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首 부동명왕(不動明王)
-신공을 참수하다.
함정(陷穽)은 끊임없이 한효월을 노리다.
쿠콰콰콰…… 콰콰아아…….
고막을 치는 굉음! 천지가 아우성치면서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다.
한효월은 폭포 속에 앉아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폭포의 뒤쪽, 수렴동(水簾洞)이라고 해야 할까?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중조산으로 오면서 어떤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하지만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이 다시금 그의 몫으로 남았다.
이제부터 또 무엇을 해야 하나?
시간이 너무 없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세상에 나오지 말고 무우곡 속에 전처럼 그냥 조용히 살아가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소용없는 생각임을 그도 안다.
그는 이미 세상의 시비에 휩쓸린 다음.
이제 돌이키고자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길게 탄식한 그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한 채로 눈을 감았다.
부동명왕공.
그 불가의 항마신공(降魔神功)을 참수(參修)하기 위해서다.
이 불가의 신공에는 크나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어쩌면 향후 무림뿐 아니라, 천하의 정세가 달려 있을 수도 있었다.
무공(武功).
조금 더 정확히 말하여 신공을 수습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이다. 마음이 안정될 수 있는 곳이라야 선정(禪定)에 들 수 있고 정신을 하나로 모을 수 있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이 보편인 까닭이다.
그러나 한효월은 굳이 폭포수 뒤를 택했다.
일단은 만에 하나 있을 방해를 피해서였다. 설마 그가 폭포수 뒤에 있을 것임을 누가 알 수 있으랴.
또 하나는 바로 부동명왕공을 참오(參悟)하기 위해서였다.
고막을 떨어 울리는 굉음.
그리고 그 진동에 사방으로 튀는 물방울. 그것은 살인적인 암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속에 정좌한 그는 입정한 노승과도 같이 고요하다.
본지풍광(本地風光) 약미발명즉고초현관 의종하투(擬從何透) 왕왕(往往) 단멸공(斷滅空) 이위선(以爲禪) 무기공(無記空) 이위도(以爲道) 일체구무(一切俱無) 이위고견(以爲高見) 차명연완공(此冥然頑空)이라…….
본래 면목을 밝혀보지 못한다면, 높고 아득한 현관을 어찌 꿰뚫을 것인가. 더러 끊어 없어진 공(空)으로 선(禪)을 삼으며,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빈 것으로 도(道)를 삼기도 한다. 모든 것이 없음으로써 고견(高見)으로 삼기도 하거니와 이것들은 아득히 비어 있구나…….
불가(佛家)의 설법과도 같은 경문(經文).
이러한 구절이 바로 부동명왕공을 이루는 근간이다. 몸을 단련하고 진기를 소통함이 목적이 아니라,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무공. 무공이라기보다는 깨침[頓悟]을 목적으로 하는 심공(心功)이 바로 부동명왕공이다.
한효월이 본래부터 수련한 공력 또한 선가(仙家)의 무공이니 주천무애신공(週天無涯神功)이 그것이다.
그 주천무애신공 또한 강한 파괴력을 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심신의 수련을 목적으로 하여 건곤무적 독고해는 거기에서 건곤신공을 연창(硏創)해 냈음은 이미 전기(前記)한 바와 같다.
그 말은 연기(年紀) 일천한 한효월이지만 그 성품과 수련으로 인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심지가 굳건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콰콰콰…….
바로 귀청에다 대고 폭포가 뇌성벽력을 때려댄다.
그러나 그처럼 엄청난 폭포의 굉음도 선정(禪定)에 든 그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돈오(頓悟), 바로 깨친다는 말이다.
점오(漸悟), 천천히 단계를 밟아 깨달아간다는 뜻이다.
지금의 한효월은 폭포수 뒤에 앉아 훨훨 창공을 노닐고 있었다. 단계를 밟아 깨달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숨에 부동명왕공을 참수(參修)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일어난 뜻밖의 일만 아니었다면, 그의 성취는 또 다른 경지에 이를 수도 있었을 터이다.
