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首 고사경변(古寺驚變)
-음모와 마주하다
거대한 진실(眞實)은 참혹함으로 숨 쉬다
쏴아아…….
얼마 전까지 간간이 뿌리던 빗줄기는 갑자기 굵어져 폭우로 변했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는 산속의 어둠을 휘몰면서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암흑 천지를 만들었다.
하늘을 향해 쳐들린 빛 바랜 처마에 매달린 풍경(風磬)은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듯이 사방으로 춤을 추며 비명을 질러댄다. 낡은 문루 위에 걸린 현판은 반쯤 부서져 거기 새겨진 커다란 금자횡서(金字橫書) 중 겨우 상(相)이란 글자와 사(寺). 두 글자만 알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 문루에 이어진 담장조차 여기저기 무너지고 잡초가 그 담장을 덮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폭우와 어둠에 묻힌 그 건물이 사찰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부서진 석등(石燈).
여기저기 반쯤 허물어진 석탑(石塔)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폭우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안쪽으로 몇 채의 전우(殿宇)가 거대한 괴물처럼 빗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번쩍, 콰콰쾅!
새파란 번갯불이 거대한 신검(神劒)과 같이 세상을 갈랐다.
<대웅보전(大雄寶殿)>
그 서슬에 희미한 글자가 얼핏 보인다.
어둠 속에 한 사람이 웅크리고 있었다.
찢어진 도포(道袍)는 불어닥치는 바람에 펄럭거리지만 그는 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제 보니 찢겨진 도포는 피투성이였다. 결가부좌를 한 채로 앉아 있는 그의 옆 바닥에는 한 자루의 보검이 꽂혀 불어오는 바람에 검수(劒綬)를 펄럭인다.
눈을 반개한 노도인, 그의 턱에 서린 흰 수염에도 선혈이 맺혀 있다.
그는 눈을 반쯤 감은 상태에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대전의 문을 가로막은 듯한 모습인 그의 뒤쪽으로는 제법 큰 불상이 놓인 불단(佛壇)이 자리했고, 그 앞에는 붉은 가사를 걸친 노승 한 사람이 가부좌를 한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무릎에는 길게 선장(禪杖) 한 자루가 놓여 있었고, 정갈했을 가사 또한 피 범벅이라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을 누구라도 일견해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바깥의 소란스러운 천둥과 번개 외에는 이따금 낡은 대전의 천장에서 떨어져서 바닥을 두드리는 빗소리 외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숨을 쉬지 않는 듯 호흡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들의 모습.
분명히 죽은 것이 아님에도 옆에다 귀를 갖다 대도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호흡이 깊다는 것은 그들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의미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노도인의 긴 눈썹이 꿈틀거렸다.
거의 감은 듯 반개했던 눈에서 신광이 일고, 그와 때를 같이하여 그의 뒤에서 운기조식하고 있던 노승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감았던 눈을 떴다.
쏟아지는 빗소리.
천둥이 울고, 그처럼 폭우가 대지를 후려치는 마당에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나도 그것을 들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들 두 사람은 달랐다. 무엇인가 기척을 느낀 두 사람에게서 호흡이 죽었다. 인기척이 사라졌다.
바로 그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노승 위쪽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낡았던 천장이 부서진 듯 썩은 나무 기둥과 흙먼지가 아래로 쏟아졌고, 빗물이 폭포수처럼 불단 아래 정좌해 있는 노승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노승이 그 빗물을 피해 옆으로 옮겨갔다.
그 소동에 노도인이 흠칫, 그곳을 돌아보았다.
펑!
그 순간에 겨우 닫아두었던 반쯤 부서진 불당의 문짝이 갑자기 왕창 터져 나갔다. 그곳을 통해서 검은 그림자들이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바닥을 뒹굴어 날아드는 그들의 손에서는 음산한 빛이 번뜩였다. 그 동작은 놀랍게 빨라 찰나간에 문 앞에 앉아 있던 노도인을 난자해들었다.
창, 차창!
금철이 부딪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뒤로 튕겨졌다.
한줄기 검광이 맹렬한 기세로 그들을 쫓아갔다.
그것이야말로 노도인의 옆 바닥에 꽂혀 있던 보검이었고, 번개처럼 그 보검을 움켜잡은 노도인은 흑영들을 물리침과 동시에 숨 돌릴 여유를 주지 않고 그들을 공격했다.
다시금 금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림과 함께 피보라가 피어났다.
그를 공격했던 두 명의 흑의인이 그 자리에서 두 쪽 나 쓰러졌다.
노도인의 검을 막았던 그들의 단도(單刀)는 두 동강이 나버렸고 그렇게 파고든 노도인의 보검은 그들을 양단해 버리고 만 것이다. 앉아 있던 상황에서 검을 뽑아 들고 그들을 물리침과 동시에 물러나는 그들을 땅을 박차면서 쫓아가 처리하는 그 과정은 그야말로 일순간, 자로 잰 듯한 상황에다가 놀랍도록 신속무비했다.
그가 흑영 둘을 막 처리하는 순간, 그의 뒤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너진 지붕에서 흑영이 날아 내려 노승을 공격하고 있었다.
노승은 심한 부상을 당한 듯 일어나지 못한 채로 무릎에 올려두었던 선장을 휘둘러 그들을 물리치고 있는데, 그럼에도 그 위세는 막강하기 이를 데 없어서 흑영들이 곁으로 가지 못하는 상태였다.
"가증한 놈들……."
노도인이 노호하면서 그쪽으로 덮쳐 갔다.
순간, 콰작!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로지르는 노도인의 아래쪽 바닥을 뚫고서 흑영 둘이 솟아올랐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솟구쳐 오른 그들의 손에 들린 도광은 절묘한 배합으로 노도인의 허를 찔렀다.
"흥!"
노도인은 냉소를 터뜨리면서 솟아오른 장도(長刀)를 검으로 치며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찰나, 다른 흑의인 셋이 줄에 꿴 듯이 바닥을 뚫고 솟구쳐 올라 그를 밑에서부터 공격했다.
피할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절세의 고수라 할지라도 공격해 온 자들의 도검을 치고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는 순간에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날아든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더구나 그가 피하는 방향을 예측한 공격인데다, 바닥을 뚫고 치솟은 공격이라 방비하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위기일발!
노도인의 얼굴이 돌연 한 가닥 맑은 빛줄기[淸光]가 치밀어 올랐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검이 호선(弧線)을 그리며 아래로 길게 그어졌다. 한줄기의 호선이었음에도 그것은 달무리와 같이 사방을 덮었고, 그를 공격했던 자들의 전신을 덮어버렸다.
창창- 차차창!
고막을 두드리는 금속성에 이어 피보라가 사방을 덮었다.
