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首 망혼괴노(亡魂怪老)
-노인을 만나다.
마교의 전설(傳說)은 세월이 가도 끊임없다.
그 자리를 떠난 한효월은 강변에 정박한 큰 배를 보았다.
낮에 보았던 배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생긴 범선(帆船). 아마도 남해용왕이 타고 온 배였을 터이다. 그 배를 미련없이 뒤로한 한효월은 그곳에서 십여 리가량 벗어난 곳까지 갈대 위를 달려갔다.
얼핏 풀잎을 밟고 달린다는 초상비(草上飛)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초상비는 낮게 깔린 풀잎을 딛고 그 탄력으로 몸을 날린다. 가볍고 빠를 수밖에 없고 경공의 대가가 아니라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상승의 신법절기다. 하나 갈대는 풀잎과 다르다. 훌쩍 큰 갈대의 끝은 자연히 낮게 깔린 풀잎보다는 더 하늘거릴 수밖에 없다. 그 갈대의 끝을 발끝으로 스치며 날아가는 경공은 자연히 초상비를 능가한다.
바로 전설의 육지비행(陸地飛行)의 일종이다.
그런 그를 소용왕 부해교의 수하들이 쫓아갈 수 있을 리 만무.
더구나 낮에 봐둔 강변에 이르자 한효월은 미련없이 강으로 뛰어들었다.
수영을 해서 강을 건너는 것이 아니었다.
넘실거리는 강물을 밟고 도강(渡江)을 하는 것이다.
황하는 보통의 강물과는 다르다.
아무리 폭이 좁다고 하더라도 보통의 강물과는 비교될 수 없는 너비를 가지고 있어 배로 건너는 것도 한참을 가야만 한다.
그런 황하를 달빛 아래,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건너가고 있는 한효월의 모습은 가히 장관(壯觀)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모습도 이내 넘실거리는 황하에 묻혀 버렸다.
* * *
화산(華山)과 중조산(中條山)은 원래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그로 인해 황하가 막혀 사방으로 범람하자 강신(江神)인 거령(巨靈)이 힘으로 그 두 산을 갈라놓았다 한다. 그렇게 양쪽으로 갈라 그 가운데로 황하를 흐르게 했다 하니 황하를 건너면 이미 중조산을 바라보게 되고 일단은 중조산 경내에 들어서게 되는 셈이다.
다음날 아침이 될 무렵.
한효월은 지난날 자신이 살던 무우곡 근처에 도달해 있었다.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밤을 도와 달려온 덕분이었다.
눈에 익은 산세가 가슴을 가득 채운다.
고향(故鄕).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고향을 찾는,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의 그 감흥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울멍줄멍한 산자락과 날카롭게 하늘을 찌르는 산봉. 산세를 따라 흐르는 새벽 안개. 그 안개와 어울린 산봉의 구름까지 모든 것들이 정겹다.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가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까지도 신기했다.
한효월은 눈이 부신 듯 안개 저편에서 밝아오는 아침 해를 본다.
부지중에 한숨이 새어 나온다.
나는 과연 이곳을 떠났어야 했을까?
지금이라도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닐까…….
귓전을 울리는 아침의 숨소리.
더없이 너른 자연의 품은 한효월을 아낌없이 감싸 안는다.
거기에 취한 듯 묵묵히 서 있던 한효월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얼굴에는 누구도 형용키 어려운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자조(自嘲)인 듯도 하고 곤혹스러운 듯하기도 하다. 아니, 체념인 듯도 해 보이는 그런 웃음이다.
"어차피 결정한 일……."
나직한 읊조림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눈앞 저 멀리에는 아침 안개에 휘감긴 무우곡의 모습이 아련하다. 사물을 인지할 때부터 살았던 바로 그곳.
한효월은 몸을 날렸다.
그가 가고 있는 곳은 눈앞에 있는 무우곡이 아니었다.
쿠쿠쿠…….
지축을 울리는 음향이 점점 뚜렷해진다.
아침 해가 아침 안개를 갈라놓고 있음에도 이곳의 안개는 더욱 짙어지는 것만 같다. 산세가 급격하게 가팔라진다. 가파르다 못해서 절학(絶壑)하다. 삐쭉삐죽 산봉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안개에 휘감긴 산곡의 경치는 가히 절세(絶世)였다.
쿵쿵쿵…….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그 정체를 드러냈다.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까마득한 절벽에서 산산이 부서진 물줄기가 은 조각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폭포의 높이만도 수십 장은 되어 보이는 장관(壯觀).
이렇게 물보라가 사방으로 튕겨 나가니 안개가 일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터이다. 발 밑을 흐르는 구름에 안개가 뒤섞여 도무지 이곳이 선계인지 하계인지 분간하기가 힘들다.
낙락장송(落落長松)에 산자락을 덮은 숲, 그 사이를 감돌아 맴도는 이름 모를 새소리까지.