"악!"
폭포수의 굉음을 뚫고 들려온 비명 한 소리.
그 소리는 고고(孤高)히 천공의 경지에서 노닐고 있던 한효월의 선정을 깨뜨리기에 족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폭포의 굉음 때문에 듣지 못했을 비명이었지만 선정에 든 한효월이니 그 소리를 놓칠 리 없다.
이어 폭포를 뚫고 들려오는 날카로운 금속성!
폭포를 배경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움직인다.
흑의무사들 한 무리. 얼핏 보아도 7, 8명은 족히 되는 그들은 검도(劒刀)에다 유성추(流星鎚)까지 휘두르면서 여인 둘을 공격하고 있었다. 여인이라고 하나 그녀들의 나이는 불과 16, 7세가량. 바로 얼마 전 이곳에 나타났던 이심환의 시비들이었다.
그녀들 중 홍의시비는 상반신을 피로 물들인 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린다. 그녀를 막아선 것은 녹의시비, 악전고투하고 있는 그녀가 손에 쥔 것은 겨우 짧디짧은 비수 하나.
그런 그녀를 향해 흑의인들이 좌우에서 틈을 봐서 유성추를 날리고 도검을 휘둘러 공격하니 그 형세는 말 그대로 풍전등화에 다름이 아니다.
"향아! 괜찮니?"
비수를 휘두르며 적을 막던 녹의시비가 소리쳤다.
"난 괜찮아. 난 상관 말고…… 앗! 위험해!"
부상당한 홍의시비가 대꾸하다 다급하게 부르짖었다.
녹의시비가 유성추의 사슬에 손목이 감기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유성추 하나를 쳐내고 다른 유성추가 날아들자 그것을 비수로 쳐내려다가 손목이 감긴 것이다.
당황한 녹의시비의 등 뒤에서 소리도 없이 도광이 날아드는 것을 보았으니 어찌 비명을 지르지 않을 것인가.
"이잇!"
녹의시비는 다급히 피하려 했지만 손목이 쇠사슬에 감겨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빙글 몸을 돌리면서 다른 쪽 소매를 떨쳐 상대의 칼을 휘감으려 했다. 그러나 상대의 도세(刀勢)는 예상보다 강력하여 이미 가슴에 도달하고 있었다. 등 뒤에서 덮쳐 오던 칼이 신형을 돌리면서 정면으로 가슴을 내준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절대절명.
바로 그 순간, 녹의시비를 덮쳤던 자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훌쩍 나가떨어졌다.
"크윽!"
쨍! 쨍그렁…….
그리고 잇달아 터져 나오는 금속성.
섬광이 번뜩이는 가운데 날카로운 금속성이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아……."
녹의시비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그녀를 막아선 사람 하나가 있었다.
그녀를 공격하던 자들을 일거수에 날려 버린 사람.
"공자님!"
그를 본 녹의시비가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오랜만이구나."
그녀를 바라본 한효월이 미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체 그간 어디에…… 위험해요!"
그녀가 놀라 부르짖었다.
한효월이 그녀를 돌아보는 순간에 흑의인 둘이 바람처럼 한효월의 배후를 엄습, 검과 도를 찔러 넣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연수(聯手)는 오랫동안 손을 맞춘 듯 신속무비했다.
하지만 한효월의 태도는 한가롭기만 하다.
그는 소매를 젓는 사이에 소맷자락으로 두 사람의 검도를 휘감았다.
쨍!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도가 소맷자락에 감겨 엉키는가 싶더니 그대로 부러져 나갔다.
"너의 운라수(雲羅袖)라면 충분히 이들과 싸울 수 있을 텐데, 너무 당황하여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만약 다음에 싸우게 된다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싸우도록 해라. 만약 네가 잘못되었다면 향아(香兒)는 어찌할 뻔했느냐?"
그들에겐 신경도 쓰지 않고 하는 한효월의 말에 녹의시비, 홍아(虹兒)는 황연히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운라수를 그렇게 쓸 수 있었군요!"
