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首 신룡재현(神龍再現)
-두 여인이 마주하다.
불길이 독장을 태우다.
펑펑!
잇달아 폭음이 터지는 가운데 사방으로 불꽃의 덩어리가 춤춘다.
가히 하늘에서 불의 비[火雨]가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다.
후두둑 후두둑…….
검은 안개를 태우는 불꽃이 우박처럼 사방을 날아 떨어지는 가운데 마치 그 속을 뚫고 나타나듯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별로 큰 체구는 아니다.
중년의 그는 손에 단봉을 들고 빛 바랜 회의를 입었다.
거지라고 부르기 어려운 차림이지만 그는 거지라는 신분으로서 당금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개방 황엽인가?"
충격으로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난 삼교주가 그를 노려보다가 물었다.
"귀하가 제천교의 세 번째 교주인가?"
각진 얼굴의 중년인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
그것은 그의 신분을 시인하는 것이기도 했으며, 그가 상대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음을 의미했다.
'개방이 비적과 같이 움직인단 말인가?'
삼교주의 얼굴이 내심 굳어졌다.
비적이 훼방을 놓을 것은 계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개방이 움직이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었다. 거기에 요동권왕까지 가세하다니…….
'대체 부천각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건가!'
삼교주는 내심 이를 갈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황엽이 그를 향해 성큼 한 걸음 다가섰던 것이다.
단순히 다가선 것이 아니었다.
황엽의 수중에 들린 단봉이 그를 노린다.
그런데 그 끝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그 미미한 움직임 한 수에 그의 전신이 노출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전신이 황엽의 손에 들린 단봉의 공제(控制) 하에 놓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황엽의 무공이 이런 정도였단 말인가?'
찰나간에 선기를 잃어버린 삼교주의 이마에 식은땀이 솟아났다.
고수의 대결에서 기선을 제압당한다는 것은 결정적인 의미였다. 자칫 잘못하면 제대로 손 한번 쓰지 못하고 쓰러질 수도 있었다.
황엽의 눈에서 신광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세가 발동하기 직전이라는 의미.
바로 그때였다.
"홍화독장을 태운 것이 넌가?"
날카로운 음성이 허공에서 들려왔다.
말과 함께 푸른 그림자가 유령과도 같이 황엽을 덮쳐 내렸다.
섭생루주가 공격해 온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차가운 웃음소리가 옆에서 들려오지 않는가.
"하하…… 그건 나에게 물어봄이 좋겠군."
비왕이 나타난 이래, 그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요동권왕에 이어 황엽이 나타날 때까지의 상황은 긴 듯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잇달아 일어난 일이었다.
그토록 급변하는 상황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섭생루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황엽의 출현도 갑작스러웠지만, 황엽을 공격하는 그의 뒤에서 들려온 음성은 더욱 갑작스러워서 섭생루주는 대경실색했다.
하나 그것도 찰나, 그의 신형이 빙글 도는가 싶은 순간에 그의 몸에서는 검푸른 폭풍이 일어 그 뒤를 쓸어버렸다.
마치 손에서 먹물이 쏟아져 나가는 듯한 광경이었다.
츠츠츠…….
가공스럽게도 그 검은 기운이 닿는 곳에 있던 초목들이 찰나간에 타 들어가고, 반 장 거리에 있던 석조물(石造物)이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공포스러운 위력이었다.
"무섭군……."
나타난 사람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는 놀랍게도 피하지 않고 덮쳐 오던 기세 그대로에서 손을 부챗살처럼 활짝 폈다.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치려는 것이다.
"켈켈켈…… 혈육지구로써 감히 독룡신무(毒龍神霧)에 맞서려 하다……!"
섭생루주의 말은 채 끝나지 못했다.
말을 끝맺기 전에 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의 독룡신무는 천하를 독보할 독공(毒功)이었다.
경지에 이르면 장세를 따라 검은 기운이 용트림하듯 뿜어 나간다.
그 냄새만으로도 사람을 중독시킬 수 있으며, 스치기만 하면 단숨에 전신이 녹아내린다.
오죽하면 돌 조각까지도 지글지글 끓어올랐을까!
그러한 위력이 있기에 탄천신화에 충격을 받은 독고해를 공격하여 그를 무력화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누구도 그 독공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힘으로, 정면으로 독룡신무에 맞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나타난 사람이 손을 활짝 펴자 그의 손에서는 다섯 줄기의 불칼[火劒]과도 같은 힘이 쏟아져 나와 마치 비수가 두부 속을
뚫고 들어가듯 독룡신무가 형성한 장세를 꿰뚫고 그 근원인 섭생루주의 손바닥까지 뚫어버렸다.
"쿠-와-아-악!"
섭생루주가 손목을 움켜쥔 채로 펄쩍 뛰어 물러났다.
그리고 한줄기 푸른 바람처럼 그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놓고 만 것이다.
