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首 신비여인(神秘女人)
-사모를 만나다
생사의 경계(境界) 아득하니 누가 그 진실을 알까
화산(華山).
화산은 중국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진령산맥의 북부 주맥에 잇닿아 있다.
섬서 화음현(華陰懸)에 위치한 이 화산의 산세는 절벽이 잇대어 달리며, 기봉(奇峰)이 돌출하여 그 하나하나의 생김이 기이하지 않음이 없다.
안으로 수려하며 겉으로 웅장하니 가히 천하의 명산이라.
그리하여 화산을 중원오악 중 서악(西嶽)이라 이름한다.
산해경(山海經)에서는 화산을 일러 그 높이가 5천인이라 하였다. 사방의 바위가 깎여 막힘이 없으니 그 형상이 꽃과 같다. 옛글에 있어 화(華)란 곧 화(花)와 같은 의미였으니 이 화산의 생김은 말 그대로 꽃이 피어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그 봉우리의 생김이 피어난 연꽃과 같아서 화(華)라고 이름하였다는 것 등의 전설은 수도 없이 이 명산을 회자한다.
사람들은 중원오악을 일러 이렇게 평한다.
항산여행(恒山如行)하며 태산여좌(泰山如坐)하고 화산이립(華山而立)이며 형산여비(衡山如飛)에 숭산여와(嵩山如臥)라고…….
화산이 그처럼 험악하다는 의미다.
화산을 칭하는 립(立)이란 글자는 곧 삭(削), 깎아지른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산의 험악함을 형용하는 말로써 당대(唐代)의 이상은(李商隱)은 그의 시에서 삭성만인,수출운한(秀出雲漢)이라 일컬었으며 그 뒤로도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화산의 험악함을 일러 준극어천(峻極於天)이라 하여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천하에 이름 높은 화산파는 바로 그러한 화산의 관문인 통천문(通天門)을 지난 다음에 자리하고 있다.
화산은 도가의 선적(仙跡)이 많은 곳이다.
그런 만큼 수많은 궁관(宮觀)들이 늘어서 있다. 화산파가 자리한 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도관(道觀)이 아니라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지난 수십 년 간 화산파는 늘 조용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그 조용함은 깨어진 지 오래였다.
얼마 전부터 수많은 인마들이 소리도 없이 화산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천하무림맹의 맹주였던 건곤무적 독고해가 사망한 후에 새롭게 임시 맹주가 된 육합무적검 진자양이 구대문파를 주축으로 한 무림대회를 은밀히 소집했기 때문이다.
연일 소리도 없이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개봉에서 이사를 온 감천형은 화산에 오자마자 손님 접대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러면서 더욱 놀란 것은 육합무적검 진자양이 이미 모든 준비를 다 갖춰놓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화산을 떠나면서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예측과 대비를 해두었고, 그들이 화산으로 돌아왔을 때는 손님을 맞을 준비는 거의 끝나 있었다.
화산파는 당당했다.
걸출한 인물 하나는 주변을 바꿔 버린다.
감천형은 화산에 와서 그 사실을 절감했다.
화산파는 이미 구대문파 중의 평범한 일원이기보다는 그 옛날 건곤무적 독고해가 밟아가던 그 길을 육합무적검 진자양이라는 거물이 되짚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석양이 저물기 시작할 때, 감천형은 진자양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진자양은 그의 집무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맹주의 유체를 찾을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소."
그가 들어서자 한 진자양의 말에 감천형의 안색은 돌변했다.
"그건…… 사부님의 유체를 도적질해 간 자들을 찾아냈다는 말씀입니까?"
"거의…… 그런 것 같소."
"어, 어디? 누굽니까? 어떤 자들이? 역시 제천교입니까?"
감천형의 다급함에 진자양이 깊게 미간을 찡그렸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제천교는 아닌 것 같소. 그들의 움직임은 은밀하기 이를 데 없어서 찾아내기가 정말 힘들었소.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내가 가야 하겠지만 지금 몸을 빼기가 힘들어서……."
"제가 가겠습니다. 거기가 어딥니까!"
감천형이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사부님의 유체를 찾았단 말입니까?"
감천형에게 불려온 좌백은 그 말에 벌떡 일어났다.
그 형상은 진자양의 앞에서 감천형이 보였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찾았다기보다는, 찾을 길을 발견한 것 같다."
"어, 어떻게?"
"부끄럽게도 진 대행이 그자들을 찾아낸 것 같다. 그는 이미 사람들을 풀어서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는데 단서를 찾아낸 모양이다. 그가 내게 그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사실 확인을 해달라고 하였다. 이 일에 관한 한 너와 나에게 전권을 맡기겠다고 하면서……."
감천형의 말에 좌백은 나직이 신음했다.
"그가…… 말입니까?"