노도인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바닥으로 내려섬과 동시에 그를 공격했던 세 명의 흑의인들이 그의 뒤에서 피를 뒤집어쓰고서 나뒹굴었다. 그들의 손에 들었던 좁은 검날의 검[狹鋒劒]은 노도인의 일검을 견디지 못하고 모조리 반 토막이 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무당이 자랑하는 무당의 진산(鎭山) 구전현공(九轉玄功)을 운용하여 펼친 절세의 태극혜검(太極慧劒) 가운데 건곤일기(乾坤一氣)의 일초였으니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노도인도 무사하지 못했다.
바닥에 내려선 노도인은 휘청거렸고, 그의 몸에는 두 군데의 검상이 더 생겨났다. 그중 하나는 부러진 검이 가슴을 꿰뚫고 있어 평범한 사람이라면 즉사를 했을 정도로 엄중하였다.
"도우(道友)!"
그것을 본 노승이 소리쳤다.
그를 공격하는 자들이 그 틈을 놓칠 리가 없다.
노승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로 수중의 선장을 휘둘러 그들을 막고 있으나, 무공을 씀에 있어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장애인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
비틀거리던 노도인은 이를 악문 채로 수중의 검을 던졌다.
쏴아앙!
검이 한 가닥 섬광(閃光)으로 화해 무섭게 날아갔다.
노승을 공격하던 흑의인 하나가 문득 심상치 않은 느낌에 번개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크악!"
그 순간, 그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검은 찰나간에 그의 등을 뚫고서 가슴으로 튀어나왔고, 그도 모자라 그를 매단 채로 날아가 맞은편 불단의 불상에다 산 채로 박아버리고 말았다. 한차례 버둥거렸을 뿐, 그 흑의인은 그대로 숨이 끊어져 버렸다.
그 변고에 노승을 포위 공격하던 흑의인들 진영에 혼란이 일었다.
"쓰러져라!"
돌연 노승이 양손을 앞으로 쳐내면서 사자후를 내질렀다.
고막을 치는 고함은 큰 종을 울리는 듯 대전을 울렸고, 대전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그 사자후에 뒤흔들렸다.
그리고 선장을 내던지며 노승이 양손을 쳐내자, 일대에는 가공할 경기가 일었다. 그 무서운 힘은 주위 공기를 모조리 밀어낸 듯했다. 숨을 쉬기 힘든 진공 상태가 일순간 노승의 장세 주변 1장여의 거리로 몰려들었다.
"흐윽!"
노승을 공격하던 나머지 두 명의 흑의인이 주춤하더니 비틀비틀 술 취한 사람처럼 뒤로 물러나다가 풀썩, 주저앉더니 모로 쓰러졌다. 그들의 손에서 장도가 떨어져 나뒹굴었다. 그들의 칠공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보자 노도인의 얼굴에 감탄한 빛이 돌았다.
"아직까지도 반야장(般若掌)을 시전할 수 있으니 도우의 공력은 과연 절세하오……."
내밀었던 손을 천천히 거두는 노승의 얼굴에 쓴웃음이 맴돌았다.
"고령자 도우야말로 아직도 이기어검을 시전할 수 있으니……!"
말하던 그가 갑자기 입을 닫았다.
검을 던져 자신을 구한 노도인, 무당파의 선대 장로인 고령자가 무릎을 꿇는 것을 본 까닭이다.
"도우!"
그의 부르짖음에 고령자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래도 빈도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소."
"무슨 소리요? 우리가 어떻게 사선(死線)을 뚫고 여기까지 왔는데……."
고령자는 머리를 저었다.
"빈도는 더 이상 체내의 독기를 제어할 수가 없소. 여기까지가 한계인 모양이오."
그의 입에서 선혈이 흘러내려 흰 수염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창백하다 못해서 푸른빛이 서리고 있었다.
"도우……."
노승, 혜도 선사의 얼굴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내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으나, 한순간의 잘못으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죽어도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을꼬……."
고령자는 장탄식을 했다.
핏물이 그의 입에서 도포를 물들이면서 뚝뚝 떨어졌다.
피시시…….
그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이 도포에 닿자 도포가 몸서리를 치면서 연기를 피워 올렸다. 놀랍게도 핏물에 도포가 타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고령자는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실로…… 무서운 독이오. 한 번도, 한 번도 세상에 이와 같이 무서운 독이 존재하고 있으리라고는…… 쿨럭,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소……."
"당연한 일이지……. 그것이야말로 독왕(毒王)의 걸작인 무형지독이니까."
돌연 대전의 바깥에서 음산한 음성이 대꾸하듯이 들려왔다.
그 말이 들려오자 고령자와 노승, 혜도 선사의 안색이 돌변했다.
"독왕이라니!"
독왕(毒王).
천하십왕 중 하나.
묘강(苗疆)에 살면서 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무서움은 이미 천하를 떨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묘강은 중원무림에서 소외된 곳이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든 중원과는 관계가 없다. 수만 리 떨어진 변방(邊方)에서 그의 존재가 어떻다 한들, 그것이 중원에 어떤 영향을 끼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거기에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러한 독왕 우특(于特)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우연한 기회에서 비롯되었다.
사천(四川)의 당가(唐家)는 예로부터 알려진 독의 명가(名家)이다. 그들은 독에다가 그들만의 암기로써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남만(南蠻)의 오지로 독을 찾아 나섰던 당가의 장로인 칠보추혼(七步追魂) 당가위(唐駕衛)가 실종되고, 그를 따라갔던 제자 하나가 반죽음이 되어 겨우 돌아오자 당가는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그것이 묘강의 하잘것없는 만인(蠻人)과의 시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체면상으로도 그냥 넘길 수가 없게 되었다.
독에 관한 한 천하제일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당가였다.
그런 그들 가운데 장로가 만인에게 독사(毒死)를 당하다니…….
당가의 명예를 걸고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어 당가에서는 장로들을 소집하여 정예고수들을 남만으로 파견하였다. 누구도 그들이 그 남만의 가소로운 오랑캐 무리들을 핏물로 녹여 버릴 것을 의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렇게 호호탕탕히 떠난 당가의 고수 열두 명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당가에 나타난 것은 작달막한 키에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만인(蠻人) 한 사람. 주렁주렁 괴상한 주머니를 온몸에 걸친 데다 대머리에 맨발까지, 그들이 그처럼 비웃던 오랑캐였다. 그러나 그의 가공할 위력을 본 사람은 어느 누구도 감히 그를 비웃지 못했다. 비웃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세상의 마지막이 되고 싶지 않다면…….
유서 깊은 천하제일의 암기 명문, 독의 가문인 당가가 그 오랑캐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무너졌다. 당세를 오시한다던 당가의 가주 천수앙신(千手殃神) 당가패(唐駕覇)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것이 50년 전이었다.
독왕이란 이름은 그렇게 독에 관한 한 천하제일이라던 당가를 딛고서 천하에 알려졌다.
공포로써…….
독왕의 이름을 듣자 혜도 선사와 고령자의 안색은 흙빛이 되었다.
절로 손발이 떨려왔다.
