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五首 절대절명(絶對絶命) (57/113)

第五首  절대절명(絶對絶命)

-절망만이 가득하다.

그 위엄(威嚴)에 천하가 전율하다.

 "멈춰라!"

 그 순간, 강한 힘을 가진 호통과 더불어 한 가닥 강력한 기세가 흑포노인을 엄습했다.

 "어떤 놈이……."

 말과 함께 흑포노인은 신형을 틀어 장세를 쳐냈다.

 단순히 피하거나 아니면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의 상대가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파파팍!

 장세가 날카로운 도기(刀氣)에 맞닥뜨려 맹렬한 질풍을 일으켰다.

 "너는?"

 주춤 물러난 흑포노인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진자양을 막아선 것은 당당한 체구의 사내, 그의 손에는 패도라 불리는 장도(長刀)가 들려 강렬히 빛을 뿜고 있다. 그를 공격한 것은 뜻밖에도 감천형이었던 것이다.

 "지난날 백련교의 사대천왕은 제각기 절기를 지녀 천하를 오시(傲視)했다고 들었지. 오늘 그것이 사실인가 봐야겠다!"

 감천형이 고함치면서 연달아 수중의 패도를 휘둘렀다.

 상대와의 부딪침에서 하마터면 칼을 놓칠 뻔한 충격을 느꼈지만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거세게 진기를 들이마시면서 상대를 공격해 들어갔다. 공력이 감퇴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전력을 다하자 누구도 그를 쉽게 볼 수 없었다. 그가 수련한 뇌정도는 한효월의 도움을 받아 거의 완벽한 상태에 이르러 있었기에.

 '나를 알아본단 말인가?'

 흑포노인은 흠칫 놀라 일시지간 선기(先機)를 빼앗기고 말았다.

 "……."

 땅바닥에 팽개쳐지듯이 나가떨어졌던 진자양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감천형이 흑포노인과 싸우는 것을 쳐다보았다.

 이 마당에 그가 자신을 구할 줄은 정말 상상외였던 것이다.

 하나 감천형이 버틸 수 있는 시간도 별로 많지 않았다.

 그의 공력 또한 시시각각으로 감퇴되고 있었고, 그가 흑포노인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기습에 의한 선점 효과에 기인할 뿐이었다. 진자양이나 소림사, 청성파의 장문인이 아무 일 없었다면 그나마 조금 시간을 끌 수 있었을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들이 쓰러지자 문하제자들은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손이 묶이게 되고, 그것은 당연히 전력의 감소에 직결되었다.

 "으악……!"

 "으아악……!"

 비명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피보라가 하늘을 가리고 바닥에 깔렸던 백석(白石)의 흰빛은 붉게 물들었으며, 그 사이로 핏물이 흘러내렸다.

 감천형이 용전분투(勇戰奮鬪)했으나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었다.

 콰쾅!

 감천형이 쳐낸 뇌정도세와 흑포노인의 장세가 마주치면서 맹렬한 폭풍을 일으켰다. 아무리 강력한 장세라 할지라도 무기의 이점을 가진 감천형의 뇌정도에 정면으로 부딪쳐서 그리 큰 득을 볼 수 없어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진기를 격하게 쓰면 쓸수록 독의 발작은 빨라 감천형의 그 막강한 도세는 채 십 초가 지나지 않아 어지러워졌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힘이 달리는 것이다. 마지막 부딪침에서 감천형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잇달아 서너 걸음이나 비틀거리며 물러나야 했다.

 "아직도 버틸 셈인가?"

 흑포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감천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양손으로 패도를 움켜잡고서 그를 겨눌 따름.

 흑포노인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감천형에게서 묘한 기세가 임을 느낀 것이다.

 "죽음을 불사할 작정인가?"

 흑포노인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상대의 기세가 신도합일(身刀合一)하여 생사를 건 일격을 준비하는 것임을 알아본 것이다.

 그의 말에 감천형의 얼굴에 차가운 웃음이 스쳐 갔다.

 하지만 입을 열지 않는 그의 기세는 더욱더 강해졌다.

 패도 전체가 푸른 빛을 쏟아내는가 싶더니 끝에서 새파란 광망이 폭죽처럼 튀며 천천히 솟아나 흑포노인을 향했다.

 숨 막히는 기운이 일대를 덮었다.

 "으악!"

 순간, 감천형의 옆에서 그를 공격하려던 흑의인 둘이 잡아 올린 생선처럼 펄쩍 뛰었다가 나동그라졌다.

