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首 홍낭재견(紅娘再見)
-비왕이 나타나다
폭우 속의 실종(失踪)은 의혹을 더하다
어둠은 이미 짙었다.
이런 어둠에서, 더구나 숲 속에서 적을 추격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문곡은 전혀 초조하지 않았다.
문곡이 습격 장소를 대강 택했을 리는 없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사방에다 천라지망(天羅地網)을 깔아두었던 것이다. 상대가 제아무리 죽을힘을 다해 도주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가 포설한 독에 중독이 된 그녀가 오래 버틸 수는 없을 터였다. 조용히, 그러나 다른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그녀 일행을 몰아서 덫에다 집어넣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까지는 계획대로라고 해도 좋았다. 그녀의 움직임은 그가 깔아둔 감시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마지막 공격을 가하면 될 것이었다.
그가 포진했던 곳은 습격하기 좋고, 적이 도주하더라도 그 경로가 뻔한 곳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그 경로에다 제이의 포위망을 포설(鋪設)해 두었으니 혹시 적이 도주한다 할지라도 어차피 스스로 덫에 뛰어드는 격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포위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이 생겼다. 전혀 뜻밖의 변수(變數)가.
"으악!"
비명과 함께 숲 속으로 들어갔던 부하들이 튕겨져 나온 것이다.
천장 절벽에서 떨어진 듯 반신이 으스러진 채로.
공포(恐怖)가 숲을 휩쓸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흩어지지 말고 모두 모여라!"
마침내 문곡이 다급히 소리쳤다.
수하들을 한곳으로 모은다는 것은 그가 배치한 진형을 포기한다는 의미다. 그처럼 침착하던 그가 다급해서 일단 스스로를 지켜야 하도록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이다.
"으악!"
흑의인 하나가 다시 휴지 조각처럼 구겨져 튕겨졌다.
피분수가 그의 궤적을 따라 어둠을 수놓았다.
"으음……."
문곡이 신음을 흘렸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숲 속 어둠을 뚫고 천천히 앞으로 나서고 있음을 본 까닭이다.
당당한 체구에 전신에 어둠의 너울과 같이 걸친 흑포(黑袍). 그의 얼굴은 짙은 어둠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얼굴은 흑포와 마찬가지로 흑건(黑巾)으로 가리고 있어서 어둠 속에서 횃불과 같이 번쩍이는 강렬한 눈빛만이 보일 따름이었다.
흑포괴인은 그 무서운 눈길을 들어 문곡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한 문곡은 절로 가슴이 떨려왔다.
한 번도 그처럼 패도적(覇道的)인 기세를 본 적이 없었기에. 아니, 그보다는 그처럼 무심(無心)하고 공포스러운 눈빛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눈. 하지만 그 눈에서 이글거리고 있는 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은 살기(殺氣)!
팡!
"으악!"
"끄아아……."
흑포괴인이 양손을 쭉 펴자, 그를 향해 달려들던 문곡의 부하 둘이 한꺼번에 비명을 지르며 튕겨져 나갔다.
그들도 분명히 약자는 아니었다. 아니, 봉황문 무영도객이 어찌 약자일 것인가. 연수합격(聯手合擊)을 한다면 지닌 바 능력의 열 배가 되어 어떠한 고수라도 상대한다는 그들이 단 일 초를 견디지 못하고 피떡이 되어 나가떨어졌다.
세상을 떨게 만들었던 그 무영도(無影刀)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채로.
"일견경혼(一見驚魂) 재견사지(再見死之)…… 비왕(秘王)이란 말인가? 정말 보구회가 제천교의 비적(秘敵)이었군!"
그 광경에 문곡이 신음을 흘렸다.
예상을 하고 확인을 위해 움직이긴 했지만 실제로 사실을 확인하게 되자 절로 가슴이 떨렸다.
비적이라 불리는 보구회의 제일고수.
홀연히 나타난 비왕의 신위는 예상을 십 배 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히 만부막적이라고 해야 옳을 그 가공할 힘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날아들었던 도검이 그의 몸에 부딪치고서 튕겨 나가는 것을 본 문곡은 오늘의 일이 흉다길소(凶多吉少)하여 자신이 이미 주도권을 상실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매복했던 고수들이 종이 인형처럼 튕겨져 나가는 가운데 흑포괴인이 무서운 속도로 자신에게 짓쳐들어오고 있음을 본 문곡은 가슴이 섬뜩했다.
그때였다.
"흥! 다시 한 번 큰소리를 쳐보시지?"
냉소가 들려왔다.
문곡의 계책에 걸려서 허둥지둥 도주했던 마차 속 흑의여인이었다.
그녀가 흑포괴인이 나온 그 숲에 서서 문곡을 비웃고 있었다.
이제 보니 그녀는 이곳으로 오기 위해서 채 싸우지도 않고 그들을 끌고 이곳까지 달려온 것 같았다. 문곡의 예상대로 부상을 당하고 숨도 쉬지 못하고 쫓기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함정으로 끌어들인 것 같은 상황이다.
그것을 짐작하자 문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으아악!"
바로 그 순간, 그의 앞쪽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흑포괴인의 앞으로 가로막으며 진세를 펼치려던 무영도객들 중 하나가 흑포괴인의 권풍에 얼굴을 얻어맞아 얼굴을 움켜쥔 채로 허공을 둥둥 떠 날아가고 있었다.
"후, 후퇴!"
문곡이 다급히 소리치며 등을 돌렸다.
오는 것은 쉽지만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문곡의 눈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그의 앞으로 사신(死神)이 덮쳐 오고 있는 까닭이다.
절대절명(絶對絶命)! 도검이 통하지 않는 괴물이 그를 덮쳐 오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영도객이 죽기를 무릅쓰고 그를 향해 달려들어도 그저 귀찮은 파리를 떨어내듯 날려 버리면서 폭풍처럼 덮쳐 오고 있으니 무슨 수로 당해낼 것인가.
"이렇듯 강하다니……!"
믿기 힘든 위력에 문곡이 신음을 흘렸다.
한순간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 될 것은 미처 상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으핫하하…… 여기에 있었더냐?"
굉량(宏量)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날아들어 흑포괴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쾅!
폭음이 일며 흑포괴인이 처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흑포괴인의 눈빛이 침잠(沈潛)이 가라앉았다.
