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首 화산대회(華山大會)
-군웅들이 모여들다.
뜻밖의 사태(事態)에 천하가 숨을 죽이다.
화산의 아침이 밝았다.
어쩌면 지루하고도 기나긴 그 밤이 지나자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긴장된 밤이 아침 햇살에 밀려 흩어지면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화산파의 중심부인 건곤대전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이야말로 구대문파의 중심 세력이었다.
화산장문 진자양을 비롯하여 소림, 무당, 곤륜, 청성, 아미, 종남, 공동, 점창까지.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모두 참가했다.
밤을 꼬박 샌 좌백은 조금 굳은 얼굴로 그들이 건곤대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잠을 설치면서 경계하고 일대를 수색했지만 그 뒤로는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더욱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왠지 태풍 전야의 고요와 같은 느낌.
만약, 이것이 정말 태풍 전야의 고요라면 적은 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일까?
그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아침 햇살은 너무도 맑고 화사했다.
건곤대전은 화산파의 정전(正殿)이다.
평소에는 그처럼 넓어 보이던 곳이 지금은 많은 사람들로 인해서 서로의 체온이 느껴질 정도였다. 얼핏 보아도 근 이백 명에 이르는 군웅들이 그 자리에 모여 있었다.
중앙에는 소림과 화산, 무당 등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자리하고, 감천형과 기타 무림의 명숙(名宿)들이 앉아 있다. 그리고 좌우로 늘어앉은 사람들 그 어느 누구도 만만히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얼굴은 무거웠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에도 대전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 침묵을 깨뜨리며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진자양이었다.
"시일이 너무 촉박하였음에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셨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미거하지만, 오늘 이 자리는 본 장문인이 무림맹 맹주 대행의 신분으로서 잠시 주지(主持)하겠습니다."
낭랑한 진자양의 음성이 대전에 울려 퍼졌다.
가벼운 박수 소리, 그리고 묵묵한 고개의 끄덕임이 대전에 출렁였다.
원래대로라면 그의 말에 대전이 떠나갈 듯한 박수와 환호가 일어야 할 것이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비상대책회의를 여는 것이기에 좌중은 숙연하기만 하였다.
"감사합니다."
군호들을 향해 머리를 숙여 보인 진자양은 감천형을 향해 물었다.
"감 총당주. 참석하실 분들은 모두 오신 거요?"
"그렇습니다. 예정되었던 분들은 모두 참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무림맹의 임시 대회를 열기로 하겠습니다. 원래 대회는 오후에 시작을 할 예정이었지만, 알려진 바와 같이 어제부터 심상치 않은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어서 조금 앞당겨서……."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전의 문 쪽으로 화산파의 제자가 한 사람 들어왔다.
그의 기색을 보자 문가에 있던 화산파의 장로 일검개화(一劒開花) 조도룡(曺屠龍)이 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을 전해 들은 그는 조금 놀란 빛으로 진자양을 건너보았다.
"무슨 일인가?"
진자양이 그를 보면서 물었다.
"전 맹주의 부인이신 독고 부인께서 당도하셨다는 전갈입니다."
"독고 부인이?"
진자양이 뜻밖이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것은 감천형도 마찬가지였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했다.
그녀는 독고해의 생전 바깥일에 참견한 적이 없었고, 외부의 일에 얼굴을 내민 적도 없었다. 더구나 무림맹이 화산으로 옮겨올 때 그녀는 굳이 화산으로 따라오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안으로 모시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감천형도 그를 따라나갔다.
사모가 오신다면 당연히 나가서 맞아들여야 했다.
감천형이 나가는 것을 본 진자양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독고 맹주가 무림맹을 비롯, 천하무림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큽니다. 그 미망인께서 오셨다면 잠시 기다려 그분을 맞이한 다음에 개회(開會)를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아미타불…… 옳습니다."
소림사의 대광 대사가 먼저 동의를 표했다.
그 말에 반대할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봉설란은 가마를 타고 나타났다.
모두 백의에 장검을 패용(佩用)한 무사들의 옹위를 받으며 나타난 가마는 한 채가 아니라 모두 세 채나 되었다.
정교한 솜씨로 만들어진 가마는 매우 화려하여 왕후장상의 행차를 보는 듯했다. 그것도 한 채가 아니라 세 채나 되니 당연한 일. 게다가 그 가마를 호위하여 나타난 백의무사들의 숫자도 얼핏 보아 서른은 족히 되니 간단한 형상은 누가 봐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감천형은 가슴이 뭉클했다.
그들이 갖춘 복색이 맹주부를 경비하던 호맹위 가운데 내원(內院)을 경비하던 기린위(麒麟衛)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맹주 부인이 외출을 할 때마다 그들은 가슴에 기린을 그린 그 옷차림으로 같이했었다.
그때의 맹주부는 얼마나 위풍당당했던가.
그들을 보자 그처럼 당당했던 맹주부의 모습이 떠올라 감천형은 가슴이 저며오는 것 같았다. 철혈이라고까지 불리는 그였지만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들을 선도하여 오는 것은 바로 좌백이었다.
"사모님이십니다."
감천형이 다가옴을 보자 좌백이 말했다.
가마가 멎었다.
그리고 가마의 문이 열렸다.
전 맹주인 건곤무적 독고해.
맹주 부인이면서도 실제로는 강호와는 전혀 상관없었던 그의 부인이 나타난 것은 분명히 의외라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새로운 맹주를 선출하는 무림대회에 맞춘 듯이 나타난 것은 무엇인가 묘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들어올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문으로 나타난 것은 방금 나갔던 감천형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선명한 백의무복을 차려입은 무사들의 옹위를 받으며 고아한 기품을 지닌 중년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십시오."
진자양이 일어나서 그녀를 맞이했다.
그뿐 아니라 대전 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였다.
건곤무적 독고해가 무림에 남긴 족적은 너무도 거대하여 그의 사후라 할지라도, 누구도 그녀를 홀대할 수가 없었다.
봉설란은 그를 보면서 가벼이 고개를 숙였다.
"이 몸이 너무 늦지 않았나 모르겠군요. 몇 가지 일이 있어서 제 시간에 온다고 하면서도……."
"별말씀을, 이렇게 와주시니 정말 영광입니다."
진자양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지만 그를 보는 봉설란의 눈은 차가울 만큼 서늘하였다.
봉설란이 나타남으로 잠시 술렁거렸던 장내가 가라앉자 화산지회는 다시 시작되었다.
시간이 촉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모인 사람은 적지 않았다.
비록 구파 위주의 모임이긴 하여도 구대문파와 연관이 있는 무림의 제파(諸派)들이 모두 모였기 때문이다. 비록 전 무림이 운집했던 그 오래전 무림맹 창설 당시보다야 못하지만 지금의 규모도 결코 작다 할 수 없었다.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은 평소 강호 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들 모두가 모여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무림 중에는 일대 사건이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여기 모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사태는 급박했다. 천하의 정세는 그야말로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다고 할 정도였기에. 무림맹이 뿌리째 흔들리고 악의 세력은 천하에 창궐하고 있었다. 무림맹 이전부터 천하무림을 지켜왔던 구대문파로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림, 무당, 그리고 새롭게 떠오른, 화산의 진자양 등을 비롯한 구대문파의 장문인들과 각파의 고수들. 거기에 더해서 각지의 영웅호걸들까지.