 "사형!"

 그의 뒤에서 좌백이 나타났다.

 감천형은 그를 보지 않았다. 대신 그의 귀에 감천형의 전음지성이 전해졌다.

 '넌 어서 사매를 데리고 이 자리를 떠나거라!'

 감천형을 구한 좌백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일었다.

 '바보 같은 녀석! 평소의 너답지 않게 무슨 짓이냐? 네 눈에는 우리가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너라도 살아나서 한 사숙을 찾아 대책을 의논해야 할 게 아니냐!'

 감천형의 전음지성이 계속해서 들렸다.

 "큭!"

 그의 앞을 가로막던 제천교의 고수가 목을 움켜잡고서 쓰러졌다.

 천수단혼(千手斷魂)이란 외호는 그저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자는 좌백의 손에서 벌 떼처럼 쏟아져 나가는 암기를 상대해야만 했다. 그것이 쉽다면 천수란 글자 뒤에 단혼(斷魂), 혼이 끊어진다는 말이 붙어 있을 리가 있을까?

 게다가 그는 단순히 암기만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사문의 절학 만뢰구산수는 사형제 중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본신의 진공실학(眞功實學)에 곁들인 암기이기에 그를 상대하는 것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으악!"

 그의 일장에 다시 흑의인 하나가 피를 토하며 튕겨져 나갔다.

 질풍과도 같은 전진 속도.

 그의 용력분전(勇力奮戰)에 그처럼 견고하던 적의 포위망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사형 감천형의 재촉에 피눈물을 뿌리며 사매를 부둥켜안고서 몇 사람의 무림맹 고수들과 함께 그 자리를 떴다. 절대로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사모를 남겨둔 채로.

 누구보다 냉철한 그였다.

 그가 감천형의 처지였다 할지라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외곽 경비를 섰기 때문에 중독이 그리 심하지 않은 상태였다.

 좌우를 지키던 무림맹의 고수들 일곱 중 이미 셋이 쓰러졌다.

 하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낸다면…….

 사방은 아비규환의 소용돌이.

 처절한 비명이 하늘을 찌르고, 여기저기에서 계속해서 군웅들이 짚단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체내의 중독이 심해져서 더욱 힘을 잃어가니 당연한 현상일 수밖에.

 이제 이 상황을 돌이킬 방법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사형 감천형도 그 흑포노인에게 밀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힐끗 뒤를 살펴본 좌백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하든 이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화산의 정면을 뚫고 나가는 것은 바보짓. 그간 외곽을 경비해 온 좌백은 다행히도 일대의 지리를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측면을 돌파해서 뒤로 돌아가 적의 추격을 피할 생각이었다.

 거의 포위망을 돌파했다 싶었다.

 그런데 앞을 스치는 검은 그림자!

 "쓰러져라!"

 좌백이 호통 쳤다.

 동시의 그의 손에서 맹렬한 일격이 뿜어져 나갔다.

 핑핑! 하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리면서 반대 편 손의 소매 속에서 암기가 튀어나가 상대에게 적중했다.

 적을 공격한 일초는 허초(虛招)이면서 실초(實招)였다.

 고수의 일격은 한 수 한 수가 범상할 수가 없다. 허초라는 것은 상대를 혼란하게 하면서 실제로 공격을 하기 위한 허장성세(虛張聲勢)를 일컫는다. 그러나 고수의 허초는 순식간에 실초로 변해 상대를 공격할 수가 있다.

 그래서 고수인 것이다.

 상대는 그의 허초에 속아 그를 공격해 왔다.

 그때, 좌백의 소매 속에서 쏟아져 나간 회선표가 타원을 그리며 그자의 목을 파고들었다. 설사 보고 있었더라도 회선표는 특성상 시야를 벗어난 상태로 휘어져 공격해 옴으로 피하기 어려웠다. 그것을 느끼고 피한다 할지라도 그때 좌백의 허초는 실초로 변해서 상대를 치게 될 터였다.

 회선표가 적의 목을 뚫는 순간, 좌백은 적의 가슴을 치며 전진했다.

 틈을 놓치지 않고 포위망을 뚫고 나갈 생각인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분명히 가슴을 쳤는데, 펑! 하는 폭음이 울려 퍼졌음에도 상대는 움찔했을 뿐, 끄떡도 하지 않았다.

 "크악!"