두렵다기보다는, 어떤 방법으로도 이 난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때문이다. 그들을 중독시킨 독이 다름 아닌 독왕의 독이라면 독왕의 해약이 아니라면 누구도 액운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쏴아아…….
빗소리는 여전히 요란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두 노인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은 서로의 눈에서 죽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미타불…… 독왕까지 저들에 가세했다면……."
혜도 선사가 납덩이 같은 안색으로 장탄식을 흘려냈다.
"그럴 리는 없을 것이오. 그는 성격이 괴팍하여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묘강을 떠난 적이 없소. 어떤 일이 있어도 상대가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상대를 건드리지 않는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고령자가 부정을 했다.
그러나 그 음성에 힘이 없음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들이 상대한 사람은 지금까지 그런 상상을 모두 초월해 버렸기에.
"고 시주라도 이 횡액을 벗어나 화산으로 돌아갔어야 할 텐데……."
고령자가 신음을 흘려냈다.
번쩍!
번갯불이 대전을 잠시 밝게 했다.
이어 고막을 찢을 듯 뇌성이 크게 울었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적의 공격은 더 이상 없었다. 쏟아지는 빗소리만이 요란할 뿐이다.
"이자들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가슴을 움켜쥔 채로 눈살을 찌푸린 고령자는 혜도 선사가 자신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자 입을 다물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바깥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바깥을 향해 귀를 기울여 본 고령자의 안색도 조금 달라졌다.
희미하게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도우, 이건……."
"누가 온 것 같소이다."
혜도 선사의 말에 고령자가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바깥에서 고함 소리와 격렬한 싸움 소리가 일었다. 그리고 꼬리를 무는 비명 소리. 뒤를 이어 굉량(宏量)한 부르짖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중기(中氣)가 충만하여 대웅전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였다.
급한 움직임이 대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막는 자들의 저항이 격렬한 듯했지만 나타난 사람의 능력이 뛰어난 듯 이내 한 사람이 대전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게 서라!"
혜도 선사가 그 사람에게 선장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사숙! 대명입니다!"
뛰쳐든 사람은 어둠 속에서 선장의 바람 소리만 듣고도 이내 그 무공노수(武功路數)가 소림의 것임을 짐작하고는 크게 소리쳤다.
"대명이라고?"
혜도 선사가 황급히 공세를 철회했다.
순간.
"물러가!"
안으로 뛰쳐 들어온 사람은 돌연 고함을 치면서 신형을 반전(半轉), 등 뒤를 향해서 선장을 휘둘렀다. 철환장(鐵環杖)이라 불리는 빈철로 만든 그 선장은 고막을 찢는 무서운 바람 소리와 함께 경풍을 휘몰았다.
쩡쩡!
금철이 부딪는 소리가 잇달아 터졌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그의 등 뒤로 달려들던 자들 서넛이 한꺼번에 튕겨져 폭우 속으로 나뒹구는 것이 보였다.
그들을 물리친 사람, 대명은 문에서 옆으로 두어 걸음 물러난 채로 몸을 돌렸다. 부리부리한 고리눈에서는 어둠을 뚫고서 신광이 쏟아져 주위를 둘러본다. 나이는 서른이나 되었을까? 얼굴을 온통 뒤덮은 수염으로 인해 산도적처럼 보이는 그야말로 지난날 한효월과 만난 적이 있었던 소림사의 기승(奇僧) 대명이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그의 돌연한 출현에 혜도 선사가 놀라 물었다.
"사숙께서 나한전의 고수들과 같이 가셨다길래 뒤를 따라……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다른 분들은?"
대명은 대전 안을 둘러보다가 안색이 변해 되물었다.
그의 말에 혜도 선사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모두가 내 잘못…… 잘못……."
"설마? 구파의 정예가 모두 당했단 말입니까?"
대명은 믿기지 않는 듯 다시 물었다.
"그들은 중독되어 채 힘도 쓰지 못하고……."
괴로운 듯 머리를 내젓던 혜도 선사는 갑자기 생각이 미친 듯 다급히 소리쳤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너는 어서 이곳을 떠나거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사숙과 고령 사백을 두고 어떻게? 제가 두 분을 모시고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우, 우리는 이미 틀렸다……. 보고도 모르겠는가?"
고령자가 가슴을 움켜쥔 채로 헐떡였다.
그의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핏줄기가 바닥에 닿을 때마다 푸르스름한 김이 바닥에서 칙칙, 피어 올랐다. 공포스럽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그것은 그가 당한 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웅변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그의 공력이 지순(至純)한 경지에 이르러 있지 않았더라면 이미 살아 있을 상태가 아니었다.
"시간이 없다. 어서 가거라!"
"사숙!"
혜도 선사의 재촉에 대명이 미간을 굳혔다.
"우리와 같이 갈 수는 없다. 어떻게 하든 너라도 가야만 한다. 가서 진 장문인에게 전하거라. 모든 게 틀렸다고! 그들은 통제(統制)에서 벗어났다고…… 그게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이다."
"그건 무슨……?"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는 대명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그렇게 전하면 알 것이다. 가거라!"
"사숙!"
"우리가 너를 돕겠다. 비록 이 지경에 처해 있긴 하지만 우리가 진원지기(眞元之氣)를 끌어올린다면 너 하나는 탈출시킬 수 있다!"
혜도 선사가 눈을 부릅떴다.
마치 꺼져 가는 불씨와 같던 그의 눈에서 신광이 일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정히 궁금하거든 가서 진 장문인에게 물어보거라. 하지만 이 소식은 네가 생명을 걸고 반드시 전해야만 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들을 막아야 한다고…… 가, 거, 라!"
혜도 선사가 선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일단 몸을 일으키자 그리 크지 않은 그의 신형은 뜻밖에도 고대(高大)해 보였다. 사람을 압도하는 기세가 일어난다는 의미다. 선장을 짚고 선 그의 모습은 당당하여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 듯하던 사람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전신을 적신 핏물은 그의 상태가 간단치 않음을 말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것을 보자 고령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도우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 또한 더 이상 죽은 척할 수는 없겠구료……."
말과 함께 그는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좀 전에 흑의인을 불단에 못 박아 죽였던 그의 검이 마치 누가 잡아당긴 듯이 쭈욱 뽑혀 나오더니 그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도 그 검에 의지하여 몸을 일으켰다.
"으음……."
그 모습에 대명은 신음을 흘렸다.
그들이 마지막 힘을 다 일으킨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힘은 마지막 불꽃과 같아서 보통 때보다 더욱 밝을 것이다. 모닥불이 타다가 꺼질 때 한순간 더욱 밝아지는 것처럼. 그러한 현상을 회광반조(廻光反照)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뿐, 그 힘이 다하면 그들은 영원히 숨 쉴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의 죽음을 헛되이 할 작정이냐? 네가 그 말을 전하지 않는다면 자칫 무림맹은 괴멸의 위기를 맞게 될런지도 모른다."
말과 함께 혜도 선사는 손을 쳐들었다.
