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第一首 번천지회(天之懷) (53/113)

第一首  번천지회(天之懷)

-절망이 엄습하다.

헐떡이는 회한(悔恨)의 처절함을 누가 알까.

 쏴아악!

 대명은 무서운 속도로 어둠과 빗속을 가로질렀다.

 숨이 턱에 닿았다. 무리하게 공력을 운용한 데다 포위망을 뚫고 나오면서 네 군데나 검상을 입었고, 잇달아 두 차례나 무거운 

장세에 얻어맞았다. 평소라면 그나마 견딜 수 있었겠지만 공력이 급격히 감퇴되고 있어서 그 상세들은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오른쪽 가슴을 가른 검세는 매우 중해서 철환장조차 제대로 들 수가 없을 지경이니 더 이상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바로 등 뒤에서 수천개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의 신법은 날듯하여 마치 날개 달린 호랑이를 보는 듯했다.

 '이 자리를 벗어나긴 틀린 것 같군!'

 절망.

 대명은 암암리에 장탄식을 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어서 담을 넘어오시오!'

 그의 귓전으로 낮은 음성이 촉급히 들려왔다.

 놀란 대명은 생각을 굴릴 여가도 없이 발을 굴러 담을 넘었다.

 그가 담을 넘자 한 사람이 그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대명을 향해 손짓을 하더니 그대로 빗속을 뚫고서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대명이 담장 밑 잡초 아래로 납작 엎드리자,

 그의 눈앞으로 수천개와 그 수하들이 줄줄이 담을 넘어 그 인영을 추격해 갔다.

 놀란 대명을 뒤로하고.

 "괴이하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수천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과 폭우를 뚫고 족히 10여 리는 추격해 왔다.

 산속 길 10여 리, 특히 이 칠흑과 같은 어둠에서의 10여 리는 실로 간단한 거리가 아니다.

 더구나 대명은 부상을 당한 몸이다. 거기에 더해서 중독이 된 그였다.

 그대로 두어도 채 일각을 버티지 못하고 체내의 진기가 힘을 잃게 될 그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둠을 뚫고 이렇게 멀리 올 수가 있었을 것인가.

 거기에 더해 이 숨가쁜 추격을 이처럼 뿌리치고 잠적할 수 있다니…….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이지?"

 무상 수천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자랑하는 정보망인 순풍이마저 그의 종적을 놓쳤다.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   *   *

 쏴아아…….

 하늘에 구멍이 난 것인가.

 쏟아지는 빗줄기는 여전히 그칠 줄을 모른다.

 숨을 죽이고 있던 대명은 폐찰 내에서 적들의 종적이 사라졌음을 느끼고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전신의 상처에서 지독한 아픔이 엄습해 왔다. 내상도 만만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리 항거해도 혼미해지는 정신을 수습하기가 힘들었다.

 그가 선문(禪門)의 정종내공(正宗內功)을 수습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미 그 자리에서 혼도(昏倒)하고 말았을 것이 분명했다.

 문득, 대명의 전신이 다시금 긴장으로 곤두섰다.

 누군가가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음을 감각으로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있는 왼손 주먹을 힘있게 움켜쥐었다.

 마지막 힘을 다해 소림의 백보신권을 격출할 준비를 한 것이다.

 상대가 적이라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차피 그에게는 이 일격 외에는 다른 기회가 있을 수 없었다.

 "접니다."

 상대는 그의 생각을 읽은 듯 그와 일 장 정도의 거리에 다다르자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 음성과 좀 전에 들었던 그 음성이 같음을 대명은 분간해 낼 수가 있었다.

 입을 연 상대는 망설이지 않고 대명의 앞으로 다가섰다.

 어둠 속에서 그의 모습이 뚜렷이 드러났다.

 "누구? 한…… 시주?"

 그의 모습을 바라본 대명의 얼굴에 믿기지 않는다는 빛이 떠올랐다.

 폭우 속에 우뚝 선 사람.

 그는 정말 뜻밖에도 그와 만난 적이 있었던 한효월. 그였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한효월이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 그의 음성을 들으면서 대명은 정신이 아득한 혼돈의 늪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대명은 신음을 흘리면서 눈을 떴다.

 귓전으로 빗소리가 들려온다. 쏟아 붓던 빗줄기는 여전했다.

 내가 왜?

 잠시 멈칫했던 그는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정신이 드십니까?"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먹물 같은 어둠이 시야에 밀려들었다. 그 어둠 속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문가에 서서 바깥을 살피다가 대명을 돌아보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그 사람의 모습은 눈에 익은 듯했다.

 "한 시주?"

 놀람과 의아스러운 음성이 대명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렇습니다. 예상보다 조금 일찍 정신을 차리셨군요."

