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六首 지척천애(咫尺天涯) (68/113)

第六首  지척천애(咫尺天涯)

-연인들 만나다.

사랑의 의미(意味)는 무엇이련가.

 믿기지 않는 듯 그의 등을 바라보던 흑포중년인은 미친 듯이 네 발로 기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나머지 흑의인들이 일제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참혹한 시신들과 폭발의 흔적들뿐…….

 혈향(血香)과 매캐한 화약 내음.

 그리고 가슴을 누르는 고요.

 …….

 한효월과 이심환.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산등성이를 비껴 흘러내리는 햇살은 거대한 무지개처럼 백의궁장의 그녀를 옹위한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귀밑머리는 말 그대로 운환이며 흰색 나삼은 또한 운의(雲衣)라. 산바람에 하늘거리는 치맛자락은 햇살을 받아 고요히 흔들리니 그 또한 예상(霓裳)이라 불리어 부끄럼이 없다.

 섬섬옥수, 손에 감아쥔 두 자 세 치의 옥퉁소는 선계의 악기.

 수려한 미목에 단순호치(丹脣皓齒)가 거기에 어울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누가 탈속(脫俗)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무사했었군요……."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녀였다.

 늘 넘친 것이 있으면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녀는 목소리마저도 아름다웠다. 맑고 영롱한 음성은 구슬을 옥 쟁반에 굴린다는 말의 뜻을 알도록 하기에 족하다.

 "죄송합니다."

 한효월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이심환은 암암리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도 생각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그의 얼굴이다.

 자면서도 생각했고 깨어 있을 때에도 생각했었다. 그처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곳을 떠나 강호로 나가서까지 그를 찾아보려고도 했었다.

 대체 그간 얼마나 변했을 것인가?

 그런데 이제 그를 앞에 마주하니 그는 잠시 산책이라도 나갔다 온 사람처럼 그 모습 그대로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못내 그녀의 가슴을 뒤흔든다.

 "많이 걱정했었어요. 무사한 듯하니 다행이군요."

 어디 갔었는가?

 왜 말 한마디도 없이 그처럼 훌쩍 떠났었는가!

 그렇게 달려들어서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말은 너무도 차분하기만 하다. 격식을 다 갖추고서야 어찌 그 답답했던 마음을 천 분의 일이나마 표현할 수 있을까.

 "죄송합니다."

 한효월은 난처한 빛으로 다시금 머리를 숙였다.

 뭔가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막상 그녀를 이렇게 앞에 두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효월보다 세 살 많은 그녀다. 오누이처럼 자란 그들이었다. 같이 자란 것은 아니었지만 산 두어 개를 사이에 두고 사는 그들은 자주 만나면서 자연히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었다.

 그 나이의 남녀가 어찌 그렇지 아니하랴.

 그러나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 한효월은 더 이상 그녀를 가까이 대할 수가 없었다.

 그의 그러한 깍듯한 태도에 시간이 지날수록 이심환은 가슴만 태울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용하고 탈속한 성품인 그녀는 한효월과 성격이 매우 비슷하여 가슴속의 말들을 쉽게 털어놓지 못했다. 후일 그의 참혹한 운명(運命)을 알고 절망했지만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바꾸게 하지는 못하였다.

 언제라도, 언제까지라도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주리라.

 그렇게 마음만 먹고 있던 그녀였었다.

 그런 그가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이렇게 나타났다.

 가슴이 벅차올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둘은 그렇게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많은 일들을 겪은 듯하군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던 이심환이 입을 떼었다.

 "조금……."

 한효월이 미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눈이 부시다.

 그의 저 웃음을 그녀는 좋아했었다. 웃는 듯 마는 듯 그렇게 웃는 그의 저 미소는 그의 얼굴 전체를 어둠 속에 떠오른 보름달처럼 환하게 만들어놓는다. 홀린 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이심환은 한효월과 눈이 마주치자 문득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당황한다.

 그리곤 불쑥 튀어나온 말.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난데없는 그녀의 말에 한효월은 의아했다.

 "기다리는 사람이라니……."

 그 말을 되뇌이던 한효월은 아, 하는 빛이 되었다.

 "그들은 내곡(內谷)에서 나오지 않을 텐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곡이라니?"

 그녀의 되물음에 한효월은 얼떨떨해졌다.

 "제 사질을 말하는 게 아닙니까?"

 "사질? 그녀가 한 공자의 사질인가요?"