펑! 펑…….
불꽃은 마치 축포를 놓듯 그렇게 아직 허공 중에 남아 있는 홍화독장을 태우며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그는 백의를 펄럭이며 우뚝 서 있었다.
'저럴 수가?'
그 광경에 삼교주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섭생루주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단 일 초에 혼비백산, 도주해 버렸으니 그러한 능력이야말로 공포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단 한 수로 섭생루주를 줄행랑치게 만든 백의인은 불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우뚝 서서 별처럼 빛나는 눈빛으로 삼교주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 가공할 위세를 보인 백의인의 나이는 불과 약관 정도?
마치 불꽃의 바다 속에 한 그루의 관옥(冠玉)이 솟아 있는 듯하다.
침착한 눈빛에 서린 것은 한 가닥 분노.
그를 보자 삼교주는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아무리 설마…….'
삼교주는 머리를 저었다.
한 사람을 떠올렸지만 그가 이러한 위력을 보일 수 있음을 믿을 수 없었기에.
찰나였다.
"으악!"
폭음과 함께 참담한 비명 한소리가 들려왔다.
천추성주가 요동권왕 막풍의 일격에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너무도 급박히 돌아가는 상황에 삼교주와 섭생루주가 손을 놓자 홀로 요동권왕을 상대하게 된 천추성주가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사방에서 함성이 커졌다.
홍화독장이 불타 사라지면서 개방의 고수들과 비적, 보구회의 고수들이 밀려들었다.
"후퇴!"
짤막한 외침.
동시에 삼교주는 황엽에게 반격을 가하기 위해 끌어 모았던 힘으로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펑펑!
사방에서 다시금 안개가 피어 올랐다.
예의 검은 안개였지만 사방으로 날아가 불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이 워낙 세차 전처럼 눈앞도 보기 힘든 상태는 아니었다.
그것과 함께 제천교의 고수들이 썰물 빠지듯 일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상황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는 듯하였다.
그처럼 참혹하고, 지루하고, 절망적이었던 화산의 참극은.
시작에 비해 너무도 싱거운 끝이었지만 화산파가 입은 피해, 구대문파가 입은 피해는 사실상 괴멸(壞滅)이라고 불려도 좋을 만했다.
가뜩이나 제천교가 공격하면서 여기저기에다 사정없이 불을 질렀었다.
그런데 그들이 펼친 홍화독장을 처리하기 위해 불을 놓자, 그 불꽃은 홍화독장을 태우면서 사방으로 번져 화산파 곳곳에 불이 붙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렇게 화산파는 화마(火魔)에 잠겨 침몰하고 있었다.
* * *
화산을, 화산파를 뒤덮었던 검은 구름은 걷혔다.
그 구름을 걷은 것은 거대한 불길. 화산은 그 불길에 휘감겨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한효월은 주위를 둘러보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전멸은 면했다 할지라도 횡액을 피한 사람들 또한 그 몰골은 차마 형용키 어려운 지경이었다.
구대문파의 영명(英名)은 오늘로써 황하의 흙탕물 속에 떠내려가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제천교의 고수들이 후퇴하는 곳으로부터 싸움 소리와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개방과 보구회의 매복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한효월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그들을 쫓기보다 이곳이 더 급하기 때문이다.
중간에서 차질만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늦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하나 이제 와서 그런 한탄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주위를 둘러보던 한효월은 땅바닥에 널브러진 감천형의 모습을 발견하고 경동한다.
"감 사질!"
짧은 부름과 함께 그는 허공을 훌쩍 가로질러 감천형을 부축했다.
"으윽……."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감천형이 그를 본다.
그를 부축함과 동시에 한효월이 그의 대혈 몇 군데를 짚어 요상지법(療傷之法)을 시전한 까닭이다.
"오셨습니까……."
힘없는 음성이 감천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괜찮은가?"
"사, 사부……."
그는 안간힘을 써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는 정신을 놓았다. 한효월을 발견한 순간, 버텨왔던 정신이 무너진 것이다.
그의 손길이 가리켰던 곳에는 불길을 등지고서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가슴에 검을 박은 채로 우뚝 선 그가 누군지 한효월은 알지 못했지만 그가 누군지 짐작해 낼 수가 있었다.
그가 이렇게, 이런 모습으로 이 자리에 나타날 것임은 정말 뜻밖이었으되.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파랗게 질린 사람 하나가 있다.
봉설란.
그녀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전신을 격동으로 떨면서 그를 본 채로 굳어져 있음을 한효월은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정말 당신이……."
그녀가 입술을 떨면서 입을 열었다.
그때, 차갑기 이를 데 없는 코웃음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흥!"
* * *
한효월은 대명에 앞서 소림사를 떠났다.
대명 또한 그의 뒤를 따랐지만 부상을 당한 몸인지라 같이 움직이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게다가 한효월을 더욱 초조하게 한 것이 잠시 짚어본 천기(天機).