 그 사람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대명의 앞으로 다가왔다.

 과연 한효월이었다. 그의 신색은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침착하고 고요해 보였다.

 "한 시주가 어떻게 여기에?"

 "우연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럼 빈승을 구한 사람이 한 시주였소?"

 "그렇습니다."

 "으음…… 폐를 끼쳤구료. 그들은? 여기는 어디요?"

 몸을 일으켜 앉자 가슴이, 어깨가 사무치게 고통스럽다. 대명은 굵은 눈썹을 슬쩍 찡그리곤 주위를 돌아보았다.

 낡고 먼지가 가득한 좁은 방 안. 지금 그가 누웠던,

 이불조차 없는 좁은 나무 침상이 유일한 가구였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폐찰의 선방(禪房)입니다."

 "그 폐찰? 아니, 그럼……."

 놀란 대명의 얼굴을 향해 한효월이 침착히 말했다.

 "상처가 중해서 멀리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곳이 더 안전할 듯해서."

 말은 간단하지만 어김이 없는 소리였다.

 중한 상처를 입고 도주한 사람이 쫓기고 있는 처지에서 굳이 돌고 돌아서,

 어렵사리 이 폐찰에 다시 숨어들 리가 없기 때문에 기실 그들의 눈을 피하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을 것이었다.

 "미혼향은 해독했습니다. 다만 그중에 공력을 금제하는 효력이 있는 듯한데…… 그것은 조금 시간이 흐르면 해독될 겁니다."

 "그럼 빈승의 공력이?"

 대명이 놀라 공력을 운기했다.

 그러자 가슴이 찌를 듯 고통스러워졌다. 하지만 공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통스럽지만 운기하자 공력을 일으킬 수는 있었다. 평소에 비해서 공력이 절반가량에 불과하다는 것이 다를 뿐.

 "무리하면 상처가 덧나게 됩니다. 어깨의 상처가 의외로 심합니다. 원래 내공이 심후하니 내상은 며칠 조섭하면 낫게 될 테지만……

 무리해서 상처가 덧나게 되면 그쪽 팔을 못 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한효월이 그를 말렸다.

 "후우∼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순 없소. 빈승은 지금 화산으로…… 아니, 소림사로…… 으음! 어쨌든 지금 이렇게 있을 수는 없소!"

 머리가 복잡한지 대명은 머리를 저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극통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전신을 쑤셨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몸을 추슬렀다. 돌아보니 침상의 옆에 그가 짚고 다니던 철환장이 기대 세워져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철환장을 잡는 것을 보던 한효월이 입을 열었다.

 "형수님…… 맹주 부인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 말에 대명이 놀란 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한 시주도 거기 계셨소? 처음부터?"

 "아닙니다. 소생이 거기 갔을 때는 대사께서 그들의 저지를 뚫고 대웅전을 벗어날 때 즈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부인의 말을?"

 "조금밖에 못 들었습니다."

 "후우∼!"

 그러자 대명은 길게 탄식했다.

 그는 계율 하나하나에 목을 매는 교조주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를 보고 외부에서는 호방(豪放)하다고 하였고,

 사문에서는 단순한 무승(武僧)이 아니라 마조(馬祖)와 같이 될 큰그릇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달라 보였다. 얼굴은 납빛과 같고 가슴 또한 천 근은 되듯 무거웠다.

 "번천지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십니까?"

 뒤이은 한효월의 질문에 대명은 한효월이 그의 말과는 달리 적지 않은 내용을 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한효월과 같은 사람이라면 몇 마디만 들어도 상황을 유추해 낼 수가 있을 터이다.

 그가 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그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일까.

 평소라면 단도직입적으로 껄껄 웃으며 물어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모르오."

 길게 한숨을 내쉰 그는 한효월을 쳐다보았다.

 "한 시주는 지금 즉시 화산으로 가주시오."

 "저 혼자 말입니까?"

 "그렇소. 빈승은 소림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화산으로 뒤따라가겠소. 만약 소림이 책임져야 할 일이 있다면 절대로 회피하지 않을

 생각이오. 어쨌든 한 시주는 화산으로 가서 진 장문인을 만나 혜도 사숙의 말씀을 전해주시오. '그들은 통제에서 벗어났노라'고."

 "혼자 가실 수 있겠습니까?"

 한효월의 물음에 대명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해야 할 일이오. 어떻게 하든 스스로의 한 몸이야 돌볼 수 없겠소? 부탁하오."

 대명이 무거운 음성으로 부탁했다.

 한효월은 머리를 저었다.

 "같이 가는 게 옳습니다."

