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三首 신룡출운(神龍出雲) (45/113)

第三首  신룡출운(神龍出雲)

-신위를 뽐내다

일신의 무공(武功)은 세상을 덮을 만하건만…….

 쨍!

 그의 패도를 막던 검이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부러져 나갔다.

 "으악!"

 검이 부러지면 그 주인이 성할 리 없다.

 그를 막던 검수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쨍쨍…….

 도명(刀鳴)이 호랑이가 울부짖는 듯하고 도광(刀光)은 천둥 번개가 작렬하는 것만 같았다. 가히 만부막적의 기세로 감천형의 패도는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쳐부수면서 전진하고 있었다. 누구도 그를 막지 못했다.

 "뇌정도로군……."

 천추성주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이 싸늘히 가라앉았다.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모양이니…… 소원대로 해주지."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목적하고 왔던 일은 완전히 무산된 상태였다. 거기에 감천형에게 기습을 당한 꼴이 되어서 부하들이 채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서 피를 뿌리고 있으니…… 어찌 참을 수가 있겠는가.

 감천형의 앞을 가로막던 자들이 썰물처럼 갈라졌다.

 "좋아, 드디어 직접 나타났다는 건가? 와라!"

 감천형이 껄껄 웃으면서 앞으로 성큼 한 걸음을 디뎠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군……."

 천추성주가 냉소를 터뜨렸다.

 "무고한 사람들을 그처럼 참혹하게 죽이고서도 네놈들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이더냐? 내 하늘을 대신하여 벌을 내려야겠다!"

 감천형이 코웃음 치면서 수중의 패도를 앞으로 무찔러 냈다.

 패도가 밤하늘을 가르며 떨어지는 번갯불처럼 천추성주를 덮쳐 갔다.

 "제 사부의 시체를 도적질해 간 자들이 누군지는 관심도 없는 모양이군. 멍청한……."

 천추성주가 코웃음을 흘렸다.

 그의 음성은 크지 않았지만 감천형 정도의 고수가 그 말을 듣지 못할 리가 없다. 더더구나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바짝 신경이 가 있는 판이니 그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러자 앞으로 찔러가던 그의 패도에 미세한 틈이 생겼다.

 찰나, 가공할 빠르기의 섬광(閃光) 한줄기가 그 틈을 파고들어 왔다.

 "윽!"

 감천형이 바늘에 찔린 사람처럼 튀듯 뒤로 물러났다.

 가슴팍 옷자락이 베어져 펄럭이고 있었다. 물러나는 그의 궤적을 따라 선연한 핏방울이 허공을 수놓았다. 중한 내상은 아니고 스친 정도였지만 그의 반응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그의 심장은 이미 두 토막이 나 있을 터였다.

 "비겁한……."

 감천형이 이를 악물자 천추성주가 냉소했다.

 "생사결(生死訣)에서 비겁이라? 하하…… 한심한, 그러니 무림맹이 그처럼 지리멸렬하여 화산으로 혼비백산, 도주한 것이겠군."

 "닥쳐라!"

 감천형이 고함과 함께 그를 덮쳐 갔다.

 "죽고 싶다면 죽여주마!"

 천추성주의 고함 소리와 더불어 두 사람의 대결은 시작되었다.

 '감 사질의 무공이 그간 많이 증진되었군…….'

 요광성주의 뒤에서 그것을 보는 한효월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면 천추성주에게 쉽게 질 염려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기습으로 일시지간 득세했던 무림맹의 고수들은 이미 기선의 효(效)를 상실한 상태였다.

 거기에 강령루의 흑포인들은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다.

 천추성주의 눈에 놀람이 서렸다.

 그는 손을 쓰면서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십 초 이내에 감천형의 손에서 위력을 발하는 패도를 떨어뜨릴 작정이었었다. 그런데 이미 이십 초가 지난 다음인데도 감천형의 패도는 여전히 막강한 위세로써 그에게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놈의 무공이 이 정도라니…… 과연 건곤무적의 대제자답다. 자칫 그대로 버려두었다가는 호랑이가 되겠구나!'

 암중에 감탄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심의 중얼거림일 뿐이다. 그의 눈에는 살기가 돌았고, 날카로운 기세로 감천형의 패도와 맞서던 검이 갑자기 신랄하기 이를 데 없이 돌변했다.

 그때였다.

 흑포괴인의 주위에 늘어서 있던 흑포인들이 갑자기 어둠의 너울처럼 훌훌 날아올라서 무림맹의 위사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위세는 실로 가공했다.

 그 움직임이 질풍과 같았고 무림맹의 위사들을 덮치자마자 잇달아 무림맹의 고수들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런 괴물들이……."

 화산의 고수인 천매검객(穿梅劒客) 하주(河周)가 놀라 검을 마구 흔들었다.

 화산비전의 검세를 시전해 낸 검은 여지없이 달려들던 흑포인을 난도질했다.

 땅! 따당…….

 그러나 흑포인의 몸에 검이 부딪치자 거기서 일어난 음향은 너무도 어이없게도 고막을 찌르는 쇳소리. 놀랍게도 그들의 몸은 강철과도 같아서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몸으로 검을 받아낸 흑포인이 손을 뻗어왔다.

 가공할 위세의 일격.

 "크으으……."