낙양에 본거를 둔 천하제일의 표국인 천룡표국의 국주인 금환대도(金環大刀) 주전(周全), 산서대협(山西大俠)이라 불리는 산서무림의 영도자 사마주(司馬週). 호남의 명문 은창보(銀槍堡)의 보주이자 일대고수인 은창무적(銀槍無敵) 수천세(帥千歲). 사천의 이름 높은 당가의 장로인 일수탈명(一手奪命) 당자도(唐子都)와 호남의 유력자 열화태세(熱火太歲) 가염(賈炎) 등…….
그 면면을 헤아리자면 끝이 없을 터이다.
잠시 좌중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던 진자양은 그들의 면면을 헤아리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주빈석 아래쪽을 보고 멈칫했다.
검은 옷을 입은 소녀 하나가 앉아 있음을 발견한 까닭이다.
독고경이었다.
죽은 전 맹주의 딸.
절차대로라면 그녀는 당연히 봉설란과 같이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앉은 주빈석에 자리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조금 앞자리에 예의 차가운 얼굴로 묵묵히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진자양이 알기로는 그녀가 아직 거처에 있어야 했다.
그런 그녀가 언제 들어와 그 자리에 있는지 의외이긴 했지만 이미 그녀와 봉설란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음을 들은 바 있는 그는 그녀를 못 본 척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 무림맹은 무림의 공도(公道)를 주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비명에 가신 전 맹주께서는 무림을 위하여 무려 20년 간이나 동분서주, 쉬지 않고 노력하셨습니다. 그분의 생존 시, 사마(邪魔)는 강호에서 숨을 쉬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분이 비명횡사하실 줄이야 누가 짐작이라도 하였겠습니까?"
전 맹주인 건곤무적 독고해의 이야기가 나오자 좌중은 숙연해졌다.
30년 전, 필마단기로 홀연히 나타나서 고군분투, 당시 천하를 피바다에 몰아넣었던 암흑신도가(暗黑申屠家)의 음모를 분쇄하고 난마와 같이 흐트러졌던 무림에 일대영웅으로 떠올랐던 사람.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면서 무림맹은 누가 시킨 듯이 독고해의 행보에 따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무림맹은 이후 지금까지 20년 간을 지속하면서 무림의 법이 되었었다.
그의 족적은 그야말로 거대했다.
일장진천(一掌震天)-일장은 하늘을 떨어 울리고
일검정해(一劒定海)-일검으로 광란하는 바다를 잠재운다.
그 여덟 자의 신화는 아직도 사람들의 눈과 귀에 생생한 현실이었고, 그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사람들에게는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하기에 그는 건곤무적 독고해라 불리웠다.
"암흑신도가의 분란 이후로 강호무림은 독고 맹주와 무림맹으로 인해 태평성세를 구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독고 맹주께서는 늘 강호의 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우셨고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어떤 확신입니까? 설마 독고 맹주께서는 전부터 오늘날의 사태를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겁니까?"
호남성의 거두(巨頭) 팔보단장수(八步斷腸手) 두약천(杜若泉)이 물었다.
"그랬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진자양은 주위를 돌아보면서 무겁게 말을 이었다.
"맹주께서 감 총당주를 비롯하여 몇 사람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저도 거기에 해당됩니다만…… 정체 모를 힘이 움직이고 있다. 그들의 힘은 이미 오래전부터 강호상에서 준동해 오고 있었으며, 만약 그들이 실체를 드러내면 암흑신도가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런지도 모른다……."
"음……."
"그, 그런……!"
그의 말에 사방에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암흑신도가 당시의 상황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 말에 놀라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암흑신도는 궤계(詭計)와 음모(陰謀)로써 천하무림을 뒤집어놓았고 그때의 사태는 정말 너무도 참혹하리만큼 심각했었기에.
그때 쌓인 상호 불신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무려 10년의 세월이 필요했었다. 그런데 그때와 비교할 수도 없다니…….
긴장이 좌중을 짓눌러 들었다.
감천형은 그런 진자양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암중에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들을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가졌다.'
사부와는 다르지만 진자양은 또 다른 힘으로 사람들 앞에 서 있었다.
"독고 맹주께서는 마지막 길을 떠나시면서 당시 폐관수련에 들어 있는 본 장문에게 따로 서신을 보내시길, 이번 출정에서 내가 예측하고 있던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면 천하무림은 생사를 건 일전을 벌여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힘을 비축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이후, 독고 맹주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진자양의 음성이 비통으로 떨렸다.
좌중이 숙연해졌다.
"제천교는 그렇게 나타났습니다. 돌아가신 독고 맹주의 유체를 거적에 싸서 돌려보냈다가 다시 도적질하는 능멸(凌蔑)을 일삼으면서……."
여기저기에서 분노에 찬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감천형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봉설란의 얼굴은 차디찰 만큼 고요했다. 그녀의 눈은 비웃는 듯 주위를 돌아보다가 그 아래쪽에 앉아 있는 독고경에게 머물렀다.
독고경은 두 손을 앞쪽에 모은 채 앉아 있는데, 늘 그렇듯 얼굴빛은 얼음처럼 차디찼다. 고개를 바짝 든 것도 아니고 무엇인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반개한 채로 앉아 있는 모습이 진자양의 말을 듣고 있는지조차 알기 힘들었다.
"그리고 제천교는 과연 천하를 횡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자양의 음성이 장내를 맴돌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비분강개한 빛이 가득했다.
"부끄럽게도 그들에게 쫓겨 무림맹은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천하무림은 치욕의 세월을 보내야 할 겁니다. 더 이상 그들이 커지기 전에, 그들을 막아야만 합니다. 아니, 그들을 궤멸시키고 독고 맹주의 한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진자양의 눈에서 전광과도 같은 빛이 폭사되어 나왔다.
누군가가 박수를 쳤다.
그러자 마치 천둥과도 같은 박수 소리가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무림맹은 다시 복원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진자양은 박수 소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주위를 돌아보면서 다시금 말을 이었다.
"기밀 유지를 위해서 전과 같이 성대하게 천하무림 모두를 모아놓고 대회를 치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구대문파를 비롯한 제파로써 무림맹을 재구성하고 제천교와 맞서면서 힘을 규합하고자 합니다. 이의있으신 분은 말씀해 주십시오!"
"……."
사람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서로 이의가 있느냐고 묻기라도 하는 듯한 몸짓.
그때였다.
"왜 천하무림에 통보를 하고 대회를 치를 수 없지요?"
느닷없이 들려온 음성에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뜻밖에도 말을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봉설란이었다.
이 상태에서 그녀가 그런 말을 할 것임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자양의 얼굴에도 당황한 빛이 떠올랐고, 감천형도 놀라 그녀를 보았다.
"무림이 어려울수록, 상황이 어려울수록 정당하게 천하에 알려 천하무림의 힘을 결집해야 하는 게 아니던가요?"
봉설란의 음성이 다시 대전 안을 울렸다.
진자양은 이내 미미한 웃음을 떠올리곤 침착히 답했다.
