지방 관아 사람들이 아니고 그중 일부는 금의위입니다.'

 '금의위?'

 한효월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조카를 끌어내리고 스스로 황제가 된 영락제.

 당금의 황제는 주위의 비난 여론을 의식하여 친정(親政)을 강화했고, 그 산물 중 하나가 바로 금의위다. 후일 북경(北京)이 된 북평(北平)으로 천도하면서 설립한 동창(東廠)과 함께 명대의 양대 특무기관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금의위다.

 아직 환관이 수장(首長)이던 동창이 설립되기 전이니 금의위의 위세는 후일보다 더 막강한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화산에 이어 낙양까지 나타났다는 건가?

 무엇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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