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首 건곤무적(乾坤無敵)
-죽음에서 돌아오다.
천지가 진동(震動)하니 그 이름 불멸이라.
감천형은 전력을 다했다.
어제까지, 아니, 바로 조금 전까지도 그처럼 믿었던 자들의 치떨리는 배신을 알고서도 그를 위해 적을 가로막았다. 그럴 수밖에 없기에, 죽여도 그의 손으로 죽여야 했던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
하지만 적은 강했다.
거기에 그는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은 데다가 중독까지 당한 상태였다. 언제 쓰러지느냐가 문제였을 뿐, 패배는 예정되어 있었다. 이만큼 버틴 것도 지난날의 그가 아니기에 가능했었다. 사제가 사매를 데리고 무사히 벗어나는 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그의 작은 소망일 뿐.
그러나 쓰러지면서 본 상황은 절망이었다.
사제마저도 이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았기에.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자신의 앞에 홀연히 나타난 흑포복면인을 보는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그가 다시 이 자리에 나타나다니…….
그의 가공할 신위 앞에 모든 것이 허물어졌다.
누구도 그의 일격을 받아내지 못했다.
그처럼 당당했던 흑포노인, 지난날 백련교의 사대천왕 중 하나라는 그마저도 그를 보자 혼비백산, 뒤로 물러나기에 바빴다.
그런데 비왕이 나타났다는 흑포노인의 고함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회색 빛 옷을 걸친 자들. 그들의 움직임은 바람처럼 신속했다.
그중 앞선 자는 놀랍게도 어검비행을 하는 흑포복면인의 정면으로 덮쳐들었다. 그 얼굴은 무표정하여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두 눈에서 번뜩이는 것은 무서운 광기(狂氣)!
흑포복면인이 검을 휘둘러 그를 가리켰다.
번쩍!
번갯불 같은 검광이 회의인에게로 날아가 그를 쳤다.
검과 그와의 거리는 일 장여나 떨어져 있음에도 검기가 형체를 이루고 뻗어 나가서 그를 쳐버린 것이다.
쾅!
그 순간 믿기 힘들게도 회의인의 몸이 그대로 폭발했다.
"으악!"
"으아아……."
미처 피하지 못하고 3, 4장 방원 내에 있던 사람들이 그 폭발에 휘말려 죽어갔다.
흑포복면인까지도 뜻밖인 듯 주춤했다. 그도 여파를 피할 순 없었다. 너무 가까운 곳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그 찰나간의 틈에 좌우에서 회의인 둘이 그를 덮쳤다.
어떤 초식이나 무공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날아들던 그들의 몸이 순간적으로 불덩이가 되는가 싶더니 흑포복면인과 부딪치는 순간, 그들의 몸이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쾅! 콰콰쾅…….
그 폭발의 위력은 주변 4, 5장을 휩쓸 정도였다.
오죽하면 이미 쓰러져 있던 감천형까지 그 폭발에 휩쓸려 튕겨져 나갔을까.
나타난 회의인은 모두 다섯이었다.
그들은 마치 흑포복면인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흑포노인의 외침에 따라 나타났고, 거침없이 흑포복면인에게 육탄으로 덤벼들었다. 처음부터 방어의 초식 따위는 아예 염두에도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눈에서 이글거리는 살기와 광기로 번들거렸다.
사람들은 처음의 회의인이 폭발했을 때는 흑포복면인의 가공할 검세에 전신이 터져 나간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다음 달려든 회의인들이 연달아 폭발하면서 코를 찌르는 유황 내음이 나자, 비로소 그들이 화약을 몸에 두른 채로 흑포복면인에게 달려들어 자폭한 것임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사신구멸(捨身俱滅)에 동귀어진(同歸於盡)이다.
재수없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횡액을 면치 못했다.
감천형과 진자양도 바닥에 쓰러져 있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를 면치 못했을 터였다.
그 폭발은 상상을 불허하게 강력했다.
더구나 폭발 후에도 불길이 이글거리면서 사방에서 타오른다. 단순히 한 번의 폭발로 꺼지는 것이 아니었다.
"으흐흐흐…… 제아무리 비왕이라 할지라도 수인가(燧人家)의 탄천신화(呑天神火)에 걸린 이상, 버틸 수가 없지! 계속해서 당할 줄 알았더냐? 네가 나타날 줄 알았다……."
