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首 명옥마녀(冥玉魔女)
-마성이 드러나다.
찾아든 인연(因緣)의 끈에 마음은 착잡하고.
"으으……."
식은땀이 절로 흘러내린다.
주춤, 뒤로 물러난다.
차가운 눈빛.
얼음처럼 차고 냉정한 눈빛이 그를 노려보고 있다.
얼음 조각처럼 투명한 손.
그 손이 천천히 그의 가슴을 향해 뻗어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도 피할 수가 없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와 같이, 보면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전신을 지배하는 것은 처절한 공포(恐怖)! 그 공포는 그의 정신을 묶고 발을 묶어버렸다. 아니, 전신을 묶어버려서 꼼짝도 할 수가 없어 그는 그저 저 아름다운 죽음의 손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멈춰라!"
호통과 함께 강력한 힘이 날아들었다.
펑!
가죽 북이 터지는 굉음.
일진 회오리바람이 일며 검은 옷자락이 휘날린다.
무심함을 담은 투명한 눈동자에 묘한 빛이 스친다. 그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에는 한 사람이 눈을 부릅뜬 채로 비틀거리고 있음이 보인다.
"경아…… 이게 무슨 짓이냐?"
그 사람은 좌백이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선 흑의여인은 바로 독고경이다.
독고경은 밤바람에 표표히 옷자락을 날리고 있었다.
얼굴은 옥을 깎은 듯 투명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투명한 빛을 뿜는 것만 같아 기괴하기까지 했다.
파라락…….
날아든 바람이 그녀의 치마를 휘감아 올린다.
땅을 딛은 맨발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녀는 누워 있던 방의 방문을 막 나선 상태였다.
문짝은 종잇장처럼 터져 나갔다.
그녀를 막아섰던 무림맹의 위사는 피를 토해낸 채로 널브러졌다. 가슴이 으스러져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감안한다면 그는 아마도 살아 있지 못할 터이다.
그 좌우로 꿈틀거리는 무사 두 사람.
그 앞에 거의 혼단백절(魂斷魄絶)한 모습으로 위사가 겁에 질려 주춤거린다. 그의 앞을 막으며 나타난 사람이 바로 좌백이었다. 그는 방금 독고경의 일장을 막아내면서 충격을 받고서 경악한 빛으로 자신의 앞에 선 독고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켜요."
그런 그를 보는 독고경의 얼굴에는 미동도 없다. 차가운 음성뿐.
"무슨 짓이야? 이 사람들은 너를 지켜주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비켜요."
간단한 말.
그것과 함께 독고경은 다시 옥장(玉掌)을 쳐들었다.
아무런 음향도 기운도 일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손을 쳐들자 좌백은 좀 전에 그 무사가 왜 그렇게 꼼짝도 하지 못하고 멍청히 바라보고만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그 투명한 손만 시야에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주위의 모든 사물이 그 투명한 손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아니, 시야에 그 손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았다.
"마공(魔功)!"
돌연 좌백이 놀라 부르짖었다.
동시에 그는 그녀의 장세를 향해 일장을 쳐냈다.
하지만 장세가 마주치는 순간에 좌백은 심상치 않음을 느껴야 했다.
그가 쳐낸 힘이 소리없이 흩어지면서 그녀의 옥장이 투명한 빛을 뿜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경아, 멈춰라……. 그는 네 사형이다! 경아!"
다급한 부르짖음이 들려왔다.
막 좌백의 가슴을 치려던 독고경의 손이 멈칫했다.
"으윽!"
그것만으로도 좌백은 비틀거리면서 뒤로 튕겨져 나가야 했다.
독고경이 무심한 눈길을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돌렸다.
감천형이었다.
그는 부서진 문틀을 부여잡은 채 독고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 차려, 경아. 여기 네 적은 없다. 함부로 손을 쓰면 안 돼. 경아…… 나를 모르겠느냐?"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감천형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혼수상태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건 단말마의 비명 소리 때문이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이 지경이다.
"……."
독고경은 무심히 그를 바라보았다.
둘의 거리는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같은 방에 있었던 두 사람이었고, 독고경은 이제 막 그 방을 벗어나려던 참이라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독고경의 투명한 입술이 열렸다.
"사형……."
"그래! 나다. 이제 정신이 드느냐?"
감천형이 반색을 한다.
하나, 그 순간 갑자기 독고경의 눈빛이 변했다.
