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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首 교주초현(敎主初現) (42/113)

第十首  교주초현(敎主初現)

-적과 동행하다

마침내 제천교의 교주가 모습을 드러내다

 어둠이 물러간다.

 저 멀리 아스라한 빛무리가 어둠을 밀어내면서 떠오르고 있었다.

 어둠 한쪽이 옅어지는가 싶더니, 급격히 어둠이 흩어지면서 노을빛 광채가 불끈 튀어 올라 사방에다 아침이 오노라고 소리친다.

 아침 이슬이 그 빛을 받아 영롱히 반짝인다.

 어젯밤의 그 격전은 사람들의 일일 뿐이다.

 자연은 그 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저 품어줄 뿐이었다.

 한효월과 요광성주는 산정(山頂)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고 있었다.

 언제 벗은 것인지 복면을 벗은 요광성주의 아름다운 얼굴은 지치고 피로한 빛이 역력했다. 한효월이 옆에서 도왔다고는 하지만 여기에 이르기까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의미하는 모습이다.

 한효월은 그녀의 앞에 우뚝 선 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본다.

 "더 이상 쫓아오지는 않는군요……."

 요광성주가 중얼거렸다.

 "조금 쉰 거요?"

 한효월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밝아오는 햇살을 받은 그의 모습은 고요했다.

 어쩌면 고요한 아침과도 같은 분위기가 바로 그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

 잠시 그를 바라보던 요광성주는 문득 입을 열었다.

 "역시 죽지 않았었군요."

 그녀의 말에 한효월은 미미하게 웃었다.

 "어제 죽지 않았다고 오늘 죽지 말란 법은 없지. 사람이란 언제 죽든 한 번은 죽을 것인데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소?"

 "정말 젊은 사람이긴 한 건가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입을 연 그녀의 물음에 한효월은 얼떨떨한 빛이 되었다.

 "그건 무슨 소리요?"

 "너무 나이답지 않아서……."

 말끝을 흐리던 그녀는 말을 돌렸다. 어조가 조금 딱딱해졌다.

 "그런데 왜 북벌후의 동위로 가장하여 스며든 거지요? 혹시 개방과 연락을 하고서……."

 "그런 건 아니오. 다만 제천교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궁금해서…… 그래서 그 뒤를 따르다 이렇게 된 것뿐이오."

 잠시 침묵하던 요광성주는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눈살을 찡그렸다. 미인빈아미(美人嚬蛾眉)라는 말이 있다. 미녀가 눈썹을 찌푸리는 것의 아름다움을 형용한 말이다. 햇살을 받아 눈부신 듯 눈살을 찡그리는 그녀의 미목은 피폐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당신에게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고맙다고 해야 할는지……."

 "고마울 건 없소. 공교롭게 우리가 만난 것이 인연이라면 인연이었겠지만 그것으로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오."

 담담히 중얼거린 한효월은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당신은 어디로 갈 거요?"

 "난 본 교로 돌아갈 거예요."

 문득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황엽은 오늘의 일로 무서운 보복을 받게 될 거예요. 제천교는 개방 따위가 건드릴 수 있는 곳이 아님을 그는 아직 모르고 있어요."

 "제천교의 힘이 대단함은 이미 알려진 바이지만, 개방의 저력도 만만하지는 않을 거요."

 한효월의 말에 요광성주는 피식, 웃었다.

 "개방의 무엇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건가요? 그들이 전력을 다 동원한다고 해도 총단에서 고수가 출동하면 그 순간 끝이에요. 겉으로 드러난 오방후나 우리 제천칠성은 기실 본 교의 힘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입술을 깨문 요광성주의 얼굴에는 한 겹 서리가 깔리는 것 같았다. 눈빛이 차갑게 빛난다.

 그녀의 말에 한효월의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겠소?"

 "……."

 요광성주는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조용하고 고요한 눈빛으로 한효월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지금 나에게 본 교를 배신하라는 건가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소. 제천교의 성세가 어떠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어떻게 배신이 되겠소?"

 "말도 안 돼요. 본 교의 규칙은 엄하기 이를 데 없어서 교중의 일은 설사 부모에게라도 말할 수가 없어요. 만에 하나라도 어김이 있을 시에는 참혹한 벌을 받게 되고……."

 "지금 나와 있는 것도 거기에 저촉이 되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안색이 창백해졌다.

 "외인과 내통한 자는 오행독형(五行毒刑)에 처해져서 참혹하게 죽게 되죠. 그것은……."