그 광경을 보고 흑포노인이 음산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의 웃음소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웃음소리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눈이 커졌고 입이 절로 벌어졌다.
허공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흑포를 펄럭이면서 내려서고 있었기에.
"저, 저럴 수……."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폭사한 것으로 생각했던 그 흑포복면인이었다.
어둠의 너울처럼 전신을 두르고 있던 흑포는 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엉망이 되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처럼 너덜거렸다. 얼굴을 가렸던 흑건도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해서 그의 얼굴은 세상에 드러났다.
창백하다 못해서 청동 빛으로 물든 그 얼굴은 나무를 깎아만든 듯 무표정했다. 그러나 사각 진 얼굴에 우뚝한 사자코는 당당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눈에서 이글거리는 무서운 살기를 제외한다면.
"사, 사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엉거주춤 그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좌백이 경악에 가득 찬 실성을 흘려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는 듯 눈을 찢어질듯 부릅떴다. 얼마나 놀랐던지 하마터면 안고 있던 독고경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 놀람은 그만이 아니었다.
억지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던 감천형도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저, 정말 사부님?"
감천형은 믿기지 않는 듯 두 눈을 껌벅거렸다.
그의 손에서 펼쳐진 무공을 보고 너무도 괴이하긴 했었다. 그러나, 그러나 정말 그라니…….
감천형은 보면서도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있다가 폭발에 나뒹굴었던 진자양 또한 멍청한 얼굴이 되어 절로 입을 벌렸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오다니.
…….
갑자기 숨 막히는 정적이 엄습했다.
"거, 건곤무적……."
"매, 맹주님이시다아……."
누가 먼저 입을 열었을까.
어디선가 떨리는, 목이 메인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 싸우던 군웅들. 지리멸렬 죽어가고 있던 그들은 전신을 떨고 있었다.
개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건곤무적 독고해.
그가 나타났다.
죽어 돌아왔다가 시신마저 도둑맞았던, 그가…… 그가 살아서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우뚝 버티고 선 그의 모습은 거대한 산악(山嶽)과도 같이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기에 족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기적(奇蹟)이 일어난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주위의 웅성거림에 그가 누구임을 알게 된 흑포노인이 턱을 떨었다. 그처럼 자신만만하던 그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버렸다.
흑포복면인, 건곤무적 독고해의 눈빛을 받자 절로 다리가 후들거린다.
건곤무적.
그 이름은 아직도 위대했고, 살아 있는 전설(傳說)이었다.
전설, 전설이 현실로 세상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펑! 퍼펑…….
제천교 고수들의 뒤쪽에서 치열한 싸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를 잇는 비명.
일단의 흑의인들이 나타나 제천교의 배후를 치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제천교 쪽의 흑포괴인들이 무림맹 군웅들을 공격하던 것과 같은 기세였다. 그들 또한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적이군……."
그쪽을 힐끗 본 흑포노인이 어금니를 물었다.
건곤무적 독고해에 이어 비적이라 불리는 보구회의 고수들이 나타났음에도, 배후를 찔렸음에도 그들이 나타나자 흑포노인의 얼굴은 오히려 침착해졌다.
그것은 이미 예측된 바였던 것이다.
다만 그 축이 될 비왕이 건곤무적 독고해라는 것을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을 뿐이다.
구대문파가 주축이 된 무림맹의 새 출발을 제천교가 그냥 둘 리가 없다. 그리고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비적, 보구회가 제천교의 그런 행동을 두고 볼 리 없음은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구대문파에서도 제천교의 공격은 당연히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부의 배신자로 인해 방어력을 상실케 될 것까지는 예측하지 못하여 오늘의 실패를 자초했다 할 수 있었다.
무림맹과 보구회.
이 둘의 일망타진(一網打盡)이 오늘 제천교가 노리는 바였다.
그렇게 해서 비적 가운데 막강하기 이를 데 없는 비왕을 상대하기 위해서 자살조를 편성했다. 그들은 산서 수인가의 탄천신화를 몸에 지니고 그와 함께 폭사할 예정이었다.
산서 수인가는 화기(火器)로써는 천하제일을 다투는 곳이다.