그리고 그 눈에 떠오른 것은 투명하리만큼 서늘한 살기.
"경아!"
감천형이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독고경은 미간을 찡그릴 뿐, 천천히 손을 쳐들었다. 아름다운 손이 빛을 뿜는 것 같았다.
죽음의 너울이 독고경의 손을 타고서 너울너울 감천형을 덮어갔다.
"경아, 안 돼!"
좌백이 부르짖으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손을 뿌리치자 좌백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그는 이미 앞서의 부딪침에서 심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던 것이다. 원래부터 정상이 아닌 그였었다.
"대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독고경의 옥장을 보면서 감천형은 신음한다.
이제 누구도 그를 구할 수가 없었다.
독고경의 옥수가 그의 가슴을 짚으려는 순간이었다.
"경아!"
맑고 힘있는 음성이 주위의 참혹을 깨뜨렸다.
부르르…….
그 소리에 독고경의 옥수가 마치 거짓말처럼 감천형의 가슴 앞에서 멎었다. 거대한 힘이 그 손을 낚아챈 듯한 형상이었다.
"그는 네 사형이다. 그를 해칠 수는 없어. 그를 해쳐서는 안 된다."
맑은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독고경은 그 말소리에 홀린 듯 감천형의 얼굴을 훑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관옥 같은 얼굴. 별빛 같은 눈동자.
"사숙……."
그를 본 독고경이 홀린 듯 중얼거렸다.
한효월이었다.
…….
불현듯 침묵이 세찬 강물처럼 그들 사이를 흘렀다.
"그래, 나다. 알아보겠느냐?"
한효월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면서 말했다.
땅바닥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좌백이 긴장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그녀는 감천형을 향해 쳐든 손을 거두지 않은 상태였다. 자칫 한순간이라도 삐끗하면 천추지한이 생길 판이었다.
얼음처럼 차디찼던 독고경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처럼 무심했던 그 눈빛에 감정의 물결이 출렁이며 차 올랐다. 마치 마른 갈대밭에 불길이 번져 가는 느낌.
"왜 이제야……."
말과 함께 그녀는 한 걸음을 앞으로 나서려다가 그만 힘을 잃고 쓰러졌다.
그러나 그녀는 쓰러지지 않았다.
푹신한 힘이 그녀를 받쳐 주었다. 어느새 다가온 한효월이 그녀를 부축한 것이다.
"사숙……."
그의 품에 안긴 채 독고경이 중얼거렸다.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까마득히 일렁이고 있었다.
"기다렸어요…… 많이……. 나를…… 나를 지켜……."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녀의 눈이 감겼다. 감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듯했지만 천근처럼 내리 감기는 눈까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그것이 못내 안타까운 듯 그녀는 한효월의 옷자락을 움켜잡고 놓지 않았다. 얼마나 바짝 움켜잡은 것인지 손에 핏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 손을 본 한효월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명옥수(冥玉手)……."
낮게 중얼거린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는 감천형을 바라보았다.
"괜찮은가?"
"아직은."
감천형이 맥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좌 사질은?"
"견딜 만합니다."
좌백도 창백한 얼굴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입가에서는 아직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이 마당에 무슨 말을 또 어떻게 하겠는가.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던 하루였다.
단 한 순간도 쉴 틈이 없었던 날. 눈을 붙이기는커녕 잠시라도 쉴 틈을 얻지 못한 악몽의 날이 지나갔다. 어제가 악몽이라 하지만 오늘 또한 그 영향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잠든 듯 혼수상태에 빠진 독고경을 내려다보는 한효월의 안색은 무거웠다.
깎은 듯 반듯한 선을 가진 독고경의 얼굴은 투명해 보였다.
"어떤 소리였나?"
한효월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감천형을 보았다.
"뭐라고 형용키는 조금 어렵습니다. 꿈결처럼 비몽간에 들은 것이라 무슨 메아리처럼 누구를 부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만……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매가 밖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좌 사질은?"
"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비명이 들려와서 쫓아왔더니……."
창백한 얼굴의 좌백이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런가……."
한효월이 곤혹스러운 안색으로 신음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사매는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저나 사형이라면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되어 면목이 없게 됩니다."
좌백이 입술을 깨물고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정신만 차리면 사람을 죽인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아무리 전 맹주의 딸이라고 할지라도.
…….
무거운 분위기가 실내를 흘러간다.