 '그녀?'

 한효월은 더욱 얼떨떨해져서 눈만 꿈벅인다.

 '여자란 말인가?'

 "무우곡에 누가 있단 말입니까?"

 마침내 그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모르고 있었던가요?"

 이심환의 말에 한효월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어느 날 문득 한 여자가 무우곡으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 집처럼 무우곡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하여 지켜보던 이심환은 기이하게 여겨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가 누군지도 모른 채 한효월이 살던 곳에서 살도록 그냥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도 안 돼…… 그녀가 지금 여기 있단 말입니까?"

 한효월은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정말 몰랐던 것 같군요? 그래요. 여기 있어요."

 이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이런…….'

 한효월은 어이가 없는 눈빛으로 무우곡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천기가 이상하여 아침에 그녀를 만나러 이곳으로 왔었어요. 그새 우리 둘은 제법 친해졌거든요. 제가 조금 더 늦게 왔더라면 큰일 날 뻔했었어요. 다행히 한 공자도 적시에 오셔서……."

 한효월은 차마 그녀의 말을 더 들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는 입술을 깨문 채로 다시 머리를 숙였다.

 미미한 웃음이 이심환의 맑은 얼굴에 파문처럼 고요히 번져 갔다.

 "뭐가 그렇게 계속 죄송한 건가요?"

 "그 말밖에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한효월은 길게 한숨 쉬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심환은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문득 맑은 바람 한줄기가 불어와 그녀의 옷자락을 흔들어놓는다.

 "사람의 인연이 어찌 뜻대로만 되겠어요? 나의 성품이…… 바보 같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녀는 좋은 사람이더군요. 하긴 나쁜 사람이라면 어찌 한 공자와 가까워질 수가 있었겠어요?"

 언뜻 쓸쓸한 표정이었던 그녀가 이내 밝게 웃어 보였다.

 "들어가 보도록 해요. 이곳은 내가 수습하지요."

 "이 소저……!"

 입을 열던 한효월은 문득 입이 얼어붙었다.

 그녀가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한평생의 삶이 짧지도 않지만 길지도 않지요. 우리의 인연이 거기까지라면 더 연연하여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부족하지만 나의 나이가 몇 살 더 많으니 한 공자는 앞으로 나를 누이로 생각해 주세요."

 그의 손을 잡은 채 이심환은 조용히 말했다.

 "이 소저……."

 한효월은 그녀에게 손을 잡힌 채 말을 잇지 못한다.

 "한 공자가 차후 나를 잊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해요."

 조용한 그 음성.

 이심환의 그 음성이 절절히 가슴으로 저며온다.

 하루 이틀이 아니다. 이미 십여 년을 같이 지내온 그들이다. 그녀의 마음을 어찌 그가 모르고 그의 마음을 어찌 그녀가 모르겠는가?

 그가 요절할 운명이 아니었다면 한효월은 이미 그녀를 맞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을 알고서는 감히 그녀의 곁으로 접근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 모든 것을 개의치 않음을 알면서도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곡구에 서서 그를 향해 웃어 보인다.

 손을 든 그녀의 흰 옷자락이 소리없이 펄럭인다.

 신형을 돌린 한효월의 가슴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 무엇이든 그녀를 볼 면목이 없음은 사실이었다.

 무우곡으로 묵묵히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웃으며 전송하던 이심환은 문득 가슴이 아려웠다.

 칼로 저며내면 이처럼 아플까.

 그가 그 얼굴을 볼까 봐 몸을 돌린다.

 가슴이 아팠다.

 한 손을 들어 가슴을 눌렀다.

 풍만한 가슴이다. 한 손으로는 추스를 수 없도록 풍만한 그 가슴은 지독한 상처로 만신창이였다. 겉보기로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다.

 세상 모든 것이 흐려졌다.

 '바보!'

 이심환은 입술을 물었다.

 나는 그간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단 한 번도 그 외에는 다른 남자를 생각한 적도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를 이렇게 보내 버리고 마는가.

 누이라고?

 그 한 단어를 위해서 지난 20년을 그렇게 보내었던가?

 벼락 한줄기가 코끝을 찌르더니 가슴까지 관통한다. 뜨거운 물줄기가 눈에서 솟구쳐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바보. 이심환! 너는 바보다. 그까짓 예의가 무엇이길래…… 그까짓 염치가 무엇이길래…… 설마 하니 너는 그가 죽고 나면 혼자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냐? 네가 무에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네가 그렇게 잘났다고 그의 앞에서 잘나 보이고 싶었더냐?'