그의 앞에는 한 노인이 나타나 있었다. 갈의장삼을 입은 그의 등은 낙타 등처럼 튀어나왔다. 그러나 구부정한 모습임에도 그 체구는 당당하고 부릅뜬 두 눈은 횃불을 켜놓은 듯 이글거린다.
늘어뜨린 두 팔은 무릎까지 닿을 듯 길어 참으로 특이한 모습.
"권왕……."
부지중에 문곡이 중얼거렸다.
힐끗, 그를 일별한 갈의노인, 요동권왕은 흑포괴인을 향해서 차갑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도망가게 그냥 두지 않겠다. 너의 정체를 밝혀라!"
"……."
그러나 흑포괴인은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흑포괴인이 돌연 괴성을 지르며 일장을 쳐왔다.
"놈! 겨우 암습이냐?"
요동권왕이 코웃음을 치면서 양 주먹을 풍차와 같이 휘둘러 오히려 흑포괴인을 공격해 갔다. 그의 일권 일권은 마치 천신이 지상으로 벼락을 내리치는 듯 강렬무비하여 일권 일권이 모두 산을 쪼개고 바다를 갈아엎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공할 대결이 시작되었다.
쾅! 콰콰콰…….
권장이 교차할 때마다 가공할 권풍이 휙휙- 일고 아름드리 나무가 뚝뚝 부러져 나갔고, 바위가 모래처럼 허물어졌다.
"저건 도대체……."
한효월은 암중에 숨어 그 광경을 보면서 안색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문곡의 도주에 이어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흑의부인이 슬그머니 숲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흑포괴인은 요동권왕에게 맡겨두고서 그녀를 따라가기로 한 것이다.
은밀히 뒤를 따를 예정이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가 숲으로 들어서자마자 검은 그림자들이 공격해 왔다. 흑건으로 복면을 해 진면목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한효월은 그들이 비적이라는 보구회의 일원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비켜라!"
한효월이 침중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러나 흑의인들이 그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
어둠 속에서 날아드는 흑의인들의 공격은 위협적이었다.
그들이 한효월을 해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한효월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상대하는 사이에 숲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흑의부인이었다. 그녀가 누구인지를 안 이상, 그녀를 놓칠 수는 없는 일이다.
다급해진 한효월은 그들의 공격을 피해 날아올랐다.
그들의 머리 위를 날아 넘어갈 생각인 것이다.
그 응변(應變)은 신속하기 이를 데 없어서 아예 처음부터 숲 속으로 들어서면서 신형을 날려 떠오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쉭쉭-!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오르는 그를 향해서 흑의인 둘이 좌우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들의 손에는 차가운 빛을 뿌리는 장검이 들려 있어 유성처럼 한효월을 공격했다. 그 배합은 놀라워서 한효월은 졸지에 그들의 공세 속으로 뛰어든 것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타앗!"
찰나, 일성 기합과 함께 한효월은 양손을 나누어 그들에게 쳐냈다. 그것과 함께 그는 한쪽 발을 들어 허공을 세차게 후렸다. 순간, 날아오르던 그의 신형이 누가 옆에서 세차게 돌린 듯 팽이처럼 맴돌았다.
파팡!
세찬 파공음과 함께 한효월의 신형은 풍차처럼 돌면서 흑의인들의 검광 사이를 번개처럼 통과했다. 그의 신형이 돌기 직전에 그의 발이 곁의 나뭇가지를 들이차 탄력을 얻었음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 움직임은 신속무비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두 흑의인의 사이를 통과하면서 양손을 나누어 검광을 뚫고 그들의 가슴에다 일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그가 순간적으로 일 장을 전진하여 앞의 나무 위에 몸을 세울 때, 그의 뒤로는 방금 일격을 받은 흑의인들이 땅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거기 서시오! 나는……."
한효월은 고함치면서 신형을 날렸다.
흑의부인이 이미 7, 8장 앞의 숲 속으로 사라짐을 발견하고 소리친 것이다. 숲 속의 그 거리는 평지에서와는 큰 차이를 가진다. 더더구나 지금처럼 어둠이 깃든 숲이라면 말할 나위가 없다.
흑의부인은 힐끗 그를 돌아보는 듯했지만 이내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런……."
한효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급히 그녀의 뒤를 쫓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의 신수는 결코 약하지 않아 금세 종적이 묘연했던 것이다.
'문곡에게 당한 암산이 예상보다 심각한 모양이군…….'
한효월은 그녀가 그처럼 급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짐을 보자 전력을 다해 그 뒤를 따랐지만 그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뒤를 따르던 흑의인들까지 뒤로 처져서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숲을 타고서 은은히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기울였지만 메아리가 생겨서 어디에서 들리는지 알아낼 수가 없다. 한효월은 우뚝 서서 그 소리가 어디서 들리는 것인지 찾기 시작했다. 모든 소리가 그의 귀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서쪽?"
잠시 눈을 감았던 그가 중얼거림과 함께 그의 신형은 쏜살같이 어둠을 뚫고서 서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질풍과도 같아서 순식간에 30여 장을 가로지른 그는 마침내 한 사람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게 서라!"
한효월은 낭랑히 소리치면서 어둠 속의 인영을 덮쳐 갔다.
이미 작정을 한 터라 그의 신형은 놀랍도록 빨라서 삼엄한 위세의 일장은 찰나간에 그 희끗한 그림자를 덮쳤다.
파파파-
그 일장의 위세는 심히 놀라워 경풍이 스치는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우박처럼 사방으로 쏟아졌다. 가히 풍운변색의 위력이라 할 만했다.
그런데.
"감히 암습이란 건가?"
상대는 코웃음을 치더니 빙글 몸을 돌리는 사이에 한 주먹을 내질러오는 것이 아닌가.
불쑥 쳐낸 것 같은 일권(一拳)의 위력은 실로 가공하여 밤하늘에서 뇌공(雷公)이 벼락을 쳐내는 것 같아 맹렬한 질풍이 권세를 따라 일었다.
그것을 본 한효월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는 원래 상대가 피할 수 있는 방위를 차단하면서 상대의 앞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던지라 상대가 이렇듯 가공할 위력으로 반격을 해오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 대결을 회피하면서 물러나고 상대가 계속해서 공격해 오면 그는 선기(先機)를 잃어버리고 연달아 몰려야 할 판이다. 고수와의 대결에서 선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불문가지. 더구나 상대의 저 일격은 그가 만나본 어느 누구보다 강력해 사실상 피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게다가 결정적인 것은……
펑!
