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首 봉신지서(封神之誓)
-의문은 깊어가다.
되살아난 망령(亡靈)의 저주는 끝이 없다.
한효월은 편전에서 나와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봉설란을 뒤따라 나온 것인데, 그 짧은 시간에 그녀는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고 새어 나온다.
사방에 늘어져 있는 것이 사람인데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어수선한 상황이니,
그녀의 행방을 찾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누굴 찾으십니까?"
개방의 옥면무영 호일랑이 한효월을 보고 다가왔다.
"혹시……."
"독고 맹주의 사모님이라면…… 보지 못했습니다."
한효월의 물음에 옥면무영 호일랑은 고개를 저었다.
"한번 찾아봐 주시겠소? 산을 내려가신 것은 아닌지……."
"알겠습니다."
옥면무영은 한효월을 향해 포권하고는 바람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의 얼굴도 창백했다.
그도 홍화장독의 중독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치고 중독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한효월과 요동권왕 등 몇 사람에 불과했다.
그만큼 사태는 어렵다 할 것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한효월은 청운궁 쪽으로 향했다.
따로 마련된 모옥 하나가 그 뒤쪽으로 있었다.
평소에는 청운궁을 돌보는 시자(侍者)들이 거처하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감천형과 독고경이 그곳에서 요상(療傷) 중이었다.
자리가 모자라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위치를 생각한 배려였다.
마침 좌백이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어떤가?"
"사형과 사매 모두 아직 혼수상태입니다."
"자네는?"
"전 괜찮습니다……!"
말하던 좌백이 흠칫했다.
한효월이 그의 손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무림고수에게 있어 손목을 잡힌다는 것은 반신을 제압당한다는 의미와 같다.
맥문(脈門)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상대가 한효월인지라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다.
"중독이 아직도 심하군?"
잠시 그의 맥을 살펴본 한효월이 미간을 찡그렸다.
좌백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소질(小姪)은 움직일 수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준 약은 먹었던가?"
"예."
"운기조식은?"
묻던 한효월은 머리를 저었다.
"약 기운이 아직 전신으로 퍼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조식을 할 여가를 얻지 못한 모양이군. 지금 당장 안으로 들어가 중독을
해소해야 한다."
"괜찮습니다. 소질은……."
"한 사람의 고수가 아쉬운 판인데 겸양할 때가 아니야! 독기가 남아 있다가 골수로 스며들게 되면 해독이 힘들어진다."
한효월의 음성은 단호했다.
"알겠습니다."
방으로 들어서자 나무 침상에 독고경이 눈을 감은 채로 누워 있다.
그리고 그 아래쪽 바닥에 감천형이 임시로 만든 듯한 들것에 누워 있음이 보인다.
그처럼 용 같고 범 같던 사내가 혼수상태에 빠져 정신조차 없음은 안타깝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먼저 앞쪽에 있던 감천형의 맥을 짚어본 한효월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어떻습니까?"
"내상이 심한 상태에서 산공독과 홍화장독까지 입어 독기가 이미 골수에 침입했다. 간단히 회복될 수 없을 것 같다……."
한효월의 침중한 음성에 좌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회복하기 어렵단 말씀입니까?"
"내가 쓴 제독단(除毒丹)은 독기의 만연을 억제하는 역할을 할 뿐, 해독을 시킬 수는 없다. 스스로 운기조차 할 수 없으니……
내상을 회복시키는 일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사숙의 힘으로도 안 된단 말입니까?"
좌백의 말에 한효월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아는 게 뭐가 있다고…… 스스로의 신병(身病)을 다스리기 위해 의서를 뒤적거린 것 외에……."
말을 하던 한효월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 말에 좌백이 놀란 빛으로 그를 바라봄을 직감한 까닭이다.
"신병이라니? 사숙께 무슨……."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이 자리에서 먼저 운기조식을 해라. 내가 돌봐주겠다. 시간을 아껴야 한다.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적은 다시 공격해 올 것이다."
"정말입니까?"
좌백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들 중에 모사(謀士)가 있다면 기회를 놓치지 않겠지……."
좌백은 운기조식에 들었다.
그의 중독은 다른 사람처럼 복합적인 것이 아니라 홍화장독에 의한 것이라 그나마 다스릴 가능성이 높았다.
한효월은 다시금 감천형의 맥을 짚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쉽지 않은 상세였다.
얼굴은 핏기 한 점 찾아보기 힘든 청람빛이다.
눌러 감은 두 눈은 철판을 내리닫은 듯하고, 꽉 다문 입술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역력하다.
그를 돌본 사람이 대강 응급 처치는 했겠지만 그 핏자국이 남아 있음은, 현재 무림맹의 처지를 보는 것 같았다.
그만큼 손이 모자라는 것이다.
"이처럼 무리를 했어야 했다는 건가……."
길게 탄식한 한효월은 빠르게 손을 놀려 감천형의 혈도를 짚기 시작했다.
마치 쏟아져 내려오는 급류를 타고 오르는 은어와 같이 그의 손가락이 빠른 속도로 감천형의 전신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감천형의 전신 혈도를 칠 때마다 감천형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감천형의 가슴을 치자, 왈칵! 감천형의 입에서 검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츠츠…….
검은 피는 바닥에 떨어지자 고약한 냄새를 피워 올렸다.
감천형의 가슴에 손을 얹고 그것을 바라보는 한효월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가지고 나왔던 단약들을 다 잃어버렸으니…… 손을 쓸 방법이 없군. 우선은 이렇게라도 해서 독기의 진행을 막아놓을 수밖에."
나직이 중얼거린 한효월은 잠시 호흡을 조절한 다음에 독고경에게로 갔다.
그녀 또한 혼수상태.
눈을 감은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차디차다.
그러고 보니 그 모습은 능자미와 매우 흡사했다. 하긴 딸이 어머니를 닮지 않으면 누구를 닮을 것인가.
