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首 남해용왕(南海龍王)
-고수를 만나다.
절세고수의 회동에는 거대한 비밀이 숨 쉬다.
황하는 중원의 젖줄과도 같다.
황하의 역사는 곧 중국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 멀리 청해(靑海)에서 시작한 황하는 사천을 스쳐 감숙(甘肅)을 거친 다음에 다시금 청해로 들어간다. 내몽고에서 다시 산서(山西) 남부를 통과, 황토고원(黃土高原)을 지나 산동성의 발해만(渤海灣)으로 흘러 들어가는 이 황하는 사시사철 싯누런 황톳물이 넘실거린다.
황토 고원에서 씻겨 내려오는 이 황톳물은 물 1말에 진흙이 6되라고 하는 지독한 흙탕물이다. 그런 까닭에 식수가 부족하여 물을 끓여 먹어야 했고, 그로 인해 다도(茶道)가 발달한 것은 또 하나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었다.
해가 중천으로 떠오를 무렵, 한효월은 황하 변에 도달해 있었다.
혹시라도 있을 제천교의 준동을 피해서 길이 없는 곳으로 질러왔다. 그 덕분인지 활염라 조과를 만난 것 외에는 여기까지 도달할 때까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다.
바로 강을 건너고자 했던 한효월은 나룻배를 발견하지 못해 잠시 갈대 숲에 의지하여 몸을 쉬게 되었다.
지금 그의 무공이라면 등평도수(登萍渡水)나 일위도강(一葦渡江)류의 경공을 전개하여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낮에 그런 경공을 전개하여 시선을 끌게 된다면 기껏 숨겨온 그의 종적을 노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터이니 전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몸의 이상 징후 때문이었다.
아침에 화산을 떠나오면서 잠시 운기조식으로 피로를 풀었음에도 황하에 도달하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가 갈대 숲에 몸을 숨기고서 얼마가 지나지 않아 과연 기혈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이렇듯 기혈이 엉기기 시작하면 잠시간 손을 쓸 수가 없게 된다.
말 그대로 반항할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성아를 데리고 올 것을 그랬던가…….'
눈을 감은 채로 한효월은 입술을 물었다.
발작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이런 발작은 앞으로 최소 3개월, 아니라면 6개월은 있어야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오다니…….
설마, 설마…….
한효월은 굳이 결론을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은 시간이 남았으리라 믿고 싶었기에.
이대로 모든 것을 끝내기에는 너무 허무한 일이기에.
쏴! 쏴아아…….
황하의 물살은 세차게 흘러간다.
마치 강물이 아니라 대해의 파도가 치듯 그렇듯 우렁찬 소리를 사방으로 토해내면서 누런 물결을 너울거리며…….
반 시진가량이 그렇게 물결에 밀려 흘러갔다.
그 출렁이는 물결을 흔들며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이제야 오시다니, 수룡신(水龍神) 곽 모(郭某)가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되었소이다!"
황하의 물을 출렁이게 할 우렁찬 웃음소리.
그 소리는 아주 가까운 것이 아님에도 고막을 울릴 만큼 굉량했다.
한효월은 갈대 숲 사이로 시선을 옮겨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묘하게 생긴 배 한 척이 황하 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떠 있었다.
뱃머리가 훌쩍 솟구쳐 나와 용의 형상을 했다. 크기도 작지 않아 용골(龍骨)의 길이만도 10장이 넘어 보였다. 그런 대선임에도 몸체가 다른 배에 비해서 좁다. 속도가 빠를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선수(船首)에 폭이 좁은 남색 단삼을 입은 대한 하나가 우뚝 서 홍소(哄笑)를 터뜨리고 있음이 보인다. 흰 수염이 날리는 것으로 보아 나이가 5, 60은 족히 되어 보이지만 구릿빛 피부에 떡 벌어진 몸체는 쇠로 빚은 동신나한(銅身羅漢)을 보는 것 같다.
그의 옆으로는 웃통을 벗은 대한들 십여 명이 도열하듯 늘어서 있고, 제각기 장창을 짚고서 허리에는 분수아미자를 차고 있어 위세가 삼엄하다.
아마도 저 남색 단삼의 흰 수염 노인이 수룡신이라 자칭했으리라.
"용왕(龍王)은 어디 있나?"
반대쪽에서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하하…… 용왕께서는 잠시 일이 생기는 바람에 이 곽 모가 대신 영접을 하게 되었소이다. 그 점 오해없으시길……."
수룡신이 다시 껄껄 웃었다.
그는 공력을 과시하기 위함인지 그 웃음소리에 내력을 실어 황하의 파도가 출렁거렸다.
그런데.
'저 사람은……!'
수룡신이 바라보는 곳, 방금 맑은 음성이 들려온 곳을 보던 한효월의 눈에 놀람의 빛이 일었다.
백의를 입은 40대 중년인.
그 사람이야말로 신안금조 조건이 죽을 때 그 자리에 나타났던, 고려검왕이라던 바로 그 백의인이었던 것이다.
'저 사람이 어떻게?'
수룡신의 말에 백의인, 고려검왕은 미간을 찡그렸다.
"수룡신이 황하 유역을 주름잡고 있다는 소리는 일찍이 들었지. 하지만 그가 남해용왕을 대신할 수 있다는 소리는 내 아직 들은 바 없었는데……. 하하…… 그사이에 남해용왕은 이 김 모(金某)가 눈에 차지 않게 된 모양이군."
그가 냉소를 흘리자 수룡신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그런 뜻이 아니기에 본인이 직접 마중을 나온 것이 아니겠소? 검왕께선 본인의 체면을 봐서……."
"하하하…… 언제부터 수룡신 따위가 내 앞에서 체면 운운하게 되었더란 말인가?"
고려검왕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가 황하 변에 낭랑히 울려 퍼졌다.
그러한 태도는 방약무인함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가 그에게서 나타나자 괴이하게도 그것은 오히려 당당해 보였다. 건방지다기보다는 그에게는 그런 태도가 더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하였다.
하나 수룡신의 얼굴은 그 말에 일그러졌다.
그의 굳어진 눈매에서 날카로운 빛이 쏟아져 나왔다.
"아무리 귀하가 고려검왕이라 할지라도 이곳은 중원 땅. 예의를 갖추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참지 못하고 그가 호통을 쳤다.
하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다.
흥!
냉랭한 코웃음소리.
동시에 고려검왕은 서 있는 모습 그대로 손을 뻗어 수룡신을 가리켰다.
"감히 반딧불이 명월과 밝음을 다투려 하는가!"
일성 꾸짖음.
그와 함께 그의 손에서 가공할 섬광(閃光)이 빛을 뿌리며 날아간다.
"어검술(馭劒術)!"
그것을 보자 수룡신의 입에서 경악지성이 튀어나왔다.
고려검왕과 그가 있는 배와의 거리는 줄잡아 20장이 넘는다.