"그렇게 하기에는 적의 세력이 너무 강합니다. 게다가 그간 파악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각파에 첩자를 깔아두었는데……."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런 말까지 드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들의 첩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각파에 침투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런 모임을 갖는 것을 지금도 그들이 모를 리가 없겠지만, 대회를 크게 치른다면 우리 내부의 모든 일을 그들이 손바닥 보듯이 알게 될 겁니다. 더구나 그들 중의 첩자가 우리에게 침투해서 방해를 한다면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적암아명(敵暗我明)의 상태가 된다면 우리로서는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것 때문에 우선 여기에 모인 분들을 위주로……."
"구대문파에는 첩자가 침투해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봉설란의 계속된 질문에 사람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사모님……."
감천형이 입을 열자 진자양은 가볍게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부인께서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그의 말에 봉설란의 얼굴에 미미한 웃음빛이 돌았다.
"그렇게 보이나요?"
"허어……."
여기저기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전 맹주의 부인이라고 할지라도 이건 심했다.
그녀가 나설 자리가 아닌 것이다. 더구나 이런 식으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다니…….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하시지요. 경청(敬聽)하겠습니다. 돌아가신 독고 맹주를 생각해서라도 당연한 일이지요."
진자양이 웃음기 띤 얼굴로 말했다.
말투는 부드럽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분명한 질책이었다.
독고해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그 정도에서 그치라는.
그러나 봉설란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태연하였다.
"이 몸은 화산으로 오던 중, 몇 사람을 만났고 그중 몇 사람을 같이 대동했습니다. 그들을 한번 만나보시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좌중에는 아연 긴장이 감돌았다.
이젠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공연히 나선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나타난 것임을.
…….
갑자기 대전이 조용해졌다.
뜻밖의 일이 생긴다면 수군거림이 크게 이는 법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생긴다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해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상태를 지나쳐 대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긴장으로 굳어져 있기에 조용하였다.
"누구와 같이 오셨습니까?"
진자양의 물음에 봉설란은 미미하게 웃었다.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요. 총당주?"
그녀가 감천형을 바라보았다.
"예, 사모님."
감천형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좀 전에 나와 같이 온 가마를 이 안으로 들어오게 해주겠어요?"
"가마를…… 말입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는 들어오면 모두 알게 되겠지."
감천형과 눈이 마주친 진자양은 머리를 끄덕여 찬동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상대인만큼 어떻게 하기가 거북한 것이다.
과연 그녀가 무슨 의도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인지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마당이기도 했다.
감천형이 밖으로 나가자 봉설란은 서늘한 눈매로 대전 안의 군웅들을 돌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오래전에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절세의 지혜를 가졌기에 오만하고도 편협하여 누구도 그보다 뛰어나기를 원하지 않았죠. 그러나…… 공교롭게도 강호에 한 젊은 영웅이 등장하자 그는 앙앙불락(怏怏不樂)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그가 왜 세상 사람들의 기림을 받는지 이해할 수도, 하고 싶지 않았던 거지요……."
그녀의 말이 대전을 조용히 울릴 때, 감천형이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뒤에는 백의무사 네 사람이 든 가마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또다시 한 채의 가마가 따랐다. 결국 봉설란과 같이 온 세 채의 가마 중 두 채가 이 대전 안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군웅들의 의혹에 찬 눈빛 속에 가마는 대전 가운데 놓여졌고, 가마를 내려놓은 여덟 명의 백의무사들은 그 좌우로 늘어섰다.
봉설란의 음성은 계속되었다.
"새롭게 등장한 젊은 영웅은 혼란에 빠진 천하무림을 바로잡으면서 무림의 추대를 받아 천하무림맹의 맹주가 되었어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 사람들의 안색이 모두 돌변했다.
조용했던 대전 안에 갑자기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인의 말씀은 독고 맹주를 의미하는 것이오?"
누가 확인하듯이 물었다.
봉설란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주위를 돌아보며 말을 계속했다.
"그는 그 젊은 영웅을 용납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그는 그를 해칠 궁리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도당(徒黨)들을 끌어 모았죠."
사람들이 모두 홀린 듯 그녀의 입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 중 몇 사람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음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간악한 자들을 끌어 모은 그는 마침내 그 젊은 영웅을 무너뜨릴 음모를 진행하기 시작했죠. 평온했던 무림에 암중으로 불안을 조성하면서 일방 천하무림맹을 쓰러뜨릴 세력을 조성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녀의 눈에서 차가운 빛이 서릿발처럼 일었다.
마치 잘 갈아놓은 비수 두 자루가 그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 눈에 깃든 것이 처절한 한(恨)임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아직도 아름다운 앵두빛 입술은 격동으로 깨물려 금방이라도 피를 흘려낼 것만 같다.
자면성모(慈面聖母).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던 그녀다.
누구도 그녀의 이러한 모습은 본 적도 생각한 적도 없었다.
"사, 사모님! 그럼 사부님을 해친 자들의 정체를 알아내셨다는 말입니까?"
감천형이 격동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그럼?"
"그게 누굽니까? 대체 누가 그런 일을?"
사방에서 웅성거림이 크게 일었다.
"……."
진자양의 얼굴은 납덩이와 같았다.
그녀가 그 일을 알 가능성은 없었다. 아니, 전무하다고 해야 옳을 터이다. 자면성모라는 거대한 이름을 가졌지만 실제로 그녀는 집안에서 살림을 하던 주부다. 무공조차 없다고 알려졌던 그녀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상황은…….
침착하고 과감한 그도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황은 그가 손을 쓰기 전에, 손을 댈 수 없도록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힘을 모으고 암중 세력을 조성하면서 그 세력과 약속을 했죠. 무림맹이 쓰러지면 그 자리를 그 세력에게 물려주겠노라고. 그래서 그 세력은 하늘과 그 자리를 나란히 하겠다는 제천(齊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고, 그 약속을 비약(秘約)이라고 했다더군요. 혹시 진 장문인께서는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문득 말을 끊은 봉설란이 진자양을 돌아보며 물었다.
대전 안은 크게 술렁이고 있었다.
봉설란의 말이 실로 놀랍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진자양은 내심 당황했다.
그녀가 갑자기 자신에게 화살을 던져 왔기에. 물론 그녀가 자신에게 화살을 돌려올 것임은 당연히 짐작을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그렇게 질문을 던져 올 것임은 몰랐다.
당황한 빛이 그의 얼굴에 스쳐 갔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찰나간. 누가 지켜보고 있다 할지라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순간적이었고 그의 안색은 누가 봐도 여일했다. 하나 상황이 상황인만큼 그의 얼굴은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본 대행을 비롯한 감 총당주까지, 우리는 그간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었습니다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었는데 부인께서는 대체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알아내셨는지 놀랍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어디서 그런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그 파장은……."
그의 말은 우회적이긴 하지만 봉설란의 말에 흠집을 내고 있었다.
그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봉설란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고 계셨다는 말이로군요. 그런가요?"
그녀는 진자양을 보면서 차갑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진자양은 가슴이 섬뜩하였다.
그는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폭로(暴露)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막아야 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천하를 위하여…… 그것만이 불신으로 얼룩져 분열될 천하를 구할 수가 있었다.
하나 이미 주도권은 그녀가 쥐고 있었다.