"격리를 시켜야겠다. 그리고……."
"무슨 일이오?"
한효월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한 음성이 들려왔다.
주자미가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용천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심소옥의 슬조산 때문에 수행을 하지 못한 듯했다.
한효월의 설명을 들은 주자미의 안색이 굳어졌다.
"설마……."
"이미 마공이 경지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본인이 내부의 변화를 깨닫고 갈등을 겪고 있어서 혼수상태와 깨어나는 것이 교차되고 있지만 이대로 두면 기하급수적으로 진행이 될 겁니다."
한효월은 말과 함께 독고경의 손을 가리켰다.
"저 손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가슴에 올려진 독고경의 손은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답다 못해서 투명했다. 너무도 투명하여 핏줄이 드러나고 뼈까지 보일 듯하였다.
"이 손은……?"
그 손을 만져 본 주자미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오른다.
마치 옥을 만진 듯했던 것이다. 부드러운 듯하지만 또 매끄럽기 한량이 없다. 아무리 빙기옥골(氷肌玉骨)이라는 말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살이 이런 느낌이라니.
"명옥수입니다."
한효월의 말에 주자미는 경악한다.
"명옥……. 설마 이 아이가 벌써 명옥마녀가 되었다는 말이오?"
"아직은 아닌 듯합니다. 명옥마녀가 되면 성정(性情)이 완전히 바뀌어서 육친조차 몰라본다고 하는데 경아는 사형제들을 알아보았고, 저도 알아보았으니…… 하지만……."
한효월이 말끝을 흐린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될런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주자미에게서 나직한 한숨이 새어 나온다.
시선을 돌리자 마치 잠든 듯 고요히 누운 독고경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리따운 자태이고 뭇 사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미모. 그야말로 처녀 시절의 그녀를 빼닮은 모습이다. 그 모습을 보자 문득 가슴이 더욱 아려온다.
"사질들이 사질녀를 돌보기 힘든 상태이니, 소생이 돌아올 때까지 사질녀를 회주께서 맡아주십시오."
"어디를 가실 생각이시오?"
"군웅들 해독과 사질녀의 상태 등을 알아보기 위해서 잠시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지금 바로 떠나고자 합니다."
"사숙, 사숙께서 이곳을 떠나시면……."
"곧 돌아오지. 회주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한효월이 말머리를 자신에게 돌리자 주자미가 그를 본다.
"회주의 심정이 어떠신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보시다시피 적아난분(敵我難分)의 혼돈 상태라…… 여기 있는 구대문파의 고수들이 구대문파의 전부가 아닐지라도 그들이 무너지면 힘의 공백이 생겨날 겁니다. 모든 게 명확해질 때까지만 이곳을 지켜주십시오. 막 선배께서 계신다면 그나마 힘이 되겠지만, 아무래도 곧 이곳을 떠나실 것 같으니 개방이 홀로 이곳을 지키는 건 무리일 겁니다."
"……."
주자미는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즉각 반발하지 않는 것은 그녀의 심경이 전보다는 많이 달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효월은 그것을 기정사실화하듯이 좌백과 감천형을 보았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사모님을 잘 도와드리게."
"알겠습니다."
"그럼……."
한효월은 주자미를 향해 포권을 해 보였다.
대명이 헐떡이며 화산에 당도한 것은 한효월이 화산을 떠난 직후였다. 그 또한 매복에 걸려 순탄하게 화산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길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 * *
그렇지 않아도 험준한 화산.
새벽 안개가 온통 세상을 덮었다.
이렇듯 안개가 서린 날은 그야말로 구름 속을 노니는 신선이 따로 없다.
눈을 들어도 몇 장 밖을 볼 수 없고 짙은 안개가 서린 곳에서는 그야말로 손을 뻗어 닿을 거리에 있는 사람도 찾기가 어렵다.
산속에서 자란 한효월조차도 마찬가지였다.
현재의 화산파는 고립된 섬과도 같았다.
제천교가 철수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분명히 어디선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 터였다. 특히 혼자 떠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둘 리가 만무, 화산의 길은 험준절학(險峻絶壑)하여 출입할 수 있는 통로가 너무 뻔한 까닭이다.
그런 상황이 너무 자명하여 떠나는 그를 향해 주자미조차도 화산 어귀까지는 독고해와 동행을 하라고 하였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사양하고 떠나온 참이다.