 그녀는 홀로 선 채로 그렇게 되뇌이고 또 되뇌이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왈칵! 뒤로 돌아섰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효월의 모습은 이미 일렁이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도 운명이었을까. 그가 보였다면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갔을 텐데.

 한효월은 감회 어린 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주 오래전에 떠난 집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하나 실제로 그가 이곳을 떠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돌아오자 마치 어제 떠난 고향에 돌아온 것만 같았다.

 아늑한 느낌…….

 엄마의 품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느낌이 아닐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만들었던 화단도, 집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다른 듯했다.

 순간.

 "언니?"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녹의의 려인(麗人) 한 사람이 집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문득 시간이 멎었다.

 나타난 사람도, 그녀를 보는 한효월도 그렇게 시간이 멎은 듯 굳어져 서로를 보기만 했다.

 서문운하.

 너무도 뜻밖에 그녀가 거기 있었다.

 "오셨군요……."

 석상처럼 굳었던 그녀의 얼굴에 환한 빛이 피어나는가 싶더니 이내 그것은 웃음이 되었다. 활짝 핀 연꽃이 된 그녀의 얼굴은 싱싱하고도 아름다웠다. 어디를 보아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던 병약한 그 서문운하가 아니었다.

 "어떻게 여기에?"

 한효월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삼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다.

 "지금은 혼자 있어요. 다들 일이 있어서 잠시 이곳을 떠나 있죠."

 눈을 반짝이며 답하던 그녀는 혼자 온 한효월을 보자 그의 뒤를 건너다본다.

 "왜 혼자 오셨죠? 언니가 밖으로 나갔었는데…… 언니는?"

 "그, 그녀는……."

 부지간에 한효월은 말끝을 흐렸다.

 "이런! 이거야말로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은 뽑아낸 격이네. 어서 가서 언니를 모셔오세요."

 서문운하가 웃으며 그의 가슴을 밀었다.

 "나, 나는……."

 서문운하는 눈을 흘겼다.

 "설마 하니 그 언니의 일편단심을 모른다고 하진 않겠죠?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 되고 말 거예요."

 한효월은 뭐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총명절정의 그였지만 도무지 이런 상황에서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는지 당혹스럽기만 한 것이다.

 "어서 가지 않고 뭘 하세요?"

 서문운하가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는 한효월을 재촉했다.

 암암리에 한숨을 내쉰 한효월은 머뭇거리다 다시 물었다.

 "그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요? 당신이 여기에 있다니?"

 그의 물음에 서문운하는 맑게 웃었다.

 "당신이 살던 곳이 어떤 곳인지……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와서 보니 너무 좋은 곳이라 그만 머물러 있었어요. 마침 몇 가지 일도 있고 해서…… 양해도 얻지 않고 함부로 들어와서 죄송해요. 설마 화난 건 아니겠죠?"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는데 화났다고 할 사람은 드물다. 더구나 상대가 자신의 여인. 그녀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여기 와서 가장 기뻤던 일은 언니를 만난 거예요. 정말 좋은 분이더군요. 그분이 없었더라면 전 그냥 이곳을 둘러보고 떠났을런지도 몰라요."

 이심환의 말이 나오자 한효월은 또 난감해졌다.

 "그들은 어디로 간 거요? 당신을 혼자 두고……."

 그가 말을 돌리자 서문운하는 미소했다.

 "몇 가지 일이 있어서요. 당신 덕분에 제가 건강을 되찾았기에 가능한 일이죠. 전 같다면 어림도 없을 텐데……."

 그 말을 하던 그녀의 얼굴이 문득 붉어졌다. 그날의 그 격렬했던 정사(情事)가 생각났기에.

 내심 당황한 그녀는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아! 혹시 조 노인이 오라버니를 찾아가지 않았던가요?"

 "만났소. 덕분에 큰 힘을 덜 수 있었소. 고맙……!"

 한효월은 말을 멈추었다.

 그녀가 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눌렀기 때문이다.

 서로를 몸으로 알아버리지 않았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자연스러운 몸짓.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전 무엇이나 다 할 거예요. 그런 일로 고맙다고 하시면 제가 오히려 섭섭하죠."

