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第一首 고려검왕(高麗劒王) (63/113)

第一首  고려검왕(高麗劒王)

-비명에 가다.

염원은 미궁(迷宮) 속에 잠들다.

 밤바람이 인다.

 무심한 바람은 능자미의 옷자락을 쥐어 흔든다.

 그녀의 나이 마흔을 넘긴 지 이미 오래. 그럼에도 그녀의 차가운 얼굴에는 세월이 지난 흔적이 별로 없다. 갓 서른은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여전한 미모가 그녀와 함께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한효월이 서 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선심제가 바라보이는 뒤뜰이다. 어제만 하더라도 아름다웠을 이곳 또한 이제는 쓸쓸하기만 하다.

 그들의 머리 위 별빛은 아스라이 차고 선명했다.

 "주원…… 태조께서 할아버님이란 말씀이십니까?"

 한효월이 놀란 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문득 씁쓸한 웃음이 그녀의 얼굴 위로 달려간다.

 "내 원래 성은 주(朱)이고, 당금 황상은 바로 내 백부이시오."

 아들이라면 군왕(郡王)이라 불리겠지만 친왕의 딸이라면 군주(郡主)가 된다. 태조의 손녀라면 그야말로 황실의 직계다.

 그러한 신분의 여인이니 성정이 차갑다기보다는 평생을 통해서 교오(驕傲)하게 살아왔음이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할 일이다.

 지난 세월, 그녀의 주변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은 바로 그러한 그녀의 신분에서 비롯한 성품과 무관하지 않았다.

 어둠에 잠긴 주위는 고요하기만 하다.

 불타다 남은 잔해가 아직도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화산파의 본전 건물들이 이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싸아한 탄 내음이 바람을 타고 풍겨오긴 하지만 갑자기 나타났던 금의위들마저 물러가 버린 지금 일대는 조용하기만 했다.

 그 어둠 속에 표연히 선 여인.

 스스로를 황제의 조카라 밝힌 존귀한 신분의 여인, 능자미. 아니, 주자미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를 쓸쓸함이 베어나는 듯 보인다.

 고오(高傲)하고 차가운 성품으로 인해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하였기에 그처럼 사랑했던 독고해를 떠나 훌쩍 남해로 가버릴 수 있었고, 출가를 하면서까지 독고해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빌기를 바랬었다. 아니, 당연히 그럴 줄 알았었다.

 그러나 일세의 영웅 독고해를 그렇게 잡아둘 수는 없었다.

 그것을 배신으로 생각한 그녀의 마음은 더욱 독고해를 향한 원망으로 굳어졌다.

 그로 인해 곁에 온 딸을 보고서도 아는 척하지 않았었다.

 그를 원망하였기에.

 하지만 그가 남긴 유서를 보고서 그녀는 스스로를 돌이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순한 자존심 싸움을 하기에는 너무도 컸던 가슴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을 생각하면 그처럼 당당하던, 당당했던 그녀 스스로가

 한없이 왜소해짐을 느껴야만 했다.

 '바보 같으니…….'

 그까짓 정의(正義)가 무엇인가?

 세상 사람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사랑을 버리고 가진 모든 것을 버려 얻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을 누가 알아준다는 말이던가…….

 스스로의 시신마저 강시화하여 천하를 지켜달라는 그의 유서를 보면서 그녀는 절규하였었다.

 몸부림치는 남해 바다, 그 철썩이는 파도를 보면서 그를 원망하였었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그를 원망하는 마음만큼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음을, 그것을 부인할 수 없음을…….

 거기에 황제가 보낸 사신이 당도했다.

 황제의 부름까지 거역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것이 그녀를 부르는 것이었음에는.

 "군주 마마이심을 몰라 뵙고 초민(草民)이 감히……."

 한효월이 부복(俯伏)하려 하자 주자미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는 강호인 능자미이니 예를 갖출 필요가 없소. 황실을 떠나온 지 이미 오래. 보구회 또한 망부(亡父)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만들어진 강호의 조직일 뿐, 황실과는 관계가 없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시다면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만……."

 "말씀하시오."

