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四首 절대고수(絶代高手) (46/113)

第四首  절대고수(絶代高手)

-의혹이 일다

일거에 천하(天下)를 진동하니, 무적이라

 화산(華山).

 감천형이 화산으로 되돌아온 것은 한효월과 헤어진 뒤,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화산파는 손님들을 맞아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돌아온 감천형이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화산파의 장문인 진자양이었다. 그는 무림맹의 부맹주일 뿐 아니라, 현재 무림맹의 대리 맹주이므로 가장 바쁜 사람이라 감천형은 반 시진가량을 기다린 다음에야 비로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모레가 대회일이라 구대문파 장문인들과 회의를 하고 있어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소. 왜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소?"

 진자양은 황망하게 돌아와서 그를 맞았다.

 감천형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 모양으로 그 자리에 나타나면 좋을 게 없을 듯해서……."

 쉬지 않고 달려온 길이었다.

 피에 묻은 옷이야 대강 갈아입었지만 그의 신색이 피폐한 것은 감출 수가 없었다. 대강 털고 들어오기야 했지만 쉬지 않고 달려서 전신이 먼지투성이이기도 했다.

 "으음…… 내 실수였던 모양이오."

 감천형에게서 상황을 전해 들은 진자양이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척후라고 할지라도 전력을 기울였어야 이런 희생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 바람에 애꿎은 사람들만 다친 것 같소."

 "호맹위대 서른이면 간단한 세력이 아닙니다. 적이 너무 강했을 뿐……."

 감천형이 말끝을 흐렸다.

 "지금 한 공자는 어디에 계시오?"

 "모르겠습니다. 적의 동태를 알아보시겠다는 말만 하고 떠나셔서……."

 "으음…… 대회에 빠지면 안 될 텐데……."

 "대회에는 반드시 참가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한 공자 혼자 그렇게 다니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실로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소. 예로부터 도고일장(道高一丈)에 마고십장(魔高十丈)이라 하였는데, 지금의 상황 또한 다르지 않소. 적이 그처럼 강하다니 결코 한 공자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는 아니 될 것이오. 감 당주가 유념하여 한 공자의 소식이 있으면 내게 바로 알려주시오."

 "알겠습니다."

 감천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자양은 문득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천형이 보던 그는 늘 자신만만했고 당당했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한숨이라니…….

 감천형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진자양은 시선을 열린 창문으로 던진 채로 잠시 침묵했다.

 따스한 양광(陽光)이 창밖을 메운 푸른 녹음(綠陰) 사이로 밀려들고 싱그러운 바람은 무심히 나뭇잎을 흔든다. 평화롭기 이를 데 없는 정경이다.

 뿅, 뿅∼

 세속의 복잡함을 알 필요 없는 새들이 장난을 치면서 지저귀고 있었다.

 한가로운 오후였다.

 "맹 내의 모든 일을 맹주께서 처리할 때는 몰랐더니…… 참으로 어렵소. 적이 그렇듯 강하니 무림맹의 힘으로 그들을 과연 저지할 수 있을런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고……."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진 장문인께서 새로운 맹주로서, 대국을 잘 이끌어 나가신다면……."

 감천형의 말에 진자양은 쓰게 웃었다.

 "나는 대리일 뿐, 맹주가 아니오. 과연 그런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감 당주나 많은 능력자들이 맹 내에 있으니 그런 말은 이를 것 같소. 더구나 늘 어려울 때면 영웅이 나타나지 않았었소? 이번에도 지난날 독고 맹주와 같이 새로운 영웅이 나타나 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은데 어떨는지……."

 그의 미간에 고뇌가 드리웠다.

 '이 사람은 진심으로 무림을 염려하고 있구나.'

 감천형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가 가고 없는 지금, 한효월과 같은 존재에 진자양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은 실로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무림맹을 이끌어간다면…….

 잠시 묵묵히 있던 감천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이번 일에 대해서 더 알고 계신 게 있습니까?"

 "무슨?"

 "맹주님의 유체를 탈취해 간 자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감천형이 그를 주시하면서 물었다.

 "그들의 존재는 어쩌면 예상보다 더 큰 의미가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어쩌면…… 대국(大局)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만."

 감천형의 말에 진자양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간 힘들여 조사를 해왔지만, 그럼에도 내가 아는 것은 별로 많지 않소.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비로소 한 가닥 단서를 잡았던 것인데……."

 "다시 그들의 뒤를 추적할 수는 없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감 당주의 전신을 받고 바로 사람을 파견했소. 대회 준비만 아니었다면 내가 직접 갔을 텐데……."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죄를 청합니다."

 감천형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무슨…… 적이 그렇듯 강한데 그 일은……."