그가 일부러 배를 뭍으로 바짝 대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에는 다시 갈대 숲이 있어 그는 자연히 고려검왕과 사이를 둔 채로 내려다볼 수가 있었다. 내심 많은 준비를 한 다음인 것이다.
그러나 고려검왕이 출수(出手)하자 그 모든 것이 만사휴의(萬事休矣).
가공할 섬광이 천지를 가르며 날아들자 그 거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섬광은 찰나간에 20장을 가로질러 그의 눈앞에 도달했기에.
"으악!"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거세무쌍(擧世無雙)한 그 검광에 수룡신이 바람처럼 뒤로 물러나자 미처 물러나지 못했던 그의 옆에 있던 수하 둘에게서 참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놀라 부지중에 손에 들었던 창을 치켜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날아든 섬광은 그들의 창과 목을 한꺼번에 날려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가공할 기세가 서릿발처럼 무서운 검기를 뿌려내면서 수룡신의 앞에서 윙윙 맴돌았다.
천지가 온통 검광으로 가득 차는 듯했다.
"으으……."
수룡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눈앞에서 소용돌이치는 가공할 검기에 눌려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려검왕의 음성이 전해진다.
"오늘 밤 삼경까지 이랑묘(二郞廟)에서 기다리기로 하지. 직접 와서 이야기하도록 용왕에게 가 전하라."
말과 함께 그는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섬광은 기다렸다는 듯이 번쩍 하는 순간에 그의 허리춤으로 되돌아갔다.
검도 최강(劒道最强)!
사람들은 어검술을 일러 그렇게 이야기한다.
검을 느끼고, 검기(劒氣)를 불러일으키며 검과 내가 하나가 되는[身劒合一] 그 어려운 과정을 거쳐 마침내 검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된다. 검이 심령(心靈)과 연결되면 마침내 검을 쳐내어 적을 공격할 수가 있게 되니 그를 일러 어검술이라 한다.
이 어검에는 두 가지의 갈래가 있다.
하나가 바로 검을 말[馬] 부리듯 검을 내쏘아 조종하는 것이니 그 말대로 어검(馭劒)이라 하며, 다른 하나는 검과 내가 하나가 되어 검이 있는 곳에 내가 있어 검과 같이 날아가니 어검(御劒)이 바로 그것이다.
세간의 전설에는 검선(劒仙)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검광(劒光)을 타고 날아 순식간에 백 장, 아니, 백 리가 아니라 천 리 밖으로 날아가는 사람의 경지를 벗어난 검술의 소유자. 그런 존재를 일러 검선이라 한다 하였다.
그 검선이 사용한다는 것이 바로 후자의 어검술(御劒術)인 것이다.
한효월도 어검(馭劒)을 한다.
그의 나이에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무림 사상 찾아보기 그리 쉽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저렇듯 놀라운 위력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자연 그 광경을 보는 한효월의 눈에는 경악의 빛이 떠오를 수밖에.
검을 손으로 부리는 경지를 지나 마음으로 부리는 심도어검(心道馭劒)의 경지. 그것은 얼핏 보기에는 비슷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차원이 다른 경지인 것이었다. 손으로 검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동(動)하자 검이 저절로 검집을 벗어나 날아갔다가 돌아오니 어찌 놀라지 않으랴.
게다가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또 있다.
남해용왕(南海龍王)!
천하십왕 중 하나인 그의 존재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이다.
'남해용왕이 여기에 나타난 것이란 말인가?'
한효월은 나타날 때와는 달리, 꽁지를 말고 사라져 가는 수룡신이 탄 배를 바라보면서 내심 침음했다.
듣건대 남해용왕은 남해에서 신과 같은 존재라 하였다.
그리고 평생 남해를 떠난 적이 없다 하였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남해를 떠나 이곳까지 와 있다는 것인가?
대체 무엇 때문에?
파라라락…….
세찬 바람이 분다.
황하가 출렁이고 갈대가 휘영청, 전신을 흔들어댄다.
"건방진 자들……."
나직한 중얼거림이 들리는 가운데, 고려검왕의 모습은 이미 그 자리에서 보이지 않았다.
한효월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력했던 전신에 천천히 힘이 돌고 있었다.
앉아 있던 널찍한 바위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주먹을 줬다 폈다 하는 그의 조용한 몸짓에서는 그런 어둠이 짙게 느껴졌다. 제아무리 죽음을 각오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할지라도,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어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의 수양이 제아무리 깊다 할지라도 한창 활발하게 다가올 인생을 설계해야 할 그 젊은 나이에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면…….
"후우우……."
한효월은 다시금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으려는 것이다.
책을 읽고 자연을 벗삼으며 마음을 다스렸었다.
다가오는 죽음을 고요히, 흔들림없이 맞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감천형이 사부인 경월선인을 찾아오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렇게 애써 외면했던 속진(俗塵)에 굳이 스스로를 담았다. 남은 생의 의미를 사람들을 위해서 두자고 스스로를 다잡았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고요했던 그 마음이 조급해지고 어딘가 모르게 세속에 물드는 듯하다.
쓴웃음이 그의 얼굴을 스쳐 간다.
"부질없는 짓……."
의미 모를 말을 그가 중얼거린다.
문득 그의 얼굴에 갈등이 인다.
이랑묘라는 것은 찾자고 마음만 먹는다면 찾을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렇게 우물거리고 있을 만큼 그의 행보는 한가로운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이 자리를 떠나기 어렵도록 고려검왕과 남해용왕이란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컸다. 어쩌면 이 혼란스러운 정국에 관한 열쇠를, 단서를 그곳에서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 그 떨거지들의 중독을 해소시켜 주라고…… 어디가 이쁜지 모르겠다만 널 도와주라고 나를 보냈다."
활염라 조과가 못마땅한 듯 툴툴 내뱉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는 자신이 중독을 해소시킬 수 있으리라고 장담했었다. 그까짓 장독이 무에 그리 대수냐고 하면서.
'그 노인이 갔으니 최소한 시간은 벌 수 있을 테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효월은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를 떠났다.
* * *
이랑(二郞)은 용을 죽인 자로 일컬어진다.
7세기 경 사천(四川)에서 현령을 지낸 조경(趙景)이란 사람이 그다. 주변의 강에 소[牛] 모양을 한 용이 살면서 홍수를 일으켜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러자 그는 용과 물속에서 일전을 벌여 그 용을 죽였다 한다. 그리고는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내놓고 사라졌다. 이후, 강이 범람하거나 폭풍우가 치는 날이면 그가 백마를 타고서 물 위를 질주하는 모습이 보였고, 효천신견(哮天神犬)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계(天界)의 매처럼 생긴 개를 데리고 가는 것이 보인다고 하였다.
이랑묘(二郞廟)는 바로 그를 모시는 사당이다.
그런 그가 개의 신으로 모셔진 것이 묘한 일이지만, 그가 마을을 돌보는 신의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이랑묘는 그곳에서 십여 리 떨어진 마을 어귀에 있었다.