 "같이라니? 화산대회는 눈앞에 닥쳤소. 소림사까지 갔다가 화산으로 가게 되면 화산대회는 이미 끝난 다음일 거요. 화산에서 무슨

 변고가 일어날지 모르는 마당에 그렇게 할 수는 없소! 우리는……."

 "그래서 더욱 같이 가야 합니다."

 한효월의 침착한 음성에 대명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그건 무슨 의미이시오?"

 "대사께서 지금 소림사로 굳이 가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그건……."

 대명의 얼굴에 주춤하는 빛이 스쳐 갔다.

 "아마 혜도 선사가 무엇인가 대사께 남긴 게 있거나 부탁한 것이 있었겠지요. 그래서 그것을 대사는 확인하고 싶은 것이고.

 맞습니까?"

 "정말…… 한 시주는 그 자리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오?"

 놀란 눈으로 잠시 한효월을 쳐다보고 있던 대명이 신음하듯 물었다.

 "점창파의 고 장로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빗속을 헤매다가 이곳을 발견했습니다. 당도한 것이 늦어 그때 들은 것은 몇 마디에

 불과합니다. 대사께서 혼수상태에 있는 동안 그때 들은 몇 마디의 단편(斷片)을 꿰맞춰서 몇 가지를 유추해 낸 것뿐입니다."

 '과연 세상에 드문 기재로군!'

 자부심 강한 대명도 내심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분이 마지막에 남긴 것이라면 분명히 큰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만약 대사께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영영 미궁에 빠져

 버릴런지도 모릅니다. 봉황문은 아직 이곳을 떠난 게 아닙니다. 그들의 수색은 계속되고 있으니 혼자 가셨다가……."

 한효월은 말끝을 흐렸다.

 뒤를 잇지 않아도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했다.

 "하지만 화산대회야말로 정말 중요하기 짝이 없소! 거기에는 구대문파의 정영(精英)이 모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차피 소림사가 있는 숭산으로 둘러간다고 해도 시간 차는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명백한 상황을 알지 못하고서는 화산으로

 간다는 것은 어쩌면 의미가 없을런지도 모릅니다."

 말소리는 조용하지만 드러난 의중은 강력하다.

 물러설 뜻이 없는 것이다.

 자신의 사형과 관련된 일이다.

 거기에는 그도 명백한 사실을 알아야겠다는 의미가 단호히 내포되어 있음을 대명도 이젠 알아듣게 되었다.

 "알겠소. 그럼 같이 갑시다."

 마침내 그도 머리를 끄덕였다.

*   *   *

 하남성(河南省) 등봉현(登封縣)에는 산 하나가 솟아 있다.

 이름하여 숭산(嵩山).

 중원오악(中原五嶽) 중 하나이며, 그 천하에 이름 높은 산 다섯 중 가운데 있다 하여 중악(中嶽)이라 불린다. 태실(太室)과

 소실(少室)의 우뚝한 두 산자락 중 소실산 오유봉(五乳峰) 북쪽 무성한 숲 속에 일좌(一座)의 금벽(金碧)이 휘황한 고찰(古刹)이

 하나 자리한다. 바로 천하에 이름 높은 숭산의 소림사(少林寺)다.

 천년고찰(千年古刹).

 숭산의 칠십이사(七十二寺) 중에서도 으뜸인 이 소림사는 단순히 숭산 72개 사찰 가운데 발군이 아니라 천하무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며, 불교적으로도 선종(禪宗)의 조종으로서 기림을 받는 곳이다.

 워낙 무림 중에 소림의 이름이 높아 소림사에 이르면 사방에 사천왕과 같은 덩치를 가진 무승들이 판을 칠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향화(香火)를 올리는 신도들이 줄을 잇는, 일반 사찰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곳이 소림사이기도 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한전에서 연무하는 무승들이 있다는 것 정도일까. 천하에 소림의 무술이 이름 높은 것은 어쩌면 그들의 기합 소리

 때문인지도.

 쏴아아…….

 엊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잠시 멎었다가 다시 굵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어서 소림사마저도 한적한 느낌으로 숲 속에

 자리한다.

 정오를 바라보는 시각임에도 저녁 무렵처럼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어서 해가 뜰 수가 없는 까닭이다.

 대명은 그 소림사의 산문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생각입니까?"

 옆에 서 있던 한효월이 물었다.

 그들 둘의 모습은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와 같았다. 말 그대로 불피풍우(不避風雨)하여 이 빗속을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비 때문이었던지 다행히 그들은 별다른 저지를 받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산문 안으로 들어가려면 굳이 남천문으로 오르지 않았겠지요."

 대명은 무거운 음성으로 대꾸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나이 여섯에 소림사에 들어와 삼십 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소림사 곳곳을 손바닥 보듯이 알고도 남을 세월이다.

