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首 급전직하(急轉直下)
-감천형 분노하다.
어제의 동료(同僚)가 오늘의 적이 되다.
…….
아무도 말이 없었다.
"더 무슨 말을 할 것이지? 무슨 확인이 더 필요한가?"
봉설란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듯 감천형은 혜도의 시신을 내려놓고서 시선을 돌려 주빈석의 진자양과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을 바라보았다.
"말해 보시오."
깊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이 분노를 머금고 흘러나왔다.
"구대문파에서 행한 그 일을…… 그 천인공노할 만행. 인간의 탈을 썼다면 행하지 못할 그 일에 대한 변명을 해보시오."
감천형이 무서운 눈빛으로 진자양을 쏘아보면서 으르렁거렸다.
"……."
진자양은 창백한 얼굴로 우뚝 서 있었다.
가슴을 움켜쥔 그의 얼굴은 내상 때문인지 충격 때문인지 백지장과도 같았다. 늘 침착하던 그 얼굴은 이미 평정을 잃은 모습이었다.
…….
침묵이, 참담(慘憺)한 절망(絶望)이 건곤대전 안을 휩쓸었다.
긍지가 사라진 지금 여기 모인 군웅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변명을 하진 않겠소……."
마침내 진자양이 입을 열었다.
"장문인!"
운한검로 풍청도와 혜원 선사 등 선대 장로들이 소리쳤다.
하지만 진자양은 이미 결심을 한 듯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이 일을 알았던 것은 얼마 되지 않았소. 그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난 다음이었소. 맹주께서 돌아가신 다음이었고
다른 문파들도 크게 다르지 않소. 이 일을 아는 장문인들도 기실 몇 분 되지 않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감천형의 음성이 노기로 이글거렸다.
언제나 그에게 정중하던 그였다.
그러나 이젠 달랐다.
칼을 맞대고 싸운 적이라도 이렇게 저주스럽지는 않으리라.
"믿기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맹주께서 돌아가신 다음, 그 일을 안 나도 어이가 없었지만 누구에게도 그 일을 말할
수가 없었소. 혜도 선사는 그 일의 주창자이셨지만 그분의 의지는 확고했었소. 독고 맹주께서 무림을 지배하기 위한 음모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계신다고……."
"닥치지 못하겠느냐!"
봉설란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아직도 그 따위 가증한 말을 함부로 하여 돌아가신 분의 명예를 더럽히려 한단 말이냐?"
쓴웃음이 진자양의 얼굴에 떠올랐다.
"뭐라 하여도 변명할 말이 없지만…… 그 일을 알고 난 다음, 알아본 상황은 너무 좋지 않았소. 만약 그 일을 공표한다면 천하에
혼란이 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천교와 싸울 수가 없게 될 것이오. 우선은 수습이 급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소이다."
"그 악마들을 누가 키웠기에?"
봉설란이 코웃음 쳤다.
"혜도 장로와 다른 분들이 이 일을 계획할 때는…… 독고 맹주께서 천하에 군림하려 음모를 꾸민다는 확신을 가지고 계셨소.
그리하여 당시 세상에 해악을 주던 자들을 모아 그들과 독고 맹주를 같이……."
진자양은 탄식을 흘렸다.
"이독제독(以毒除毒)의 계(計)였지만 그분들은 당시의 상황을 좀 더 면밀히 검토해야 했었소……."
"검토했었소!"
혜원 선사가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형께서는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계셨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일을……."
"그 증거가 무엇이오?"
감천형이 눈을 부릅뜬 채로 소리쳤다.
그는 정말 분노하고 있었다.
사부는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요,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사내아이들에게 있어 자신의 아버지는 우상이다.
아이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다.
감천형에게 있어 평생 바램이 있다면 바로 사부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사부를, 평생을 협(俠)과 의(義)를 위해 밤잠을 설친 그 우상을 모독하는 자들을 그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더더우기 그 사부의 죽음이 그들의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니…….
극도의 자제심을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손을 써 이들을 모조리 쳐 죽이고 말았으리라. 아니, 지금도 그러고 싶었다.
혜원 선사가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독고 맹주는 각 문파에 자신의 첩자를 심어……."
"그만 해두시오!"
진자양이 소리쳤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로 혜원 선사를 쏘아보며 머리를 저었다.