누구라도 넋을 잃기에 족한 절경이 불쑥 눈앞으로 뛰쳐 들어온다.
그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한효월은 문득 기억 저편으로 밀어두었던 한 여인을 떠올린다.
현숙한 기품을 지닌 여인.
이심환(李尋環).
그녀를 떠올리자 한효월의 얼굴에는 묘한 빛이 인다.
추억인 듯도 하고 가슴 한쪽, 저 깊은 곳이 아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때였다.
계곡의 안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효월이 갑자기 폭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마치 투신이라도 하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의 신형이 찰나간에 폭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직후, 안개를 밟으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마치 선녀가 하강한 듯한 모습으로, 한 여인이 거기에 나타난 것이다. 안개를 즈려밟고 긴 옷자락을 너울거리며…….
투명하고도 맑은 얼굴의 미인이다.
아주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품은 고귀(高貴)했다. 아니, 고귀보다는 고결(高潔)이라는 말이 맞을까? 그윽한 눈매며 오뚝한 콧날이나 붉디붉은 단순(丹脣)에 호치(晧齒)를 갖춘 얼굴은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기품을 지녔다. 얼핏 주자미와 흡사한 듯도 보이지만 그녀처럼 냉오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감싸줄 수 있는 그윽한 분위기라 매우 달랐다.
안개를 헤치며 소리없이 나타난 그녀는 깊은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 모습은 이곳에 오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아가씨!"
맑은 부르짖음 한소리.
그녀의 시비인 듯한 청의여인 둘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나이는 불과 십육칠 세 안팎인 듯한데 신법의 영교(靈巧)함은 보기 드물 정도였다.
"잠시 다녀오마. 따라올 것 없다."
고개를 돌려 그녀들을 본 백의미녀는 가볍게 어깨를 흔들었다.
순간, 옷자락을 너울거리며 그녀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놀랍게도 그녀는 그렇게 폭포를 가로질러서 저쪽 산봉으로 날아갔다. 그녀가 향하고 있는 방향은 바로 좀 전 한효월이 지나온 무우곡이다. 그녀의 나이는 아무리 봐도 서른을 넘지 않은 듯했다. 그런 그녀의 나이를 감안한다면 그녀의 이 놀라운 경공은 세상을 놀라게 하고도 남았다.
"아가씨-!"
그녀의 뒤로 시비들의 외침만이 폭포의 고함 소리에 묻힌다.
쿠쿠쿠쿵쿵…….
한효월은 폭포 뒤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이 소저…….'
나직한 읊조림이 한효월의 입에서 새어 나온다.
그녀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그 모습조차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긴 그사이 시간이 얼마나 흘렀다고 변할 것인가.
잠시 그녀가 사라진 곳을 보고 있던 한효월은 생각을 떨어버리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시선을 안쪽으로 돌렸다.
놀랍게도 그 폭포의 뒤쪽 암벽으로는 동굴이 있었다.
한효월의 행동에 거침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이 동굴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고막을 떨어 울리는 굉음.
사방으로 물방울이 튄다.
질척한 습기.
물줄기를 뚫고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지만 눈앞에 드러난 동굴 속은 어둠이 짙어 사물을 분간하기 힘들다. 장정이라면 허리를 펴고 들어갈 수 없는 크기. 높이가 다섯 척에 조금 모자란다. 게다가 안에서는 쿨쿨 물줄기가 흘러나오니 내부에 수원(水源)이 있는 듯했다.
한효월은 망설이지 않고 허리를 굽힌 채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망혼동(亡魂洞).
어둠 속에, 한효월이 사라진 그 동굴의 안쪽 벽에 희미하게 새겨진 이름이 드러난다. 마치 야수가 긁어 쓴 듯한 섬뜩한 글귀.
짙은 어둠.
동굴 내부는 자신의 손가락도 보기 힘들었다.
고막을 치는 폭포의 굉음도 허리를 펴지 못한 채로 몇 구비를 전진하자 멀어진다. 하지만 그에 비례하여 발 밑을 흐르는 물소리가 또렷해졌다.
물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는 가운데 좁던 동굴이 넓어지고 커졌다.
이젠 허리를 펴고 걸을 수 있었다.
입구에서 십여 장이나 들어온 다음이었다.
허리를 펼 수 있다는 것은 높이가 그렇다는 뜻이지 훤한 동공(洞空)이란 말은 아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가는 몇 걸음만 걸어가 보면 알게 된다. 길게 늘어진 종유석들이 길을 막는 것이다. 아름드리 종유석들이 줄줄이 늘어지고 석순이 자라나 종유석과 마주하니 마치 기둥으로 길을 막아놓은 것 같을 지경이다.
한효월의 공력은 이미 허실생동(虛實生同)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의 공력이라면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칠흑 같은 어둠이라면 제아무리 그일지라도 힘들 수밖에 없다.
