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首 천금지귀(千金之貴)
-유성과 만나다.
금의위의 출현(出現)에 놀람은 더해지다.
소백은 쏜살같이 산 아래로 내달았다.
그렇게 해서 당도한 곳은 뜻밖에도 화산파에서 홍화장독으로 인해 후퇴하여 비어 있는 화산파의 본전.
그처럼 북적거리던 사람들이 사라진 사방은 인적이 끊어져 괴괴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 외곽 쪽에 한 채의 건물이 있다.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에 화재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비어 있는 듯 보이는 곳.
소백이 쉬지 않고 내달려 사라진 곳은 바로 그 전각이었다.
선심재(善心齋)라는 이름이 붙은 그곳은 화산파에서 부상자들을 안치하여 치료하는 곳이었다.
한효월이 소백이 사라진 곳으로 들어서자 돌연, 문 뒤에서 서릿발 같은 검광이 엄습했다.
한효월이 슬쩍 뒤로 물러나면서 손을 들어 검신을 튕겨내려 했다.
그러자 검이 빙글 돌면서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과 같이 한효월의 얼굴을 향해 직격해 들어왔다. 사납기 이를 데 없는 기세다.
한효월이 낭랑히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성아, 나를 죽일 작정이냐?"
"공자?"
검광이 사라졌다.
"정말 공자님?"
한 사람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그간 한효월과 헤어졌던 유성이었다. 그는 한효월을 보자 환성을 지르며 한효월에게로 달려들어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살아 계셨군요! 성아는 다신 공자를 뵐 수 없을 줄 알았어요!"
어둠 속에서 눈물이 글썽거린다.
찍, 찍!
그의 뒤에서 소백이 팔짝팔짝 뛰면서 장단을 맞춘다.
"이런…… 사내답지 못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한효월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훈훈한 정이 그 손짓에서 느껴진다.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죽거나 살거나 신경 안 쓸 거였죠?"
"하하…… 녀석, 잘 있을 줄 알았다."
한효월이 웃는 것을 보자 유성은 입이 한 다발이나 나왔다.
"으…… 잘 있긴,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요!"
"여기 이렇게 잘 살아 있지 않느냐?"
"으으…… 과정이 중요하죠! 그간 얼마나 천신만고에 천간만난(千艱萬難)에 시달렸는지 아세요?"
"다행히 아무 일도 없지 않았느냐? 그럼 되었지, 게다가 그간 무공도 많이 는 것 같은데 엄살은……."
한효월이 웃자 유성이 다시 툴툴거렸다.
"권왕 어르신네께서 몇 수 가르쳐 주셔서 그런 게지 늘긴……."
"그런데 여기서 뭘 하는 게냐?"
유성의 불만이 실은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임을 잘 아는 한효월은 유성의 머리를 한차례 흔들어주고는 여전히 웃음기 어린
얼굴로 물었다.
그의 물음에 유성의 안색이 갑자기 달라졌다.
그는 아차! 하는 얼굴로 한효월의 뒤쪽으로 고개를 빼밀어 바라보고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누가 같이 왔습니까?"
"아니, 혼자 왔다. 무슨 일이길래?"
"이리 오세요."
유성이 안내한 곳은 선심제 구석방에 있는 침상이었다.
거기 누운 사람을 본 한효월의 안색이 돌변했다.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그 사람은 바로 신안금조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지난날 죽어가는 그를 구한 사람이 바로 한효월이었었다.
그는 무림맹이 개봉에서 화산으로 옮아가면서 같이 옮겨졌었다.
그리고는 만나본 적이 없었다. 굳이 그에게 신경을 쓸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그날 이후, 그가 혼수상태에 빠져서 그를 만나봐도
의미가 없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아무도 없는 이곳에 혼자 남아 있다니…….
"잊어버렸단 말인가?"
후퇴하기 바빠서 그를 놓고 갔다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이가 없는 건 뒤로 미뤄둔다고 할지라도 이 자리에 어떻게 해서 유성이 있는 것일까.