그녀들의 무공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차원이 다른 무공을 배운 까닭이다.
그러나 경험 칠 푼에 무공 삼 푼이라는 강호의 교훈처럼 실전에 임한 적이 없어 흉험한 공격을 받자 당황하여 제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이제 한효월의 말에 크게 깨달았으니 그녀의 무공은 진일보한 셈이라 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이들은 왜……."
"그들은…… 아! 아가씨가 위험해요!"
한효월의 물음에 홍아가 갑자기 다급히 부르짖었다.
그때 한효월이 갑자기 손을 내밀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홍아가 놀라 입을 벌리는 순간, 한효월은 피투성이로 바위에 기대 있는 향아까지 바람처럼 휘감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파파팍!
그들이 있던 암반에서 불꽃이 세차게 튕겨났다.
흑의인들 중 서넛이 검은 통을 겨누고 있었다.
그 검은 통에서는 방금까지 한효월과 시비들이 있던 곳으로 섬광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가공할 위력!
그 자리를 벗어남이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벌집이 되고 말았으리라.
"천왕통이군. 제천교도인가?"
한효월의 음성이 들려왔다.
흑의인들은 모두 일곱이었다.
그들 중 다섯이 시녀들을 공격했고, 한효월이 나타나면서 그들이 일패도지(一敗塗地), 격퇴되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수뇌로 보이는 흑의인 둘이 천왕통을 꺼내 들고 공격을 했었다.
하지만 한효월이 찰나간에 꺼지듯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들은 대경실색 급급히 사방을 돌아보며 한효월을 찾았다.
"제천교도라면 나를 찾아온 모양이군."
한효월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윽?"
천왕통을 든 흑의인은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눈앞에 인영이 번쩍이는 것을 보자 다급히 물러나면서 천왕통을 발사했음에도 전신이 저려옴을 느끼면서 이미 자신의 완맥을 제압한 한효월을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한효월의 뒤쪽으로 방금 그가 전력으로 발출한 천왕통의 음염독화(陰焰毒火)가 시퍼렇게 암벽을 하릴없이 태우고 있음이 보인다.
그를 제압한 한효월은 홍아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지? 아가씨가 위험하다니?"
홍아가 급히 답했다.
그녀들은 이미 한효월에 의해 삼 장 밖에 있었다.
"아가씨를 찾으러 나섰다가 저들을 만났어요. 저들은 무우곡을 둘러싸고서 공격할 방법을 의논하고 있었어요! 진세가 발동된 바람에 저희가 들어가지 못하고 기회를 엿보다가 발각되어 쫓기던 참이었구요."
"무우곡에?"
한효월이 얼떨떨한 빛을 보인다.
"무우곡이라니? 이 소저가 거기 가셨단 말이냐?"
"예. 요즘 자주 가셨어요. 그런데 저들이……."
"누가 온 건가?"
한효월이 맥문을 제압당한 자를 다그쳤다.
"교중의 고수들……."
한효월의 손에서 강대한 진기가 파도처럼 혈도를 타고 몰려들자 흑의인이 이를 갈면서도 고통스러운 빛으로 입을 열었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쉽게 대답을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소용 없는 답변. 교중의 고수 아닌 자가 올 리 없을 것이니 시간을 벌자는 수작에 불과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쾅! 콰아앙…….
저 멀리서 엄청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산천이 모조리 떠나갈 듯 거대한 굉음이었다.
'무우곡?'
폭음이 들려온 곳을 본 한효월의 안색이 돌변했다.
윽!
나직한 신음과 함께 흑의인이 거꾸러졌다.
"향아와 함께 속히 곡으로 돌아가 있거라. 수곡진세를 발동하고 나오지 말도록, 알겠느냐?"
신형을 돌린 한효월의 말에 홍아가 냉큼 허리를 굽혔다.
"예, 공자!"