품속에서 준비된 화섭자를 꺼내 불을 밝힌 한효월은 잠시 주위를 살펴보고는 다시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철퍽거리던 바닥도 말랐다.
말랐다기보다는 바닥을 흐르던 물이 나오던 동굴에서 갈라져 나간 다른 동굴로 한효월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한효월은 전신에 강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꺄아아! 꺄아아…….
소름 끼치는 음향과 함께 수많은 그림자들이 그를 향해 덮쳐들었다.
파닥거리는 그것들은 수백 마리도 넘어 보이는 박쥐 떼. 이를 드러낸, 그 형상은 섬뜩하기 그지없었고 박쥐들은 불빛을 따라 미친 듯 그를 덮쳤지만 이미 호신강기를 일으켜 몸을 보호하고 있는 한효월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었다. 그는 그것들이 덮쳐 올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이곳에 이미 여러 번 왔었음을 의미한다.
슉-
한효월의 신형이 바람처럼 박쥐 떼를 지나갔다.
그 속을 뚫고 지나 조금 더 전진하자 빛이 보이는 듯했다.
동굴이 끝났다.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동굴은 끝이 아니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지하 광장.
종유석이 늘어진 그 동굴 광장은 얼핏 보기에도 족히 십여 장은 넘어 보인다. 그 광장의 가운데에는 광장의 절반은 차지하는 듯한 지하 호수가 있었다. 이런 지하에 있는 호수라면 물빛이 검어야 옳았다. 물빛은 검었다.
그런데 기이한 빛이 그 호수에서 안개처럼 뿜어지고 있었다.
희미한 빛이 물속에서 일렁거려 검은 물빛이 기이하게 빛난다.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호수.
창, 창……!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묘한 메아리로 동굴을 울린다.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괴기한 분위기.
마치 악마의 숨결이 목덜미를 핥고 지나가는 것만 같아 가슴이 섬뜩하다.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절로 주위를 둘러보게 만드는 기괴한 느낌이 동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한효월은 무엇을 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일까?
지하 호수는 넓은 띠처럼 지하 광장을 가로막는다.
안개가 서린 듯한 호수 건너에 뭐가 있는지는 어둠 탓에 제대로 분간조차 힘들다. 호수에 서린 빛이 주변 사물을 희미하게나마 보이게 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기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잠시 어둠에 잠긴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던 한효월은 천천히 숨을 들이키고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의 신형이 바람처럼 너비 사오 장에 이르는 지하 호수를 갈랐다.
촤악! 촤아악…….
흰빛이 폭죽처럼 호수에서 솟구쳤다.
그 빛은 한효월을 따라 호수의 처음에서 끝까지 이어졌다.
흰빛의 창(槍)이 호수에서 솟구쳐서 한효월을 꿰어버리려는 듯했다.
하지만 한효월의 신형은 바람과도 같아서 그 백광(白光)이 따라오기 전에 이미 건너편에 내려서고 있었다. 그는 이미 그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처럼 반대 편에 내려선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촤악! 촤아아! 촤아아!
물결이 미친 듯이 용솟음쳤다.
한효월을 놓쳐서 노한 듯, 분함을 참을 수 없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자세히 본다면 그 물결 속에서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 뱀과 같은 물체들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은광사어(銀光絲魚).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희귀한 물고기.
말은 물고기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뱀과의 잡종에서 태어난 것으로 성정(性情)이 흉포하여 물속에 들어온 것이라면 무엇이든 뼈도 남기지 않는다. 가늘고 날카로운 몸체로 상대의 몸속으로 파고들 뿐 아니라, 물 위를 지나는 것조차 그냥 두지 않으니 황소라도 찰나간에 뼈도 남지 않게 된다.
한효월조차 지난날 이곳에 처음 들어올 때는 곤욕을 치렀었다.
처음에는 그 흉포함에 놀라 모두 죽여 버릴 생각을 했었다. 만약 저런 것이 동굴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그 해악을 이루 말할 수가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늘의 처사는 공평하여 이 악종(惡種)들이 이곳을 떠날 수가 없음을 알고 그냥 두기로 하였었다. 이 지하 호수를 벗어나면 일각 이내에 죽게 되는 것이 은광사어의 운명이었기에.
지하 광장의 어둠은 호수를 지나자 더욱 짙어졌다.
어둡지 않은데도 어둡다.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다. 실로 괴이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혼돈무극(混沌無極)……."
한효월은 나직이 중얼거리고는 익숙한 걸음으로 전진하기 시작한다. 그 어둠 속으로.
그리고 채 일각이 지나지 않아 그는 그 어둠이되, 어둠이 아닌 곳을 벗어나 전혀 다른 곳으로 나오게 되었다.
원래 거기에는 일종의 진도(陣圖)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이름하여 혼돈무극진세(混沌無極陣勢).
천지간의 모든 것이 엉겨 버리는 진세다.