그들이 만든 삼대화기 중 하나인 탄천뢰는 무서운 폭발력을 가져 작은 산을 날려 버린다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운반에 난점이 있었다. 미리 설치를 해둬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 탄천신화는 크기가 작아 품에 지닐 수가 있었다. 게다가 한번 터지면 폭발력이 미치는 범위 내의 것을 모조리 태워 버린다. 그 불길은 한번 붙으면 그 물체가 다 탈 때까지 꺼지지 않는다. 말은 신화(神火)라고 하지만 세상에서는 그 악랄함을 일컬어 지옥화(地獄火)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비왕은 그 가공할 폭발에서도 폭사하지 않았다.
그 가공할 지옥화도 그를 태우진 못했다. 불길이 그에게서 이는 호신강기에 튕겨 나가 버렸던 것이다. 하나 타격을 받은 것은 분명한 듯 살기가 이글거리는 무서운 눈빛으로 노려보고만 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
제천교로부터 비왕이라 불리는 건곤무적 독고해는 천천히 수중의 검을 들어 흑포노인을 겨누었다.
팍팍!
검끝에서 불꽃이 튕겼다.
검을 휘두르면 바람이 이니, 그를 검풍(劒風)이라 한다. 그렇듯 검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빛을 반사하면 검과 검이 연결되어 그 빛의 눈부심이 꽃이 핀 듯하여 검화(劒花)라 이름한다. 검을 움직이는 사람의 수련에 따라 그 검화는 선명해지고 커질 수도 있으며 숫자를 헤아릴 수 없게 많아질 수도 있다. 그러한 명멸(明滅)의 검화가 형체를 갖추면서 검기(劒氣)가 형성되며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검기가 유형화됨을 일러 검강이라 한다.
건곤무적 독고해의 검끝에서 인 불꽃은 검화이면서 바로 검강이었다.
검강은 정기신(精氣神)이 일치된 무상검도의 결정체다.
이러한 경지는 반드시 검과 내가 하나가 된 신검합일(身劒合一)이 이루어졌을 때에만 가능하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어검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건곤무적 독고해의 검끝에서 검강이 솟구치는 순간, 그 검광은 찬란한 빛을 뿜으며 전광석화와도 같이 흑포노인을 덮쳐 갔다.
가히 눈 깜박할 사이에 일어난 변화.
흑포노인의 안색이 대변했다.
비왕, 건곤무적 독고해의 위력은 이미 증명이 된 바 있었다.
그의 장하(掌下)에 수많은 제천교의 고수들이 일패도지했고,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비적이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제천교는 이미 천하를 장악했을 것이었다.
'설마 그 폭발에서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단 말인가?'
흑포노인의 눈에 공포의 빛이 어렸다.
인사유명(人死留名) 호사유피(虎死留皮)라고 하지 않던가.
단순히 비왕만 하더라도 제천교에게는 부담스러운 이름. 그런데 그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건곤무적 독고해의 믿지 못할 부활(復活)이라면…… 절로 손발이 굳어짐이 예외는 아닐 터이다.
"네가 정말 건곤무적 본인이라고는 믿지 못하겠다!"
돌연 흑포노인이 고함쳤다.
동시에 그는 양손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과우우- 다시금 막강한 회오리바람이 일면서 주위의 흙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나 그를 휘감았다.
팍팍!
세찬 경기가 무섭게 사방으로 튕겨지는 가운데 독고해가 발출한 검강이 흑포노인의 장세를 뚫고 들어갔다.
쨍! 쨍그렁…….
귀청을 찢는 금속성이 연달아 터져 나오면서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크으…….
이를 악무는 신음 소리.
흑포노인이 일그러진 얼굴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한 사람의 흑의인이 나타나 건곤무적 독고해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다.
바로 천추성주. 그도 서너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가 나타나 돕지 않았더라면 흑포노인은 낭패를 당할 뻔했다.
"삼교주! 물러날 때입니다!"
천추성주가 다급하게 부르짖었다.
바로 그 순간, 비적과 제천교의 고수들이 싸우고 있던 곳에서 잇달아 폭발이 일어났다.
쾅! 콰콰쾅…….
건곤무적 독고해가 나타나 적진을 휘저어놓자, 그 뒤를 이어 비적이라 불리는 보구회의 고수들이 나타나 제천교의 배후를 쳤다.
그것은 허를 찔린 것이라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제천교에서는 그들의 출현을 알고 준비라도 한 듯 그들이 나타나자 썰물처럼 기존의 고수들이 물러나고 일단의 흑의인들이 몰려나왔다. 그들이 지금까지 구대문파와 싸우고 있던 자들이 아님은 물론이었다.