"이 마당에 더 이상 고인을 욕되게 하여 무슨 의미가 있단 말씀이오?"
"하지만 이대로 우리가 누명을 뒤집어쓸 수는……."
"하! 누명이라고?"
봉설란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
"개도 주인을 물지 않거늘, 하물며 도탄에 빠진 무리들을 죽음에서 살려주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고도 모자라 누명?"
"말을 삼가시오! 독고 맹주는 각파에 첩자를 심어 각 문파를 자신의 수하로 거두어 독존천하(獨尊天下)하여 무림에 군림하려고
획책했었소! 우리는 자위(自衛)를 위하여……."
운한검로 풍청도가 발을 굴렀다.
"닥치지 못하겠소?"
감천형이 두 눈을 부릅뜬 채로 고함쳤다.
그는 격렬히 분노하여 전신의 옷자락이 절로 펄럭였고, 대전이 온통 쩌렁쩌렁 울렸다.
그 기세는 가히 놀라워 서까래가 떨리고 그의 주변에서 일진 질풍이 일 정도였다. 그의 눈에서 전광과도 같은 신광이 폭사된다.
운한검로 풍청도는 그 기세에 압도되어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랬다면 왜 그 당시 천하에 그 죄를 밝혀 묻지 못하고 암중에 제천교를 조직하고, 구대문파가 그들을 멸하는 각본을 쓴 것이오?
그게 아무런 흑심도 없이 천하를 위하여, 자위를 위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단 말이오?"
감천형의 고함이 대전을 떨어 울렸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설사, 건곤무적 독고해가 그런 일을 획책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대응에 분명히 문제가 있었음을 누구나가 느낄 수 있기에.
"당신들이 그러고도 협(俠)을 이야기하고 의(義)를 주장한단 말인가? 이 인면수심의 악도들 같으니……."
감천형이 눈을 부릅뜬 채로 이를 갈았다.
자제(自制)라는 것은 늘 한계가 있다.
감천형의 자제력은 이미 한계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직 내상이 낫지 않은 그다. 하지만 그런 것을 돌볼 상황이 아니었다. 말을 할수록 참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도 가증(可憎)스러웠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로 앞에 선 운한검로 풍청도를 향해 사나운 기세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숨 막힐 듯한 살기가 운한검로 풍청도를 핍박해 갔다.
풍청도는 전신 피부가 날카로운 송곳에 노출되는 것만 같았다.
숨조차 쉬기가 어려웠다.
그는 무림 유수의 구대문파, 그 가운데 공동파의 선대 장로다.
그럼에도 그는 정작 손을 쓰기도 전에 그 기세만으로도 감천형에게 압도되어 버렸다.
이미 살기는 무섭게 뻗어와 그의 전신을 공제(控制)한 상태였다.
이렇듯 기세에 휩싸이게 되면 손을 쓰기 전에 벌써 승부는 난 것과 다름이 없다.
설사 몇 초를 버틴다 할지라도 시간문제일 따름.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감천형이 그를 죽이고자 마음먹고 전력을 다해 그를 공격한다면 단 일 초에 그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었다.
풍청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이마에서 절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흘러내렸다.
감천형이 한 걸음을 더 다가오자 그의 눈에 공포의 빛이 드러났다.
견디지 못한 그는 부지중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감천형의 눈에서 살기가 일었다.
"총당주, 멈추게."
옆에서 청풍노인 사마무애가 저지했다.
감천형이 눈을 들었다.
대전 안 모든 사람들의 눈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지금 그가 손을 쓴다면 아마도 일거수에 풍청도를 쳐 죽일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을 시발로 하여 이 대전은 피비린내 나는 격전이 벌어지게 될 터이다. 사부인 독고해를 따르는 사람들과 구대문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간에 벌어질 그 혈투는 협의도의 분열과 종말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
여기저기 곤혹스러운 사람들의 모습과 금방이라도 손을 쓸 듯한 사람들의 모습들이 눈에 가득 찬다.
중도에 설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느 편이든 설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과는 참혹하리라.
"참게. 지금은……."
그의 어깨에 청풍노인 사마무애가 손을 얹었다.
감천형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주먹이 벌벌 떨렸다.
우두둑!
움켜쥔 주먹에서 고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바로 그때였다.
"아미타불……."
침중한 불호 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지금까지 참담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소림사의 장문인 대광 대사였다.