 그가 앞서자 한효월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소림사의 뒤쪽에 자리한 장로들의 거처인 장생전(長生殿)에 도달하게 되었다.

 울창한 거목들이 하늘을 가린다.

 은은히 풍경(風磬) 소리가 귀를 울리고, 그 숲 사이로 고색창연한 전각의 모습이 보일 듯 말 듯하다.

 착잡한 눈길로 장생전의 모습을 바라보던 대명은 잠시 주위의 기척을 살핀 다음에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장생전의 뒤쪽이었다.

 "내 거처 뒤쪽 큰 바위 밑을 보거라! 그러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

 사숙 혜도 선사의 음성이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소림사의 천 년 세월 동안 수많은 기재들이 나타났다 사라졌었다. 혜도 사숙은 그러한 기재 중의 한 사람이었고, 근 100여 년 이래

 가장 걸출한 인물 중 하나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소림사의 장문방장이 되지 못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너무 재기(才氣)가 승(勝)하여 출가인답지 않다는, 바꾸어 말하면 그의 재주가 너무 출중하여 그 재주를 믿고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강한 호승심 때문이었다. 사숙인 혜도 선사는 늘 그것이 불만이었고 거인 소림사가 은인자중, 숲 속에서 수도장으로 남아

 있는 것을 늘 못마땅해 했었다.

 소림사라면 소림사다워야 한다는 것.

 정진(精進)하지 않으면 어찌 발전이 있겠느냐가 그의 지론이었다.

 숲 속에 자리한 장생전의 주위로는 올망졸망한 암자들이 자리했다.

 소림사의 전설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은 오랜 세월을 사바(裟婆)에서 지낸 다음에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수도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여기에는 세간에서 이미 죽었다는 고승대덕(高僧大德)들까지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생존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야말로 소림사에서는 살아 있는 전설과 같은 곳. 그렇기에 이곳을 장생전이라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장생전에 머무는 고승들은 별로 없었다.

 장생전 주변에 작은 암자를 짓고 은둔하는 경우가 많았던 까닭이다.

 현 소림방장의 사숙이 되는 혜도 선사 또한 그러했다.

 '후우…….'

 대명은 암중에 한숨을 내쉬며 눈앞에 나타난 한 칸의 암자를 바라보았다.

 절벽을 등진 채로 또한 그 자신도 절벽에 위태로이 자리한 암자에는 보덕암(普德庵)이란 빛 바랜 현판이 걸려 있었다.

 고색이 창연한 이 보덕암이야말로 사숙인 혜도 선사의 거처였다.

 "좋은 곳이로군요."

 주위를 둘러본 한효월이 나직이 말했다.

 정말 산수가 좋은 곳이었다.

 그가 머물던 중조산 무우곡에 조금도 못지 않는…….

 거기에 새 울음소리, 귓전을 스치고 가슴을 흔드는 시원한 바람에 실려 저 멀리에서 은은히 산사(山寺)의 풍경 소리가 들려온다.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다.

 중조산을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하루하루를 생사의 칼날 위에서 살다시피 하니 그 한가롭던 세월이 까마득하기만 했다.

 "명산이라고 불리는 산은 다 이유가 있고 그 산에 큰 절이 있는 것 또한 이유가 있는……."

 대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효월이 나직이 물었다.

 "여기 누구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사숙님이 안 계시니 명없이 다른 사람은……."

 한효월의 말을 되뇌이던 대명의 안색이 돌연 달라졌다.

 뭔가 다른 의미를 느낀 것이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효월의 신형이 거대한 붕새처럼 훌쩍 날아올라 보덕암을 날아 넘었다.

 대명도 급히 한효월의 뒤를 따랐다.

 보덕암은 가파른 절벽 끝에 자리했다.

 깎아지른 절벽은 아니지만 장생전 뒤쪽으로 난 오솔길을 통해야만 겨우 올라갈 수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보통 사람들에게 한정된 이야기였다.

 암자의 뒤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버티고 서 있었고 태고의 숲이 주변을 감싸고 있어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보덕암을 날아 넘은 대명은 그 뒤편 숲 속에 몸을 숙이고 있는 한효월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람처럼 그의 곁으로 간 대명의 안색이 돌변했다.

 한 사람이 한효월의 앞쪽에 엎어져 있었다.

 승복을 입은 사람인데, 비를 맞은 듯 전신이 흙투성이였다. 어디로 간 것인지 짚신 한 짝은 벗겨져 보이지 않았다.

 "아시는 분입니까?"

 "사숙의 시자(侍者)로 있는 수진(修眞)이오……."

 대명이 신음을 흘렸다.