"공자님이 화산에 계신다고 회주께서 절 보내셨죠……."
능자미의 뒤를 추적하다가 붙잡힌 다음, 유성이 한효월의 시종임을 알게 된 능자미는 그를 잡아두었을 뿐, 괴롭히지 않았다.
그리고 한효월에게 변고가 있다는 소문이 돌자 오히려 그를 돌보아주었다.
보구회로 찾아든 요동권왕 막풍을 만난 것도 그런 와중이었다.
참지 못하고 한효월을 찾아 떠돌던 유성은 한효월이 화산에 나타났다는 전갈을 받고 급거 화산으로 달려오게 되었다.
그렇게 그가 화산에 당도한 것은 모든 것이 다 끝난 다음이었다.
그런데…….
그처럼 격렬했던 싸움.
피가 튀고 뼈가 부서져 혼백이 흩어지던 그 참혹한 싸움이 끝난 다음에 남은 것은 불타고 남은 잔해와 참담한 상흔(傷痕)뿐.
어둠에 묻힌 그 잔흔(殘痕)에 유성은 내심 머리를 흔들어야 했다.
화산에 이르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적을 물리쳤다고는 하지만 일시 득세했을 뿐, 실제로는 화산을 장악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 마음 놓고 돌아다닐
상황도 아니었다.
유성의 움직임도 어둠 속에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보다 더욱 조심스럽게 어둠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그들.
일단의 복면인들이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를 들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운반하는 것이 사람임을 알아본 유성은 호기심이 동해 은밀히 그들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게 조 당주였단 말이냐?"
"맞아요. 놈들이 숲 속으로 들어갈 때 장난을 쳐서 조 당주를 빼돌렸죠. 놈들의 발악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어요. 졸지에 빈손이 된
놈들은 삽시간에 일당을 불러 모으는데 한둘이 아니에요. 순식간에 스무 명도 더 넘게 몰려들더군요. 무지하게 빠르던걸요?"
"그들이 아직 부근에 진을 치고 있는 게 맞는 모양이군……."
"제천교도들이 아니던데요?"
유성의 말에 한효월은 멍청해졌다.
"아니라면? 봉황문이더냐?"
유성이 머리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조직이 일사불란한 것이 간단한 놈들이 아닌 것은 한눈에 알겠는데…… 뭐 하는 놈들인지는.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서 밖으로 도주한 흔적을 남기고 이 안으로 숨어들어서 요놈을 공자께 보낸 거예요."
유성은 곁에서 골골거리고 있는 소백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크악?
그새 유성의 어깨에 올라앉아 졸고 있던 소백이 불시의 습격에 노해 유성을 노려보았다.
"얼래? 이놈이 이제 주인님에게 반항을 할라구 하네?"
유성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노려보자 소백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앞발로 머리를 한번 쓰다듬더니 훌쩍 몸을 날려 신안금조의 옆으로
가 웅크리고 앉아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저놈 게으른 거 하고는……."
유성이 혀를 찼다.
'괴이하군. 그들이 누구며 무엇 때문에 이 와중에 조 당주를 납치하려 한 것일까?'
생각을 해보지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혼수상태인 사람을 이 마당에 굳이 데려가려 했다는 것은…….
그때였다.
"크으으……."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란 한효월이 고개를 돌려보니 그 신음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조건이 흘린 것이었다.
"상당히 괴로운 듯 가끔 헛소리도 하고 신음을 흘리기도 하는데, 뭐라는지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하겠어요."
유성의 말에 한효월의 눈에서 빛이 났다.
"정말이냐?"
"그럼요. 자꾸 그래서 놈들에게 들킬까 봐서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어요. 그렇다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 입을 막아놓을 수도
없구……."
한효월은 굳은 표정으로 조건에게 다가가서 맥을 짚었다.
조건은 그날 이후 혼수상태로써 한 번도 깨어난 적이 없었다.