일진 바람이 이는 가운데 한효월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아."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부상당한 향아가 부지중에 중얼거렸다.
그녀를 부축하는 홍아도 마찬가지였다.
"전이랑 비교할 수 없이 단호하고…… 강해진 거 같지?"
* * *
산세가 아름답다.
단순히 아름답다기보다는 기묘한 형상을 한 기암괴석들이 이리저리 어깨를 부벼대고 제각기 멋을 자랑하고 그 암반들에 뿌리를 내린 고목들과 노송(老松)들이 안개 속에 그림처럼 걸려 풍치를 자아낸다.
어깨를 맞대고 높게 솟은 그 암벽들의 사이로 계곡 하나 자리한다.
쏟아지는 햇살은 이제 산 너머로 기울어가니 경치는 더욱 발군(拔群)!
그렇게 계곡은 자리하고 있지만 더 이상 갈 곳은 없었다.
그 막다른 계곡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 하나가 있다.
일신에는 흑색 장포를 걸쳤다.
사각형의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 매부리코에 굳게 다문 얇은 입술은 그의 성정(性情)을 말해 주는 듯하다. 나이는 40대 후반.
그는 팔짱을 낀 채로 막다른 계곡을 바라보고 있었다.
숲에 몸을 담근 그의 주변으로는 역시 흑의를 걸친 자들이 숲 속에 은신하고 있다. 그 숫자는 얼핏 눈에 띠는 것만 10여 명. 하지만 주변에 얼마나 더 있는지는 한눈에 알기 어렵다.
숲이 흔들리면서 한 사람이 흑의인의 앞에 나타났다.
"어떠냐?"
"팔진도(八陣圖)에 기초한 진세인 듯한데, 구궁과 오행이 뒤섞여 있어서 도저히 진세를 파훼하기가 힘듭니다. 가능하다 해도 진세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될 거 같습니다."
흑의인이 무릎을 꿇고 하는 말에 흑포중년인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멍청한! 결국 못한다는 말이잖나! 준비되었나?"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가 낮게 소리쳤다.
"옛! 명령만 하시면 됩니다."
옆에 있던 흑의인이 답했다.
"무너뜨려 버려! 당장!"
흑포중년인의 명령에 따라 막다른 곳으로 보이던 무우곡. 그 무우곡에서 가공할 폭발이 일어났다.
한효월이 들은 폭음이 바로 그것이었다.
콰콰앙!
거대한 폭발은 산곡을 떨어 울렸고 폭음은 이 산 저 산으로 옮겨가면서 진저리를 쳤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굴렀다. 돌덩이가 굴러다니고 바위산이 쪼개지면서 산사태가 일어났다.
쿠쿠쿠쿠…….
고막을 뒤흔드는 굉음.
흙먼지가 하늘을 덮으면서 일었다.
흑포중년인은 있던 자리에서 조금 물러나 그의 명령이 만든 장관을 바라본다. 그의 바로 앞까지 거대한 암석이 굴러 나와 있었다.
천지개벽할 듯 엄청난 폭음이었지만 실제로 부서진 것은 막다른 곡의 일부뿐이었다. 그러나 좌우의 암벽이 무너져 내려 길을 막으니 쉽게 갈 수가 없다. 게다가 시야를 가리며 일어난 흙먼지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판이다. 하지만 앞서 진세를 살펴보고 왔던 흑의인은 바람처럼 그 암석과 나무가 뒤엉킨 잔해들을 타고 넘어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런……."
흑의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눈앞으로는 안개가 서린 계곡이 펼쳐져 있다.
화약을 수백 근이나 썼는데도 진세를 파괴하지 못한 것이다.
그를 비웃듯 거대한 암벽은 여전히 하늘을 가리며 치솟아 있었다.
"어떻게 되었나?"
그의 옆으로 흑포중년인이 날아들었다.
"진세를 파괴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뭐라고?"
"하지만 진세가 흔들린 것 같습니다. 파훼할 길이 보이지 않더니 지금 상태면 조금만 시간이 있으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같기도 하다?"