그는 길게 불호를 외곤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가 앞으로 나서자 그를 호위하는 좌우 호법승(護法僧)이 뒤를 따랐다.
하지만 대광 대사는 가벼이 손을 저어 그들을 멈추게 하고는 홀로 감천형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감천형은 청풍노인 사마무애의 만류와 대광 대사가 자신을 향해 다가옴을 보자 기세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와 같이 숨조차 쉬지 못했던 운한검로 풍청도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뒤로 몸을 빼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은 백지장보다 더 창백했다.
대광 대사는 감천형과 봉설란을 향해 합장을 해 보인 다음에 입을 열었다.
"나무아미타불…… 부인, 그리고 총당주…… 노납은 소림사의 당대 장문으로 참으로 할 말이 없습니다. 노납이 그러한 사실을 알았든 몰랐든간에, 또 돌아가신 독고 맹주께서 정말 그런 일을 했든 아니었든간에…… 본 사의 장로이신 혜도 사숙께서 제천교를 조직하였다면 오늘날 강호에 이러한 해악(害惡)을 끼치게 한 것이 본 사와 무관하지 않으니…… 어찌 본 사와 노납이 그 업(業)을 벗을 수 있겠습니까?"
소림사는 역대로 승적에 몸을 담은 다른 문파와는 달리 양 손바닥을 마주하는 합장을 하지 않고 한 손만을 가슴에 세워 반장(半掌)을 해 보인다. 그것은 지난날 소림파의 조사인 달마 대사에게서 의발(衣鉢)을 전수받은 혜가(慧可)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지금 대광 대사가 그들에게 합장을 해 보임은 의미가 사뭇 달랐다.
"호호호…… 그래, 어떻게 책임을 질 생각인가?"
봉설란이 날카롭게 다그쳤다.
그 모습에 소림사의 승인들이 일제히 나직이 불호를 읊조렸다.
거기에는 억눌린 분노의 모습이 역력하다.
소림사의 장문인은 존귀한 신분이었다.
불문의 거대한 세력인 선종(禪宗)의 시조이기도 하거니와 나라에서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문파였다. 당나라 때에는 나라를 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대내외적으로 우뚝한 소림사의 장문인. 그를 면전에서 이렇듯 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난날 무림맹의 맹주인 건곤무적 독고해까지도.
그녀의 다그침에 대해서 내심 고개를 젓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것은 소림사와 연관된 사람이긴 했지만 그 뒤에 일어난 일은 정말 상상을 뛰어넘었다.
"소림사는 어떠한 책임이라도 달게 지겠소이다."
소림사의 장문인, 대광 대사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다른 문파도 아닌, 세상에서 태산북두라고 일컬어지는 소림사.
그 소림사의 당대 장문인이 한낱 여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세상이 놀랄 일이고, 그 파격(破格)에는 봉설란은 물론, 감천형, 천풍노인. 그리고 진자양과 이 대전에 모인 그 누구도 놀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침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놀람의 빛을 드러냈다. 사방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장문인! 이럴 수는……."
그 옆에 서 있던 혜원 선사가 놀라 소리쳤다.
사람들의 놀람을 뒤로하고 소림사 장문인 대광 대사는 길게 탄식한다.
"아미타불…… 잘못을 범한 다음, 그 잘못을 덮기 위해서 더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은 옳지 않소이다. 사숙은 더 이상 무리하지 마시오."
"그……."
혜원 선사의 얼굴이 참혹히 일그러졌다.
"흥! 이렇게 해서 이 자리를 모면해 볼 생각인가?"
봉설란이 날카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추호도 그런 생각은 없소이다."
"없다? 그럼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이지?"
"하라시는 대로."
"그렇다면 목을 내놓아라!"
외침과 함께 봉설란은 돌연 앞으로 일장을 쳐냈다.
그녀의 일장은 쾌속무비하여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던 대광 대사는 채 피할 사이도 없이 그대로 그 일장에 얼굴을 얻어맞고 말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대광 대사는 자신에게 날아드는 공세를 보면서도 태연히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함이 옳았다.
펑!
폭음과 함께 그 강한 기세에 대광 대사는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만약 그 뒤쪽으로 좌우 호법승이 서 있지 않았더라면 기둥까지 굴러가 버렸을 막대한 타격.