 황망히 고개를 젓던 진자양은 문득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일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지만 예상보다 시간이 길어져서 걱정이오. 대회까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는지……."

 "장문인!"

 그때 밖에서 진자양을 부르는 음성이 들려왔다.

 "점창, 청성, 아미파, 곤륜파의 장문인들께서 장문인을 청하고 있습니다."

 "곤륜? 곤륜파의 장문인께서 당도하셨느냐?"

 "예, 방금."

 "알겠다. 바로 갈 테니 잘 모시도록 해라."

 대답한 진자양은 감천형을 돌아보았다.

 "예정보다 사흘이나 늦긴 했지만 곤륜의 장문인이 마지막으로 당도했소. 이젠 내일이라도 대회를 치를 수 있겠소. 감 총당주도 같이 가겠소?"

 "아닙니다. 전 잠시 주위를 돌아보고 뒤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오. 그럼……."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일어섰다.

*   *   *

 "뭐라고?"

 감천형은 경악해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진중한 사람이라 표변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놀라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사모(師母)님이라니?"

 "저도 믿기지는 않습니다만, 틀림없습니다."

 "으음……."

 좌백의 단정에 감천형은 신음했다.

 그가 경솔한 사람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감천형이었다. 그야말로 철두철미. 절대로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의 그인지라, 저렇듯 단정한다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정말 너무도 뜻밖이었다.

 진자양과 헤어져 돌아온 그는 좌백과 만나자마자 너무도 뜻밖의 소식에 아연실색,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다.

 근 마흔에 가까운 사람들이 갔다가 채 스물이 되지 못하는 인원이 돌아왔다. 그런 마당에 한가롭게 사매를 보살피고 사제를 만나서 그간의 사정을 물을 형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화산으로 돌아오던 그는 중도에서 좌백을 만나 그가 급히 보자는 전음을 보내오자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그를 찾은 상태였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것은 과연 그때…… 사모님이 돌아가셨느냐는 겁니다. 전 그때 어려서 당시의 경과를 명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사모님이 돌아가신 것을 직접 뵙지 못한 듯해서……."

 "그건……."

 감천형은 다시금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면 그도 직접 보지는 못한 듯했다.

 사매인 독고경이 네 살인가 되던 해에 사모는 사부와 뭔가 크게 다투고는 강호에 나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급보를 받고 그녀를 찾아 나선 사부가 안고 돌아온 것은 그녀의 유골함. 풍토병에 걸려 죽은 그녀는 화장한 유골(遺骨)로써 맹주부에 돌아왔었다.

 그런데…….

 '그런 그분이…… 그 사모님이 살아 계시단 말인가?'

 감천형은 뇌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첫 번째 부인의 사후, 몇 년 뒤에 맹주 부인이 된 봉설란은 자상하기 이를 데 없는 성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그전의 맹주 부인이었던 독고경의 친모(親母)는 매사에 엄격한 성품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딸과 흡사한 성격이라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것을 보지 못했다. 그녀로 인해 맹주부 내의 기상은 칼과 같았다. 그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일러, 맹주부가 처음 생길 때는 첫 번째 부인의 성품이 적합했으며, 맹주부가 자리 잡은 다음에는 현재의 부인인 봉설란으로 인해 맹주부의 위상이 더 빛날 수 있었다라고 하였었다.

 겸하여 붙은 말이 맹주는 처복도 많다…….

 그런데 십수 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그녀가 살아 있다니?

 죽었다던 그녀가 남편 독고해의 사후에 딸을 돌보기 위해서 환생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만약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사부는 왜 그녀가 죽은 것으로 위장을 해야 했던가.

 무엇 때문에?

 그가 아는 사부는 천하에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낙양에 남은 사모님의 소식은?"

 "그대로 계신 듯합니다. 제가 그 즉시 사람을 보내서 알아봤는데 이상없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아무래도 한번 가 뵈어야겠군……."

 감천형이 중얼거렸다.

 "사매는?"

 "그날 이후로 다시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합니다. 다행히 화산옥녀 진 소저가 명랑해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사매는……!"

 갑자기 좌백이 말을 멈추었다.

 감천형이 굳은 표정으로 그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 이틀 같이 보낸 세월이 아니다. 그 행동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아는 그는 말을 멈추었고, 그 순간에 감천형은 바람처럼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젖혔다.

 아무도 없었다.

 "흥!"

 감천형은 나직이 코웃음 치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이야기하던 방은 감천형의 집무실 겸 숙소였다. 작은 대청 하나가 있고 거기에 붙은 방이 하나 있었다. 무림맹 총당주의 숙소로서는 초라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감천형은 거기에 대해서 전혀 불만이 없었다. 그 숙소는 조금 다른 사람들의 숙소와 담을 사이에 두고 자리했다.