"그렇다. 그래서 나는 지금 바로 출발할 예정이다."
"으음……."
좌백이 다시금 신음을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육합무적검 진자양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안 든다는…….
굳이 갖다 붙이자면 지난날 사부가 살아 있을 때와는 달리 그가 주도적으로 움직이면서부터 좌백 스스로가 무림맹에서 어떤 소외감이랄까, 생경함을 느끼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 가장 큰 것이겠지만 이번 일은 달랐다.
그가 자신들을 배려하고 있음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도 당연히 따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매가 그냥 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사부님의 유체를 찾으러 간다는 것을 사매가 알게 된다면 누구도 그 아이를 막지 못할 텐데…… 역시 넌 남는 게 좋을 것 같다."
"그……!"
좌백은 불만의 빛이 역력했지만 입만 벌릴 뿐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독고경의 성정이 너무 희노무쌍(喜怒無雙)하여 그들 둘이 다 떠나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자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사숙께서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니 거기에 대한 대비를 위해서도 네가 있어주는 게 좋겠다."
"알겠습니다."
좌백은 이내 수긍했다.
그는 냉정한 성품인지라 이 일이 감정을 앞세워서 될 것이 아님을 알고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것이 그의 뛰어난 점이기도 하였다.
"사매에게는?"
"내가 직접 이야기하마. 잠시 일이 있어서 갔다 오는 것으로 하자."
"누구와 같이 가시겠습니까?"
"호맹위대 중에서 서른 명 정도를 추리기로 했다. 진 대행이 화산파의 고수 둘을 지원하기로 하고."
"고수 둘이요?"
좌백이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여기 손이 모자라 내가 일부러 그렇게 청한 것이니 오해할 것 없다. 싸움이 일어날지도 모르지만 우선은 그쪽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 우선이니 어쩌면 이 인원도 너무 많을런지도 모르지. 우선 그렇게 알고 내가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는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말고 있거라."
* * *
화산은 절경이다.
대륙의 산자락 어디가 절경 아닌 곳이 있으랴마는, 이 화산의 기험절학한 산봉은 그 봉우리마다 기승절경(奇勝絶景)이 아닌 곳이 없었다. 장대한 노을이 세상을 덮고, 그 노을에 물든 구름은 산마루를 덮다 남아 발 아래로 까마득히 세상을 덮으며 깔린다. 한 걸음을 떼어 구름을 밟으면, 그 구름을 딛으면서 유유히 걸어다닐 수 있을 것만 같다.
선경(仙境)이 따로 없고 선인(仙人)이 어찌 달리 있을 것인가.
검은 경장을 한 여인.
옥과 같이 아름다운 얼굴에 차가운 눈빛을 한 그 여인은 요즘 매일 이곳에서 노을을 본다.
어쩌면 그 노을보다는 저 창룡령(蒼龍嶺)을 넘고 통천문을 지나올 어떤 사람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그저 바람을 쐬고 있을 따름이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
근래에 들어 그녀의 성정은 더욱 차가워졌다.
그렇게 깎아놓은 석상과 같이 그녀가 그 자리에 선 채로 노을을 맞이한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사매."
문득 그녀의 뒤에서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흑의녀, 독고경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날려 시야를 가린다.
그녀가 은어와 같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그녀의 앞에는 당당한 체구의 청년이 서 있음이 보인다.
감천형이었다.
"어쩐 일이세요?"
독고경이 물었다.
"잠시 밖에 나갔다 올 예정이다."
"……."
무슨 이야기를 하고픈 것인지 해보라는 듯 독고경은 물끄러미 감천형을 바라보고만 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걱정 마세요. 조용히 있죠. 어차피 여긴 내 감옥이잖아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감옥이라니? 넌……."
문득 독고경이 미미하게 웃는 걸 보고 감천형은 말을 멈추었다.
"되었어요. 사형이 나 때문에 고심하는 거 잘 알아요. 염려 말고 다녀오세요. 조용히 있을 테니까."
너무도 뜻밖인 그녀의 태도에 감천형은 어리둥절해질 지경이었다.
개봉을 떠나온 뒤에 보인 그녀의 그간 태도와는 너무도 상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표정이 우스웠던지 독고경은 피식, 웃더니 물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뭐든지."
"사숙……!"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언니는,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군요!"
그 음성과 함께 녹색 경장을 차려입고 허리에는 패검을 한 소녀 하나가 나타났다. 나이는 17, 8세가량.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해맑은 얼굴에 붉은 입술이 아름다운 소녀였다.
"어머, 감 당주님께서도 여기 계셨네요?"
그녀는 감천형을 보자 활짝 웃으며 팔랑 인사를 했다.
누가 봐도 첫눈에 명랑한 성품임을 알 수 있는 태도.