진세를 발동하면 음양(陰陽)이 전도(顚倒)하고 오행(五行)이 방향을 잃고 한데 뒤섞여 버린다. 매시(每時), 매각(每刻) 천도(天道)의 운행이 저절로 바뀌며 상식적인 모든 것들이 그 안에서 무너진다.
진세를 통과한다는 것 자체가 지난(至難)한 일이 된다.
모든 것이 뒤바뀌어 있기 때문에 제아무리 진도지학의 달인이라 할지라도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효월이 채 일각이 지나지 않아 그 진도를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 뛰어남도 있지만, 실제로는 이 진세가 단순히 사람의 발길을 막는 역할만을 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온전하게 진세가 발동하고 있었다면 제아무리 그일지라도 이렇듯 간단히 통과할 수는 없을 터였다.
진세를 벗어나자 전혀 다른 광경이 나타났다.
그곳은 이미 동굴이 아니었다.
음침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은 일견 비슷해 보이긴 한다.
그러나 동굴은 아니었다. 하늘을 찌를 듯 깎아 세운 벼랑이 좌우로 보이고 작은 길 하나가 눈앞으로 뻗어나 있을 뿐, 기괴하게도 검은 돌과 이끼, 그리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덩굴만이 간혹 보이는 산곡(山谷) 하나가 나타난 것이다.
그의 눈앞에.
어딘지 모르게 음산한 기운이 가득한 곳.
그 흔한 풀이나 나무 한 그루도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항아리와 같은 생김. 이곳은 또 하나의 동굴에 다름이 아니었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은 동전만하다. 그 좁은 하늘을 둘러싼 산곡은 좌우로 급격히 넓어지면서 이 산곡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늘의 한쪽만을 조금 떼어내어 빛만 스며들게 한 것 같은 형상.
정오가 아니라면 햇빛조차 보기 힘들 지세였다.
대충 폭이 이십여 장에 길이가 칠팔십 장가량은 되는 듯 보인다.
한효월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이내 산곡의 끝이 나타났다.
커다란 동굴 하나가 그 끝에 자리하고 있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동굴 앞에서 한효월이 말했다.
답이 없다.
괴괴한 침묵이 산곡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한효월은 그 침묵 속에 조용히 서 있었다.
"크크크……."
문득, 음산한 웃음소리가 그 침묵을 깨뜨리며 들려왔다.
온통 검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곡(山谷).
살아 있는 것을 찾아보기 힘든 그 산곡 끝에 자리한 동굴은 높이가 일 장가웃이나 되니 사람이 드나들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안으로 들어서자 희미한 빛이 어둠을 쫓는다.
모든 것이 검은데, 기이하게도 산곡의 전체는 희미한 빛으로 둘러싸인 듯했고 그것은 이 동굴 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굴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그리 깊지 않았고 들어서자마자 광장처럼 넓었다.
거기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봉두난발(蓬頭亂髮).
백발이 뒤엉킨 그 머리카락은 얼마나 긴지 땅바닥에 끌릴 지경. 그 백발 사이로 번갯불 같은 빛이 뇌전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것이 안광(眼光)임을 감안한다면 가히 심금(心琴)이 떨리는 공력이다.
몸에 걸친 것도 누더기다.
엉망으로 헤어진 옷, 그의 늘어진 백발과 어울리니 기괴하다.
얼핏 보면 그의 모습은 벽과 동화되어 눈빛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한효월도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벽에서 빛이 쏟아져 나오는 줄 알았으니 더 말해 무엇할 것인가.
"무양(無恙)하시군요."
한효월이 여전한 어조로 말했다.
"큭큭큭…… 왜? 뒈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살아 있어서 불만이냐?"
"그리 쉽게 돌아가실 분이 아닌 걸 알고 있죠. 그리고……."
한효월이 미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전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보다는 당연히 오래 사실 것이라고."
"크크크크……."
괴인이 대답 대신 음산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효월은 말없이 괴인의 앞으로 다가가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괴인과 대면을 하는 셈인데 이곳이 마치 어느 집안 대청이나 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강호에 나가 기연을 얻었더냐?"
마주 앉는 한효월을 보고 있던 괴인이 음산한 음성으로 물었다.
눈동자에서 푸른 빛이 짙게 쏟아진다. 단순히 강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눈빛은 사람을 핍박하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멍청한 놈…… 그렇게 해서 더 일찍 뒈지게 되었군!"
"얼마나 남은 것 같습니까?"
"네놈이 더 잘 알 텐데 그걸 왜 나에게 묻는 게냐?"
"방법이 있을까 해서요."
갑자기 괴인이 벼락처럼 손을 뻗어냈다.
그가 자신의 손목을 낚아채자 한효월은 주춤 앞으로 끌려갔지만 전혀 반항함이 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침묵이 동굴 안을 줄기차게 흘러갔다.
"……."
괴인은 한효월의 맥을 짚은 채로 입을 다물었다.