 낮은 기척.

 그림자 하나가 담장을 돌고 있었다.

 감천형은 벼락 치듯 5장 거리의 허공을 갈랐다.

 "헛?"

 그 그림자가 놀란 음성을 흘리며 주춤, 한 걸음 물러났다.

 "누구…… 아니, 당신은?"

 금방이라도 손을 쓸 듯하던 감천형이 손을 멈추었다.

 눈앞에 드러난 상대가 전혀 뜻밖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감 당주? 아니, 무슨 일이오?"

 그 사람이 놀란 눈을 꿈벅거렸다.

 화산우사 육기.

 바로 진자양의 사형인 그가 감천형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는 명리(名利)에 별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제인 진자양의 자질이 뛰어남을 보고 자신에게 돌아와야 할 장문인의 자리를 미련없이 그에게 물려주고 출가하여 화산파 유일의 도사가 된 사람이었다. 세간의 평판이 나쁠 까닭이 없는 사람이고 평소에는 세상을 운유(雲遊)하여 화산에도 잘 있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화산에 남게 된 것은 독고해의 죽음으로 급박한 상황이 되면서부터였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소. 곤륜파의 행렬을 뒤쫓는 자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길래……."

 말끝을 흐리던 그는 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감 당주는 언제 돌아온 거요? 중요한 일이 있어서 하산했다고 들었는데?"

 "좀 전에 돌아왔습니다."

 감천형이 그를 보면서 대답했다.

 "그가 맞습니까?"

 그 자리를 떠나는 화산우사 육기를 전송하는 감천형의 뒤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좌백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글쎄……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 더구나 그가 우리들의 이야기를 엿들어야 할 까닭이 없지 않느냐?"

 "글쎄요……."

 좌백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눈빛은 칼날처럼 매섭고 날카로웠다.

 "낙양 맹주부 내에서도 전혀 엉뚱한 자들이 적의 첩자로 나타났었습니다."

 "넌 설마 그를……."

 감천형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십여 년 전에 돌아가셨던 분이 살아서 나타난 마당에 무엇인들 불가능하겠습니까?"

 "만약 그가 적과 관련이 있다면, 진 맹주 대행까지 의심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그도 의심할 수 있죠. 지금 상황이라면……."

 "넌……."

 어이없는 듯 그를 보던 감천형은 고개를 저으며 정색을 했다.

 "말을 조심해라. 그런 말을 함부로 해서 만에 하나라도 우리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난다면,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될 게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할지라도 다 드러내는 건 평소의 너답지 않다."

 쓴웃음이 좌백의 얼굴에 스쳐 갔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평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감천형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려울 때 흐트러지지 않아야 사부께 부끄럽지 않겠지. 난 사매에게 가볼 테니 넌 그만 돌아가 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끄덕이던 좌백이 뭔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한 사람이 빠르게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화산파의 정예라 할 수 있는 화산십이룡 가운데 하나인 일수탈혼(一手奪魂) 경정추(耿靖鄒)였다.

 화산십이룡은 늘 진자양의 곁을 떠나지 않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일이 너무 바빠 그들 중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사람을 접대하고 화산 외곽을 경비하는 등 손을 나누고 있었다. 그럼에도 진자양의 곁을 떠나지 않는 몇 사람 중 하나가 경정추였다.

 "총당주!"

 감천형의 앞으로 온 경정추가 그에게 포권했다.

 "무슨 일이오?"

 "장문인께서 총당주를 청하고 계십니다."

 "나를? 방금 만나뵙고 나온 길인데?"

 "취의청에서 긴급 회의가 열리고 있는 중입니다. 안건이 있으니 직접 오십사 전갈토록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일인가?

 감천형과 좌백이 서로 얼굴을 돌아보았다.

 "좌 당주께서도 시간이 허락한다면 같이 참석하십사 전하셨습니다."

 "나도 말이오?"

 "예!"

*   *   *

 화산파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취의청(聚議廳)은 대개 매화청(梅花廳)이라 불리웠는데, 그 주변에 오래된 매화가 많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면 이곳은 그야말로 설중매로 일대 장관을 이룬다. 하지만 원래 화산에서 내건 이름은 건곤대전(乾坤大殿)으로써 지금도 화산파의 제이대 조사가 썼다는 건곤대전이라는 편액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그 이름은 취의청이 화산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의미한다.

 취의청의 날아갈 듯한 처마에는 기울기 시작하는 해가 걸려 석양빛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가운데, 그 일대에는 나는 새도 들어오기 힘든 삼엄한 경계가 발동된 상태였다.