 그녀가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녀의, 서문운하의 이 말속에는 의미심장한 뜻이 내포되어 있었지만 제아무리 한효월이라고 할지라도 그것까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자, 어서 가서 언니를 모셔오세요. 더 늦으면 언니가 섭섭해할 거예요."

 그녀가 한효월의 등을 떠다밀었다.

 곡구의 상태는 참혹했다.

 저들이 가면서 부상자는 데리고 갔다.

 하지만 폭발로 인해 찢긴 시신의 잔해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어 이심환에게 그것을 정리하라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제아무리 보통 여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녀 또한 여인인 것이다.

 한효월이 동분서주 움직이면서 정리를 하고 진세를 손질하는 등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세 사람은 비로소 무우곡 내의 정자에 서로 마주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   *   *

 무우곡에도 어둠이 찾아들었다.

 촛불을 켠다. 차를 내온다. 음식을 장만한다…….

 그렇게 서문운하가 들락거렸고 멀뚱히 앉아 있던 이심환도 거기에 가세하여 그녀와 같이 들락거리며 정자에다 저녁을 차려내었다.

 이곳의 주인인 한효월은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안 하기도 그런 묘한 처지가 되어 그저 멍하니 앉아서 눈알만 굴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참 소란을 떤 다음에야 한효월의 앞에 상이 차려졌다.

 그렇게 요란한 것에 비하면 너무도 간단한 소채에다 밥 한 그릇.

 "반찬이 없어서……."

 서문운하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간단한 소채는 뜻밖에도 맛있었고 밥맛 또한 좋아 한효월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그 밥을 다 비웠다.

 그리고는 그들 앞에 찻잔이 놓여졌다.

 차를 끓여 내놓으면서 서문운하가 웃었다.

 "밥은 잘 못하지만 차는 그런대로 마실 만할 거예요."

 그녀의 말대로 차맛은 좋았다.

 차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찻잎이 그렇고, 물이 그렇고, 그릇과 끓이는 사람의 솜씨까지 여러 가지 변수가 차맛을 결정하게 된다. 이 무우곡에는 한효월이 따놓은 상품의 차가 앞으로 몇 년은 마실 만큼 보관되어 있었다. 세간에 이름높은 천지(天池)나 호구(虎邱), 용정(龍井)의 차에 비해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 어디보다 물이 좋았다. 결국 끓이는 사람의 실력이 차맛을 좌우할 수밖에 없는데, 그녀는 총명한 사람이라서 차를 어떻게 끓여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물이 끓는 것은 물고기의 눈과 같은 포말이 생기면서 미미한 소리가 나면 일불(一沸)이라 하고 구슬 같은 방울이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것을 이불(二沸), 거친 파도가 일고 물방울을 튕기게 되면 삼불(三沸)이라 한다. 소동파는 그를 일러 '해안(蟹眼)이 지나면 어안(魚眼)이 생기고 우수수 솔바람 소리가 인다'고 표현하였었다.

 그렇게 끓인 물이 담긴 주전자를 들어 올리는 것에도 법도가 있다. 수기(水氣)가 사라지기 전에 미리 들어 올리면 그도 차맛에 문제가 있게 되며, 따를 때에도 천천히 물이 나오는지 아닌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따라야 차의 맛이 제대로 우러난다고 하니 차 한 잔 끓이기는 실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마련한 찻잔을 사이에 두고 세 남녀는 마주 앉았다.

 어둠은 싸아한 향기를 뿜고서 정자를 둘렀다.

 눈을 들면 어둠에 잠긴 하늘에는 온통 보석과도 같은 별빛이 영롱하다. 벌레들의 노래에 꽃 내음이 코끝을 스치니 도원(桃源)이 따로 없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신 한효월은 문득 부지간에 한숨을 토해낸다.

 "왜 맛이 이상한가요?"

 서문운하가 그를 바라보았다.

 차를 마시던 한효월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자 서문운하는 걱정스러운 듯 그를 보면서 물었다. 자신이 끓인 차가 이상한가 저어한 까닭이다.

 "아니오. 차맛이 너무 좋아서……."

 한효월의 말에 서문운하는 기분이 좋은 듯 가볍게 웃었다.

 그때 조용히 찻잔을 한 손으로 받쳐 들고 있던 이심환이 물었다.

 "무슨…… 다른 걱정이 있나요?"

 그녀의 물음에 한효월은 미미하게 웃었다.