그가 짚어본 천기의 의미는 미명(未明)이었다.
미명이란 아직 아침이 되지 않았다는 것.
아침이 밝아오면 희망이 있다. 하지만 아침이 밝을 때까지 버틸 수 없다면 영원히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할 수 없을 터였다.
그것은 주역(周易)의 천지비(天地否)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비(否)는 막힌다는 뜻이다.
양기는 위에 있어 내려오지 못하고 음기는 아래에 있어서 위로 올라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음양이 교화(交和)하지 못하고 하늘과 땅이 따로 존재한다. 그러하기에 부가 아닌 비[否]라고 읽는다.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한다면 흉(凶)이 변하여 길(吉)이 되거나 화(禍)를 면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였다.
자칫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미명…….
아침이 되기까지만!
한효월은 그러한 마음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가 전력으로 추운축전(追雲逐電)의 경공을 전개하자 대회가 열리기 전날 새벽 안개에 덮인 화산 경내에 들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대회가 하루 전에 열리게 된 것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촉(蜀)의 길은 험하기로 이름 높다.
오죽하면 일부당관(一夫當關)이면 만부막개(萬夫莫開)라고 하여 한 사람이 지키면 만 명이라도 그 관문을 열 수 없다고 하였을까.
하긴 만 명이 달려들고자 한들, 갈 수 있는 길이 좁아 한 사람만 겨우 지날 수 있다면 만 명의 대군이 무슨 소용이랴.
그런 길을 지나기 위해서 깎아지른 절벽에 길을 덧대어 만드니, 그를 일러 잔도(棧道)라고 하였었다.
지금 한효월이 지나는 화산의 이 길도 그 잔도에 조금도 못지 않았다.
화산 또한 화산자고일조로(華山自古一條路)라고 하여 예로부터 화산에 오르는 길은 한 가닥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 것이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너비의 길.
그 길 아래는 깎아지른 낭떠러지. 안개가 시야를 가린 아래는 도무지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아래를 내려다보자니 그 자체로 어지러워 자칫 현기증을 일으켜 떨어져 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런 길이라 할지라도 한효월을 막을 수는 없다.
그의 능력이라면 발끝만 댈 수 있다면 어디든 지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날듯 화산의 아침 안개를 가로지른 그는 창룡령(蒼龍嶺)에 이르러 잠시 숨을 돌렸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달려온 터라 숨이 턱에 찬 상태. 이대로라면 누구를 만나도 제대로 힘을 쓰기 힘들 판이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의 눈빛이 굳어졌다.
어둠에 잠긴 산 저쪽 통천문 쪽 하늘에 붉은 빛이 보인 까닭이다.
"화광(火光)이다……."
잠시 그곳을 지켜본 한효월이 나직이 신음한다.
새벽 안개를 뚫고 보일 정도의 불빛이라면, 산불이 났거나 아니라면…….
"화산파가 있는 쪽……."
말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한효월의 신형은 훌쩍 날아올랐다.
세차게 바람을 가르면서 그의 신형이 화광이 충천하는 쪽으로 날기 시작했다.
'조심해요!'
경고가 그의 귀를 때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놀라는 한효월에게 미미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 경고에 각성하지 않았다면 바쁘게 지나느라 미처 경각하지 못했을런지도 모를 살기였다.
동시에.
쿠쿠- 쿠르릉!
진동이 일었다.
놀라 보니 머리 위에서 집채만한 바위가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산사태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한효월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순간, 그의 신형이 바람을 일으키면서 질풍처럼 앞으로 쏘아갔다.
쿠콰쾅! 쾅! 콰콰쾅…….
그의 등 뒤로 천지개벽의 굉음이 연달아 일었다.
돌 가루가 튀어 안개를 헤집었다. 거대한 낙석으로 인해 그의 뒤 10여 장가량의 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그것을 감상할 여유 따위는 없다.
앞으로 내달은 그를 기다리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어둠 속에서 소리도 없이 날아올랐다.
그들의 손에서 번뜩이는 검이 아니라면 움직임조차 느끼기 힘들 놀랍도록 신속한 운신(運身)이었다.
"천마각의 살수?"
지난번에 들었던 천마무영이라는 자들에 대한 기억이 스쳐 간다.
생각은 찰나, 그 순간에 한효월은 손가락을 튕겼다.
매서운 지풍이 쏟아져 나가 그를 공격하던 자의 가슴을 쳤다.
답답한 신음과 함께 그자가 날아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산벽(山壁)에서 사람이 튀어나온다.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던, 잡초조차 자라기 힘겨워할 돌 바닥에서도 검이 솟구쳤다.
그리고 아침 안개 속에서 소리도 없이 흘러나오는 죽음의 손.
가히 은잠(隱潛)의 극치.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모르되, 앞으로 전진하는 한 그들의 공격은 끝이 없을 것 같다.