그녀가 바로 화산파의 삼대제자 중 화산옥녀(華山玉女)라고 세상에 알려진 진가기(陣嘉綺)였다. 당금 화산파의 장문인 진자양의 조카로서 총망받는 화산칠수(華山七秀)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독고경에 대한 진자양의 배려로써 그녀가 화산에 온 이후에 독고경을 위로해 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처음에는 상대를 하지 않던 독고경도 그녀가 하도 살갑게 구니까 이젠 마음을 터 서로가 제법 친해진 상태였다.
"진 소저 오셨소?"
감천형은 그녀가 오자 웃음을 지어 보이곤 독고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녀와서 하도록 하자. 이번에 밖에 나가면 몇 가지 알아볼 일이 있으니 네게도 알려줄 것이 많을 것 같구나."
"알았어요."
독고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로 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언제 가세요?"
"지금. 그럼 다녀오겠소."
감천형은 화산옥녀 진가기의 물음에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등을 보인 채 총총히 그 자리를 떠났다.
"……."
화산옥녀 진가기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묘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참 멋진 분이야……."
홀린 듯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참지 못하고 종알거렸다.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봐도 정말 저분이야말로 장부 중의 장부인 것 같아요. 저 나이에 저렇게 당당하시고……."
"그만 하자. 너 또 우리 사형 이야기로 시작해서 사형 이야기로 끝낼 작정이지?"
독고경의 말에 화산옥녀 진가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호호…… 언니는……."
그녀는 문득 손을 내밀어 독고경의 손을 잡으며 은근히 입을 열었다.
"나 이야기 들었어!"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호호호, 언니가 누굴 생각하고 여기 나와서 매일 아래를 내려다보는지…… 저처럼 멋진 대사형이 왜 눈에 안 들어오는지 말이야."
"무슨 소리야?"
화산옥녀 진가기의 말에 독고경은 당황한 빛이 되었다.
전혀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태도.
"무슨 소리긴? 그렇게 잘생기고 무공도 고강해서 무림세가의 자녀들이 한 번만 봤으면 하고 몽매에도 잊지 못한다는…… 그분! 바로 언니의 사숙 말이지!"
"진매. 넌 대체……."
"아냐? 이상한데? 아니면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갛게 되었지?"
화산옥녀 진가기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빼 독고경의 얼굴을 빼꼼이 들여다보았다.
"하여튼…… 넌 어떻게 생각을 해도……."
독고경은 짐짓 눈을 흘겼다.
"그러지 말고 한번 말해 봐! 그분이 정말 어떻게 생겼지? 망산대회전(邙山大會戰) 이후에 그분에 대한 소문은 강호를 온통 뒤집어놨어. 생긴 것은 능풍옥수에 그 무공은 천신과 같아서 이미 지난날 독고 맹주님에 버금간다고…… 일검에 산이 무너지고 이검으로 바다를 가르니 뉘라서 그 신위에 맞설쏘냐! 물럿거라. 탕마신룡(蕩魔神龍)이 나아가노라……."
화산옥녀 진가기는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탕마신룡은 또 뭐니?"
독고경의 물음에 화산옥녀 진가기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것도 몰라? 그분 외호지. 하긴…… 그날 이후에 하도 부르는 이름이 많아서…… 어떤 사람은 백의신룡(白衣神龍), 또 어떤 사람은 백의대유협(白衣大儒俠)…… 또 뭐래더라?"
"일검에 산이 무너진다며? 검이 붙은 건 없디?"
"맞아!"
화산옥녀 진가기가 독고경의 말에 손뼉을 쳤다.
"검협(劍俠)이라고도 해!"
"그냥 딸랑 검협이야?"
어이없는 듯 독고경이 되묻자 진가기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야 이제 만나본 담에 붙여야지. 절세검협(絶世劍俠)라고 할 수도 있고 능풍검협(凌風劍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거고 이름이야 없어서 못 붙겠어?"
독고경은 눈을 흘겼다.
"너, 그 이름 다 네가 지어낸 거지?"
그녀의 추궁에 화산옥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몇 개 지으려고 했지만 정말 강호상에 떠도는 소문이 분분하던걸? 밖에 나갔다 왔던 사형이 내게 말해 줬어. 그분 때문에 세상이 떠들썩하다고……."
"언제?"
"아까 낮에 돌아온 삼사형이 그랬어. 그날 이후 그분의 종적이 강호상에서 사라져서 탐문 중이라고……."
"화산파에서도 알지 못한단 말이야?"
독고경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그녀는 이곳에 와서 상세를 치료하면서 화산파의 힘을 보았다.
현재 화산파의 힘은 화산파 사상 최강이라고 일컬어질 만하다. 라고 그녀의 사형인 감천형이 말했었다.
구대문파는 고래로 소림, 무당이 병칭되고 나머지 칠파가 그 영광을 나누었지만 이제 누구도 그들을 그 아래로 평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알지 못한다면, 혹시라도 한효월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 * *
방에까지 따라와 조잘거리던 화산옥녀 진가기는 한참 만에야 돌아갔다.