소위 식물인간이 되어버려서 그가 정신을 차린다거나 말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말을 하려고 한다는 것은…….
맥을 짚은 한효월의 신중한 표정을 바라보던 유성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때요? 깨어날까요?"
"뭐라고 말할 상태가 아닌 것 같다. 어떤 염원(念願)이 그를 잡아놓고 있긴 하다만……."
조건의 지금 몸 상태는 사실상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였다.
무엇인가 못다 한 한(恨)이 무의식 속에서 그를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설명하기 힘든 것이 바로 지금 그의 상태였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조건은 돌아온 그날 빈양동이란 말만 하고는 혼수상태에 빠져 버렸다.
거기에 의거하여 한효월은 제천교가 꾸민 진시황릉의 음모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는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가 알고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저 지경에서조차 저처럼 안간힘을 쓰면서 버티고 있다는 것인가.
궁금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하나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가능한 조치는 그때 다 했기 때문이다.
'그 노인이라면 혹 무슨 방법이 있을까?'
문득 한효월의 뇌리에 괴팍한 성미의 노인 한 사람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있는 중조산까지는 너무 멀었다.
유성이 다시 뭔가 입을 열려고 했다.
순간, 한효월은 머리를 저으며 손가락을 입에다 댔다. 말을 하지 말라는 의미.
그 의미를 알아챈 유성이 소리도 없이 문가로 다가섰다.
그 손은 이미 검결(劍訣)을 짚고 있다. 문이 열리기만 하면 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춘 것이다.
소리없는 긴장이 살처럼 실내를 흘러갔다.
바로 그때다.
"크으…… 그, 그를 차…… 차자(尋)……."
조건에게서 일그러진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 하에서 그 소리는 천둥 소리 못지 않게 컸다.
팡!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문짝이 활짝 젖혀졌다.
밀어보거나 안을 탐색한 것이 아니라 전혀 거리낌없이 다짜고짜 두터운 문을 쳐서 열어버린 것이다.
문고리가 부서져 나갔다. 놀라운 내공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졸지에 벌어진 일이라 그 문 뒤에서 호시탐탐, 적을 노리고 있던 유성은 대경실색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문 뒤에서 채 정신도 차리기 전에 오징어포가 되어버렸을 변고. 번개처럼 그가 뒤로 후퇴하자 문짝은 방금
그가 붙어 있던 벽을 쾅! 세차게 때리며 실내를 떨어 울렸다. 그 충격으로 집 전체가 울리며 흙먼지가 쏟아져 내렸다.
검광이 어둠 속에서 작렬했다.
유성이 검을 휘둘러 뒤이어 덮쳐 들어올 적을 공격한 것이다.
하나 허탕이었다.
적은 한 수로 문을 젖혀 열었을 뿐,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유성은 공연히 헛손질만 한 꼴이 되었다.
조건의 옆에 있던 한효월은 열린 문밖을 보았다.
한 사람이 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빛이 마치 등잔처럼 형형히 빛난다.
어둠을 뚫어 볼 수 있는, 내공이 경지에 이른 사람이 아니라면 보일 수 없는 형상이다.
그는 우뚝 선 채로 안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람만 돌려준다면 그냥 돌아갈 수 있다."
말을 하면서도 그의 눈은 앞쪽에 검을 든 채 서 있는 유성이 아니라 한효월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돌아간다면 성하게 돌아가게 버려두지."
유성이 코웃음을 쳤다.
"무례하게 굴지 마라."
한효월이 나섰다.
그는 안력을 돋우어 밖에 선 사람을 살펴보았다.
어둠 속이지만 당당한 체구가 돋보인다.
뜻밖에 갸름한 얼굴이나 금의(錦衣)를 입고 손에는 한 자루 섭선(摺扇)을 들었다.
그리고 허리에는 보검 한 자루가 걸려 있었다. 나이는 마흔을 넘긴 듯 보이지만 눈빛은 침착하고도 싸늘했다.