그 흑의인들은 싸우러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비적에게 달려들었다.
방어의 초식 따위는 처음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비적과 어울리면서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 그것은 약속이나 한 듯이 좀 전의 광경과 꼭 같았다.
하나 흑의를 입은 채 날아들었던 보구회의 고수들은 건곤무적 독고해와 같을 수가 없었다.
폭발이 임과 동시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화약 냄새가 진동을 하는 가운데 사방으로 불꽃이 번졌고, 여기저기로 검은 그림자들이 튕겨져 나가 꿈틀거렸다.
좀 전에 폭발했던 탄천신화가 다시 터진 것이다.
폭발음에 그곳을 돌아본 흑포노인, 제천교 제삼교주의 눈에 득의의 빛이 떠올랐다.
얼핏 봐도 나타난 비적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 치른 제천교의 대가도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는 이미 각오하고 안배한 일이었다.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는 적을 상대한다는 것은 제천교로서도 부담이 되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기에.
폭발에 날아간 비적을 향해 제천교의 고수들이 덮쳐 갔다.
확실히 끝장을 낼 작정인 것이다.
구대문파의 고수들은 이미 독이 발작하여 거의 힘을 쓸 수가 없는 형편이라 말 그대로 있으나 마나 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와아아……!"
사방에서 함성 소리가 크게 울리면서 일단의 인영이 벌 떼처럼 날아들었다.
"이놈들, 모조리 목을 내놔라!"
"제천교의 잡졸들은 게 섯거라아……!"
기세는 흉흉한데, 나타난 사람들의 몰골은 한심했다.
제대로 된 옷을 걸친 자는 단 하나도 없는 거지들. 맨발에 개 잡는 몽둥이를 휘두르는 가소로운 모습이었지만 그들을 보고 어이없어할 자는 현 무림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야말로 개방의 고수들이었기에.
"이런……."
그들을 본 제삼교주의 눈꼬리가 일그러졌다.
"대체 섭생루(攝生樓)는 뭘 하는 겐가! 아직까지 나타나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켈켈켈…… 재촉하지 않아도 좋소."
고막을 찌르는 괴이한 웃음소리.
그것과 함께 펑펑! 지축을 울리는 일성 포향(砲響)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사방에서 벌 떼처럼 나타나 제천교의 고수들을 향해 덮쳐 가던 개방의 고수들은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포향이라고 하는 것은 군사들의 전투에서 신호를 위해서 오래전부터 써오던 것이다. 이런 무림의 싸움에서 포(砲)를 쏠 일도 없었고 위력은 강하지만 그 느려터진 포가 힘을 쓸 리가 없음을 모를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포향이 울린다는 것은 무슨 신호임에 틀림없을 터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비적을 향해 덮쳐 가던 제천교의 고수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펑! 퍼펑!!
사방 여기저기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물러서던 제천교의 고수들 가운데 녹의를 입은 자들이 나타나 뭔가를 마구 집어 던지고 있었다.
그때마다 검은 연기가 터져 올라 하늘을 가렸다.
삽시간에 검은빛이 먹물처럼 화산을 덮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화산파의 건물 여기저기, 산곡 여기저기에서 녹의를 걸친 자들이 나타나 연신 손을 휘두르고 있었기에.
펑! 펑…….
그때마다 검은 연기는 피어 올라 하늘을 가린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지?"
개방고수들의 앞장을 섰던 옥면무영 호일랑이 미간을 찡그렸다.
앞서의 탄천신화와 같은 가공할 폭발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연기가 계속해서 피어 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시야를 차단할 뿐, 어떤 위험도 주지 못했다.
"안 보이기로 말하자면 저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일 텐데……."
옥면무영은 주위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사방에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개방의 독특한 신호로써 서로가 연락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주위로 개방고수들이 모여들었다.
그사이에도 연기는 계속해서 터져 사방이 짙은 안개가 낀 듯 대낮임에도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느닷없이 검은 안개가 천지를 뒤덮자 그처럼 무섭던 싸움은 멎고 말았다.
그때였다.
"이상한 냄새가 납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옥면무영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 외침 소리와 더불어 머리가 핑 돌았던 것이다.
"후퇴해! 독이다!!"
검은 연기가 퍼질 때부터 조심을 했다.