전형적인 강촌(江村). 4, 50여 호가 모여 사는 그 마을 뒤편에 세워진 이랑묘는 세워진 지 제법 오래된 것 같았다. 하지만 강물을 누르고 마을을 지키는 개[犬]의 신답게 아직도 마을에서 돌보고 있는 듯했다.
한효월은 나룻배 하나를 맞춰놓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덕분에 길게 쉴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
이 마을의 이랑묘에는 뱃사공의 신이라는 천비낭랑(天妃娘娘)이 같이 모셔져 있어 묘한 일이지만, 물어본 결과 근 백여 리 내에는 다른 이랑묘가 없으니 기다려 볼밖에.
이랑묘는 별로 크지 않았다.
그 말은 한효월이 그 속에 들어가 숨을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이경 무렵, 한효월은 황하를 등진 이랑묘의 뒤편에 숨었다.
비스듬한 언덕배기를 덮은 잡목림이 마을로 곧장 부는 바람을 막아주고 있는데, 이랑묘는 바로 그 숲을 등지고 자리한다.
어둠이 짙어지자 은은히 물결치는 소리만이 들릴 뿐, 사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한효월은 나무 사이에 숨은 채로 조용히 자신을 다스렸다.
조식(調息)을 하게 되면 숨이 가늘어진다. 그리고 힘을 비축하게 될 뿐더러, 감각이 예민해져서 주변의 상황을 좀 더 잘 살필 수가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둠 속에서 흰빛이 움직이더니 바람처럼 이랑묘의 앞으로 도달했다.
고려검왕이었다.
그는 오늘도 혼자인 듯했다.
이랑묘에 도착한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서슴치 않고 이랑묘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곤 눈을 감더니 그만이다.
그저 고요히 눈을 감은 채로 정신을 가다듬는 듯하다.
'역시 남해용왕이란 간단한 상대는 아니겠지…….'
한효월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식(內息)을 깊이 한다.
바로 그때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오더니 십여 명의 대한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고려검왕과는 달리 마을 쪽이 아니라 강물 쪽에서 숲을 가로질러와 이랑묘에 도달했다. 이랑묘를 향해 달려오는 그들의 숫자는 금세 이십여 명으로 불었다. 주변을 수색하며 달려오는 그들의 움직임은 신속하기 이를 데 없다.
한효월이 그러한 상황을 짐작하고 장소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낭패를 당했을 수도 있을 움직임이었다.
어느덧 밤은 깊어 삼경.
은은히 개가 짖는 소리가 마을 쪽에서 들린다.
그리고 황하의 물살 치는 소리가 고요를 깨뜨릴 뿐…….
나타난 자들은 모두 푸른빛 경장을 했다. 그들 중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잠시 이랑묘 안을 살펴보았을 뿐, 누구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사방으로 흩어져서 주위를 경계하였다.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더 많아졌다.
숫자는 불어났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조용하기 이를 데 없어서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문득 그들 사이에 긴장이 흘렀다.
그와 동시에 숲 속에서 금삼(錦衫)의 청년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사각진 얼굴에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20대 후반 정도의 청년. 그는 정교하게 용이 수놓여진 금삼을 입고 섭선 한 자루를 쥔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용왕(少龍王)을 뵙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용왕께서 오신다. 모두 주위를 경계하라."
금삼청년의 말에 일대에 깔렸던 청의인들은 찰나간에 썰물이 빠지듯이 숲 속으로 사라졌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청의인들이 사라지자 금삼청년은 주위를 쓸어보곤 이랑묘를 향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남해(南海)의 부해교(浮海鮫)가 선배를 뵙고자 합니다."
…….
답이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반쯤 열린 문을 통해 단정히 앉은 채로 눈을 감은 고려검왕의 모습이 보이니 사람이 없는 것일 리야 없다.
"선배님……."
금삼청년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나직한 꾸짖음이 전해진다.
"내가 만나고자 한 사람은 네 할아버지다. 더 이상 번거로운 절차는 생략하도록 가서 전해라."
그 말이 채 끝나지 않아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만나지 못한 지가 벌써 수십 년이건만 그 성미는 여전하군."
동시에 숲이 움직이며 수룡신이 십여 명의 수하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좌우로 갈라섰고, 그 뒤를 따라 숲 속 어둠 속에서 교자(轎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 사람의 웃통을 벗은 장한이 멘 그 교자 위에는 두 마리의 금룡(金龍)이 정교하게 수놓인 금포(錦袍)를 입은 긴 수염의 노인이 앉아 있다. 머리에는 은은한 금광이 번뜩이는 구량관(九樑冠)을 썼으며, 마른 체격이지만 눈빛은 날카롭기 이를 데 없어 사람을 압도하는 기풍이 있었다.
나이가 든 것은 분명하나 얼굴은 주톳빛이고 수염 또한 검어 생김만으로는 사오십 대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할아버님!"
금포노인이 나타나자 금삼의 청년이 그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김 형이 이 아이를 본 적이 없을 듯하여 데려왔소. 우리가 마지막 만난 다음 십여 년이 흐른 후에 비로소 얻은 내 손주라서 말이오. 하하하…… 김 형이 잘 돌봐주신다면 이 아이에겐 장차 큰 힘이 될 것이오."
순간, 이랑묘 안에 앉아 있던 고려검왕이 눈을 떴다.
어둠 속이지만 횃불과 같이 형형한 안광이 어둠을 뚫고 직사되어 나왔다. 그의 내공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는 대목이다.
그는 금포노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라를 잃은 유민(流民)이 무슨 힘이 될 수 있겠소?"
그 말에 멈칫하던 금포노인은 문득 껄껄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별로 크지 않은 듯했지만 실제로는 굉량(宏量)하기 이를 데 없어서 고막을 울릴 뿐 아니라 그 진동은 주변 전체가 떨려 한효월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공이 깊어 이미 안으로 갈무리되어 나타나지 않고,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에 이르렀군…….'
그를 지켜본 한효월은 내심 머리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그가 만나본 천하십왕은 모두가 명불허전이었다.
누구도 천하십왕의 반열(班列)에 오르기에 부끄러운 사람은 없었다. 이 금포노인이 남해용왕이라면 그 또한 그렇게 불리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진 듯 보였다.
웃음을 그친 금포노인은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로 말했다.
"김 형이 힘없는 유민이라? 겸손도 지나치면 듣기 거북하지. 김 형이 마음만 먹는다면 당대 조선의 우두머리라는 자의 목을 따기는 여반장이 아니겠소? 만약 그것이 귀찮다면 본왕이 대신해 드릴 수도 있소만."
"교만함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군……."
고려검왕이 나직이 말했다.
"교만이라? 핫하하…… 그……."
금포노인이 입을 열려는 순간 고려검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그런 짓을 하려 한다면 부 형(浮兄)은 남해용왕이란 자리를 보전하지 못하게 될런지도 모르지."