 검이 부러지면서 화산파의 장로 가운데 하나인 하주가 뒤로 물러났다.

 사방에서 흑포인들이 죽음의 너울처럼 난무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라고 할 만했다.

 무림맹의 고수들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목을 내놓아라!"

 천추성주와 싸우던 감천형이 갑자기 천둥처럼 소리치면서 천추성주를 엄습해 갔다.

 주변의 상황이 돌변하자 도세가 일변했다.

 그런데 그것은 놀랍게도 방어의 초식이 전혀 없다. 오로지 공격일변도. 그러니 그 위력은 방금 전보다 배는 강력하여 주위가 온통 가공할 도기(刀氣)로 가득 찼다.

 "미친……."

 천추성주의 얼굴에 냉소가 스쳐 갔다.

 그대로 가도 그는 몇 초 이내에 감천형을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저렇듯 무리를 한다면 결과는 뻔했다. 하지만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그도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할 터였다. 너 죽고 나 죽자는 그런 타법에 맞선다는 것은 어리석었다.

 그는 냉소하며 옆으로 반걸음 물러났다.

 얼핏 보면 옆으로 물러나 상대의 예봉을 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신형은 옆으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슬쩍 회전하면서 그 서슬에 한줄기 섬광이 가공할 속도로 감천형의 도광을 헤집고 날아갔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폐관수련한 천홍일예(穿虹日霓)의 일검.

 스파앗!

 검이 허공을 갈랐다.

 "이……."

 천추성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 상상할 수 없게도 감천형의 일초는 허초였던 것이다.

 그는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듯 보이고는 그 순간 패도를 거두어 전세를 관망하고 있던 요광성주를 공격해 가버렸다.

 그러니 천추성주의 일격은 헛되이 허공을 갈랐을 뿐.

 그의 검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에 감천형의 패도는 가공할 속도로 이미 요광성주의 면전에 이르고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 요광성주는 대경실색했다.

 전혀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던 까닭이다.

 감천형의 패도는 무서운 기세로 요광성주를 갈랐다. 그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질풍과 같아서 요광성주는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뒤에서 한 사람이 바람처럼 뛰쳐나오면서 감천형의 패왕신도에 맞서갔다.

 바로 그녀의 뒤에 서 있던 한효월이었다.

 쨍!

 날카로운 불꽃이 튕겼다.

 그가 손을 쓴 시기는 매우 적절해서 거의 일도양단의 기세로 쏟아져 내린 감천형의 패도를 막아낼 수가 있었고, 한효월이 신음과 함께 주춤, 뒤로 물러나는 순간에 요광성주는 틈을 얻어 몸을 피할 수가 있었다.

 "으하하하! 다시 받아봐라!"

 감천형은 요광성주의 부하로 분(粉)한 한효월이 자신의 일도를 막아내자 노하여 천둥처럼 웃으면서 연달아 삼도를 쳐냈다.

 쏵! 쏴쏴…….

 일도보다 이도가 무섭고 마지막 삼도는 첫 번째 도광이 이는 순간에 오히려 그것을 앞질러 제삼도가 먼저 쳐낸 제일도처럼 보였다. 그 의미는 그 공격이 그만큼 무섭게 빠르다는 것이었고, 옆에서 보던 요광성주의 안색이 놀라 창백해질 정도였다.

 그 공격이 얼마나 무서운지 감천형의 수중에 들린 패도는 거의 찰나간에 한 가닥 도광으로 화해 한효월을 무찔러드는데, 얼핏 보기에 감천형의 몸에서 새하얀 번갯불이 튕겨져 나가 한효월의 몸에서 작렬하는 것만 같았다.

 쨍! 쨍그렁…….

 누가 봐도 힘에 붙이는 형국.

 마치 술에 취한 듯 거의 일직선으로 물러나던 한효월은 마지막 제삼도가 제일, 제이도와 같이 그를 향해서 쏟아지자 더 이상은 견디지 못했다.

 고막을 찌르는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그의 수중에 있던 장검이 그대로 산산조각으로 부서졌고 감천형의 패도는 그대로 한효월을 쳐버렸다.

 '맙소사!'

 그들의 관계를 너무도 잘 아는 요광성주는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상황이 너무도 전격적이라 한효월의 신분을 감천형에게 알려줄 만한 여유도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으악!"

 외마디 비명.

 보통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직접적으로 베이지 않는다면 치명적인 타격을 받지 않는다.

 특히나 들고 있던 검이나 도가 상대의 무기에 의해 부서진다면 일단 그 상태에서 힘이 대부분 상쇄되므로 그로 인해 상처를 입는 것은 예외라 할 수 있었다. 검이나 도가 날아들어 직접 상처를 입힌다면 몰라도.

 하지만 감천형의 패왕신도 하에서 펼쳐지는 뇌정도는 달랐다.

 검이 부서지는 순간에 가공할 경기가 패왕신도에서 일어나 그 패도를 막아내던 한효월을 그대로 쳐버렸던 것이다.

 그 타격은 가히 치명적이라 한효월은 피를 뿜어내면서 그의 뒤쪽으로 가지런히 자리한 정원수 뒤쪽으로 가랑잎처럼 날아가 버렸다.