소림사에서부터 이곳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달려왔었다.
그리고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눈을 붙이기는커녕, 제대로 쉰 적도 없었던 지난 삼 일 간이었다.
철인이 아닌 이상, 피곤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그는 굳이 쉬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조금도 피곤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그를 배웅하던 사람들은 그의 그런 굳건한 모습을 보면서 한 가닥 희망을 가질 수 있을런지도 모르기에.
화산파의 경내를 벗어나자 한효월은 길이 아닌 산자락을 택해서 훌훌 날아올랐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감시자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지리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둔 터라 그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다.
화산파의 경내를 벗어나자 한효월은 절벽 틈에 몸을 감춘 채 눈을 감았다.
잠시 조식하여 피로를 풀려는 것이다.
고수는 굳이 잠을 자지 않아도 운기조식으로 잠을 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눈을 감고 조식을 하고 있던 한효월의 코끝에 묘한 냄새가 스쳤다.
눈을 떠보니 이미 해가 떠오른 뒤다.
시야를 가렸던 안개가 제법 흩어져 시야가 넓어졌다.
'고기 냄새?'
문득 격심한 공복감이 엄습한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효월은 냄새가 풍기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맑은 계류가 흘러가는 계곡.
산자락에서 토끼 한 마리가 불길에 올려졌다.
그 앞에는 회삼을 걸친 노인 한 사람이 토끼 한 마리를 모닥불 위에다 올려놓고 있음이 보인다.
냄새는 바로 거기에서 풍기고 있었다.
'저 노인은……!'
그를 발견한 한효월이 놀라 그 자리에 굳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이야말로 활염라 조과였기에.
흰 수염이 가슴을 덮고 얼굴 모습도 청수하다. 얼핏 보면 신선이 하범(下凡)한 듯한 모습이다.
하나 자세히 본다면 광대뼈가 조금 나온 노인의 얼굴에서는 괴팍한 느낌이 한눈에 느껴지는……
그 모습은 서문운하와 같이 움직이는 활염라 조과에 분명했다.
'저 노인이 여기에 있다면?'
한효월은 부지중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들 강호삼괴는 늘 같이 붙어 다닌다. 그리고 그들이 왔다면 서문운하도 같이 왔을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탁탁…….
나뭇가지로 토끼를 뒤집으며 활염라 조과는 미간을 찡그렸다.
"망할 놈의 토끼를 다시 잡아야 할라나? 나올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숨어서 머리만 처박고 있다니……."
한효월의 안색에 묘한 빛이 스쳐 갔다.
그의 말투로는 그가 이곳에 왔음을 안다는 뜻, 게다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같기도 하지 않은가.
"음…… 시간이 다 되었는데?"
얼핏 하늘을 올려다본 활염라 조과가 다시 중얼거렸다.
"해독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모양이로군……. 그렇다면 토끼는 버리고 갈밖에."
말과 함께 그는 손을 털면서 일어섰다.
몸을 돌리던 그는 눈앞에 선 한효월을 보고 일순 놀란 빛을 떠올린다.
"너로군……."
그가 중얼거렸다. 눈을 부릅뜨고서 그를 보고 있는 모습이 그를 보면서도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
"저를 기다리고 계신 게 아니었습니까?"
"맞아. 그 녀석…… 정말 신통하군! 네가 이곳을 지날 줄 어떻게 알고 널 기다리라고 했는지…… 배고픈가?"
그가 불쑥 물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한효월이 미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활염라 조과는 그가 토끼 한 마리를 해치우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가타부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불쑥 호로병 하나를 내밀었다.
"물이다. 술이 좋을 것 같은데 하아가 굳이 술보다 물을 주라고 하더군."
우물우물 토끼 다리를 뜯고 있던 한효월의 안색이 굳어졌다.
눈앞에 아름다운 그녀, 서문운하의 얼굴이 선연히 떠올랐다.
그는 손을 내밀어 호리병을 받아 들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잘 있습니까?"
"빨리도 물어보는군……."
"죄송합니다."
"하아가 그처럼 부탁을 하지 않았다면 네게 토끼를 구워주기는커녕, 토끼 속에다 염왕지독에 또 다른 독으로 양념을 더해서 줬을
게다."
쓴웃음이 한효월의 얼굴에 번졌다.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제가 여길 지날 것은 어떻게 아시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하아가 여기에서 고기를 굽고 있으면 네가 나타날 거라고 해서 시킨 대로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습니까?"