차가운 성정의 독고경이었지만 그녀의 성품이 원래부터 차고 독한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홀로 자라다시피 해서 스스로를 닫아버린 것에서 기인한 차가움이었던지라 붙임성 많은 진가기가 살갑게 굴자 의외로 빨리 친해지게 된 셈이었다.
열린 창문으로 밤바람이 불어와 창가 휘장을 펄럭인다.
아스라한 밤하늘에 걸린 달빛이 눈이 시리게 정겹다.
세찬 바람이 휘모는 바닷가에서 고사리 손을 불어가면서 검을 수련했었다. 어린 그녀를 돌봐준 것은 사저들뿐, 청정(淸淨)과 고행을 목표로 하는 암자에서의 수련은 고달플 수밖에 없었고 그녀와 같은 나이의 소녀에게는 힘든 시절일 수밖에 없음이 사실이었다.
고집스러운데다 차가운 성품이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을 닫아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그녀와 함께했던 사형들도 낯설기만 했다.
그런데……
그런데 불쑥 나타난 사숙.
오히려 사형들보다 어린 사숙, 한효월을 보자마자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자신을 느껴야 했다.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미남도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람을 잡아끄는 신비로운 힘이 있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뛴다.
어렵고 답답할 때마다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가 자신의 사숙임을 되뇌어도 이미 기울어진 마음을 그녀 스스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자신도 모르게 매일매일 그를 기다리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훈훈해지는 그녀였다.
둥근 달 속에 그의 얼굴이 소리없이 그려진다.
"바보……."
문득 그녀가 중얼거렸다.
누가 바보라는 것일까?
답답하고 초조한, 이 불안한 마음을 누가 알까?
언제부터인가 자신에게 일어난 그 괴이한 현상으로 인해 그녀는 마음대로 바깥출입조차 하지 못했다.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견뎌낼 수 없었을런지도 몰랐다. 평소 그녀의 성품으로 보자면 미치지 않은 것만도 용한 일이라 할 터이다.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들 그녀는 이미 남해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렇듯 기다리건만 한효월은 오늘도 오지 않았다.
불조차 켜지 않은 채로 그렇게 창가에 서서 물끄러미 달을 바라보고 있던 독고경의 안색이 문득 달라졌다.
'설마…… 감 사형이 오늘 강호로 나간 게 사숙 때문?'
그녀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생각에 잠겼다.
바로 그때, 독고경의 안색이 갑자기 돌변했다.
어디선가 은은히 퉁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달빛.
은은한 달빛이 서린 가운데 고즈넉한 어둠을 타고 조용히 흘러드는 퉁소 소리는 끊어질 듯 말 듯 어디선가 아련히 들려온다.
아마도 누군가가 화산의 절경에 감탄하면서 계곡에 앉아서 연주라도 하는 것일까. 근래에 들어서 화산파에는 이미 천하에서 백여 명 이상의 군웅들이 몰려와 용사혼잡(龍蛇混雜)하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였다. 강호상의 기인(奇人)들은 그 지닌 바 재주가 제각각이니까.
하지만 그 소리를 듣는 독고경의 얼굴빛은 단순하지 않았다.
묘한 빛으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독고경의 얼굴에는 이내 괴이한 빛이 드러났다.
두 눈에서 심한 갈등의 빛이 일고, 이어 그녀의 눈에는 망연(茫然)한 빛이 떠올랐다. 마치 정신을 잃어버린 듯한 눈빛. 그녀는 스스로의 변화를 아는 듯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그녀는 이내 입술을 깨물면서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퉁소 소리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좌백은 길게 한숨 쉬었다.
이제 어느 정도 일과가 끝이 난 참이었다.
무림맹에서 그의 신분은 전과 같이 순찰당의 당주다.
그러나 무림맹이 화산파로 옮겨오자 그 순찰당의 당주라는 직위와 화산파의 자체 권한 사이에 묘한 충돌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순찰당의 당주는 모든 곳을 살펴볼 권한을 가진다. 그러나 화산파 고유의 영역을 넘볼 수는 없으므로 그런 갈등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점을 감안하여 화산 장문인 진자양은 그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고, 화산파는 철저히 지주(地主)로서만 자리하게 했다.
사람들을 접대하고 그들에게 무슨 일이 없는지, 적의 동태가 어떤지를 살펴보는 것이 바로 그의 일이다. 화산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실제로 그는 이 무림맹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였다.
조금 시간이 나자 그는 혹시라도 독고경에게 무슨 일이 없을까 하여 그녀에게로 가는 중이었다.