진자양이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봉설란은 그를 비웃듯 다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악마는 비약을 만들어 무림맹주를 함정으로 몰아넣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그의 뜻대로 그 젊었던…… 아니, 이젠 젊은 영웅은 아니로군요. 그는 쓰러졌어요. 무림맹도 붕괴 직전에 이르렀고……."
문득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죠. 이 일이 그의 복안대로 되고 있음을. 천하무림에 다시 일기 시작한 그 겁난이 바로 그 악마의 권력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호호호……!"
갑자기 그녀가 날카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가증스럽게도 제천교를 만들어 암중 조종하면서 천하에 겁난을 일으켰어요. 그리고는 이번에는 그 제천교를 제물로 하여 스스로가 천하의 구성(求星)이 되고자 했죠. 새로운 무림맹을 만들어서."
갑자기 물을 뿌린 듯 사방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간, 뒤이어 격렬한 외침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요?"
"그럼 그 악마라는 자가, 암중의 원흉이 구대문파에 있기라도 하단 말씀입니까?"
"말도 안 돼…… 그런……."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경악의 외침.
"사실이에요."
낭랑한 음성이 그 소란을 누르고 들려왔다.
봉설란의 음성이었다. 그녀의 음성은 그 소란스러움을 누르고 또렷하게 모든 사람들의 귓전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상승의 내가공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 일에 대한 증인이 바로 여기, 이 가마 안에 있어요."
봉설란이 가마의 앞에 서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가마 안에 누가 있는지 궁금해하던 군웅들이었다.
누구냐는 물음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가 누군지는 보면 알게 되겠죠. 그 이전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죠."
봉설란이 감천형을 돌아보았다.
"감 총당주는 지난번에 무림맹에 왔던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돌아가던 때를 기억하던가요?"
"예. 기억합니다."
감천형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 또한 상황이 너무 뜻밖이라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했다.
대체 이건…….
"그때 맹주부는 전체가 위급했고, 맹주부 내의 모든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제천교의 매복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는데 구대문파의 고수들은 모두…… 그래요. 하나같이 모두가 안전하게 자파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던가요?"
구대문파의 고수들 몇몇이 분연히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게요? 우린 악전고투하면서 겨우 돌아갈 수가 있었소. 제천교는 우리 모두를 습격……."
하지만 봉설란의 얼굴은 여전히 차갑다.
"그럴 테죠. 하지만 그로 인해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었죠? 구대문파에서 무슨 피해를 봤던가요?"
"피해를 보지 않았다니, 그런……."
"당연한 일이죠. 어차피 그것은 시위용에 불과한 것이었으니까…… 처음부터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짜여진 각본에 의한 일이었을 뿐이니까."
"닥치시오!"
"보자 보자 하니 너무 심하지 않나!"
"아무리 독고 맹주의 부인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은 용납할 수가 없다!"
사방에서 구대문파의 고수들이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졸지에 대전 안의 분위기는 흉흉하게 변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곳에 모인 군웅들은 거의 모두가 구대문파와 연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 까닭이다.
대전의 분위기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강호는 이름이 지배하는 사회다.
그것은 명예(名譽)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생명보다 더 중한 것이 그 명예다. 수많은 충돌이 그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일어났고 자신의 명예를, 사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언제 어디에서라도 목을 걸었다.
그것이 바로 강호(江湖)였다.
그런 마당에 구대문파 전체가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지도 모르는 엄청난 소리를 면전에서 해댄다. 상대가 아무리 전 맹주의 부인이라 할지라도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흉흉한 살기가 일었고, 분노에 찬 눈빛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구대문파의 고수들은 금방이라도 손을 쓸 것만 같은 기세였다.
심지어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조차 웅성거리는 제자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두 채의 가마를 메고 들어왔던 여덟 명의 백의무사들은 일제히 허리춤에 걸려 있던 장도의 도병을 움켜잡았다. 그들의 얼굴에도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누구든 건드리기만 하면 장내의 공기는 그대로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봉설란의 얼굴에 아차, 하는 빛이 떠올랐다.
이렇게 싸움이 일면 그녀가 계획했던 것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만다. 싸움이 벌어지면 아무것도 증명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 와중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것은 독고경뿐이었다.
그녀는 주위의 그 소란을 느끼지 못하는 듯 그 자세 그대로 앉아 단상의 진자양을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눈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자양의 얼굴은 무거웠다.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바로 그 순간이다.
"모두 멈추시오!"
천둥 같은 호통 소리가 대전을 떨어 울렸다.
중기가 충만한 그 호통은 대전을 온통 흔들고 사람들의 고막을 쳤다. 지붕 위에서 흙먼지가 흘러내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 앞에 나선 사람은 눈을 부릅뜬 감천형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대전의 중앙으로 나서서 위엄있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광채가 일고 있었다. 그것은 그간 보지 못했던, 지난날 패왕신도의 그 당당한 모습에 다름이 아니었다.
"무슨 짓들을 하려는 게요? 설마 모두가 나서서 전 맹주의 부인이셨던 분을 공격하려는 것이오?"
그가 나서서 꾸짖자 금방이라도 손을 쓸 듯 무기에 손을 얹었던 군웅들이 주춤거렸다.
기세로써 그들을 누른 감천형은 봉설란을 돌아보았다.
"사모님께서 하신 말씀은 정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일대사건입니다. 정말 그 말씀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까?"
그의 음성이 대청을 울렸다.
봉설란은 감천형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답 대신 차가운 웃음을 머금은 채로 주위를 돌아보다가 단상에 있는 진자양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이 일을 계획한 것은 소림사의 땡중이며, 그 파렴치한 자는 무당, 점창, 공동파 등의 파렴치한 선대 장로 몇을 규합하여 오늘날의 음모를 만들어냈지. 그자는 무림맹을 무너뜨리고, 제천교를 등장시켜 무림에 위기를 조성한 다음에 구대문파로 이루어진 무림맹이 제천교를 무너뜨리는, 천하를 바보로 만드는 사기극을 계획했다. 오늘의 이 모임이야말로 그 수순 중 하나이지."
"닥치시오!"
사방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진자양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소림 등 각 문파의 수장(首長)들도 마찬가지였다.
"부인, 말씀이 지나치시오! 이것은 구대문파 전체를 모독함을 지나쳐 전 무림을 능멸하는 소리외다. 더 이상……."
진자양의 노호가 이어지기 전에 봉설란이 날카롭게 웃어댔다.
"그 음모의 주동자가 바로 소림사의 간교한 중인 혜도이다! 설마 구대문파가 추대할 무림맹주로 내정된 당신이 모른다고 할 것인가?"
"그……."
일순간 진자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제 네가 말해 보라! 내 말이 사실이냐? 거짓이냐?"
봉설란이 그녀의 뒤에 있는 가마를 홱! 돌아보면서 고함쳤다.
"모두…… 사실이오……."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가마 안에서.
갑자기 대청이 조용해졌다.
"가마 안에 누가 있습니까?"
감천형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직접 보라."
그녀의 말과 함께 가마의 좌우 벽이 옆으로 넘어졌다.
그러자 그 안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마를 지키던 백의무사들 넷이 좌우에서 가마의 벽을 치자 상자의 벽을 벌리듯 그 안의 사람이 나타난 것이지만 나타난 사람을 본 군웅들은 모두 대경실색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안에는 피투성이의 두 사람이 늘어지듯이 앉아 있는데, 노승과 노도사인 그 두 사람이야말로 그들이 너무도 익히 잘 아는 사람들인 까닭이다.