 "좀 전 금의위의 천호는 금의위 지휘사가 직접 맹의 조 당주를 나포해 오도록 명령했고, 그것은 역모와 관련이 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군주 마마께서 황상의 명을 받으신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

 그의 물음에 주자미는 한효월을 보았다.

 물끄러미 한효월을 바라보던 주자미가 입을 열었다.

 "황상께서 수신호위들을 내게 보내주시고 당부한 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구체적인 역모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소.

 강호상에 불순한 세력이 준동하고 있으며, 그 움직임이 심상치 않단 말씀만 하셨고 이 몸에게 그것을 조사해 보라고만 하셨을

 뿐이오."

 "그게 제천교였습니까?"

 "지금으로써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

 "그렇다면 금의위에서 주목하고 있는 대상도 제천교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오?"

 다시 한효월을 바라보던 능자미가 이윽고 입을 열어 물었다.

 그들 사형제는 모두 뛰어났다.

 과감하고 패도적인 성품의 독고해와는 달리 한효월은 심산의 호수와 같이 고요하면서도 상대로 하여금 그가 비범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특이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한효월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공자! 빠, 빨리……."

 유성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꺼지듯 두 사람의 신형이 사라졌다.

 "끄, 끄으으……."

 신안금조 조건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무토막과 같이 굳었던 그의 몸에서는 경련이 일고 있다.

 감긴 채 영원히 떠지지 않을 듯 보였던 그 눈을 부릅뜬 채 입에서 거품을 게워내면서 그는 전신으로 경련하고 있었다.

 "언제부터냐?"

 "방금,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면서……."

 유성의 대답을 귓전으로 흘리면서 한효월은 조건의 맥을 짚었다.

 "끄으으…… 그, 그를 찾……."

 알아듣기 힘든 음성이 조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흰자위만 보이게 부릅뜬 두 눈이 고통으로 희번덕거렸다.

 "누구를 찾으란 겁니까?"

 한효월이 그의 귀에다 소리쳤다.

 "끄으…… 제(齊)…… 천(天)…… 기(機)…… 크으으……."

 연결되지 않는 단속적인 말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떨림이 멎었다.

 부릅뜬 눈.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 전신의 모공으로 핏방울이 스며 나올 듯이 그렇게 그의 전신은 격렬한 고통으로 부풀어 있었다.

 단 몇 마디, 그 알아듣기조차 힘든 말을 하기 위해서 신안금조 조건이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 너무도 선연한 모습이다.

 한줄기, 검붉은 핏물이 그의 입에서 흘러 베개를 적신다.

 "당신의 염원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조 당주……."

 한효월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그의 부릅뜬 눈을 쓸어 감겼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들을 수 있던가요?"

 주자미가 물었다.

 쓴웃음이 한효월의 입가에 스쳐 갔다.

 "단어도 아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로 무엇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작은 몇 가지로 유추가 가능한 모든 것을 따져 봐야겠지요. 먼저 알아봐야 할 것은 조 당주에게 금제(禁制)를 베푼 사람이 누군지

 하는 것입니다."

 "금제라니?"

 주자미의 눈에 의혹의 빛이 드러났다.

 "누군가가 손을 써서 조 당주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를 옮기면서 그 금제에 차질이 발생하여

 조 당주의 의지가 그를 깨웠고, 그 과정에서 금제가 발동하여 그의 목숨을 앗아간 듯 보입니다."

 "그런……?"

 주자미는 믿기 힘든 듯 조건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제 추측이 맞다면 그의 뒷머리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겠지요."

 한효월은 말하면서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받쳐 든 채로 천천히 그의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손을 떼자, 그 집게손가락 끝에 반짝이는 물건 하나가 달라붙어 천천히 올라왔다.

 너무 가늘어 언뜻 실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놀랍게도 금침(金針)이었다. 그 길이는 한 치가 훨씬 넘었다.

 "맙소사……."

 주자미의 입에서 낮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알아보시겠습니까?"

 한효월의 물음에 잠시 침묵하던 그녀의 눈에서 갑자기 경악의 빛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놀람은 이내 그녀의 입으로 흘러나왔다.