순간, 대명의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쳐 갔다.
혜도 선사가 순간적으로 그에게 은밀히 전음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
얼떨떨한 빛으로 혜도 선사를 바라보던 그는 혜도 선사의 재촉에 장탄식을 흘리면서 그들에게 합장을 해 보였다.
"그럼……."
마지막 인사를 하고 그가 막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쨍! 쨍그렁…….
갑자기 바깥에서 격렬한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천둥 소리보다 더 우렁찬 광소(狂笑) 소리가 뒤를 이어 터져 나왔다. 난데없이 들려온 웃음소리는 큰 종을 울리는 것 같았다. 그 위세는 대단하여 바깥에서 쏟아지는 빗줄기가 그 웃음소리에 춤을 추며 출렁이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빗물이 출렁이는 것이 보일 지경이었다.
그 웃음소리의 뒤를 이어 싸움 소리가 더욱 격렬해졌다.
난데없이 들려온 싸움 소리에 대명을 비롯, 혜도와 고령자 또한 놀란 눈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싸움 소리는 점점 더 격렬해졌고, 나타난 쪽이 우세한 듯 점점 대웅전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구와 같이 왔느냐?"
칠흑 같은 어둠에 싸인 바깥을 내다본 혜도 선사가 대명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소식을 듣고 급해서 혼자 달려왔습니다."
굳이 답을 하지 않아도 그가 혼자 온 것은 자명했다.
전신이 빗물에 젖은 채 상기된 그의 얼굴은, 그가 격심한 싸움 끝에 저지를 뚫고서 단신으로 여기에 도달한 것임을 말하고도 남음이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인가?'
혜도 선사는 백미를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 자리에 나타날 사람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더더구나 저들의 그 무서운 포위망을 뚫고 올 사람이라면…….
지난날 그의 사부였던 소림사의 방장 무상 선사(無常禪師)는 그를 보고 말했었다. 너는 너무 총명한 데다 호승심이 강하여 네 자신을 잘 다스리지 않는다면 자칫 그로 인해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당시 소림사 적전제자(嫡傳弟子)들 중에서 으뜸가는 무공과 배움을 갖추었음에도 그는 장문 직을 이어받지 못했다. 그것이 그는 늘 불만이었었다. 게다가 사부의 뒤를 이어 소림사를 맡은 사형 혜우(慧愚)는 선종(禪宗)의 큰그릇임에는 분명했지만 천하제일이라는 소림을 키우는 것에는 등한하였다. 사문은 사문으로 족하다는 것이 그 논지였다.
그는 그런 무사안일의 삶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위험을 무릅쓰고서 번천지계를 계획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싸움 소리는 더욱 격렬해졌다.
그리고 그 소리가 갑자기 잦아들었다.
번쩍, 콰콰쾅!
폭우 속에서 새파란 전광(電光)이 천지를 푸른빛으로 온통 밝게 휘감았다. 일순간, 대웅전 밖의 모든 것이 빛줄기에 발가벗겨졌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늘어서 있음이 보였다.
아니, 대오를 이룬 채 대웅전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 앞에 선 사람은 천장(天將)과도 같이 고대한 체구를 가지고 있는데 그는 그 순간에 대웅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 빠른 걸음인 것 같지 않지만 성큼성큼 걷는 그 속도는 질풍과도 같았다.
대명 또한 제법 거구에 속했다.
그러나 나타난 사람은 정말 거인이었다.
그는 빗물을 뚝뚝 흘리면서 대웅전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대전 내부를 둘러보는 그의 태도는 당당하고 위맹했다.
마치 사자를 보는 것 같은 느낌.
팔 척 장신에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은 사자의 갈기처럼 사방으로 흘러내렸다. 한 가닥 영웅건(英雄巾)으로 질끈 동여맨 그 이마에는 한 마리 봉황의 모습이 정교히 새겨진 옥 장식이 붙었다.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나이에 얼굴은 주톳빛. 부리부리한 눈빛에 사자코, 메기입 등은 전형적인 장사의 모습이고 손에는 마치 손오공의 여의봉(如意棒)과 같은 생김의 철봉을 들었다. 길이가 1장은 족히 넘는 듯하여 보통 사람이라면 들기조차 힘들 터이다. 마치 무슨 기둥을 뽑아 들고 다니는 것 같아 그가 천생의 신력을 지닌 사람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누가 혜도 선사이시오?"
대웅전 안을 훑어본 그가 우렁우렁하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가 묻는 순간에 날렵한 검은 경장을 한 자들이 대웅전의 입구 좌우로 소리도 없이 늘어섰다. 싸움 소리는 거의 멎은 상태였다. 그들의 움직임으로 보아 상황은 그들이 이미 장악한 듯했다.
"아미타불, 시주는 뉘신지?"
나타난 사람이 적인지 우군인지 알 수 없는지라, 대명은 두 노인을 가로막듯 앞으로 나서면서 되물었다.
"본인은 수천개(帥天開)라고 하오. 음, 소림사에 사자승(獅子僧)이라고 불리는 걸출한 젊은 고수가 있다고 하더니 혹시 그 대명 대사가 아니시오?"
"과찬의 말씀을……."
대명이 말끝을 흐렸다.
의혹이 깃든 표정이었다. 상대는 자신을 단숨에 알아보는데 그는 상대를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아미타불…… 봉황문에 문무 양쪽으로 뛰어난 인재가 있다고 하던데, 혹 시주가 봉황문의 무상(武相)이시오?"
대명의 뒤쪽에서 혜도 선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과연…… 그렇소! 본인이 바로 봉황문의 무상이외다. 대사가 소림사의 혜도 장로이시오?"
"그렇소이다."
혜도 선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송충이처럼 굵은 눈썹을 찡그렸다.
"음, 부상이 심하신 모양이군. 다른 분들은?"
그가 사람을 찾듯 주위를 둘러보자 대명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그의 말속에서 그가 우연히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라 혜도 선사 일행을 목적으로 하여 온 것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행을 찾는 것은 그들의 인원 구성까지 안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실로 괴이한 일이었다.
혜도 선사가 이곳으로 온 것은 매우 은밀하여 소림사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극히 적은 비밀이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그들을 찾아왔단 말인가.
"본 문이 대사 일행을 찾아온 것은 한 분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외다."
그러한 의혹을 읽었음인가.
수천개가 다시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큰 종을 울리는 듯하여 설사 속삭인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고함치는 것 같았다.
대명 일행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상대가 자연히 말을 하게 마련이다. 혜도 선사는 의혹이 깃든 눈빛이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대명 또한 그것을 알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눈치 싸움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입을 열고자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바깥에서 은은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부인(夫人)께서 당도하셨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수천개는 미미한 웃음을 지었다.
"마침 오셨군. 직접 만나보시면 되겠소이다."
