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六首 보구초현(報仇初現) (48/113)

第六首  보구초현(報仇初現)

-봉황문 나타나다

마침내 비적(秘敵)이 모습을 드러내다

 예진은 모퉁이를 돌자마자 몸을 찰싹 담벽에다 붙였다.

 호흡을 멈춘 그는 정신을 모아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따라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내민 그는 모퉁이 밖을 살펴보았다.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방금 나온 저 폐가는 이 일대에서는 귀신 나오는 집이라고 소문이 나서 낮이라도 사람이 지나가는 법은 별로 없었다. 하긴 그 소문 자체도 그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낸 것이긴 했지만. 그러니 누가 따라온다면 그의 시선을 피하긴 어려울 터였다.

 슬쩍 주위를 둘러본 그는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골목골목을 돌고 때로는 담장을 뛰어넘어 남의 집을 가로지른다. 전혀 이목을 돌보지 않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남의 눈을 완벽히 피하면서도 일직선으로 움직이고 있어 그 전진 속도는 대단히 빨랐다.

 그렇게 해서 그가 도달한 곳은 한 주루.

 이름은 만선일관루(萬善一貫樓).

 무슨 의미를 담은 이름인지 아리송한 그 만선일관루 앞에서 호객을 하고 있던 점소이에게 말을 붙이던 예진은 엉덩이를 한 대 채이고는 쫓겨났다. 투덜투덜 주먹질과 욕을 해대다가 거구의 점소이가 눈을 부릅뜨고 쫓아오자 황급히 줄행랑을 놓았다.

 "원 빌어먹을 놈 같으니, 감히 이 야 대야(夜大爺) 앞에서 게겨?"

 거구의 점소이는 탈탈 손을 털다가 주위를 슬쩍 둘러본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그의 행색을 암중에서 잠시 지켜보던 한 사람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예진과 점소이가 다투는 듯하면서 실제로는 뭔가를 주고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방금 사라진 예진의 뒤를 따랐다.

 황급히 주루에서 도망친 예진이 설렁설렁 걸음을 옮겨 이윽고 도착한 곳은 그곳에서 한참 떨어진 퇴락한 작은 도관(道觀)이었다. 아주 익숙한 모습을 보건대 아마도 그것이 그의 거처인 듯했다.

 뜨락은 그야말로 황량의 극치에다가 더럽기 이를 데 없다. 너무 지저분해서 누구라도 들어가다가 다시 나갈 수밖에 없어 보인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안으로 들어선 예진은 주위를 둘러본다.

 태상노군을 모셨던 대전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원래 규모가 작았는 데다가 도무지 청소라곤 한 적이 없어 보이는 곳이니 알 만했다.

 그 대전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것은 아마도 유삼(儒衫)인 듯한데 낡아 그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꾀죄죄한 몰골의 그는 50줄에 막 들어선 듯 보이는 초로인이었다.

 그는 대전 한 귀퉁이에서 꼬박꼬박 졸고 있었다.

 그를 본 예진은 그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조금 굽혔다.

 "다녀왔습니다."

 방금까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그가 아니었다. 정색을 한 모습.

 그러자 그 초로인이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의 그 모습과는 달리 눈을 뜨자 눈빛이 전광이 번뜩이는 듯하다.

 "과연 한효월이던가?"

 "그렇습니다."

 "그가 구한 것은 누구였지? 거기 같이 있던가?"

 "그늘 속에 누가 있는 것 같은데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몇 번 위치를 바꾸면서 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그가 묘하게 움직여서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감히 더 이상 시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음…… 제천교도를 구했다면…… 누굴까? 그 자리에서 살아남은 자가 누군지 알아보면 드러나겠군. 좋아! 그가 또 무슨 말을 했나?"

 "방주께 전하라고 했습니다. 방주를 뵙고자 한다고."

 "그것뿐인가?"

 "그것뿐입니다."

 "흐음……."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하던 초로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예진을 쏘아보았다.

 "숨기는 것은 없겠지?"

 돌연 음성이 싸늘해졌다.

 지금까지는 눈빛만 차갑더니 그 음성도 한풍이 휘모는 듯했다.

 그러나 예진의 얼굴은 두려움보다는 그저 일그러질 뿐이다.

 "없소."

 "좋아, 가봐라. 한효월의 종적을 놓치면 안 된다."

 초로인이 냉랭히 명했다.