 이 취의청, 건곤대전에는 당금 무림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구대문파의 장문인 아홉 명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신중하고도 굳은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건곤무적 독고해가 쓰러졌을 때, 그들은 무림맹으로 모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장문인들이 모두 온 것은 아니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는 구대문파의 장문인 아홉 명이 모두 있었다.

 감천형이 좌백과 함께 그 자리에 들어서자 진자양을 비롯한 구대문파의 장문인들까지 모두 일어나 그를 맞았다.

 무림맹의 총당주라는 지위는 천하무림을 총괄하는 무림맹의 실권자를 의미했고, 무림맹 공봉인 구대문파의 장문인에 비해 그 비중이 전혀 작지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건곤대전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구대문파의 장문인을 비롯한 그들을 수행하는 사람들까지 합해서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음에도 조용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감천형은 좌백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감 당주까지 참석하셨으니, 이제 결론을 내릴 때가 된 듯합니다."

 그가 자리를 잡는 것을 본 진자양이 입을 열었다.

 "길게 끌고 갈 시간이 없으니 빨리 일을 진행함이 좋겠소이다."

 호호백발의 노도사가 상기된 표정으로 뒤따라 말했다.

 그는 바로 곤륜파의 장문인인 옥허 도장(玉虛道長)이었다. 그는 예정보다 삼 일이나 화산에 늦게 도착했는데 안색이 매우 굳어 있는 듯 보였다.

 "……."

 감천형은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했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들이 자신을 청한 것을 본다면 일의 경과를 이야기하지 않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일단 감 당주께 경과를 말씀드리고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곤륜파의 장문인 옥허 도장에게서 시선을 돌린 진자양은 감천형에게 굳은 표정으로 경과를 설명했다.

 "곤륜파의 장문인이신 옥허 도장께서 예정보다 늦게 온 것은 제천교의 습격을 받아서였는데, 그들의 공격이 너무 집요하여 그야말로 혈로를 뚫고서 간신히 여기에 당도하셨는데…… 수행했던 고수들을 거의 잃고 장문인과 같이 오신 분은 겨우 세 명에 불과하였소."

 감천형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들이 오시는 길을 어떻게 알고?"

 "그것이 문제인 것 같소. 그들이 어쩌다가 곤륜파의 앞을 막은 것이 아닐 것이니, 그들이 언제 어떻게 화산대회를 방해할는지 모를 일이오. 그래서 우리들은 대회일을 앞당기기로 결정하고 감 당주의 의견을 듣고자 청한 것이오."

 "앞당기다니요? 날짜는 이제 겨우 이틀 남았는데……."

 "이틀이 아니라 내일 아침이라도 바로 시작할까 하오."

 "그건……!"

 감천형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전 맹주이신 독고 맹주의 사제인 한 공자께서 이 자리에 계시지 않는 점이지만, 감 총당주와 좌 당주가 계시니 별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진자양이 신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러분들은 이미 그렇게 결정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사안의 중대함을 생각할 때 감 총당주 사형제의 의견없이 일을 추진하기는 곤란한 일이오."

 "……."

 감천형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입을 열어 말을 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어 보인 까닭이다.

 "아미타불…… 이상하게 생각하진 마시오. 감 총당주의 사숙이신 한 공자께서 기일 내에 오시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모두 의견을 모은다면 달리 하자가 없을 것이오."

 소림파의 장문인 대광 대사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천교의 힘은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범주를 벗어난 듯하오. 그들과 맞서려면 하루라도 빨리 무림맹을 정비하여야 하니…… 이와 같은 비상시국에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외다."

 무당파의 장교진인 일양자도 동조했다.

 그들의 표정은 긴장으로 딱딱히 굳어 있었다.

 이미 결정이 난 사안이었다.

 감천형이 반대를 한다고 해서 번복될 일이 아닌 것이다.

 "다들 같은 의견이십니까?"

 잠시 침묵하던 감천형이 물었다.

 "한시가 급하다는 데 모두가 동의하였소."

 진자양이 답했다.

 "그러시다면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그 말에 좌백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좋소, 감 총당주까지 찬성하니 대회를 바로 진행하고 그 진행도 사흘 예정이었던 것을 하루 정도로 단축하여 최단시간 내에 맹을 재정비하는 걸로 해봅시다!"

 진자양이 결론을 내렸다.

 발 밑에 깔리는 흙바닥이 왠지 무겁게 느껴진다.

 그것을 밟고 걸음을 옮기고 있는 좌백의 얼굴도 무거웠다.

 "못마땅한 게로구나?"

 그와 어깨를 나란히 건곤대전을 나온 감천형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건 의논이 아닙니다. 통보(通報)였지요. 그럴 바에야 왜 우리를 부릅니까?"