 오히려 괴이한 음성과 함께 손을 휘둘러 그를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의외의 일, 그 일격은 반사적으로 막아냈지만 뒤이어 날아든 제이격에는 그대로 가슴을 얻어맞고 말았다.

 펑!

 한소리 폭음이 터지면서 좌백이 격하게 밀려났다.

 대번에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적은 그러고도 계속해서 그를 향해 짓쳐들고 있었다.

 이제 보니 나타난 것은 오늘 가장 무서운 위력을 보이고 있는 흑포괴인 중 하나였다.

 좌백 또한 그들이 제천교의 삼루 가운데 하나인 강령루의 고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철골마왕신을 연성하여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시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피윳!

 날아오는 적의 눈을 향해 좌백의 손에서 암기가 날아갔다.

 그것은 도저히 반응하기 힘든 상황에서 날아간 일격.

 제아무리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눈까지야. 흑포괴인이 몸을 흔들어 암기를 피했다.

 좌백은 뒤에 있던 수하에게 안고 있던 독고경을 던져 주며 소리쳤다.

 "내가 막을 테니 앞으로 가라!"

 동시에 그는 대갈일성하면서 덮쳐 오는 흑포괴인에게 마주쳐 갔다.

 펑펑!

 정면으로 마주치자 연신 폭음이 터져 나왔다.

 흑포괴인이 제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는 건곤무적 독고해의 제자인 좌백이다. 그들 한둘은 충분히 상대할 힘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정상이기만 했더라도 그들이 어찌 문제일 것인가…….

 "으악!"

 그 순간, 앞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명은 바로 독고경을 안고 달려간 수하에게서였다.

 좌백의 명령에 그와 다른 두 명은 독고경을 보호한 채로 앞을 향해 내달렸다. 그들의 무공도 능히 강호의 일류라 할 수 있어 녹록한 자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마치 짚단과 같이 잇달아 쓰러졌다.

 그들이 보호하던 독고경도 바닥에 내팽개쳐질 수밖에.

 흑의검수 하나가 나타나 무서운 쾌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검세는 섬광과도 같아서 구대문파 중에서 쾌검으로 유명한 점창파의 분광검(分光劒)보다 더 빠른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 검세는 잔독(殘毒)하기 이를 데 없어서 살을 가르고 뼈를 잘라냈다.

 그는 바로 옥형성주였고, 그의 전광무영검은 실로 빨랐다.

 피가 튀면서 마지막 하나 남은 무사가 연신 뒤로 밀려났다.

 무림맹 향주인 그의 무공은 약하지 않았지만 옥형성주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그것을 본 좌백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악몽과도 같이 달려드는 강령루의 흑포괴인을 향해 그는 일격을 쳐냈다.

 전혀 타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들던 흑포괴인이 흠칫했지만 별것 아닌 것같이 보이던 그 일격은 그를 치는 순간에 가공할 힘을 발휘했다.

 끙!

 하는 신음과 함께 흑포괴인이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그것이야말로 바위 속을 가루로 만드는 가공할 위력을 가진 만뢰구산수 중의 절초인 홍파흔지축이었다. 제아무리 도검불침이라 할지라도 그런 심대한 타격을 받자 물러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를 물리침과 함께 좌백은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연달아 손을 쳐냈다.

 마지막 무사를 향해 회심의 일격을 가하던 옥형성주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를 향해서 날아드는 암기를 경각해 낸 것이다.

 검을 휘두르면서 그가 뒤로 물러났다.

 쨍쨍! 쨍…….

 날카로운 금속성이 귀를 찌르는 가운데 사방으로 암기가 흩어졌다.

 옥형성주의 눈매가 싸늘히 굳었다.

 그처럼 방비를 했음에도 검을 쥔 어깨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어깨가 아니라 그 암기는 심장에 파고들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스친 것이라 대단한 상처라곤 할 수 없었다.

 그의 앞에는 좌백이 독고경을 막아선 채로 우뚝 서 있었다.

 "어리석군…….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옥형성주가 냉소를 터뜨렸다.

 사방의 비명 소리는 여전했고,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치솟아올라 화산파, 아니, 구대문파의 몰락은 이제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듯했다.

 좌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형 감천형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쓰러짐이 보였던 것이다.

 이젠 절망이었다.

 "너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나 좌백의 안색이 여전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면서 냉랭히 물었다.

 한참을 악전고투한 다음이라 전신에 피로가 몰려왔다. 그의 무공이라면 이 정도로 무리가 가지 않을 터이지만, 그도 중독에서 피하지 못한 것이다.