그리고 혹시 무슨 기미가 없는지 물러서면서 냄새를 맡아보았다. 검은 연기에서는 조금 매캐한 냄새가 있는 듯하면서도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방중의 독물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청사개 구지원(寇之遠)도 이상이 없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결국 내린 결론은 이놈들이 시야를 가리고 그사이에 무슨 음모를 꾸밀 예정이로구나! 하는 것. 그렇게 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간 숨을 죽인 채 오늘을 준비해 왔었다.
곳곳에서 피를 흘린 형제들이 얼마인데…….
그들은 내심 이를 갈면서 오히려 적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 질풍처럼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달라졌다.
검은 연기의 색깔이 어딘지 모르게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평소라면 금방 알 정도의 붉은빛이었는데, 검은 안개가 사방에 퍼져 있어서 미처 인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개방고수들이 놀란 메뚜기처럼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중 몇은 이미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빨리 물러나! 홍화독장이다! 숨을 쉬면 안 돼……!"
청사개 구지원이 다급히 부르짖는 소리가 검은 연기 속에서 들려왔다.
"홍화독장이라니……."
옥면무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독장이라고 하는 것은 습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독기(毒氣)다. 습한 지대에는 수목이 울창하기 마련이다. 그런 곳에서 나무와 나뭇잎 등이 떨어져 쌓이면 썩어 거름이 된다. 하나 습한 곳에서 지속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제대로 썩어 거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하면서 독기가 생겨난다. 그리고는 일대를 그 죽음의 기운으로 덮어버리게 된다. 안개와 같이 생성되는 그 기운을 일컬어 장기라 한다. 더운 남쪽 밀림 지대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그러한 장기다. 그런데 홍화독장은 그중에서도 홍화라고 불리는 독을 품은 꽃잎이 주된 성분으로 형성된 장기로써 가히 치명적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런데 적이 그런 홍화독장을 뿌려낼 줄이야…….
옥면무영은 비로소 적이 검은 연기를 터뜨린 것은 이 홍화독장을 뿌리기 위한 눈가림이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후퇴 명령을 내렸음에도 개방의 고수들은 이미 상당수가 중독된 듯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중 몇은 이미 쓰러지고 있었다. 홍화독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나타내는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켈켈켈…… 홍화독장이 이미 퍼진 상태에서 후퇴가 있을 수 있나? 마음껏 까불어보거라. 거지들이 구대문파의 영수들과 같이 죽는 것 또한 후세에 길이 남을 영광이 아니랴?"
처음에 들렸던 그 웃음소리가 안개를 뚫고서 음산하게 고막을 찔렀다.
흑포노인, 삼교주의 옆에는 헐렁한 녹포(綠袍)를 걸친 대머리노인 한 사람이 나타나 있었다.
5척 단구. 삼각형의 눈에서는 사이(邪異)한 푸른빛이 번쩍여 보기에도 섬뜩한 인상. 수염조차 없는 그의 얼굴은 온통 주름살로 뒤덮여 고목나무의 껍질을 보는 것 같았다. 나이가 몇인지조차 알기 힘들었다.
그의 주위로는 녹포를 걸친 자들이 검은 안개 속에서 유령처럼 움직이면서 손을 젓고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독장을 조종하는 주축이었다.
"이렇게 손을 쓰면 우리 측 고수들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상황을 지켜본 천추성주가 미간을 찡그렸다.
녹포의 노인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눈 속에서 푸른빛이 공포스럽게 번쩍였다.
"그까짓 허접쓰레기들이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인가? 본 루주는 여기에 나타난 적을 섬멸하기 위해 왔을 뿐……."
그의 음성은 매우 날카로운데다 심한 호광(湖廣) 사투리가 섞여 얼핏 알아듣기가 힘들 정도였다.
"루주(樓主)! 이 자리의 책임자는 본 교주요. 섭생루(攝生樓)가 이 자리에 온 것은 본 교주를 돕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삼교주가 차갑게 말을 잘랐다.
"큭큭큭…… 그럼 지금 본 루주가 방해를 하고 있단 말씀이오?"
삼교주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루주는 내가 제천권고를 지닌 채 지벽계를 지휘하고 있음을 잊지 마시오. 이 일에 차질이 생긴다면 루주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소!"
"……."
삼교주에 의해 섭생루주라 불린 녹포노인은 음산한 눈빛으로 삼교주를 잠시 바라보더니 문득 괴기한 표정을 지었다. 입 주위의 주름살이 온통 괴이하게 입 주위로 몰리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웃음인 듯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주변의 검은 안개는 더욱 짙어져 자신의 손가락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도 녹포의 섭생루주는 사물을 볼 수 있는지 말과 함께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클클 기괴한 웃음을 흘려냈다.