 예진을 내보내고 난 다음, 초로인은 일어나 옆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문틀도 제대로 맞지 않는 곳이라 문짝이 성하지 않아 겨우 밖과 안을 갈라놓은 곳이긴 하지만 거기에는 그런대로 마련된 침상 하나가 있고 볼품없지만 탁자도 하나 놓여 있었다. 그 탁자에는 지필묵이 마련되어 있다. 초로인은 그 탁자에 앉아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종이에다 급히 몇 자를 적은 다음에 그 종이를 돌돌 말아 쥐고는 밖으로 통하는 문을 나섰다.

 그 문밖은 뜰이다.

 앞쪽과 마찬가지로 엉망이라 밤이라면 사방에서 귀신이 아우성치고 쫓아 나올 만했다. 그가 문 옆에 허름한 상자를 쌓아둔 곳으로 가서 가운데 있는 상자의 문을 열자 구구…… 소리와 함께 비둘기 한 마리가 그의 팔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그 비둘기의 다리에 매인 동관(銅管)에다가 가지고 나온 쪽지를 집어넣고는 그 비둘기를 훌쩍, 날려 보냈다.

 푸드득 소리와 함께 날아오른 비둘기는 그의 머리 위에서 한 바퀴를 돈 다음에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비둘기의 모습이 사라짐을 본 그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막 안으로 들어가던 그의 안색이 돌연 굳어졌다.

 안쪽, 조금 전까지 그가 있었던 대청 쪽에서 뭔가 푸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굳은 얼굴로 잠시 생각을 굴리던 그는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그의 모습은 금세 평범한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모습. 그러나 낡은 대전으로 들어선 그의 안색은 찰나간에 흙빛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대전의 중앙에 백의를 걸친 사람이 우뚝 서서 뭔가를 읽고 있는데, 그 어깨에는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서 날개를 푸드득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그 비둘기는 그가 방금 날린, 그 비둘기였다.

 게다가 그 백의인이 읽고 있는 것은 초로인이 그 비둘기 편으로 날려 보낸 서신이었다.

 "누구냐?"

 초로인이 낮게 소리쳤다.

 이 마당에 가장을 하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은 바보가 아니라면 다 아는 일. 그는 으르렁거리듯 낮게 소리침과 동시에 발끝으로 땅을 밀었다. 찰나 소리도 없이 그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져 백의인을 덮쳐 갔다. 그 속도는 그야말로 바람과 같아 한 가닥 바람이 이는가 싶은 순간에 그의 손에서 뻗어난 장세는 백의인을 후려치고 있었다.

 펑!

 그의 장력을 맞은 벽이 굉음을 울리며 부서져 나갔다.

 흙먼지가 풀썩, 하늘로 치솟았다.

 '으윽!'

 초로인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귀신이 곡할 일. 방금까지 그의 앞에서 편지를 읽고 있던 그 백의인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가슴이 섬뜩해진 그는 번개처럼 뒤로 돌았다.

 거기 있었다.

 백의인은 별빛처럼 맑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고요하지만 기태는 사람을 압도하는 바가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나이. 그의 나이는 불과 스물이 조금 넘은 듯했다.

 "누구의 명령을 받고 있나?"

 백의인이 입을 열어 물었다.

 "하, 한효월?"

 그의 음성에 정신을 차린 초로인이 어깨를 떨며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러했다. 나타난 사람은 바로 한효월이었다.

 "여기 쓴 것으로 보건대, 개방은 아니고…… 제천교도 아니군. 그럼…… 그럴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한데?"

 한효월이 전서구에서 빼낸 편지를 들어 보이면서 물었다.

 "노, 놈이 배반했구나…… 찢어 죽일 놈 같으니."

 초로인이 이를 갈았다.

 그가 말하는 것이 예진임을 안 한효월은 미미하게 웃었다.

 "쓸데없는 오해를 할 필요는 없다. 난 그의 뒤를 따랐을 뿐이니까."

 순간, 초로인이 번개처럼 몸을 돌려 밖으로 도주했다.

 그의 뒤를 한효월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쫓았다.

 사람이 아무리 빨라도 웃음소리보다 빠를 수는 없다. 그리고 한효월은 그 웃음소리만큼 빨랐다.

*   *   *

 관도(官道).

 석양이 깃들다 못해 힘을 잃고 서산 너머로 막 떨어져 온 산이 붉게 물들어갈 때, 한 대의 마차가 저문 석양빛을 받으며 나타났다.