 좌백의 부은 음성에 감천형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렇게 의견이 모아졌겠지.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느냐? 구대문파 수뇌들의 얼굴이 그처럼 무거운 것을 나는 처음 본 것 같다. 그렇게 어렵게 내린 결정을 우리가 반대한다면 공연히 내부적인 갈등만 일어나게 된다. 지금은 힘을 모을 때다. 사숙이 오시기 전에 대회가 열리게 되어 조금 아쉽지만, 하루 빨리 맹을 정비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대회 날짜가 이미 열흘가량이나 늦어진 것도 사실이었고……."

 "일의 당위성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절차가 문제 아닙니까? 우리를 배제하고 모든 것이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우리를 부른 게 아니라 나름대로 결정을 내리고 난 다음에 형식적으로……."

 "그만 해두자. 일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감천형은 좌백의 불만을 눌러 버렸다.

 '시대가 바뀌었다. 아직 그것을 느끼지 못하겠느냐?'

 굳은 얼굴로 멀어져 가는 좌백의 뒷모습을 보면서 감천형은 내심 무겁게 중얼거렸다.

 위대했던 사부의 죽음과 함께 그 무림맹은 이미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남겨둔 무림맹은 구대문파를 중심으로 변모하려고 하는 중이었다. 현재 무림맹을 이루고 있는 주축은 그들이었으므로,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맹에 비록 외부의 고수들이 있긴 했지만 구대문파는 일개인이 아닌 유구한 전통을 지닌 세력인 것이다.

 좌백의 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감천형은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날이 밝으면 아마 눈코 뜰 사이가 없을 것이다.

 그전에 사매에게 한번 들러봐야 할 터였다.

*   *   *

 "사매."

 감천형은 굳은 얼굴로 독고경의 방문을 두드렸다.

 여전히 응답이 없다.

 "사매, 나다."

 혹시라도 잠이 들었나 하여 감천형은 진기전성(眞氣傳聲)의 수법으로 독고경을 불렀다. 소리 내어 크게 불렀다가는 주위 사람들을 경동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방 안으로 음성을 흘려 넣은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그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그가 부른 음성, 진기전성으로 부른 음성은 귀에다 대고 소리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안에 있다면 제아무리 깊이 잠들었다고 할지라도 못 들을 리가 없다. 더더구나 그녀는 일반인이 아니라 내공을 수련한 무공인이었다.

 문을 밀어보았지만, 안으로 잠겨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불안해진 감천형은 문을 밀던 손에 힘을 주었다.

 나무문이 제아무리 튼튼해도 어찌 그의 힘을 당할 수가 있으랴.

 뚝!

 안에서 빗장이 부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활짝 열렸다.

 "사매!"

 문이 열리자 감천형은 한 손을 가슴에 세운 채로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실내는 어두웠다.

 하지만 안으로 뛰쳐 들어간 감천형은 뜻밖의 광경에 그 자리에 굳어져야 했다.

 독고경.

 그녀는 아무 일도 없는 듯 그린 듯한 모습으로 창밖을 바라보면서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등을 보인 채로.

 누군가가 문을 부수고 들어왔음을 알았을 것임에도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사매……."

 감천형은 그녀에게 다가가면서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돌아보지도 않았다.

 "사매, 무슨……."

 감천형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이었다. 그녀가 몸을 돌린 것은.

 그녀가 몸을 돌리자 감천형은 본능적으로 손을 움츠렸다.

 과년한 처녀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은 어떤 돌발 상황이 아니라면, 아무리 무림인이라 할지라도 삼가야 하는 것이 당연한 당시 예법이다.

 하지만 몸을 돌린 그녀의 눈을 본 감천형은 공연히 가슴이 철렁했다.

 본능적으로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던 것이다.

 망연(茫然)한 눈빛.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 독고경의 눈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그 눈은 그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앞의 그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다.

 "사매?"

 그가 그녀를 다시 부르는 순간,

 돌연 그녀가 찬물을 뒤집어쓴 듯이 한차례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눈에 한 가닥 빛이 일었다.

 그리고 그 찰나, 독고경이 갑자기 손을 들어 그를 쳐왔다.

 소맷자락이 펄럭이는 가운데 희디흰 섬섬옥수(纖纖玉手)가 번갯불처럼 그를 향해서 직격(直擊)해 들어왔다. 그것은 밤하늘을 가르며 떨어지는 유성과도 같이 놀랍도록 빨랐다.

 "무슨 짓이냐?"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다 막 손을 거두던 감천형은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의 일장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그는 발을 교차하는 순간에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찰나간에 일 척(尺)가량을 옆으로 물러났다. 거의 본능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었다.