"반 시진 이내에 살아 움직이는 건 모두 쓰러질게요. 굳이 살려야 할 자가 있다면 그때 말하시오. 살려주지."
팡팡!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불꽃이 터졌다. 그리고 그 불꽃은 무서운 속도로 허공으로 번지면서 홍화독장을 태우기 시작했다. 가히 걷잡을 수 없는 기세.
"뭐냐!"
섭생루주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때였다.
무서운 빛줄기 하나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사나운 소용돌이가 공기를 격탕치게 하면서 홍화독장의 안개마저 휩쓸어내고 있었다.
쏴쏴쏴아아…….
섭생루주에게 날아든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검이되, 단순한 검이 아니라 가공할 검광을 찬란한 햇살과도 같이 토해내면서 날아든 그 검을 부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건곤무적 독고해였다.
그가 우뚝 선 채로 검을 발출하자 그 경기에 휩쓸려 홍화독장이 사방으로 회오리치면서 밀려났고, 그것은 마치 섭생루주 등이 있는 곳까지 허공에다가 커다란 동굴 하나를 뚫어놓은 듯 절묘한 광경을 만들어냈다.
"뭐, 뭐야? 설마 거, 거언-고온무작(乾坤無敵)?"
그제서야 그의 얼굴을 본 섭생루주의 눈에 경악과 공포가 튀어 올랐다.
마지막 말은 심한 사투리로 인해서 거의 알아듣기 곤란했다.
하지만 말보다 그의 행동은 비교할 바 없이 빨라서 검이 날아옴을 본 순간에 그곳을 향해 일장을 쳐냈다. 쳐냄과 동시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옆으로 튀었다.
그가 나타나면서 화산파의 전정(前庭)은 홍화독장으로 휩싸였다. 그것을 지휘하기 위해서 그는 삼교주와 천추성주의 앞에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옆으로 사라져 버리자, 그제서야 상황을 알게 된 삼교주와 천추성주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라면 그들이 상황을 몰랐을 리 없지만 지금은 홍화독장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서 그야말로 불시에 당한 기습인 셈이었다. 혼비백산할 수밖에.
일성 기합과 함께 삼교주와 천추성주가 일제히 앞으로 검과 장을 쳐냈다. 피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쨍! 쨍그렁…… 채애앵…….
고막을 찢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구름 속의 용이 신음하고 심산의 범이 울부짖는 듯 잇달아 울려 퍼졌다.
"으윽!"
천추성주가 신음을 흘려냈다.
단 일 합에 손목이 저려왔다. 진기의 흐름이 이어지지 않아 하마터면 검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부서져 버릴 뻔했다. 지금도 검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윙윙- 세차게 떨린다.
그와 일합을 마주한 검은 허공에 뜬 채로 웅웅거린다. 가공할 기세를 뿜어내면서.
건곤무적 독고해는 그의 앞쪽에서 공포스럽게 꿈틀거리는 그 검을 향해 손을 뻗은 채로 우뚝 서 있었다. 홍화독장마저도 그를 어찌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 손의 움직임에 따라 검이 공포의 검광을 뿌리며 울고 있었다. 그 힘에 떠밀려 홍화독장이 소용돌이친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강할 수가 있다니…….'
천추성주의 눈에 비로소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건곤무적이란 이름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사람들이 왜 그를 그처럼 두려워했는지를 비로소 실감을 하게 된 것이다. 만에 하나 삼교주가 같이 합세하지 않았더라면 일합도 견뎌낼지 못하고 거꾸러졌으리라.
그 순간, 다가오는 건곤무적 독고해를 향해서 어둠의 장막 속을 뚫고서 푸른 빛이 덮쳐 내렸다.
팡! 파파파…….
세찬 소용돌이가 일었다.
도주한 줄 알았던 섭생루주가 검은 안개 속에 몸을 감추고서 건곤무적 독고해의 측면을 공격해 온 것이다.
불시에 당한 공격으로 독고해가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 여파로 그가 쳐들었던 손길을 따라 무섭게 천추성주를 노리던 검이 힘을 잃고 땅으로 떨어졌다.
삼교주의 눈에 빛이 번쩍 튕겨져 올랐다.
"탄천신화의 폭발에 충격을 받았다!"