생김만 닮은 것이 아니라, 그 기질 또한 그러한 듯하였다.
그녀의 손목을 손가락 끝으로 잡았다.
차가운 기운이 손끝을 통해 밀려든다. 마치 얼음을 잡은 것 같다.
'괴이하군…….'
잠시 그녀의 용태를 살핀 한효월의 안색이 묘하게 변한다.
정말 괴이했다.
예상대로면 그녀의 내상은 심각해야 했고, 중독 또한 깊어야 했다. 그런데 중독된 증상은 거의 찾기 힘들었다.
얼음 구덩이에 빠진 듯 차가운 전신의 형상은 흡사 시신을 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차가움에도 경직 현상은 일어나지 않아 더욱 괴이하였다.
"회복 중이란 건가?"
한효월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사숙……."
얼핏 들으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힘든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한효월은 흠칫 놀라 독고경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그녀의 푸른빛 입술이 떨리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신이 드느냐?"
한효월이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사숙…… 한 사숙……."
다시금 그녀의 입술이 미약한 파동을 일으키며 낮은 음성이 흘러나온다.
"그래, 나다. 정신이 드느냐?"
한효월은 힘주어 말했다.
그녀가 눈을 뜨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망연한 어떤 눈빛을 본 듯도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도, 눈을 뜨지도 않았다.
한효월은 다시 그녀의 맥을 짚었다.
느렸다.
여전히 아주 느리게 맥이 뛰고 있었고, 전신은 얼음처럼 차다. 이런 상태라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바라보았을 리는 없다.
아마 무의식 중에 자신을 불렀으리라.
한효월은 부지중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군……."
그녀의 맥을 여러모로 짚어본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얼굴은 아주 무거웠다. 아무래도 그녀의 어머니인 능자미를 만나봐야만 할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 허름한 옷차림은 그가 개방의 사람임을 의미한다.
그는 어둠 속에서 눈빛을 빛내면서 주위를 살피다 한효월이 있는 곳을 바라보곤 문득 씩, 웃었다.
하얀 이가 어둠 속에서 드러난다.
"좋아, 드디어 찾았군……."
그리고 그가 막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지금 뭘 하려는 게냐?"
누군가가 낮게 꾸짖는 음성이 들려왔다.
거지가 흠칫, 바라보자 옥면무영 호일랑이 인상을 굳힌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 하긴? 보면 몰라? 그를 만나려는 게지!"
음성에 날이 선다.
뜻밖에도 그것은 여자의 목소리다.
교호 심소옥, 그녀였다.
"너 지금 정신이 있는 거냐?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어디긴, 어디면 어때? 보고 싶은 사람 보겠다는데 누가 말려?"
말과 함께 심소옥은 대뜸 옥면무영 호일랑을 밀치고 한효월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비켜줘!"
심소옥은 도끼눈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옥면무영 호일랑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신법은 날랜 토끼와 같았지만 호일랑의 움직임은 더욱 빨랐던 것이다.
하긴 무영이란 호(號)가 그냥 붙은 것일 리가 있겠는가.
"철 좀 들어라. 여기가 네가 장난치는 곳인 줄 알아? 당장 돌아가!"
옥면무영 호일랑이 정색을 한 채로 낮게 꾸짖었다.
"뭘 보고 내가 장난친다는 거야?"
하지만 심소옥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따져 물었다.
"나 이거야 참……."
호일랑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혀를 찼다.
도무지 이 소사매는 가리는 게 없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한마디로 대책이 없는 것이다. 하고픈 것이면 뭐든 마음대로 하려 드니…….
"말해 봐! 내가 무슨 장난을 친단 건지? 동생이 오빠를 만나려는 게 잘못이야? 난 한 공자랑 남매지의를 맺은 몸이란 말……!"
허리에 척하니 손까지 얹고서 점점 더 기세가 당당하던 심소옥의 안색이 돌변했다.
옥면무영 호일랑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 끌고 가기 시작한 까닭이다.
설마 하니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터라 졸지에 맥문을 제압당한 그녀는 노해 발버둥쳤다.
"놔! 놓지 않으면 소리를……!"
하지만 그 소리도 이내 잦아들었다.
호일랑이 그녀의 아혈마저 봉해 버렸기 때문이다.
"제발 속 좀 썩이지 마라. 네가 내 사매만 아니었으면 벌써 무사당으로 보내서 혼내줬을 거야."
그녀를 개 끌듯 질질 끌고 가던 옥면무영은 멈칫, 했다.
한 사람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달빛에 검은빛 옷자락을 표표히 날리고 선 사람.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능자미였다.
그녀의 곁에는 늘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르는 호위 둘이 붙어 있었다.
"회주……."
옥면무영이 황급히 그녀를 향해 포권했다.
"내 딸아이가 있는 곳이 저기요?"
"맞습니다."
능자미는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그를 지나쳤다.
'북풍이 이는 것 같군…….'
그녀의 태도에 옥면무영은 내심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음 볼 때부터 그녀는 고오(高傲)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옆에만 가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심소옥이 그의 팔을 탁 치곤 바람처럼 내빼는 것이 아닌가!
설마 하니 아혈을 제압당한 상태에서 그녀가 몸을 빼낼 수 있을 것은 생각지 못했던지라 옥면무영 호일랑은 크게 당황했다.
"아옥(阿玉)!"
옥면무영 호일랑에게서 벗어난 심소옥은 뜻밖에도 대뜸 능자미의 앞으로 달려갔다.
게다가 그녀의 앞에서 꾸벅 절을 하더니…….
"개방 삼수 중 막내인 심소옥이라 합니다.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그리곤 대답도 듣지 않고 냉큼 앞서서 졸랑졸랑 걷기 시작했다.
'저놈이…….'