그녀가 이렇듯 갑작스럽게 손을 쓸 것임을 짐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이 돌출한 행동에는 감천형마저 대경실색했다.
사방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혜원 선사가 눈을 부릅떴다.
좌우호법승이 다급히 대광 대사를 부축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일격에 머리가 으스러져 버렸으리라.
하지만 제아무리 공력이 심후한 대광 대사라고 할지라도 한쪽 머리가 피투성이였고, 입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림승인들의 두 눈에서 분노와 살기가 떠올랐다.
그 광경을 보면서 봉설란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
"목숨의 빚을 졌다면 목숨을 내놓는 것이 당연하지!"
"허어……."
청풍노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감천형을 돌아보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녀가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인 까닭이다.
옆에 있던 감천형조차도 놀라 미처 손을 쓰지 못했다.
일견해도 대광 대사의 상세는 심상치 않았다.
봉설란은 수중에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대광 대사의 불문내공이 정순하지 않았더라면 즉사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감천형은 그제서야 그녀의 무공이 자신이 알던 수준과 틀림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이건 너무하지 않소이까?"
잠자코 있던 구대문파의 고수들이 노기를 띠고 분분히 일어섰다.
"너무하다고? 무림을 지배하기 위해서 천인공노할 음모를 꾸민 자들이? 지금 너무라고 했나?"
봉설란이 코웃음 쳤다.
그녀의 얼굴은 서리가 낀 듯 차가웠다.
그 앞에 선 구대문파 장문인들의 얼굴은 침통했다.
진자양 또한 납덩이 같은 얼굴로 깊은 한숨만 불어낼 따름.
그때였다.
"맹주 건은 누가 뭐라든 구대문파가 책임을 벗을 수 없을 것이오. 하지만 부인의 이런 행동은 독고 맹주를 욕보이는 일에 다름이 아니외다!"
사납게 힐난(詰難)하는 음성이 터져 나왔다.
흰 수염을 나부끼는 강퍅한 생김의 노도(老道). 나이는 육순가량. 바로 청성칠자 중 하나이며, 당대 청성파의 장문인 수령자(修靈子)다.
그는 노한 눈으로 봉설란을 노려보면서 꾸짖었다.
"저간의 일은 구파의 장문인들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었소! 살피지 못한 책임이야 응당 우리가 질 것이오. 그러나 전후 사정을 살피지 않고 무작정 핍박을 한다면 그 결과를 누가 책임진단 말이오?"
"책임?"
봉설란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무슨 책임? 천하를 장악하려다가 의도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이 몸이 져드려야 합니까? 그렇게 해드릴까요, 장문인?"
그녀가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
그 태도나 어조가 비웃는 것임은 삼척동자도 역력히 알 수 있을 터.
"보자 보자 하니, 너무 방자하도다!"
수령자가 노해 발을 굴렀다.
그가 앞으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악적! 너도 목을 내놓아라!"
앙칼진 고함이 장중을 울렸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놀라운 속도로 수령자를 향해 덮쳐 왔다.
그것이 좀 전에 쓰러졌던 독고경임을 알아본 수령자는 미간을 찡그렸다.
"허어, 천방지축이로고. 물러나지 못할까!"
그가 독고경을 향해 일장을 쳐냈다.
원래 독고경은 진자양을 공격하다가 그의 자하신공에 내부가 반진(反震)되어 상세가 매우 중했다. 거의 혼절을 한 상태니 말해 무엇 할까. 그러나 상황이 급박하여 감천형은 그녀만을 돌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를 옆에 있던 수하, 신응(神鷹) 조철군(曺鐵軍)에게 맡겨둔 채로 봉설란에게 달려가야만 했다.
신응 조철군은 녹록한 사람이 아니었다. 직위는 무림맹의 향주이지만 영민(英敏)하고 무공도 높아 감천형이 신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신응 조철군이 당황한 표정으로 우뚝 서 있었다.
그것은 채 손도 쓸 수 없는 사이에 일어난 일임을 의미한다.
일별하는 사이에 상황을 판단한 감천형은 다급히 몸을 날렸다.
"멈춰!"
하지만 상황은 이미 쏘아진 화살과 같았다.
독고경이 수령자를 덮쳐 간 것은 가까운 곳인데다가 그 속도 또한 놀랄 만큼 빨랐다. 좀 전에 진자양을 공격했던 바로 그 일격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놀라 그곳을 바라볼 때, 그녀의 일장은 이미 수령자에게 들이닥친 다음이었다.