 말 그대로 한칼에 한효월을 날려 버린 감천형은 조금도 쉬지 않고 뒤로 물러난 요광성주를 덮쳐 갔다.

 이 일련의 상황은 긴 듯했지만 실제로는 요광성주를 덮쳐 가던 연장선상에 있어서 찰나간에 벌어진 일에 불과했다.

 "흥!"

 요광성주를 덮쳐 가는 감천형의 귓전에 북풍(北風)과도 같은 냉소가 들려왔다.

 감천형은 보지 않아도 그것이 뒤에 남은 천추성주의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와 싸우다가 다른 사람을 공격하니 허탕을 친 그가 그냥 있을 리 만무다.

 무서운 검기가 느껴졌다.

 "으악!"

 "으아아……."

 그때 주위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

 패도를 돌려 천추성주와 상대하려던 감천형은 옆으로 튕기듯 물러나 상대의 예봉을 피하면서 주위를 둘러보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적이 믿기지 않도록 강했던 것이다.

 좀 전부터 발동한 그 흑포괴인들…….

 그들은 무림맹의 그 누구도 상대해 내지 못했다.

 놀랍게도 그들의 몸은 도검이 불침이라 무림맹의 고수들은 이미 공포에 질린 상태였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죽어라 공격을 해도 상대의 몸에 흠집조차 낼 수 없으니…….

 그것은 악몽(惡夢)이었다.

 검을 휘둘러도 칼을 휘둘러도, 바위를 두부처럼 으스러뜨리는 막강한 장세(掌勢)에도 흑포괴인들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피하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날아드는 칼날을 팔뚝으로 쳐내는 것이 그나마 막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었지만 그 다음에는 공격한 사람의 비명이 처절하게 뒤따랐다. 그 팔뚝은 무림맹 위사들의 검을 간단히 쳐내고는 그들에게 달려들어서 그 가공할 팔뚝으로 그의 머리를 치니, 위사들의 머리는 말 그대로 두부처럼 으깨어져 뇌수를 흘리며 참혹하게 죽어가야 했다.

 이 자리에 나타난 흑포괴인들의 숫자는 열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구름 사이로 겨우 드러난 희미한 달빛 아래서 흑포를 펄럭이면서 날아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공포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나마 그 우두머리인 강령루의 제이당주라는 자는 나서지도 않았다.

 무림맹 위사들의 사기는 이미 땅에 떨어진 다음이었다.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으니 싸울 마음이 날 리가 없는 것이다.

 그 광경을 본 감천형은 천추성주를 버려두고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막 그 뒤를 따르려던 천추성주는 냉소를 흘리며 그를 쫓지 않았다. 네가 과연 그들을 어떻게 상대하려는지 보겠다는 심산.

 "으으……."

 무림맹의 호맹위대. 열 명의 위사를 책임지는 십장(什長)인 천운검객(穿雲劒客) 마운(馬雲)은 공포에 질린 빛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의 손에 들린 천운검은 이미 반 토막이었다. 그의 눈앞에서 죽음의 너울을 펄럭이는 흑포인을 공격한 대가였다. 연달아 칠 검을 공격했고, 그 공격은 하나도 빗나가지 않았지만 돌아온 것은 부러진 검과 충격에 덜덜 떨리는 팔목뿐.

 그의 칠 검에 흑포를 갈가리 찢긴 혹포괴인은 음산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면서 그에게 덮쳐 오고 있었다. 천운검객이 사력을 다한 칠 검은 그가 다가서는 기세를 약간 늦추었을 뿐이었다.

 "이 괴물! 같이 죽자!"

 천운검객 마운은 이를 갈면서 앞으로 반 동강의 검을 쳐냈지만 흑포괴인은 간단히 그의 검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 검은 그의 손아귀에서 수수깡처럼 와작! 부서져 내렸다.

 마운은 그것과 함께 그의 머리를 잡아오는 흑포괴인의 손을 보았다.

 보면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공포에 질린 데다가 그들의 움직임은 괴기하여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절망과 공포, 분노가 그의 부릅뜬 눈에 복잡하게 뒤엉키면서 일었다.

 바로 그 순간이다.

 "감히! 물러나지 못할까!"

 벼락 치는 호통과 함께 막강한 힘이 날아들어 흑포괴인의 등을 쳤다.

 쾅!

 폭음과 함께 흑포괴인이 날아갔다.

 눈앞에 감천형이 나타난 것을 본 마운의 눈에 감격과 안도의 빛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감천형을 향해서 좌우에서 날아드는 흑포괴인들을 보고 안색이 흙빛이 되고 말았다.

 쾅, 콰앙!

 감천형이 진기의 소모를 무릅쓰고서 도강을 일으키자 잇달아 폭음이 일고 흑포괴인들이 산지사방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쇳덩이도 부서졌을 타격이건만 흑포괴인들은 나가떨어졌다가 다시금 일어나 그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제천교의 진정한 힘은 강호상에 나오지도 않았다던 요광성주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들 열둘은 일 개 문파를 괴멸시키고도 남을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서른이 넘던 무림맹의 위사들은 이미 열 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모두 내 곁으로!"

 감천형이 패도를 휘둘러 흑포괴인을 물리치면서 고함쳤다.

 그가 패도를 휘두르면서 앞으로 내달리자 흑포괴인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이 모여 길을 막자 그것은 철벽과도 같았다.