 기묘한 형태의 마차였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그 사두마차는 온통 검은빛이었다.

 마차도 말도, 거기에 마차의 창을 가린 휘장까지도 모두가 검었다.

 그저 단순히 검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마차의 재질은 검으면서도 윤택이 흘러 단순히 목재에 옻칠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흑단(黑檀)임을 말한다. 게다가 만들어진 형태나 새겨진 조각들은 명공(名工)의 손길을 거치지 않으면 결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창문을 가린 휘장 또한 얼핏 보면 검은 비단이지만 실제로는 비할 바 없이 얇다. 다시 말하면 밖에서는 안을 보기 힘들지만 안에서는 바깥을 충분히 내다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마차를 호위하듯 좌우로 늘어서 달리는 여덟 명의 기수(騎手)들 또한 흑의를 착용하고 있다. 그들의 어깨 위로 불쑥 솟아오른 검병에 달린 검은 수실이 그들이 가르고 달리는 바람에 멋지게 휘날린다.

 두두두…….

 당당하고도 신비한 모습의 검은 사두마차 일행은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관도를 지나고 있었다.

 필시 바쁜 일이 있는 사람들인 듯한 모습이다.

 그때였다.

 소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앞쪽에서 소 떼가 불쑥 나타나 몰려나왔다. 몇 마리면 그러려니 하고 스쳐 갈 수 있겠지만 얼핏 봐도 3, 40마리는 넘는 숫자라 소 떼는 단숨에 관도 전체를 메워 버리고 말았다.

 "모두 그 자리에!"

 앞서 달리던 흑의기수가 고함쳤다.

 그러자 달리던 말이 급하게 앞발굽을 들고 크게 울어대면서 마차의 바퀴 주위에서 격하게 흙먼지가 일었다. 마차를 몰고 있는 사람의 솜씨는 발군이었다. 그처럼 달리고 있던 마차가 반 바퀴쯤 비틀어지듯 돌면서 단숨에 그 자리에 멈춰 섰던 것이다.

 그것과 동시에 마차의 좌우에서 달리던 여덟 명의 기수가 바람처럼 말을 달려 마차 주위에 산개(散開)했다.

 찰나간에 형성된 엄밀한 방어망이었다.

 두두두…….

 그들이 길을 멈춘 상황에서도 소 떼는 계속 몰려나왔다.

 하지만 괴이하게도 소 떼를 모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몰려나와 길을 막고 있을 뿐, 관도를 건너가는 것도 아니었다. 소 떼가 관도를 건너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하나 한 마리 한 마리가 농민에게는 큰 재산인 그 소 떼를 돌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당장 나오지 못할까? 이따위 눈속임으로 누굴 속이려는 것이냐?"

 앞서 소리친 흑의기수가 눈을 부라리면서 다시 소리쳤다.

 말과 함께 그가 한 손을 들자 그의 좌우로 두 명의 흑의기수가 검을 빼 들고 다가왔다.

 "내가 신호하면 소 떼를 흩어버려. 필요하면 모두 죽여도 좋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우훙!

 느긋하게 풀을 뜯으며 관도를 막고 있던 소 떼들이 갑자기 흉흉한 울음을 터뜨리면서 마차 쪽을 향해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기세는 울음보다 더욱 흉흉했다.

 "꽁지에 불이 붙었다!"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소 떼의 미친 듯 내두르고 있는 소꼬리에 불이 붙어 타 들어가고 있음을 본 흑의기수가 소리치다가 갑자기 말을 몰아 그 소 떼를 향해 달려갔다.

 다른 두 명의 흑의기수는 그를 도와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말을 몰아 몇 걸음 앞으로 나서며 그가 빠진 공백을 메웠다. 마차를 보호하기 위해서 방위를 점거한 것이다.

 크악!

 꾸아악!

 괴성이 잇달아 이는 가운데 달려오는 소 떼들을 상대로 검광이 무서운 위력을 가지고 덮쳤다.

 흑의기수가 가진 무공은 가히 발군이라 할 만했다.

 말을 탄 그가 검을 번뜩이자 달려들던 소 떼의 앞선 소들이 짚단처럼 목이 날아가면서 쓰러졌다. 앞선 소가 쓰러지자 뒤에서 달리던 소들이 거기에 부딪혀 튕겨 나가면서 장내는 일시지간 엉망이 되고 말았다.