 하나 독고경의 일장은 원식을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로 그의 가슴을 향해 여전히 날아들고 있었다. 가공할 속도로써.

 팡!

 맹렬한 폭음이 일었다.

 쨍그랑!

 두 사람의 부딪침에서 일어난 일진 회오리바람에 창가의 놓였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으로 깨어졌다.

 "윽!"

 나직한 신음.

 놀랍게도 감천형이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쿵쿵, 소리와 함께 그의 발 밑에서 바닥이 으스러졌다. 그것은 방금 그가 받은 충격이 실로 간단치 않았음을 의미한다.

 "사매……."

 숨을 두어 번 몰아쉬고서야 겨우 기혈을 진정시키고 독고경을 부르는 감천형의 얼굴은 창백했다.

 창가의 휘장이 펄럭인다.

 하지만 방 안에서 독고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무슨 일이에요?"

 놀란 음성이 감천형의 뒤에서 들려왔다.

 화산옥녀 진가기였다.

 그녀의 방은 바로 독고경과 붙어 있다시피 해서 방에서 벌어진 일진 소동에 놀라 뛰어온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감천형으로서는 그녀의 말에 대답할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화산옥녀 진가기에게 머리를 저어 보이고는 그대로 신형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마치 빨려들듯이 번개처럼 창문을 통해 반대쪽으로 날아 나갔다.

 독고경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그 자리에는 두 눈이 휘둥그런 진가기만이 남았다.

 산속의 어둠은 짙었다.

 산속에서, 더구나 이처럼 어둠이 찾아든 숲 속에서 이미 사라진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라고 해도 좋았다.

 무림의 고수가 훨훨 날아간 것을 사냥꾼이 뒤를 쫓듯이 그렇게 더듬거리면서 쫓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을 두고 그렇게 추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설사 찾았다 할지라도 독고경에게 무슨 일이 어떻게 생긴 다음일지…….

 '사모님이 사매의 금제를 해제했다고 하더니 이건 도대체……?'

 감천형은 굳은 얼굴로 다급히 주위를 살폈다.

 창졸간에 날아온 그녀의 일격은 참으로 놀라웠다.

 하마터면 피를 토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던 것이다. 한효월과 만나 한차례 기우(奇遇)를 경험한 그였다. 그런 그에게 그러한 위력을 보이다니, 평소 독고경의 무공을 생각한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무리 그가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다급한 감천형의 눈이 문득 빛을 발했다.

 어둠이 깃든 숲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인영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감천형이 독고경을 찾기 위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방을 살피던 중이 아니었다면 놓치고 말았을 정도로 그 인영의 움직임은 신속하고도 은밀했다. 그저 검은 바람이 한줄기 지나가는 정도라고나 할까.

 더 이상 생각을 하고 말 것도 없었다.

 그 인영이 사라진 곳으로 감천형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2, 3각(刻)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감천형은 커다란 소나무 가지 위에서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 가지 가운데 하나가 조금 꺾어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흑영의 신법은 실로 놀라워 그가 전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놓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젠 흔적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돌발 상황이 발생하였다.

 "으악!"

 "으아악……."

 갑자기 어둠을 뚫고서 참담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기에.

 나뭇가지가 출렁였다.

 감천형이 순간, 나뭇가지를 박차며 날아올라 그 비명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쏘아간 자리에서는 나뭇가지만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숲 속.

 어둠마저 숨을 죽였다.

 화산파에서도 한참을 올라온 높이.

 무성한 숲은 계곡과 같이 자리하며, 그 계곡을 타고 한 가닥 옥류(玉流)가 청랑한 소리를 내면서 아래로 흘러내린다. 그야말로 천하의 절경이라 할 경치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숲과 계곡이 어우러진 그곳, 그곳에서 단말마의 비명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사방에 널린 부상자들.

 어둠 속에서도 일견해 참혹한 모습이 역력하다.

 제각기 필적하기 힘든 가공할 힘에 휴지 조각처럼 구겨 처박힌 모습들…….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십여 명의 인원이 그렇게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지는 가운데에, 그들을 마치 장난감처럼 쳐 날리고 있는 것은 검은 흑포를 어둠의 나래처럼 휘날리고 있는 괴인이었다. 그의 체구는 당당했으며 일거수일투족은 마치 바다를 가르고 산을 허무는 듯한 위력이 있어 그를 공격하던 사람들은 연신 참담한 비명과 함께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주위에 널브러진 사람들은 모두 다 그런 과정을 거친 듯했다.

 감천형이 그 광경을 발견한 순간에도 한 사람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그를 알아본 감천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사람이 소림사의 장로(長老) 중 하나임을 알아본 까닭이다.