옥면무영 호일랑은 어이가 없어서 입만 벌리고 있을 따름이다.
이 마당에 그녀를 덮쳐서 끌고 올 수야 없는 일인 까닭이다.
그것을 익히 아는 심소옥은 앞서 걷다가 힐끔 호일랑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득의한 웃음이 가득했다. 뿐만 아니라, 낼름 혀까지 내밀어 보이니 옥면무영 호일랑은 당황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능자미의 앞이니 가서 끌고 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두고 보자니 무슨 말썽을 부릴 것인지 불안 초조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저 얼굴만 울그락푸르락할 뿐.
"가가! 손님이 오셨어요!"
심소옥은 기세 좋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음? 너도 여기 왔더냐?"
한효월은 느닷없는 그녀의 등장에 얼떨떨한 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럼요, 개방 일에 내가 빠지면 안 되죠! 하하…… 저랑 가가는 의남매지간이에요."
심소옥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능자미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나를 우습게 보지 말라는 묘한 어조였지만 능자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침상의 독고경에게로 다가갔다.
"잠시 그냥 두시지요. 제가 잠시 손을 썼습니다."
"……?"
능자미는 시선을 돌려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질녀의 일로 형수님을 뵙고자 하던 차였습니다."
능자미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그때, 좌백이 운기조식을 마치고 일어났다.
그의 창백했던 얼굴에는 조금 혈색이 돌고 있었다.
"사모님께서 오셨는데 미처 마중을 못했습니다."
"되었다. 지금 일일이 인사를 하고 말 처지이더냐. 말해 보시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한효월은 조금 굳은 안색이 되어 좌백을 보았다.
"이 아이와 같이 잠시 밖에 나가 있도록 하게. 밖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테니 이 아이는 그에게 맡기면 될 거네."
"가가!"
심소옥이 당황해 소리쳤다.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 아닌가.
밖에서는 심소옥이 툴툴거리면서 호일랑과 다투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오고 있다.
하지만 정작 방 안에서는 질식할 듯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
굳은 얼굴로 묵묵히 한효월의 말을 듣고 있던 능자미.
그녀는 희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독고경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미끄러뜨려서 독고경의 맥을 짚어본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
"맥이 아주 느리군……."
"좌 사질에게 듣기로 지난번 질녀를 치료하신 적이 있는 걸로 압니다. 당시 금제를 깼다는 말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금제였는지 혹 아십니까?"
"일종의 사악한 색혼지법(索魂之法)인 듯하지만 묘하게 얽혀서 명확하게 어떤 것인지 알 수는 없었소. 하나, 당시 이 몸이 본신의
연화선공(蓮花禪功)으로 그것을 해제하였는데……."
"그 연화선공이 혹 남해 관음초의 천수관음선공(千手觀音禪功)과 관련이 있습니까?"
한효월의 물음에 능자미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산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참으로 박식하시군. 그 사람은 만난 적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과찬의 말씀을."
가볍게 그녀의 말을 받아넘긴 한효월은 굳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질녀의 상태는 소생도 이미 한번 본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소생도 색혼지법으로 누군가가 질녀를 조종하려 한다고 느껴 그것을
완전히 해체하지는 않았었습니다. 다만 금제를 가하여 그자가 질녀를 완전히 장악할 수 없도록 해두기만 했었습니다."
"왜 해제하지 않고?"
"그녀에게 가해진 금제가 상당히 복잡하여 단시간에 해제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과연 누가 무엇 때문에 그녀에게 그런 금제를
가했는지를 명확하게 알아봐야만 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말을 하던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데…… 정작 흉수는 알아내지 못하고, 형수님의 불문신공에 제가 베풀어두었던 보호막이 깨져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
능자미의 눈에 해연히 놀란 빛이 떠오른다.
"그보다 더 큰일은, 그로 인해 잠복해 있던 어떤 마공대법이 발동하기 시작한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다면, 그녀의 무공은
이제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한효월의 음성이 무겁게 방 안을 울렸다.
"무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 거라니?"
능자미는 얼떨떨한 빛으로 죽은 듯 늘어져 있는 독고경을 바라보았다. 움직이기는커녕, 정신조차 없는 그녀인데 무슨 소리란 말인가.
"혹시 명옥대법(冥玉大法)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명옥……."
중얼거리던 능자미의 안색이 돌변했다.
"설마 마교의 명옥대법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바로 그 명옥대법입니다."
"무슨 소리예요? 그럼 경아가 걸린 사법(邪法)이 명옥대법이란 말이오? 그런 말도 안 되는…… 명옥대법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마교의 호교대법(護敎大法) 가운데 하나인 걸로 기억하는데 어떻게 경아에게 그런……."
"사질녀의 자질이 특별납니다. 제 짐작이 맞다면 형수님께서는 사질녀와 몇 년을 같이 보내셨을 텐데, 전혀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능자미의 안색이 다시 변했다.
"경아와 내가 같이 지낸 것을 어떻게 아시오? 그것은 아무도…… 심지어 경아마저도 모르는 일인데."
"사형께서는 결전(決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후일을 위해 사질녀를 맹주부에서 떠나 있게 했다면 누군가 믿을 만한 사람이
있는 곳으로 보내려 했겠지요. 좀 전 형수님의 무공이 관음초와 관련이 있음을 보고 그래서 사질녀를 그곳으로 보냈구나라고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질녀가 형수님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면, 곁에 두고도 친모이심을 내색하지 않으셨기 때문이겠지요.."
한효월의 조용한 추론(推論)에 능자미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길래 믿지 않았더니 정말이로구나!'
그녀는 한효월을 다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었다.
그녀는 한순간의 오해로 자신의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갔고, 그 길로 남해에 투신하여 속세를 등졌었다.
남해 관음초의 절진 신니는 바로 그녀의 사자였다.