두 사람의 권풍장세가 마주치자 고막을 울리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사방으로 맹렬한 경풍이 일었다.
"으핫하…… 제법이로구나! 다시 한 번 받아보아라!"
상대는 그 부딪침에서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는지 고함을 치면서 재차 한효월을 향해 일권을 쳐냈다.
"선배님! 접니다!"
한효월이 곤두박질치듯 물러나면서 다급히 소리쳤다.
우지끈! 쏴, 쏴아악…….
그가 물러난 자리에 있던 나뭇가지들이 상대가 쳐낸 권풍의 경기에 스쳐 뚝뚝 부러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한효월의 외침을 듣고 경력을 회수하여 그 정도에 그친 것이니 어찌 놀랍다 하지 않으랴.
"너, 넌?"
상대도 놀라 눈을 꿈벅거렸다.
상대는 뜻밖에도 갈의를 입은, 요동권왕이었다.
"네가 어떻게?"
"선배께선 어떻게 여기에? 비왕과 싸우고 계셨지 않습니까?"
한효월의 물음에 요동권왕 막풍은 미간을 찡그렸다.
"비왕? 그놈이 비왕이냐? 놈이 갑자기 도주해 버려서 그 뒤를 쫓던 중이었다. 그런데 넌…… 너도 그 자리에 있었더냐?"
한효월의 말에 깃든 의미를 느낀 요동권왕 막풍이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저들의 수령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뒤쫓느라고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떠났었습니다. 그런데 선배께선 왜 그들을 쫓고 계십니까?"
"전에 말하지 않았더냐? 시신을 훔친 놈들, 그놈들을 쫓아 여기까지 온 게다."
그 말에 한효월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럼 그들이 정말?"
무공이 뛰어나다 함은 단순히 힘만 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단순히 수련을 통해 이루는 무공도 있지만 요동권왕과 같은 절세의 고수는 수련이나 노력만으로는 될 수가 없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결코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를 수가 없는 것이다. 고수(高手)가 되는 것은 노력만으로 가능하지만 절세(絶世)라는 이름이 붙으려면 그만큼 뛰어난 천품(天稟)을 타고난 사람이라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요동권왕과 같은 고수가 움직인다는 것은 당연히 보통 사람이 움직이는 것과는 다르다.
요동권왕은 한효월과 헤어져서 귀왕을 찾는 일방, 계속해서 시체를 훔친 자들의 뒤를 쫓았고, 그로 인해서 그들이 사사건건 제천교와 맞서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다.
제천교의 세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대하여 천하에 퍼져 있음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제천교를 상대하는 그들의 행적은 매우 은밀하여 가히 신출귀몰이라 할 수 있어 그들의 뒤를 쫓으면서 애를 먹어야 했다. 그가 아니라면 누구도 그들의 뒤를 쫓을 수는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요동권왕이 곳곳에서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보구회를 쫓고 있었기에 그가 나타난 자리에는 늘 보구회가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나타났던 것도 마찬가지.
"놈이 그런 말을 했단 말이냐?"
한효월이 문곡이 한 말을 전하자 요동권왕의 안색이 달라졌다.
"놈들이 독고 노제의 시신을 가져간 것이 확실하다면……."
그는 미간을 찡그린 채 잠시 한효월을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너도 알고 있느냐?"
"무슨?"
"그 무슨 보구회라는 놈들…… 그들 중 상당수가 살아 있는 자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귀왕이 손을 써서 살려낸 시체들 같다."
"귀왕을 다시 만나셨습니까?"
"만나지 못했다. 찾아오라고 해놓고는 도망치고 없어서……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저 보구회라는 놈들의 상당수는 귀왕의 구마회혼대법으로 살아난 시체들이 분명하다. 놈들이 훔쳐 간 시체들은 거의가 다 무공을 아는, 그중에서도 강자들이었다."
그는 미간을 찡그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 놈들이라면, 독고 노제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겠지……."
"으음……."
한효월이 신음을 흘렸다.
그 신음은 무거웠다. 무엇인가 실로 놀라운 일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그의 머리 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이제부터 그 일을 조사해야만 했다.
"아무래도 이 일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복잡한 것 같군!"
중얼거린 요동권왕은 한효월을 쳐다보았다.
"놈들을 잡으면 수수께끼가 풀릴 것 같다. 같이 가겠느냐?"
"그들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니 일단 같이 찾아보시지요."
두 사람은 샅샅이 숲 속을 뒤졌다.
단순히 숲을 뒤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적을 따라 추적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요동권왕의 추적술은 탁월했다. 그런 능력이 있기에 그처럼 집요하게 보구회의 뒤를 따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밤이 밝아올 때까지도 그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머리를 맞댄 두 사람은 일단 서로 헤어져서 요동권왕이 그들을 계속 추적하고, 한효월은 다른 방향에서 조사를 해 단서를 찾기로 했다. 누구든지 먼저 알아내는 것이 있다면 그때 연락을 하기로 하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 * *
개봉(開封).
하남성에 위치한 중국의 유서 깊은 육대고도(六大古都)의 하나이다.
황하의 남쪽에 위치한 이 개봉은 비록 지난날보다는 그 규모가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성 주위가 24리나 되어 지난날 수많은 왕조의 도읍이었던 영광이 남아 있었다. 각종의 산물(産物)이 발달한 이 개봉에는 특히 변주라 불리는 비단이 천하에 유명했다. 북송의 유적인 용정(龍亭)이나 철탑(鐵塔), 우왕대(禹王臺) 등의 명승고적이 산재하며 특히 성내에 자리한 상국사(相國寺)는 그 규모나 역사가 오래되어 향화(香火)가 번성하여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나른하게 졸고 있던 햇살이 조금씩 빛 바래가는 오후.
상국사의 앞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사람이 많은 곳에는 장사가 되기 마련, 그렇게 해서 상국사의 입구에 이르는 길은 사람들의 발길로 넓은 길이 되고 그 길 좌우로는 하나둘 상점이 들어서더니 이제는 아예 시장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난전(亂廛)이라고나 할까.
먹거리에서부터 문방사우, 필요한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싸요! 사세요! 팔아요! 팔아, 막 팔아……!"
"여기 천하에서 유명한 고려산삼이 있어요."