"사숙……!"
소림과 무당의 장문인들이 신음하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소림의 혜도 선사.
그리고 무당의 고령자.
그 두 사람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가마에 앉아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오?"
진자양이 노해 소리쳤다.
혜도와 고령자의 상태는 참혹했다.
전신을 창칼로 난자한 듯 걸레가 되다시피 한 승포는 피에 절어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살아 있다는 자체가 기적처럼 보일 정도. 그나마 고령자는 이미 숨을 거둔 모습으로 뒤에 안석이 있어 그를 받쳐 주지 않았다면 앉아 있지도 못할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소림과 무당, 양문파의 장문인은 대노했다.
아무리 수양이 깊은 출가인이라고 하지만 그들 사문의 존장(尊丈)들이 이런 곤욕을 치르고 있음을 목도하고서야 어찌 그대로 좌시할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봉설란의 안색은 차갑고도 태연하였다.
"무슨 짓? 흥! 나는 구대문파의 고수들이 제천교에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구하러 달려갔을 뿐이다. 거기서 그들의 파렴치를 목도하고 치를 떨었고, 사지(死地)에 빠진 그들을 구해 이곳으로 데려온 것뿐이다. 그 더러운 진실을 천하에 밝히기 위해서."
그녀의 입술이 격동을 참지 못하고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안색은 그처럼 얼음 같지만 그 심중의 격동이 어떠한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모습이었다.
그 옆에 선 감천형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그는 믿기지 않는 듯 사경에 처한 두 선배들과 창백한 얼굴로 우뚝 선 진자양 등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진 장문…… 이 일이, 이 일이 사실이오?"
마침내 감천형이 입을 열어 물었다.
그처럼 소란스럽던 대전은 엄동(嚴冬)에 찬물을 끼얹은 듯 모두 입이 얼어붙어 입을 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감천형의 물음에 따라 진자양을 바라보았다.
"오호호호호……."
갑자기 봉설란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파렴치한 자들은 제천교를 조직하고 그들을 조종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자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구대문파의 정영(精英)을 데리고 제천교를 공격하러 갔다가 오히려 그들의 함정에 빠져서 이 모양이 되었더군. 내 말이 틀렸는가?"
봉설란이 피를 토하듯 소리쳐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대전 군웅들은 숨을 죽이고 혜도를 주시했다.
그녀의 다그침에 혜도는 일그러진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그의 몰골이 하도 참혹하여 그의 눈빛이 이미 흐려져 있음을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부터의 대답을 하기 위해서, 그 대답을 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그가 안간힘을 다했는지 아는 사람은 더 더욱 없었다.
"답하라! 내 말이 틀렸는가?"
봉설란이 발을 구르며 꾸짖었다.
"사실…… 이오……."
혜도가 고개를 떨구었다.
참혹한, 가슴 저미는 절망의 신음 소리가 대청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왔다.
전장(戰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기(士氣)다.
이곳이 비록 전장터는 아니라 할지라도 명분을 잃어버리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다.
무림에는 정(正)과 사(邪)가 있다.
그렇게 정파와 사파로 나뉜 가장 큰 근본은 바로 협(俠)을 행함에 있다. 구대문파가 정파의 태두로서 기림을 받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그들의 무공이 높고 세력이 강한 것에도 기인하지만 그보다는 공명정대한 그들의 행동거지에 있었다.
억강부약(抑强扶弱).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돕는 그 정신이야말로 협이며, 정파가 존속하는, 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런데 그런 근본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얼굴을 들고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천 년을 두고 쌓아온 그 믿음이, 자부(自負)가 산산조각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들의 가슴이 무너지고 손에서 힘이 빠졌다.
말 그대로 허탈.
그 충격은 너무도 컸다.
그 충격을 더욱 크게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감천형이었다.
말 그대로 하늘이 까마득히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은 참혹(慘酷)! 과연 무엇을 위하여 그간 살아왔던지 회의가 밀려들어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을 지경인 것이다.
용암과도 같은 격한 분노가 들끓어 오른다.
주먹에 절로 불끈 힘이 들어가고 가슴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 이가 갈린다는 표현이 이처럼 절절히 느껴질까.
그때였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소?"
천둥 같은 질타가 대전을 때렸다.
진자양이 눈을 부릅뜨고서 봉설란을 노려보고 있었다.
"흥, 사실이 아니라고?"
봉설란이 코웃음을 쳤다.
"그 음모를 주창한 원흉인 이 악마가 모든 것을 자백했는데도 말인가? 여기 바로 앞에서 똑똑히 말을 했음에도?"
진자양이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저분의 성품을 잘 알고 있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긍지를 꺾을 분이 아니오. 그런데 지금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정상이라고 볼 수가 없소. 내가 직접 뵙고 물어봐야겠소."
그가 앞으로 한 발을 나섰다.
봉설란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직접 뵙고 물어본다는 것은 혜도를 데려가겠다는 의미다.
그럴 수는 없었다.
변고는 바로 그때 일어났다.
건곤대전은 그 한 면의 길이가 십여 장에 이르는 거대함을 자랑한다. 대전의 주축을 이루는 대청은 길이가 십 장이나 되는 장방형이다. 대청의 가운데는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고, 그 좌우로는 열두 개의 기둥이 대청을 떠받친다.
대청의 전면 중심부에는 화산파의 조사(祖師)가 남겼다는 화악일심(華嶽一心)이란 네 글자가 강렬한 필체로써 용사비등(龍蛇飛騰)한다. 그 글은 원래 화산파 조사의 유필(遺筆)인데, 후일 사대조사인 선인검(仙人劒)이 화산을 중창하면서 이 건곤대전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그 화악일심이란 연꽃(蓮花) 모양인 화산의 구심을 의미하여 화산파의 결속을 당부하는 것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듯 하나가 되어 천하에 이름을 높이라는 것이기도 하였다.
진자양을 비롯한 구대문파의 수장들은 그 화악일심의 글자가 있는 대전 중앙 끝에 마련된 주빈석에 자리했다. 감천형도 당연히 스물두 석이 마련된 그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무림맹의 총당주였으며 얼마 전까지 맹주의 대행이었으므로 그 위치는 일파지존에 못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러한 신분이 아니었지만 전대 맹주인 독고해의 그늘이 워낙 큰지라 독고경도 그 예우로써 같은 반열에 위치할 수 있었다.
하나 그녀는 굳이 주빈석 아래에 자리하였었다.
그녀의 자리는 좌우로 길게 진설된 다른 자리 중에서 가장 앞쪽이라 진자양을 마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시종 그 자리에서 진자양을 주시하고 있던 그녀의 눈길을 진자양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 신경을 쓸 틈이 있을 리 없다.
눈앞에 들이닥친 이 일련의 사태가 너무 엄청났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천하무림의 근간(根幹)을 완전히 뒤흔들어 버릴 중대사인 것이다.
게다가 그가 경계할 만한 무공을 지닌 그녀는 아니었다.
진자양이 봉설란을 향해 앞으로 나서자 그와 독고경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그의 측면에 독고경이 있게 되었다.