 "설마…… 마교의 금침정혼(金針定魂)?"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또다시 마교의 흔적이라니……."

 "금침정혼이란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사용되는 섭혼술(攝魂術)의 일종입니다.

 그러나 조 당주는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다시 깨어나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과연 누가 무슨 의도로 이런 일을 한 것일까요?"

 한효월의 음성에도 의혹이 감돌고 있었다.

 신안금조 조건은 영민한 사람이었다.

 독고해가 생존해 있는 동안 그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어 천하무림은 그의 눈과 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독고해가 친위대만을 이끌고 출정했을 때에도 그만은 그가 어디로 간 것인지 알고 있다고 하였었다.

 그런 그가 그 모든 것을 털어놓지 못하고 이렇듯 비명에 가고 만 것이다. 가슴속 가득, 하고픈 모든 말을 담아둔 채로.

 과연 누가 무슨 의미로 그에게 금침정혼지법을 시술한 것일까?

 누구도 한효월의 의문에 답할 수 없었다.

 시술을 한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의혹은 생각할수록 깊어진다.

 그는 이미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제압하기 위해서 고심하기 이를 데 없는 금침정혼지술을 펼친다는 것도 괴이할 뿐더러,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의 입을 막아야 한다면 차라리 그를 죽이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침묵이 괴괴하게 실내를 누른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침묵을 깨뜨린 것은 한효월이었다.

 "……."

 말없이 주자미가 그를 바라보았다.

 "지난날 소생은 조 당주가 한 말을 따라 용문석굴의 빈양동으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처음 군주 마마를 뵈었습니다."

 한효월의 말에 주자미의 눈에 미미한 떨림이 흘러갔다.

 "당시 조 당주는 무엇인가를 빈양동에 남겨두었다고 하였는데 찾지를 못하였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서 혼수상태에 빠진 독고

 질녀와 군주 마마를 처음 만나뵐 수 있었습니다."

 말을 끝으로 한효월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이다.

 "그럼 그때 조 당주가 남겨둔 것을 내가 얻었다는 말씀이오?"

 주자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반면 한효월의 얼굴은 여전히 고요할 따름이다.

 "그런 말씀은 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발견한 것이 질녀와 군주 마마이시니…… 혹여 보신 것이 없는지 물어보는

 것뿐이지요."

 "없소."

 말을 하던 주자미가 돌연 날카롭게 소리쳤다.

 "누가 엿보고 있는 것이냐?"

 그것과 함께 갑자기 질풍이 일며 그녀의 곁에 서 있던 용천성이 창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미 발검을 하여 어둠 속으로 검광이 번갯불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앗! 살려주세요!"

 밖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정을 봐주시지요."

 한효월이 그 음성을 알아듣고서 소리쳤다.

 "아이고오…… 하마터면 시집도 못 가보고 클 날 뻔했네……."

 한 사람이 죽는시늉을 한다.

 "거지 주제에 시집은……."

 뒤이어 뛰어나간 유성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나타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교호 심소옥이었던 것이다.

 한효월의 음성에 주자미의 수신호위 용천성은 이미 검을 거둔 다음이었다.

 개방은 보구회와 화산에서 행동을 같이하여 그 또한 그녀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쫓아온 거야?"

 유성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심소옥의 미간에 내 천 자가 그려졌다.

 "쫓아오다니? 내가 너 같은 애들을 쫓아서 여기 왔을 거 같아? 이 누나는 어디까지나 오빠가 보이지 않아서 걱정이 되어

 찾아다니는 중이란 말이야."

 그녀는 고개를 빼 밀고 불빛조차 없는 실내를 굽어보다 슬그머니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한 걸음도 떼어놓지 못했다.

 막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순간, 뼈를 깎는 검기가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용천성이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검자루를 움켜잡은 채로. 그의 몸 전체가 한 자루 거대한 검이 되어 금방이라도 그녀를 후려칠 것만 같았다.

 심소옥은 바보가 아니었고 상당한 수준의 무공을 지녔다.

 그렇기에 지금 이 상태가 검기가 충일(充溢)하여 발동하기 직전의 살기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한 걸음이라도 나선다면 그 검기는 바로 발동하여 그녀의 목을 베어버릴 것이었다.