옷 장사가 비단을 펼쳐 놓고 고함을 지르자 그 건너에서 산삼을 판다고 젊은이가 맞고함을 지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원 저런 사기꾼 같은 놈…… 하며 장사꾼들을 아래위로 쳐다보기만 하지 실제로 사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누가 뭐라던 웅크리고 앉아서 꼬박꼬박 졸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거적을 방불케, 아니, 말 그대로 거적을 깔고 팔짱을 낀 채로 조는 그의 옆에는 때묻은 깃발이 양쪽으로 꽂혀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인다.
<상통천문(上通天文)> <하달지리(下達地理)>
<무불통지(無不通知)> <천하제일(天下第一)>
양쪽 깃발에 적힌 그 댓귀에 그의 앞에 놓인 산통 등은 그가 점쟁이임을 잘 말해 준다.
꾀죄죄한 유삼에 염소수염을 턱에다 붙인 그는 손님이 오든 말든 햇살을 받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가끔 파리가 달라붙지만 그는 냉큼냉큼 고개를 끄덕거려 파리를 쫓는 절묘한 피신법을 구사하고 있어 실소를 금치 못하게 했다.
그렇게 졸고 있던 그는 문득 끄덕거림을 멈췄다.
따듯하던 햇살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음?"
고개를 든 그의 앞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사람을 찾고 싶소."
그의 앞에 선 사람이 말했다.
눈을 꿈벅거리며 바라보자 나타난 사람은 깨끗한 유생복을 입은 잘생긴 젊은이였다. 맑은 눈빛에 관옥과 같이 수려한 얼굴. 군계일학이라 할 만한 모습이라 점장이 노인은 다시 한 번 눈을 꿈벅거렸다.
저런 사람이 자신에게 점을 치려고 오다니 하는 표정이다.
"어떤 사람을 찾으슈?"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뜻밖에도 퉁명스럽기조차 하다.
그러나 그 청년 유생이 그의 앞에 앉으며 손바닥을 쳐들어 보이자 그의 안색은 돌변했다. 청년의 손에 비천옥녀상이 조각된 한 치가 조금 넘어 보이는 작은 옥패 하나가 들려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찾을 수 있겠소?"
"복채를 한번 놔보시우."
딸랑.
청년 유생의 손에서 은정(銀錠) 하나가 떨어져 맑은 음향을 낸다.
한 냥은 되어 보이는 은이다. 길거리의 점쟁이 노인이 받을 복채로써는 지나치게 많은 금액이었다. 그것을 보자 흠칫했던 점쟁이 노인은 누가 볼세라 황급히 그 은정을 소매 속에다 쑤셔 넣었다. 그 움직임은 그야말로 매가 토끼를 덮친 듯 빨라 눈부신 손속이라 할 만했다.
단숨에 은정을 갈무리한 점쟁이 노인은 누가 보지 않았나 주위를 슬쩍 돌아본 다음에 험험, 헛기침을 하곤 소리를 낮추어서 빠르게 말했다.
"해질 녘에 상국사의 남쪽 탑에 가서 소원을 빌어보시오. 그럼 불등(佛燈)이 길을 밝혀줄게요."
말을 마친 노인은 가보라는 듯 손을 저었다.
잠시 그를 보던 청년 유생이 그 자리를 떠나자 그는 뒤돌아 앉아서 청년이 준 은정을 꺼내 누런 이빨로 그 은정을 깨물어본다. 혹시라도 가짜가 아닌가 확인을 하는 것이다. 진짜 은임을 확인한 그 점쟁이는 희희낙락하여 은정을 깊이 갈무리한 다음에 주섬주섬 판을 걷기 시작했다.
돈이 생겼으니 어디 가서 술이라도 걸칠 참일 터이다.
청년 유생은 점쟁이 노인의 말을 듣자 망설이지 않고 상국사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지만 개봉이 초행길인 그는 주위를 둘러볼 참인 듯하였다.
상국사의 경내를 잠시 둘러본 청년 유생은 대웅전으로 들어가 향을 사른 다음에 그 앞에서 결가부좌를 한 채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평일이라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조용한 예불 소리만이 법당을 울릴 뿐, 주위는 조용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문밖의 그 소란한 난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역시 수도장다웠다.
청년 유생은 바로 한효월이었다.
요동권왕 막풍과 헤어진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바로 개봉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가 이곳으로 온 이유는 홍 낭랑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점쟁이를 찾은 것은 그녀를 만나기 위한 절차였다.
저녁때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 잠시 생각을 정리할 참이었다.
화산대회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자칫하면 시간에 대지 못할런지도 몰랐다. 그런 상태에서 그가 굳이 홍 낭랑을 찾은 것은 보구회의 흑포괴인 때문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의 신분에 대한 의혹.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온 그는 생각을 정리하는 일방, 조용히 숨을 고르자 그간 쌓였던 피로가 풀렸다. 그가 수련한 주천무애신공은 이런 부분에서 탁월한 무공이었다. 공격을 위한 무공이라기보다는 섭생(攝生)을 위한 무공이 바로 주천무애신공인 까닭이다.
날이 어두워졌다.
상국사의 남쪽 탑은 다른 곳에 비해 규모가 조금 작았다.
하지만 거기에 새겨진 정치(精緻)한 조각은 실로 뛰어난 점이 있었다. 연꽃 하나하나가 살아서 피어나는 듯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시간이 묘한지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서 청소를 시작한 사미승이 하나 보일 따름.
한효월은 망설이지 않고 탑의 오른쪽에 있는 석등으로 다가가 좀 전에 살펴본 바대로 그 석등 속을 살펴보았다. 과연 그 속에 아까는 없었던 쪽지가 한 장 있었다.
역시 불등이 길을 밝힌다는 말은 그가 짐작한 대로였다.
<성 서남쪽에 있는 포목상 금수(錦繡)로 가서 변주 한 필 반을 사시오.>
은밀히 펼쳐 본 쪽지에 적힌 글이었다.
석양이 무너져 내리고 어둑어둑한 어둠이 거리를 메우기 시작하지만 저잣거리는 오히려 이제 활기를 찾는다.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외침이 뒤섞여 들리는 소음은 대체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소리들에 생기가 넘치고 있다는 것이라고 할까.
개봉성의 남쪽에는 상가(商街)가 조성되어 있었다.
특히 저자의 서남쪽으로는 포목점들이 줄줄이 들어서 개봉의 비단을 세상에 내보내고 있었다.
겉으로 보자면 한심해 보이는 규모다.
하지만 그 포목점들의 힘은 매우 커서 지방 관아를 마음대로 주무를 정도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 만큼 그들 포목점의 규모는 겉보기와는 달리 매우 컸다.