바로 그렇게 진자양이 앞으로 나설 때, 독고경의 신형이 한 덩이 구름처럼 한 가닥 바람처럼 소리도 없이 떠올랐다.
그 움직임의 빠름은 보는 사람을 경악하게 하기에 족했다.
한 가닥 그림자가 번쩍이는 것 같은 순간에 독고경의 신형은 이미 진자양을 덮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움직임은 너무도 빨라 그를 덮치는 그녀에게로 진자양이 나서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섬뜩한 기운에 부지중에 옆을 돌아본 진자양은 일진 경풍을 휘몰고서 이미 눈앞에 옥장(玉掌)이 날아들고 있음을 보자 대경실색했다. 그 섬섬옥수가 품고 있는 기세와 속도는 그의 평생 처음 보는 것이었던 까닭이다.
"무슨 짓!"
일진 경호성이 진자양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사매!"
감천형 또한 놀라서 소리쳤다.
독고경의 성질이라면 지금껏 조용히 있었던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런데 감천형은 너무도 가공할, 믿기지 않는 사실에 격분하여 그 스스로도 주체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라 그만 그녀를 잠시 잊어버렸던 것이다.
지난날 무림맹에서 보였던 진자양의 신위라면 독고경의 이 행동은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녀가 다치게, 죽음에 이르게 할 수는 없는 일.
외침과 함께 감천형의 신형이 날아올랐다.
진자양은 차마 독고경에게 독수를 쓸 수가 없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앞뒤를 가리지 못하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철없는 여자 아이에게 심하게 손을 쓴다면 정말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말이 없을 것이다. 자연히 그의 대응은 늦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사태의 진전은 그의 생각을 뛰어넘었다.
뜻밖에도 독고경의 일장(一掌) 공세는 이미 무도에 있어서 일가를 이룬 진자양이 평생 처음 보는 가공할 속도로 그에게 날아들고 있어 피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진자양의 신형이 옆으로 물러서면서 그녀를 밀어내려 했다.
하나 그것은 그의 생각뿐, 그가 독고경을 바라보는 순간에 그녀의 일장은 놀라운 속도로 이미 그의 가슴을 치고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전광석화(電光石火)에 다름이 아니었다.
보고 피할래도 피할 수 없는, 괴이한 일장.
쾅!
독고경의 일장이 맹렬하게 진자양의 가슴팍에 작렬했다.
위기에 이르면 방어 본능이 발동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아무리 그녀에게 독수를 쓰지 않고자 하였지만,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그 순간, 진자양의 일장 또한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과 교차되면서 진력을 뿜어냈다.
웅장한 경기가 순간적으로 일어나면서 그녀를 쳤다.
"아악!"
독고경의 신형이 거대한 철추에 얻어맞은 듯이 튕겨져 나갔다.
피분수가 입에서 뿜어져 그녀의 궤적을 따라 그려졌다.
"사매애-!"
감천형이 다급히 부르짖으며 독고경에게로 날아갔다.
쿵쿵쿵…….
진자양이 비틀거리면서 연신 대여섯 걸음이나 뒤로 밀려갔다. 그의 안색은 순간적으로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가 이렇게 되자 화산파의 제자들이 노호성을 터뜨리면서 날아들었다.
졸지에 건곤대전 안은 흉흉한 살기에 가득 찼다.
그것과 함께 몇 사람의 그림자가 훌훌 날아올라 봉설란에게로 날아갔다. 마치 파도가 덮쳐 가는 것 같았다.
진자양은 화산파가 근 백 년래에 들어 배출한 가장 걸출한 고수였다. 그 위력은 이미 무림맹에 쳐들어온 제천교와의 대결에서 실증이 된 바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독고경의 일장에 타격을 받게 될 것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바였다.
비록 그녀가 상처를 입었다 할지라도.
'이건!'
가슴을 움켜쥔 진자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엇인가 괴기한 기운이 곧장 가슴으로 스며들고 있음을 느낀 까닭이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바로 심장이 터져 죽고 말았을 가공할 위력이 독고경의 그 전광석화와 같은 일장에 숨어 있었다.
이런 정도라면 가히 일격필살(一擊必殺)!
진자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불신의 빛으로 독고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일장에 튕겨져 나간 독고경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지만 감천형의 부축을 받고는 진자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매……!"
감천형은 그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그녀를 불렀다.
"놔요……."
독고경이 그의 팔을 뿌리치면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그녀의 입에서 선혈이 쏟아졌다.
진자양의 자하강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를…… 죽여야…… 해……."
독고경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녀는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감천형이 혈도를 짚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사생결단을 하려 들었을 태도였다.
'대체 이건…….'
그녀의 몸에서 들끓는 기이한 기운을 느낀 감천형은 불시에 그녀를 제압하고는 괴이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좀 전에 본 그녀의 눈빛은 괴이했다.
거기에는 분노의 빛도 흥분한 빛도 없었다. 굳이 말한다면 망연한 어떤 집념만이 존재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앞둔 그런. 차가운 가운데 살기만이 넘실거리는 소름 끼치는 눈빛. 과연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를 해한 자들을 향한 분노이기만 하였을까?
"오호호호……!"
그때,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마의 앞에서는 싸움이 일고 있었다.
승도속이 포함된 네 명의 노인들이 가마에 있는 혜도 선사를 구하려 했고, 가마를 둘러싸고 있던 백의무사들이 일제히 발도(拔刀)하여 그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 노인들이야말로 괴인에 의해 중상을 입고 요양 중에 있던 구대문파의 선대 장로들이었다.
"좋아, 이젠 살인멸구까지 할 속셈이로구나!"
봉설란의 웃음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아미타불! 무슨 말씀이시오? 노납은 사형을 구하려는 것뿐이오!"
앞을 막는 백의무사를 향해 선장을 휘두르면서 혜원 선사가 침중히 소리쳤다. 이 상황에서 살인멸구라는 질타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빈도 또한 혜도 도우(道友)의 말씀을 달리 들어보아야겠소이다. 비키지 않는다면 빈도의 손속이 무정타 탓하지 말라!"
고양자가 송문고검을 곧추세워 앞으로 찔러가면서 소리쳤다. 그의 검끝에서는 검화가 폭죽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일견해도 진력을 모아 한 번에 백의무사를 돌파할 속셈임이 분명했다.
"좋아, 좋아……. 혜도가 말하길 우유부단하고 멍청하여 뭐가 옳은 일인지도 모르고 그저 시키는 대로 따라하는 바보 사제가 있다더니 무당파의 도사도 다를 게 하나도 없었군 그래?"
봉설란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는 경멸의 빛이 가득하여 수십 년 간을 수도한 혜원 선사도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혜도 선사와 고령자, 두 분을 우리에게 넘겨서 과연 그분들이 제정신인가를 확인하게만 해준다면 우리는 더 이상 손을 쓰지 않을 게요!"
점창파의 삼로 중 하나인 운한검로 풍청도가 잇달아 칠검을 쳐내 그 기세로써 앞으로 진격하면서 고함쳤다.
아직 내상이 낫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의 손에서 펼쳐지는 점창파의 분광검법은 가히 일절이라 밤하늘에 번갯불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흥! 네가 점창파의 풍가이겠지? 너 또한 혜도와 함께 공모한 원흉 다섯 중 하나라는 것을 이 몸은 이미 혜도에게서 실토받았다. 감히 그런 주제에…… 혜도는 말해 보라. 이자가 틀림없겠지?"