 검을 휘두른 흑의기수는 소 떼의 돌진을 막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달려오던 소 떼를 사정없이 베어버린 결과, 죽어 넘어진 소 떼가 첩첩이 쌓여 길을 막아버린 꼴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태연했고, 차가운 눈길로 주위를 쓸어본다.

 "누구냐? 무엇을 원하는 자들이냐?"

 그가 차게 소리쳤다.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 강한 음성이 일대를 떨어 울렸다. 그가 일부러 내공을 끌어올려 시위를 한 것이다. 관도 주위의 숲에서 메아리가 울릴 정도의 음성이었다.

 …….

 그러나 그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흥! 길을 막아놓고는 나타날 담량은 없단 말인가?"

 흑의기수가 코웃음을 쳤다.

 쐐애애애-

 순간, 고막을 찌르는 날카로운 음향이 들려왔다.

 "향전(響箭)?"

 흑의기수가 미간을 찡그렸다.

 향전이란 소리나는 화살을 이른다. 화살을 쏴 올리면 날카로운 소음이 일어 신호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와아아-!

 과연 그 향전의 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고함 소리가 들리며 숲 속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이 쫓아 나오자 섬뜩한 빛이 무섭게 번뜩인다. 귀두도와 철봉, 안령도에다 유성추까지. 그들이 휘둘러 대는 갖가지 무기들이 햇빛에 반사된 까닭이다.

 그들의 행색을 보면 산적(山賊)이 분명했다.

 그것을 보자 흑의기수는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산적이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이렇게 소 떼를 희생시키면서…… 뭔가가 이상했다.

 그들이 흉흉한 기세로 달려들자 남아서 마차를 호위하던 흑의기수들이 일제히 말을 달려 그들을 맞아 나갔다.

 쨍! 쨍그렁…….

 정면 격돌이 일자 이내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비명은 모두 산적들에게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그들의 무공으로 흑의기수들의 검을 당해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일. 숫자는 서너 배나 되니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그 형상은 마치 거대한 해일에 허술한 방죽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이고 살려주십쇼!"

 단숨에 십여 명이 도륙되자 나머지 산적들이 새파랗게 질려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나타나던 기세에 비한다면 어이가 없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누가 너희들을 시켰느냐?"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들은……!"

 흑의기수의 말에 대답하던 산적 두목으로 짐작되던 자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목을 흑의기수가 내민 검끝이 지그시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만 더 허튼소리를 지껄인다면 죽여 버리겠다."

 그 말이 정말임을 의미하듯 산적 두목의 목덜미에서 피가 흐른다.

 "그, 그게……!"

 그는 더듬다가 눈을 부릅떴다.

 검에 목을 꿰뚫린 사람은 말을 하지 못하는 법이다.

 흑의검수가 가볍게 손을 떨자 산적 두목의 목이 그의 목에서 굴러 떨어졌다. 피분수가 위로 솟구쳤다.

 하지만 흑의기수는 냉정한 모습으로 그 옆에 파랗게 질린 자를 본다.

 "봤나?"

 "예? 예, 엣! 봐, 봐, 봤…… 봤습니다."

 그자는 다급하게 더듬거렸다.

 "좋다. 누가 이런 일을 하도록 시켰지?"

 "그, 그건……!"

 미미하게 더듬던 그의 머리가 갑자기 그의 목에서 굴러 떨어졌다. 피를 뿜어내면서.

 "말해 보겠나?"

 흑의기수가 그 옆에서 파랗게 질린 자에게로 검을 겨누었다.

 "예, 예! 저희들을 시킨 사람은……."

 연달아 두목에서 동료의 목이 떨어짐을 본 그자는 혼비백산, 황급히 입을 열었다.

 바로 그 순간이다.

 "핫하하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일단의 회의인들이 숲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느릿하고 평범했지만 침착하고 안정되어 있어서 흑의기수는 한눈에 그들이 고수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의 회의는 흑의기수들처럼 모두 회색에다 형태마저 같았다. 그들은 모두 등에 묘하게 생긴 장도(長刀)를 메고 있어 얼굴만 아니라면 한무리의 쌍둥이를 보는 듯했다.

 그들은 일렬로 걸어나오다가 좌우로 벌려 섰다.