무림맹에서와 같이 그녀에게 별도의 거처를 주지도 못하고 그저 여자들이 모인 곳에 따로 방을 하나 줄 수밖에 없던 점도 마음에 걸렸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방도 모자라고, 거의 피난처럼 옮겨온 상태라 비상시이긴 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부의 하나밖에 없는 그 딸을 그렇게 두자니 늘 신경이 쓰였다.
더구나 수 년 만에 돌아온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전과 달라 각별한 주의를 요하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것이 그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뭐지?'
문득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무엇인가가 앞쪽으로 스쳐 지나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정신을 모아 다급히 앞을 살펴보자 누군가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듯했다.
'설마?'
그 그림자의 모습이 눈에 익은 듯하여 가슴이 철렁한 좌백은 다급히 땅을 박찼다.
그가 몸을 날린 곳은 그 그림자가 사라진 곳이 아니라 바로 앞에 보이는 독고경의 거처.
"경아!"
바람처럼 그곳에 당도한 그는 독고경의 방 창문이 열려 휘장이 펄럭이고 있음을 보자 그녀를 불렀다.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이런!"
고개를 들이민 그는 방 안이 빈 것을 직감하고는 그대로 창턱을 손으로 짚었다.
그 반동으로 그의 신형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렇게 신형을 튕겨 올린 그는 몸을 뒤집으면서 좀 전에 그 그림자가 사라진 곳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바람 같은 금리도천파(金鯉倒穿波)의 경신술이었다.
풀잎을 밟고, 담을 차면서 거침없이 앞으로 내달렸다.
다른 사람의 눈을 상관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앞으로 달리던 그는 눈을 빛냈다.
앞쪽 계곡의 숲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한 것이다.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있을 리 없다.
좌백의 신형이 소리없이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천수단혼 좌백.
그 이름은 그가 암기의 달인임을 의미한다.
암기라고 하는 것은 작은 무기이고 그것을 쓰기 위해서는 눈이 매서워야 하며 손이 영교(靈巧)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느려서는 안 된다. 신법이 탁월하지 않다면 암기를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의미다.
좌백의 신법은 사형제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점이 있었다.
그의 무공은 감천형처럼 웅장하거나 천무처럼 강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볍고 표홀함을 주종으로 하여 그 방면으로 남다른 성취가 있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의 추적에서는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그였다.
어둠 속이다.
그리고 숲이었다.
자칫 대낮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을 찾기 어렵고 앞서 가는 사람을 미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좌백은 조금 달랐다.
그는 이미 앞선 사람이 독고경임을 확인한 다음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움직임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것에 이끌려 가고 있는 것을 짐작한 상태였다. 빠르게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긴 하지만 그녀의 신법에는 영교(靈巧)한 맛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바람을 타고 은은히 들려오는 퉁소 소리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그녀를 놓칠 염려는 없었다.
오히려 이젠 과연 누가 이런 짓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내심 이를 갈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반 각가량을 그렇게 전진했다.
지세가 일변했고 가파른 산세를 등진 곳이 나타났다.
험악한 바위들이 첩첩이 덩치를 자랑하듯이 등을 맞대고서 사방에 웅기중기 모여들었다. 소나무와 잣나무들이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옴을 드러내듯 커다란 몸체를 하늘 높이 벌린 채 달빛 아래 그윽하다.
그중 수백 년은 더 되었음직한 고송(古松).
그 아래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먹물 같은 흑포를 걸치고 바위에 걸터앉은 그 괴인은 긴 퉁소를 입에 대고 있는데, 불어오는 밤바람에 흑포를 펄럭이면서 옥으로 된 퉁소를 연주하는 모습은 표표(飄飄)하기까지 해 보였다. 마치 오래된 산수화에 선인도(仙人圖)를 덧칠한 듯.
독고경은 그 흑포인의 앞으로 망설임없이 다가갔다. 마치 무엇이 끌고 있는 듯이.
흑포인은 그녀를 보지 못한 듯 연주를 계속했다.
독고경은 끌리듯 흑포인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그 앞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흑포인이 연주를 멈추었다.
놀랍게도 그 흑포인은 수십 리나 떨어진 이곳에서 퉁소 소리 하나로써 독고경을 불러낸 것이다. 그러한 능력은 실로 가볍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체 저 흑포인이 누구이길래……?'
그 광경을 보는 좌백은 괴이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때, 독고경은 평소의 그 영민(英敏)함을 이미 잃어버린 듯했다.
그저 멍하니 앉은 채로 그 흑포인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연주를 멈춘 흑포인은 독고경을 향해 나직이 무엇인가 말했다.
그러자 독고경이 앉은 자세로 흑포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흑포인이 손을 내밀었다.
소매가 펄럭이는 가운데 그 소매 속에서 손이 뻗어 나왔다. 그 손은 어둠 속에서 매우 희게 번뜩이면서 독고경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멈춰라!"