 마치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라고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길을 좀 비켜주겠나?"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감천형의 앞을 가로막던 흑포괴인 둘이 한꺼번에 옆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죽음의 사자와 같았던 흑포괴인들.

 그들을 한꺼번에 둘이나 날려 버리면서 나타난 사람은 백의에 관옥과 같은 얼굴을 가진 청년이었다. 잘생겼다는 표현보다는 청수(淸秀)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수려한 얼굴을 가진 백의청년은 일거수에 그 무서운 흑포괴인 둘을 날려 버리고는 감천형의 앞에 섰다.

 "사숙!"

 감천형이 반가움에 떨리는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청년, 한효월이 미미한 웃음을 입가에서 스쳐 보내며 말했다.

 "긴말은 나중에 해야겠군!"

 말과 함께 그는 수중에 들고 있던 검을 앞으로 쳐냈다.

 그의 수중에 들린 검에서 눈부신 검광이 번개처럼 일어 옆에서 공격해 오던 흑포괴인을 맞아갔다.

 그 섬광(閃光)을 보자 지금까지 방어는 생각지도 않던 흑포괴인이 손을 들어 그것을 막으려 했다.

 서걱!

 하지만 섬뜩한 음향이 일면서 그의 손이 무 조각처럼 두 동강이 나는 순간에 한효월의 검은 이미 그의 목을 긋고 있었다.

 목이 장난처럼 굴러 떨어졌다.

 그 흑포괴인의 목을 베어낸 한효월은 신형을 빙글 반 바퀴 돌리는 순간에 어느새 자신의 앞에 도달한 흑포괴인을 향해서 검을 휘둘렀다.

 법(法)도 없고 식(式)도 없어 보이는 검세였으나 실제로는 그 상황에서 가장 적절했고 검이 움직이기에 불필요한 동작이 없었다.

 검광이 번뜩이는 순간에 흑포괴인의 입에서 괴이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뒤를 이어 그의 상체와 하체가 따로 분리되면서 쓰러졌다.

 "저럴 수가!"

 무림맹의 고수들은 일순 멍청해져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이 놀라고 있는 사이에 다시 두 명의 흑포괴인이 목을 잃어버리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영원히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흑포괴인들, 그처럼 공포스럽던 흑포괴인들이 그처럼 간단히 쓰러지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휘이익!

 고막을 찌르는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울리자 흑포괴인들이 바람처럼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난 곳은 바로 강령루의 제이당주의 옆. 휘파람을 분 것도 그였다. 그가 흑포괴인들을 불러들인 그 순간에도 두 명의 흑포괴인들이 목을 잃어버리고 땅바닥에 처박혔다.

 "청룡장에서 본 그자들이다. 마왕철골신을 연성한……."

 한효월이 감천형의 앞에서 중얼거렸다.

 그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는 감천형만이 알 수 있었다.

 "살아 있었군……."

 그를 알아본 천추성주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중얼거림에 따라 그를 따라온 제천교의 고수들이 좌우로 퍼져 나갔다.

 "하하…… 불만인가? 길인(吉人)은 천상(天祥)이라 하니 잡귀가 나를 해하는 것은 마음대로 되지 않더군. 여기서 시험해 볼 텐가?"

 한효월이 낭랑히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가 채 끝나기 전에 한효월의 손에서 맹렬한 파공음을 동반한 채로 검이 날았다.

 쏴아아악-!

 그 검은 찰나간에 허공을 가로지르면서 천추성주를 엄습했다. 그것과 함께 감천형은 무림맹 고수들을 이끌고 장원 밖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이 일사불란함은 그가 이미 한효월과 모종의 묵계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감히 수작을 부리다니…… 오늘은 놓치지 않겠다!"

 천추성주는 노해 고함을 치려고 했지만 찬란한 검광으로 화한 검이 눈앞에 들이닥치는 것을 보자 감히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쨍! 쨍…… 쨍그렁!

 용과 호랑이가 한데 어울려 아우성을 치는 듯한 굉음이 일면서 불꽃 같은 광채가 그의 앞에서 일어났다.

 그가 한효월의 검을 쳐내면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는 한효월 또한 감천형의 뒤를 따르고 있음을 보자 코웃음 쳤다.

 "그까짓 비검(飛劒)으로 나를 막……!"

 하지만 그는 채 말을 맺지 못했다.

 가공할 기세가 그의 뒤에서 그를 엄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놀랍게도 방금 그가 쳐 날린, 한효월이 던져 낸 그 검이었다.

 한효월이 그를 돌아보면서 낭랑히 웃었다.

 "비검과 어검을 구분하지 못하니 죽어도 후회는 없으렷다?"

 그가 낭랑히 웃는 것과 함께 그의 손에 이끌린 검이 천추성주를 덮쳤다. 그와 검은 무려 7, 8장이나 떨어져 있었다.

 검을 다루는 사람들에게는 꿈에도 그리는 경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검을 자신의 마음으로 부리는 어검(御劒)의 경지다.