그 말에 금포노인, 남해용왕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호오…… 그렇다면 변방소국에 그렇듯 힘이 있다는 뜻이오?"
비꼬듯 말한 그는 이내 머리를 저었다.
"그런 힘이 있는 나라가 그런 소국으로 남아 있다는 것인가? 오랑캐는 오랑캐일 뿐…… 그들이 무슨 힘으로 본왕과 상대할 수가 있겠소? 오늘이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그런 나라 하나쯤은……."
순간, 나직한 웃음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이제서야 연 소저(淵小姐)가 귀하를 저버리고 출가(出家)를 한 까닭을 알겠소. 그러니 그녀가 당신의 구애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겠지."
그 말에 남해용왕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건 무슨 뜻이오?"
남해용왕은 무서운 빛이 쏟아지는 눈빛으로 이랑묘 안의 고려검왕을 노려보았다.
…….
문득 기이한 정적이 일대를 누른다.
쏴! 쏴아아…….
물결 소리가 그 정적을 깨뜨릴 뿐 이랑묘 일대는 숨막히는 정적에 잠겼다.
"말해 보라! 김호민(金護民)!"
남해용왕이 교자의 손잡이를 두드렸다.
간단한 손짓임에도 그 교자를 메고 있던 네 명의 거한들이 고통스러운 빛으로 전신을 떨었다. 전신의 근육이 마치 파도가 치듯 꿈틀거림은 그들이 얼마나 힘을 쓰고 있는지를 말한다.
풀풀, 그들의 발 밑에서 흙먼지가 인다.
그런 그를 보고 있던 고려검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이 나라를, 이 중원천하를 지배하지 않고 그 변방의 오랑캐들이 사는 남해바다에서 숨죽이고 있소?"
"말을 조심하라! 오랑캐들이 사는 곳이라니!"
남해용왕이 노호했다.
고려검왕이 낭랑히 웃었다.
"당신은 조선을 일러 오랑캐라고 했소. 그런데 남해를 일러 오랑캐라고 하지 못한단 말이오? 설마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계통이 누구의 후예인지조차 모른다는 말을 할 생각이오?"
남해용왕의 안색이 조금 일그러졌다.
"동이(東夷)가 천손(天孫)임은 이미 오래전의 일! 그 일은 세상의 흐름에 이미 묻혀졌소. 천하의 형세가 그 일을 말하고 있지 않소?"
고려검왕은 정색을 한다.
"오래전의 일이라……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는 거요? 중원을 차지하고 스스로 중화(中華)라 그처럼 자존자대(自尊自大)하다가 몽고에 천하를 내어준 지가 언제라고…… 당신이 남해에서 왕 노릇 한다고 하여 세상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지. 해가 뜨는 동쪽에는 여전히 신성(神聖)이 남아 있소. 그렇지 않다면 나와 같은 자가 홀로 떠돌 리가 있겠소?"
나와 같은 자가 홀로 떠돌 리가 있겠소?
그 말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된다.
남해용왕이 그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할 바보라면 천하십왕이란 우뚝한 자리에 설 수가 없었을 터이다.
그가 입을 다물고 있음을 보자 고려검왕은 다시 말했다.
"진인(眞人)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였소. 모습을 드러낸 자는 이미 진인이 아니라 하였지. 하하…… 당신은 우리가 천하제일이라는 자리를 놓고 다툴 수 있다고 생각하오?"
남해용왕은 아주 간단하게 말을 받았다.
"못할 것도 없지!"
"호승심은 여전하군……."
가만히 남해용왕을 바라보던 고려검왕은 미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는 정색을 했다.
"사람들을 물리시오."
"여기 있는 자들은 모두 나의 손과 발이나 마찬가지요. 무슨 말이라도……."
그의 말은 채 끝나지 못했다.
"봉신(封神)의 서(誓)를 알게 되어도 말이오?"
그 말에 남해용왕의 안색이 돌변했다.
"봉…… 무슨 소리요? 그럼, 당신이 중원으로 나온 것이……."
"그냥 이야기하길 바라오?"
고려검왕의 말에 남해용왕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움찔했다.
순간, 그의 신형은 소리도 없이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 이미 이랑묘 안의 고려검왕 앞에 앉아 있었다. 세상이 놀라고도 남을 경공신법이었다.
"교아(鮫兒), 너는 수하들을 데리고 행선(行船)으로 돌아가 있도록 해라."
"할아버님!"
"염려할 것 없다. 당금 천하에 누가 우리 두 사람을 한꺼번에 해할 자가 있단 말이냐? 쓸데없이 접근하는 자가 없는지 감시만 하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남해용왕의 어조가 단호한 것을 보자 소용왕 부해교는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남해용왕은 평소에 늦게 얻은 손자인 그를 끔찍이 사랑했다.
어릴 때부터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모두 다 들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듯 단호한 어조로 말을 한다면 그 말은 거역할 수가 없는 것임을 소용왕 부해교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궁금해도, 못마땅하더라도 감히 드러낼 수가 없는 일이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던 고려검왕이 말했다.
"당년의 당신을 그대로 빼닮았소."
굳어 있던 남해용왕의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저놈 하나를 얻기 위해 여자 일곱이 필요했소. 그 바람에 본왕은 팔자에 없이 손녀가 여덟이나 되오. 사내라곤 저놈 하나뿐이지. 본 가는 유난히 손이 귀하여……."
"아들은?"
"그놈은 남해를 지키고 있지. 모두 다 비울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교아는 이번에 세상 구경을 시켜줄 겸 해서 데리고 나왔소."
"부 형이 이번에 남해를 떠나온 이유는 어디 있소?"
고려검왕의 말에 남해용왕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것을 묻는 의도가 뭐요?"
"평범한 일이라면 당신이 굳이 남해를 떠나 이곳까지 직접 올 리가 없지 않겠소? 더구나 그 일이 봉신방(封神榜)과 관련이 있다면……."
고려검왕의 말에 남해용왕의 안색이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쏴아! 쏴아아…….
철썩거리는 물소리가 귓전을 친다.
달빛조차 구름에 숨었다. 어둠은 짙어 물소리가 더욱 청승스럽다.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다시 입을 연 것은 남해용왕이다.
"봉신방의 존재를 아는 것은 당금 천하에서 오직 우리 천하십왕뿐일 것이오. 그 전설을 아는 것만으로도 죽을 사유가 되니까!"
냉소가 고려검왕의 얼굴에 떠오른다.
"교만한 짓이지……."
"교만? 자격이 없는 자가 어찌 감히 봉신방을 넘볼 수가 있단 말이오? 우리조차 그 비밀에서 밀려난 마당에……."
"더 이야기하겠소? 그렇게 되면 스스로 맹세를 깨뜨리는 것이 될 텐데?"
고려검왕의 말에 남해용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맹세는 선대(先代)의 것이오! 본왕은……."