남편인 건곤무적 독고해가 딸을 데려와 사자인 절진 신니에게 맡기고 갈 때에도 그녀는 내다보지 않았었다.
후일 다시 한 번 찾아왔을 때에도 그를 만나보지 않았고, 후에 그가 남기고 간 서찰을 보고는 그 내용에 어이없어했었다.
그런 그녀의 오만하고 차가운 성품은 그녀의 출신 내력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으나 당금 천하에서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런 그녀인지라, 바로 곁에 딸이 있음을 알면서도 이따금 먼발치로 그녀의 삶을 지켜볼 뿐 내가 바로 네 어미이노라. 나서지
않았었다.
독고경도 그런 어머니를 빼닮은 고오(高傲)한 성품이다.
사숙이 곁에 수도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살갑게 가서 어리광을 부린 적도 없이 그저 서로의 존재만을 알고 지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마치 보고 있었다는 듯이 말 몇 마디로 추론해 내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독고경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 보였다.
얼핏 보면 얼음으로 빚은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 모습으로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듣건대 명옥대법이 일정 수위에 이르면 그때부터 본신의 무공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한다고 하더군요.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고
나날이 일신의 마공이 깊어져 거세무쌍(擧世無雙)의 힘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러한 성취를 위해서는 당연히 특별한 체질을 가져야
하는데, 아마도 사질녀가 그러한 체질인 것 같습니다."
한효월의 음성이 조용히, 그리고 무겁게 주위를 울렸다.
"제어할 수가 없단 말이오?"
"소생이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제어할 수가 없어 그냥 둔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겠지요. 독고경이 아니라, 명옥대법에 의해 완성된 명옥마녀(冥玉魔女)라는 존재로……."
"말도 안 돼……. 누가 우리 경아에게 이런 짓을!"
말하던 능자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을 뿜는다.
"설마 그 독부(毒婦)가 정말……."
"마교의 호교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절세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야만 합니다. 섣불리 단정하지 않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지난 근 반백 년 내로 마교의 흔적은 강호상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처럼 성정이 찬 능자미도 발을 굴렀다.
그녀도 어머니였다. 자식의 아픔 앞에서는 세상의 모든 다른 어머니와 같았다.
한효월은 답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지난날 사부인 경월선인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긴 하지만, 지나가는 말로 들었기에 그 해법이나 대처 방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 명옥마녀가 어떤 존재인지조차…….
"이제부터 그 일을 조사해 봐야겠지요.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중얼거리던 한효월이 문득 미간을 굳혔다.
기대에 찬 빛으로 능자미가 그를 바라보았다.
"저의 사부께서는 강호의 겁난을 막기 위해서 독고 사형을 세상에 내보냈다고 하셨습니다. 사형의 힘으로 어려울 것을
알면서도……. 그것 때문에 자신도 산을 떠난다고 말씀하셨는데, 만약 사부님의 말씀하신 존재가 제천교라면 사형이 나타난 다음에
구대문파가 사형을 시기하여 만들어낸 꼭두각시가 제천교라고 하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효월의 말에 능자미의 안색이 달라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역시 구대문파는 이용당한 게 아닌가 싶다는 것이지요. 아니면……."
"아니면?"
능자미가 한효월의 뒷말을 채근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사형이나 사부께서 쫓던 존재는 제천교가 아니라 다른 어떤 존재라면…… 우리는 아직 적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
능자미조차도 그만 입을 벌린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듣자니 너무도 엄청난 말이기에.
정작 싸울 상대는 나타나지도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저 막강한 제천교를 두고서 말인가!
"처음에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군요. 어쩌면 이 일의 인과(因果)는 생각보다 더욱 복잡한 것인지도……. 지금으로써는
무엇도 말할 수 없고, 나머지 일은 좀 더 조사를 해본 뒤라야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천교를 만든
것이 단순히 구대문파라고 생각하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형수님께서도 사태를 예의 주시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사형께서 공연히 대임(大任)을 형수님께 맡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한효월의 말에 능자미는 굳은 표정이 되었다.
깊은 의미가 담긴 말이기 때문이다.
"질녀의 상태는 형수님께서 살펴주십시오. 전 개방의 황 방주와 만나서 다시 몇 가지 의논할 일이 있어서……."
한효월이 막 나서려 할 때, 능자미가 입을 열었다.
"혹 유성이란 아이를 알고 있으시오?"
한효월은 흠칫, 그녀를 보았다.
"제가 데리고 있던 아입니다만."
"지금 나와 같이 있어요. 매우 영민한 아이더군요. 내 뒤를 쫓다가 수하들에게 잡혔어요. 한 공자의 시종인 것을 알고 잠시 안치해
두었다가 풀어주라고 이야기했으니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여기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그땐 형수님이 뉘신지를 몰라서……."
한효월은 그녀에게 포권해 보였다.
역시 괘상(卦象)대로 성아에게 흉한 일은 닥치지 않은 듯했다.
밖으로 나오자 심소옥은 아직도 옥면무영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가가!"
그를 보자 심소옥이 반색을 했다.
"방주는 어디 계시오?"
한효월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아는 척하고는 난감한 표정인 옥면무영 호일랑에게 물었다.
"본 방의 장로이신 청사개 부일, 부장로와 함께 계십니다."
"안내해 주겠소?"
* * *
청사개 부일(傅一)은 개방의 장로 중 한 사람.
하지만 그는 떠돌아다니길 좋아해서 강호상에서 그다지 명성이 높지 않다.
나이도 장로 중에서 제법 많아 칠순을 넘겨 팔순을 바라본다. 하긴 외호부터 평범하여 그는 별로 주목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개방에서 가장 독물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뱀과 같이 뒹굴면서 뱀에 흥미를 가지고 차츰 영역을 넓혀가다가 아예 독물에 파묻혀 살다시피 한 사람이 그인 까닭이다.