 "쓸데없는 반항을 해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차가운 어조로 옥형성주가 말을 받았다.

 "그런가? 네게 불리하면 네 부모라도 팔아먹겠다는 것인가? 하긴 그러니 악마의 졸개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겠지……. 너 따위가 어찌 의(義)를 알고 신(信)을 알랴?"

 좌백이 그를 비웃었다.

 그 말에 옥형성주의 눈빛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아직도 입이 살아 있다는 건가?"

 말과 함께 그의 손에서 검광이 날았다.

 정말 번갯불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전광무영이란 말은 결코 헛말이 아닌 듯했다.

 그가 발동한 순간에 좌백의 손에서 섬광이 부챗살처럼 폭출되었다.

 "넌 걸렸다!"

 그 말에 덮쳐 가던 옥형성주의 가슴이 섬뜩해졌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더구나 상대는 건곤무적의 둘째 제자. 결코 자신에 비해서 약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천수단혼이란 외호처럼 그의 암기는 강호일절이었다.

 하지만 이 마당에 물러난다면 목을 내놓는 것과 다름이 없을 터.

 그는 이를 악물고서 검세를 휘감아 쓸면서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것은 마치 잉어가 물살을 차고 옆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것과 같이 유연하고도 신속무비하여 처음부터 그렇게 예정된 듯했다.

 순간, 좌백은 손을 거두고 신형을 날렸다.

 그의 손이 바닥에 쓰러진 독고경을 쓸어안으며 그대로 발은 다시금 땅을 박찼다.

 쑤욱!

 그의 신형이 한순간에 7. 8장을 쏜살같이 날아갔다.

 "이런!"

 옥형성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귀어진(同歸於盡)을 바라지 않은 터라 맞부딪침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이 틈을 준 것이고, 상대는 그것을 처음부터 노리고 있었다.

 하나, 거의 포위망을 벗어난 듯 보였던 좌백이 갑자기 주춤거렸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그의 앞에는 또 다른 흑포괴인이 우뚝 서 있었다.

 "크으으……."

 좌백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어렸다.

 그의 입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젠 마지막 승부수까지 허사로 돌아갔다.

 비틀거리는 그를 향해 흑포괴인은 조금도 망설임없이 덮쳐 오고 있었다. 펄럭이는 검은빛 소맷자락 속에서 뻗어 나온 손은 죽음의 너울을 두르고서 그를 덮어왔다. 저기에 스치기만 하더라도 그의 머리는 두부처럼 으깨어지고 말리라.

 좌백은 두 눈을 부릅떴다.

 격하게 진기를 끌어올렸었다.

 그로 인해서 중독이 급격히 확산된 것인지 사매를 끌어안았던 손에서 힘이 빠져 그녀를 안고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렇게 죽음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이런 개죽음이라니…….

 사람은 대개 이런 순간에 질끈 눈을 감는다.

 하나 좌백은 두 눈을 찢어질듯 부릅뜨고서 자신에게 덮쳐 오는 사신(死神)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자존심으로는 도저히 이런 개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그를 덮쳐 오던 흑포괴인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구겨진 휴지 조각처럼 옆으로 나가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 타격이 얼마나 심대한 것인지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아 불사신과 같이 여겨지던 그 흑포괴인은 몇 번 꿈틀거렸을 뿐, 일어나지도 못했다.

 좌백은 놀라 눈을 부릅떴다.

 흑포괴인을 마치 장난감처럼 날려 버린 채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또 다른 흑포인이었다.

 칠 척을 넘어 거의 팔 척에 육박하는 당당한 체구. 전신에 걸친 흑포는 얼핏 보면 여타의 흑포괴인들의 것과 비슷하지만 재질도 틀리고 모양도 틀렸다. 머리를 가린 흑건으로 인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그 속에서 빛나는 눈빛은 너무도 강력하여 사람을 압도하는 기세를 가졌다.

 그는 횃불처럼 신광이 형형히 빛나는 눈으로 좌백을 바라보았다.

 무서운 살기에 이글거리는 눈.

 좌백은 기지(機智) 영민하며, 성정(性情)이 치밀했다. 거기에 과감한 결단력을 가졌고, 담 또한 컸다. 그럼에도 그 눈빛을 보자 마치 고양이를 본 쥐처럼 공포(恐怖)가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름을 느껴야 했다.

 흑포복면인이 손을 들었다.

 파팡!

 순간, 흑포복면인 좌우에서 금속성이 터져 나왔다.