 그는 심소옥을 알아보고 검을 거두었지만 살기까지 거둔 것은 아니었다.

 '지독한 검기…….'

 심소옥은 내심 가슴이 섬뜩해졌다.

 이러한 검기는 단순히 검을 수련하기만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대련을 거치고 결투를 하면서 사람을 베어본 검수만이 가질 수 있는 기세인 것이다.

 그 말은 언제라도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녀를 벨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아, 알았어요. 안 들어가면 될 거 아니에요?"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저어대며 슬그머니 엉덩이를 뒤로 뺐다.

 용천성의 안색은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꼬리를 말고 물러서자 살기는 사라졌다.

 물러서게 하는 것이 목적이지, 굳이 그녀를 죽이려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노리던 바였다.

 '흥! 네가 그런다구 내가 포기하고 말 것 같아?'

 심소옥은 내심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살기가 걷히는 순간, 심소옥은 발끝으로 땅을 박찼다.

 그 발짓에 땅바닥의 흙먼지가 긁혀 안개처럼 일며 용천성을 덮쳐 갔다.

 소매를 젓는 순간에 휙휙 소리와 함께 십여 매의 섬광이 그 흙먼지에 묻혀 같이 날았다.

 어둠 속에서 창졸간에 허를 노리고 벌어진 일이라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급습이었다.

 그래 놓고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선심제 안으로 내달았다.

 "무슨 짓이야?"

 그 광경에 유성이 놀라 소리쳤다.

 용천성의 얼굴에 놀람과 동시에 살기가 드러났다.

 쨍!

 검이 발동했다.

 검명(劒鳴)은 고막을 찢고 대기가 그 서슬에 진탕한다.

 검을 뽑는 기세에 그를 향해 날아들던 흙먼지가 폭풍에 휘말린 듯 흩어졌고 십여 매의 암기는 찰나간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그의 검은 검기를 흘리며 심소옥의 등을 향해 덮쳐 갔다.

 그것은 마치 강력한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와 같았다.

 섬뜩한 느낌에 힐끗 뒤를 돌아본 심소옥의 눈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그래도 한 편인데 설마 죽이기야 하겠느냐고 내심 생각했었기에 지금에서야 그것이 큰 착각임을 알게 된 것이다.

 상승의 검도를 연수(練修)한 사람은 검기를 적에게 동조(同調)시킬 수가 있다.

 적이 움직이면 이쪽도 따라서 같이 움직인다는 의미다.

 그것은 한 줄에 꿴 실과 바늘과 같아 일단 그 범위에 들게 되면 상대의 능력이 발군이 아닌 다음에야 벗어날 수가 없다.

 심소옥은 상대가 살기를 지우자 착각을 한 것이다.

 용천성과 같은 고수라면 언제라도 살기를 다시 뿜어낼 수 있음을.

 바로 그 순간이다.

 "사정을 봐주시오."

 한 가닥 침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심소옥의 등을 가르는 용천성의 검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심소옥과 연동된 검기가 그로 인해 끊어졌고 대신 그 검기는 그에게 그대로 직사(直射)되었다.

 절대절명의 순간, 그 사람은 막강한 잠경(潛勁)을 뿜어냈다.

 윙윙-

 검이 마치 갈대 잎과 같이 흔들리며 섬뜩한 외침을 토해냈다.

 검이 상대의 잠경을 이기지 못함을 보자 용천성의 눈에서 진한 살기가 일었다.

 동시에 검끝에서 검광이 퍽퍽! 폭죽처럼 튀었다.

 승부를 결할 생각인 것이다.

 그때.

 "물러나거라."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자 용천성은 잔뜩 끌어올렸던 공력을 풀면서 뒤로 물러났다. 어둠 속을 밝히며 일던 검광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사정을 봐주어 감사하오."

 나타난 사람이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용천성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황엽이었다.

 "……."

 용천성은 황엽을 보자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황엽의 뒤쪽으로 주자미의 모습이 보인다. 그를 저지한 것은 용천성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온 주자미였다.