흑포중년인의 눈빛이 음산하게 변했다.
그의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흑의인이 다급히 말했다.
"일단 고수들을 투입해서 건방의 암벽을 깨뜨리면 우리 눈앞에 펼쳐진 환영(幻影)을 깨뜨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진세는 파괴된 것과 다름이 없게 됩니다."
"화약은?"
"방금 폭파를 위해서 가져온 것을 다 썼습니다."
"부숴 버려."
말을 하면서 흑포중년인은 암중에 주위를 살핀다.
그의 눈빛은 냉혹하기 이를 데 없지만 차가운 만큼 냉정했다. 그렇기에 그는 제천교의 눈과 귀라고 할 수 있는 부천각(扶天閣)의 다섯 령주(令主) 중 하나가 될 수가 있었다.
쾅!
폭음 소리와 더불어 눈앞의 경물이 거짓말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수 십여 명이 달려들어서 일제히 암벽을 향해 장풍을 쳐냈다.
무형의 진기를 몸 밖으로 쳐낼 수 있는 것은 고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진기의 힘이 바위를 부술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당연히 내가의 고수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그런 고수들이 달려들어서 일제히 암벽을 공격하자 천 년의 이끼로 무장한 채로 당당하던 암벽도 견디지 못하고 뒤흔들렸다.
쩡쩡-
고막을 울리는 소음.
거대한 암벽에 좍좍 금이 가고 그 금이 확산되는가 싶더니 이내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암벽이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곤 경색이 일변했다.
갑자기 전혀 다른 세계에 온 듯이 밭이 있고 논이 보인다. 그 가운데 시내가 흐르고 화원과 약초 밭도 보였다. 소 몇 마리가 한가로이 꼬리를 치면서 이리저리 노닐고 있는 모습까지…….
그 가운데 자리한 것은 초가 서너 채.
주변으로는 대가 우거지고 송백이 푸르름으로 계곡을 에워싸 바람을 막는다. 여기저기에 꽃들이 흐드러져 곡 내에는 그야말로 청랑한 화향(花香)이 그윽하여 전혀 다른 세계에 온 듯하였다.
"흐음……."
어지간한 흑포중년인도 신음을 흘려냈다.
기문진세가 사라진 그 안쪽 커다란 바위에 일필휘지, 휘갈겨진 큼직한 글자가 눈에 선연하다.
<무우(無憂)>.
하지만 그것도 찰나, 다시금 안개가 서리면서 경물이 흔들거리면서 그 안개 속으로 묻혀드는 것이 아닌가!
"뭐, 뭐야? 빨리 안으로 들어가랏!"
그 광경에 흑포중년인이 다급하게 고함쳤다.
"누구를 찾아온 건가?"
낭랑한, 그러면서도 당당한 음성이 날아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 음성은 뜻밖에도 곡 내에서가 아니라 흑포중년인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흑포중년인이 신형을 돌리자 한 사람이 그와 7, 8장의 거리를 두고 우뚝 서 있음이 눈에 들어온다.
표표히 흰빛 유삼 자락을 날리는 모습.
맑은 얼굴.
한 번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익히 들어본 그 모습임을 보는 순간에 직감할 수 있다.
순간, 흑포중년인의 입에서 음산한 웃음이 떠올랐다.
"드디어 나타난 건가? 한효월……."
방금까지 그 다급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한효월이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좌우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마치 파도처럼 그를 향해 밀려들었다.
한효월을 향해 밀려드는 검은 그림자들.
그들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처음 흑포중년인의 옆에 은신해 있던 십여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이었다. 그 범위도 흑포중년인 부근이 아니라 계곡 여기저기, 바위 아래, 위, 나무 위에서 잇달아 모습을 드러내면서 한효월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들이 특별한 목적 하에 매복하고 있었음은 불문가지.
검은 파도와 같이 밀려들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도 한효월은 태연했다.