 그녀의 눈에 절로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차고 냉정한 그녀에게서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공포가 떠오른다는 것은 그 형벌이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을 느끼게 하기에 족했다.

 "당신은 나와 내통을 한 적이 없지 않소? 더구나, 내가 듣기로 제천칠성은 제천교주의 제자라고 하던데…… 아무려면 제자를 그런 식으로……."

 "우리 사형매는 모두 열둘이었었어요."

 "……?"

 그녀가 입술을 물었다.

 "다섯이 잘못을 범하고 죽었죠. 그중 삼사형은 교주님의 총애를 받고 있었음에도…… 그리 큰 잘못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예외가 없었어요."

 그렇게 해서 열둘 중 일곱이 남았다는 이야기다.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당신과 있음을 누가 안다면 나는 용서받을 수 없을 거예요. 아, 나는……."

 그녀는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태양은 사람들의 갈등을 아랑곳하지 않고 떠올라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사방 여기저기에서 새들의 울음소리가 청랑히 들린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이슬들이 영롱하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요광성주의 안색이 달라졌다.

 가느다란 떨림이 그녀의 전신으로 파도처럼 번져 갔다.

 한효월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

 그녀는 말없이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나를 도와주시오."

 한효월이 말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죠?"

 "제천교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소. 평화로운 무림에 피바람을 일으키고 스스로의 사욕을 위하여 천하무림을 피바다에 몰아넣는 것도 마다하지 않소. 그들을 막아야 하오."

 "당신이 말인가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오."

 "왜 그래야 하죠? 당신은 무림과 아무런 상관이 없던 사람이라고 들었어요. 단순히 당신의 사형이 우리 제천교에 당했다고 해서 우리와 적대시하려는 건가요? 우리가 당신 사형을 해쳤기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 그럴 필요가 있는 건가요? 무림이 당신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오."

 "그런……."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되겠소?"

 한효월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제천교로 데려가 주시오."

 한효월의 말에 요광성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신 말대로 과연 제천교가 무림에 해가 되지 않는 집단인지 알아보고 싶어서. 만약 정말 당신 말대로 제천교가 무림 중에 해를 끼치는 곳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나는 사형의 뒤를 잇는 것을 포기하겠소."

 말은 완곡하지만 건곤무적 독고해의 복수를 포기한다는 의미다.

 "내가 그걸 승낙할 걸로 생각한다는 건가요?"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이야기해 보시오."

 "……어이가 없군요."

 한참 한효월을 쳐다보고 있던 요광성주가 신음하듯 말했다.

 "당신은 이미 본 교가 지목한 추살 대상 제일호예요. 그런 당신을 교중으로 데리고 들어가라니, 만에 하나라도 그것이 발각나면…… 그리고 내가 당신을 교중에 넘겨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믿죠?"

 한효월의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죽으라면 죽을 수밖에."

 간단히 말을 마친 그는 정색을 했다.

 "난 내 사형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강호에 나왔소. 그분의 뒤를 이어 세상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하지만 정작 아직까지도 제천교에 대해서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소. 이래서는 그들과 상대할 수가 없지 않겠소?"

 "……."

 요광성주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한효월을 쳐다보았다.

 한효월도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여기저기에서 들리고 아침 안개가 싸아하니 나뭇잎 사이를 감돌아 햇살에 스러져 가고 있었다.

 "세상은 알지 못해요. 본 교의 힘을……."

 마침내 요광성주가 길게 탄식을 흘리면서 입을 열었다.

 "오방후나 제천칠성은 본 교의 드러난 힘일 뿐이에요. 그저 대외적인 일을 처리하는 전위(前衛)일 뿐이죠. 만약 총단에서 이각삼루(二閣三樓)가 세상으로 나온다면 그 어느 누구도 대적할 수가 없어요. 그들은 오직 건곤무적 독고해를 칠 때 한 번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에요. 그것은 건곤무적 독고해가 그만큼 강했다는 의미일 것이고, 그가 죽고 없는 이상 이제 누구도 본 교를 막을 수가 없을 거예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소?"

 그녀는 이미 작정을 한 듯 망설이지 않았다.

 "본 교의 조직은 아주 특이해요. 대외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우리 칠성과 오방후이지만 실제로는 심부름꾼일 따름이죠. 총단에는 우리를 지원하는 이각이 있어요. 바로 천마각(天魔閣)과 소혼각(消魂閣)인데, 앞서 본 그 흑포인 등이 천마각에서 나온 살수들이었어요."

 "지난번의 그 온유향도 관련이 있소?"