 검을 처음 다루면 그 다루는 법(法)을 익히게 된다. 법과 길[路]을 따라 검을 익히면서 마침내 그 검은 술(術)의 경지를 벗어나게 되니 검에서 기(氣)가 생기며, 그 무형의 검기(劒氣)를 유형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검도 상승(上乘)의 검강이다. 검기의 결정이라 할 수 있는 검강은 부딪치는 모든 것을 파괴할 힘을 가졌다. 그러한 경지에서 검수는 비로소 검과 자신을 하나로 하는 신검합일(身劒合一)에 이르게 된다. 검이 나이고 내가 바로 검이 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검과 검수가 서로 심령상으로 연결이 되는 상태가 되면, 비로소 검의 궁극이라 불리는 어검을 구사할 수가 있게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바로 기로써 검을 다루는 기어검(氣馭劒)과 검이 검수와 하나가 되는 말 그대로의 어검(御劒)이다. 둘의 차이는 기어검은 검수의 능력에 따라 그 검의 위력이 미치는 범위가 한정되지만, 어검술은 그 범위가 무한하다. 십 리 백 리도 능력만 닿는다면 날아가 상대의 목을 취할 수 있으며, 전설상의 검선(劒仙)은 바로 이 어검을 성취하면서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어검이 단순히 검을 던지는 비검과 구분되는 점은 바로 그렇듯 자유자재로 허공에서 검의 조종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천추성주는 한효월이 자신에게 검을 던져 내자 도주할 시간을 벌기 위한 것으로 지레짐작을 했었다.

 하지만 검이 불덩이와 같은 가공할 위세로 날아들자, 그는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검이 무서운 것은 그 위력이 일반 검세와 천양지차의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쩡! 쨍그랑…….

 천추성주가 몸을 돌리면서 한효월의 이끎을 받는 어검을 향해서 검을 쳐내자 맹렬한 폭음이 일면서 가공할 검광이 불꽃처럼 미친 듯 일었다.

 일진 회오리바람이 이는 가운데 천추성주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무공이 제아무리 발군이라도 미처 방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검을 상대하고 무사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하…… 그 정도로 끝날 것 같은가?"

 한효월이 웃으며 손을 뒤집었다.

 쏴아아앙-!

 그의 손짓에 따라 검이 빙글 회전하면서 검광이 무섭게 일었다. 찬란한 검광의 덩어리가 밤하늘의 유성이 떨어지듯, 물러나고 있는 천추성주를 덮쳐 갔다.

 눈앞으로 날아드는 검광을 본 그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그야말로 명재경각의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바로 그 순간, 검은 그림자가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한효월에게로 날아들었다.

 그의 공격은 가공할 위세를 동반하고 있어서 한효월은 천추성주를 죽일 수 있는 호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죽인다 할지라도 자신의 목숨과 바꿀 수는 없는 일인 까닭이다.

 하지만 그때, 정말 누구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한효월이 천추성주를 덮치던 검세를 철회하지 않은 것이다.

 한 손으로는 어검을 계속해 시전하여 천추성주를 공격하면서 다른 한 손을 뻗어내어 날아드는 검은 그림자, 흑포에 긴 머리카락이 어둠의 너울처럼 펄럭이는 강령루의 제이당주를 막아갔다.

 그의 손가락이 부챗살처럼 일제히 펴지면서 붉은 빛이 번쩍였다.

 '세상에……!'

 그 광경을 보고 요광성주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너무 무모했던 것이다.

 혼자서 양대고수를 상대하려 하다니! 그것도 한 손으로 한 사람씩이라니!

 파파팟!

 펑! 퍼퍼퍽-

 검광이 크게 일고, 돌개바람이 일었다.

 쨍그렁!

 급급히 검을 쳐내 어검술을 막아내던 천추성주의 검이 견디지 못하고 반 동강이 나버렸다.

 "크윽……."

 검광이 그를 덮쳤고 그에게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흑포괴인, 강령루의 제이당주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허공에서 곤두박질치면서 땅바닥으로 떨어져서 가슴을 움켜쥔 채로 한참 동안이나 일어나지도 못했다. 참으려 해도 참아내지 못한 신음이 절로 그의 입을 뚫고서 새어 나왔다.

 "크으윽…… 도, 도대체 이게 무슨……."

 강령루의 제이당주가 가슴을 움켜쥔 채로 이를 갈았다.

 고통이 극심한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이를 갈고 있었다. 뿌드득 소리가 십 리 밖에까지 들릴 정도로 그는 이를 갈면서 전신을 덜덜 떨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반대쪽에서 검이 반 동강으로 부러진 천추성주의 복면 앞이 붉게 물들고 있어서 그가 단순히 검만 부러뜨린 게 아니라 내상까지 입은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 광경에 요광성주는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사이에 믿기지 않게 강해졌군……."

 그녀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처음 나타날 때부터 그는 강자였다.

 하지만 이런 정도는 아니었다.

 천추성주는 다른 제천칠성과는 격이 틀린 고수였다.

 제천칠성은 누가 더 낫다고 하기 힘들 정도로 각자의 배움이 틀렸다. 나름대로의 특기가 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들 몇이 달려들어도 천추성주를 당할 수 없었다.

 그런 고수인 그가…… 더더구나 강령루의 제이당주라면 거의 괴물과 같은 존재였다. 들은 바에 의하면 전신이 도검불침이며 어떤 상처를 입어도 숨만 붙어 있으면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절세의 고수 둘을 간단히, 그야말로 일거수에 일패도지(一敗塗地)하여 나가떨어지게 만들어놓고 한효월은 유유히 그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낮게 쿨럭이던 천추성주가 일그러진 신음을 토해냈다.