"귀공(貴公)은 어디 소속이시오?"
그를 살펴본 한효월이 물었다.
"친구가 아니라면 상대를 알아서 무엇 할까? 사람을 내놓아라."
금의인이 차갑게 소리쳤다.
위엄이 담긴 모습이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측의 사람이오. 설마 이 사람이 무림맹의 신기당주임을 모르고 데려가려는 것은 아닐 텐데?"
"벌주를 마시겠다는 겐가?"
금의인이 코웃음을 쳤다.
펑!
그가 코웃음을 치자 그것이 신호인 듯 창문이 부서져 나가면서 한 사람이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그것과 함께 금의인의 좌우, 아마도 문 좌우 벽에 숨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자들이 빙글 몸을 돌려 그 서슬로 바람처럼 문
안으로 직격해 들어왔다.
그들은 연수합격(聯手合擊)에 능란한 듯했다.
한 사람은 몸을 낮춘다. 또 한 사람은 그 위에서 검을 찔러온다.
그들을 막으려면 두 자루의 검을 상하로 한꺼번에 막아내야 할 처지였다.
평범하게 공격해 온다면 못 막아낼 것은 아니었으되, 그 속도는 질풍과 같으며 창문으로 적이 날아든 것과 때를 맞추고 있어서
허를 찔린 셈. 누가 봐도 막아내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유성은 코웃음 쳤다.
"잔머리를 굴릴 줄 알았지!"
적이 진격해 옴과 동시에 뒤는 돌아보지도 않고 앞으로 향해 왼손에 준비하고 있던 한 주먹의 암기를 집어 던지고는 검을 흔들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자야 한효월이 처리할 터이니,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보나마나 그놈은 내년 오늘이 제삿날이 될 것이므로.
땅! 따당!
날카로운 음향이 연달아 터져 나오면서 덮쳐 들어오던 두 검수에게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성이 던져 낸 것은 철연자(鐵蓮子)로서 쇠 구슬의 형태를 가졌다. 공력을 실어 던지면 바위라도 파고들어 가는 위력이 있었다.
허투루 볼 수 있는 공격이 아닌지라 공격해 오던 자들은 당황했고, 그 허둥대는 순간을 노려 유성의 검이 날아든 것이다.
"윽!"
검수 하나가 가슴을 찔려 나뒹굴고 위쪽으로 공격하던 자는 겨우 유성의 검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기선을 제압당해서 유성의 연환검세에 쩔쩔매면서 문밖으로 쫓겨 나가고 말았다.
"너도 가라!"
유성은 냉소하면서 문 앞에 쓰러져 있는 자를 밖으로 걷어차 냈다.
슬쩍 뒤를 보니 창문으로 날아들었던 자는 이미 한효월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햐, 언제 한 거야? 그새 공자의 무공은 더 강해진 것 같군…….'
유성이 내심 혀를 내두르는 사이 한효월이 앞으로 나서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곳은 화산파의 경내. 귀하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집중 공격을 받을 수도 있소. 무림맹의 힘은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오."
그의 음성은 침중했다.
"하하…… 감히 본 대인(大人)을 위협하려는 것인가?"
금의인(錦衣人)이 냉소를 터뜨렸다.
'대인?'
그 말에 한효월이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귀하는 관(官)에서 나온 것이오?"
"흥!"
한효월의 물음에 금의인은 답변 대신 냉소를 흘렸다.
긍정일 수도, 부정일 수도 있는 태도였다.
"귀하가 관에서 나온 것이라면 더욱 괴이하군. 현재 이곳에서의 일에 관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오?"
한효월의 물음에는 의미가 깊었다.
당금의 황조(皇朝)는 전란(戰亂) 속에서 일어나 오늘의 위업(偉業)을 이루었다.
그 와중에 천하를 장악했던 대원(大元)이 물러나고, 다시금 이민족(異民族)을 물리친 중화(中華)의 왕조가 들어선 것이다.