팡!
폭음이 일었다.
"크윽!"
쥐어짜는 신음이 그 뒤를 이었다.
수령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부릅뜬 채로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가슴을 움켜쥔 그의 입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린다.
경호성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단 일 격으로 청성파의 장문인을 패퇴시키다니!
구대문파, 그것도 청성파의 장문인인 수령자의 무공이 어찌 그렇듯 만만한 것일까.
그는 청성 진산(鎭山)의 응원공(凝元功)을 운기하여 독고경의 일장을 맞받아쳤다. 그러나 그가 채 힘을 쓰기도 전에 독고경의 일장이 기이하게 꺾어지면서 놀라운 속도로 그의 가슴을 쳐버린 것이다. 겉보기로는 두 사람의 일장이 부딪친 듯했지만 실제로는 독고경은 그와 부딪치지도 않았다.
수령자는 술 취한 듯 비틀거리면서 물러났지만 독고경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바람처럼 다시금 진자양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감히! 물러나지 못할까!"
진자양의 주위에 있던 화산칠수 중 둘이 노호를 터뜨리면서 일제히 검을 휘둘렀다.
그들은 이미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기에 그 위세는 험악했다.
"으악!"
"와아악!"
하지만 독고경이 그들에게 덮쳐 간 순간, 그들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를 뿌리며 날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진자양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대전 안은 경악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독고경의 진격(進擊)은 그야말로 질풍과도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 순간, 다시 날아올라 수령자를 덮쳐 가고, 그를 일거수에 패퇴시키면서 허공을 가로질러 진자양을 덮쳤다. 그러한 그녀를 가로막던 화산칠수 중 둘이 그녀가 손 한 번 드는 순간에 피를 토하고 거꾸러졌을 때, 그녀의 신형은 화산칠수가 있던 자리에 내려섰다.
아니, 내려서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에 그녀의 신형은 이미 진자양의 코앞에 들이닥쳐서 그에게 일장을 쳐가고 있었다.
무인지경을 질주하는 것 같은 그 기괴한 속도의 빠름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정말…… 인가?"
그녀의 장세를 보던 진자양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 자줏빛 광채가 어렸다. 다음 순간에 그는 나지막한 호통과 함께 앞으로 일장을 마주 쳐냈다.
막대한 잠력이 그 일장을 따라 일어났다.
그제서야 그 자리로 날아든 감천형은 그것을 느끼고 안색이 대변했다.
"멈……!"
펑!
굉량한 맞부딪침.
일진 무서운 소용돌이가 폭풍과도 같이 세차게 일어났다.
나지막한 신음.
그처럼 무섭게 앞으로 질주해 가던 독고경의 신형이 마치 하늘을 가로지르다 화살을 맞은 새처럼 그대로 훌쩍 튀어 올랐다가 뚝 떨어졌다.
그러한 그녀의 신형을 그제서야 그 자리에 당도한 감천형이 받아냈다.
좀 전과는 달리 물 먹인 솜과 같이 그녀는 그의 팔 위에서 축 늘어졌다. 얼굴은 회색 빛이고 앵두 빛 입술 또한 회백색, 그 입에서는 선혈이 밀려 나오고 있어 상세가 간단치 않은 듯했다.
눈마저 꼭 감은 상태.
"이런……!"
뭔가 입을 열려고 고개를 들던 감천형은 놀라 입을 닫았다.
진자양이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서고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파각, 파가각…….
그의 발 밑에 깔린 대리석이 마치 분가루처럼 부서지면서 위로 먼지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드러나는 선명한 족적이 하나둘…… 늘어갔다.
누가 손쓸 사이도 없이 뒤로 밀려난 그의 신형은 뒤에 있는 기둥에 등을 부딪치고서야 겨우 멎었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끽끽 하는 비명을 기둥이 질러댔다. 진자양의 위쪽, 기둥이 맞닿은 천장에서 흙먼지가 진자양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마교…… 정말 마교의 혼단백절수(魂斷魄絶手)로구나!"
진자양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교(魔敎)!
그 한마디는 대전을 얼어붙게 하기에 족했다.
그 단어는 바로 공포와 저주를 상징하기에.