한효월 또한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인 양, 동굴 안은 괴괴한 적막에 묻혀들었다.
괴인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그의 눈에서 쏟아지던 빛이 꺼졌다. 눈을 감고서 다시 진맥을 하는 것이다.
한효월의 맥을 잡은 그의 손은 사람의 손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검은빛을 띠고 있는 데다가 흑요석처럼 윤이 났다. 게다가 세 치나 되는 손톱은 하얗게 빛나 섬뜩하기까지 했다.
"미친놈……."
이윽고 그가 눈을 뜨면서 내뱉은 말이다.
"방법이 없는 건 알고 있겠지? 대체 무슨 짓을 해서 이렇게 단축을 시켜놓은 게냐? 일 년도 남지 않았다."
한효월이 쓴웃음을 머금어 보였다.
"일 년씩이나 됩니까? 저는 불과 몇 개월 정도라고 생각했었는데요."
괴인은 어이없다는 듯 한효월을 쳐다보다가 한효월의 손목을 집어 던지듯 밀면서 머리를 저었다.
"애늙은이 같은 놈! 네놈의 사부가 어째서 널 이따위로 키워놓은 건지 모르겠군. 애는 애다워야지…… 제까짓 놈이 무슨 생사를 초월한 도인처럼……."
"제가 도(道)를 얻어 생사를 초월했으면 왜 어르신네를 찾아왔겠습니까?"
그의 말에 움찔하던 괴인은 괴소를 터뜨렸다.
"크카카카카……."
괴인은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별로 큰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동굴 전체가 뒤흔들리고 기파(氣波)가 광풍(狂風)을 불러일으켰다.
세상이 놀랄 공력이었다.
그의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던 한효월은 정색을 했다.
"초혼대법(招魂大法)이 정말로 가능합니까?"
그 말에 거짓말처럼 괴인의 웃음소리가 뚝, 끊어졌다.
그리고 늘어졌던 백발이 너울거리면서 춤추듯 일어났고 부릅뜬 그의 눈에서 가공할 녹광(綠光)이 형체가 있는 것처럼 쏟아져 나왔다.
"설마, 네놈은 생에 미련이 남아서 그 역천(逆天)의 대법을 사용하려는 것이냐? 그 결과가 어떨지 알면서도?"
그의 기도는 공포스럽기 짝이 없었다.
방금까지의 태도와는 달리 금방이라도 때려죽일 듯한 표정이라 희로가 무상함은 종잡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효월의 얼굴은 고요하기만 했다. 웃음기마저 감돌았다.
"마교의 호법장로(護法長老)가 역천 운운하다니, 누가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쾅!
마치 거대한 철추로 얻어맞은 듯 괴인은 전신을 떨었다.
그의 눈에서 공포스러운 살기가 무섭게 일었다.
"어디서 그 말을 들었더냐?"
금방이라도 손을 쓸 듯한 기세.
살기가 수천 개의 검날처럼 덮쳐 온다.
그것은 괴인의 말이 단순한 위협이 아님을 의미한다.
하지만 한효월의 태도는 여전히 물 흐르듯 고요하기만 하다.
"제가 모를 것으로 생각하셨습니까? 마교의 호법장로가 아니라면 누가 있어서 그처럼 놀라운 마공이학(魔功異學)을 일신에 지니고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이지요."
괴인이 눈을 부릅떴다.
"건방진…… 마교는 천하제일의 힘을 가진 곳이다! 나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는 수도 없이 많다!"
"만약 마교에 어르신네와 같은 분이 많았다면 이미 세상은 마교의 천하가 되었을 겁니다. 그처럼 분열되어 어둠 속으로 숨어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내분(內紛)으로 자멸하지도 않았겠지요. 더구나……."
한효월은 그를 바라보았다.
"어르신네께서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이런 곳에 은거할 리도……."
괴인이 노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이곳에 있는 건……."
"마공(魔功)을 이기기 위함임을 저도 압니다. 하지만 어르신네의 지금 능력이라면 굳이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도 없음도 알고 있습니다."
"네놈이……."
"만류귀종(萬流歸宗). 모든 것은 결국 하나로 이어집니다. 어르신네의 능력이 이미 마공을 승화시킬 경지에 도달해 있음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건방진…… 대가리 피도 안 마른 놈이 뭘 안다고……."
괴인의 음성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가 한효월과 만난 것은 십 년이 넘었다.
어린애이면서도 전혀 어린애가 아닌 묘한 한효월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곳에 도달하자 괴팍하지만 외로웠던 그는 한효월과 묘한
관계를 유지한 채로 가끔 만난 것이 그간 십 년을 흐른 것이다.
"말씀해 주십시오, 가능한지."
"……."
쏘아보던 괴인이 입을 열었다.
"가능한 걸 네놈도 알고 있지 않느냐?"
"단순한 초혼대법이 아닙니다. 마성(魔性)에 물들지 않은, 예전의 저로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왜 죽느냐?"