당(唐)을 지나 송(宋)에 이르면서 천자의 위엄은 사라지고 이민족의 힘에 늘 전전긍긍했던 나날이었다.
그도 모자라 몽골에게 지배를 당하기까지 했다. 그것을 희대의 풍운아 주원장이 나타나 강렬한 지도력으로 명(明)을 세웠다.
명(明)의 의미가 무엇이던가.
해[日]와 달[月]과 같이 빛난다. 해와 달처럼 영원하리라는 염원을 담고 있지 않던가.
일개 행각승(行脚僧)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가 되기까지, 그 과정이 쉬웠을 리 없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수많은 인연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오늘날의 위업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주원장이 무림의 도움을 받은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고, 세간에 알려진 백련교와의 사단(事端) 또한 거기에서
비롯한다.
그들의 숨은 힘을 잘 알고 있는 주원장이었기에 은연중에 무림의 일에는 관부가 간섭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 되어 내려왔고,
그것은 당대의 황제인 성조에 이르러서도 변함이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관이란 건가?
더구나 대인이라면 어디 아문(衙門)의 졸개가 아니다.
다시 살펴보니 조금 묘하다.
관인(官人)이 검을 차고서 다시 손에 부채를 들었다는 건가.
순간, 금의인이 코웃음을 쳤다.
"그것을 본 대인이 너에게 말해야 한단 말인가?"
동시에 그는 한 걸음을 앞으로 나섰다.
불과 한 걸음을 나섰을 뿐인데, 그의 신형은 마치 허깨비가 솟아나듯 찰나간에 유성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곤 수중의 섭선을 들어 유성의 가슴을 찔러왔다.
"이형환위(移形換位)로군!"
유성이 놀란 외침을 토해냈다.
이형환위는 신형을 움직여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아주 간단한 의미다.
하지만 그것이 신법 중에서 터득하기 어려운 상승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그 움직임이 찰나간에 일어난다는 데 있었다.
이형환위를 제대로 전개하는 고수라면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었다.
유성의 눈에 일순 긴장이 깃들었다.
찰나간에 적의 일격은 이미 유성의 가슴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놀란 외침을 발하긴 했으되, 유성의 검도 이미 기다렸다는 듯이 마주 찔러간 다음이다.
어둠 속에서 검광이 번갯불처럼 번뜩였다.
섭선과 검이 마주한다면 섭선이 불리할 것은 자명하다.
아무리 팔이 길다고 하더라도 같이 찌른다면 섭선이 닿기 전에 검이 먼저 상대를 찌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촌강(一寸强)이라 하여 한 치라도 더 긴 무기는 유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굳이 짧은 병기를 쓴다는 것은 그만한 자신이 있다는 의미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졸지에 유성의 검에 뛰쳐든 꼴이 된 금의인에게서는 전혀 당황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땅!
섭선을 슬쩍 흔들어 검신을 쳐냄과 동시에 그의 섭선은 이미 유성의 가슴을 치고 있었다.
말로야 복잡하지만 실제로 그 속도는 전광석화와도 같아 금의인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에 곧추세운 그의 섭선은 이미 유성의
가슴을 찌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법인걸!"
유성이 놀라 소리쳤다.
찰나, 그는 왼발에 중심을 둔 채로 벌렁 뒤로 넘어졌다.
왼발에 중심을 둔지라 그의 신형은 피잉- 왼쪽으로 돌면서 검은 쓸듯이 상대의 다리를 노리게 되었다.
그 속도는 불꽃이 튀는 듯했다.
"제법이군!"
금의인의 눈에서 처음으로 놀란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여전히 침착하기 이를 데 없어서 한쪽 발을 슬쩍 들어 오히려 검을 걷어차려고 하면서 수중의 섭선을
쫙! 펼쳤다. 삼엄한 기세가 숨 막히게 뿜어져 나왔다. 그의 눈에서 살기가 드러났다.
그때 한효월이 소리쳤다.
"물러나거라. 네 상대가 아니다!"