 용천성을 저지한 것은 그녀였고, 그녀의 명이 아니었다면 용천성은 결코 손을 멈추지 않았을 터였다.

 그녀를 제외하고는 누구의 명도 듣지 않는 그이기에.

 "방주!"

 심소옥이 반가워 소리쳤다.

 "어서 사과하지 않고 뭘 하느냐? 자칫했다면 넌 다시 세상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황엽이 그녀를 꾸짖었다.

 "흥! 그랬다가는 그도 살아남지 못할걸요? 감히 천하제일의 대방인 개방의 중요 인물을 살해하고 그가 발 뻗고 잘 수가 있을까요?

 아마 삼대(三代)를 두고 골머리를 썩여야 했을 거고……."

 종알거리던 그녀는 문득 씨익 웃었다. 눈빛이 장난스레 빛난다.

 "나를 죽이려면 그도 대가를 치러야 했을걸요?"

 그녀는 주먹을 들어 보였다.

 그 주먹에는 뭔가 들어 있는 듯 보이는데 일부러 보여주진 않았다.

 황엽은 머리를 저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 당장 돌아가지 못할까!"

 "방주님, 저는……."

 뭔가 말을 하려던 심소옥은 황엽의 눈빛이 굳어짐을 보자 입이 얼어붙었다.

 늘 자상하던 황엽이다.

 누구도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안색을 굳히고 자신을 쏘아보자 심소옥은 감히 더 이상 입을 놀릴 수가 없었다.

 "가요! 가면 되잖아요. 간다구요……."

 그녀는 머리를 긁어대면서 일그러진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원망스러운 빛으로 안을 쳐다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사랑스런 동생이 왔는데 내다보지도 않다니……."

 픽!

 그 형상을 보면서 유성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사납게 유성을 쏘아본 심소옥은 그래도 안 나오네라며 씩씩거리더니,

 난감한 황엽의 시선을 뒤로하고서 활개를 치며 그 자리를 떠났다.

 막 용천성의 옆을 스쳐 가던 그녀는 문득 그를 보면서 씩 웃어 보였다. 어둠 속에서 흰 이가 드러났다.

 "한 삼 일만 고생하면 살 수 있을랑가?"

 그녀의 괴이한 웃음과 말투에 용천성의 얼굴이 묘해졌다.

 저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녀의 태도는 꼭 그 소리가 자신을 두고 한 것만 같다.

 삼 일만 고생하면 살 수는 있을랑가?

 그 말을 되뇌이는 순간, 갑자기 괴이한 느낌이 전신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이, 이건……."

 돌연 용천성의 얼굴이 괴이하게 일그러진다.

 가려운 느낌이 이는가 싶더니 이내 그 가려움은 삽시간에 전신으로 번져 갔다. 처음에는 개미 한 마리가 기어가는 느낌이었다.

 하나 채 숨 한번 내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오죽하면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랴.

 참지 못하고 무심결에 한 번을 긁자 미칠 듯 가려워져 그야말로 환장을 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으으……."

 용천성이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손을 어디다 어떻게 둬야 할지를 모르는 모습이다.

 차마 주자미의 앞에서 벅벅 긁어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냥 참기에는 너무 끔찍했다.

 살기에 찬 눈으로 심소옥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이미 숲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의 괴기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에 주자미의 눈빛이 굳어졌고, 그녀의 곁에 있던 다른 호위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왜 그래?"

 "가, 가려워서……."

 입을 열자 더 가렵다.

 말을 채 맺지 못하고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음을 보자 상황을 짐작한 황엽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당장 이리 나오지 못할까!"

 …….

 이를 갈아대는 용천성의 신음 가운데 숲 속에서 심소옥이 머리를 내밀었다.

 "가라고 하시곤……."

 "무슨 짓을 한 게냐?"

 심소옥이 씩,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아무 짓도…… 그저 슬조산(蝨蚤散)을 조금 뿌렸을 뿐예요. 좀 가렵겠지만 죽진 않아요."

 "슬조산?"