 "기억하고 있군요. 온유향은 소혼각의 일부예요. 살수와 미녀로 총단에서는 외방의 오방후와 우리 칠성을 지원하는데 아직까지는 누구도 그 이상의 힘이 필요없었어요. 그러니 가장 무섭다는 삼루의 고수들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죠. 우리 중에도 그들을 본 사람은 거의 없어요. 혹…… 대사형이라면 좀 다를지 모르겠지만……."

 "그가 왜 다른 거요?"

 "그는 같은 칠성에 속해 있지만 총단에 마음대로 출입할 권한을 가졌으니 당연히 우리와는 다르죠.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총단에 출입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하고, 실제로는 그 위치조차 몰라요."

 "위치도 모른단 말이오?"

 한효월이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몰라요. 외단 사람들은 연락을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죠."

 "음……."

 한효월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온다.

 듣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상황은 심각한 듯했다.

 그처럼 큰 조직이 이와 같이 철저한 비밀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긴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모든 것이 어떻게 그처럼 철저한 비밀 속에 묻혀 있을 수 있었겠는가.

 "삼루의 어떤 면이 그처럼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있겠소?"

 "나도…… 확실히는 잘 몰라요. 다만 강령(降靈), 섭생(攝生) 등의 삼루는 제각기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이 강호에 나오면 누구도 그들을 당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

 이제 아침 해는 제법 강렬한 빛으로 사방에 군림하고 있었다.

 한효월은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알면 알수록 더 거대하고 신비한 것인 제천교인 까닭이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이 그처럼 무섭다면 제천교에서는 무엇 때문에 그들을 아껴두는 것이오? 그들 모두가 강호에 나온다면 일거에 천하를 쓸어버릴 수가 있을 텐데?"

 "그건 모르겠어요. 전부터 그들은 강호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들이 강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유일하게 건곤무적 독고해를 상대할 때뿐이었으니까요."

 "그들이 사형을 상대할 때…… 당신도 그 자리에 있었소?"

 그 물음에 요광성주는 한효월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본 교는 건곤무적 독고해를 상대하기 위해서 모두 열두 개의 관문을 설치했었다고 해요. 그리고 건곤무적 독고해는 그를 호위하던 삼십육 맹주친위대와 함께 그 관문을 모두 뚫고 갔다고 하더군요. 마지막 관문에 이르렀을 때는 그 혼자뿐이었지만…… 거기서 그는 교주님을 만났다고 하더군요."

 "교주?"

 한효월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는 어떤 사람이오?"

 "나도 몰라요."

 요광성주의 대답에 한효월은 어이없는 빛이 되어 그녀를 보았다.

 "모르다니? 그는 당신들의 사부가 아니오?"

 "사부이긴 하죠. 그는 우리들을 거두고 키우고 가르쳤어요. 하지만 그뿐. 우린 그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해요. 더 이상 아는 것도 허용이 되지 않았어요……."

 "그의 이름이나 용모도 모른단 말이오?"

 쓸쓸한 빛 한 가닥이 요광성주의 눈 속에 스쳐 갔다.

 "그분은 그저 교주님이죠. 사부로 부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어요. 그분의 모습은 나타날 때마다 틀려서 한 번도 같지 않았어요. 게다가 우리는 가끔 한 번씩 그분을 뵙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죠. 아마 지금 내 앞에 나타난다 해도 알아보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물었다.

 "그분이 지금 여기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 말이오? 이름도 용모도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분위기요. 그분께는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이 있어요. 그것만은 어떤 사람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거지요.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그 말을 하면서 요광성주는 은은히 공포의 빛을 드러냈다.

 한효월은 오랜 세월 동안 그녀가 제천교의 교주에게 훈육되면서 자연히 그를 두려워하게 되어 아마도 짧은 시간 내에는 그러한 생각을 버릴 수 없을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   *   *

 주루(酒樓).

 태평주루(太平酒樓)라고 쓰인 곳.

 거기 2층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관옥과 같은 용모를 가진 서생이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누런 안색에 흑의를 입은 대한인데 그는 허리에 한 자루의 직도를 매달고 있어서 아마도 앞에 있는 서생의 호위무사인 듯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깍듯한 인사와 함께 주루의 점소이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방이 있느냐?"

 서생이 말을 하면서 음식을 집어 먹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가 내려놓은 젓가락을 본 점소이의 안색이 묘하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 서생이 내려놓은 젓가락은 열십 자로 겹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우연일 리는 없으니 반드시 이유가 있을 터.