"선대의 맹세이므로 그 맹세를 지키지 않겠다는 것이오? 봉신(封神)의 서(誓)를 지키지 않는 자가 그 비밀을 논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건……."
남해용왕은 일시지간 말을 잇지 못했다.
'대체 봉신의 서라는 것이 무엇일까?'
숨을 죽이고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한효월의 뇌리에는 의혹이 구름처럼 일고 있었다. 처음 사부가 남긴 서찰에서 봉신의 서라는 글을 접했을 때에도 뭔가 의미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그 의미가 커질 줄은 몰랐다.
어쩌면 당금 무림의 모든 사태는 거기에서 연유하고 있는지도…….
"말해 보시오, 부 형이 강호에 나온 것이 무엇 때문인지."
"그것을 본왕이 왜 김 형에게 말해야 하오?"
"부 형이 강호에 직접 나온 것이 제천교와 관련된 것이 맞다면, 그래서 나온 것이라면 알아야 할 일이기 때문이오."
"그건 또 무슨 뜻이오?"
남해용왕은 미간을 찡그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모르겠소? 제천교가 말하는 제천(齊天)! 하늘과 나란히 한다는 말의 뜻을?"
그 말에 남해용왕의 안색이 돌변했다.
부릅뜬 눈에서 신광이 폭출하고 수염이 절로 출렁인다. 그의 심중 격동을 말하듯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파(氣波)로 이랑묘가 무너질 듯 흔들거렸다.
"서, 설마……?!"
"나도 알 수 없소. 하지만 그 일로 나는 여기에 왔소. 그것이 과연 사실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럴 리가? 그럴 수가 있단 말이오? 누가 감히 서약(誓約)을 깨뜨리고 움직일 수가…… 세상의 권력, 그까짓 것이 항차 무엇이길래……."
남해용왕은 머리를 저었다.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
그러나 권력(權力)!
그까짓 것이 항차 무엇이길래…….
과연 권력을 두고 그렇게 말할 사람이 있을까?
천하의 주인이라는 황제의 힘도 그 권력에서 나온다.
바꾸어 말한다면 권력의 궁극에는 황제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체 봉신의 서약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그런 권력을 두고 그까짓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일까. 더더구나 남해용왕과 같은 사람이 그까짓 권력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면…….
"중원무왕 독고해가 왜 목숨을 걸고 제천교에 대항했는지 알고 있소?"
"그거야 그가 무림맹의 맹주였기 때문……!"
대꾸하던 남해용왕의 안색이 다시 달라졌다.
"그럼 그도 제천교가 봉신……."
남해용왕은 이내 머리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을 게요. 누가 있어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오? 누가 주체(主體)가 될 수가 있겠소? 기껏 세상을 휘어잡기 위해, 세상에 군림하기 위해서 약속을 깨뜨린단 말이오? 그럴려면 누가 그 오랜 세월을 기다렸겠소?"
"기다리고 싶어서 기다린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고려검왕의 말에 남해용왕도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당연한 일이지! 서약에 묶이고 봉신방이 전설로 화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어서 된 일이지, 누가 일부러 기다렸겠소?"
"나는 한 사람의 부탁을 받고 중원으로 왔소."
"……?"
"어쩌면 그는 부 형을 강호에 나오게 한 사람과 동일인일런지도 모르오."
"그게 무슨 소리요? 동일인이라니?"
"부 형의 재지(才智)라면 생각해 보면 짐작이 갈 수 있을 것이오. 내가 부 형을 보고자 한 것은."
고려검왕은 말을 끊고 잠시 남해용왕을 바라보았다.
"건곤무적 독고해가 제천교를 저지하려 했던 의미를 잘 생각해 보라는 말을 해주기 위해서였소."
말과 함께 그는 일어섰다.
"무슨 소리요? 기왕 말을 하려면 시원하게 해보시오!"
고려검왕은 이랑묘의 문 앞에서 남해용왕을 돌아보았다.
"어쩌면 그는 봉신의 서약이 깨지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일지도 모르오. 아니면 봉신방에 대한 단서를 발견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 말에 남해용왕의 얼굴에 격동의 빛이 일었다.
"그, 그런!"
"그 의미는 부 형도 잘 알 테니……."
말소리가 끝나기 전에 일진 바람이 일면서 고려검왕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김 형! 김 형……."
남해용왕이 발을 굴렀다.
그가 번개처럼 밖으로 뛰쳐나왔지만 고려검왕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봉신방에 대한 단서라니!"
잠시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던 남해용왕이 문득 중얼거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어떻게 그런 일이……."
말과 함께 그는 훌쩍 몸을 날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들의 움직임은 일반 무림인들과 달라 표홀(飄忽)하기 그지없다. 그야말로 오고 감이 자유롭기 그지없고 흔적이 남지 않았다.
그가 사라지자 이랑묘에는 이내 고요가 찾아들었다.
뒤이어 숲 여기저기에서 낮은 음향이 일었다.
매복하고 있던 자들이 떠나는 듯했다.
그리고 잠시 고즈넉한 달빛이 흐를 때, 그 자리에 한효월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묵묵히 그들이 떠난 쪽을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당장 급한 일이 없다면 저들의 뒤를 쫓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처리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도 이 상황을 보기 위하여 미루었던…….
그때 몸을 돌리던 그의 신형이 흠칫 굳어졌다.
한 사람이 뒤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각 진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
금삼의 그는 손에는 한 자루의 섭선을 들고서 폈다 접었다 하면서 한효월을 바라본다. 냉소를 눈에다 가득 담고서.
"어디선가 쥐새끼 냄새가 난다 싶었지……."
금삼청년, 소용왕 부해교는 천천히 다가오면서 말했다.
"무엇 하는 자이길래 감히 이 자리를 엿본 것인지 이실직고해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뜨거운 맛을 보게 될 것이다."
그의 움직임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다가오기 시작하자 강력한 예기가 그를 무찔러 오고 있었다.
숨이 막히는, 마치 칼끝을 곤두세워 놓은 듯한 기세였다. 손에 든 것이라고는 섭선 한 자루뿐이건만 그러한 기세를 쏟아낼 수 있는 것은 그가 과연 명가(名家)의 자제임을 말하는 듯하였다.
하나 한효월의 안색은 그저 고요할 뿐이다.
그리고 말.
"내가 이실직고한 다음에는 어찌할 생각이오?"
그의 반응이 뜻밖인지라 소용왕 부해교는 그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별 볼일 없는 백면서생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물처럼 고요한 기도를 가졌다. 얕보는 마음이 사라졌다. 하긴 평범한 자라면 절대고수 두 사람이 어찌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겠는가?
부해교는 그를 노려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그건 나의 마음. 네가 이실직고한 다음의 일이다."
담담한 웃음이 한효월의 얼굴에 번져 갔다.
"대답을 하는 것은 나의 마음이오. 그것이 어찌 귀하의 마음이겠소?"
"네가 감히 본 소용왕의 명에 토를 달 작정이냐?"