독물을 연구하고 수집하고, 그러기 위해서 그는 천하를 떠돌아다녔다.
반백의 봉두난발을 한 늙은 거지.
게다가 누덕누덕 기운 포대까지 메고 있으니 거리에서 보았다면 그저 그런 거지로 보아 넘겼을 모습.
하지만 자세히 보면 매부리코에 얄팍한 입술, 어딘지 강퍅한 인상에다 눈빛에 서린 정광(精光)은 그가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
그는 침상의 환자들을 심각한 표정으로 진찰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황엽이 서 있었고, 막 심소옥과 함께 들어선 한효월이 그 옆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처럼 막무가내인 심소옥도 황엽의 앞에서는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는 모양인지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허리를 굽히고 있던 청사개 부일이 이윽고 허리를 펴면서 황엽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침중해 보였다.
"단순히 홍화장독에 중독된 사람들은 해독이 가능할 것 같습네다만, 나머지는……."
"힘들다는 말씀이오?"
"그렇습네다. 앞서 쓴 독이 하도 지독하여 홍화장독과 섞이면서 해독이 불가능한 상태로 변해 버렸습네다. 아마도 의도적인
용독(用毒)으로 보입네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까지 될 수는 없었을 겝니다."
"해독이 전혀 불가능하단 말이오?"
황엽이 재차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독된 사람들은 구대문파의 정영들이다.
그들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정파무림은 심각한 전력의 손실을 받게 된다.
무림의 고수라는 것은 일조일석,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이 모두 힘을 쓸 수 없게 된다면 실로 심각한 것이다.
"이 방면으로 가장 뛰어난 사람은 역시 독왕(毒王)입네다. 그 외에 해독 방면이라면 세 사람 정도가 있을 수 있을 겝니다."
청사개 부일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천하에서 서너 명 정도가 해독을 시킬 수 있지만, 자신으로서는 힘들다는 의미였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한효월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지요, 한 공자."
"지금 하독한 수법으로 보아, 이 독을 쓴 사람이 독왕이거나, 아니면 그 계열 사람이라고 단정하실 수 있겠습니까?"
"단정할 수 있소."
청사개 부일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소리이고 확실하다는 의미다.
* * *
별빛이 차다.
어두운 하늘은 보석처럼 박힌 별들의 반짝임 속에서 드넓게 세상을 감싸고 있었다.
한효월과 황엽은 그 하늘 아래 우뚝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은 굳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이번 대회에 모인 군웅들의 숫자는 대략 7백여 명이고, 화산파의 사람들을 포함하여 전체 숫자는
천2백여 명에 이르는데, 낮의 참변으로 인해 죽은 사람이 3백 명이 넘고 부상자가 6백 명가량인 듯하오. 그 부상자들 중 2백 명
이상이 중상이거나 다시 살아나더라도 지난날의 힘을 회복할 수는 없을 것 같소. 나머지 사람들 또한 중독이 심하여 본 방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은 2백 명 정도인 듯한데, 그중 실제로 적과 싸울 만한 고수들은 아마 4, 50명도
되지 않을 것 같소. 화산파의 전력 손실은 참혹하여……."
황엽은 말을 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본 곳이 화산파였다.
이러한 타격을 회복하려면 몇십 년, 그 이상의 세월이 흐른다 할지라도 가능할런지 모를 일이었다.
인재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당장 사태 수습에 나서야 할 화산파의 장문인 진자양마저도 내상이 심한데다 중독이 심하여 꼼짝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군요……."
문득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냐는 듯 황엽이 한효월을 쳐다보았다.
"부상자들을 보자면, 하독(下毒)을 한 것도 그렇습니다만…… 전혀 사정을 보지 않았습니다."
말이 좀 이상함을 느낀 듯 한효월이 보충했다.
"그들의 목적이 무림을 발 아래 두고 군림을 하기 위함이라면 아예 씨를 말려 버릴 듯한 행태를 취할 것 같진 않아서요.
부상자들도 경상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살아나기 힘든 중상이지요. 잔인무도한 손속들……. 오늘 그들이 쓴 독도 어쩌면 해약이
없는 게 아닌가 걱정됩니다."
한효월의 말에 황엽이 미간을 찡그렸다.
"적을 일단 이기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설마 거기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오?"
"글쎄요……."
말끝을 흐린 한효월은 말을 돌렸다.
"어쨌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군웅들을 해독하는 일입니다."
"이미 사람을 풀었소."
황엽이 말했다.
"부장로가 말한 대로, 독왕이 제천교에 가담했는지 알아볼 겸해서 묘강으로 사람을 보냈고 그 외 나머지 세 사람을 찾도록 이미
지시를 내렸소. 그보다 문제는……."
황엽은 굳은 얼굴로 말을 계속했다.
"어떻게 하든 중독을 해소해야겠지만, 그동안 군웅들을 적의 손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요."
개방이 아무리 막강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힘에 겨운 일이었다.
적과 싸우는 것만이 아니라 무력한 군웅들을 지켜야 한다면…… 더구나 그들과 손을 잡았던 보구회가 구대문파의 배신에 치를
떨고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난 판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군웅들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방법을 강구하시지요. 내상이 안돈되면 해독도 쉬워질 겁니다."
말과 함께 한효월은 황엽을 바라보았다.
"좌 사질에게 일단 군웅들의 상처를 치료하도록 지시를 해두었습니다. 다행히 화산파에서 연단(練丹)을 하고 있어 각종 약초가
많더군요. 약을 만들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군웅들 중에도 의도에 조예 깊은 분들이 많고…… 다만 문제는
상처를 가장 빠른 시일 내에 낫게 해야 하는 점일 듯합니다."
"음……."
황엽은 잠시 한효월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었지만 한 공자의 의도(醫道)는 심상한 수준은 아닌 걸로 아는데, 왜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으시오?"