포전(包田)은 그 포목점 중에 금수포전(錦繡布廛)이라는 비단 가게의 주인으로서 이 바닥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아무런 기반도 없이 남의 가게 종업원에서부터 장사를 시작해서 오늘날 스스로의 가게를 가졌고, 그 업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까닭이다.
포전은 주판을 튕기며 잔뜩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망할…… 이놈들은 도대체 물건을 받아 처먹기만 하고 돈은 줄 생각을 안 하는군. 이 포 나으리가 그렇게 만만하게 물러설 줄 알았단 말이지?"
그는 냉소를 터뜨리면서 장부책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바로 그때, 조카인 아포(阿包)가 머리를 내밀었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무슨 손님인데 그래? 큰 건이냐?"
"아닙니다. 겨우 변주 한 필 사겠다는 사람인데……."
"이런 망할 놈! 그런 걸 왜 나한테까지 가져와? 네놈들이 그냥 처리하고 말아야지…… 도대체 일을 어떻게 그 따위로……."
금방이라도 불호령을 내릴 듯하던 포전의 안색이 달라진 것은 뒤이은 아포의 말 때문이었다.
"안 계신다고 해도 그 손님이 반드시 주인에게서 변주 한 필 반을 사야겠다고 떼를 써서…… 어딘지 모르게 범상치 않은 기품이 있는 선비인지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싶어서…… 그냥 보낼까요?"
"지금 뭐라고 했냐? 변주 한 필 반?"
"예."
"이런 육시랄 놈! 그럼 진작 그렇게 말했어야지……. 당장 이리 모셔와!"
포전이 황망히 소리쳤다.
"대체 누굽니까?"
포전이 손님을 전송하고 나자 아포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포전을 찾아온 손님이 정말로 변주 한 필 반만을 사가지고 갔고, 큰 거래가 아니면 아예 취급하지 않던 포전이 최대한의 예의로 그에게 변주 한 필 반을 팔고 직접 나서서 그를 전송까지 하는 걸 보았던 까닭이다.
"알 거 없어. 일이나 해."
손님을 전송한 포전은 냉담히 말하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원 성질하곤…….'
아포는 투덜거렸지만 일이나 해야 했다.
금수포전을 나선 한효월은 그곳에서 산 비단 한 필 반을 들고 성 북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금수포전의 주인에게서 성 북쪽에 있는 주택가로 가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뜻밖에도 홍 낭랑을 만나는 절차는 복잡했다.
그것은 그녀가 이곳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맑았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졌다.
어둔 하늘에서는 바람이 일고 구름이 바람에 쫓겨 이리저리 밀려다니다 한데 뭉치는가 싶더니, 이내 세상을 뒤덮었다. 어둠이 밀리는 초저녁이 아닌 대낮이라 하더라도 해를 가릴 만한 구름이었다.
"잘못하면 소나기를 만나겠군."
천색을 살펴본 한효월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걸음을 빨리하자 그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해 있었다.
포전이 가르쳐 준 집은 개봉성 북쪽 주택가에 있는데 길이 넓은 가운데, 집들의 규모도 모두 컸다. 소위 부호들이 모여 사는 곳인 듯했다. 굳게 닫힌 대문의 양쪽에는 구리로 된 사자가 장식되어 커다란 쇠고리를 위엄스레 하나씩 물고 있었다.
그가 문에 달린 쇠고리를 잡고 탕탕 두드리고 잠시 있자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면서 문이 조금 열렸다.
거기서 눈을 꿈벅거리는 것은 칠순은 되어 보이는 노인.
"……?"
그가 왜 왔느냐는 듯 눈을 꿈벅거리면서 자신을 바라보자 한효월은 수중의 비천상을 내어 보이면서 말했다.
"홍 낭랑을 만나뵈러 왔습니다."
그는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들어오라는 듯 옆으로 조금 물러났다.
한효월이 들어서자 그는 문을 닫고는 주척주척 앞서 걷기 시작했다.
따라오라는 말도 없었다.
문 안은 그럴듯한 화단이 조성되어 향기가 가득했고, 그 가운데로 조약돌이 깔린 길이 곧게 뻗어 있었다. 담장 하나를 지나자 한효월의 앞에는 이층의 누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옆으로는 가산과 작은 연못을 대동한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제법 큰 집이었지만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화광루(花珖樓)라 이름된 그 누각에 이르자 노인은 한효월을 그 자리에 남겨두고 말도 없이 되돌아가 버렸다.
"한 공자이십니까?"
맑은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각의 입구에서 시비 차림의 여인 하나가 그에게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나이는 스물이 채 안 되어 보이는데, 어딘지 모르게 날렵한 차림이다.
"채련(採蓮)이라 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낭랑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게 안내된 곳이 대청이었다.
거기에는 이미 차가 준비되어 있어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듯했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다던 홍 낭랑은 일각여가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르르…… 콰쾅!
저 멀리서 천둥이 우는 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부는 소리가 창문을 통해 들려왔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다시 반 각 정도의 시간이 더 지났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며 안쪽 문을 통해서 그 채련이라는 시비가 다른 시비와 함께 바람처럼 나타났다. 그녀들의 등에는 한 자루의 보검이 메어 있고 얼굴은 굳어 있어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다.
"낭랑께서 오십니다."
들어오자마자 그녀들은 문 옆으로 갈라섰다.
"죄송해요. 기다리게 했군요."
뒤를 이어 홍 낭랑이 문으로 들어섰다. 뜻밖에도 그녀는 날렵한 경장(輕裝)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굳어 있어서 무엇인가 좋지 않은 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별말씀을,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한효월이 그녀를 맞으면서 물었다.
홍 낭랑은 그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머리에 꽂은 노리개가 서로 부딪치면서 맑은 음향을 토해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수상한 사람들이 갑자기 출몰한다는 보고를 받았어요. 이곳은 매우 은밀해서 아무도 알지 못했는데……."
그녀의 얼굴 화장이나 옷차림 등으로 보아 편한 상태에서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나 급히 옷을 갈아입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싸우거나 긴장할 큰일이 있다면 저렇듯 성장(盛裝)을 했을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번쩍! 짜짜자아- 콰쾅!
바깥에서 다시 천둥 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어디 가까운 곳에 벼락이 떨어진 듯 대청이 크게 울렸다. 세찬 바람 한 가닥이 닫혔던 창문을 밀어젖히고 사납게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촛불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펄럭거렸다.