갑자기 부해교가 노호를 터뜨렸다.
동시에 그는 손을 휘둘러 수중의 섭선으로 한효월을 쳐왔다.
소용왕 부해교의 섭선은 한 자 하고도 일곱 치나 된다.
펼치면 반신을 가릴 크기다. 그 정도라면 이미 단순히 모양을 내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것일 리가 없다.
정교하기 짝이 없는 세공에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가 그려진 그 섭선의 겉면은 얼핏 금박을 입힌 듯 보인다. 하나 실제로는 천잠사(天蠶絲)에다 금정(金精)을 섞어 짠 것으로 도검으로도 흠집을 내기 힘든 것이었다. 섭선의 끝은 투명한 옥(玉)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호신강기까지 파괴할 수 있는 만년강모(萬年鋼母)가 붙어 있어서 날카롭기 그지없다.
그 섭선 하나의 가치는 족히 만금(萬金)을 넘을 터였다.
한효월은 자신을 향해 짓쳐들어오는 섭선의 끝이 달빛을 받아 날카롭게 반짝임을 보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성미가 급하군."
말과 함께 그는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간단한 한 걸음이지만, 호리의 차이가 천 리의 차이인 것처럼 그의 신형은 상대의 섭선 공세에서 벗어나 있었다.
"과연 한 수가 있군!"
부해교가 냉소를 터뜨렸다.
그 정도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는 찔러오던 섭선을 쫘악 펼쳐서 비스듬히 쓸어왔다.
사나운 기세가 역력하다.
움직임에는 절도가 있고 손을 씀에는 전혀 사정이 없다.
일단 발동하자 섭선의 움직임에는 살기와 경풍이 깃들어 섬광이 번쩍이는 듯하다. 고수의 풍모가 역력했다. 하긴 남해용왕이란 일세의 고수가 후계자로 키우는 하나뿐인 손자이니 어찌 그가 호락호락할 것인가!
한효월은 다시 옆으로 물러나면서 말했다.
"나는 고려검왕을 따라왔던 것이니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오."
"고려……?"
섭선을 쳐오던 부해교가 멈칫, 섭선을 멈추었다.
"그의 제자란 말이냐?"
"아니오."
"그럼?"
"그것을 굳이 당신에게 말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말과 함께 한효월은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상대가 방약무인(傍若無人)함을 느꼈기에 굳이 이 자리에서 그와 다투고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으핫하하…… 감히 네놈이 본 소왕(少王)을 능멸하려 하다니!"
소용왕 부해교는 한효월이 떠나려 함을 보자 노해 크게 웃었다.
동시에 그는 섭선을 폈다 접었다 하면서 한효월을 덮쳐 왔다.
원래 그가 한효월을 다짜고짜 공격했던 것은 그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한효월이 자신의 공세를 대단치 않게 피해 버림을 보자 실제로 노하여 호승심이 치민 것이다.
남해에서 남해용왕이란 존재는 가히 전설과도 같다.
그런 가문에서 자란 그였다. 거기에 천부(天賦)의 자질이 범속하지 않았으니 그 배움 또한 실제로 약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누가 감히 건드릴 수가 있었을 것인가.
사람을 눈 아래로 두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
그런데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한효월이 자신의 공세를 간단히 피하는 것을 보자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 태도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누군지 알면서도 그 따위 태도라니!
대노한 그는 본때를 보여주마 다짐하고는, 섭선을 쓸고 치는 사이에 가문의 벽해광도십이선(劈海狂濤十二扇)을 펼쳐 한효월을 핍박해 들어갔다. 선영(扇影)이 첩첩이 일자 먹구름이 몰려드는 듯하고 일어난 경풍(勁風)은 태풍이 몰아치는 듯했다.
가히 바다를 가르고 노한 파도가 천지를 삼킬 듯한 기세!
한효월의 미간이 굳어졌다.
그냥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발동하자 소용왕 부해교는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았다. 살기가 등등하여 다시 피한다면 자칫 피동에 몰려 허둥거리게 될런지도 몰랐다.
여기서 굳이 그와 이렇게 싸우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손속이 과하군!"
낭랑한 꾸짖음 한 소리.
한효월은 둥실 몸을 띄웠다.
종잇장처럼 가벼워진 몸은 상대의 막강한 경력을 타고 오히려 숲으로 날아올랐다.
그런 절고(絶高)한 경신공부를 보자 소용왕 부해교의 안색이 돌변했다.
"감히 도주하려는 것이냐!"
외침과 함께 그가 섭선을 빙글 돌리며 한효월을 향해 찔러냈다.
이미 4장이 넘는 거리.
섭선의 끝에서 섬광이 번쩍! 한효월에게로 직사해 갔다.
"암기(暗器)?"
부풍탄신(扶風彈身)이란 절세의 경신공부로서 섭선의 경풍에 몸을 실어 그 자리를 벗어나려던 한효월은 섬광이 날아오는 것을 보자 나직이 소리쳤다.
소매가 쫙 펼쳐졌다. 그의 신형이 허공에서 선풍을 일으키면서 맴도는가 싶은 순간에 아래로 뚝 떨어졌다.
"핫하하…… 네놈이 아무리 그래도 천풍과해(穿風過海)……!"
득의한 웃음을 터뜨리던 소용왕 부해교의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마치 살을 맞은 새처럼 뚝 떨어졌던 한효월이 천천히 신형을 바로 세우면서 그를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그의 형형한 눈빛을 보는 부해교의 눈은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효월이 손을 쳐들었다.
소매가 펼쳐지며 거기에 꽂힌 금빛 침들이 드러났다.
그의 소매에 꽂힌 금침의 생김은 매우 특이했다.
길이가 한 치가량인 금침 끝에는 좌우로 가시가 돋아 있다. 날아가는 데 균형을 유지하고 일단 사람의 몸속으로 파고들면 역린(逆鱗)이 되어 쉽게 뽑아낼 수 없는 형상이다.
"독(毒)까지……."
소매에서 시선을 들면서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명가(名家)에서 배운 게 겨우 이런 것인가?"
부해교를 보는 한효월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천풍과해자(穿風過海刺)!
그렇게 불리는 그 금빛침은 만보풍운선(萬寶風雲扇)이라 불리는 부해교의 섭선에서 기관 장치에 의해 발사된다. 속도는 질풍이고 속도가 빠른 만큼 바위라도 진흙처럼 파고든다. 사람이라면 맞는 순간에 반은 죽은 목숨이 된다. 천풍과해자의 위력 때문이기도 했고 거기 묻은 독이 그만큼 독한 까닭이다.
그런 천풍과해자를 겨우 소매를 펴서 받아낸 한효월의 무공에 소용왕 부해교는 내심 크게 놀랐다.
하지만 교오(驕傲)한 그의 기가 죽을 리 만무.
"과연 한 수 재간이 있긴 하군! 그렇다고 해서 감히 네가 본 소왕을 훈계하려 들다니…… 흐흐…… 눈에 뵈는 게 없는 놈이로구나!"