"……."
한효월이 입을 닫았다.
그것을 모를 괴인이 아님에도 그가 물었기에.
"육신은 혼백(魂魄)을 담는 그릇과 같다. 사람이 죽는 것은 혼백을 담을 그릇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 영생(永生)의 신체(神體)가 있다면 누가 죽는단 말이냐? 너의 요절 또한 육신을 유지할 수 없어서 생긴 일이거늘, 초혼(招魂)한다고 하여 어찌 그 몸에 혼백이 온전히 깃들 수가 있겠느냐?"
사람의 정신은 불멸(不滅)이라 말한다.
정신은 혼(魂)과 백(魄)으로 이루어지니, 정신 작용을 일러 혼이라 하고 형체에 의지한 영(靈)을 백이라 한다. 혼이 사람의 몸을 떠나고 넋이라 불리는 백이 땅으로 돌아가면 사람의 생기(生機)는 끊어진다. 그를 일러 돌아간다[歸]라 하며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설사 혼이 몸을 떠났다 할지라도 백이 아직 몸에 남아 있으면 혼이 돌아올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다. 혼과 백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라 따로 놓고 생각할 존재가 아닌 까닭이다.
백(魄)이 흩어지면 신체는 완전히 죽게 된다.
그런 몸에서 이미 나간 혼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은 역천(逆天), 하늘을 거슬리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교의 무공과 술법들이 역천이라 불리며 배척을 받고, 또한 세상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역천이라는, 하늘의 뜻을 거슬린다는 것이 쉬울 리 없고, 쉽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무섭다는 반증(反證)이기 때문이다.
괴노인의 말은 이미 생기가 끊어진, 백이 흩어진 몸에 어찌 혼이 다시 깃들 수가 있겠느냐는 뜻이다.
"부동명왕공(不動明王功)을 베푼다면 어떻겠습니까?"
한효월의 말.
괴노인의 눈에 경악이 드러났다.
"노옴…… 주제에 정말 모르는 게 없구나!"
"초혼대법으로 혼을 불러오고 부동명왕공으로 사(邪)를 물리치고 잠수(潛修)한다면…… 그래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부동명왕공은 잊혀진 고대(古代)의 기공(奇功)이다. 전설뿐, 과연 그 효능이 어떻게 될는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담담한 웃음이 한효월의 얼굴에 피어난다.
"어차피 죽을 몸. 더 이상 나빠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악마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어르신네께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
갑자기 숨 쉬기 어려운 침묵이 동굴을 짓눌렀다.
잡아먹을 듯 한효월을 노려보던 괴노인은 이윽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고자 하는 게냐? 전의 너는 이렇게 생에 집착하지 않았었는데…… 그사이에 속물(俗物)이 되었을 리는 없을 테고,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만 할 이유라도 있는 게냐?"
한효월의 얼굴에 그늘진 웃음이 드리웠다.
"생을 영위하면서 어찌 집착이 없겠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이겠지요. 소생이야 평범한……."
괴노인이 말을 끊었다.
"이유가 없다면, 이 일은……."
"필요할지 몰라서 미리 알고자 하는 겁니다."
"그게 무엇이냐?"
괴노인이 한효월을 노려보았다.
"아직은 저도 뭐라고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굳이 말을 하라면, 후일을 위한 대비라고나 해야 할는지……."
"후일을 위한 대비?"
"제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처리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면……."
그의 말에 일순 괴노인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그럼 부활해서 다시 그 일을 하겠다는 게냐?"
희미한 웃음이 한효월의 얼굴에 스쳐 간다.
"그럴런지도."
"한심한 놈이로구나! 뒈지면 그걸로 모든 게 끝인데 무슨 한(恨)이 그렇게 남아 역천을 하면서까지 되살아나려고 발광을 하겠다는 게냐?"
"한이라기보다는 제 자신에 대한 다짐 같은 거겠지요."
"다짐?"
"과연 내가 하려던 일을 다하지 못했다면, 그것이 내 능력의 부족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가능성이 있었던 일을 주어진 시간 때문에 못한 것인지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문득 묘한 웃음이 한효월에게서 일어난다.
"만약 능력이 되는 데도 수명으로 인해 하지 못했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한이라기보다는 욕심이겠지요."
어이가 없는지 괴노인은 풀풀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큭…… 말이야 그럴듯하군! 모든 사람들이 다 네놈과 같으니 이 세상에 죽고 싶은 놈이 하나도 없는 게지. 시황(始皇)이란 놈까지 무슨 불사약 어쩌고 하면서 지랄발광, 오히려 스스로의 명을 재촉하지 않았더냐?"
"어르신네께선 어떠십니까?"
괴노인이 눈을 꿈벅거렸다.
"무슨 소리냐?"
"생에 미련이 없으십니까? 아니면 이미 생사를 초월하셨습니까?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요. 스스로의 나이를 잊어버릴 만큼 사셨으니……."