 "걱정이라…… 어차피 그 걱정이야 스스로 사서 하는 것이니 따로 걱정이라고 할 것이야 없겠지요. 다만, 여기에서 한 잔의 차를 들면서 밤하늘을 쳐다보니 굳이 세상으로 나가서 그처럼 힘들이는 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한 가닥 쓴웃음이 그의 얼굴을 흐른다.

 "공연한 생각을……."

 "공연한 생각은 아니에요."

 맑고 밝은 표정만을 보이던 서문운하가 딸각,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효월의 말을 받았다.

 한효월이 그녀를 건너다보자 그녀는 정색을 한다.

 "그들에 대해 잠시 알아보았어요. 생각보다 대단하더군요. 그들의 힘은 지금 드러난 것이 다가 아닌 듯했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그들은 자신의 힘을 다 사용하지 않고 있어요. 만약 그들이 전력을 투입한다면 아마도…… 현재의 무림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을 것 같았구요. 화산에서의 일은, 그들이 내보인 경고와 같은 것이었지요."

 "경고?"

 "제천교에 저항한다면 모두 죽일 수도 있다라는."

 "으음……."

 한효월이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그도 이미 그러한 느낌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저들이 화산에서와 같이 마음대로 횡행하면 어느 문파가 그 독수(毒手)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대체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들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전대 맹주를 없애고도 본격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저도 알지 못하겠어요."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굳이…… 그들과 싸워야 하나요?"

 잠시 머뭇거리던 서문운하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시작한 일이니까……."

 한효월이 스스로에게 말하듯 그렇게 답했다.

 사부의 행방을 찾고, 그렇듯 위대했던 사형의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세상에 나갔다.

 그 결정을 내리고 한 번도 회의(懷疑)를 가진 적은 없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를 맞으면서도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었기에, 실제로 강호에 나와 제천교가 하는 행태를 보면서 그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에 그 결정에 후회를 한 적도 없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하늘을 보니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문득 들었다. 거대한 대자연의 품 안에서 그 모든 것이 어쩌면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懷疑). 하지만 이제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물러설 것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이심환은 평소 그녀의 성품답게 조용히 그를 바라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서문운하는 뭔가를 말할 듯했지만 그녀도 입을 다물었다.

 다시 잠시간의 침묵.

 그것을 깨뜨린 것은 한효월이었다.

 "화산으로 조 선배를 보내주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소.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때를 맞췄는지 그분들을 대신하여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소."

 웃음이 서문운하의 얼굴에 떠올랐다.

 "어떤 사람은 목을 내놓고 전력투구하는데, 어쩌다 다행히 도움이 된 걸 고맙고 말 게 어디 있겠어요? 조금만 더 미리 알았더라면 막을 수도 있었을 일을…… 안타깝게 되었어요."

 "미리? 그럼 그 내용을 미리 알았단 말이오?"

 서문운하가 머리를 끄덕였다.

 "말씀드렸지요? 그들에 대해서 조사를 하다가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고. 제가 알아본 바로는 그들은 전 강호를 독으로 덮어버리려고 해요. 정말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들을 막을 방도는 별로 없을 것 같더군요. 하독하는 것보다는 해독이 더 어려우니 정말 난감한 일이죠……."

 "……."

 한효월도 입술을 물었다.

 그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자 다시금 마음이 급해졌다.

 그처럼 조심해서 달려왔건만 이곳까지 자신을 따라온 자들이 있을 정도의 능력을 지닌 것이 제천교다. 그것은 제천교가 단순히 막강하다는 수준이 아니라, 절세의 재지(才智)를 가진 자가 제천교를 운영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혹, 다른 두 분이 이곳을 떠난 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소?"

 한효월의 질문에 서문운하는 미미하게 웃었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죠. 아무런 성과가 없을 수도 있구요."

 "그분들은 언제 돌아오는 거요?"

 "한 열흘은 더 걸릴 듯하군요. 좀 더 빨리 돌아올런지도 모르지만."

 서문운하의 답변에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렇다면 시간이 맞지 않을 것 같소. 이 소저께 한 가지 부탁을 드려야겠습니다."

 "말씀하세요."

 "저를 따라왔던 자들이 일시 패퇴했지만 제가 이곳에 있음을 안 이상, 반드시 다시 쳐들어올 겁니다. 그런 것을 알면서 이 자리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겠지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곳을 떠나야 하니 잠시 이 소저의 거처에 서문 소저가 머물 수 있도록 해주시면 합니다."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죠."