음침히 웃는 그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하지만 그는 채 말을 맺지 못하고 급하게 섭선을 펴들면서 옆으로 튀었다.
한효월이 소매를 휘두르자 거기 박혀 있던 천풍과해자가 가공할 기세로 되날아왔기 때문이다.
그 위력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팍! 파파파…….
요란한 소리가 들리면서 천풍과해자가 방금까지 그가 있던 자리를 지나 바로 뒤에 있는 아름드리 나무를 뚫고 들어갔다.
그처럼 급히 피했음에도 몇 개의 천풍과해자를 섭선으로 튕겨내야 했던 소용왕 부해교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분명히 몇 장의 거리를 두고 있던 한효월의 신형이 불쑥 자신의 눈앞에서 솟아남을 보았던 까닭이다.
"이형환위(移形換位)!"
경호성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이형환위라는 것은 신형을 움직여 위치를 바꾼다는 의미다.
그것이 상승의 신법으로 일컬어지는 이유는 보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미처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이동하는 것에서 연유한다. 말은 쉽지만 정말 경지에 이른 이형환위는 보기 힘들다.
그런데 이처럼 자연스러운 사용이라니!
천풍과해자를 피한 그는 자신의 앞으로 불쑥 닥쳐든 한효월에 놀라 황급히 만보풍운선을 쳐냈다.
"감히!"
팡!
일진 폭음.
"윽……."
소용왕 부해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거짓말처럼 불쑥 앞에 나타난 한효월. 그가 손을 뻗어냄을 보고 황급히 만보풍운선을 휘둘러 그를 막았다.
일컬어 풍운도도(風雲滔滔)!
만보풍운선을 휘저어 잠경(潛勁)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구명절초(求命絶招). 어떠한 공세라도 이 일격이라면 정면으로 받아내지 않고 옆으로 흘려 버릴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막강한 충격이라니!
소용왕 부해교는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쿵쿵 소리와 함께 그의 앞에 발자국이 뚜렷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한효월은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듯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가 싶은 순간에 물러나고 있는 그의 앞으로 다시금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금도 쉴 틈 없이 뻗어오고 있는 그의 손.
'이런 개 같은 일이……!'
나이도 자신보다 어린 놈에게 이렇듯, 강호에 나오자마자 밀릴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하필 뒤에는 거목 하나가 버티고 있다.
물러나기는커녕, 좌우 어디로도 피할 틈이 없었다. 어지간한 굵기의 나무라면 등으로 밀어내면서 물러날 수도 있었다. 하나 그럴 크기의 나무가 아니었다. 게다가 고수의 한순간은 바로 생사와 직결이다. 한효월의 저 신속무비한 일장에 그런 한가한 짓을 하다가는 죽음을 자초함에 다름이 아닐 터이다.
중심이 흐트러진 상태, 막아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순간, 소용왕 부해교의 신형이 바람처럼 옆으로 빙글 뒹굴었다.
땅바닥을 뒹굴긴 했지만 한효월의 일장은 허탕을 쳤다.
소용왕 부해교의 얼굴이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반격을 가할 여지가 생긴 것이다.
바람처럼 2장여를 뒹굴어 벌떡 일어나던 소용왕 부해교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한효월.
그는 회색 빛 옷자락을 강바람에 펄럭이면서 우뚝 서 있었다.
방금까지 그가 있던 그 자리에 조용히, 마침 구름 사이로 드러난 달빛을 받으며 조용히 서 부해교를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은 말 그대로 임풍옥수(臨風玉樹)에 다름이 아니었다.
한효월은 그저 위협을 했을 뿐인데 소용왕 부해교는 놀라 땅바닥을 뒹굴고 만 것이니, 그것을 깨달은 부해교의 얼굴이 일그러짐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한효월이 그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힘을 믿고 아무에게나 시비를 거는 것은 진정한 강자가 할 짓이 아니지. 거리의 부랑자라면 몰라도."
"이노옴…… 네놈이 감히 본 소왕에게 훈계를 할 참이냐!"
소용왕 부해교는 수치를 참지 못하고 노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 말을 내뱉는 순간에 그는 전력을 다해서 한효월을 덮쳐 갔다.
처음에 그를 공격했던 것은 한효월의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물론 노한 듯 보였던 것도 짐짓 그렇게 보인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대로라면 피를 토하고 드러누워도 치욕을 씻을 수 없다.
내가 누구인데 너 따위 무명지배에게 당할쏘냐!
소용왕 부해교는 전력을 다했다.
남해에서는 한 번도 좌절을 겪어보지 못한 그였다.
누구도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못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강호에 나와 처음 만난 상대가 그로서는 정말 재수없게도 한효월이었다.
그가 전력을 다해 덮쳐 감에도 한효월은 처음과 달리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곤 덮쳐 오는 그를 정면으로 마주쳐 갔다. 주먹을 쥔 듯 손을 편 듯 뭐라고 형용키 어려운 그의 장세는 일단 발동하자 거대한 경력이 천지를 덮을 듯 일어났다.
네까짓 것이 아무리 그래도 나보다 더 셀 것인가?
라는 생각으로 노한 김에 정면으로 덮쳐 갔던 소용왕 부해교는 심상치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
이 마당에 뒤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꽝!
폭음 일성.
"크악!"
참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틀비틀 허공에 뜬 듯 두어 걸음을 허우적거리며 물러나던 그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반 장가량이나 훌쩍 날아가 버린 것이다. 만약 그 뒤에 나무가 있어서 그를 받치지 않았다면 볼썽사납게 땅바닥에 나뒹구는 것을 면할 수 없었으리라.
우두둑! 세차게 나무에 등을 부딪고서야 신형을 추스른 그의 입에서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단 한 번의 부딪침에서 내상을 입고 만 것이다.
강약은 너무도 명백했다.
"진정한 강자는 스스로의 강함을 뽐내지 않지……."
한효월은 우뚝 선 채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푸른 그림자들이 바람처럼 장내로 날아들었다. 바로 남해용왕의 수하들. 소용왕 부해교가 돌아가지 않자 그를 찾아온 것이다.
"소왕 전하!"
우두머리가 놀라 소리쳤다.
"감히 이분이 뉘신지 알고…… 모두 놈을 쳐라!"
소용왕 부해교의 입가로 선혈이 흘러내림을 보고 놀란 청의인들의 우두머리가 대노하여 소리쳤다.
청의인들이 일제히 한효월에게로 달려들었다.
"멈춰!"
일그러진 음성이 그들을 잡아 묶었다.
소용왕 부해교였다.
그는 우두머리의 부축을 뿌리치고는 천천히 신형을 세웠다.
그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네 이름을 알고 싶다."
"……."
한효월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음.
"무엇 때문에?"