 수진은 항렬로 따져 그의 사질이었다.

 나이 서른둘.

 평소 혜도 선사를 시봉(侍奉)하던 그였으니,

 혜도 선사가 소림사를 떠났으니 그의 거처를 돌보는 것은 당연히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눈을 부릅뜬 그의 모습은 채 반항도 하지 못하고 죽어 넘어진 듯했다.

 칠공으로 흘러내린 핏줄기는 내가공력에 의해 그의 내부가 으스러진 것을 의미한다.

 그 자리에 벗겨진 한쪽 신발이 보이지 않음은 그가 이 자리에서 죽은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소림사 내에서 이런 일이……."

 대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림사 경내에서, 그것도 중지(重地)라 할 수 있는 장생전 안쪽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비록 한효월과 함께 길을 질러왔지만 그것은 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외부인이라면 누구도 소림사를 이렇듯 무인지경으로 오갈 수 없을 터이다.

 그러나 누가, 무슨 이유로 혜도 선사의 시자를…….

 갑자기 대명의 안색이 돌변했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바람처럼 앞으로 내달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를 돌보던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한효월 또한 그 의미를 알고 있기에 달리는 대명의 뒤를 따랐다.

 대명이 간 곳은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 속 바위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보덕암의 뒤쪽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

 그 자리에 도달한 대명은 굳은 얼굴로 그 바위를 살펴보았다.

 비를 맞아 물기를 머금은 바위는 오연한 모습으로 대명과 한효월 앞에 거대한 몸체를 자랑하며 우뚝했다.

 얼핏 봐도 장정 서넛이 둘러서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바위였다. 높이만도 3장은 충분해 보였다.

 이끼 낀 거대한 바위는 세월의 무게로써 당당했다.

 대명이 그 바위를 살펴보았지만 누가 손을 댄 흔적은 없었다.

 "다행이로군……."

 암암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두 손을 내밀어 바위에다 댔다.

 "이 바위를 움직여야 합니까?"

 한효월이 다가서며 물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소리였다.

 3장 높이의 바위라면, 그냥 그 자체로만으로도 엄청날 뿐 아니라,

 만약 아래로 파묻혀 있다면 그 무게는 상상을 불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무리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하지만…… 아직 한쪽 팔을 제대로 쓸 수 없는 대명으로서는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거요."

 대명은 쓰다듬듯이 바위를 더듬으면서 아래를 살폈다.

 뭔가를 발견한 듯 그는 두어 걸음 바위 옆으로 돌아가 거기에서 바위를 향해 힘을 썼다.

 움찔 힘을 쓰자, 이마에 핏줄이 불끈 솟았다.

 그것은 아주 잠시, 이내 바위가 움찔거리면서 조금 뒤로 밀려났다.

 그렇게 바위가 밀려나자 대명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빛났고, 한효월의 눈이 빛났다.

 축축이 젖은 흙더미.

 그 바위 아래에 뭔가 흔적이 있는 듯했던 것이다.

 흙을 파헤치자마자 거기에 묻혀 있던 작은 철궤(鐵櫃)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비는 한 자가량, 길이가 조금 더 긴 납작한 장방형의 철궤였다.

 세월을 말하듯 붉게 녹이 슨 철궤에는 작은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자물쇠는 대명이 잡아 비틀자 아주 간단히 부서졌다.

 철궤를 열자, 그 안에 유지(油紙)로 싼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책이었다.

 <번천지회>

 누가 쓴 것인지 서명조차 없이 네 글자만 표지에 선명하다.

 그 책을 든 대명의 손은 스스로도 인식치 못하는 사이에 은연중에 떨리고 있었다.

 혜도 선사.

 그의 말대로 여기에 와서 그가 남긴 것을 얻었다.

 과연 여기에다 그는 무엇을 남겼을 것인가?

 "……."

 한효월은 말없이 그를 보고 있었다.

 암암리에 숨을 몰아쉰 대명은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소림사는 천하제일.

 천하제일이란 아무에게나 붙는 이름이 아니다.

 그러한 위치에 있다면 그에 걸맞는 일을 해야만 한다.

 나 스스로를 수고로이 하지 않고서야 어찌 세상을 제도(濟度)할 수가 있을 것인가. 선인(先人)의 도(道)는 어디로 가고 심신의

 안일(安逸)을 추구하는 보신(保身)주의만이 산에 가득한가…….

 천하무림에 어둠이 몰려올 때, 소림은 무엇을 했던가?

 그저 독고해라는 무명인이 천하제일의 영웅이 되어 초유의 무림맹을 결성하고 맹주로 앉기까지 바라보고 있기만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는 그의 명령을 받들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니 이 어찌 참혹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일어설 줄 모르고 그저 현실에 안주하니…… 은둔하는 거인(巨人)이란 이름을 아직도 자랑스러이 생각할 것인가.>

 쓴웃음이 대명의 얼굴에 감돌았다.