그는 그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안개가 일렁이면서 시야를 가리고 있는 무우곡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곡 내에는 한 사람의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는 듯 보였다.
그녀 또한 한효월처럼 그 자리에 고요히 서 있는데, 손에는 길다란 퉁소 하나를 들고 있어 탈속한 선녀를 보는 듯하였다. 그 모습이 진세가 발동하면서 일어나는 안개에 가리니 신비롭기 그지없다.
안개 속, 일순 고요했던 그녀의 눈이 커진 듯 보인다.
한효월을 발견한 듯한 태도.
순간.
"야아앗!"
기합 소리.
한효월을 향해 흑의인들이 달려들었다.
"무조건 나를 죽이기만 하면 되는 건가?"
쓴웃음이 한효월의 얼굴에 떠올랐다.
중얼거림과 함께 그의 신형이 바위를 차고서 옆 나무로 이동했다.
순간, 좌우의 나무에서 두 명의 흑의인이 한효월을 향해 날아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한 매복이다.
허공에서 휘익, 선회한 한효월은 빙글 도는 사이에 그들을 스쳐 올라 치려다가 흠칫한다.
그들에게서 팍! 그물이 펴져 나옴을 보았기 때문이다.
머리 위를 온통 그물이 덮어온다. 기이한 검은빛을 뿌리는 그물과 거기 달린 갈고리들. 보통의 그물이 아니고 아마도 갇히는 순간에 물고기의 신세로 확실히 만들어줄 물건이리라.
찰나, 한효월의 신형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리고는 바닥을 채 딛기도 전에 흑포중년인이 있는 쪽으로 날았다.
그 움직임은 영교하기 이를 데 없어서 보고도 믿기 힘든, 가히 절세의 신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머리를 치겠다는 건가?"
흑포중년인이 훌쩍 뒤로 물러나면서 껄껄 웃었다.
좌우로 검은 파도처럼 흑의인들이 몰려들었다.
한효월의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그들의 움직임이 전혀 의외였기 때문이다.
무우곡을 공격하는 자들, 그들의 뒤에서 자신이 나타난다면 전열이 흐트러져야 했다. 그런데 자신이 나타나자마자 이렇듯 파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공세라니!
검은 파도처럼 자신을 향해 밀려드는 흑의인들을 바라보는 한효월의 안색은 굳어 있었다.
그들이 보인 행태에서 자신이 나타날 것을 미리 알고 대비하고 있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변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았어야 했는데 무우곡에다 폭약을 터뜨리는 것을 보고 다급히 나타났던 것이 실수였다 싶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정도로서는 한효월을 잡을 수가 없었다.
무섭게 떨어져 내린 그물도 헛되이 바닥을 덮었을 뿐이고, 한효월은 이미 그 우두머리 흑포중년인을 덮치고 있는 상태였다.
"으악!"
좌우에서 그를 덮쳐 오던 자들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서너 명이 한꺼번에 나가떨어졌다.
한효월은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고, 그렇다고 적과 싸우지도 않았다. 나타나자마자 그를 가로막는 자들을 쳐 날리면서 비단 폭을 자르듯 일직선으로 흑포중년인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이다.
"과연 한 수가 있긴 하구나!"
흑포중년인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 말이 신호인 듯 그의 주위에 있던 수신호위들이 일제히 덮쳐 오는 한효월을 향해 양손을 내밀었다.
슈파팟!
섬광이 그들에게서 쏟아져 나갔다.
'천왕통!'
한효월의 신형이 바람처럼 옆을 사라졌다.
"으악!"
"으아악!"
뒤에서 그를 공격하려던 흑의인들이 참혹한 비명과 함께 거꾸러졌다.
쨍! 쨍그렁…….
뒤이어 고막을 찌르는 금속성이 터져 나왔다.
한효월은 순간적으로 옆으로 물러서고 있었고 그런 그를 서너 명의 흑의인들이 도검을 휘두르면서 공격하고 있었다. 그들의 공력은 대단하여 검기(劒氣)가 서릿발처럼 일고 도풍(刀風)이 소름 끼칠 정도였다.