 "말 그대로 이하고 벼룩이를 섞어 만든 거라 헤헤…… 좀 지저분하죠. 참는 게 중요해요! 못 참고 일단 긁기 시작하면 미친 듯이

 가려워져서 살을 파내고 뼈를 긁게 되죠. 그래도 가려운 게 멈추진 않지만……."

 의기양양한 심소옥의 말에 황엽은 어이가 없어 절로 입이 벌어졌다.

 그것은 유성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바깥의 소란을 뒤로하고 한효월은 굳은 얼굴로 눈을 감은 신안금조 조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세를 풍미했던 사람.

 한때, 제갈량과 같은 지모를 가졌다 일컬어졌던 사람.

 그는 죽음과 싸우면서까지 자신에게 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했었을까?

 "크으으…… 제(齊)…… 천(天)…… 기(機)……."

 '제천교라는 말이었을까?'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한효월은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몇 마디를, 그 사이에 끼인 단어 몇 마디를 더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의 입만 벙긋거려서 누구도 듣지 못했고 오로지 정면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한효월만 보았었다. 들은 것이 아니라…….

 "열쇠는……."

 생각을 정리하던 한효월의 눈이 빛났다.

 한 생각이 스쳐 갔기 때문이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는 죽었나?"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한효월의 안색이 돌변했다.

 시선을 돌리자 창문으로 한 사람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지만 백의를 입은 그는 40대 후반의 나이, 모습이 청수하고 눈빛이 맑았다.

 그는 눈을 감은 신안금조 조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미 생기(生機)가 끊어졌군. 조금 늦어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되었구나. 이제 어떻게 한단 말인가?"

 "뉘십니까?"

 그의 기품이 평범하지 않음을 직감한 한효월이 정중히 물었다.

 기품 이전에 그가 창밖에서 자신을 보고 있음에도 자신이 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능력을 대변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듣던 대로 뛰어난 친구로군……."

 한효월을 바라본 백의인은 대답 대신 중얼거렸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거든 막풍에게 물어보게. 옛친구를 기억하고 있는지……."

 말과 함께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훌쩍 사라졌다.

 "잠시만!"

 한효월이 다급히 소리치면서 창밖으로 뛰쳐나갔다.

 정말 한순간이었다.

 그가 백의인을 따라 창문 밖으로 뛰쳐나간 것은.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앞쪽에서 황엽과 주자미 등이 모여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있음이 보였지만 그들도 발견한 것은 없는 듯했다.

 "정말 뭐라고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할는지……."

 황엽은 난감한 표정으로 연신 사과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심소옥이 퉁퉁 불어서 서 있다가 한효월이 나오는 걸 보고 반색했다.

 "대가! 나……."

 "가서 대죄(待罪)하고 있거라!"

 그녀는 채 입도 열기 전에 준엄한 황엽의 꾸짖음에 찌그러지고 말았다.

 뭔가 중얼중얼거리면서 그녀는 슬금슬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못내 아쉬운 듯…….

 그런 그녀를 보고 어이없어하던 주자미는 한효월의 훤칠한 모습을 보고는 문득 묘한 빛이 되었다.

 한효월의 출중한 모습, 반면 길거리에서라면 쳐다보지도 않을 거지소녀의 어깨를 늘어뜨린 뒷모습은 뜻밖에도 매우 처량해 보였다.

 '네가 정말 한 공자를 좋아한다면 한 공자가 어떤 모습을 좋아할는지 가서 깊이 한번 생각해 보거라.'

 못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심소옥의 귓전으로 모깃소리와 같은 전음이 전달되었다.

 뜻밖의 소리에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돌린 심소옥은 주자미와 눈이 마주치자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깨닫고 갑자기 활짝, 웃었다.

 그리곤 넙죽 이마가 땅에 닿을 듯 절을 했다.

 "감사해요!"

 이어 그녀는 팔짝 뛰더니 냅다 달려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기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돌변한 그 모습에 황엽이 얼떨떨해 눈을 꿈벅인 것은 물론,

 부지간에 마음이 동해 전음을 보낸 주자미조차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였다. 심소옥이 알려준 처방대로 목욕을 하러 간 시위 용천성만을 제외하곤.

 그녀가 사라지자 마치 폭풍이 쓸고 지나간 듯하다.