 늘 사숙이 하던 말이고,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문득 대명의 눈빛이 굳어졌다.

 뭔가 뒤쪽에서 이상한 기척을 느꼈던 것이다.

 한효월도 그것을 느낀 듯 바람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산속, 숲 속이 이처럼 조용할 수는 없다. 무엇인가 변화가 있음이 분명했다. 이미 그들은 혜도 선사의 시자인 수진 화상의 주검까지 본 마당인 것이다.

 순간, 앞쪽 수풀이 흔들 하더니 토끼 한 마리가 폴짝 뛰어나왔다. 눈이 동그란 토끼는 눈앞의 한효월과 대명을 보곤 놀란 듯 수염난 입과 코를 쫑긋거렸다. 조금만 이상하면 금방이라도 도망갈 듯 겁먹은 모습.

 그 모양에 한효월과 대명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돌연 바위 위에서 한 가닥 질풍이 대명을 향해 덮쳐 내렸다. 그것은 너무도 신속하여 대명이 뒤쪽을 돌아보다가 토끼를 발견하고 피식, 웃는 순간에 이미 그를 덮치고 있었다.

 "누구냐!"

 대명이 놀라 고함치면서 손을 거둬들이며 다른 손으로 상대를 치려 했다. 하지만 부지중에 깜박한 것이 그의 어깨 상처. 상처 입은 손으로 상대를 치려니 움직임이 문제일 뿐더러 경력이 제대로 발출될 리가 없다.

 통증과 함께 그가 멈칫하는 찰나간에 대명의 손에 들렸던 혜도 선사가 남긴 책자는 괴인영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거의 손도 쓰지 못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를 덮친 자는 전신을 흑의로 감싸고 얼굴에는 복면을 한 자였다.

 상황을 깨달은 대명은 대갈일성, 고함과 지르며 책을 들고 있던 성한 손을 들어 흑의인에게 일장을 때려내며 상대에게 덮쳐 갔다. 웅장한 장세가 노한 파도와 같이 흑의인에게 밀려갔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그것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빼앗은 책자를 허공에다 던져 버리고는 옆으로 튀어 달아났다.

 책은 일직선으로 바위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이 일련의 상황은 너무도 급박하여 번쩍 하는 순간에 일어난 일.

 대명을 도와주려던 한효월은 상대가 책을 던져 버리는 것을 보자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대명에게 위험이 없는 것을 보고 우선 책을 잡으려는 것이다.

 흑의인은 책을 손에 넣자마자 그대로 머리 위로 집어 던지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그의 신법은 놀랍도록 빨라 그가 그런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대명은 일순간 허탕을 치고 말았다. 책을 노리고 온 것이라면, 그 책을 손에 넣자마자 그렇듯 책을 던져 버리고 도주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명이 흠칫, 고개를 들어 날아오른 책을 보는 순간.

 한효월은 구름을 타고 오르듯 바람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면서 날아올라 그 책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가 책을 잡는 것은 너무도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막 그 책자를 잡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보다 빨리 책을 잡아챘다. 그것은 바위 위에 숨어 있던 또 다른 흑의인이었다.

 그는 바위 위에 숨어 있다가 다른 흑의인이 책을 집어 던지자, 그대로 그 책을 잡아채면서 뒤로 몸을 날렸다. 원래 먼저 흑의인이 책을 빼앗자마자 집어 던진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상대는 한효월이었다.

 한효월은 책이 또 다른 흑의인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자 허공에서 발을 차면서 손을 쭉 뻗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누가 밀어낸 듯이 불끈 날아오르면서 그 책의 한쪽을 잡게 되었다.

 "손을 놓아라!"

 한효월이 호통치면서 책을 잡아당겼다.

 동시에 그는 다른 손으로 그 흑의인을 향해서 일장을 쳐냈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자 흑의인은 놀라고 다급하여 있는 힘껏 책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되자 책은 그 순간적인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찢어져 버리고 말았다.

 어떤 개체를 가운데 두고 잡아당기다가 그 개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줄다리기를 하던 사람들이 서로 잡아당기고 있던 줄이 끊어질 때와 같다.

 책이 찢어짐과 함께 한효월은 허공에서 그 힘에 훌쩍 뒤로 튕겨졌다.

 그의 눈에 바위 저쪽으로 나뒹구는 흑의인이 보였다.

 흑의인이 당황한 것인지, 아니면 한효월의 일격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 그는 바위 뒤쪽으로 구르듯 사라졌다.