 "멈춰라!"

 흑포인이 공격하는 것이 구대문파 중의 사람임을 알게 된 감천형은 벽력처럼 소리치면서 흑포인을 향해 덮쳐 갔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흑포인은 아예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태도에 감천형은 노해 코웃음을 치면서 공격에 더 힘을 실었다.

 그의 일장이 웅장한 경력을 뿜어내면서 흑포인을 치려는 순간, 흑포인이 그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불꽃 같은 안광(眼光)이 강렬하게 그를 쏘아본다. 복면을 해서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복면 속에서 드러난 두 눈에서 쏟아지는 안광만으로도 그의 무공 수준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눈빛을 본 순간, 감천형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그 기세만으로도 자신이 상대하기 힘든 상대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쾅!

 맹렬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흑포괴인은 감천형의 장세를 피하지 않았다.

 감천형의 장세를 그대로 몸으로 받아낸 것이다.

 패왕신도라는 감천형의 별호는 그냥 붙여진 것이 아니었다. 천무만은 못하지만 덩치도 컸고, 천생의 신력(神力)도 타고난 터였다. 그럼에도 그 흑포괴인의 몸을 치자 마치 강철판을 친 듯했고 그 충격으로 오히려 손목이 부러지는 것 같았다.

 "윽!"

 그를 친 감천형이 나직한 신음과 함께 비틀 한 걸음을 물러서는 순간에 흑포괴인은 괴악(怪惡)한 외침과 함께 감천형을 향해 일장을 쳐왔다.

 쏵-!

 전광석화와 같은 일격이었다.

 감천형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흑포괴인을 공격한 그가 충격을 받고 주춤 하는 순간에 그 흑포괴인의 일장이 그를 쳐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그런 과정을 예상하고 공격한 것처럼 시기적절해 감천형은 허점을 몽땅 드러내고서 목을 내민 것과 같은 형국이 되고 말았다.

 펑!

 위급한 상황, 감천형은 사문의 건곤대라신공을 운기하여 양손을 교차, 흑포괴인의 장세를 막아냈다.

 그러나 여전히 팔목이 부러지는 듯한 충격.

 팡팡!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그의 발 밑에서 바위가 으스러지면서 돌 부스러기들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세찬 경기의 회오리가 그 돌 부스러기와 흙먼지들을 휘감아 올렸다.

 "……!"

 흑포괴인은 그가 자신의 일격을 막아내자 뜻밖인 듯 음산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성큼 한 걸음을 내딛는 사이에 그는 다시금 흑포를 펄럭이면서 감천형을 공격해 오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일련의 동작에서 이루어져 신속하기 이를 데가 없었으며 자세조차 바로잡지 못한 감천형은 막기는커녕, 피할 수조차 없었다.

 그의 얼굴에 경악과 불신이 한꺼번에 뒤엉켰다.

 채 이 초를 견디지 못하고 속수무책(束手無策), 그로 하여금 죽음을 기다리게 할 고수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니!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소리도 없이 옆에서 날아들어 흑포괴인의 목을 쳤다. 그 공격은 참으로 놀랍도록 신속무비하여 흑포괴인은 알고도 피하지 못했다.

 팡!

 폭음이 일며 흑포괴인이 그 충격으로 비틀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놀라운 무공과는 달리 그의 반응은 조금 느린 듯했다.

 하지만 날아든 흑영이 재차 그를 공격해 오자 두어 걸음 물러난 그는 이내 냉소를 치면서 손을 쭉 뻗어서 흑영을 맞아갔다. 기습을 당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사매!"

 그때서야 나타난 흑영을 알아본 감천형이 놀라 소리쳤다.

 정말로 나타난 흑영은 다른 사람이 아닌 독고경이었던 것이다.

 "안 돼! 그와 맞서지 마라! 그를 상대할 순 없다!"

 독고경이 정면으로 그와 맞서감을 보자 감천형이 놀라 소리쳤다.

 하나 독고경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서 일장을 쳐 흑포괴인과 맞서갔다.

 그 움직임은 실로 신속무비하여 보고도 피하기 힘들 정도였다. 바로 감천형을 패퇴시켰던 그 괴기(怪奇)한 일장이었다. 그녀의 장세는 놀랍도록 빠른 데다가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위력이 있어서 보고도 피하기 힘든 힘을 가졌다.

 하지만 상대는 그 일장에 격중당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았고,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악!"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면으로 격돌하자 독고경은 참담한 비명과 함께 훌쩍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선명한 선혈이 그녀가 날아가는 궤적을 따라 그어졌다.

 "사매!"