 그러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학창의를 걸쳤다. 머리에는 동파건. 손에는 한 자루의 옥골섭선(玉骨摺扇)이 들려 휘적휘적 바람을 몰고 있다. 나이는 40대 정도로 보이는데 가슴까지 늘어진 검은 수염에 깊은 눈빛은 그가 평범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 같다.

 "너무 급하게 가는 것 같아서 잠시 쉬시도록 한다는 게 결례가 된 것 같구료. 죄송하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그가 입가에 미소를 걸고 하는 말이다.

 "당신은……."

 흑의기수가 중년 문사의 앞을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와 말하기 위해서 여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중년 문사가 조용히 말했다.

 높은 음성은 아니나 그 의미는 명백한지라 흑의기수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뒤에 있는 마차를 보고 있었다. 그들과 마차와의 거리는 4, 5장가량. 그사이에 흑의기수가 버티고 서 있는 상태였다.

 "그런가? 나도 당신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돌연 흑의기수의 신형이 말 위에서 훌쩍 날아올라 가공할 속도로 중년 문사에게로 날아갔다.

 3, 4장의 거리가 한순간에 지척으로 좁혀졌다.

 검광이 번뜩이는 순간, 그는 이미 중년 문사의 코앞에 도달했고 떨어지는 유성과도 같이 하늘을 가로질러 중년 문사의 가슴에다 그의 검을 찔러 넣고 있었다.

 그런데도 중년 문사는 그것을 보지 못한 듯 피하기는커녕 놀란 모습조차 없었다.

 쨍!

 날카로운 음향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인가 중년 문사의 앞은 회의도객(灰衣刀客)들이 막아서 있었다.

 두 명의 회의도객들이 뻗어낸 장도는 교차하면서 흑의기수의 검을 막아낸 상태. 뿐만 아니라 좌우의 회의도객들은 모두 손을 치켜 올려 도병를 움켜쥔 상태였다. 도를 뽑아낸 것도 아니었다. 도병을 움켜쥐고 장도를 뽑아낼 태세를 취하자 강렬한 도기가 그들에게서 일었다.

 그것은 마치 형체가 있는 듯 흑의기수를 엄습했다.

 '으으……!'

 흑의기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도산검림(刀山劒林)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러나라."

 그의 뒤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차갑기 이를 데 없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음성이다.

 그 음성이 들려오자 흑의기수는 미련없이 뒤로 물러섰다.

 "봉황문의 무영도객이 모두 출동한 것을 보니 귀하가 봉황문의 머리라는 문곡인 모양이군……."

 흑의기수가 물러나자 예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 음성은 마차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핫하…… 과연, 과연! 명불허전이외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니."

 중년 문사, 봉황문의 문곡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는 상대가 자신을 알고 있음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 태도였다.

 "하잘것없는 이름이긴 하지. 무영도객을 보지 않았더라면 생각해 내지 못했을 테니까."

 검은 마차 안에서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하하…… 본 문의 무영도객이 그처럼 대단했던가."

 문곡은 그 말에 멈칫하다가 다시 길게 웃었다.

 …….

 문득 냉랭한 공기가 일대를 점거한다.

 급격히 어둠이 사방으로 번져 오고 있다. 바람이 밤의 기운을 담고서 숲에서 불어 나와 풀잎을 세차게 흔들어댄다.

 쏴, 쏴아아…….

 주위가 을씨년스러운 느낌으로 가라앉는다.

 마차 안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그 마차 앞으로 다가갔던 산적들은 감히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땅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한다. 마차의 주위로는 흑의기수들이 여전히 말 위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문곡을 경계하고 있다.

 그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발동할 태세.

 문곡은 여전히 웃음기 떠올린 얼굴로 마차를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다.

 그 침묵을 깨뜨린 것은 마차 안에서 들려온 차가운 음성.

 "내가 누군지 알고 찾아온 건가?"

 "누군지도 모르고 찾아왔다면 너무 실례가 아니겠소?"

 문곡이 답했다.

 그러나 그뿐,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상대의 말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가? 하지만 정작 찾아올 이유는 없었던 모양이니,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이유는 없을 것 같군. 가자!"

 마차 안의 음성이 차갑게 소리쳤다.

 순간,

 "독고해는 어디 있소?"

 문곡이 소리쳤다.

 …….

 갑자기 일대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숨소리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그저 숨을 죽이고 있을 뿐.

 "그게 무슨 소리지?"

 잠시의 침묵 끝에 마차 안의 음성이 물었다.