 그것을 본 한효월은 급격히 숨을 들이키면서 두 팔을 저었다. 소매가 날개처럼 펄럭이는 가운데 그의 신형이 다시 솟구쳐 올라 바위 위에 내려서게 되었다.

 그 광경을 대명은 놀란 빛으로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연달아 힘을 빌리지 않고 움직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기를 한번 바꾼다면 대가(大家)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저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다니…….

 그러나 그것은 잠시.

 대명은 한효월을 따라가야 할는지 아니면 자신을 습격한 자를 추격해야 할는지 갈등해야 했다.

 한효월은 바위 위에 내려서자마자 주위를 살폈다.

 그의 동작은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방금 바위에서 굴러 떨어진 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바위 뒤는 바로 울창한 숲이었다.

 절벽에 이어진 그 숲은 말 그대로 태고의 숲이라 누가 지척에 웅크리고 있다 할지라도 쉽게 찾기 힘들 정도였다.

 한효월은 바위 위에 우뚝 선 채로 손에 든 반쪽의 책자를 천천히 품속에다 갈무리하면서 빛나는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숲 속은 조용했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쉽게 도망갈 수도 없을 것이었다.

 한효월은 깊게 숨을 몰아쉬고는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무엇인가, 소리가 4, 5장가량 떨어진 곳에서 들려온다.

 그것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낀 순간 그의 신형을 바위에서 날아올라 숲을 가로지르며 그곳을 향해서 날아갔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몇 번의 숨바꼭질이 있었지만 결국 한효월은 그 흑의인의 종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곳의 지리를 면밀하게 잘 알고 있지 않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

 주위를 둘러보는 한효월의 미간이 굳어졌다.

 그리고 돌아온 한효월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선 대명을 발견했다.

 "놓쳤소?"

 "그럼 그자도?"

 대명의 물음에 한효월이 되묻자, 대명이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들은 본 사와 관련이 있는 자들인 것 같소……."

 "……."

 한효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움직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책은?"

 묻던 대명은 한효월이 품속에서 꺼내는 찢어진 책을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림사 경내에서, 그것도 장생전에서 이런 일이라니……."

 그는 답답한 듯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으으……!"

 대명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옆에 있는 한효월의 얼굴도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그들이 보고 있는 책에 실린 내용은 너무도 믿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책은 묘하게 찢겨졌다.

 그냥 책을 묶은 곳이 뜯어진 것이라면 절반일지라도 그 남은 것은 전체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톱으로 썬 듯 위쪽이 뜯겨져 나가 버린 상태라 위쪽에 뭐가 적혔었는지 알 수가 없고 대충 내용을 꿰맞춰야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내용은 경악하고 남음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건재하면 소림사는, 구대문파는 차후로도 영원히 일어설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그를 위하여 나는 이제부터 뜻을 같이 하는 구대문파의 선대 장로들을 규합하여 그를 제거하려 한다.

 우리들의 약속은 비약(秘約)이라 불릴 것이며, 영원히 우리들만이 아는 비밀로 지켜지게 될 것이다.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이 글을 다른 사람이 보는 경우는 생기지 않으리라.>

*   *   *

 장원 하나.

 희미한 어둠 속에 묻힌 장원은 매우 큰 규모로 자리했다. 멀리 강을 끼고 자리한 장원은 단순한 한 채의 장원이라기보다는 커다란 마을과 같은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장원의 외곽으로는 호장하(護莊河)가 있을 정도였고 그 담장 안쪽으로는 논과 밭이 있다. 전형적인 지방 호족들의 근거지 형태이기도 했다. 당시 호족들의 힘은 적지 않았고 또 난세로 인하여 자체적인 방어시설을 갖추다 보니 마을 전체가 하나의 장원화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이곳도 그런 형태였다.

 호장하 밖으로는 숲과 산자락이 목책(木柵)처럼 길을 막고 있으니 말 그대로 요새와도 같은 장원이라 할 수 있었다.

 천지를 덮었던 어둠은 저 멀리 강 건너에서 밀려오는 빛줄기에 천천히 밀려나는 중이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일어나 농기구들을 챙기고 이곳저곳 굴뚝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기지개를 켠다.

 그런 장원의 뒤쪽으로는 버들이 잔뜩 우거진 집 한 채가 있다. 장원 속의 또 다른 장원과 같은 그 십여 채의 집으로 이루어진 저택의 후원에는 소년 하나가 아침 안개를 보며 서성이고 있었다.

 총기가 반짝이는 눈을 가진 그는 유성이었다.

 뜻밖에도 실종되었던 그가 여기 있는 것이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연신 왔다 갔다 하던 유성은 갑자기 발을 굴렀다. 그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입술을 물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젠 도저히 초조해서 못살겠다!"