"날씨가 이상하군요. 역시 한 공자는 풍운 인물인가 봐요. 한 공자가 나타나자 이렇듯 날씨가 변색하고 조용하던 개봉성에 신비한 자들이 출몰하는 것으로 봐서……."
그녀의 말에 한효월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그녀의 말에 깊은 뜻이 있음을 경각하고 안색이 달라졌다. 그녀의 말은 그들이 자신을 따라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미인 것이다.
"나타난 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셨습니까?"
"지금 사람을 풀어 은밀히 조사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들이 과연 한 공자를 따라온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아요."
말을 받은 그녀는 비로소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는지 한효월을 향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서 걱정을 했었는데, 무사했군요? 다행이에요."
"덕분에……."
한효월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게 무슨 할 이야기가 있어서 온 거겠죠? 화산대회가 있는데도 이렇게 나를 찾은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무슨 일이지요?"
"지난날 홍 낭랑은 감 사질에게 청룡장을 알려주셔서 그곳에서 괴이한 일을 목도하게 되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곳을 알아내신 것인지, 또 그곳의 배후가 누군지 알고 계시다면 알려주십사 하고 찾아왔습니다."
홍 낭랑은 미간을 찡그렸다.
"갑자기 왜 그것이 궁금한 건가요?"
한효월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녀에게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비적이라면 나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들이 독고 맹주의 시신을 가져갔다는 건가요?"
"봉황문의 문곡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한효월의 말에 미간을 찡그렸던 홍 낭랑은 문득 안색이 돌변했다. 그의 말투에서 한 가지를 짐작해 낸 것이다.
"설마…… 그 흑포괴인이 독고 맹주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실로 믿을 수 없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의혹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 말에 대한 한효월의 답변 또한 점입가경. 천하가 경동(驚動)하고도 남을 말을 그는 거침없이 해대고 있었다.
"말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패옥 소리가 짤랑거렸다.
"그건 불가능해요! 설혹 강시대법을 써서 그를 살려낼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본래의 무공을 사용케 하기는 힘들 뿐더러, 그 대법을 성사시키려면 몇 달이 아니라 몇십 년이 필요해요. 더구나 성공할 수 있을런지도 모를……."
번쩍!
콰짜짜자…….
번개가 그녀의 말을 끊더니 천둥이 거세게 포효를 터뜨렸다.
그 위세가 얼마나 가공하던지 대청이 떨어 울리고 촛불이 금세라도 꺼져 버릴 듯이 흔들렸다. 문 옆에 시립해 있던 홍 낭랑의 시비들이 놀라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사방이 새파란 번갯불로 일순 하얗게 물들어 일순 가물했던 촛불이 다시 밝아지면서 시비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뒤를 이어 빗줄기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먼저 입을 연 것은 한효월이었다.
"한 사람은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한 사람이라면…… 귀왕 말인가요?"
"……."
한효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무리 그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그라도 그럴 수는 없을 거예요."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낭랑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한효월의 말에 홍 낭랑은 입술을 물었다.
쏴아아…….
빗소리를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당시, 나는 몇 군데의 세력을 동원했는데, 그중에는 봉황문도 있었어요."
"봉황문?"
"그래요. 그때 나는 봉황문과 접촉해서 몇 가지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상황이 어딘지 모르게 심상치 않아서…… 그래서 그때 공…… 천기선생을 찾아갔던 거예요. 봉황령을 빌리기 위해서."
"심상치 않다면? 그게 무슨 의미이신지?"
한효월의 질문에 그녀는 과연, 하듯이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말을 얼버무리기 위해서 상황을 그저 심상치 않다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한효월은 뭔가 다른 의미가 있음을 단숨에 알아차린 것이다.
"한 공자 앞에서는 그냥 다 털어놓는 게 피차에 편할 것 같군요. 당시 나는 사람을 풀어서 다각도로 조사를 했었는데…… 독고 맹주의 시신 반출에는 맹주부 내부의 도움이 있었어요."
"역시…… 그게 누군지도 아십니까?"
"명확하지는 않지만, 당시에 내응(內應)한 자는 구대문파와 관련이 있어요."
"감 사질도 그런 사실을 알아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개인의 일이 아니라, 구대문파와 관련이 있다는 것도요?"
그 말에 한효월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얼음보다 더 차가운 웃음이 홍 낭랑의 얼굴에 떠올랐다.
"내 말은……."
"으악!"
그녀가 막 입을 여는 순간, 밖에서 갑자기 처절한 비명이 빗소리를 뚫고서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홍 낭랑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금 비명이 들려왔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뚫고서 들려온 비명 소리는 심야에 올빼미가 울부짖는 듯 매우 처절했다.
번쩍거리는 번갯불에 일렁이는 촛불.
홍 낭랑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비 둘이 급히 밖으로 사라졌다. 평소의 훈련이 잘되어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녀들이 나간 다음, 다시 참혹한 비명이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지만 그녀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무섭게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군요. 잠시……!"
안색이 굳어진 홍 낭랑은 슬쩍 탁자를 짚는 서슬로 바람처럼 밖으로 뛰쳐나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일신의 무공을 발휘하여 그 신법은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굳은 표정이 된 한효월은 잠시 망설이다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는 손님이라서 주인의 허락없이 자리를 뜨는 것은 실례이다. 그러나 상황이 심상치 않아 그대로 있는 게 옳지 않다는 판단이 섰기에 움직인 것이다. 더구나 그녀의 언질대로라면 이 사태는 자신으로 인해 발생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쏴아아-
밖으로 나와보니 제법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홍 낭랑이 화광루의 앞에 서서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다.
빗속에 몇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괴이하게도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금 나간 두 명의 시비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비틀거리면서 앞으로 다가오다가 쓰러졌다.
"등노(登老)!"
홍 낭랑이 다급히 소리치며 그에게 날아갔다.
한효월을 맞아들였던 그 노인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죠?"
그를 부축한 홍 낭랑이 다급히 소리쳤다.
"크, 큭…… 그, 그가 왔…… 어, 어서 피……!"
노인의 얼굴은 피투성이였고 입에서는 내장 토막이 섞인 피가 연신 쿨럭거리며 튀어나왔다. 안간힘을 다해 부릅뜬 눈에는 공포의 빛이 역력했다. 그는 피 묻은 손을 다급히 휘저었다.
"누구냐?"
순간, 한효월이 호통 치면서 땅을 박찼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화단의 가산(假山) 쪽으로 날아가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으악……."