말과 함께 그는 고함을 지르면서 독고해에게 진격해 들어갔다.
그의 손에서 괴기한 음향을 토하면서 일장이 쏟아졌다. 그의 장세는 매우 특이했다. 힘이 그냥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무섭게 회전을 하면서 쏟아져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성명절기인 와선장(渦旋掌). 공력이 약한 사람이 여기에 휘말리면 단 한 수에 전신이 찢겨져 나가는 가공할 위력을 지닌 무공이다.
쾅!
독고해의 가슴에 그 와선장세가 그대로 작렬했다.
쿵, 쿵쿵…….
그가 괴이한 신음과 함께 비틀거리면서 연신 뒤로 밀려났다.
그의 걸레처럼 타버렸던 가슴팍 옷자락이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푸른 청동 빛을 띤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크으으……."
번쩍 고개를 쳐든 독고해의 눈빛에서 무서운 살기가 폭사된다.
그러나 그가 미처 중심을 잡기도 전.
"여기도 있다!"
벼락치는 일성 고함.
천추성주가 검과 하나가 되어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검은 그대로 독고해의 가슴을 꿰뚫었다.
"크으윽!"
독고해가 두 눈을 부릅뜨고서 천추성주를 노려보았다.
동시에 독고해는 천지가 무너지는 고함을 지르며 천추성주를 향해 일장을 쳐냈다.
"크하하학…… 네가 다시 살아났다고는 믿지 못하겠다!"
바로 그 순간, 날카로운 웃음소리와 함께 자색 광채가 독고해에게 쏟아져 나갔다. 자색의 인광(燐光)을 띤 그것이야말로 섭생루주가 재차 쏟아낸 회심의 일격이었다.
쾅!
다시 그의 일격이 독고해에게 작렬했다.
공격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녹의를 걸친 그의 수하들이 일제히 독고해에게 공격을 시작했고, 삼교주의 와선장이 다시금 독고해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녹포노인, 섭생루주의 장세는 그냥 장세가 아니었다.
그의 전신은 독으로 가득했다. 제천교의 섭생루는 독을 다루는 곳이었다. 그런 만큼 그 자리의 책임자인 그의 무공은 자연히 절독(絶毒)할 수밖에 없다.
녹광이 번뜩이는 그의 장세는 스치기만 해도 중독이 된다.
그 장세에 적중된다면 전신이 독기에 녹아내리기 마련이다.
제아무리 절세무적이라는 건곤무적 독고해라고 할지라도 그런 장세에 연달아 격중당하고 아무렇지도 않기를 기대할 수야 없다.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의 몸이 한순간 천추성주의 일검에 가슴을 관통당한 것은 그가 이미 심대한 타격을 받았음을 의미했다.
바로 그 순간이다.
"귀졸(鬼卒)들이 감히 누구를 노린단 말이냐!"
천둥 같은 고함 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 소리가 얼마나 강한지 시야를 가린 흑무가 출렁거릴 정도였다.
동시에 삼교주는 가공할 힘이 날아듦을 느낄 수 있었다.
쾅!
맹렬한 폭음이 터지며 경풍이 일었다.
삼교주는 막강한 충격에 물러서면서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그 경력은 독고해를 향해 뻗어냈던 자신의 와선장을 막아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자신을 향해 쏟아져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동……권왕?"
나타난 사람을 보자 신음 같은 소리가 그의 입을 비집었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콰쾅!
그가 있던 자리에서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치솟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검은 안개를 쳐 흩트리면서 갈의의 곱추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곱추이되, 당당한 체구를 지닌 그 사람야말로 정말 요동권왕 막풍이었다. 그의 주위로는 막강한 경풍이 일어 검은 안개가 태풍에 휩쓸린 것처럼 휘말려 흩어지고 있었다.
"으하하하…… 여기도 있다!"
중기(中氣)가 충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몸을 피한 삼교주를 향해서 막강한 힘줄기가 밀려들었다. 그것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의 길목을 차단하여 피할 수가 없었다.
삼교주는 이를 악물고서 신형을 빙글 돌리면서 일장을 때려냈다.
파팡!
막대한 충격이 그를 두드렸다.
펑!
퍼퍼펑…….
사방 여기저기에 폭음이 터져 나왔다.
불길이 검은 안개를 태우다 못해 공중에서 폭발을 일으키면서 사방으로 폭발하듯이 확산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