 "본 문은 그간 조사 끝에 당금 무림에는 그간 한 번도 활동한 적이 없었던 신비로운 단체가 하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소. 그 이름을 보구(報仇)라고 하는 곳인데 들어본 적이 있으시오?"

 답은 없다.

 문곡은 미미하게 웃음을 입가에 걸고서 말을 계속했다.

 "이 신비로운 단체는 현재 암중으로 곳곳에서 제천교에 맞서 그들을 괴롭히고 있소. 제천교는 그들을 잡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야말로 신출귀몰, 꼬리만 보이고 머리는 보이지 않는 신룡과도 같아 정말 그들이 존재하는지도 모를 지경…… 그래서 제천교에서는 그들을 비적(秘敵)이라고 부르오."

 "흥! 봉황곡 순풍이(順風耳)가 발동하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듣는다고 하더니 허언(虛言)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마차 안에서 차가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문곡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말을 계속했다.

 "본 문은 그간 많은 노력을 경주하여 몇 가지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그 비적이란 자들이 건곤무적 독고해의 시신을 훔쳐 갔다는 것이오."

 그는 훔쳐 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듯 그 자리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마차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귀 회(貴會)가 왜 독고해의 시신을 훔쳤는가 하는 것이고…… 보구(報仇)라는 명칭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오."

 "아하하핫하하……."

 마차 안에서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고막을 찔러드는 듯했고 일대의 공기가 춤추듯 파동 쳤다.

 팟팟…….

 문곡의 옷자락이 그 파동에 절로 팔락거린다.

 하나 그는 미동도 없이 조용히 서서 상대의 답을 기다릴 뿐이다.

 "과연 대단하군, 대단해! 하지만 내가 왜 그 말에 대한 답을 해야 하지? 내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텐가?"

 "증명은 필요없소. 본좌는 회주의 답변을 듣고 싶을 따름이오."

 문곡의 말은 여전히 담담하다.

 "내가 하지 않겠다면?"

 "그렇다면 사정이라도 해야 할밖에."

 문곡이 다시 웃으며 답했다.

 사정이라도 해야겠다는 말의 의미는 대단히 묘했다.

 협박의 완곡한 표현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적대 의사가 없다는 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정을 하겠다는 문곡의 태도는 태연한 가운데 당당하다. 누구라도 사정을 한다는 말의 의미가 단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터이다.

 "흥! 그럼 어디 사정을 한번 해보시지?"

 차가운 음성에 문곡은 여전히 웃음 띤 얼굴이다.

 "굳이 그래야만 할 필요가 있겠소?"

 답은 들리지 않았다.

 뭔가 지시를 받은 듯 다시금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마차의 주위에 붙어 있던 흑의기수들이 말을 몰아 앞서기 시작한다.

 "이런이런! 굳이 권주(勸酒)를 마다하고 벌주(罰酒)를 자청하다니……."

 그 광경에 문곡이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마차가 달려갈 앞쪽은 죽어 넘어진 소 떼로 인해 길이 막힌 상태였다. 하지만 마차는 조금도 망설임없이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아니, 전진을 하려고 했다는 편이 옳을 터였다.

 마차와 흑의기수들이 전진하자 무릎을 꿇고 있던 산적 중 대여섯 명이 갑자기 그 자세로 날아올랐다. 그 움직임은 신속한 데다 바람 같아 조금 전까지 그처럼 참혹한 도륙을 당하던 일개 산적이 아니었다.

 "흥! 내 그럴 줄 알았다!"

 흑의기수가 코웃음을 쳤다.

 검은 말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기수들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찰나간에 그 앞을 가로막으며 검광이 그들을 찔러갔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일은 그 다음이었다.

 날아오른 산적들이 흑의기수들의 그 흉흉한 기세의 검을 못 본 듯 그대로 검을 향해서 덮쳐 갔기 때문이다.

 서로를 향해서 날아든 것은 두 배 이상의 속도를 가진다.

 퍽!

 검이 산적들의 가슴을, 배를 꿰뚫었다.

 그들이 검을 피하지 않을 것을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산적들은 흑의기수들의 검을 자신의 몸으로 받고도 모자라 자신의 몸을 꿰뚫은 검신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도무지 고통도 모르는 듯, 죽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한 동작이었다.

 경악의 빛이 흑의기수들의 눈에 튀어 올랐고, 누가 시키기 이전에 움찔, 그 동작에 미세한 틈이 일었다.