 감천형은 다급하여 사문의 뇌정도를 전개하여 흑포괴인을 덮쳐 갔다. 도저히 적수공권으로는 흑포괴인과 맞설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스팟-!

 감천형이 뇌정도를 전개하자 그 기세는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뇌정도는 밤하늘에 천둥이 치는 형상을 모방하여 만든 도법이다. 그 기세는 장대할 뿐더러 번갯불이 번뜩이듯 신속무비함이 특징이다.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무섭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한 뇌정도법을 감천형이 다급하여 전개하자 흑포괴인이 독고경을 쳐 날리는 순간에 이미 감천형의 패도는 흑포괴인을 덮쳤다. 게다가 그 위력은 이미 조운촌에서와 판이했다. 한효월과의 대화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쿠콰콰콰…….

 막 독고경을 쳐 날린 흑포괴인은 감천형의 뇌정도에서 발출되는 우렛소리에 놀란 듯 흘낏 돌아보다가 눈앞으로 날아드는 뇌정도를 보곤 괴이한 빛을 떠올렸다.

 "……!"

 하지만 그것도 일순간, 그는 어깨를 움찔하는 사이에 상반신을 미미하게 흔드는 가운데 일장을 쳐내 뇌정도에 정면으로 맞서왔다.

 '아무리 그래도 맨손으로 내 뇌정도에 맞서려 하다니?'

 상대의 그러한 광오(狂傲)함에 감천형은 이를 갈면서 전력을 기울여 뇌정도를 쪼개어냈다. 그의 뇌정도는 원래 강렬무비했는데, 한효월에게 가르침을 받은 다음부터 무르익어 이젠 어떤 고수라도 함부로 볼 수 없었다.

 파파팡!

 흑포괴인의 일장과 감천형의 뇌정도는 정면으로 맞닥뜨리자 강렬한 음향을 일으켰다.

 사방으로 경기가 폭장(暴張)되어 나갔음은 물론.

 "장세에서 강기를 일으킬 정도라니!"

 감천형의 신음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그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러나 흑포괴인도 그가 나타난 이래 처음으로 주춤 전진하던 기세를 멈추었다.

 하나 그것은 찰나일 뿐.

 그는 이내 복면 속에서 드러난 눈에 무서운 살기를 드러내면서 성큼 감천형의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어둠의 나래처럼 펄럭이는 흑포를 휘저으며 그 손은 강렬한 기세로써 다시금 감천형에게로 날아들고 있었다.

 과아아∼

 감천형은 자신을 향해 밀려드는 가공할 힘에 전율해야 했다.

 상대는 정말 막강했다.

 저토록 강한 자는 감천형이 처음 보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사부인 건곤무적 독고해도 생전에 저러한 위세는 보이지 못했었다.

 "정말 대단하군! 어디 나 감 모의 목을 가져가 보라!"

 감천형이 소리치면서 전력으로 적에게 맞서갔다.

 그가 물러선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을 판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설사 그것이 미친 짓이라 할지라도 그는 적과 맞서지 않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땅!

 마침내 감천형의 손에 들린 패도가 부러졌다.

 감천형의 입에서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그의 신형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흔들거리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경악(驚愕)으로 눈을 찢어질 듯이 부릅뜨고서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앞에 버티고 선 흑포괴인은 참으로 멀쩡했다.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흑건 한 조각이 베어진 것뿐, 겨우 한 걸음을 물러나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도 감천형의 힘에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어디선가 끊어질 듯 이어질 듯 기이한 피리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감천형의 일격을 간단히 꺾어버린 그는 재차 앞으로 덮쳐 오다가 그 피리 소리에 문득 공격을 멈추었던 것이다.

 "당신…… 당신의 그 무공은 어디에서 배운 것이오?"

 넋을 잃은 듯 흑포괴인을 바라보고 있던 감천형이 문득, 쥐어짜듯 입을 열어 물었다.

 피리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던 흑포괴인은 감천형의 물음에 힐끗 그를 보고는 마치 바람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멈추시오!"

 그가 떠나는 걸 보고는 갑자기 감천형이 고함쳤다.

 얼마나 격동했는지 그의 고함과 함께 내상이 울려서 다시금 선혈이 폭포처럼 터져 나왔다.

 그러나 흑포괴인은 바람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진 다음이었다.

 감천형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아니면 충격이 너무 큰 것인지 그는 넋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흑포괴인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떻게 본 문의 건곤대라신공을…….'

 그때, 나직한 신음과 함께 나가떨어졌던 독고경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감천형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사형!"

 놀람에 찬 음성이 다급히 들려와 그를 깨웠다.

 좌백이 어둠을 뚫고 무림맹의 고수들과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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