 "사숙께서 늦게 거둔 막내라서 귀여워만 했더니 버릇이 없어져서……."

 황엽이 난감한 듯 머리를 저었다.

 "혹…… 누구 본 사람이 없었습니까?"

 "누구 말이오?"

 한효월의 말에 황엽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태도나 주자미의 태도를 보건대 아무도 보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아닙니다. 그냥……."

 답을 한 한효월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의혹이 깃든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들 모두가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일까?'

 그가 적이라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동권왕 막풍을 일러 옛친구 운운한 것을 보면 적이 아닐는지도 몰랐다. 하나 그 나이에 막풍과 친구란 말인가?

 "누구라구?"

 "모르십니까? 옛친구라고 하던데……."

 "옛친구라고? 어떻게 생겼던가?"

 한효월과 만난 막풍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백의를 입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백의 형상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늘상 보던 형태가 아니라 옷깃이 검고……."

 "학창의처럼 생겼던가?"

 "비슷합니다만 조금 다른 형태인 것 같았습니다. 중원 사람의 형태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고 할까, 어딘지 모르게 묘한 느낌……."

 "중년인이라고 했나?"

 "그렇게 보였습니다."

 문득 경악의 빛이 요동권왕 막풍의 얼굴에 떠오른다.

 "설마 고려검왕(高麗劒王), 그 친구란 말인가?"

 "고려검왕이라니? 혹시 천하십왕 중 한 분인, 검도제일(劒道第一)이라는 그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바로 그 사람이지."

 막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성명(盛名)하신 지가 언제이길래 그런 나이에……."

 "해동(海東)의 선도(仙道)를 수련하여 청춘을 유지하는 것이지, 실제의 나이는 나보다 적지 않네. 어쩌면 더 많을런지도 모르지."

 "아……."

 한효월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흐른다.

 얼핏 보기에도 단순한 무부(武夫)라기보다는 탈속(脫俗)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천하십왕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인가.

 또 한 사람의 천하십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그는 누구를 찾아, 무엇을 위하여 그 머나먼 곳에서 이곳까지 온 것인가?

 요동도 먼 곳이다.

 하지만 고려검왕의 근거라 할 수 있는 해동(海東)은 더욱 멀다.

 '그 먼 곳에서 그가 어떻게 조 당주를 알고 찾아온 것일까?'

 상황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복잡해지는 듯하였다.

 그가 그 먼 곳에 우연히 신안금조 조건을 찾아왔을 리는 만무(萬無).

 "그가 이곳까지 왔다면 필시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을 텐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요동권왕 막풍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각한 얼굴.

 "찾아보시렵니까?"

 "아무래도."

 밖으로 나와 사라지는 요동권왕 막풍을 배웅하면서 한효월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안금조 조건이 갑자기 왜 그렇듯 중요 인물이 된 것일까?

 그가 어떤, 무엇을 알고 있기에?

 역모(逆謀)?

 황궁에서까지 그를 찾았다.

 그는 과연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생각에 잠겨 있던 한효월은 문득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태의 심각함은 이미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고, 그 진전도 괴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금씩 전진한다 싶으면 모든 것은 더 더욱 미궁(迷宮)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아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었다.

 "과연 누가 제천교를 만들어낸 것이란 말인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중얼거리던 한효월의 눈에 돌연 광채가 돌았다.

 한 생각이 스쳐 간 것이다.

 신안금조 조건.

 그는 실종된 사형 건곤무적 독고해를 찾아 나섰었다.

 그가 알아낸 것이 제천교와 무관하지 않을 것임은 철부지 아이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 그런데 그런 그를 역모 운운하면서 무소불능(無所不能)의 권한을 가졌다는 금의위까지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거기서 끝이었다.

 더 생각할 수 없음이 아니라, 변고가 발생한 까닭이다.

 "으악!"

 난데없이 들려온 비명.

 부지중에 고개를 돌린 한효월의 눈에 긴장이 튀어 올랐다.

 비명이 들려온 곳이 바로 감천형과 독고경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

 슉!

 그의 신형이 어둠을 뚫고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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