스팟!
그의 소매가 펄럭인다.
살수(殺手)의 검이 스치면서 팔뚝의 소매가 베어져 펄럭인다.
그 대가로 공격했던 살수는 한효월의 일장을 맞고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다. 처절한 비명을 남기고…….
그 비명은 산곡에 부딪쳐 메아리가 될 것 같지만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공격하면서도, 죽으면서도 아무런 말도 소리도 없었다.
그저 살기에 찬 눈빛뿐, 그것이 더욱 공포스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런 공격을 뚫고 한효월은 질풍처럼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지난날의 그였다면 그런 위력을 발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산벽을 박차면서 그곳을 벗어났다.
가히 필살의 진용으로 이루어진 그 함정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흐르는 안개.
침잠한 기운 속에서 아침을 밝히는 새소리마저 숨을 죽였다.
그 가운데 한효월은 조용히 섰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적의 손에서 빼앗은 한 자루 장검. 선혈로 붉은빛을 띤 그 검은 땅을 향해 늘어졌다.
그리고 그 끝에서 한 방울의 선혈이 땅으로 조용히 굴러 떨어졌다.
그런 그의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안개 속을 헤치고 나타난 사람은 복면을 했다. 복면 속의 차가운 눈빛만이 영롱하게 빛난다.
눈에 익은 그 모습은 요광성주의 것이었다.
"더 강해진 것 같군요……."
그녀가 그를 보면서 말했다.
"고맙소."
한효월이 그녀를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조금은 창백해 보이는 그의 얼굴. 웃음에 따라 조금 상기된 입술이 벌어지고 흰 이가 드러나 환하게 빛난다.
그에게 경고를 해준 사람은 그녀였다. 그렇기에 한효월은 그녀를 향해 고맙다고 사의를 표한 것이다.
그의 웃음을 본 그녀의 차가운 눈빛에 미미한 흔들림이 일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 먹어도 그의 저 웃음을 보면 가슴이 설렌다.
하지만 그 눈빛은 이내 다시금 굳어졌다.
"아무리 강해졌어도 당신 혼자서 상황을 돌이킬 수는 없어요. 돌아가요."
"어디로 말이오?"
한효월이 물었다.
아침 안개가 두 사람을 휘감고 있었다.
안개 속을 헤집고 햇살이 금빛 그물처럼 뿌려진다.
그 속에 선 요광성주는 한효월의 물음에 문득 말이 막혔다.
한효월은 무림맹을 위해서 세상에 나왔다. 아니, 공도(公道)를 위하여 세상에 나왔다고 함이 옳을 터이다. 그런데 그 자리를 잃어버리고서 과연 어디로 갈 수가 있을 것인가?
총명한 그녀는 그 말속에 담긴 뜻을 알아듣곤 말문이 막힌 것이다.
안개 속에서 침묵이 흐른다.
어디선가 새가 운다.
잠시 말을 잃었던 요광성주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것까지 내가 말할 순 없겠죠. 화산에는 이미 천라지망이 펼쳐졌어요. 본 교의 고수들은 당신을 포함, 비적까지 일망타진할 작정이에요. 누구도 그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없을 거예요. 살아서는……."
"총단의 고수들이 나온 거요?"
한효월의 물음에 요광성주는 흠칫했다.
"그래요. 섭생루의 루주까지 출동했어요."
한효월의 미간이 찡그려진다.
"섭생루라면, 독?"
"그래요. 설사 금강불괴라도 섭생루의 용독(用毒)……!"
말을 하던 요광성주의 눈에 경악이 차 올랐다.
느닷없이 한효월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채 피할 여유도 없이 그는 그녀의 왼쪽 어깨를 쳤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찰나간에 세 군데를 연달아 친 것이라 요광성주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일 장여 밖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졸지에 풀밭을 나뒹군 그녀의 모습은 낭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기혈이 울렁거려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이게 무슨……!"
이미 저만치 사라지고 있는 한효월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노해 소리쳤다. 그가 자신을 공격할 것은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라 채 손도 쓰지 못하고 당했던 것이다.
그때 그녀의 귓전에 한효월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그 정도면 적을 비호(庇護)했다는 의심은 받지 않을 수 있을 거요. 미안하오…….'
그의 음성이 멀어졌다.
"바보 같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그녀는 발을 굴렀다.
하지만 노해 날뛰자 기혈이 치밀어 올라 그녀는 입술을 물면서 그 자리에서 운기조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음을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눈빛은 참으로 차가웠다, 소름이 끼칠 만큼.
그리고 그로 인해 그녀가 받아야 할 처절함을 본인은 물론 그 누구도 아직은 상상치 못했다.