봉설란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소리쳤다.
화산파의 제자들을 비롯, 구대문파의 제자들의 기세가 달라지고 있었다. 여차직하면 혜도를 구하기 위해서 손을 쓸 것만 같은 분위기. 이처럼 수많은 고수들로 둘러싸인 마당이니, 그들이 한꺼번에 손을 쓴다면 천하없는 고수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럼에도 그 가운데 선 봉설란의 안색은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혜도는 봉설란의 다그침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혜원 사제가 맞소. 고양자는 고령자 도우의 사제로서 그저 명을 따른 것밖에…… 그들은 사형들의 의견을 따랐을 뿐이나, 풍 시주는 노납의 뜻에 동조하여 비약을 조성, 번천지계를 발기한 발기인이었소……."
힘없는 말소리였다.
그러나 그 말소리가 가진 위력은 실로 컸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나설 듯하던 군웅이 참담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추어 서버렸던 것이다.
"말도 안 돼!"
운한검로 풍청도가 고함쳤다.
그는 순식간에 폭포수처럼 십여 검을 재차 공격했다. 그의 분광검법은 이미 화경에 달하여 한 초식에 십칠 검을 쏟아낼 수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내상을 입은 상태라 전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은 내상을 돌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세의 영명(英名)이, 사문의 영예(榮譽)가 한순간에 폭포에 휩쓸려 곤두박질쳐 사라져 버릴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별것 아닐 것으로 보였던 백의무사들 여덟의 검세는 뜻밖에도 매우 공고하여 그들 셋과 공동파의 장로 복주마검(伏誅魔劒) 정주(鄭州)가 합세를 했음에도 일시에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내상을 입은 까닭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백의무사들이 형성하고 있는 검진(劒陣) 때문이었다.
밤이 길어 좋을 것이 없다.
일단 발동이 걸린 이상, 이대로 밀어붙여야만 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 분명한 까닭이다.
진자양이 그런 상황을 읽지 못할 리가 없다.
"나는 괜찮다. 혜도 선사를 구하도록 하라."
그가 주위에 몰려든 제자들에게 굳은 얼굴로 명했다.
그의 얼굴은 아직도 창백했다. 손으로 가슴을 누른 그 모습은 비장(悲壯)하기조차 하였다. 새롭게 무림맹을 출발시키려는 순간에 벌어진 이 일은 말 그대로 화산파와 구대문파의 존망지 대사(大事)였다.
화산의 고수들이 몸을 날렸다.
바로 그 순간이다.
"멈추시오!"
한 사람이 질풍처럼 그들의 가운데로 날아들었다.
동시에 그는 운한검로 풍청도가 쳐낸 분광검세가 자신에게로 날아들자 호통을 치면서 일장을 때려냈다. 그 장세는 웅장무비했다.
운한검로 풍청도는 자신의 검세가 그 장세와 부딪치자 격하게 떨리면서 흩어짐을 느끼고 대경실색했다.
억지로 검세를 전개한다면 내공의 대결로 치달을 것이다. 그의 검이 내공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 버린다면 이미 내상을 입고 있는 자신은 치명상을 입고 나가떨어지게 될 터이다. 군웅들이 모두 모여 있는 상태에서 그런 수모를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검이 견디지를 못하고 윙윙 부러질 듯 전신을 떨고 있었다.
손목이 저리고 진기가 흩어짐을 깨달은 운한검로 풍청도는 가슴이 서늘하여 그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표현이야 긴 것 같지만 실제의 상황은 눈 깜박할 사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날아든 인영이 한 수에 운한검로를 물리친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그 한 수에 경탄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손을 멈추지 않는다면 감 모가 선배들에게 실례를 범하겠소!"
그가 다시 천둥처럼 고함쳤다.
나타난 사람은 감천형이었다.
과연 그는 천하제일고수였다는 건곤무적 독고해의 대제자에 부끄럽지 않았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서 봉설란의 앞을 가로막자 어느 누구도 감히 그를 범접하기 어려웠다.
"이게 무슨 짓인가? 설마 우리가 그런 짓을 했다고 믿는단 말인가?"
운한검로 풍청도가 턱을 떨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은 극한 분노를 이기지 못함에 다름이 아니었다.
"믿고 안 믿고 이전에, 풍 장로의 이런 행동은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질 않소이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자중하지 않는다면 감 모는 여러분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소!"
감천형의 음성이 대청을 때렸다. 그의 음성은 냉랭(冷冷)하여 이미 사태는 심각한 양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를 주지 않고서 진자양을 바라보았다.
"맹주 대행은 경거망동을 삼가게 조치를 취해주시오. 이대로 간다면 우리끼리 피바람이 이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오."
"감 당주, 그게 무슨 뜻이오? 설마……."
진자양이 채 말을 끝내기 전에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감 총당주는 어떻게 일을 처리할 작정이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음성만큼이나 창노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눈이라도 내린 듯 빛나는 백발에 구리 동곳을 꽂은, 그의 얼굴은 동자(童子)의 것과 같아 한눈에도 정기가 충만하다. 일신에 걸친 것은 선비들의 학창의. 만약 서원(書院)에서 만났다면 대학자로 여길 형모(形貌)다.
"사마 장로님이 언제 여기에?"
그를 보자 감천형의 눈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야말로 무림맹 십이장로 중 한 사람인 청풍노인(淸風老人) 사마무애(司馬無碍)였다. 그의 성품은 한 마리 고고한 학과도 같아서 매인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이름만 십이장로 중 하나일 뿐, 맹주부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무림맹 십이장로는 맹의 총단이 무너지면서 이미 유명무실, 몇 사람이 남지 않았고, 한운야학(閒雲野鶴)과 같은 그의 종적을 알지 못해 연락도 닿지 않았었다. 하나 그가 차지하는 무게는 이미 죽은 수석장로 천애유자 곽도광에 못지 않았다.
그가 화산에 당도했음은 감천형조차 모르고 있었다.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이 일은…… 한 점이라도 의혹이 남아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말을 마친 감천형은 봉설란을 바라보았다.
"사모님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봉설란의 얼굴은 얼음을 깔아둔 듯하다.
"혜도 선사를 저에게 넘겨주십시오."
감천형의 요청에 봉설란의 눈매가 싸늘히 굳었다.
"무엇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오호호호……!"
순간,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봉설란에게서 터져 나왔다.
"진실을? 그럼 내가 지금까지 없는 일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고?"
봉설란의 어조가 달라졌다.
목소리는 얼음이 깨지는 듯했고, 어조에서는 서릿발이 묻어나 한기가 풀풀 흩날리는 것만 같았다. 과연 그러하였다. 그러한 조작으로써 그녀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설혹 있다 할지라도 여기 있는 사람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짐작해 낼 수가 없었다.
"사모님의 말씀을 의심한다기보다는 한 점이라도 의혹이 남지 않도록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혜도 선사가 제정신임이 증명된다면…… 천하가 그 더러움에 치를 떨게 될 것입니다."
감천형의 음성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부릅뜬 눈에 내공을 운용하여 한 말이라 대청 구석구석까지 누구도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감천형의 마지막 말은 한 자 한 자가 마치 쇠망치를 후려치는 힘으로 대전을 울렸다.