말과 함께 유성은 땅을 짚고서 튕기듯이 뒤로 물러났다.
물러난 유성이 몸을 세운 곳은 한효월의 뒤쪽, 은연중에 침상의 신안금조 조건을 가로막는 형태다.
위급한 순간을 넘겼음에도 그의 안색은 조금 상기되었을 뿐 침착했다.
그 모습에 금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을 보면 그 주인을 안다 하였는데…… 당대무림 중에 이런 나이에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백의유협(白衣儒俠) 한효월뿐일
터, 귀하가 바로 한효월인가?"
미미한 웃음이 한효월의 얼굴에 떠올랐다.
"분에 넘치는 칭찬이군요. 귀공의 신분은?"
"금의위(錦衣衛)의 천호(千戶) 공자기(孔仔期)다."
상대가 안색을 굳히며 어조를 바꾸었다.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다. 하지만 금의위라니!
그 말을 듣자 한효월의 안색도 굳어졌다.
"금의위? 대내(大內)의 금의위에서 나오셨단 말씀이오?"
"그렇다."
금의인, 공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
한효월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금의위(錦衣衛)!
이 나라, 명을 세운 태조 주원장이 전제(專制) 권력을 잡기 위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조직이다.
겉으로야 경사를 지키는 경위(京衛) 중 하나이지만 다른 숙위(宿衛)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병형(兵刑)의 양권을 가진다는 점이었다.
다른 숙위들은 말 그대로 궁성을 지키는 역할만을 한다.
그러나 금의위는 초월적인 존재로서 시위(侍衛)만이 아니라 즙포(緝捕)·형옥(刑獄)을 통괄하여 그 권한은 무소불능에 가까웠다. 주원장은 바로 이러한 힘을 움직여 절대의 권력을 유지했으나 말년에 그 폐단을 자각하여 금의위를 잠시 폐지했었다.
하지만 새롭게 일어선 영락제 주체는 금의위를 다시금 부활시켰을 뿐 아니라, 그 힘을 더욱 강화하여 후일 동창(東廠)·서창(西廠)과 더불어 이 금의위는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조카를 밀어내고 황제에 오른 그이니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서였음은 불문가지.
그런데 그런 금의위가 돌연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천호라니?
천호라면 정오품(正五品)의 품계를 갖는다. 부천호라 할지라도 종오품, 당시 한림학사(翰林學士)가 정오품이었음을 생각한다면 그 위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 조정의 고관(高官)이 이 자리에 나타나다니?
더구나 그가 왜 신안금조 조건을 노린단 말인가…….
"알고서도 길을 막을 셈인가?"
금의인 공자기가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가 신분을 드러낸 이상,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다면 조정을 적으로 돌려야 한다는 명백한 선언이기도 한 것이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일면서 검은 그림자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음이 그의 등 너머로 보인다. 모두 신속하기 이를 데 없는 움직임, 그리고 제각기 손에는 검이 들려 어둠 속에서 삼엄한 빛을 뿌린다.
그들로 인해 일대는 삽시간에 살기로 가득 찼다.
얼핏 봐도 서른은 넘어 보이는 숫자.
"한 가지만 물어보겠소."
한효월이 입을 열었다.
"소생이 길을 비킨다면 귀공은 무엇을 할 작정이시오?"
그의 물음에 공자기는 미간을 찡그렸다.
세 살 먹은 어린아이라도 길을 비키라는 의미를 모를 리 없을 터이다. 그런데도 한효월이 그것을 묻는다면 거기에는 다른 뜻이 있음이 분명하기에.
"감히…… 금의위의 행사(行使)에 간섭을 하겠다는 것인가?"
공자기의 눈빛이 음산하게 빛났다.
한효월의 말은 얼핏 들으면 별게 아닌 듯하지만 실제로는 당신이 정말 금의위에서 나왔다면 왜 신안금조 조건을 찾는 것이냐? 라고 물어 간섭할 뜻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말속에는 당신이 과연 금의위인지 믿기 힘들다는 의심의 뜻도 포함되어 있음에랴.