 제천교의 고수 둘이 그를 공격한 것이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백련정강(百鍊精鋼)의 강도(鋼刀).

 그러나 흑포복면인을 친 그들의 강도는 놀랍게도 쇳소리를 울리며 튕겨졌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단말마의 비명.

 "으악!"

 마치 귀찮은 먼지를 털어낸 것처럼 양손을 쳐드는 것으로 그들을 날려 보낸 흑포복면인은 성큼 좌백을 향해 다가섰다.

 그 눈에 이글거리는 것은 무서운 살기.

 좌백은 흑포복면인의 눈을 보고 절망을 느껴야 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가공할 기세에 숨이 막혔다. 우군인가 했더니 아닌 모양.

 그렇다면 저토록 막강한 자를 무슨 수로 당한단 말인가.

 자신의 능력이 설사 온전하다 할지라도 당할 수 없는 상대.

 바로 그 순간, 그를 향해 다가오던 흑포복면인은 고개를 조금 쳐들었다. 무엇인가 귀를 기울여 듣는 듯한 모습이던 그는 돌연 좌백을 향해 일장을 쳐왔다.

 손을 쳐들자 숨이 막히는 가공할 힘이 일어났다.

 주변이 모조리 진공 상태로 빠져드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으아악!"

 좌백의 옆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좌백을 향해 다가서던 한 명의 제천교 고수가 마치 폭풍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허공에서 곤두박질치면서 날아가고 있었다. 피분수가 그 궤적을 따랐다.

 흑포복면인이 한 걸음을 더 나서자 그는 이미 좌백을 지나쳤다.

 그리곤 때마침 덮쳐 오던 흑포괴인을 향해 한 주먹을 쳐냈다.

 쾅!

 일성 폭음.

 끄아악!

 괴성이 흑포괴인의 입에서 터졌다.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 흑포괴인. 구대문파의 정예들 사이를 마치 양 떼 속에 뛰어든 늑대와 같이 활개 치던 그가 흑포복면인의 한주먹에 가슴이 완전히 허물어져 날아가 버렸다.

 땅, 따땅!

 흑포복면인의 측면 몸에서 쇳소리가 일었다.

 흑포복면인이 눈길을 돌렸다.

 경악한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은 옥형성주였다.

 그는 흑포복면인이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틈을 타서 전력을 기울인 회심의 일격을 흑포복면인의 등에다 가했던 것이다. 신검합일하다시피 한 검이 찔러 들어간 곳은 입동혈(入洞穴). 인체의 구대아혈(九大啞穴) 가운데 하나로써 이곳에 타격을 받으면 심폐(心肺)에 심각한 충격을 받게 된다. 검으로 찌른다면 바로 등을 통해 심장을 뚫게 되는 곳이었다.

 옥형성주와 같은 고수가 전력을 다한 일격이니 설사 강철이라도 뚫고 들어갈 힘이 있었다.

 그런데 쇳소리라니!

 경악과 불신의 빛이 옥형성주의 눈에 가득 찼다.

 그런 그의 눈앞으로 가공할 힘을 싣고서 흑포복면인의 일장이 날아들었다.

 피할 사이도 없었다.

 다급하게 검을 휘두르면서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참담한 단말마의 비명.

 "우아악!"

 단 일 장.

 그 일장에 검이 부러져 나가고, 옥형성주는 패대기친 개구리처럼 땅바닥에 처박혀야 했다. 복면이 찢겨져 나가고 땅바닥에 부딪친 입이 터져 입 안으로 흙이 한아름 밀려 들어왔다. 검을 들고 장세를 막아냈던 손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진 듯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나마 그가 빠르게 대응하여 뒤로 물러나면서 힘을 약화시켰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미 황천을 헤매고 있으리라는 것이 그를 공포에 떨게 했다.

 "비, 비와앙(秘王)……."

 피 범벅이 된 그의 입에서 알아듣기 힘든 말이 맴돌았다.

 "저렇듯 고강하다니……."

 좌백은 홀린 듯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듯 선 흑포복면인의 등을 쳐다보았다.

 가히 경천동지(驚天動地)가 아닌가!