대전의 바깥에서 빗소리를 뚫고 들려온 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바깥의 어둠과 폭우 속을 뚫고서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한 채의 검은 가마[轎子]와 그 가마를 든 두 명의 흑의인. 그 가마를 호위하듯 좌우로 늘어선 십여 명 흑의인들의 기세는 삼엄하였고 대전을 향해 다가오는 속도는 질풍과 같았다. 삽시간에 그들은 시체가 널브러진 성한 뜨락을 가로질러 대전의 앞에 도달했다.
그들이 다가오자 앞에 있던 자들이 물러났고, 가마는 바로 대전의 앞에서 멈추었다.
수천개 또한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 자리를 양보하였다.
대전 층계 위에 도달한 가마의 문이 열리자 당혜(唐鞋)를 신은 여인의 발이 치마와 함께 나타났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떠오르듯이 희디흰 손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렇게 해서 가마에서 내린 여인은 얼굴에 검은 면사를 가리고 있어 누군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호리호리한 교구(嬌軀)와 눈 아래를 가린 면사 위로 드러난 봉안(鳳眼)과 그 눈을 감싼 버들눈썹, 반듯한 이마 등으로도 그 여인의 아름다움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부인은……?"
그녀를 보자 혜도 선사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수천개의 옆을 지나 대전 안으로 들어선 흑의면사녀가 그를 향해 가벼이 머리를 숙여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사."
"그, 그렇군요. 어떻게 여기에……?"
그녀가 인사를 하자 혜도 선사는 당황하여 그녀에게 마주 합장하면서 예를 표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자 여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부상이 심하시군요?"
말과 함께 그녀는 혜도 선사에게로 다가갔다.
칠흑 같았던 대웅전 안은 이미 밝아진 상태였다.
흑의면사녀를 호위해 온 흑의인들이 대전 안으로 들어서면서 불을 밝힌 까닭이다. 그들은 흑의녀를 호위하여 좌우로 갈라섰고 신속한 행동으로 화섭자를 꺼내어 불을 밝혔다.
혜도 선사의 옆으로 다가선 그녀는 전신이 피로 물든 그를 보자 발을 구르며 탄식을 흘렸다. 안타까운 빛이 역력했다.
"어쩌면 이렇게…… 제가 소식을 조금 더 일찍 들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가벼이 연족(蓮足)을 구르자 사향 내음이 은은히 혜도 선사에게 풍겨왔다. 눈앞에서 풍만한 중년 여인의 가슴이 출렁거림이 완연하다. 비록 호승심이 강하다고 하지만, 평생을 수도승으로 살아온 그였다. 그 모습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는 당황함을 감추려는 듯이 고령자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모르시겠소? 독고 맹주의 부인이신 독고 부인이시오."
그의 말에 고령자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드러났다.
"독고 부…… 인이……?"
그녀가 여기에 어떻게 나타났냐는 의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은 너무도 뜻밖인지라 그 의문은 여기 있는 그들 모두의 의문이기도 하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선장(仙長)."
흑의녀가 얼굴을 가렸던 면사를 떼면서 고령자에게 가벼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타난 얼굴은 과연 그들이 익히 아는 맹주부의 안주인인 봉설란이었다.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우연히 봉황문 내부에서 제천교의 움직임을 알아냈는데, 그들이 함정을 마련하고 여러분을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는데 늦었군요."
그들의 몰골을 보고 봉설란은 다시 한 번 탄식을 하더니 손짓을 했다.
뒤에 있던 흑의인이 그녀에게 단목(檀木)으로 된 상자를 건넸다.
"혹시 몰라서 약을 준비해 왔었습니다만……."
그녀가 약이 들은 듯 보이는 상자를 받으며 하는 말에 혜도 선사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미타불…… 노납 등은 이미 중독되고 상세가 심하여, 고심(苦心)하심은 익히 감사하지만 아마도 소용이 없을 듯하외다."
그 말이 맞다는 듯 고령자도 쓴웃음을 머금었다.
진원지기까지 불러일으킨 그들인데 대라신선인들 어떻게 그들을 구할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약선(藥仙)의 장생단(長生丹)입니다."
"장생……."
그 말에 놀람의 빛이 대전을 압도했다.
약선의 장생단이라는 것은 죽은 사람의 뼈에다 살을 붙인다는 절세의 영약인 까닭이다. 그녀가 가져왔다는 것이 설마 그런 것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혜도 선사의 얼굴에도 경악의 빛이 가득하였다.
약선(藥仙) 백장주(白長州).
그는 따로이 염왕의 구적(仇敵)이라고 불린다. 염라대왕에게 잡혀갈 사람까지 살려내는 놀라운 의술로 인해서 염라대왕이 이를 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만큼 그의 의도는 탁월하여 의도에 관한 한, 무림이나 일반을 막론하고 그가 가장 뛰어난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은 이미 30년이 넘는다.
당시에 이미 육순의 그였으니 살아 있다면 백 세를 바라보는 노인. 아마도 이미 죽었으리라 여겨지지만, 아직도 그의 이름이 세상을 유전함은 그의 의도가 워낙 발군인데다가 남겨둔 장생단 때문이다. 죽은 자의 백골에 살을 붙인다는 전설의 영약이니 누가 탐내지 않으랴. 그러나 약재를 구하기 어려워 그의 평생에 겨우 단로(丹爐) 하나를 만들어낸 장생단이니 구하기 쉬울 리가 없다. 더구나 그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다음에는 더 더욱…….
그런데, 그런 장생단이 여기, 봉설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다.
이미 포기했던 삶의 의욕이 혜도 선사의 심중에서 강하게 피어 올랐다.
더 오래 살고자 해서가 아니라, 하지 못한 일. 그가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을 이대로 두고서는 눈을 감을 수 없기에.
"어, 어떻게 이것을?"
혜도 선사가 주춤거리며 그녀를 보았다.
"쉽지는 않았지요. 비록 한 알뿐이지만 두 분의 능력이라면 반씩 나누어 드셔도 충분히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봉설란이 미소를 지은 채 그를 향해서 상자를 내밀었다.
길이가 한 자가량이나 되는 장방형의 단목 상자. 일개 단약 하나를 담기에는 터무니없이 크지만, 장생단의 가치를 생각해 본다면 그 정도로써도 부족할 터이다.
봉설란은 상자를 내밀면서 그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과연 붉은 주단이 깔린 바닥에 다시 이끼처럼 생긴 묘한 풀이 가득 담겨 있고 그 위에는 밀봉된 오리알만한 단환이 하나 놓여 있었다. 상자가 큰 것은 그 풀을 담기 위함이고, 그 풀이 있는 것은 약의 보전을 위한 특별한 것인 듯했다.
"어, 어떻게 노납이 부인께 이런 귀한 것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겠지만 봉설란은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저었다.
"그분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선사의 능력은 제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부디 법체를 보전하셔서 그들을 상대하셔야지요."
"아미타불, 과찬! 과찬의 말씀이오……."
혜도 선사는 장탄식을 하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여 주시니 염치없지만 우선 신세를 지겠습니다."