자리를 잡고 있다가 공격하니 한효월조차도 물러나야 할 정도.
그런 그를 향해 기다렸다는 듯이 흑의인 한 무리가 달려들었다. 쓰러진 흑의인들을 타 넘어 달려드는 그들은 아예 수비는 도외시하고 흉흉한 살기를 뿜어내면서 한효월에게로 쇄도해 왔다.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만 같다.
밀려나던 한효월과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그들의 거리는 불과 반 장 남짓.
"물러나라……."
한효월이 그들을 치는 순간.
쾅!
콰콰쾅!
가공할 폭발이 그들에게서 연달아 터져 나왔다.
창백한 얼굴은 마치 백랍(白蠟)과 같고 부릅뜬, 핏발이 서린 두 눈에서는 흉흉한 살기가 불길과도 같이 이글거린다. 수비는 아예 생각조차 없는 모습은 그들이 정상이 아님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한다.
그렇기에 한효월은 그들이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사정없이 손을 썼다.
천하독보의 절옥장세가 그들 중 앞선 자의 가슴을 쳤고, 그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 한 사람이 폭발하자 그와 같이 있던 자가 다시 폭발했고, 그 옆에 있던 자도 폭발했다. 일대는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화해 버리고 말았다.
한효월뿐만 아니라, 그를 공격하던 흑의인들도 그 폭발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콰콰콰앙…….
그 폭음은 처음 무우곡의 진세를 깨뜨리기 위해서 터뜨렸던 것에 못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신음 소리가 검은 연기와 함께 피어 오른다.
팔다리가 날아간 참혹한 형상이나 핏자국조차 찾기 어렵다. 가공할 폭발이 그 모든 것을 집어 삼켜 버린 것이다.
"놈을 찾아라!"
그 와중에 들리는 것은 흑포중년인의 명령.
흑의인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아직도 불길이 널름거리는 폭발의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차가운 음성이 흑포중년인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늘 악독하군……."
난데없는 소리에 흑포중년인은 가슴이 섬뜩했다.
그가 바람처럼 옆으로 물러나면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강렬한 힘이 그의 턱을 후려쳤다.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하지만 처박힌 순간에 그의 신형은 오뚝이처럼 튀어 옆으로 굴렀다. 그러한 타격을 받았음에도 그러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음은 그의 능력이 범상하지 않다는 의미. 그러나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는 다시 옆으로 굴러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뒤에 있었던 사람, 한효월이 앞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발로 차버렸기 때문이다.
"저들을 모두 죽이고 싶지 않다면 멈추게 해."
한효월이 말했다.
그의 발 밑에 흑포중년인의 가슴이 깔려 있었다.
활개를 펴고 누운 꼴인 흑포중년인의 눈에 불신에 이어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한효월이 강하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이처럼 강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폭발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소란을 부린 것은 오로지 한효월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가 나타나면 그를 유인하여 탄천뢰를 품은 자들과 함께 폭사시킬 예정이었다. 자폭하게 선택된 자들은 섭혼(攝魂)에 걸려 제정신이 아닌 상태, 명령대로 죽기를 각오하고 그를 향해 덤빌 터이다.
하나가 터지면 주변 사오 장이 초토가 되는 탄천뢰다.
그런 것이 연달아 세 개나 터졌으니 주변 십 장이 모조리 잿더미가 되어버렸고 바위조차 남아나지 않았다. 그 폭발의 힘은 강력하기 이를 데 없어서 한효월을 공격하던 이십여 명의 흑의인들도 요행을 바라지 못하고 모조리 폭사하고 말았다.
살아남은 자들의 처경은 가히 목불인견.
그런데도 정작 한효월은 이미 그 폭발권을 빠져나와 우두머리인 흑포중년인의 뒤로 돌아가서 그를 제압한 것이다.
당하면서도 믿기 힘든 것이 무리가 아니었다.