소용왕 부해교는 천천히 손을 들어 손등으로 피가 흘러내리는 입가를 훔쳤다. 그 눈은 한효월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이름을 알아야 후일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 설마, 두려워서 알려주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그의 충동질에 한효월의 얼굴에 미미한 웃음기가 스쳐 간다.
"복수를 하고 싶은가?"
"겁이 나나?"
그의 되받아침에 한효월의 미간에 살짝 그늘이 드리워졌다.
"우리에게 인연이 있다면 자연히 또 만나게 되겠지. 그까짓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하지만 아마도 귀하와 내가 다시 만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오."
한효월의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어차피 그의 생은 그리 오래 남지 않은 상태, 부해교가 설치(雪恥)하기 위해서 그를 찾아온다면 아마도 그때 그는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내용을 알 리가 없는 부해교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이름조차 알려주지 못하겠다는 겐가?"
"사자는 결코 썩은 고기는 먹지 않는 법. 귀하가 정말 강자가 되고 싶다면 아무에게나 힘을 뽐내는 허세를 버리는 게 좋을 것이오. 이름 따위야 부질없는 일이지……."
말과 함께 일진 질풍이 일며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새벽달 벽공(碧空)에 유유하니
그 노정(路程)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라.
아침 해 뜨면 스러지고 말 것을
새벽달이 어찌 밝음을 다툴 것인가.
한 수의 낭랑한 읊조림만이 메아리처럼 그곳에 남았다.
"건방진 노오옴……."
한효월이 사라지자 소용왕 부해교는 이를 갈았다. 격노로 인하여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남해를 떠나 중원으로 들어오면서 이런 상황은 생각조차 못했었다.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무명지배(無名之輩)에게 패배하여 이런 꼴이라니!
"뭣들 하느냐? 당장 놈을 쫓지 못하고!"
청의인들의 우두머리, 과성(過成)은 호통을 치는 일방 소용왕 부해교의 곁으로 와 그를 부축하려고 했다.
"괜찮으십니까? 제가 부축을……!"
그는 채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로 나가떨어져 버렸다.
소용왕 부해교가 그를 후려친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황급히 일어난 과성의 입과 코에서 선혈이 쏟아지고 있었다. 눈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무슨 죄를 지었나?"
소용왕 부해교가 냉랭히 물었다.
"그, 그건…… 하좌(下座)가 감히 옥체에 손을……."
뻑!
그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당장 가서 놈의 정체를 알아내. 놈이 누군지 알아내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소용왕 부해교가 음산하게 말끝을 흐렸다.
"존명(尊命)!"
그 음성에 깃든 의미를 모를 리 없는 과성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고는 그 자리를 떠나갔다. 소용왕 부해교는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청의인의 우두머리 하나쯤은 언제라도 기분 내키는 대로 처리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소용왕 부해교임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놈…… 반드시 이 빚은 갚아주고야 말겠다……."
수하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던 부해교는 다시금 이를 갈았다.
"새벽달이 어쩐다고? 개자식…… 너는 떠오르는 아침 해고 나는 지는 새벽달이란 말이냐? 찢어 죽일 놈 같으니……."
그때였다.
"무식하긴…… 그걸 어떻게 그렇게 해석하니?"
난데없이 들려온 음성이 부해교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어떤 놈이냐?"
"저 성미하곤, 누구긴 누구야? 나지."
음성과 함께 한 사람이 나타났다.
맑은 눈동자, 틀어 올린 머리. 타는 듯 붉은 홍의. 두 자루의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보검을 등에다 교차해 멨다. 부해교와 비슷해 보이는 나이지만 명백히 다른 점은 그녀가 여인이라는 것, 그리고 부해교와는 달리 그 눈에는 연신 생글거리는 웃음이 쉬질 않는다.
"넌?"
그녀를 본 부해교의 눈에 얼떨떨한 빛이 떠올랐다.
"어, 어떻게? 어떻게 여길 온 거야? 넌 남해에 있어야 하잖아?"
홍의여인을 발견한 부해교의 얼떨떨한 표정에 홍의여인은 교태롭게 깔깔 웃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는데 흰 이가 달빛에 선명하다.
한바탕 교소를 터뜨린 홍의여인은 옆머리를 쓸어 넘기며 눈을 흘긴다.
"이 누나가 어떻게 너 혼자 떠나보내고 마음이 놓이겠어? 그래서 널 보호하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계집애가 어딜 함부로 나와! 당장 돌아가지 못해? 할아버님이 아시면 그냥 두지 않으실 게다."
부해교가 눈썹을 곤두세우며 소리쳤다.
"넌 내가 돌봐주지 않음 아무것도 못해. 그 빌어먹을 성미는 밖에 나와서도 조금도 고쳐지지 않으니 그래 가지고 수하들이 널 어떻게 따를 거야? 그런데도 이 누나보고 집에 있으라고?"
홍의여인은 다시 웃었다.
반대로 부해교의 얼굴은 다시 일그러졌다.
"닥치지 못해! 이 망할 계집애. 네가 어째서 누나야!"
부해교와는 달리 그녀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눈에 서린 웃음기는 교태(嬌態)라 해도 모자랄 정도로 풍정(風情)이 넘친다.
"누나가 아니면? 일각이나 빨리 태어난 내가 누나가 아니면 네가 오빠니? 사내가 대범한 구석이 있어야지, 그렇게 옹졸하게 굴어서야…… 천세제일(千世第一) 남해부가(南海浮家)의 앞날이 걱정된다."
부해교는 어이가 없는 듯 그녀를 노려보았다.
운중연(雲中燕) 부해옥(浮海玉).
그와 그녀는 거의 같은 날 태어난 남매였다. 그렇다고 쌍둥이는 아니고 아버지는 같되, 어머니가 달랐다. 아들이 없는 집이었으니 딸을 낳은 어머니와 아들을 낳은 어머니의 희비가 엇갈렸음은 물론이다.
그들 둘은 같이 태어났으되, 한 배가 아니었던지라 누가 먼저라고 하기가 매우 애매했다. 세상에 태어나 고고의 성을 터뜨린 순간까지 거의 같아서 누가 먼저라고 아무도 단정 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해용왕은 증손자인 부해교의 손을 들어주어 그를 오빠로 인정했지만 부해교와는 달리 도무지 거침이 없는 성격인 부해옥은 그것을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부해교는 내뱉듯 중얼거리면서 신형을 돌렸다.
순간.
"호오? 그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의 발목을 잡아당기는 소리.
부해교가 흠칫, 그녀를 돌아보았다.
"놈이 누군지 안단 말이냐?"
"자신이 누군지 가면서 알려줬는데도 모르는 네가 바보지! 아직도 그걸 모르겠단 말이야? 쯧쯧…… 성질만 더러워 가지고…… 아무려면 널 한 방에 쓰러뜨릴 사람이 그렇게 많겠어?"
순간, 부해교의 눈에 빛이 일었다.
"새벽달(曉月)…… 그럼, 놈이 근자에 이름 높다는 그 한효월이란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