그는 상자를 받으며 옆의 고령자를 돌아보았다.
"더 이상 사양함은 이렇듯 약을 구해 달려오신 부인께 결례가 될 듯하니 도우, 이리 오시오. 노납보다는 도우의 상세가 더 중하니 도우가 먼저 복용을 하시……!"
말을 하던 그가 갑자기 눈을 퉁망울처럼 부릅떴다.
"크으윽!"
상처 입은 맹수의 울부짖음과 같은 신음.
혜도 선사는 두 눈을 퉁망울처럼 부릅뜬 채로 튕겨나듯이 훌쩍 뒤로 물러났다.
와당탕!
장생단이 들어 있던 상자가 바닥으로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크으아아아……!"
혜도 선사가 아랫배를 움켜잡고서 미친 듯 전신을 떨었다.
그의 아랫배에는 음사(陰邪)한 검은빛이 번뜩이는 아주 작은 단검이 손잡이까지 깊숙이 꽂혀 있었다. 상자의 밑바닥에 감추어져 있던 단검이었다.
"크흐으으…… 이, 이게? 이게 무슨 짓이오? 대체 이게 무슨……."
혜도 선사가 학질에 걸린 듯 전신을 벌벌 떨면서 소리쳤다.
그의 앞에는 번개처럼 단검을 찌르고 한 걸음을 물러난 봉설란이 그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저런, 많이 아픈가요?"
묻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크윽, 으흐흐흑! 대체 이게 무엇이기에 이처럼…… 대체 당신은…… 누구요? 맹주 부인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 이건……."
혜도 선사는 이를 갈면서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누가 봐도 참기 힘든 격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이었다. 그처럼 중한 상처를 입고 있었어도 태연하던 그였다. 그런데 연신 비명을 질러대는 그의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하고 눈에서는 핏발이 섰다. 대머리에는 굵은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고, 피부는 충혈이 지나쳐 삽시간에 자색으로 변했다.
"왜요? 내가 어때야 하는데요?"
그런 혜도 선사의 모습을 보면서 봄바람과 같이 웃고 있던 봉설란의 얼굴이 돌연 차갑게 변했다.
얼음이 얼다 못해서 쩡! 소리를 내면서 깨질 듯했다.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모습은 전혀 달라 보였다. 일렁거리는 화섭자의 불빛에 비친 검은 옷을 입은 그녀의 얼굴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저런, 저런! 수십 년을 산사에서 수도한 중이 그렇듯 엄살을 떨다니…… 그러고도 당신이 수도승이라고 할 자격이 있을까?"
봉설란이 격통에 시달리는 혜도 선사의 모습을 보면서 깔깔 웃었다. 고막을 찌르는 웃음소리였다.
"당장 멈추지 못할까! 이게 무슨 짓이오!"
너무도 뜻밖의 사태에 일순간 멍청했던 대명이 대갈일성하면서 선장을 휘둘러 봉설란을 공격해 갔다.
"으핫하…… 젊은 중은 본좌와 같이 놀아보세!"
이미 그의 진로를 예측하고 있던 거한, 무상 수천개가 껄껄 웃으면서 세상에서 삽천봉(揷天棒)이라 불리는 그의 거대한 철봉을 휘둘러 대명의 앞을 가로막았다.
"고얀! 맹주 부인이 적도(賊徒)와 한통속이 되었단 말인고?"
고령자가 대노하여 봉설란을 향해 검을 쳐냈다.
무당의 검은 예로부터 무림일절(武林一絶)이라 하였다.
그 무당파의 선대 장로인 고령자의 검이다. 비록 중한 상세를 입은 상태라 하나 검이 날자 빛무리와 같은 검기가 피어나 봉설란을 향해서 무찔러 왔다. 검이 채 이르기도 전에 차가운 검기가 서릿발처럼 쏟아졌다.
거리조차 가까웠으니 그 속도야 말할 나위가 없다.
창! 차창!!
무찔러 가는 그의 검 앞에서 고막을 찢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검과 검이 마주치면서 새파란 불똥이 미친 듯이 튕겨 나왔다. 마치 번갯불이 무찔러 가듯이 검기를 번쩍이면서 고령자의 검이 연달아 앞을 쳐갔다. 이미 진원지기를 불러일으킨 그였다. 그것은 타버린 장작에다 불을 지핀 것과 같았다. 한순간 불꽃이 찬란하기는 할망정, 오래갈 수는 없다.
당사자인 고령자는 누구보다 그것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봉설란의 호위 무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그의 검을 막았다. 그들 개개인이라면 고령자의 사력을 다한 검을 막아낼 수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의 손에 들린 장도는 마치 수레바퀴와 같이 돌면서 교묘하게 고령자의 검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대명의 철환장 또한 폭풍이 일듯 소림사의 복마장(伏魔杖)을 시전해 내고 있지만 일시지간에 수천개의 삽천봉을 돌파해 내지는 못했다.
한눈에 상황을 짐작해 낸 봉설란은 싸늘히 웃으며 고통에 겨워하고 있는 혜도 선사를 돌아보았다.
"어때요? 견딜 만한가요?"
얼음처럼 차갑던 그녀의 얼굴은 다시금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
"크으윽! 대체 왜 이런 짓을…… 저, 정말 당신이 맹주 부인인가? 정말 당신이?"
혜도 선사는 배를 움켜쥔 채로 신음을 내뱉었다. 핏줄기가 그의 입에서 흘러내리고 아랫배 단검이 박힌 곳에서도 흘렀다. 검은 핏줄기는 바닥에 닿으면서 칙칙 소리와 함께 흰 연기를 피워 올렸다.
"내가 아니라면 또 누가 봉설란이란 거죠?"
그 모습을 보면서 봉설란은 하얗게 웃었다.
얼핏 보면 한없이 부드러운 모습이고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웃는 그녀의 눈은 독사의 그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보는 사람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크으으으윽! 왜 이런…… 왜……?"
혜도 선사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서 이를 갈았다.
상상하기도 힘든 고통이 아랫배로부터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단순히 흉기에 찔려서가 아니었다. 그런 정도라면 그의 수양으로 얼굴빛도 변치 않고 참을 수가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것은 달랐다.
뼛속으로 사무치다 못해서 온몸의 피부 한 조각조각이 다 일어서는 듯한 가공할 고통. 어떻게 형용조차 할 수 없는 가공할 고통이 그의 전신을 온통 씹어대고 있었다.
고통에 겨워 신음하는 혜도 선사를 보면서 봉설란은 차갑게 웃었다.
"고통스러우신가? 하긴…… 당연히 그렇겠지! 그 주한검(鑄恨劒)은 바로 그것을 위해서 36종의 독액에 49일 간 담구어 만들어낸 독검이니까. 스치기만 해도 독기가 즉시 전신으로 퍼져서 7주야 간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참혹한 고통에 시달리면서 죽어가야 한다고 하더군."