 한효월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어둠을 뚫고 들려오고 있었다.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지……. 그러나 다음에는 오늘처럼 돌려보내지 않을 테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웃음소리는 여운을 끌면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 개자식…… 그냥 두지 않겠다……."

 천추성주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는 천선성주나 요광성주에게 명하여 한효월 등의 뒤를 쫓게 하지 않았다. 감히 그러지를 못한 것이다. 그의 눈에는 은은히 공포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현재의 상황을 보자면 이 자리의 그 누구도 한효월과 맞서서 그 일격을 감당할 사람이 없는 판이었다. 그러니 누구를 시켜서 그를 쫓게 할 것인가.

 그의 부상은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강령루의 제이당주가 입은 부상은 거의 치명적임을 천추성주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저렇듯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본 것은 틀림없었다.

 한효월은 강령루 제이당주의 무공이 사악하여 쉽게 상대하기 힘든 것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서하곡에서 수련해 낸 수인지력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 수인지력은 양화지기의 정화(精華)로써 강령루의 제이당주가 수련한 사공(邪功)에는 가히 극성이었다. 그는 지금 그간 수련했던 무공이 파괴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   *   *

 한효월과 감천형은 남은 무림맹의 고수들을 이끌고 어둠 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악몽과도 같은 장원은 그들의 뒤로 멀어지고 있다.

 "사숙, 괜찮으십니까?"

 한효월의 곁으로 다가가 보조를 맞추면서 감천형이 물었다.

 달리고 있는 한효월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본 까닭이다.

 "괜찮아. 우선은 이 자리를 벗어나고 보지. 혹시라도 놈들의 원군이 오거나 뒤를 따르는 자들이 있을런지도 모르니."

 한효월이 낮게 대꾸했다.

 '부상을 당하셨습니까?'

 감천형은 굳은 얼굴로 은밀히 전음으로 물었다.

 "그렇지는 않아. 잠시 쉬면 회복될 거야. 무리하게 공력을 운용해서일 뿐이니까."

 한효월이 답했다.

 말은 간단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효월의 얼굴은 창백했고 감천형이 보기에 이상할 정도로 서두르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보여준 무위라면 그 자리에서 제천교의 모든 고수들을 일거에 멸할 수도 있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쫓기듯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는 누가 쫓아올 것을 염려하듯이 전력을 다해서 그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한효월은 그 장원에서 이십여 리가량을 벗어나자 사람들을 쉬게 하고 자신도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역시…….

 사람들이 암암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절세의 무공을 발휘하여 그 막강한 고수 두 사람을 한꺼번에 패퇴시켰지만 그 자신도 성하지 못했구나……. 그래서 이렇듯 급하게 그 자리를 벗어났구나. 라는 의미다.

 한효월이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반 시진 정도가 흐른 다음이다.

 그는 눈을 뜨자 감천형이 굳은 얼굴로 자신의 곁에 서 있음을 보고 그가 운기조식에 들어간 다음에 그를 지켜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 때문에 쉬지도 못한 모양이로군."

 "상세가 심하십니까?"

 감천형의 물음에 한효월은 미소했다.

 "이젠 괜찮아. 난 조금 무리를 했을 뿐이지만 저들은 타격이 좀 있겠지."

 그의 말은 별것이 아닌 듯했지만 기실 당시의 상황은 엄중했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추격해 왔다면 한효월은 앉아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으리라.

 그가 그 자리를 떠난 것은 결코 부상을 당해서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마침 고질이 발작하여 전신의 힘이 산실(散失)되어버린 상황이었던 것이다.

 무리를 해서 그 자리를 벗어나고, 죽을힘을 다해서 이십여 리를 벗어나긴 했지만 운기조식에 들어갈 때, 그는 거의 혼수상태였다. 쉽게 말해서 그는 운기조식이 아니라 고질의 발작이 해소되기를 기다린 셈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러한 사실을 밝힐 필요는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그 자리에……."

 한효월의 얼굴에 다시금 혈색이 도는 것을 본 감천형은 내심 안심이 된 듯 그를 향해서 물었다.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식조차 없어서 백방으로 찾던 그가, 갑자기 위기의 상황에 그 자리에 나타나다니……

 더구나 난데없이 전음이 날아들어 자신을 치라는 말과 함께 한효월이 그의 손에 의해서 날아가 버린 것까지 의문투성이일 수밖에 없었다.

 "좀 알아볼 것이 있어서…… 그보다는."

 한효월이 말머리를 돌렸다.

 "사질은 어떻게 그곳을 알고 온 건가?"

 한효월의 질문에 감천형은 간단히 상황을 정리했다.

 그의 말에 한효월의 안색이 굳어졌다.

 "거기에…… 사형의 유체를 도적질해 간 자들이 있었다는 건가?"

 "그럼,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얼떨떨해서 감천형이 눈을 꿈벅거렸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싶은 듯 저 멀리 어둠을 찢고 아침 해가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이 있는 자리는 숲이 우거진 상태에서 주위를 내려다볼 수 있는 요지였다. 눈 아래로는 아직은 어둠 속에서 출렁이는 강물까지 내려다보인다.