마교라는 것은 금제(禁制)된 단어다.
교(敎)라는 것은 사람들의 믿음을 의미하지만 마교라는 단어는 믿음이 금지된 교를 의미한다. 그리고 당대에 있어 마교는 태조 주원장을 도와 명을 일으켰던 백련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세간에는 알려져 있었다.
하나 무림 중에서 전해져 오는 마교라는 이름의 의미는 그와 다르다.
오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이름. 공포와 저주로 얼룩진 그 이름이 마교다. 세상의 사공이학(邪功異學)이 모두 마교에 뿌리를 두고 전수되었고, 새로이 창조된 마공이라 할지라도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도록 그 영역은 거대하고 무서웠었다.
세상을 거부하고 어둠을 쫓아 악마를 숭배하는 무리.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마교였다.
그 잔혹함 때문에, 그 공포를 물리치기 위해서 수많은 피가 흘렀다.
그렇게 해서 마교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한 자락이라도 마교의 흔적이 보이면 무림 전체가 나서서 그들을 말살해 왔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 마교라니…….
"마교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감천형은 정신을 잃은 독고경을 안은 채로 사납게 꾸짖었다.
"보고도 모른단 말이오? 그녀가 전개한 그 무서운 일장…… 그것이야말로 마교의 혼단백절수……. 그 일장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 청성의 응원공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화산의 자하신공을 파괴할 수 있겠소?"
진자양은 입에서 선혈을 흘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 그런……!"
감천형은 그녀의 일장을 떠올리곤 얼굴이 창백해졌다.
과연 그녀의 무공은…….
"흥! 이젠 그 아이를 마교의 후예로 몰아서 삭근제초(削根除草)를 할 작정인가? 과연 천하의 구대문파답군! 정말 대단해……. 이 몸은 어떻게 처리를 할 생각인지 말해 보시지?"
봉설란이 나서며 코웃음 쳤다.
"감 당주……."
진자양은 가슴을 움켜잡은 채 감천형을 불렀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감천형을 바라보면서 다시 말했다.
"한 가지만 물어보겠소. 지금…… 감 당주는 정상이오?"
듣자니 그의 말은 심히 괴이하다.
"그게 무슨 뜻이오?"
감천형의 되물음에 진자양은 일그러진 얼굴로 답했다.
"내 몸은 정상이 아니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마교의 혼단백절수라고 할지라도 이렇듯……."
뒷말을 더 들을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몸이 정상이었다면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
그 말에 대전 안에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모두 돌변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놀람에 찬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중독?"
감천형의 안색도 창백해졌다.
운기를 해보자 진기가 정상이 아니었다. 단순히 그가 입은 내상 때문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느낌. 진기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말을 듣지 않는다기보다는 전신 기혈이 흩어지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주, 중독이다!"
"도대체 이건……?"
술렁거림이 큰 파도와 같이 대전을 뒤덮었다.
"누가 독을 쓴 거지?"
"진 장문인, 이게 어떻게 된 거요?"
술렁거림과 고함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자리의 주인은 화산파이며, 당대 화산파의 장문인은 바로 중독을 처음 이야기한 진자양인 까닭이다.
그러나 진자양이 아는 일이라면 그가 감천형에게 물었을까.
무림의 공적, 제천교를 상대하기 위하여 열린 무림대회는 정말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모든 군웅들은 당황스럽고 굳은 얼굴로 자신의 몸을 점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긴장이 살처럼 대전을 꿰뚫고 흘렀다.
"아무래도 이건 산공독(散功毒)인 것 같소……."
"대체 어떻게? 아침까지, 아니, 여기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데 언제 중독이?"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다.
"진 장문인,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
누군가가 진자양을 향해 노한 어조로 외쳐 물었다.
그러했다.
여기 오기 전까지 멀쩡했다면 중독은 이곳에서 되었다는 말. 군웅들은 여기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음식을 든 사람도 거의 없었다. 간략한 주효(酒肴)가 차려져 있었지만 대부분 차를 입에 댄 것뿐, 음식을 먹고 즐길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이오?"
가슴을 움켜쥔 진자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황이 이렇게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의 주인인 그가 어찌 혐의를 벗을 수 있을 것인가.
바로 그때였다.
"적이다!"
바깥에서 갑자기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참담한 비명 소리가 그 뒤를 이어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
얼떨떨한 표정으로 군웅들이 바깥을 내다보았다.