그 광경을 보자 좌백은 놀라 소리치면서 달려갔다.
원래 숨어서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지만 독고경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인 까닭이다.
독고경의 머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던 흑포인은 방해자가 나타난 것이 뜻밖인 듯 빠르게 손을 거두어들였다.
"너는……."
나타난 사람이 좌백임을 본 흑포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자리에 당도한 좌백은 먼저 독고경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좌백이 나타난 것도 알지 못하는 듯 망연한 눈빛으로 그대로 앉아 있긴 했지만 해를 입은 듯 보이지는 않았다.
내심 일단 안도한 좌백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여전히 앉아 있는 그 흑포인을 쏘아보았다.
어둠을 두르고 거대하게 자리한 아름드리 고송(古松)의 아래에 자리한 그 흑포인은 흑포뿐만 아니라, 얼굴에도 검은 천으로 된 면사(面紗)를 쓰고 있어서 정체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면사는 눈 아래를 가리는 것이 보통인지라 면사 위로 드러난 흑포인의 눈은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좌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광(精光)이 깃든 그의 눈은 그가 만만한 사람이 아님을 알게 하기에 족하다.
"당신은 누구요?"
좌백은 싸늘한 표정으로 상대를 쏘아보면서 물었다.
모습을 드러낸 그의 자세는 어떻게 보면 매우 엉거주춤해 보였다.
약간 자세를 낮춘 상태로 두 팔을 약간 치켜 올린 채 발은 앞으로 전진하다가 만 듯했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매우 어색한 자세인 듯했지만 실제로 그것은 마치 활을 당겨놓은 듯한 준비 자세였다. 언제 어느 때라도 그의 장기인 암기를 쏘아낼 수 있는 자세인 것이다.
그때 돌연 좌백의 얼굴에 긴장이 살처럼 흘렀다.
옆구리를 날카로운 바늘로 찔리는 듯한 감각을 느낀 것이다.
좌측 어둠 속이었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검을 움켜쥐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거리는 1장가웃 정도.
아직 검을 뽑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검을 잡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그를 후려칠 것만 같았다.
1장가웃이라면 절대로 검이 닿을 수 없는 거리.
그러나 그 검수(劒手)에게 있어서는 그 거리가 검을 뽑는 순간, 발검(拔劒)을 하는 순간에 벨 수 있는 거리임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검을 뽑기도 전에 이러한 검기가 일어나다니…….
'대단한 검도고수…….'
좌백은 굳은 눈빛으로 눈앞에 있는 흑포인을 노려보았다.
그를 앞에 두고서는 아무리 위협이 되더라도 감히 신경을 분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독고경을 두고 물러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흑포인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에게 옆구리를 내놓고 있는 마당이니 불리한 것은 그였다.
그때였다.
"물러나 있도록 해라."
흑포인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뜻밖에도 그 음성은 맑고 영롱했다.
순간, 그처럼 무섭게 좌백을 핍박해 들어오던 검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동시에 좌백을 위협하던 검수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음…….'
좌백은 내심 신음했다.
적이 유리한 위치를 스스로 포기한 이유를 알지 못해서였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그의 얼굴과 마음은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고경이 여기 있는 한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돌아가라. 여기서 네가 할 일은 없다."
흑포인이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매와 함께라면 돌아가겠소."
"네 능력으로 말인가?"
흑포인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
좌백은 반 걸음을 미미하게 움직여 자세를 조금 편하게 하면서 태연히 말을 받았다.
"세상에는 능력이 모자랄지라도 물러날 수 있는 일이 있고, 물러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니…… 최선을 다할밖에."
"……."
그의 말에 흑포인은 묘한 표정이 되어 좌백을 보았다.
좌백의 눈빛은 완강했다.
"네가 죽어도 말인가?"
"……."
좌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조금 움직여 신형의 위치를 조정했을 뿐이다.
고송의 나뭇가지 사이로 달빛이 미미하게 흘러드는 것을 보고 거기에 맞춰서 몸을 움직인 것이다. 별것이 아닌 것 같지만 암기를 발출할 때, 이런 각도라면 분명히 암기의 끝이 달빛을 반사할 것이므로 순간적으로 암기의 위력은 천양지차가 될 수 있었다.
"여전히 영악하군……."
흑포인이 좌백의 움직임의 의미를 알아본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음성에는 묘한 빛이 서려 있었다.
잠시 그를 보던 흑포인이 다시 말했다.
"이 아이를 해롭게 하지는 않을 테니 돌아가 있어도 좋다."
흑포인의 말에 좌백이 침착히 대꾸했다.
"사매는 돌아가신 선사의 단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오. 당신의 말 한마디에 내가 그냥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아이는 내 혈육이다."
"……!"
그 말에 좌백의 안색이 돌변했다.
마치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천형이라면 몰라도…… 넌 그때 너무 어렸으니까."