잘못 본 것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가산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촤악! 촤촤…….
빗줄기가 한효월의 몸에서 무서운 속도로 튕겨져 밀려났다.
가산의 규모는 별로 크지 않았다. 그저 산의 모양새만 갖추어놓은 상태라서 기암괴석과 나무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을 따름이었다.
거기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흑의에 검을 쥔 그는 얼핏 보기에도 앞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과 복장이 같아서 이곳의 호원무사(護院武士)임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되었어요?"
뒤에서 홍 낭랑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가중수(內家重手)에 의해서 내부가 완전히 으스러져 즉사했습니다."
엎어져 있는 흑의무사를 살펴보며 한효월이 말했다.
흑의무사의 상태는 앞선 노인과 거의 같았다. 칠공(七孔)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본신 공력의 차이를 말하듯 즉사해 버린 것이 다를 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손을 쓴 사람이 같을 수 있다는 의미.
"지독한 공력이군……."
잠시 그의 상태를 살펴본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호원무사가 당한 것은 가히 마공이라 할 만했다.
한 가닥의 경력이 미처 피하지 못한 그의 가슴을 쳤고, 그것은 이내 그의 심장을 토막토막으로 만들어 버린 듯했다. 쌍방 능력의 차이를 말하듯 그는 검을 채 뽑지도 못하고 겨우 검에 손을 대다가 앞으로 엎어져 죽은 상태였다.
"낭랑?"
몸을 돌리던 한효월의 안색이 달라졌다.
방금 그에게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던 홍 낭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그 자리에 전혀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쏴아아…….
빗소리만 요란했다.
하늘은 이미 먹장구름으로 완전히 뒤덮여 사물을 분간한다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다. 이런 마당이니 누가 빗속을 철퍽거리면서 뛰어간다고 해도 발각해 내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금방 뒤에 있었던 사람이 없어지다니?
더구나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아무런 기별도 하지 않고 홍 낭랑이 사라질 리는 만무였다.
하지만 누가 그녀를 납치했다고 생각하기는 더 더욱 어려웠다. 아무리 빗줄기가 쏟아진다고 할지라도 바로 뒤에서 사람이 납치되는 것도 모를 한효월이 아닌 것이다.
주위를 살피던 한효월은 땅을 박찼다.
그는 바람처럼 조금 전에 노인이 쓰러진 곳으로 돌아왔다.
혹시나 했지만 그 자리에는 노인의 시신만이 있을 뿐, 홍 낭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낭랑! 어디 계십니까?"
한효월이 공력을 끌어올려서 소리쳤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주위를 쓸어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소리쳐 불러봐도 대답도 없다. 그냥 불렀다면 빗소리에 묻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공력을 운기하여 소리친 음성이니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참으로 기괴(奇怪)하였다.
질식할 듯한 침묵만이 빗소리에 묻혀 속절없이 부서지고 있었다.
번쩍, 콰콰쾅!
문득 어두웠던 주위가 새파란 번갯불에 일시 밝아지면서 이내 요란한 천둥이 사방을 온통 뒤흔들었다.
한효월의 신형이 빗속을 뚫고 날았다.
주위를 돌아보다가 화광루의 지붕에 올라가 사방을 살피던 그는 어둠이 번갯불에 산산이 찢겨지는 찰나에 그림자 하나가 담을 넘어가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얼핏 보기에 그 모습이 홍 낭랑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한효월은 그녀를 부르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상황이 어딘지 모르게 괴이하기 때문이다.
빗줄기는 가늘어지지 않고 천둥 번개도 여전했다.
누구의 뒤를 쫓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최악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날씨에는 은밀히 미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라 무조건 상대를 쫓아가서 잡아야만 할 판이었다.
그가 전력을 다하자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러자 앞서 가던 상대는 힐끗 뒤를 돌아보다가 놀란 듯 길가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이런 주택가에서의 골목은 구획 정리된 곳일 수가 없다.
그야말로 미로와 같아서 자칫 놓치기 쉬울 터였다.
그것을 보자 한효월은 골목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달려가던 탄력으로 신형을 솟구쳤다. 그의 신형이 빗줄기를 뚫고 날아올랐다.
담장 너머로 뻗어 나온 큰 버드나무 가지 위로 날아오른 한효월은 그 나뭇가지를 발로 차는 탄력으로 거대한 붕새와 같이 허공을 가로지르면서 골목 위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7, 8장 높이로 솟구친 한효월은 골목을 질주하는 검은 그림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비가 쏟아지자 골목길은 금세 진창이 되었다.
그 골목길을 달리는 흑의인의 발걸음은 그야말로 나는 듯하여 물방울조차 튀지 않았다. 마치 한줄기 바람이 빗줄기를 휘몰고 달려가는 듯했다.
"……!"
하지만 그는 다급히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표표히 백의를 날리는 한 사람이 자신의 앞에 서 있음을 발견한 까닭이다. 형형히 빛나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는 그는 놀랍게도 그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전혀 비를 맞지 않고 있었다. 빗줄기가 그의 주변에서 마치 무형의 막에 튕겨 나가는 듯 그렇게 사방으로 튕겨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귀하는 누군가?"
앞을 가로막고 선 백의인, 한효월이 물었다.
큰 음성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한 걸음을 내딛으면서 묻자 흑의인의 안색이 돌연 달라졌다. 한효월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에 압도적인 기세가 일어나 그를 짓눌러 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한효월이 다시 다가온다면 그 기세는 더욱 강해질 것이고 그가 물러선다면 그 순간에 한효월의 공세는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처럼 그를 향해서 날아들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기선을 제압당하면 손도 써볼 수가 없게 된다.
한효월이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찰나, 흑의인이 상체가 살짝 흔들렸다.
동시에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빛이 빗줄기를 가르면서 무서운 속도로 한효월을 향해 날아들었다.
한효월의 눈에 놀람이 어렸다.
상대의 발검(拔劒)이 놀랍도록 빨라 일곱 자 정도의 거리가 한순간에 지척이 되어 검이 그의 가슴을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흡사 유성이 하늘을 가르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순간 한효월의 신형이 옆으로 슬쩍 돌았다.
검이 그가 있던 자리를 찌르며 지나갔다.
한효월은 옆으로 돌면서 손을 들어 흑의인의 손을 쳐갔다.
"검을 놓아라!"
"흥!"