의문을 풀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한 사람이 뛰쳐 들어왔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순찰당의 당주인 천수단혼 좌백이었다. 급하게 뛰쳐 들어온 그는 대전의 괴이한 분위기에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바깥의 경비를 책임졌던 그인지라 대전 내부의 일을 알지 못함은 당연했다.
"무슨 일이냐?"
감천형이 물었다.
그가 축 늘어진 독고경을 안고 있음을 보자 좌백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다급히 소리쳤다.
"제천교가 공격해 왔습니다!"
그 말에 놀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공교롭다는 것인가?
"전력을 다해 막고 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외곽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전혀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외부 방어선은 이미 무너진 상태입니다. 전면으로 뚫고 들어오는 적이 너무 막강합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그 음성은 급박했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순찰을 책임진 그가 이곳까지 직접 쫓아 들어왔을까.
바깥에서는 격렬한 싸움 소리가 들려온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싸움 소리라기보다는 급박한 비명 소리가 꼬리를 물고서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급격하게 대전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일단 모두 본전까지 후퇴시켜 두었습니다. 대책을!"
말과 함께 좌백은 다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이 마당에 무슨 대책이 있을 것인가?
대전 안에 있던 군웅들은 오늘 화산에 모인 전력의 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간다면 제천교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충분히 자웅을 결할 수가 있으리라.
구대문파 전체라면 천하의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그들을 제물(祭物)로 삼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좀 전까지의 상황이다.
봉설란이 나타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언제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군웅들 모두가 중독되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좋아……. 잘하는군! 어미를 잡아먹으려는 살모사가 나타난 모양이니,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지 지켜봐야겠군."
봉설란이 냉소를 터뜨렸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지만 지금 그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적을 막은 다음…… 이야기합시다!"
진자양이 이를 악물고서 소리쳤다.
감천형은 답하지 않았다.
태도를 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 그처럼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무림의 평화를 깨뜨리려는 자들을 막기 위해서 움직였었고, 한 점의 회의(懷疑)도 없었다. 사부의 삶이 그러했었고 자신 또한 그를 우상으로 삼아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었다. 그런데 자파의 이익을 위해서 무림의 평화가 어떻게 되든, 세상이 어떻게 되든간에 뒤에서 그런 음모를 꾸민 자들과 행동을 같이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 음모로 인해 천하가 어지러워지고 사부가 죽었는데도?
신명을 다해 저지하려던 적의 실체가 어제까지, 아니, 조금 전까지도 생사를 같이하는 동료로 생각했던 자들이 만들어낸 꼭두각시였음에도 그래야 한단 말인가?
사부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였을까.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판단이 서지 않았다. 너무 충격이 큰 까닭이다.
"감 당주……."
그를 부르던 진자양은 길게 탄식을 하며 발을 굴렀다.
동시에 그가 있던 자리에 핏방울이 뿌려졌다. 진자양의 신형이 바람처럼 대전의 밖으로 쏘아간 까닭이다. 그가 입고 있는 내상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나가자 굳은 얼굴의 군웅들이 하나둘 몸을 날렸고, 이내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으악……."
"으아아……."
비명 소리는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지 않은 사람들이 감천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청풍노인 사마무애가 물었다.
"나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간다고? 저들을 도우러 말인가?"
봉설란이 날카롭게 다그쳤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 저들이 제천교에 당하고 나면 누구 차례이겠습니까? 그들이 우릴 그냥 둘 리가 없겠지요. 사마공봉께선 어떻습니까?"
얼핏 들으면 청풍노인의 의견을 묻는 것 같았지만 그 의미는 달랐다.
"노부 또한 중독되었네. 지금 상태라면 평소에 비해 칠 할 정도나 될는지……."
청풍노인이 말끝을 흐렸다.
얼핏 자신이 가진 것의 칠 할이라면 별게 아닌 듯하지만 정작 싸움에서 칠 할의 힘밖에 발휘할 수 없다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더더구나 중독이 된 상태라면 그 칠 할은 더 내려갈 수도 있고 무리한다면 스스로 무너져 버릴 수도 있었다. 중독된 사람은 움직이지 말고 운기하여 독기에 저항함이 일반적이고 당연한 수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감천형은 신음을 흘렸다.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더 가깝고 더 처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