그 말에 한효월은 멈칫, 황엽을 보았다.
"……."
그가 말을 하지 않자 황엽은 신중한 어조로 다시 말하였다.
"한 공자가 지금 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소. 만약 한 공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강호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거요."
한효월은 미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황엽도 더 이상 말을 하긴 곤란했다.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고함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잇달아 들려왔다.
황엽이 미간을 찡그렸다.
"한 공자의 말대로 적이 공격해 왔구료."
방향을 가늠한 그가 말과 함께 몸을 날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말이 필요없다.
그들은 이미 이 상황에 대해서 논의했고, 그에 대비하여 매복까지 깔아둔 상태였던 것이다.
청운궁의 뒤쪽 산은 깎아지른 절벽이라 원숭이도 오르기 힘들다.
하지만 경공이 뛰어난 고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구나 그것이 소수라면 산 위로 오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단 거기에 오르면 청운궁을 굽어볼 수가 있었다.
대저 명당(明堂)이라 이름할 때에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
그 자리가 의지할 주산(主山)이 있어야 하며,
태음신을 상징하는 북현무(北玄武)인 그 주산이 옹위한 혈(穴)의 좌우로는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라고 불리는 바람을 막아줄 산자락이 필요하다.
그 앞쪽으로는 안산(案山)이라 불릴 작은 산이 있어 남주작(南朱雀)의 자리를 지킨다.
그러한 사가 자리하여 만들어진 명당의 뒤쪽으로는 그 뿌리라 할 수 있는 조산(祖山)이 있다.
가까운 쪽을 일러 근조(近祖)라 하며 좀 더 먼 곳에 있는 산을 중조(中祖),
그 전체를 아우르는 형태의 근본 줄기인 먼 산을 일러 태조(太祖)라 이름한다.
이 청운궁은 화산파의 주산인 현무정(玄武頂)에 위치하여 화산파가 자리한 평탄한 지역을 지켜주는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넓게 보면 그 자체가 또한 명당으로서 뒷산이 근조(近祖)의 역할을 해주는 절묘한 구조였다.
그 의미는 산의 생기(生氣)가 흘러 모이는 곳이라는 것. 산의 구조상 바람이 그 기운을 따라 분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만에 하나 누군가가 그러한 지형을 알아보고 산봉(山峰)에 올라 독을 풀어놓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저절로
청운궁으로 몰리게 마련이다. 물론 이것도 바람과 시간, 지형을 잘 판단할 능력이 있어야 하는 일이긴 했다.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소리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림자의 숫자는 일곱.
먹물처럼 검은 옷을 뒤집어쓴 그들은 비할 바 없이 은밀하고도 신속한 움직임으로 청운궁 뒤쪽 깎아지른 절벽 밑에 도달했다.
그리곤 그들 중 하나는 남고, 나머지가 절벽 위로 은밀히 날아 올라갔다.
남은 자는 눈을 번뜩이며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망을 보는 것이다.
"흑?!"
하지만 동료들이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린 그는 눈을 부릅떠야 했다.
한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 듯했다.
그러나 그를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그 순간, 상상하기 힘든 가공할 압력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찰나간에 심장이 으스러진 그는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칠공으로 피를 뿜으며 조용히 쓰러지고 말았다.
절벽 위로 오른 흑의인들은 셋이 남아 퇴로를 지키고 나머지 셋은 청운궁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의 끝으로 갔다.
어둠 속에 자리한 청운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숲과 산자락으로 인해 전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불을 밝히고 있는지라 그 모습은 눈에 잡힐 듯하였다.
"지옥을 보게 해주지……."
앞선 자가 낮게 중얼거렸다. 묘한 음색이었다.
옆의 수하가 들고 있던 포대를 건네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처절한 비명과 함께 그들은 옆으로 튕겨져 나가 버렸다.
"뭐, 뭐야?"
흑포인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앞에는 고대한 체구를 가진 갈의노인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빛이 횃불과 같이 형형하게 빛난다. 그 눈빛은 강렬하기 이를 데 없어서 태양 두 개가 떠오른 듯했다.
그 눈빛을 본 흑포인은 가슴이 섬뜩했다.
'대체 어떤 놈이기에 이런 공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상대하기 어려운 고수가 나타난 것을 안 흑포인은 눈알을 굴려 찰나간에 주위를 쓸어보았다.
좌우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포위가 된 것이다.
망을 보던 자들은 이미 그들과 싸우고 있었고 그의 좌우에 있던 호법 둘은 갈의노인의 일격에 피를 토하고 쓰러진 다음이었다.
뒤는 절벽이고 앞에는 추측불가의 능력을 가진 적.
다시 살펴보니 적은 갈의의 곱추노인이었다. 곱추라면 키가 작을 것인데 그렇지 않아 체구가 당당하기 그지없다.
"설마…… 권왕?"
그의 말아 쥔 주먹에서 가공할 기세가 일고 있음을 직감한 흑포인이 부지중에 신음을 흘렸다.
"으흐흐…… 쥐새끼 같은 놈이 노부를 알아보니 기특하군."
갈의노인, 요동권왕 막풍이 껄껄 천둥처럼 웃었다.
상대가 권왕임을 알아본 흑포인은 기가 질려 주춤 한 걸음 물러나면서 다급히 소리쳤다.
"비키지 않으면 이 포대를 풀어버리겠소. 크크크…… 그럼 나를 포함하여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게요."
"그런가?"
"그렇다! 만약 서툰 짓을 한다면 아예 이 포대를 이 산 아래로 던져 버리겠다. 그럼……!"
기세가 올라 소리치던 흑포인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한줄기 암경(暗勁)이 자신의 가슴을 눌렀기 때문이다.
어떻게 손을 쓸 시간도 없었다.