흰 유삼 군데군데 불길에 그슬린 자국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효월의 겉모습만 보아서는 그가 방금의 그 악독무비한 함정을 헤치고 나온 사람인 것 같지가 않았다.
한효월은 흑포중년인을 상대함에 있어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턱은 반쯤 부서졌고 걷어채인 옆구리도 반쯤 허물어져 있는 상태였다. 입에서는 선혈이 쏟아져 흐르고 전신은 어떻게 된 것인지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다. 걷어채이면서 혈도까지 제압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흑포중년인은 공포스러웠다.
자신이 채 일초도 견딜 수 없는 상대라니!
함정을 재삼재사 강조하던 명령이 떠올랐다.
여의치 못하면 무조건 그 자리를 벗어나라던 명령까지…….
"들리지 않나? 무고한 살생은 하고 싶지 않다."
한효월이 다시 말했다.
그가 발에 힘을 가하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조금만 더 힘을 가한다면 가슴이 무너져 즉사하게 되리라.
흑포중년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소문보다 더 강하군……. 교주님의 유시(諭示)를 전하……겠다."
난데없는 소리에 한효월은 멈칫 그를 내려다보았다.
좀 전까지 공포의 빛이 어렸던 흑포중년인의 얼굴에 괴이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의아할 것은 없다. 너를 해치지 못하면 이 유시를 전하라는 말씀이셨으니…… 유시는……."
그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입에서 핏물이 솟구쳐 올랐다.
명재경각(命在頃刻)!
손을 너무 과하게 쓴 것 같았다.
그 모습에 한효월은 그의 가슴에다 몇 가닥 지풍을 쏘아 기혈을 도우면서 발을 뗐다.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바로 그 순간.
푸학!
흑포중년인이 몸을 숙이는 한효월을 향해 핏물을 토해냈다. 핏물과 함께 섬광(閃光)이 입속에서 튀어나왔다.
막 몸을 숙이던 한효월은 대경실색했다.
거의 죽어가는 것 같던 자가 이런 기습을 해올 것임은 상상치도 못했던 것이다.
사악한 웃음이 흑포중년인의 눈에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그의 눈에 떠오른 것은 경악과 불신!
몸을 숙이려던 한효월이 슬쩍 허리를 틀자 자신이 토해낸 섬광이 그의 목덜미에 맞는 것 같더니 그대로 튕겨져 나감을 보았기 때문이다.
"간교한 자 같으니……."
한효월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천혼침(穿魂針)을…… 설마 금강불괴?"
그가 눈을 부릅뜬 채로 더듬거렸다.
하지만 그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좌우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한효월이 달려드는 흑의인들에게 손을 써 그들을 쓰러뜨린 것이다.
"내가 이곳에 올 것임을 어떻게 알았나?"
한효월이 그를 바라보면서 냉엄히 물었다.
"으으……."
흑포중년인의 입과 코에서 핏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한효월에게서 일어나는 절대(絶大)한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절로 피를 게워내는 것이다.
"어떻게 알았나?"
한효월이 다시 물었다.
"크으으…… 본 교의 부천각에서 찾고자…… 하면……."
견디지 못하고 흑포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입을 열자 핏물이 울컥 올라왔다. 억지로 버틸 일도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것은 기밀 사항이라고 할 것이 아니었기에.
"아직도 교주가 나에게 전할 말을 가지고 있나?"
한효월의 물음에 흑포중년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표정은 그의 말이 함정이었음을 시인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돌아가라."
"……?"
얼떨떨한 빛이 흑포중년인의 얼굴에 떠올랐다.
"나는 오늘 밤 이곳을 떠날 것이다. 재주가 있다면 다시 나를 따라와 보라고 전하라."
그 말을 끝으로 한효월은 등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신형을 돌린 한효월의 전신에서 격한 떨림이 일었다.
'이 소저…….'
곡구. 그의 앞에 한 사람이 홀연히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선녀와 같이 옷자락을 표표히 날리는 가운데,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