* * *
제천교는 지금까지 무림에 나타났던 어떤 세력들과도 달랐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힘만을 믿고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결코 무리를 하지 않았고, 상대를 공격하기 전에 늘 상대를 무력화시켜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
맹주부를 유린할 때에도 그러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건곤무적 독고해가 사라진 맹주부가 허술하다 할지라도 어찌 그처럼 허무하게 무너졌을 것인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거기에 사용된 것은 늘 독(毒)이었다.
중독이 된 사람은 속수무책, 그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화산파에 온 군웅들은 그 내부의 배반으로 인한 중독으로 힘을 쓰지 못했다. 그들의 역량이라면 제아무리 제천교라 할지라도 쉽게 볼 수 없었지만 중독이 된 지금의 그들은 허깨비와 같았다.
싸워보기도 전에 도마에 올려진 고기와 같은 신세.
제천교의 지벽계는 완벽했고, 그들은 구대문파뿐 아니라 그들에게 맞서는 자들 모두를 이번 기회에 일망타진하고자 했다.
개방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 집단 비적, 보구회(報仇會)까지를 이번 기회에 없애 버릴 수 있다면 누가 있어 제천교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인가. 천하에 방회(幇會)가 많다 한들, 현 무림에서 구대문파를 합한 것보다 강한 힘이 존재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그것을 위해서 제천교에서는 총단의 고수들까지 대거 출동시켰다.
섭생루와 강령루, 거기에 천마각의 살수들까지…….
한효월은 물론이고, 비적과 개방까지 화산에 나타날 수 있는 모든 적을 겨냥하고서 지벽계는 발동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완벽한 대비를 한다 할지라도 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늘 변수(變數)가 생기기 마련, 보구회와 개방이 같이 행동할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거기에 요동권왕이 가세할 것은 더 더욱 상상 밖의 일이었다.
게다가 한효월의 능력은 이미 그들의 예상을 뛰어 넘어버린 상태였다.
화산파의 외곽에 매복한 채로 홍화독장을 풀고 있던 섭생루의 고수들은 느닷없는 공격에 채 반항도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들을 기습한 사람의 공력이 그들로서는 상대하기 불가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외곽에서 매복한 채로 하독(下毒)하고 있던 자들을 쓰러뜨린 한효월은 즉시 불을 놓았다.
홍화독장의 상극(相剋)이 불임을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전권(戰圈)으로 뛰어든 한효월은 첫눈에 누구를 공격해야 할지를 알아보았다. 현재의 국면을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섭생루주를 처리해야만 했다. 하나 그 어느 누구도 단 일 초에 그를 패퇴시킬 수는 없다.
설사 요동권왕 막풍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알면서도 한효월은 거침없이 그에게 덮쳐 갔고 그가 닿는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독룡신무를 전개함을 보자 수인지력을 쳐냈다.
그러한 무공의 상극(相剋)이 바로 수인지력.
그 위력을 알지 못했던 섭생루주가 일거에 패퇴하여 혼비백산, 도주하면서 그 무서운 참극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남은 것은 중독된 사람들과 불타는 화산.
차가운 눈길.
검은 옷, 흑포로 전신을 휘감은 채 불길을 헤치며 나타난 그 사람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전과는 달리 복면을 쓰지 않았다. 맑은 얼굴에 세월이 몇 개의 금을 주름이라는 이름으로 그어놓았지만 원래의 미모를 훼손하지는 못했다. 서른을 넘긴 듯하지만 미모는 여전하다. 눈길만큼 얼굴 또한 차가워 얼음으로 조각한 듯함이 옥의 티다.
"사모님……."
그녀를 본 좌백이 나직이 신음을 흘린다.
그녀야말로 지난날 좌백이 만났던 그 흑의의 여인, 죽은 것으로 생각했던 사모였었다.
"당신은? 설마……!"
그녀를 본 봉설란의 전신에 격한 진동이 달려간다.
긴가민가하는 표정이었던 그 얼굴에 이어 떠오른 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경악(驚愕)! 그 놀람은 독고해를 발견했던 것에 조금도 못지 않아 그녀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흥!"
그녀의 놀란 얼굴을 보고 흑의여인은 다시 코웃음을 쳤다.
"저, 정말 당신…… 그럴 리가? 당신은 그때…… 그때 죽었을 텐데?"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본 봉설란은 귀신을 본 듯 주춤 뒤로 물러났다.
"내가 죽는 것을 보았던가?"
흑의여인은 불길이 넘실거리는 바람에 흑포를 휘날리면서 다가섰다.
"나, 나는…… 그때 당신이 죽었다는 말만…… 대체……."
봉설란은 극도의 혼란을 느낀 듯 무표정한 얼굴로 우뚝 서 있는 독고해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주춤거렸다.
그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어감을 보면서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던 봉설란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눈앞의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부지중에 머리를 저어대고 있었다.
하긴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죽었다던 사람 둘이 눈앞에 나타났다.
더구나 그중 한 사람은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 있던 바로 그 사람인 바에야.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 놀란 사람은 또 있었다.
바로 감천형을 부축한 한효월이었다.