 이심환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떠날 생각인가요?"

 "그렇습니다. 삼노들이 돌아올 때까지 서문 소저를 돌봐야겠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일신상에 늘 위기가 따르니, 되도록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것이 오히려 두 분 소저에게 누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의 행방이 밝혀지면 이 자리에 다시 제천교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바보는 이 자리에 없다.

 "거처를 옮겨도 세 분 선배가 찾아올 수는 있겠죠?"

 "연락할 방법이 있어요."

 "그럼 되었군요."

 한효월은 그녀의 대답에 바로 몸을 일으켰다.

 "일단 그렇게 결정한 이상, 바로 진세를 폐쇄하고 곡을 봉한 다음에 이 자리를 떠나기로 하지요. 한 식경 정도면 될 터이니 그동안 준비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가 저만치 멀어지는 것을 보자 서문운하가 중얼거렸다.

 "원…… 목석 같은 사람. 언니에게 할 말이 겨우 그거뿐이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심환은 그녀의 투덜거림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 말했잖아. 그와 나는 오랜 친구 사이라니까."

 "남녀 간에 오랜 친구란 오랜 연인이란 의미라는 걸 저도 잘 알아요. 아직도 친구이기만 한 건 둘이 바보라서 그렇지……."

 서문운하의 말에 이심환은 피식 웃었다.

 "그래. 하매가 똑똑한 거야 나도 잘 알지."

 문득 그녀가 정색을 했다.

 "그를…… 그냥 그대로 보낼 거야?"

 "그럼?"

 "그는 아무것도 모를 거잖아? 이 일은 그도 알아야만 해. 그의 이세(二世)가 하매에게……."

 "언니가 그걸 어떻게?"

 서문운하의 눈이 동그래지자 이심환이 미미하게 웃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하지만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서문운하의 얼굴에는 정말 놀람의 빛이 역력했다.

 "내가 배운 것은 선도(仙道)야. 세속의 인연을 버리고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찾아가는 양생지도(養生之道)라고 할 수 있지. 경지에 이르면 초월적인 존재가 될 수 있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어림없는 일. 그러나…… 같은 여인의 몸인 너의 변화 정도는 알아볼 수 있어. 한 공자도 지금처럼 정신이 복잡하지 않았다면 알아보았을 거야."

 "정말 대단하군요…….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어요. 소매의 임신……은 아직 명확하지 않고 또 그런 일로 그의 발목을 잡고 싶지는 않아요. 나중에 정말 확실해지면 그때 이야기를 하지요."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

 서문운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는 복연(福緣)이 많은 상이야. 하지만 그 가운데 기(氣)가 넘쳐 화를 부르니 결코 장수를 할 수 없는 운명. 그가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수명은 족히 몇 년은 남았었어. 그런데……."

 "저 때문이에요."

 서문운하가 어두운 얼굴로 탄식했다.

 "저 때문에 그의 수명이 그렇게 단축되었어요. 저를 살리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수명을……."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조금 전까지의 그 활발하던 모습, 그 밝았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 크고 맑은 그녀의 두 눈에는 금세 핑! 눈물이 돈다. 이어 눈물이 그녀의 두 볼을 타고 흐른다.

 그녀의 억눌린 울음.

 그 울음으로 떨리는 그녀의 어깨에 이심환의 손이 올려졌다.

 "하매, 자책하지 마. 그건 그의 운명이지. 세상의 모든 일이 어찌 인과(因果)의 범주를 벗어날 수 있겠어?"

 "언니!"

 서문운하는 이심환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

 이심환은 말없이 다만,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만 있었다.

 그녀도 울고 싶었다. 펑펑 소리 내어 울다 못해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렇듯 울 수는 없다.

 '그래…… 아마도 이것이 내 한계이겠지…….'

 이심환은 암암리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하리라. 거부한다고 닥쳐올 운명이 비켜 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운명이라고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체념하고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그것을 거부하고 싸울 것인지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일 것이기에.

*   *   *

 이심환의 거처인 천운곡(天韻谷)은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만장애(萬丈崖)의 아래에 위치한다. 한효월의 거처인 무우곡에서 산 하나를 건너 있는 폭포를 지난 곳이다. 늘 구름에 가려 있어 은밀하기 이를 데 없고 절정의 경공을 지니지 않으면 출입조차 어렵다.