한효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이라는 표정도, 놀라는 표정도 아니었다.
"놀랍지 않으냐?"
그의 태도로 오히려 뜨악해진 활염라 조과가 물었다.
"그녀라면 가능한 일일 겁니다. 선천역수(先天易數)를 보는 데에는 체력이 많이 필요한데, 건강이 회복되면서 신지(神志)가 맑아진
데다가 체력이 뒷받침되니…… 하긴, 제가 이리 지날 것을 알아내는 것은 사실 선천역수를 빌릴 필요도 없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지……."
활염라 조과는 머리를 흔들며 혀를 찼다.
그의 머리로서는 이 젊은 남녀들의 생각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한효월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한효월의 물음에 활염라 조과는 코웃음을 쳤다.
"궁금하긴 한 거냐?"
"……."
한효월은 미미하게 쓴웃음을 머금을 뿐, 답하지 않았다.
"말해 봐. 대체 왜 도망친 거냐?"
활염라 조과가 정색을 하고서 다그쳤다.
"두 늙은이들이 널 잡기만 하면 아주 포를 떠버리겠다고 작정을 하고 있다. 그렇게 도망치다니…… 하아가 간곡하게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노부도 널 그냥 두지 않았을 게다."
"죄송합니다."
그때 활염라 조과가 손을 불쑥 내밀었다.
"진맥해 보게 해주겠느냐?"
"……."
한효월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늙은 눈에 감정의 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안타까움이었다.
말없이 한효월은 손을 내밀었다.
그 손목을 잡은 채로 활염라 조과는 신중히 눈을 감았다.
한 식경이나 지나서 그는 눈을 떴다.
그 눈빛은 암울했다.
"이런 상태에서 이렇게 무리를 해야만 하나? 절대 안정을 하면서 섭생을 하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한효월의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 얼굴은 마침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을 발하는 듯했다.
"그녀를 잘 돌봐주십시오."
"대체 왜 이래야 하는 게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젓고 있던 활염라 조과가 갑자기 눈을 부릅뜬 채로 머리를 디밀었다.
눈빛이 사납게 희번덕이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정의고 나발이고…… 내가 알아봤더니 넌 강호에 나오기 전까지는 세상과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그런 네가 굳이
목숨을 걸고 칼날 위에서 춤을 춰야만 하는 이유가 뭐냐? 무엇 때문에? 왜 그래야 하는 게지?"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의미? 무슨 의미?"
"세상 모든 사람이 남이 어떻게 되든 혼자 조용히, 편안하게 사는 것만 바란다면 힘없고 약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강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면서 약자를 돌보지 않는다면……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스스로의 안일(安逸)만을 추구한다면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믿고, 무엇을 하기 위해서 살아가게 되겠습니까?"
"공자님 말씀이군! 세상에 자기를 위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이 몇이나 된단 말이냐?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죽음을 눈앞에 둔 자가 뭘 더 바라겠습니까?"
"그……."
갑자기 활염라 조과의 말문이 막혔다.
사람이 죽는다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세상을 덮는 학문도, 재물도, 능력도…….
모든 것이 다 무(無)로 돌아가고 만다. 그렇기에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다.
탐욕에 가득 찬 사람이 재물을 움켜쥐고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면 추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얼굴도 모르는 자들의 안위가 네 여자보다 중하단 말이냐?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와 같이 있을 수 있음에도, 그것이 그 아이에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 될는지 모르는데도?"
괴로운 빛이 한효월의 얼굴에 스쳐 간다.
"죄송합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깊이.
"……."
잡아먹을 듯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한효월을 지켜보던 활염라 조과는 이를 악물더니 마침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이로다……."
…….
잠시 침묵이 흘러갔다.
역시 먼저 입을 연 것은 활염라 조과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
"처리할 일이 있어서 잠시 이곳을 떠나던 중이었습니다."
"그게 떨거지들이 중독된 것과 관련된 게냐?"
그 말에 한효월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그녀가…… 그 때문에 노선배를 보낸 겁니까?"
* * *
화산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사람들이 일어나면서 일과를 위하여 분주할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태의 수습을 위한 회의가 아침부터 열리고 있었고, 곳곳에서 부상자들의 신음이 이어져 어수선한 분위기가 역연하다.
그 와중에도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분위기도 있었다.