 그의 출현을 알아차린 듯 일단의 흑포괴인들이 물밀듯이 흑포복면인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오늘 화산에 나타난 흑포괴인들 전체가 움직이는 듯했다. 하긴 이미 구대문파는 참혹한 지경에 이르러 그들을 상대할 사람은 없는 상태였으니 그들이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들이 달려오는 것을 본 흑포복면인은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찰나간에 7, 8장을 가로질렀고, 괴성과 함께 흑포괴인 둘이 한꺼번에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러나 흑포괴인들도 만만치 않아 나머지의 공력이 흑포복면인에게로 집중되자 그처럼 막강한 그도 주춤, 뒤로 물러났다.

 참으로 평생을 두고 다시 보기 어려운 싸움이 벌어졌다.

 상대의 공격은 도외시하고 방어는 없으되, 공격만 있는 싸움.

 펑! 펑! 폭음이 연달아 터져 나오면서 가공할 경풍이 이는 가운데 흑포괴인들이 잇달아 튕겨져 나갔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이냐?'

 문득 좌백의 귓전에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던 좌백은 깜짝 정신을 차렸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누가 한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독고경을 부둥켜안고 막 그 자리를 떠나려는 찰나였다.

 가공할 위세를 보이며 싸우고 있던 흑포복면인이 한 손을 내밀었다.

 바닥에서 흰빛 한줄기가 그 손으로 자석에 끌리듯 날아들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장검이었다.

 그 검은 빛 바랜 채로 주인을 잃고 맥없이 흙바닥에 떨어져 있었으되, 막상 흑포복면인의 손으로 들어가자 정신을 차린 듯 그 평생 단 한 번도 일궈낸 적이 없었던 가공할 섬광(閃光)을 폭출해 냈다.

 쏴아아악-

 거대한 반원이 달무리와 같이 찬란하게 그어졌다.

 그 반원은 참으로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흑포복면인의 앞을 가로막던 흑포괴인 셋이 한꺼번에 그 검광에 양단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저, 저건?"

 그것을 본 좌백은 입을 딱 벌린 채로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거, 건곤개벽(乾坤開闢)!"

 그는 실성을 한 듯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아니, 떠날 수가 없었다. 그 한 수를 본 이상, 설사 이 자리에서 엎어져 죽는다 할지라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단 일 검으로 앞을 가로막던 흑포괴인 셋을 두 동강 내어버린 흑포복면인은 그 검빛을 끌고서 날아올랐다.

 쏴아아앙!

 가공할 파공음이 화산을 온통 뒤흔들었다.

 그는 검과 하나가 되어 날았고, 그 검광이 미치는 곳에 있던 제천교의 고수들은 누구도 거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일거에 피를 뒤집어쓴 채로 거꾸러졌다.

 공포가 그들을 엄습했다.

 그가 날아가는 위치에 있던 자들은 모조리 머리를 싸매고 좌우로 흩어졌다.

 그렇게 그가 일직선으로 날아간 곳은 감천형이 있던 곳.

 감천형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중이었다.

 마지막 일격을 감천형에게로 쳐내려던 흑포노인은 주위에서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외침에 이어 가공할 기세를 느껴 고개를 들다 안색이 돌변했다.

 "어검비행(御劒飛行)?"

 경악해 입을 벌린 그는 고함치면서 양손을 모아 앞으로 쳐냈다.

 동시에 그는 결과를 보지 않고 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팟! 파파파…….

 맹렬한 힘의 소용돌이가 일면서 흑포복면인의 검광은 그가 쳐낸 장세를 면도날이 비단 폭을 가르듯 갈라내면서 그를 따랐다.

 고수의 싸움에서 뒤로 물러나는 것은 죽음의 행위다.

 그러나 흑포노인은 누가 잡아당긴 듯이 무서운 속도로 뒤로 물러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옆으로 움직일 그 찰나의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검과 하나가 된 흑포복면인이 허공에 뜬 채로 따라갔다.

 말이 따라가는 것이지, 실제로는 번쩍 하는 순간에 그는 흑포노인이 있던 자리에 도달했고 흑포노인은 질풍과 같이 물러났다. 그런 그를 섬광과도 같이 덮쳐 가는 그 시간은 눈 한 번 깜박일 시간에 불과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목이 달아난 다음일 터였다.

 "네가 천하무적이라도 된단 말이더냐!"

 흑포노인은 대갈일성, 고함을 치면서 양손을 회전시켰다.

 과우우…….

 주위의 공기를 뒤트는 와류(渦流)가 그의 장세를 따라 일었다.

 "비왕이 나타났다!"

 동시에 그가 화산을 떨어 울릴 듯이 고함쳤다.

 거기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한쪽에서 회색 빛 옷을 걸친 자들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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