"어떻게 치르게 할 것이지?"
봉설란이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
"일단, 그 일은 혜도 선사를 살펴보고 난 다음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과 함께 감천형이 혜도 선사를 향해 걸음을 떼자, 그의 앞을 백의무사들이 가로막고 섰다. 도기가 삼엄하게 그를 노렸다. 금방이라도 손을 쓸 듯한 기세.
"사모님……."
감천형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볼 필요 없다. 모든 것이 명명백백한 이상, 저들의 말을 들어줌은 시간만 끌게 될 뿐이야. 놈들은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
봉설란이 날카롭게 소리치며 발을 굴렀다.
"구대문파가 천하에 군림하기 위해서 그분을 모해하고, 제천교라는 꼭두각시를 세워 천하에 피바람을 조성한 다음 세상에 군림하려는…… 그 더러운 짓을 듣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그 말씀을 믿기 위해서, 모두에게 그 증거를 보이려면 혜도 선사의 상태를 확인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본인이 제정신으로 모든 것을 토로했다는 것을……."
"점점 말이 이상해지는군. 그럼 내가 사마외도(邪魔外道)의 술법으로 그의 정신을 미혹케 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 말씀이 아니라……."
감천형은 암암리에 미간을 찡그렸다.
이건 쓸데없는 논쟁이었다.
설마 하니 그녀는 사부의 제자인 그도 믿지를 못한단 말인가?
바로 그 순간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소림사의 고승이 제정신으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갑자기 대한 하나가 고함치면서 뛰쳐나왔다. 그의 손에는 서릿발 같은 검기를 뿌리는 검이 들려 있었다.
그와 동시였다.
윽! 나직한 신음과 함께 봉설란의 뒤쪽에 있던 백의무사가 비틀, 검을 놓치면서 쓰러졌다. 돌변한 사태에 놀란 옆의 백의무사가 다시금 경호성과 함께 뒤로 물러나다가 가마에 부딪치면서 옆으로 픽, 쓰러졌다.
구대문파 장로 네 명이 한꺼번에 공격을 해도 금성철벽과 같은 방어를 하던 그들이 그처럼 맥없이 쓰러지자 사방에서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암기닷!"
누군가의 외침이 뒤를 이었다.
"당신이 정말 독고 부인이오? 제천교의 사주를 받고 우리 맹을 와해시키려는 가증한 수작이 아닌 걸 어떻게 증명할 거요?"
"혜도 선사를 구해서 직접 말을 들어봐야 해!"
두어 명의 대한이 더 뛰쳐나와 도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웅성거리며 몇 명의 대한이 더 뛰쳐나왔다. 그들까지 합세하여 백의무사들을 공격하자 삽시간에 장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무슨 짓들이오?"
감천형이 노해 그쪽을 보면서 발을 구르며 천둥처럼 소리쳤다.
"좋아, 마침내 적반하장! 그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겠다는 건가?"
봉설란이 날카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손을 멈추지 못하겠는가? 이게 무슨 짓들인가?"
청풍노인 사마무애가 나서며 그들에게 소리쳤다.
그의 신분이라면 누구도 그 말을 무시할 수 없다. 더구나 백의무사들을 덮쳐 간 자들은 모두 구대문파와 관련이 된 사람들이기에.
하지만 흥분한 군웅들은 멈추지 않았다.
감천형과 그를 비롯한 무림맹의 고수들이 봉설란의 주변으로 나섰다.
"사모님!"
감천형이 봉설란을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가 없는 그녀다.
그녀는 감천형을 바라보다가 문득 발을 굴렀다.
"좋아! 그 악적을 총당주에게 맡기지! 하지만 이 자리에서 살펴봐야만 한다. 총당주에게 길을 열어주어라!"
그녀의 명령에 감천형의 앞을 막았던 백의무사들이 옆으로 퍼져 감천형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공격하던 십여 명의 군웅들에 맞섰다.
건곤대전 안은 긴장에 휩싸였다.
불과 몇 걸음 되지 않는 감천형과 혜도 선사 간의 거리.
그 거리를 걸어가는 감천형의 모습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은 긴장으로 납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싸움도 멎었다.
이 마당에 싸움을 벌이는 것은 무의미한 까닭.
감천형의 뒤를 청풍노인이 따랐다.
봉설란도, 백의무사들도 그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은연중에 건곤대전 안은 구대문파의 직계 고수들과 어정쩡한 모습의 군웅들. 그리고 봉설란의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로 보이지 않는 경계가 지어진 듯했다. 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서로 간의 거리감이 거기에 존재함을 그들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제가 질문할 테니 사마 장로께서 혜도 선사의 상태를 지켜봐 주십시오."
"알겠네."
감천형의 부탁에 청풍노인이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노선사!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감천형은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물었다.
참혹한 몰골의 혜도는 눈을 꿈벅거리더니 그를 바라보았다.
탈진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초췌한 얼굴. 그는 물끄러미 감천형을 쳐다보다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좀 전에 하신 말씀, 모두 사실입니까?"
"……."
감천형의 물음에 혜도는 망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모습을 청풍노인은 괴이쩍은 얼굴로 주시했다.
"선사! 감 당주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소?"
청풍노인의 말에 문득 정신이 든 듯 한차례 부르르 몸을 떤 혜도는 황망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알아……."
"뭘 안다는 말씀이십니까? 정말 소생의 선사를 해치고 제천교를 설립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셨던 겁니까? 무슨 까닭으로?"
"그, 그건……."
"정말입니까? 정말 그런 짓을 하신 겁니까?"
"그, 그건……."
혜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왜 그런 짓을 하신 겁니까?"
감천형이 다그쳤다.
"나, 나는……."
갑자기 그가 눈을 부릅떴다.
"나, 나는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야! 어쩔 수가 없었어. 독고해가 천하를 제패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어서…… 그래서…… 그래서어……."
미친 듯 머리를 흔들며 고함치던 혜도의 입에서 쿨럭! 검은 피가 올라왔다. 뒤를 잇는 격한 기침.
…….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수백 명의 군웅이 모인 건곤대전 안은 숨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납덩이보다 더 무거운 얼굴. 창백한 안색으로 군웅들은 굳게 입을 다물고서 피를 토해내며 절규하는 혜도 선사의 참혹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절규는 백 마디의 다른 어떤 말보다 더 명확하게 사실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가, 그가 배신을…… 내가 아니야! 이런 게…… 이런 게……."
피를 토해내면서도 미친 듯 중얼거리던 혜도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격한 심중의 갈등을 말하듯 그의 얼굴 전체가 푸들푸들 경련이 일어났다. 부릅뜬 눈꼬리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이, 이……!"
발작적으로 목을 움켜잡으며 쥐어짜던 그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옆에 있던 건곤대전의 기둥으로 달려가 자신의 머리를 받아버렸다.
퍽!
섬뜩한 음향과 함께 피가 튀고 뇌수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억?!"
사방에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선사!"
감천형이 황급히 그를 잡아챘지만 그의 머리는 이미 절반쯤 부서진 다음.
"……."
그는 멍청한 빛으로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혜도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스스로의 몸도 가누지 못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그처럼 빠른 동작으로 자결을 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