"왜, 왜 이런…… 크으으…… 노납과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무슨 원한?"
봉설란이 차갑게 웃었다.
"궁금한가? 내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그녀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가증한 도적놈! 네 스스로 한 짓을 알면서도 내가 왜 이러는지 정녕 모르겠단 말이냐? 이 천하의 악종(惡種). 겉으로 출가인의 탈을 쓰고 온갖 인면수심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러 놓고서도 무슨 원한이냐고?"
그녀의 날카로운 꾸짖음에 고통으로 일그러진 혜도 선사의 얼굴이 조금 달라졌다.
"크으…… 그게 무슨 소리요……? 노납은…… 크윽!"
그는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 봉설란이 휘두르는 소맷자락에 얼굴을 맞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한갓 여인의 소맷자락이었지만 거기에는 내가공력이 깃들어 있어서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바위도 부숴 버릴 수 있었다. 그랬다면 그의 머리는 집어 던진 수박처럼 부서졌을 터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그의 얼굴은 이미 엉망이 되어 피가 쏟아졌다.
무상 수천개와 싸우던 대명이 그 광경을 보고 대노해 소리쳤다.
"감히…… 그분이 뉘신데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어찌 수도승을 그처럼 욕을 보일 수 있더란 말인가!"
그는 고함치면서 수중의 철환장을 무섭게 휘둘렀다.
"으하하하…… 수도승? 저 천하의 잡놈이 말이냐?"
수천개가 천둥처럼 웃어대면서 대명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삽천봉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결은 완전히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철환장과 삽천봉이 부딪칠 때마다 가공할 폭음이 터져 나왔고, 그렇게 터져 나온 경기(勁氣)와 그들이 휘두르는 병기에서 일어난 경풍은 폭풍처럼 무섭게 사방을 휘몰았다. 그나마 절제를 하지 않았다면 그 싸움으로 인해 대웅전 자체가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 분명했다.
"잡놈이라니, 네 이놈! 어디서 감히!"
대명이 대노하여 철환장을 휘둘렀지만 일시지간에 수천개의 저지를 뚫고 혜도 선사에게 도달할 가능성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고령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처럼 무섭게 피어나던 검기는 몇 초 지나지 않아 눈에 띄게 흐려졌고 이미 그 위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꺼지는 불길을 불러일으켰다고는 하지만 그 힘의 쇠퇴는 너무 급격했다.
고령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진기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고?"
돌연 튕기듯이 뒤로 물러선 그는 한차례 비틀하곤 검으로 바닥을 짚으며 침통히 소리쳤다. 과도한 출혈에다 심한 내상으로 그의 얼굴은 원래 창백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창백함에다 납덩이 같은 무거움이 더한 상태였다.
일장 싸움의 소용돌이.
쏟아지는 경기에 봉황문 무사들이 들고 있는 화섭자의 불길이 일렁이고 그 불빛을 받으며 우뚝 선 봉설란의 얼굴은 요괴(妖怪)롭기까지 했다.
"무슨 짓을 했느냐고?"
봉설란이 차가운 눈을 들어 그를 건너보았다.
"뭐가 궁금한 것이지? 아, 갑자기 기력이 떨어지는 모양이군? 하긴…… 당연하겠지. 저들이 들고 있는 화섭자에는 무색무취의 미혼향(迷魂香)이 타고 있으니 정신이 아득해지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닐까?"
그녀의 말에 고령자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비열한 짓을……."
그의 말을 듣자 갑자기 봉설란은 미친 듯이 깔깔 웃었다.
"이 간악한 도적놈! 네놈들이 감히 나에게 비열하다고? 겉으로는 수도자인 척하면서 암중으로 음모를 꾸며서 그분을 암해(暗害)한 것을 내가 영원히 모를 줄 알았더냐?"
그녀의 말에 고령자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무슨 소리냐고? 번천지계까지 모른다고 하고 싶은가?"
그녀의 말에 고령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심한 충격을 받은 듯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 그……."
"천하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번천지계를 꾸며 구대문파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제천교를 조장(助長)하고, 그도 모자라 그들로 하여금 무림맹주인 건곤무적 독고해를 암해(暗害)하도록 획책한 원흉이 바로 너희들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다 알아냈다! 아니라고 부인하겠느냐?"
봉설란이 피를 토하듯 날카롭게 소리쳤다.
번쩍!
쾅! 꽈르르르…….
천지를 찢어발기는 번갯불, 그리고 대웅전을 뒤흔들 천둥 소리가 이내 그들의 귀를 때렸다. 바로 옆에 강한 번개가 친 듯했다.
하지만 지축이 뒤흔들릴 그 엄청난 번갯불과 천둥조차도 방금 그녀가 한 말보다 더 크고 충격적일 수는 없었다.
듣고도 듣기 힘든 믿기지 않는 소리.
"무, 무슨 소리요? 그게?"
튕기듯 뒤로 물러난 대명이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쳐 물었다.
평소 털털하여 늘상 태평하던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쏴아아…….
바깥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까지 대웅전에서 벌어지던 일장박투는 이미 가라앉았다.
대명이 물러나자, 그와 싸우던 수천개 또한 물러나 그의 진로만을 가로막은 채 그를 쫓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냐고?"
대명의 소리침에 대답을 한 것은 무상 수천개였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을 부라리면서 냉소했다.
"소림사의 일대 기재라는 사자승 대명이 설마 번천지계를 모른다는 말인가? 그게 말이나 되나?"
그의 말에는 비웃는 빛이 역력했다.
"……."
대명은 납덩이 같은 얼굴로 바닥에 쓰러진 채로 신음하고 있는 혜도 선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휘청거리고 있는 고령자를 번갈아 보았다.
그의 눈길을 맞은 고령자는 눈을 감았다.
그의 눈꼬리가 어둠 속에서 경련을 일으켰다.
바로 그 순간, 혜도 선사가 일성 고함을 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그는 오른손을 쳐들어 봉설란을 쳐갔다.
바람 소리도 일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서운 기세가 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본 무상 수천개가 대경실색하여 소리쳤다.
"반약장이다! 부인을 보호하라!"
말과 함께 그도 그곳을 향해 날았다.
봉설란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순간, 그녀의 좌우에 있던 흑의인 둘이 장검을 휘둘러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찰나.
"흐윽!"
답답한 신음과 금철이 부러지는 쇳소리가 울렸다.
봉설란의 앞으로 가로막으며 검을 휘두른 흑의인 둘의 검이 가공할 힘을 이기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무섭게 휘었다. 이어 그들이 마치 연체동물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칠공으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그 모습은 이미 절명을 의미했다.
공포스러운 위력이었다.
하지만 그뿐, 그것으로 위력이 다한 듯 혜도 선사는 더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앞으로 쳐내던 손이 더 이상 뻗어나지 않았다.
그는 무너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다급히 소리쳤다.
"가거라! 명아! 너만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사숙!"
"자세한 것은 내가 말해 준 것을……!"