'저 사람은…….'
그의 놀람 또한 당연했다.
그녀야말로 그가 이미 여러 차례 만나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용문석굴에서도 한 번 본 적이 있었고, 그 뒤에서 수차례에 걸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더더구나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녀가 봉황문의 습격을 받을 때였다.
바로 보구회의 회주라는 신분으로.
하지만 그보다 그녀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좌백이 중얼거린 사모라는 소리였다.
그 가운데 독고해는 무심한 표정으로 우뚝 서 있었다.
마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그는 그렇게 무심한 얼굴로 서 있었다.
콰콰콰콰아…….
한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불길에 휩싸인 전각 하나가 무너져 내린다.
불티가 사방으로 깃털처럼 흩어졌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판이라 불길을 잡을 인력 따위는 없었다. 한숨을 돌리고 정신 차려 주위를 돌아보니 불길이 번지지 않은 곳이 없어 손을 쓸 길이 없다.
너무도 참혹한 상태에 구대문파의 고수들은 망연자실(茫然自失), 할 말을 잃었고 그나마 정신을 차린 화산파의 고수들은 불길에 스러져 가는 기업을 보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불길을 등 뒤로 한 채로 독고해는 우뚝 서 있었다.
이제 모든 일을 다 한 듯 그저 그렇게 석상과 같이 묵묵히…….
흑포여인은 그런 독고해를 바라보았다.
얼음과 같던 그녀의 눈길이 그에게 닿자 처음으로 조금 부드러워지는 듯했다.
하지만 독고해의 모습이 정상이 아님을 본 그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대장을 모셔라."
암암리에 한숨을 몰아쉰 그녀가 명했다.
그러자 그녀를 호위하고 있던 흑의인 둘 중 하나가 독고해에게로 날아갔다.
"저희가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황엽이 그녀의 옆으로 나서면서 정중히 물었다.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도울 수 없는 일이니……."
그녀는 말끝을 흐리곤 뭔가 나직이 읊조렸다.
그러자 석상과 같이 묵묵히 서 있던 독고해가 문득 고개를 들고서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임을 보자 독고해는 문득 걸레가 된 흑포를 세차게 펄럭이면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직도 그의 움직임은 질풍과 같아 찰나간에 십여 장을 가로질러 그 자리에서 사라져 갔다.
"사부님!"
그가 바람처럼 자신을 스쳐 지나자 너무도 돌변한 상황에 넋을 놓고 있던 좌백이 다급히 소리쳤다.
하나 독고해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사라졌다.
자신의 딸이 그에게 안겨 빈사지경으로 늘어져 있음에도.
"사부님, 경아가 여기 있습니다! 사부님!!"
좌백이 발을 구르며 연달아 부르짖었다.
그러나 이미 숲 속으로 사라져 버린 독고해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많이 다쳤느냐?"
대신 그의 뒤에서 들려온 차가운 음성.
흑포여인, 좌백의 사모가 거기에 서 있었다.
"상세가 좀 중합니다……."
좌백이 엉거주춤 대꾸했다.
독고경의 얼굴은 백지장과 같았다.
진자양과의 일전에서 심한 상처를 입고서도 감천형이 취한 임시 조치 외에는 제대로 상세를 치료하지도 못해 기식이 엄엄했다.
그녀의 맥을 잡아본 흑포여인의 눈빛이 굳어졌다.
"분명히 금제를 해제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그녀는 독고경의 혈도를 급히 몇 군데 짚으면서 사나운 눈빛으로 봉설란을 쏘아보았다.
"경아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그녀의 다그침에 일순간 얼떨떨한 빛이었던 봉설란은 미간을 굳혔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무슨 짓이라니? 그 애는 간악한 구대문파의 내정(內情)을 알고는 참지 못하고 진자양, 저 도적을 공격하다가
상처를 입고 쓰러진 건데 내가 무슨 짓을 했다는 말인가요!"
그녀의 음성에 날이 섰다.
"진자양을?"
흑포여인이 멈칫하면서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은 채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진자양을 바라보았다.
그는 급히 달려온 제자 한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이제서야 겨우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
그는 갑자기 급박하게 변해가는 정세에 뭐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새롭게 나타난 이 여인이 누군지 그는 쉽게 알아보지도 못했다. 하나 눈이 마주치자 그의 얼굴에서도 경악의 빛이 솟구쳤다.
"설마 부인……?"
십수 년이 경과되면서 겨우 몇 번 본 사람의 얼굴을, 그것도 내원에 깊이 있다가 사라진 다른 사람의 부인을 기억하긴 어렵다.
그러나 몰랐던 사람일지라도 짐작을 할 수 있을 판에 그처럼 영민한 사람이 그녀를 기억해 내지 못할 리가 없다.
그때였다.
"노부가 잠시 봐도 되겠소?"
흑포여인의 뒤에서 걸걸한 음성이 들려왔다.