천지가 깜깜하면서 숨이 막히고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혼비백산 옆으로 몸을 날리려던 그는 그만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암경으로 찰나간에 그를 쓰러뜨리고 혈도를 제압해 버린 막풍은 코웃음 쳤다.
"감히 내 앞에서 흥정을 하려 들다니……."
그때, 장소성이 들리면서 그 앞으로 두 사람이 차례로 날아들었다.
한효월과 황엽이었다.
"나다!"
주위를 포위한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본 황엽이 소리쳤다.
매복을 한 사람은 대부분 그의 명을 받은 개방의 고수들이라 그의 외침에 바람처럼 물러났다.
그들과 대적했던 적은 이미 모두 쓰러진 다음이었다.
"벌써 다 끝내셨습니까?"
주위를 살펴본 한효월이 물었다.
"놈들이 너무 허약하군! 왜 이렇게 쥐새끼 같은 놈들만 보낸 것일까?"
요동권왕의 말에 옆에 즉사하여 쓰러져 있는 자들을 잠시 살펴본 황엽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들이 약한 게 아니라, 선배님께서 너무 강하신 겁니다. 제아무리 고수라고 할지라도 어찌 절대고수의 일격을 견뎌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들은 채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즉사했군요."
"놈들이 자칫 손을 쓰면 낭패라서 사정을 보지 않았지. 하지만 이놈은 우두머리라 남겨두었으니 문초하면 얻을 게 있을 게야."
요동권왕의 발 아래 쓰러진 흑포인은 작달막한 체구인데, 어딘지 모르게 생김새가 중원인이 아닌 듯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
말투도 조금은 이상했었던 것 같았다.
"이자는 아마 제천교 총단의 삼루 중 섭생루에 속한 자일 겁니다. 처음 그들을 끌고 왔던 자가 부상을 입고 도주했으니 이자가
온 것이겠지요."
한효월이 그를 살펴보면서 말했다.
"만약 이자가 섭생루의 일원이라면 이자를 족치면 뭔가 얻어낼 수가 있겠군……."
황엽이 눈을 빛냈다.
그때, 요동권왕 막풍이 한효월을 돌아보았다.
"네 말대로 여기 있긴 했었다만, 대체 이놈들이 여기로 올 것을 어떻게 미리 알고 사람을 보낼 수가 있었더냐?"
그의 음성에는 의혹이 깃들어 있었다.
그 의혹은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적이 공격해 올 것은 짐작할 수야 있겠지만 언제 어디로 올 것까지 미리 알고 적을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기에.
"그러니까, 풍수(風水)라는 것인가? 산 아래가 명당이고 이곳이 그 모근(毛根)이 되는 형세라는……. 으음. 그런 것까지 알아볼
수 있는 재사(才士)가 놈들에게 있다는 것은 간단한 일은 아니로군. 그런데 만약 바람의 방향이 바뀐다면 어떻게 되는 게지?"
한효월의 설명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요동권왕이 다시 물었다.
"역풍이 불어도 순간적일 뿐입니다. 어차피 산세를 따라 흘러내리게 되지요. 평소라면 그냥 넘길 수 있지만 이곳은 지세가 너무
특이해서 누구라도 조금만 유심히 살펴본다면 가능할 걸로 생각되어 대비를 했던 겁니다."
한효월의 대답.
말은 쉽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님은 누구나 안다.
"소형제와 같은 신성(新星)이 무림에 새로 나타난 걸 보면, 아직 무림에 희망은 있는 것 같군."
요동권왕 막풍은 껄껄 웃으며 한효월의 어깨를 쳤다.
한효월은 담담히 웃으며 그의 말에 겸사의 표시를 했다.
그와는 유난히 인연이 많은 사람이 바로 요동권왕 막풍인 셈이었다.
요동권왕 막풍은 시신이 사라지는 것을 조사하러 중원으로 들어왔었다.
한효월을 만난 뒤, 계속 그 뒤를 추적하던 그는 마침내 적괴(賊魁)로 추정된 보구회를 찾아내게 되었다.
일차 격돌이 있은 후, 회주인 능자미를 만나 그 내막을 알게 된 그는 보구회가 뜻밖에도 독고해의 유지(遺志)에 의해서 조직된
것을 알고는 그 숭고한 정신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잠시간 그들에게 협조를 해주기로 하여 화산까지 이르러 있었다.
개방 또한 그러한 과정을 거쳐 여기에 이르렀으니, 만에 하나 그들이 한데 뭉쳐 있는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오늘 화산의 액겁은
참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있었을 터이다.
'저 젊은 친구가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놈들은 이미 뜻한 바를 이루었을는지도 모르지…….'
요동권왕 막풍은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면서 황엽과 함께 제압당한 자들을 문초하고 있는 한효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간 지켜본 바에 따르면 개방 방주 황엽 또한 출중했다.
하지만 한효월에게는 그와는 다른 묘한 어떤 것이 있었다.
뭐라고 말하기 힘든.
한효월이 굳은 얼굴로 요동권왕에게로 다가왔다.
"쉽게 입을 열 놈이 아니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독왕과 관계된 자는 틀림없는 듯합니다. 황 방주의 말씀으로는 그가 수련한 공력이 만화독장(萬花毒掌)인 것
같다고 하는군요."
"만화독장이라면……."
요동권왕 막풍이 미간을 찡그렸다.
만화독장이란 수많은 꽃잎이 땅에 떨어져 썩은 화독(花毒)을 이용하여 수련하는 장력이다. 독왕이 있는 묘강(苗疆)에서 수련할 수
있는 공력이기도 했다.
"그간 정황으로 보아 독왕은 어떤 경로이든, 제천교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골치 아픈 노릇이군! 그 노괴(老怪)가 무슨 마음으로……."
"제가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은데 괜찮을는지……."
한효월이 말끝을 흐리며 그를 보았다.