흑포인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너무 괴이하여 좌백은 흑포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눈길에 흑포인은 얼굴에 쓰고 있던 면사를 벗었다.
그러자 아름다운,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중년 여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나이는 얼핏 서른 정도로 보이지만 차고 고고하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다만 그 안색이 너무 차가워 한 겹 얼음을 깔아둔 듯 함이 옥의 티라고 할까.
"서, 설마……?"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던 좌백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알아보겠느냐?"
"정말 사(師)…… 아니, 그럴 수는? 돌아가셨는데……."
좌백은 그답지 않게 더듬거릴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도 상상하기 어려운 사실 앞에 직면한 까닭이다.
"때론 살아 있음이 죽은 것만 못할 때도 있지. 네가 나를 알아볼 수 있다면 내게 이 아이를 맡기고 돌아갈 수 있겠지?"
"……."
좌백은 일시지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정말 너무도 뜻밖의 사람이라 어떻게 말을 해야 할런지 정말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 사매를……."
한참 만에야 입을 연 그의 말이다.
"이 아이는 정상이 아니다. 그 독랄한 계집이 이 아이를 꼭두각시로 만들고자 하여…… 다행히 내가 발견했으니 오늘만 치료를 한다면 정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독랄한 계…… 여자가 누굽니까?"
좌백이 어설픈 어조로 물었다.
그는 매우 혼란스러워져서 평소의 명민하던 일 처리와 같을 수가 없었다.
하긴 십수 년 간이나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돌연 살아서 나타났는데 누가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겠는가.
"네가 그간 사모라고 부른 계집 외에 또 누가 있겠느냐?"
"그……!"
좌백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사모인 봉설란이 독고경을 모해하였다는 것인데, 평소 그가 아는 봉설란이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인 까닭이다.
더구나 봉설란과 독고경은 물과 기름처럼 잘 어울리지 않았는 데다가 독고경이 남해에 있어서 같이 있을 시간조차 거의 없지 않았던가?
파라락…….
밤바람이 묵묵히 선 좌백의 옷자락을 펄럭인다.
그는 석상처럼 서서 이제는 흑포여인이 된 그녀가 바위에 잠자듯 누운 독고경의 머리에다 손을 대고서 눈을 감고 있음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공력은 보기 드물게 고강하여 그녀의 머리 위로는 허연 김이 무럭무럭 피어 오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김은 그녀의 머리뿐만 아니라 그녀의 손이 닿은 독고경의 머리 위에서도 은은히 피어 올랐다.
신비로운 보랏빛 광채가 흑포여인의 손에 일렁였다.
'불가의 공부(功夫)인 듯한데 무슨 공력인지 알 수가 없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좌백이 내심 신음했다.
"으으으……."
독고경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침내 금제(禁制)가 깨어졌군……."
나직한 음성이 독고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흑포여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정신을 잃고 누운 독고경.
그녀의 얼굴은, 전신은 온통 땀투성이였다.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흑포여인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깎아 만든 사람처럼 무표정하던 흑포여인의 얼굴에는 안쓰러운 빛이 가득해 보인다.
'정말…… 이란 말인가?'
좌백은 내심 신음했다.
하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인데…… 아니, 죽었는데, 죽었었는데…….
그때, 흑포여인이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반 시진 정도는 쉬어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이 아이를 지켜주겠느냐?"
"사(師)……."
좌백은 그녀에 대한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열다가 말을 돌렸다.
"사매가 깨어나는 것을 보지 않을 것입니까?"
"바쁜 일이 있어서 여기 오래 머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네가 굳이 고집을 피우고 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으니…… 부탁하마."
말과 함께 그녀가 갑자기 일어났다.
이처럼 돌연히 떠난다고 나설 줄은 몰랐으므로 좌백은 당황해서 말했다.
"사매가 깨어난다면……."
"네가 알아서 이야기를 하도록 해라. 다만, 내가 저를 치료했다는 것은 아직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 조금 더 상황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까."
갑자기 흑포여인이 안색을 굳혔다.
"나를 만난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도록 하거라. 아직까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으니까. 아니, 알아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다짐에 좌백은 단서를 달았다.
"경과를 대사형에게까지 숨길 수는 없겠습니다."
그의 말에 흑포여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좋다. 너희 사형제들만 안다면……."
그 말을 남기고 그녀의 신형은 숲 속 어둠 속으로 소리도 없이 스며들었다. 독고경을 잠시 내려다보던 그녀는 몸을 트는가 싶은 순간에 숲 속 어둠으로 사라져 버려 허깨비를 보는 것 같았다.
"대단한 신법이로군……."
좌백이 신음을 흘렸다.
어떻게 된 것이 지금 사방에서는 고수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흑포여인의 무공이 자신보다 하수가 아니라는 것은 그 신법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증명이 된 듯했다. 그것이 그를 불안하고도 화나게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의 무공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런…….