"이분은 무림맹의 사람이오. 관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게다가 언제 숨이 끊어질지 모르는 위중한 상태. 명백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넘겨드릴 수 없음이 당연한 일이 아니오?"
"방자하군! 감히 본관에게 설명을 요구한단 말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수중의 섭선을 불쑥 찔러왔다. 섭선이 채 이르기도 전에 날카로운 경풍이 먼저 닥쳤다.
한효월은 그것을 보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섭선의 끝 부분이 날카로운 빛을 뿌리는 것을 보아 평범한 섭선이 아님은 분명할 것임에도 한효월은 별빛 같은 눈으로 상대의 눈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막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한효월은 머리를 저으며 침착히 말했다.
말과 함께 그는 손을 쳐내 섭선을 치려 하였다.
"흥!"
한효월이 손을 쓰자 공자기의 입에서 냉소성이 터져 나왔다. 거기에 검광이 폭죽처럼 일더니 쨍쨍! 하는 금속성이 연달아 터졌다.
…….
그리곤 찾아온 정적.
공자기는 놀란 빛으로 두어 걸음을 물러나 한효월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오른손에는 섭선이 쫙 펴져서 가슴을 가린다. 왼손에는 언제 뽑아 든 것인지 허리에 걸려 있던 검이 들려 삼엄한 검광을 흘리고 있었다.
"듣던 것보다 더 강하군……."
이윽고 공자기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한효월은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상태.
"귀하가 정녕, 금의위라면 굳이 맞상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하지만 끝내 안으로 들어와야겠다면……."
한효월이 말끝을 흐렸다.
"감히 역모(逆謀)에 가담하겠다는 뜻인가?"
공자기가 눈을 부릅뜨고 으르렁거렸다.
분을 참지 못한 기색이 역력한데 어지간한 한효월도 그 말에는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참지 못한 한효월이 입을 열어 물었다.
역모라니?
"역모는 구족구멸의 대죄다. 물러나지 않는다면 역도(逆徒)로 간주하여 체포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다!"
공자기가 으름장을 놓았다.
"조 당주가 역모와 관련이라도 있다는 것이오?"
"흥! 초민(草民)에게 본관이 하나하나를 설명해야 한다는 겐가? 무엇들 하는가? 모두 역도(逆徒)를 체포하라!"
갑자기 공자기가 소리쳤다.
순간, 창문이 부서지고 지붕이 뚫어져 나가면서 흑의를 걸친 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무슨 금의위가 시커먼 옷을 입고 다니나? 이 사기꾼들 같으니……. 아무 데나 대고 역모냐? 이 역적 놈들아!"
유성이 욕을 하면서 검을 휘둘렀다.
골골…….
소백이 왜 이렇게 시끄러우냐는 듯 인상을 쓰면서 침상에서 주위를 둘러보더니 벽 쪽으로 옮겨가서 다시 머리를 처박았다.
"물러나지 않는다면 사정을 보지 않을지도 모르오."
한효월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음성은 크지 않다. 하나 그가 손을 쳐들자 찰나지간에 실내로 뛰어든 세 명이 신음과 함께 쓰러졌다.
"과연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지녔나 보자……."
공자기가 노해 한 걸음을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그의 뒤에서 흑의검수 둘이 질풍처럼 한효월을 향해 튀어나왔다.
그때였다.
"손을 멈추시오."
침중한 음성이 바깥에서 들려왔다.
"용 선생(容先生)!"
나타난 사람을 본 유성이 반가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한 사람이 어둠 속에서 다가오고 있다.
흑의를 한 금의위들은 어느새 4, 50명이 넘게 늘어나 어둠을 메우고 있는데,
그는 그들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람이야말로 바로 보구회주 능자미의 주변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수신호위였다.
유성은 그녀와 같이 있었으니 자연히 그를 알고 있었다.