"크크크…… 교활한 놈 같으니, 감히 네놈이 나를 떠보겠다는 게냐?"
문득 한효월은 정색을 한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괴노인을 향해 머리를 숙이는 그의 신색은 방금까지와는 달리 정중하다. 고요한 기품이 그의 전신에 서려 있다.
"……."
괴노인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만 있을 따름.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이윽고 그가 입을 연다.
"무엇이 너를 곤란케 하는지나 들어보자."
한효월은 이미 생각을 정리해 둔 듯 망설임없이 입을 열었다.
"명교(明敎)에 마교의 힘이 이어졌다는 말이 맞습니까?"
괴노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명(明)…… 그 무슨 백련교(白蓮敎)라는 놈들 말이냐?"
"그렇습니다."
"말도…… 그까짓 놈들하고 마교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괴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세간에 알려지기는 백련교가 마교로 불리는 것은 당금의 조정이 백련교를 사교(邪敎)로 몰아 말살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만, 그들이 마교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 같진 않습니다."
"연관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한효월의 대답에 괴노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 게냐?"
"이제부터 제가 말씀드릴 제천교라는 집단과의 문제로 개방은 오래전부터 마교에 대해 조사를 해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문제로 개방의 방주와 깊게 상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개방의 방주라고?"
괴노인의 눈빛이 일렁인다.
다른 사람이 아닌 개방의 방주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거지의 집단이라 할지라도 그 오랜 역사는 허투루 볼 게 아닌 까닭이다.
"제천교……."
한효월의 이야기를 다 들은 괴노인이 중얼거렸다.
"백련교와 마교의 관련은 그리 깊은 것 같지 않습니다. 궁지에 몰린 그들이 세를 불리기 위해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마교의 인물이 섞인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천교는 다릅니다. 개방에서는 물론이고 제 사형이신 무림맹주가 그토록 오랜 세월을 조사해 왔음에도 전혀 그 내용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제천교 자체가 바로 마교의 변형인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가능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한효월은 자신의 사부에게서 처음 들은 봉신의 서약을 이야기했다. 그와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천하십왕의 이야기까지.
"그런 까닭에 제천교를 딱히 마교의 변신이라고 단정할 순 없었습니다. 혹 짐작 가는 바라도 있으십니까?"
"없다."
괴노인은 간단히 말을 잘랐다.
평소의 괴팍한 성품이 되살아나는 듯한 태도.
"마교가 모습을 감춘 것은 대략 50년 전이라고 하더군요. 당시 마교의 힘은 천하를 뒤덮을 정도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마교가 갑자기 사라진 까닭을 아는 사람은 뜻밖에도 거의 없더군요……."
한효월은 말끝을 흐렸다.
그가 바라봄을 알면서도 괴노인은 눈을 감았다.
말을 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
잠시 그를 바라보고 있던 한효월은 다시 묻는다.
"혹 봉신의 서(誓)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 사부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나도 말할 수 없다."
"아신다는 말씀이로군요?"
"무슨 의미인지는 안다."
괴노인이 부러지는 목소리로 답했다. 눈을 감은 채. 노인의 얼굴은 고집으로 완강하다.
"말씀해 주십시오!"
한효월이 그의 앞으로 다가앉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봉신(封神)이란 말의 의미를!"
"나도 언젠가 조금 들은 적이 있을 뿐, 아는 게 별로 없다. 게다가 그 약속은 당사자 외에는 누구도 그 상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
"아시는 것만이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한효월이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가 손을 잡고 흔들자 낡아 빠진 괴노인의 옷이 펄썩펄썩 삭아 내렸다. 그 바람에 시커먼 빛으로 빛나는 노인의 앙상한 가슴이 반쯤 드러났다.
"이런 패 쥑일 놈 같으니! 날 벌거벗길 참이냐?"
노인이 흉흉히 눈을 부릅떴다.
"새 옷으로 한 벌 만들어드리지요. 봉신이 무슨 뜻입니까?"
한효월이 집요하게 묻자 괴노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를 노려본 채로 입을 연다.
"말 그대로 봉신(封神)! 신(神)을 가둔다는 뜻이다. 인간이되,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자들이 신을 가두었다는 것이 봉신이라고 들었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라 전설로 전해지고 그 초인(超人)들의 후예는 아마도 네가 말한 천하십왕 중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다 그 초인들의 후예인지도 모르지."
'신을 가두었다?'
한효월이 내심 중얼거렸다.
이해하기 힘든 소리였다. 너무 막연했다.
"신을 가두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나도 그 말밖에는 알지 못한다. 본 교의 교주라면 상세한 것을 알 테지. 하지만……."
그는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완강한 빛. 더 이상은 알아도 말할 수 없고, 아는 것도 없다는 표정이다.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하던 한효월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더. 명옥대법을 해제할 수 있습니까?"