 그 와중에도 한효월은 그냥 자리를 잡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가……. 비적(秘敵)이라는 것이 그런 뜻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의심했던 제삼의 힘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들은 이미 제천교와 충돌하고 있었다는 의미로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그렇기에 제천교가 함부로 발동을 하지 못했었다. 라는 상황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비적이라니요?"

 그 말의 뜻을 알 리 없는 감천형이 물었다.

 한효월은 잠입하여 들었던 내용을 간단히 그에게 요약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적이 아니라는 뜻입니까?"

 "나도 단정하기 힘들군. 적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사형의 유체를 가져갔는지……."

 한효월이 말끝을 흐렸다.

 묘한 상황이다.

 적아난분(敵我難分)의 상황이었다.

 "화산대회 때문에 눈코 뜰 새가 없었는데…… 아무래도 저들에 대한 조사를 적극적으로 해봐야겠군요. 어쩌면 현재 국면에 대한 어떤 새로운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진 장문인과 한번 잘 상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군."

 "맞습니다. 저들에 대한 조사를 해서 그들의 근거지까지 알아냈으니 뭔가 더 알고 있을런지도 모르겠군요."

 말을 하던 감천형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그럼, 사숙께서는 저와 같이 가지 않으실 겁니까?"

 한효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조금 더 알아볼 일이 있어서……."

 "곧 화산대회가 열릴 겁니다. 예상보다 규모가 커져서 구대문파를 위시하여 각 문파들이 다 모이는 일장 성회(盛會)가 될 것 같은데, 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대회 전에는 갈 생각이네."

 "알겠습니다."

 이미 한효월의 능력을 깊이 믿고 있는 감천형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사질녀는?"

 "예. 화산의 경치가 좋아서인지 화산파의 여제자와 잘 어울리고 가끔 놀러도 다니고 그러는 듯합니다. 기분이 좀 좋아져 보입니다."

 "다행이군. 그 외에는?"

 "유념하고 있지만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아, 아닙니다."

 감천형이 어울리지 않게 어색하고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매일 화산마루에 올라 누굴 기다리는 것을 말하기가 묘한 구석이 있어서 입을 닫아버린 것이다. 농담도 아니고 자신의 사숙 앞에서 그런 말을 하기는 어려운 것이 그의 성정(性情)이었다.

 "내가 말한 대로 사질녀를 잘 살피도록. 분명히 누군가가 그녀와 접촉을 할 테니,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해. 그녀의 몸에는……."

 한효월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무슨 다른 금제(禁制)라도?"

 "아니야. 지금은 그대로 두는 게 좋을 것 같군. 어쨌든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는 점은 명심하게. 그리고 여기서의 뒷조사는 일단 내가 해볼 테니…… 사질은 화산으로 돌아가서 대책을 강구토록 하지? 적이 너무 강해서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낭패를 볼 수가 있을 거야."

 한효월은 독고경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서 과연 어떤 일이 파생될 것인지는 천기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로서도 미처 상상치 못했다.

 그가 요광성주에게서 들은 제천교 내부 사정을 알려주자 감천형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럼 그 흑포괴인들이 제천교 총단의 삼루 가운데 하나인 강령루에서 나왔다는 겁니까?"

 "그들 가운데 일부인 것 같아."

 "큰일이군요. 적이 그렇게 강하다면……."

 감천형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림맹의 고수들은 이미 독고해가 쓰러지면서 대다수가 사라진 상황인데, 적의 힘은 갈수록 강대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구대문파의 힘은 아직 온전하다는 것 정도일까.

 그들의 대화는 낮게 진행이 되었고, 긴요한 부분은 전음입밀로써 이루어져 옆에서 귀를 기울여도 제대로 듣기 힘들었다. 대강 상처를 치료하고 운기조식을 하면서 무림맹의 고수들은 묵묵히 그들을 보고 있었다.

 "감 사질의 무공은 많이 증진되었더군."

 한효월의 말에 감천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부끄러운 따름입니다. 사부님께서 그처럼 믿어주셨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이 모양이라니……."

 그는 참으로 참괴(慙愧)하였다.

 자부했던 무공이 오늘에 이르러 이렇게 평범하게 변해 버릴 줄이야 누가 짐작이라도 했을 것인가. 비록 상대가 너무 강하다 할지라도 그의 참괴함은 여전할 수밖에 없었다.

 "본 문의 무공은 대부분 공력에 기반을 둔 데다 한 수 한 수가 모두 형(形)을 기(基)로 삼되, 용(用)을 본(本)으로 생각하지. 감 사질은 그 부분에서 이미 최상의 경지에 이르렀네."

 "……."

 감천형은 쓰게 웃었다.

 그가 자신을 위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농담이 아니야. 감 사질의 무공은 이미 절정(絶頂)에 이르렀지."

 "무슨……?"

 얼떨떨한 빛으로 감천형이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그의 어조가 진지하여 농담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긴 그가 언제 자신에게 농담을 한 적이 있었던가.

 "감 사질이 수련한 것은 웅장함이네. 그것은 기세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지. 그런데 형식에 얽매어 있으니 본연의 기세가 그 위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 않나?"