흑의인에게서 냉소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검은 한효월의 신형을 놓치는 순간에 이미 부챗살처럼 펴지면서 벼락같이 한효월을 쫓아 덮어오고 있었다. 그 속도의 빠름은 전광과도 같았다. 그 변초의 속도가 하도 신속하여 한효월의 신형은 그 검세에 덮이고 말았다.
그의 검은 신랄(辛辣)하고도 빨라 실로 무서웠다.
"놀라운 쾌검(快劒)이군!"
한효월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흑의인의 검이 무서운 속도로 한효월의 목을 찔렀다.
그의 검은 그가 검을 뽑는 순간에 이미 한효월의 목에 도달하고 있어서 아예 처음부터 한효월이 그의 검에다 목을 내놓고 있었던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쨍!
날카로운 음향이 일었다.
"크윽!"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흑의인이 뒤로 물러섰다.
술 취한 듯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반 토막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어, 어떻게?"
그는 믿을 수 없는 듯 눈을 부릅떴다.
위기의 순간에 한효월은 손가락으로 그의 검신을 퉁겼고, 그 순간 막대한 잠력(潛力)이 검신을 통해 그를 공격했던 것이다. 당연히 흑의인은 본신의 공력으로 그 힘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순간적으로 밀려든 그 강대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검은 부러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여력을 견디지 못하고 흑의인은 빗속을 철벅거리면서 비틀비틀 물러나야 했다.
그것이 끝이었다.
한효월은 그가 물러서는 것을 그냥 두지 않고 바람처럼 뒤따르면서 손을 휘둘러 그의 가슴팍 몇 개 대혈을 단숨에 봉쇄해 버렸기에.
흑의인이 힘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덩그렁, 반 동강의 검이 그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둔중한 음향을 토해냈다.
"당신의 신분은?"
한효월이 그를 내려다보면서 다시 물었다.
흑의인이 고개를 들어 한효월을 보았다.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나이. 네모진 얼굴은 근엄해 보였지만 매부리코와 날카로운 눈빛은 음사한 빛으로 빛난다. 그는 한효월을 쳐다보곤 눈을 감아버렸다.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은가?"
흑의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죽는 것은 쉽지만, 입을 열지 않는 것은 어렵다. 귀하는……."
그때 흑의인이 눈을 떴다. 그 눈은 괴이하게도 활활 타오르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다. 죽는 것은 쉽다. 너 또한 내 뒤를 따를 테니까!"
그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동시에 비에 젖은 그의 머리카락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들고일어났다. 눈이 커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눈자위에 붉은 핏줄이 툭툭 튀어나오고 있는데, 공포스럽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신 근육이 모조리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삼척동자라도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볼 상황이었다.
'대체 이건?'
경악의 빛이 한효월의 눈에 튀어 올랐다.
쾅!
폭음이 일었다.
콰쾅!
폭발이 일어났다.
담장이 터져 나가고, 쏟아지던 빗줄기들이 폭풍을 만난 듯이 사방으로 비산(飛散), 흩어졌다. 그 폭발의 강력함을 의미하듯 담장이 몽둥이에 맞은 유리처럼 터져 나가고 그 뒤에 있던 나무들은 파편에 구멍이 펑펑 뚫렸다.
그것은 마치 천둥이 친 듯했지만 쏟아지는 폭우에다 천둥이 치는 악천후로 인해서 사람들은 또 가까운 데 천둥이 친 모양이라고 치부한 듯 아무도 나와보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이곳이 골목 안쪽이 아니라 거리였다면 또 달랐겠지만.
"도대체 이건……."
한효월은 굳은 얼굴로 폐허가 된 자리를 바라보았다.
심상치 않음을 경각하고는 그처럼 빨리 몸을 피했음에도 그의 옷자락 몇 군데에는 혈흔(血痕)이 묻어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 흑의인의 몸이 산산조각으로 터져 나가면서 그 파편에 구멍이 나버린 것이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한효월은 머리를 저었다.
'그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적에게 제압되면 적과 함께 죽도록 만들어진 금제(禁制)다. 이토록 무서운 금제가 있었던가?'
잠시 생각을 굴리던 한효월의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더 굵어지는 것 같지만 그것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이 너무도 가공할 것이었기에.
쏴아아…….
빗줄기는 여전히 쏟아 붓고 있었다.
조금 전보다는 약간 그친 듯도 했지만 으르릉거리는 천둥은 여전했다.
한효월은 그 빗속에서 다시 화광루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시신들 몇 구뿐, 내심 기대했던 홍 낭랑의 귀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집 안을 조사해 보았지만 단서가 될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남겨진 물건들도 언제라도 사들일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몹시 조심성있게 움직였다는 반증(反證)이다.
집 안을 살펴본 한효월은 다시 찾아오겠다는 한 장의 편지를 대청에 남겨두고는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누군지 알지 못하겠지만 홍 낭랑이라면 그게 자신인 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화산대회가 임박하여 어쩔 수 없이 떠나긴 하지만 그의 심중은 의문투성이였다.
대체 홍 낭랑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리고 그녀를 공격해 온 자들은 대체 누구인 것일까.
만약 제천교라면, 그들이었다면 한효월을 앞에 두고서 그렇듯 종적을 감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상대가 봉황문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실종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뛰어난 재지(才智)로써도 그 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쏴쏴아…….
빗줄기는 개봉을 벗어나자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바람까지 불었다. 거기에 더해 귀청을 찢는 천둥 소리.
이런 악천후 속에서 길을 재촉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한효월은 신법을 전개하여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이런 정도의 비라면 호우(豪雨)라 할 만했다. 일찌감치 객잔을 잡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야 했지만 화산대회가 눈앞에 닥쳐온 터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홍 낭랑이 실종되었는데 그냥 개봉을 떠나진 않았을 것이었다.
개봉에서 화산까지는 천여 리 길이니 일반인이라면 족히 열흘은 쉬지 않고 가야 할 길이다. 그런 거리를 하룻밤에 주파해야 하니 무리할 수밖에. 그야말로 불피풍우(不避風雨)하면서 관도를 지나 숲을 가로지르며 계곡을 날아 넘어야 했다. 보통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모자랐다.
세상사의 공교함은 늘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그가 심중의 의문을 풀기 위해서 없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홍 낭랑을 찾고, 그로 인해 소비된 시간 때문에 이 악천후 속에서 길을 재촉하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났을 일을 그로 인해 알게 될 것임은 누가 짐작이라도 했을까.
그렇게 알게 될 그 거대하고 무서운 진실(眞實)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