"말 안 해?"
심소옥은 눈을 치켜떴다.
"자꾸 말시킬 거야? 나도 여기 혼자 떨어져서 열받는 판이란 말이야."
유성이 하품을 하면서 마주 인상을 썼다.
"친형제 같다면서 왜 너 혼자 떨어진 건데?"
"사내의 깊고 넓은 속을 한낱 아녀자가 뭘 일일이 다 알려구 해?"
유성의 말에 심소옥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쬐그만 게 꼴에 사내라구……."
"뭐야? 난 이래 봬도 여자와……!"
말을 하던 유성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여자와 뭘?"
문득 심소옥의 눈이 빛난다.
"오호? 그러니까 여자랑…… 그랬다는 그런 이야기지?"
"누, 누가 그랬대?"
유성이 당황하는 걸 보고 심소옥의 얼굴에는 짓궂은 빛이 떠올랐다. 힐끔힐끔 아랫도리를 훑어보면서 아래로 위로 자신을 살펴보자 유성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뭐 하는 거야?"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까져 가지구……!"
혀를 차던 심소옥의 눈빛이 갑자기 묘해졌다.
"가만, 그럼 혹 오빠도?"
"에라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애가 뭔 소릴 하는 거야?"
마침내 유성이 참지 못하고 심소옥을 후려쳤다.
거기에 맞을 심소옥이 아니다. 그렇다고 유성이 사생결단하고서 덤빈 것도 아니니 애초에 무슨 험악한 일이 날 것도 아니었다.
그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닌 감천형과 좌백이 조섭(調攝)을 하고 있는 방 앞이었다.
운기조식을 하던 두 사람은 그 소동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인데, 심소옥이 저처럼 집요하니 웃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허허거릴 상황도 아니니 쓴웃음이 나올밖에.
"정말 사숙을 찾아 떠날 모양이군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좌백이 머리를 저었다.
"찾아 나서고도 남을 것 같군. 그보다……."
문득 감천형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내가 이처럼 무기력하니, 사부님을 생각할 때마다 참괴(慙愧)하기 이를 데가 없군. 후우…… 무슨 낯으로 사부님을 뵈올지……."
자신의 주검마저도 세상을 위해 내놓은 사부.
그를 생각할 때마다 감천형은 무력한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몸을 돌보려 해도 가슴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아 스스로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지난 일보다는 이제부터 닥쳐올 일을 생각하고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좌백이 말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사제답군……. 언제라도 냉정할 수 있으니……."
감천형의 말에 좌백이 답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저는 매사를 냉철히 살필 수 있지만 너무 주저함이 많아 대업을 이룰 수는 없을 거라고. 하지만 사형은 다릅니다. 과감하고 호방하니 물을 만나면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하셨지 않았습니까?"
"지난날의 이야기일 뿐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사형!"
좌백이 손을 내밀어 감천형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이제 시작입니다. 비록 사숙과 같은 나이를 초월한 천재도 있지만 세상 사람 모두가 그런 천재는 아니지 않습니까? 굳이 따지자면 사숙이 너무 뛰어나서 그런 거지, 우리도 사실 둔재는 아니니……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충분히 사부님의 유지를 이을 수 있을 겁니다."
"……."
물끄러미 좌백을 보고 있던 감천형의 얼굴에 훈훈한 웃음이 피어 올랐다.
"그래. 다시 시작해 볼 수 있겠지. 우린 아직 젊으니까."
바로 그 순간이다.
"이제야 비로소 사내다운 소리를 하는군……."
칼칼한 음성이 밖에서 들려왔다.
감천형과 좌백이 놀라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거 누구요?"
유성의 외침 소리가 바깥에서 터져 나왔다.
감천형과 좌백은 서로를 마주 보고는 급히 밖으로 나왔다.
심소옥은 그새 어디로 갔는지 유성 혼자 눈빛이 날카로운 회의노인 한 사람 앞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유성인 게로군."
유성을 본 노인이 말했다.
"어? 어떻게 날?"
한효월에게서 감천형과 좌백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기에,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던 유성은 노인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 네 주인인 한 공자의 부탁을 받고 온 사람이다."
"무슨…… 부탁인데요?"
한효월을 들먹이자 유성의 말투가 묘하게 물러선다.
"이곳에서 해독할 사람을 찾는다고 해서……."
말과 함께 활염라 조과는 감천형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