"용 시위(容侍衛)?"
그를 본 공자기가 놀란 빛을 떠올렸다.
"수하들을 물리시오."
용 선생이라 불린 흑의인이 다가오면서 말했다.
"당신이 어떻게?"
그의 모습을 확인한 공자기의 얼굴에 얼떨떨한 빛이 역력하다.
"설명은 나중에 하겠소. 어서 수하들을 물리시오."
"그럴 수는 없소. 본관은 명을 받고 수행하는 중이오."
"누가, 무슨 명령을 내렸기에 금의위가 이곳에 왔단 말이냐?"
문득 차가운 음성이 날아들었다.
느닷없이 들려온 음성.
그 주인공을 본 한효월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둠 속에서 또 한 사람의 수신호위를 대동하고 나타난 사람은 뜻밖에도 능자미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를 본 금의위 천호, 공자기.
그처럼 당당하던 그가 대경하여 바로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부복을 한 것이다.
"마마!"
그가 무릎을 꿇자 나머지 사람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처럼 살기등등하던 장내가 갑자기 전혀 다른 분위기로 돌변한 것이다.
"마, 마마라니?"
유성이 눈이 휘둥그레서 눈을 꿈벅거렸다.
그 놀람은 한효월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마마라니? 형수님이 황족(皇族)이었단 말인가?'
일거에 중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능자미는 미간을 찡그렸다.
"누가 보냈느냐고 물었다."
능자미의 물음에 공자기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능자미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말하지 못하겠다는 뜻이냐?"
"소관(小官)이 받은 명령은 이곳에서 한 사람을 압송해 가는 것뿐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의 음성은 굳었고, 그 말뜻은 명백했다.
"좋아……. 금의위가 눈에 뵈는 게 없다더니 감히 황상(皇上)까지 우습게 보는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공자기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관원(官員)에게 황제의 명을 거역한다는 말보다 두려운 말이 어디 있으랴.
더더구나 당시 황제의 권력은 가히 절대적.
절대권력이라 누구도 감히 그 권한에 반기를 들 수 없었다.
오죽하면 주원장 생전에 등청(登廳)을 하던 관리들은 아침에 죽음을 각오하고 나갔다가 저녁에 무사히 귀환하면 가족들과 손을
맞잡고 기뻐했다는 말이 전해질까.
그런 마당에 황제를 거역한다는 말이 나오니 아연실색(啞然失色)할밖에.
고개를 든 그의 눈에 능자미의 곁에 호위하듯 서 있는 용천성(龍天誠)과 또 한 사람이 보였다. 누군지 이름을 모른다.
하지만 그 또한 언젠가 대내(大內)의 어전시위(御殿侍衛) 용천성과 같은 반열(班列)에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 듯했다.
그 의미를 기억해 내게 되자 공자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어전시위는 금의위와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금의위 또한 황제의 경호를 맡는다.
그러나 어전시위는 한시라도 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황제의 수신호위인 것이다.
자연히 그들의 권세는 막강했고, 아무나 어전시위가 될 수도 없었다.
더구나 공자기가 아는 바에 따르면 저 유성검(流星劒) 용천성은 어전시위 중에서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다른 시위 한 사람과 같이 황제가 아닌 능자미를 호위하고 있음은…….
그때 공자기의 귓전에 전음이 들렸다.
'마마께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고 강호에 나오신 것이오. 본관(本官)을 보고도 짐작이 되지 않는단 말이오?'
용천성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맙소사!'
공자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부지간에 그는 머리를 땅에다 박았다.
"미처 알아뵙지 못하고……."
"흥!"
능자미가 냉소를 터뜨렸다.
흑의인들은 그사이에도 늘어나 얼핏 7, 80명은 되어 보였다. 그런 그들이 모두 그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두 시위의 호위를 받으며 그 가운데 우뚝 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당당 그 자체였다.
오래전부터 그러한 생활을 해본 사람만이 가진…….
『대풍운연의』 제7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