요동권왕 막풍이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에게 사의를 표한 여인은 좌백에게 말했다.
"선배께 경아를 보여드리도록 하거라."
그녀와 막풍은 이미 믿을 만한 사이가 된 듯하였다.
좌백이 막풍에게 경아를 넘겨주는 것을 보고 있는 흑포여인에게 딱딱히 굳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어떻게 된 건가요?"
봉설란이 창백히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뭐가 궁금한 거지?"
흑포여인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를…… 그의 시신을 빼돌린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던가요? 그래서 그 사람을 저렇게…… 그의 시신을 이처럼 욕보이다니!"
갑자기 봉설란의 어조가 높아졌다.
"욕보여? 항차 네가 무엇을 알기에 감히 그 따위 소리를 한단 말이냐?"
흑포여인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내가 뭘 모른단 건가요? 난 그 사람의 부인이에요!"
봉설란이 지지 않고 마주 소리쳤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독고해의 명실상부한 정실(正室)부인이었다.
"난, 난…… 그의 복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강호에 뛰어들었어요. 그런데 모르다니? 내가 모르는 게 뭐가 있는 거죠?
그렇군요. 당신이 살아 있음은 알지 못했군요! 그도 알고 있던 일인가요? 당신이 살아 있는 것을 그도 알고 나를 속인……."
"닥쳐라! 네 천한 입으로 감히 그분을 모욕하려는 게냐?"
흑포여인이 날카롭게 꾸짖었다.
부릅뜬 봉목에서는 차가운 빛이 비수처럼 뿜어진다.
그녀의 전신에 서린 기품은 오만하리만큼 고고(孤高)하였다.
사람을 쉽게 다가갈 수 없도록 하기도 했지만 또한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람을 부려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기풍(氣風)이기도
했다.
하나 봉설란도 지지 않았다.
"천하다니? 무슨 근거로 그 따위 소리를 하는 건가요?"
그녀는 눈을 치뜨고 흑포여인을 마주 쏘아보았다. 사납기는 하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잃지 않는 모습이다.
그녀가 상대하는 사람은 바로 독고해의 전처이기에.
그런 그녀의 모습을 어이없는 듯 바라보던 흑포여인이 차갑게 웃음을 흘렸다.
"좋다. 너의 가면을 벗길 때까지는 내가 참아주도록 하지."
"가면이라니……."
봉설란이 입술을 깨물었다.
두 여인의 모습은 양날이 선 칼과 같이 서로 조금도 양보를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때다.
"죄송합니다만……."
그녀들 사이에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개방주 황엽이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가볍게 포권을 해 보이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조금 늦어서 사태가 매우 심각합니다. 두 분께선 말씀을 잠시 후에 나누시기로 하고 우선은 사태를 수습하시는 게……."
"그렇게 하지요."
흑포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태를 수습한다고? 무슨 사태?"
봉설란이 깔깔 미친 듯이 웃어대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태도에 흑포여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한 겹 얼음이 그녀의 얼굴에 깔리는 듯했다.
그녀뿐 아니라, 황엽의 안색도 굳어졌다. 너무 심한 것이다.
"구대문파의 고수들은 거의 모두가 중독되었고, 뒤이어 온 우리 개방도들도 상당수가 중독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화산파의 기업은
오늘의 이 일전으로 거의 붕괴 직전의 치명적인 피해를 당했습니다. 속히 중지(衆志)를 모아서 사태를 수습해야만 합니다."
황엽이 침착한 어조로 설명을 했다.
말이야 설명이지만 그 말뜻이야 봉설란의 태도를 질책함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녀가 독고해의 부인이 아니었다면 설명 따위를 할 시간이 없는 지금이었고, 개방주라는 그의 신분으로 그런 설명이나 하고 있을
상황도 아니었다.
사방에서 상처 입은 자들의 신음 소리가 진동했고, 중독되어 쓰러진 사람들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판인 것이다.
뿐인가?
불길은 하늘을 태울 듯 치솟고 있었고, 화산을 덮었던 홍화장의 독기는 그로 인해서 대부분 스러졌다지만 여독(餘毒)만 하더라도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독기에 스친 초목들이 천천히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그처럼 싱싱하던 나무에 달려 있던 잎들이 변색되고 말라비틀어져서 눈 오듯 쏟아져 내리는 광경은 이곳이 죽음의 땅으로 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누구를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사태를 수습한다는 건가요?"
하지만 봉설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코웃음 쳤다.
"부인!"
황엽이 정중히 그녀를 불렀다.
"설마, 설마 이 위선자들을, 이 간악한 도배(徒輩)들을 위해서 사태를 수습하겠다는 건가요? 이 인면수심의 악도(惡徒)들을 위해서? 은혜를 원수로 갚은 이자들을 위해서?"
봉설란이 다시금 날카롭게 웃었다.