 "물론입니다. 저희 집에서는 깨끗한 방을 상시 준비하고 있습니다. 식사가 끝나시면 바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따로 시키실 것은?"

 점소이는 허리를 굽혀 보이면서 다시 물었다.

 보풍(寶豊).

 수백 호의 인가가 모인 곳. 물산(物産)보다는 교통의 요지로 인해서 이루어진 마을이다. 자연히 객잔과 주루가 발달하기 마련.

 태평주루 또한 그러한 곳 중 하나다.

 술을 마시는 주루와 잠을 잘 수 있는 객잔을 겸해서 전원(前院)은 1, 2층을 통틀어 주루였고 후원은 20여 개의 방과 별원 두 개가 있어 그 규모가 작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청의의 서생과 그 호위무사는 별원 한 채로 안내되었다.

 "달리 시키실 일은?"

 점소이가 물을 가져다 놓으면서 물었다.

 "목욕할 물을 준비해 주고 나머진 자네 용채로 쓰게."

 청의서생이 은자를 집어주자 점소이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미 더운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 별원에는 목욕탕이 준비되어 있으니 마음대로 쓰십시오. 그럼 소인은 이만……."

 그는 연신 절을 하면서 뒷걸음으로 방을 물러났다.

 그가 나가자 청의서생은 문을 닫아걸고는 잠시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그리고 그는 점소이가 놓고 간 주전자를 들었다.

 그 주전자 아래에는 몇 겹으로 접힌 종이 쪽지가 있었다.

 그것을 펴본 청의서생은 고개를 들어 우뚝 서 있는 호위무사를 보았다.

 "좀 쉬도록 해요. 이따 밤에 움직일 거예요."

 호위무사는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 쪽지에서 시선을 떼고는 말했다.

 "이곳도 제천교의 거점이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죠. 여긴 연락 거점 중 하나에 불과하니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청의서생이 유건(儒巾)을 벗으며 대답했다.

 그가 유건을 벗자 구름 같은 머리가 쏟아져 내렸다. 그는 남자가 아닌 여자인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한효월과 요광성주였다.

 거의 반나절을 두고 설득을 시킨 결과 요광성주는 한효월과 동행을 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실로 위험한 일로써 한효월의 정체가 발각나면 두 사람이 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제천교 내에서는 한효월을 본 사람이 제법 있어서 그냥은 불가능하고 그를 알아볼 수 없게 변장을 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얼굴빛이 누런 30대 후반의 무사로 변장한 한효월은 요광성주의 뒤를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한효월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두어 군데의 연락망을 거쳤는데 제천교의 연락망은 가히 천의무봉하여 길가 국수집에서도, 골목 어귀에서 노는 아이들까지도 그 전달자 중 하나였다.

 이런 정도의 조직이라면…….

 겨우 그것만 보았음에도 한효월은 마음이 심히 무거웠다.

 "언제나 이렇게 연락이 가능하오?"

 한효월의 물음에 요광성주는 피식, 웃었다.

 "본 교의 연락 방법은 매우 고명해요.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 일 년은 공부해야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연락 방법은 계속 변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일 당신이 여기에 찾아온다면 아마도 오늘의 이 연락 방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수도 있어요."

 "음……."

 한효월이 나직이 신음하자 문득 요광성주가 나직이 웃었다.

 "난 지금부터 목욕을 할 거예요. 같이 할 생각인가요?"

 "무, 무슨 말을……."

 한효월이 당황하여 더듬거렸다.

 요광성주는 깔깔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한효월은 그녀의 신형이 사라지자 암중에 머리를 저었다.

 그녀와 동행을 한 것이 과연 잘한 것인지 아닌지를 모를 지경이었다. 비록 반나절이었지만 여자와의 동행이 얼마나 신경 쓰이는 것인지를 그는 절실히 깨닫게 된 것이다.

 문 안쪽에서 물 끼얹는 소리가 신경을 자극한다.

 그녀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시험이라도 해볼 모양인가.

 쓴웃음을 머금은 한효월은 침상에 올라 옷을 입은 채로 눈을 감았다. 운기조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가 눈을 뜬 것은 밤이었다.

 그의 앞에는 이미 경장으로 차려입은 요광성주가 서 있었다.

 "가요!"

 그녀가 창문으로 신형을 날렸다.

 한효월이 창밖으로 날아 나가 보니 그녀는 이미 지붕을 밟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믐이 가까워 오고 달은 구름 속에 숨었지만 한효월은 앞서 달리는 그녀를 어렵지 않게 따를 수 있었다.