대명이 앞으로 달려나오려 할 때, 봉설란이 앞으로 날아 나오면서 혜도 선사에게 일장을 가했다. 그것은 그녀의 앞을 가로막던 흑의인들이 쓰러지는 것과 거의 동시라 할 정도로 신속무비했다.
펑!
폭음과 함께 봉설란의 일장에 혜도 선사는 외마디 신음과 함께 튕겨져 나갔다. 그 궤적을 따라 피분수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사숙!"
그것을 보고 대명이 소리쳤다.
"간악한 도적, 아직도 힘이 남아 있었다는 건가?"
혜도 선사를 날려 보낸 봉설란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 동시에 그녀가 손가락을 활짝 펴자 그녀의 은어와 같은 흰 손가락에서 지풍이 부챗살처럼 일면서 혜도 선사의 전신을 쳤다.
"흥! 그냥 죽도록 버려둘 것 같으냐?"
그녀가 냉소를 터뜨리자 그녀의 좌우에서 흑의인 둘이 바람처럼 달려나가 혜도 선사의 뺨을 올려붙이면서 그에게 뭔가를 먹였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게냐?"
대명이 노해 눈을 부릅뜨면서 선장을 휘둘러 앞으로 진격해 왔다.
하지만 수천개가 그냥 있을 리 없다.
쾅!
철환장과 삽천봉이 맞부딪치자 굉음이 터져 나왔다.
힘과 힘의 대결.
지금까지 그 대결에서 밀린 적이 없었던 대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 격돌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 뒤로 밀려난 것이다.
"와하하하…… 왜 그런가? 힘이 딸리나?"
수천개가 껄껄 웃으면서 앞으로 덮쳐 갔다.
"어서 가거라! 우린 이미 중독되었다. 모르겠는가!"
그 광경을 보고 고령자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도 채 말을 맺지 못하고 덮쳐 온 흑의인에게 제압당해서 널브러지고 말았다. 이름 높은 도인인 그가 나동그라지자 흑의인은 그를 개처럼 질질 끌어다 혜도 선사의 위에다 포개 버렸다.
그 광경에 대명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네 이놈들!"
그는 천둥처럼 고함치면서 다시금 수천개를 덮쳐 갔다.
윙윙-
수중의 철환장에서 고막을 울리는 굉음이 일었다. 경기가 태산처럼 일어나면서 경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광경을 본 수천개의 안색이 돌변했다.
"복마장(伏魔杖)의 정화인 강세복마(降世伏魔)로군!"
하지만 그는 전혀 물러나지 않고 수중의 삽천봉을 불쑥 앞으로 찔러냈다. 다시금 정면으로 부딪치려는 것이다. 어차피 상대는 중독된 상태. 힘으로 맞선다면 오래 버틸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였다.
그러나 전혀 뜻밖의 일은 그 다음.
삽천봉과 부딪친 철환장에서 폭음이 터지는 것이 아니라,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 탄력으로 대명의 신형이 무섭게 대웅전의 문을 향해 튕겨져 나간 것이다.
"이런!"
잔뜩 힘을 써 삽천봉을 쳐냈다가 헛손질을 한 꼴이 된 수천개가 일순 당황해 혀를 찼다.
그러나 대명의 이러한 행동은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 혜도 선사나 고령자가 그렇게 도망가라고 종용을 했는데, 봉황문의 고수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대비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대명이 날아간 쪽에 있던 흑의인들은 대명이 그쪽으로 날아옴을 보자 일제히 기합과 함께 들고 있던 장도를 쳐들어 그를 막아섰다. 그들의 임무는 대명을 잠시 저지함으로써 족했다. 어차피 수천개가 바로 대명을 쫓아올 것이고, 그는 지척에 있었다.
두 명의 흑의인이 그를 막음과 동시에 좌우에서 검이 날아들었다.
칼날이 경풍을 동반한 음향이 귀를 찌른다.
이미 검을 경지에까지 수련한 검수(劒手)가 아니라면 이런 위력을 보일 수가 없을 터이다. 대명이 앞을 막아선 도수(刀手) 둘과 부딪치는 순간에 그들의 검은 이미 대명의 좌우를 파고들어 그를 쪼갤 것이 분명했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은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났다.
"물럿거라!"
일성 사자후.
쨍그렁, 쩡!
고막을 두드리는 금철의 격돌, 그리고 뒤를 잇는 비명.
한 가닥 피보라가 이는 가운데 대명의 앞을 가로막던 흑의인 하나가 바닥에 쓰러졌다. 다른 한 사람은 충격을 받고 비틀거리는 가운데 대명의 좌우를 공격했던 흑의인 둘은 일순 멍청한 빛으로 서 있었다.
그 자리에 대명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밥통 같은 놈들! 그것 하나를 막지 못해!"
수천개가 노호를 터뜨리면서 그들을 스쳐 지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밖에서 격렬한 싸움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과연 소림의 기재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군…….'
봉설란이 놀란 눈빛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대명은 좌우에서 공격해 오는 검수들의 공격을 도외시하고 과감하게 앞을 막던 도수 두 사람을 돌파한 것이다. 검수들의 검격(劒擊)을 피하지 않았으니 상처를 입었을 터이지만, 어차피 그런 정도의 상처를 돌볼 상황이 아니었다. 말은 쉽지만 누구나 그 순간에 그런 판단을 이런 상황에서 과감히 실천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봉설란은 쓰러진 혜도 선사 등을 일별하고는 대웅전을 나섰다.
쏴아아-
빗줄기는 여전히 앞을 보기 힘들게 쏟아지고 있었다.
대웅전을 나선 그녀의 아미가 찡그려졌다.
그녀의 생각대로라면 대명은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수하들과 싸우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어디로 갔느냐?"
봉설란은 그녀에게 급히 달려온 흑의인에게 물었다.
흑의인은 사십 대 후반의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자였는데, 그는 미간을 굳힌 채로 급히 답했다.
"포위망을 돌파했습니다. 그의 능력은 생각보다 뛰어나서…… 지금 무상께서 그자의 뒤를 쫓고 있습니다."
그의 보고에 봉설란의 얼굴에 놀란 빛이 다시 떠올랐다.
"봉황검대를 돌파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의 능력은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더 놀랍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더욱 그를 놓치면 안 되겠군. 혹시라도 그를 놓치지 않도록 순풍이를 발동하여 이 일대를 모두 수색하시오."
"이미 수색을 시작했습니다."
흑의인이 머리를 숙였다.
쏴아아…….
빗줄기는 여전하다.
마치 시야에 물막을 쳐둔 것처럼 빗줄기는 퍼붓고 있었다. 천둥 소리는 간헐적으로 천지를 진동하며 그 빗줄기를 떨어 울린다.
'어차피 번천지계를 알지 못하던 자. 그가 있든 없든…… 그 위선자들의 가면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패망(敗亡)시키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봉설란은 차가운 얼굴로 그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대풍운연의』 제6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