 바로 그 순간에 산적 중 몇이 땅바닥을 구르며 마차를 향해 덮쳐 갔다.

 흑의기수들은 대경실색했지만 산적들과 엉겨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그들이 몸으로 흑의기수의 검을 움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따위 허튼수작으로 감히!"

 흑의기수들의 우두머리 기수는 냉소를 터뜨리면서 검을 휘저었다. 피가 튀면서 그의 검에 가슴이 뚫린 자의 가슴이 도끼 맞은 장작처럼 쩍, 양쪽으로 갈라졌다.

 "으악!"

 참담한 비명이 그 뒤를 따랐다. 검을 움켜쥐었던 손가락이 붉은 꽃송이처럼 피보라를 뿌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것과 동시에 흑의기수는 말의 등을 떠나 신형을 뒤집으면서 바닥을 뒹굴어 검은빛 마차로 접근하고 있는 산적들에게 허공에서 쏜살처럼 내리꽂혔다.

 이미 경험이 있던 그는 가슴이 아니라 산적들의 목을 노렸다.

 그의 검은 막 뒹굴어 일어나는 산적의 목을 쳐 날렸다.

 "겨우 이따위 무공으로……!"

 상대가 자신의 일격도 견디지 못하는 한심한 수준임을 본 흑의기수는 냉소 하다가 눈을 부릅떴다.

 몸을 떠난 산적의 목이 날아가면서 웃고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쾅! 콰콰쾅!!

 뒤를 이은 맹렬한 폭음.

 섬광에 이어 시뻘건 불빛이 검은 마차를 휘감았고,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합창하듯이 일었다.

 놀랍게도 산적 중, 마차를 덮쳐 온 자들은 일신에 화약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게 장치되어 있었다.

 그 폭음 속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문곡의 웃음소리였다.

 졸지에 한 폭의 지옥도(地獄圖)가 펼쳐졌다.

 시뻘건 불길이 번쩍이는 순간에 사두마차를 끌던 말들이 어육이 되어 나뒹굴고 그 서슬에 마차도 미친 듯 달려가 관도 옆의 숲 속 나무를 들이박았다. 그 호위였던 흑의기수들도 참변을 면치 못했다.

 죽어 넘어진 사람들의 모습은 가히 참혹(慘酷).

 화약 냄새가 매캐하게 코를 찌르는 가운데 폭발로 인한 불꽃이 사방으로 튀면서 흩날렸다.

 그곳으로 회색 빛 바람이 날아들었다.

 문곡의 좌우에 늘어서 있던 회의인들, 바로 무영도객들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상황을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폭발이 일어나자마자 마차를 향해 전력으로 날아든 것이다.

 그 모습을 문곡은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을 계산해 두고 있었다는 표정.

 "크윽!"

 쥐어짜는 신음이 들려왔다.

 기수(騎手) 중 살아남은 자들이 마차의 앞을 가로막다가 그중 하나가 무영도객의 장도에 피를 뿌리고 쓰러졌다.

 무영도객이란 이름처럼 그들의 움직임은, 칼 씀씀이는 정말 신속했다. 칼날이 보이지 않도록 그들의 장도는 바람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들은 그렇게 앞을 가로막는 흑의기수들을 짚단처럼 베어 넘기고 폭발로 인해 숲 속에 처박힌 마차를 향해 덮쳐 갔다.

 그들이 나무를 들이박고 반쯤 기울어진 마차를 덮친 순간,

 펑!

 돌연 맹렬한 폭음과 함께 마차의 문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그 바람에 막 문을 열려고 거기에 다가선 두 명의 무영도객이 그 폭발하듯 부서지는 문짝에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동시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마차 안에서 불쑥 솟구쳐 올랐다.

 사방에서 삼엄한 도광이 그 그림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마치 노한 파도가 고립된 암초를 향해 몰려오는 것 같았다.

 "흥!"

 차가운 코웃음 소리가 흑영(黑影)에게서 터져 나왔다.

 흑영이 손을 쓰자 나직한 신음 소리와 함께 앞선 무영도객 둘이 삽시간에 거꾸러졌다. 흑영은 무기도 들지 않았지만 그 손과 소매에서 이는 경풍은 열 명의 무영도객을 압도하는 듯했다.

 "과연 보구회(報仇會)의 주인답군……."