 중얼거린 그는 슬쩍 몸을 날려 담장 곁으로 붙어서면서 주위를 살폈다.

 아침 안개가 스멀거리고 있는 주위.

 보이는 것은 희미한 안개와 아직 채 물러나지 않은 어둠.

 슬쩍 몸을 날리자 그의 신형은 담장을 둘러싸듯 솟은 나무 그늘에 의지하여 담을 넘었다. 표홀(飄忽)한 모습이 그간 무공에 진경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담을 넘지 못했다.

 담을 넘으려는 순간, 담장 뒤에서 한 사람이 불쑥 머리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어딜 가려는 겐가?"

 차가운 음성.

 그 음성만큼이나 냉정한 얼굴의 중년인이 유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하…… 답답해서 바람이나 쐴까 하고……."

 흠칫한 유성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

 중년인은 잠시 유성을 쏘아보다가 말했다.

 "회주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회주께서?"

 유성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빛이 떠올랐다.

 "언제 돌아오신 건가요? 어제까지는……."

 "따라오게."

 말과 함께 그가 신형을 돌렸다.

 '무슨 일이지?'

 유성은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가 머릴 흔들고는 그 중년인의 뒤를 따랐다. 여기 사람들은 모두가 그랬다. 필요한 말만 한다. 그나마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몇몇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늘 밖으로 떠돌아 얼굴 보기도 힘들다.

 마당 둘을 건넜다.

 따로 떨어져 있지만 담장과 담장 사이에 문이 있어서 그 문을 통해서 안채로 통할 수가 있었다.

 안채는 장원의 중심부다.

 거대한 건물은 없었지만 몇 개의 건물이 연이어 시선을 가로막고 후원 쪽으로는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된다.

 유성이 안내된 곳은 바로 그 후원이었다.

 후원 대청으로 안내된 그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흑의에 냉막한 얼굴을 가진 여인. 나이는 들었으되, 고귀한 기품과 아름다움은 여전한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유성을 맞았다. 뜻밖에도 그녀야말로 유성이 한효월의 명에 따라 뒤를 따랐던 그 흑의의 여인, 보구회의 회주였다.

 "상처를 입으셨습니까?"

 그녀의 기색을 본 유성이 흠칫하여 물었다.

 "대단치 않다. 그보다…… 너는 지금 바로 이곳을 떠나야겠다."

 "예?"

 "네 주인을 만났다."

 "공자님을 말입니까?"

 "그렇다."

 "어, 어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정말 살아 계신가요?"

 유성의 얼굴이 흥분으로 들떴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보구회주의 뒤를 따르다가 발각되어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대는 그를 잘 대해주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한효월이 죽었다는 소문에 그는 크게 상심하고 그를 찾아 나서려고 안간힘을 쓰던 참이었다. 그런데…….

 "내가 만났다."

 "회주께서 직접……!"

 문득 유성의 안색이 굳어졌다.

 "설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 주인과 싸운 것은 아니니까. 너는 지금부터 그를 찾아가서 내 말을 전해주어야겠다."

 "무슨……?"

 "그와 만날 때가 되었다. 그는 아마 화산으로 가고 있을 것이니 가능하면 그가 화산에 도착하기 전에 그를 찾아서 내 말을 전해주면 좋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막 무엇인가 입을 열려던 유성은 흠칫, 입을 다물었다.

 "으핫하하…… 모조리 썩 기어나오지 못할까!"

 천둥이 치는 듯한 웃음소리.

 뒤를 이어 바깥쪽에서 고함 소리와 비명이 잇달아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설마 그가 여기까지?"

 흑의의 여인, 보구회 회주의 얼굴에 차가운 빛이 떠올랐다.

 유성은 그 말소리가 끝나기 전에 이미 대청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대청 밖에는 한 사람이 우뚝 서서 횃불과 같은 눈으로 주위를 쓸어보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이미 십여 명의 흑의인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밀려오고 있는 흉흉한 기세의 흑의인 수십 명은 눈에 차지 않는 듯 우뚝 선 그. 갈의장삼을 걸친 그에게서는 실로 막강한 기세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체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 기세는 천지를 누르고도 남을 듯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그의 굽은 등.

 "권왕……."

 그를 본 유성이 실성을 토해냈다.

 그 말에 그를 힐끗 돌아본 권왕 막풍의 눈에도 괴이한 빛이 스쳐 갔다.

 언젠가 유성을 한 번 본 적이 있는 까닭이다.

 그때 흑의부인, 보구회의 회주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안색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

 "좋아, 드디어 찾아낸 것 같군……."

 권왕 막풍의 얼굴에 음산한 웃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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