"뭔가?"
"다름이 아니라……."
한효월이 입을 열어 설명을 하자 요동권왕 막풍의 안색이 돌변했다.
"놈들과 마교가 관련되었다는 것이냐?"
"제 생각에는 제천교가 어떻게든 마교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중얼거린 그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그럴 수는 없을 텐데? 봉신(封神)의 서(誓)가 엄연한데 어떻게 마교가 움직일 수가 있단 말인가?"
그의 중얼거림에 한효월의 눈에 놀람과 의혹의 빛이 동시에 떠올랐다.
<……이 사부는 모종의 중대한 일 때문에 강호에 나간다.
만약 5년 이내에 내가 돌아오지 않고, 네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이미 강호의 겁난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거기에 얽힌 인과와 그로 인하여 파생된 당금 천하의 정세는 너무도 복잡하다. 그럼에도 이 사부는 봉신(封神)의 서약(誓約)에
의해 네게 아무것도 말해 줄 수가 없구나. 만에 하나라도 내가 봉신의 서약을 깨뜨린다면 천하는 즉각 회생 불능의 상황에 빠지고
말 터이니…….>
문득 한효월의 뇌리에 사부가 남긴 글이 스쳐 간다.
강호에 나온 이래, 봉신의 서약을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요동권왕 막풍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온 것이다.
한효월은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봉신의 서가 어떤 의미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질문에 요동권왕 막풍은 당황한 빛이 되었다.
"아,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 그래, 그래서 노부에게 뭘 부탁하려는 것인가?"
한효월은 그가 말머리를 돌리려는 것임을 알았다.
그와 같은 사람이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면 계속해서 물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기에 한효월은 내심 생각을 굴리곤 대답했다.
"정말 제천교가 마교와 상관이 있는지 알아봐 주시면 합니다. 대체 그들이 그녀에게 그런 대법을 베푼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런 복잡한 절차를 거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으음……."
막풍은 신음을 흘린다.
그의 얼굴은 참으로 복잡했다.
단순히 한효월의 부탁을 받은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뭔가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에 부딪쳐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 과하게 표현하자면 넋이 나갔다고 해도 좋을.
'대체 봉신의 서가 무엇이기에 저 노인이 저런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한효월의 눈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한다.
그 한마디의 단어에 어쩌면 당금 천하의 형세를 풀 열쇠가 숨어 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문득 한효월은 자신의 가슴을 더듬었다.
사부가 남긴 금낭(錦囊)에 생각이 미친 까닭이다.
사부는 그에게 글을 남기면서 두 개의 금낭을 남겼었다.
그의 생사에 의문이 생기면 열어보라는 것과 너의 신세를 알게 되거든이라는 글과 함께.
그동안 모진 일을 많이 겪었지만 그 금낭들은 그가 금사(金絲)에 걸어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있어서 유실되지는 않았었다.
'내 신세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단 말인가?'
한효월이 내심 신음을 흘렸다.
사부에게 거두어져 고요한 삶을 살았다.
자신의 몸이 평범하지 않음을 자각하곤 배움에 정진하여 나름대로 성과를 얻었었다.
나이답지 않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기실 그 깨달음은 일종의 체념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의 삶이 오래 남지 않았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강호에 나온 것 또한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간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금낭이 오늘 막풍의 말로 인해 되살아난 것이다.
실로 큰 의미로써.
"혹…… 경월선인이란 분을 아십니까?"
"누구?"
의혹이 깃든 눈으로 요동권왕 막풍이 한효월을 보았다.
전부터 알던 이름을 들은 표정이 아니었다.
"제 사부님입니다. 물론, 돌아가신 독고 사형의 사부이시기도 하고, 그분께서도 봉신의 서약을 언급하신 적이 있어서……."
한효월의 말에 요동권왕 막풍의 얼굴이 돌변했다.
"네 사부가 말이냐?"
"그렇습니다."
…….
침묵이 흘렀다.
미간을 굳힌 채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요동권왕 막풍이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네 사부의 이름이 뭔지 알려줄 수 있겠느냐?"
"죄송합니다만, 저도 잘 모릅니다."
한효월의 답변에 요동권왕 막풍은 일순 어이없는 빛이 되었다.
"제자가 사부의 이름도 모른단 말이냐?"
"사부님께서는 평소 함자를 입에 담으신 적이 없습니다. 여쭤봐도 경월이라고 알고 있으란 말만 하실 뿐, 더 이상은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경월(鏡月)……. 경월이란 말은 거울 속에 비친 달인데? 알려주기가 싫었다는 것인가?"
막풍의 얼굴이 곤혹으로 물들었다.
거울 속에 비친 달은 달이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그 의미는 경월선인이란 이름 자체가 가공(架空)의 것일 수 있다는 것.
"어디 네 사부의 외모를 이야기해 봐라."
막풍의 채근에 한효월이 사부의 모습을 형용하자 막풍의 미간은 더욱 찡그려졌다.
"그가 아니란 말인가?"
"그가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한효월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아서였다.
찍찍!
묘한 울음소리와 함께 흰빛이 한효월을 향해 날아들었다.
"소백?"
한효월이 놀라 소리쳤다.
나타난 것은 뜻밖에도 작은 다람쥐처럼 생긴 유성이 데리고 다니는 소백이었다.
풍초(風貂)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놈은 유성이 없어짐과 동시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근일 중으로 유성이 이곳에 당도하리라더니…….
찍찍!
냉큼 한효월의 어깨에 올라온 소백은 눈을 꿈적이며 머리를 흔들었다.
"성아가 여기에 왔느냐?"
그 말에 소백은 찍, 하는 소리를 남기고 훌쩍 뛰어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았다. 찰나간에 소백의 모습은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먼저 실례를."
요동권왕과 황엽에게 포권을 해 보인 한효월은 소백을 따라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