 그 광경을 보고 문곡이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그 순간이다.

 갑자기 그 흑영이 내려서면서 비틀거렸다.

 "이런 비겁한…… 독이구나!"

 흑영이 이를 갈듯 소리치자 문곡이 낭랑히 웃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독이오. 당신의 목을 취하려 했다면 폭약이 아니라, 진천뢰를 써서 폭사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니 그렇게 노할 필요는 없소. 그러게 잔은 권할 때 받는 것이 예의지……."

 찰나, 흑영은 긴 소매를 휘둘러 강력한 강풍을 일으켜 무영도객의 도막(刀幕)을 막아내면서 그 탄력을 빌어 훌쩍 뒤쪽으로 날아갔다.

 "도주하지 못하게 막아라!"

 그것을 보고 문곡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자 흑영이 날아가는 숲 앞쪽에서 돌연 몇 명의 회의인들이 나타나 흑영을 막아섰다. 기다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바로 그 순간에 고함 소리와 함께 좌우에서 두 사람이 나타나 그 회의인들을 공격했다.

 "회주님, 어서 이곳을 피하십시오!"

 그들은 피투성이가 된 마부와 흑의기수들 중 우두머리였다.

 그들의 무공은 여전히 놀라워 그들이 목을 내놓고 덤비자 그들을 무시하고 흑영을 잡으러 갈 수가 없었다.

 펑!

 뿐만 아니라, 마부가 뭔가를 집어 던지자 검은 안개가 폭발하듯 일어나 방원 4, 5장을 뒤덮어 버렸다. 지척을 분간하기 힘든 안개가 삽시간에 숲 속을 뒤덮는 것을 본 문곡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쫓아! 놓치면 안 된다!"

 말과 함께 그도 숲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얼굴은 괴이하게 변해 있었다.

 "여자란 말인가?"

 그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흑영의 모습을 얼핏 본 그는 정말 믿기지 않았다. 보구회의 주인이 여자라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쫓고 쫓기는 일단의 무리들이 사라지자, 관도는 다시 정적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남은 사람들은 참혹했다.

 기세 좋게 창칼을 휘두르면서 나타났던 산적들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들 가운데 숨어 있던 자들이 몸에 지니고 있던 폭약이 폭발하면서 그 주위에 있던 그들마저 모조리 저승 길동무로 삼은 까닭이다. 그만큼 폭발의 위력은 강했고, 그로 인해 초래된 것은 한 폭의 지옥도.

 피비린내와 매캐한 화약 내음이 코를 찌르는 가운데 문득 그 자리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신법은 놀라운 바가 있어서 누가 옆에서 보고 있었어도 그가 어떻게 그 자리에 나타나는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관옥 같은 그 얼굴은 굳어 있다.

 뜻밖에도 그 얼굴은 한효월의 것이었다.

 "그녀라니……."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그는 흑영의 모습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 흑영은 뜻밖에도 그가 몇 번이나 본 사람이었다.

 검은 면사를 썼던 여인.

 처음 조양동에서 만났었고 그 뒤에는 절에서도 만났던…… 그 흑의의 귀부인이 비적이라는, 보구회라는 단체의 주인으로 나타나다니? 실로 믿기지 않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더구나 그녀가 맹주부에서 사형 독고해의 시신을 훔쳐 간 장본인이라니…….

 사실일까? 그것이?

 한효월은 굳은 얼굴로 그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가 몸을 날렸다.

 그대로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원래 그는 그 도관에서 초로인을 다그쳐 그가 봉황문의 사람임을 알아내고 그가 어디로 연락을 해야 하는지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간 소식없어 보이던 봉황문. 과연 그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개방에까지 간세(奸細)를 파견한 것인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초로인에게서 알아낸 연락처로 간 그는 문곡이 이동하는 것을 보고 그 뒤를 따라 여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는 놀라운 사실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어두워지면서 점점 급박해졌다.

 하지만 한효월은 그 뒤를 어렵지 않게 따를 수 있었다. 그렇듯 싸우면서 쫓고 쫓기는 데 놓칠 리가 없는 것이다.

 뒤를 따르면서 그는 갈등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흑의부인을 찾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어봐야 할 것 같다는. 그러기 위해서는 봉황문이 그녀를 추격하지 못하게 하고 그 이목을 따돌린 다음에 자신이 그녀를 만나봐야 했다.

 그러나 상황은 돌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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