"그럴 순 없죠! 그건 용납할 수 없어요. 소림사가 불타고 무당의 삼청궁(三淸宮) 주춧돌이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걸 보기 전에는……."
그녀가 완강하게 고개를 저어댔다.
부릅뜬 눈에 핏발이 섰고 즈려 문 입술에서 피가 맺혀 흘러내린다.
필유곡절(必有曲折)!
제정신이 아닌 다음에야 이 마당에 저렇듯 심하게 할 수가.
황엽과 흑포여인, 보구회주, 그리고 요동권왕 막풍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졌다. 그처럼 매도(罵倒)를 당하면서도 진자양이 참혹한 낯을 할 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까지……."
마침내 황엽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들은 내부의 상황을 알지 못했고, 구대문파의 음모는 더 더욱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제가 한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때 침착한 음성이 옆에서 들려왔다.
한효월이었다.
"황 방주,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효월은 황엽에게 포권을 해 보였다.
얼핏 이런 상황에서 보이기 힘든 한가로운 태도였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해서 분위기를 자신에게 잡아끄는 계산이 거기 깃들어 있었다.
"정말 그렇소이다. 그날 이후 정말 많이 찾았는데 계속해서 길이 어긋나서 만나뵙질 못했구료."
황엽도 반가운 얼굴로 포권을 해 보였다.
그 또한 한효월이 뭔가 뜻이 있어 나선 것임을 짐작하고는 말을 받는 것이다.
"몇 차례 뵌 적이 있었는데 알아뵙질 못했었군요."
한효월이 보구회주에게 말을 건넨다.
"……."
그의 이런 한가로운 태도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족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바보가 없기에.
그러하기에 보구회주는 의혹이 깃든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얼핏 보면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효월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는 그녀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시선을 돌린 한효월은 그제서야 봉설란을 바라본다.
"왜 그렇듯 분노하시는지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게 나머지를 맡겨주실 수 없겠습니까?"
"안다고?"
봉설란이 흠칫, 놀라 그를 보았다.
"예, 압니다. 혜도 선사를 제압할 때 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일을 조사하느라 예상보다 여기에 늦게 도착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 말은 당연히 충격이었으리라.
봉설란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녀는 경악한 표정으로 한효월을 쳐다보았다.
"그 자리에? 거기 있었단 말인가요?"
"예. 나타날 자리가 아닌 듯하여……."
"……."
봉설란은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한효월을 쳐다보고 있을 뿐……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이었다.
한효월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미 발언권은 그에게 넘어와 있는 것이다.
그는 시선을 돌려 황엽을 바라보았다.
"일단 이 자리에서 사람들을 옮겨야 합니다. 홍화장독은 침투하는 습성이 있어서 대부분을 불태웠지만 사방에 독기가 남아 있을
겁니다."
한효월의 말은 틀리지 않는 듯했다.
불길이 사방에서 아직 맹위를 떨치고 있고 불티가 이리저리 날고 있는 가운데, 초목들이 급속도로 푸르름을 잃어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진 나뭇잎들이 힘없이 떨어져 내린다.
불길로 인해 일어난 뜨거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그 나뭇잎들이 비 오듯 날아다니고 있었다.
누가 그 광경을 보고 침착할 수 있을 것인가.
"이곳 전체가 오염되었단 말씀이오?"
황엽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것은 실로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말과 함께 한효월은 진자양에게로 다가갔다.
"장문인,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진자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숨이 붙어 있는 한은……."
그 간단한 말에는 수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급히 달려온 제자의 부축을 받은 채 겨우 일어나 있던 그는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바로잡았다.
창백한 얼굴이요, 피폐한 몰골이지만 그 몸짓 하나만으로도 그는 당당해 보였다.
"사람들을 일단 이 자리에서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
한효월이 다시 물었다.
진자양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에서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성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처럼 활기 차던 화산이, 무림맹이 단 한 순간에 이 모양이 될 줄이야 누가 짐작이라도 했을 것인가.
참혹한 얼굴로 진자양은 입술을 즈려 물었다.
핏물이 그 입술에서 배어 나와 턱을 타고 흘러내린다.
"후전(後殿)으로 갑시다. 좁기는 하지만 산등성이라 바람이 내리불고 있으니 독기의 침범을 받지 않았을 것이고 불길도 미치지
않아 우선 쉴 수는 있을 것이오."
진자양이 침통히 말했다.
"장문인께서 안내를 명해주십시오. 방주, 부탁드리겠습니다."
한효월이 진자양에게서 황엽에게로 말을 돌렸다.
모든 사람들이 다시 한 번 그를 바라보았다.
아주 간단히, 그는 어려웠던 상황을 풀어냈다. 그리곤 상황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간 것이다.
겉보기야 쉽다.
하지만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 이런 결과를 끌어내기 어렵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말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세상사에는 흐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한효월은 바로 그러한 흐름을 절묘히 이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말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