 "무슨…… 의미이신지?"

 "뇌정도는 감 사질에게 가장 잘 맞는 무공이지. 밤하늘의 뇌정(=번개)을 잘 생각해 보게. 그 가공할 기세는 언제라도 변함이 없지만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는 법은 없어. 어떻게 움직여도 그것이 바로 번갯불이기 때문이지. 천태만상으로 보이는 것은 그저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일 뿐, 그 본질은 달라진 것이 없어. 그게 바로 본(本)이지."

 "……!"

 감천형의 전신이 문득 벼락을 맞은 듯 세차게 떨렸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본이라…….

 근본은 변함이 없는데……

 그런데 자신이 가장 자부했던 그 기본이,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그 기본이 잘못되었더라는 것인가? 그래서 자신의 무공이 지난 몇 년 간 벽에 부딪친 듯 더 이상 진전이 되지 않았단 말인가.

 "……."

 감천형이 격동한 빛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을 본 한효월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감천형의 무공이 이 순간, 한 단계 올라선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진정한 건곤무적 독고해의 대제자로서 거듭날 수 있게 될 터였다.

 감천형과 그 일행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한효월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계획에 약간의 차질이 발생했다.

 감천형에게 전음을 보내서 요광성주의 부하로 가장한 자신을 날려 보내게 하고 나타난 그는 감천형 등을 구한 다음에, 다시 부상을 당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시간이 너무 흘러 버렸다. 아직까지 그곳에 그들이 있을지도 몰랐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스며들기도 쉽지 않을 터이다. 자신은 몰라도 요광성주에게 큰 부담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 내부에 들어서 그들의 힘을 알아내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일임을 한효월은 깨닫고 있었다.

 어떤 방법을 쓰든,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한효월은 신형을 날렸다.

 그가 향하는 곳은 바로 그가 감천형 등을 구한 그 장원이었다.

 한효월은 일단 예의 장원으로 돌아갔다.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지금까지 그들이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리는 없을 터이다. 두 시진이라는 시간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잠시인 듯했지만 그가 정상을 회복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의외로 길었다. 감천형과 이야기한 시간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오래 후유증이 나타날 때가 아니었기에.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은밀히 장원에 당도한 한효월은 기이한 느낌에 전신이 굳어졌다.

 그가 떠나기 전과 어딘가 틀렸다.

 여기저기 부서진 흔적, 그리고 사방에 흩어진 주검들.

 그들은 얼마 전에 제천교도와 싸우다 죽은, 수습하지 못한 무림맹의 고수들이 아니었다.

 한효월이 떠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히 살아 있던 바로 그 제천교의 고수들이었다.

 한효월은 절정(絶頂)의 검기를 뿜어내어 네 명의 강령루 고수를 쓰러뜨렸었다. 그리고는 천추성주와 강령루의 제이당주.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사라졌었다.

 그런데, 여기저기 흩어진 제천교도의 죽음 가운데 그 나머지 흑포괴인들의 주검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흑포괴인들은 제이당주를 비롯하여 모두 열둘. 그중 일곱의 주검이 남아 있었다.

 결국 살아남은 것은 열둘 중 겨우 하나라는 소리였다.

 강령루 제이당주의 것으로 보이는 시신도 있었다.

 그들이 죽은 모습은 한효월에게 죽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거대한 절구공이에 격타당한 듯 전신이 완전히 으스러져 거의 박살이 나서 처박힌 채로 죽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힘에 짓눌린 형상이었다.

 놀랍게도 가공할 힘은 그들을 한 방에 날려 버린 듯했고 흑포괴인들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서 건물을 허물고, 혹은 나무를 밑동부터 부러뜨리면서 날아가 처박힌 듯 보였다.

 "가공할 고수가 나타났었다……."

 한참 상황을 살펴본 한효월이 신음을 흘렸다.

 처음에는 제천교의 고수들도 아마 그 미지의 적을 맞아 싸운 듯했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가공하자 그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뿐이었던 모양. 처음 몇 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귀신을 본 듯 혼비백산, 도주하다가 죽어간 모습이 역력했다.

 대체 어떤 존재가 이런 위력을 보일 수 있을까?

 '지금의 내가 전력을 다한다면?'

 어쩌면 그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다시금 고질이 발작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과연 이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는지 장담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더더구나 연달아 이런 위력을 발휘할 수는…….

 한효월은 굳은 표정으로 일대를 샅샅이 조사했다.

 "혼자가 아니었군……."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가공할 존재.

 가히 발군(拔群)의 위력을 가진 그 존재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가공할 위력에 놀라 도주하는 제천교의 고수들.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도주하는 제천교 고수들의 도주로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잔혹하게 그들을 베어 넘긴 것으로 보였다.

 그 의미는 그들의 출현이 우연이 아니라, 준비된 것이라는 뜻.

 "비적(秘敵)?"

 문득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어떤 존재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제천교에서 비적이라고 부르는 그들이 여기에 나타났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여기가 정말 그들의 근거지였다면…….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펴본 한효월은 천추성주와 요광성주의 시신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정확히 말한다면 떠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설사 죽어서 시체가 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한효월은 요광성주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를 찾아낸다면 이 사태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들을 수 있을 터이다.

 어쩌면 사태는 새로운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지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