"명옥대법?"
괴노인의 눈에서 횃불과 같은 신광이 쏟아져 나왔다.
"무슨 소리냐? 설마 누가 명옥대법에……."
"그렇습니다. 말씀드렸던 제 사질녀가 현재 명옥대법으로 인하여 명옥마녀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가능합니까?"
"크으음…… 명옥대법이 나타났단 말이지?"
괴노인은 신음을 흘렸다.
뭐라고 형용키 어렵도록 그의 안색은 복잡하게 엉킨다. 그가 이처럼 격동하는 것은 한효월로서도 본 적이 없었다.
"그걸, 그걸 누가 시전했는지 아느냐?"
"아직 모릅니다."
"알아오너라."
괴노인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알아온다면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겠다."
말하는 괴노인의 얼굴에는 격동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태도였다.
"대법을 시전하려면 마교에서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합니까?"
한효월의 물음에 생각에 잠겨 있던 괴노인이 입을 연 것은 잠시 후였다.
"수뇌부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최소한 본전(本殿)의 고수라야 가능하지, 그것도 장로(長老) 이상이라야……."
"그들이라면 대법을 해체할 수도 있습니까?"
"당년의 교주와 사제(司祭) 등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아마 내가 아니라면 불가능하겠지."
"제게 가르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마교의 비전(秘傳)은 외인에게 알려줄 수 없음이 법. 불가하다!"
"하지만 명옥대법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시전자를 찾아낼 수 없을 겁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테니까요."
"으음……."
문득 괴노인이 신음을 흘린다.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한효월을 노려보던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교활한 놈. 대법에 걸린 자가 지금 어떤 단계냐?"
"전신이 투명하게 변하고 있는 상태이고, 손은 이미 명옥(明玉)과 같이 투명하고 혼수상태에 자주 빠져 친인도 몰라볼 때가 있습니다."
"이미 5단에 들어가 있는 상태로군……. 곧 6단공으로 들어가 명옥마녀가 될 것이다. 6단공에 이르면 마기(魔氣)를 스스로 흡취하는 상태에 이르러 하룻밤에 천 리를 부유(浮遊)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며, 도검으로도 상해할 수 없는 마력(魔力)을 지니게 된다. 당대에 그런 천부(天賦)를 지닌 계집애가 있었다니……."
"그때부터 피를 그리워하게 됩니까?"
"아는 것도 많군. 맞다. 5단공에서부터 피를 봐야 하고 피를 마시면서 6단공을 넘어 마지막으로 명옥마녀가 되지. 마교 역사상 명옥마녀는 단 두 번 탄생했다. 만약 이번 일이 성사된다면 사상 세 번째가 되겠지……."
괴노인의 눈빛이 괴이하게 일렁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까마득한 오랜 옛날로부터 전해져 오는 전설(傳說).
세 번째 명옥마녀가 탄생하는 날, 마왕(魔王)이 일어서리라.
마(魔)의 힘이 천지를 덮으며 마교의 전설이 천하를 누르리라.
어둠의 추종자들이 암흑(暗黑)을 벗어나 세상을 흑암으로 뒤덮으리라…….
괴노인은 마교에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호법장로였다.
호법(護法)이라 함은 법을 지킨다는 의미다. 단순한 장로가 아니라 마교의 법을 관장하고 그 법을 수호하는 교중의 어른이라는 뜻이다. 마교의 대소사를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아마도 당대에는 찾기 어려울 터이다.
그는 전설을 한효월에게 일러주지 않았다.
대신 명옥대법을 깰 수 있는 방법을 한효월에게 전수했을 뿐이다.
괴노인은 수백 년을 산 사람이었다.
한창 때 그는 마중의 마. 말 그대로 마중지마(魔中之魔)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마를 초월한 존재였다. 그처럼 치솟던 극렬한 마기를 수백 년의 수도로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그였다.
천리(天理)대로라면 그는 그 사실을 한효월에게 알려주어야 했다.
명옥마녀의 탄생이 단순한 마공대법의 완성이 아니라, 가공할 의미를 담고 있음을…….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부동명왕공(不動明王功)을 한효월에게 전수했을 따름이다.
이 공력은 마공이 아니라, 불가의 전승척사지공(傳承斥邪之功)이다. 마기를 제압하고 심지(心志)를 굳건히 하는 데에는 이보다 더 뛰어난 공력은 없다. 오죽하면 그 명칭을 마귀를 항복받는 부동명왕의 이름으로 하였을까.
그렇게 해서 그는 하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한효월이 명옥마녀의 탄생을 저지한다면 그것이 하늘의 뜻일 것이요,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그 또한 천기(天機)일지니 천기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으려 듦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또 다른 생각 하나가 있음을 그는 부인하지 못했다.
마교의 중흥(重興)!
다시금 그 위대한 마교의 힘이 나래를 펴는 것을 보고 싶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