이렇게 해서 좌백은 하릴없이, 아니, 불안과 긴장이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만에 하나라도 독고경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모면할 수가 있으랴. 흑포여인이 떠나자마자 그는 독고경의 앞을 가로막고서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정말 반 시진가량이 지난 뒤였다.
"사형?"
잠을 자고 난 듯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좌백이 우뚝 서 있음을 보자 어리둥절하여 그를 불렀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그녀를 덮고 있던 좌백의 겉옷이 흘러내렸다.
"괜찮으냐?"
"무슨 말이에요?"
"나도 영문을 모르겠다. 나는 네가 화산파 경내를 벗어나는 걸 보고 따라왔는데…… 네가 갑자기 여기에서 쓰러지는 바람에……."
"내가 여기에서 말인가요?"
독고경은 미간을 찡그린 채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신경 써서 돌아보지만 머리만 깨어질 듯 아플 뿐,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련하게 퉁소 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그것이 기억의 전부였다.
그 퉁소 소리를 따라 여기까지 이른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느냐?"
"그래요. 아무것도……."
독고경이 굳은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생각할수록 머리만 깨질 듯 아프기만 했다.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정신을 차리는 일이 있음을 느낀 다음부터 그녀의 성격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화산으로 온 다음부터 그런 일은 눈에 띄게 줄었다. 아니,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녀도 심리적인 안정을 찾아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좌백은 한참 그녀를 위로하여 일단 그 자리를 뜰 수 있었다.
…….
그들이 그렇게 달빛 내리는 산길을 따라 그 자리를 떠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눈이 있었다.
그것은 뜻밖에도 이미 떠난 줄 알았던 흑포여인이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뒤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만에 하나 살아 계신 것을 그쪽에서 알게 되면……."
"때가 되었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는 없는 일. 저들이 영원히 우리를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지. 그리고 이젠 누가 적인지 아닌지는 알아야 할 때가 되기도 했지……. 위험을 무릅쓸 만한 가치는 있는 일이야. 그의 동태를 하나 남김없이 감시해서 수상한 점이 없는지, 누구와 접촉하는지를 알아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녀의 뒤에서 서 있던 검은 그림자가 머리를 숙였다.
"출관(出關)은 예정대로 차질이 없나?"
"그런 것으로 압니다."
"……."
문득 말이 끊겼다.
흑포여인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독고경이 사라진 곳을 망연히 응시하고 있었다.
착잡하다.
지난 십여 년 간의 수도(修道)로 다스렸던 마음이었다. 그러나 다시 속진(俗塵)에 파묻힌 이래 수없이 손에 피를 묻혔다.
그것도 가장 경원시하던 복수란 미명(美名) 하에.
나를 버린 그 사람을 위해서…….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천하라는 괴물을 대명제로 놓고서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을 이렇게 내팽개치면서까지 그가 남긴 그 유언(遺言)을 따라 이렇게 달려가야만 하는 것일까?
그가 출관한다.
"호정군(護正軍)의 대장(大將)으로서……."
부지중에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는 세상에 경악하고도 남을, 참으로 크나큰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알게 되면서 세상은 막강하기 이를 데 없는 새로운 힘의 출현을 보게 될 터였다.
흑포여인.
그녀야말로 그 중심에 선 사람이었다.
* * *
화산을 떠난 감천형은 화산파의 장로 한 사람, 그 제자 둘과 호맹위대 서른 명을 대동하고서 일로 목적지를 향해서 달렸다.
사부의 시신을 가져간 자들.
다른 것도 아닌 돌아가신 분의 유체를 욕보인 자들…….
그들을 찾아가는 마당이니 한시라도 쉴 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무모한 사람이 아닌지라 목적지를 십 리 앞에 두자 모두에게 휴식을 명했다.
내세운 척후의 보고는 심상치 않았다.
은밀한 세력이 일대를 감시하고 있고 그 범위가 생각보다 대단히 크다는 것. 그것은 어떤 강력한 힘이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처럼 강하게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을까?"
감천형은 머리를 저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지금까지 은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굳이 지금에 와서 이처럼 스스로를 드러낼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한 가지.
무엇인가 내부적으로 변고가 일어났다는 의미.
그렇게 판단하자 감천형은 휘하의 모든 고수들에게 일대악전(一代惡戰)을 각오하도록 엄명하고서 바로 그 자리를 떠 목적지인 조운촌으로 향했다.
감천형은 그렇게 해서 이 자리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가 조운촌에서 목도한 것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경이었고 가히 천인공노라고 할 만했다.
어른, 아이, 부녀자 할 것 없이 살아 있는 생명체는 모두가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누구도 예외가 없었고 그것을 목도한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노 이전에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달리는 급류와 같아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싸움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