 얼핏 보면 계곡의 끝처럼, 천길만길 낭떠러지처럼 보이는 이곳을 넘어 수곡진세를 지나면 그 내부는 별유도원(別有桃源)이라 할 만하였다. 이곳은 전대의 기인이 수도를 위해 사용하던 곳으로 이심환의 사부인 천운모모가 발견하여 거처로 삼았다.

 한효월은 어릴 때 가끔 이 천운곡으로 놀러 갔었지만 자신의 운명을 알고부터는 이곳에 들르지 않았었다.

 지금도 그는 굳이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들어가지 않을 건가요?"

 이심환이 물었다.

 "그냥 가겠습니다."

 한효월은 두 여인의 바램을 애써 외면한 채로 말했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그때 폐를 끼치도록 하지요……."

 한효월은 이심환에게 길게 읍을 해 보였다. 그리곤 서문운하를 향해서는 포권을 해 보였다.

 "보중(保重)하시오."

 한효월이 말했다.

 그의 말에는 묘한 여운이 있었다.

 마치 마지막 길을 떠나는 사람이 남기는 말과도 같은, 이제 떠나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은…… 그 말이 갖는 무게로 인하여

 서문운하는 갑자기 가슴이 저며왔다. 목이 메어 그녀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입을 열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심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효월은 떠났다.

 정말 너무도 속절없이 그렇게 휑하니 떠나갔다.

 그처럼 총명절세한 서문운하도 이 마당에는 님을 떠나 보내는 일개 여인에 불과했다.

 그의 모습이 멀어져 안개 속으로 묻힘을 보자 그녀의 눈에서는 마침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한 공자!"

 갑자기 이심환이 소리쳤다.

 저만큼 가던 한효월이 뒤를 돌아보았다.

 "잊지 말아요! 여기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한 번은 돌아와야만 해요. 알겠죠?"

 이심환이 다시 소리쳤다.

 크지 않은 음성이지만 그 소리는 이미 수십 장 밖의 운연(雲煙)에 아스라이 잠긴 한효월의 귓전에 또렷이 들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누님."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던 한효월이 고개를 끄덕인다.

 누님…….

 한효월의 말에 이심환의 신형에는 가는 떨림이 일어났다.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

 쉽게 부를 수도 있는 호칭이었지만 한효월은 늘 정중하고도 단호하게 그녀를 이 소저라고만 불렀었다.

 반면 이심환은 늘 누이라고 불리길 원했었다. 어릴 때는 서로의 나이 차를 가지고서 티격거리면서 내가 누나잖아!라고 심술을 부렸었고 한효월은 그래도 웃기만 했었다.

 한번 부르면 쉬울 것을, 그렇지 않았기에 그 부름은 참으로 힘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이를 잊어버리고 친구가 되었다. 대개의 경우는 여자가 남자보다는 정신적으로 빨리 성장하지만, 한효월은 나이 열 살을 넘어가면서 이미 애늙은이와 같아 이심환조차 그가 오빠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을 정도였다.

 물론 그것은 한효월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성품이 너무 고요하여 생긴 일이다.

 둘 중 한 사람의 성품이 조금만 더 격하던지 아니면 나이답지 않은 경지에 일찍 이르지 않았다면 오늘날 두 사람의 사이는 많이 달랐을 터이다.

 그런데 오늘, 그는 그녀를 누이라고 부른 것이다.

 어찌 만감이 교차하지 않겠는가.

 …….

 이심환은 말을 잃었고, 서문운하도 말을 잃었다.

 두 여인은 옷자락을 나부끼면서 안개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지는 한효월의 뒷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한효월의 모습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조용히, 서문운하의 어깨에 손 하나가 올려졌다.

 서문운하가 입술을 물었다.

 근래에 들어 친해진 이심환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서 다시금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들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그녀는 입술을 물고서 울음을 삼켰다.

 "그는 돌아올 거야.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니까. 스스로를 정리하기 전에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이심환의 음성이 조용히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

 서문운하는 고개를 떨군 채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녀의 어깨에 올려진 이심환의 손은 따스했다.

 그렇게 고개를 떨군 채 서문운하는 암암리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망설이고 있던 일.

 갈피를 잡지 못했던 그 일을 이젠 결정해야 할 때였다.

 단순히 그와의 거래라고 강변했던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직접 만나보자 그녀는 그간 자신이 그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를 절감할 수 있었다. 단순히 그가 첫 남자라서가 아니었다.

 그는 참으로 큰 의미로서 그녀에게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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