 요광성주는 미리 방향을 잡아둔 듯 서쪽을 향해 몸을 날렸고, 그들은 순식간에 보풍을 벗어났다.

 어둠을 뚫고 날아가고 있는 요광성주의 신형은 날렵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당도한 곳은 보풍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이랑묘(二郞廟)였다.

 그녀는 주위를 살펴본 다음에 이랑묘의 제단(祭壇)으로 다가갔다. 관리하는 사람은 잠이 든 듯 나와보는 사람은 없었다. 하긴 소리도 없이 담을 넘은 상태이니 누가 나와본다면 오히려 난감할 터이기도 했다.

 제단에 이른 그녀는 향불이 꽂힌 제단의 모래를 살펴보더니 그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잡혀서 빠져나온 것은 종이 쪽지 하나.

 "이상하군……."

 그 종이 쪽지를 살펴본 요광성주가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일……."

 한효월이 입을 열자 요광성주가 잠시 주위를 살펴보더니 머리를 저었다.

 "우선 이곳을 벗어난 다음에 말하자."

 말과 함께 그녀는 땅을 박차고 쏜살같이 이랑묘를 빠져나갔다.

 한효월은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함을 알고는 아무 소리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가 동행한 후로 그녀의 움직임은 매우 조심스러워 그 부담이 만만치 않음이 역력했던 것이다.

 이랑묘를 벗어나 1리쯤을 쉬지 않고 달린 요광성주는 길가에 있는 큰 잣나무 위로 올라갔다. 수백 년은 되었음직한 그 고목은 가지가 무성하여 몸을 숨기기 좋아 보였고 조망도 좋아 누가 다가오면 한눈에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린 지금부터 백여 리를 더 가야 해요."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시간을 가늠하더니 말을 이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가면서 생각해 봐야 될 거 같군요.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 않아요. 전에는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택하지 않았었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이길래……."

 한효월이 묻자 그녀는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쪽지를 찢어버렸다.

 "여기에는 백 리 밖에 있는 도문정(陶問亭)으로 가라는 지시가 있지만 실제로는 가짜예요."

 "가짜?"

 "그래요. 정말 명령은 그 제단 앞에 있는 휘장에 적혀 있었죠. 물론 해석할 수 없는 사람이 보면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겠지만."

 그녀의 말에 한효월은 내심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관찰력은 비범했다.

 무엇이건 한번 봐서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로서도 무엇으로 그 쪽지가 가짜이고 그 제단에 있는 휘장에 적혀 있는 것이 지시가 될 수 있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복잡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간단해요. 본 교의 연락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진짜이고 하나는 가짜예요. 그 구분은 전서의 내용에 달려 있지요. 가짜라면 진짜를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남겨져 있게 되는…… 이랑묘의 이 쪽지에는 바로 그 방법이 남겨져 있는데, 그게 그 이랑묘의 휘장이었어요."

 "언제나 그렇게 연락 전달이 복잡하오?"

 한효월이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복잡한 방법이 필요할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신비하고 비밀 유지에 좋기야 하겠지만 그녀에게서 들은 말 그대로라면 머리가 나쁜 사람은 지시 사항조차 제대로 받기가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요광성주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뇨. 우리 정도가 되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표기(標記)와 수하들이 받는 건 달라요. 좀 더 쉽고 간단하죠."

 그녀가 문득 안색을 굳혔다.

 "난 일이 실패한 것을 보고하고 다음 지시를 기다렸는데, 지금의 명령은 긴급 소집령이에요. 근래에 들어서는 삼환지령(三環旨令)이 발동된 적이 거의 없었는데 뭔가 일에 변동이 생긴 듯하군요."

 "삼환지령이 무슨 의미요?"

 한효월이 다시 물었다.

 "삼환지령은 긴급 소환령을 의미해요. 삼환이란 세 번 호출한 것과 같이 매우 급하다는 뜻이고 이 명령이 떨어지면 누구든 최단시간 내에 그곳으로 가야만 해요."

 "수뇌부라도 말이오?"

 "물론이죠. 이 명령은 하부자들이 받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럼 교주의 명령이란 뜻이오?"

 한효월의 질문에 요광성주의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교주님의 성지(聖旨)와는 조금 차이가 있어요. 성지를 받든 사명사자도 삼환지령을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 말의 뜻은 교주의 권능은 무상(無上)이라는 의미다.

 스스로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런 능력으로 군림하고 있는 제천교의 교주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한효월은 문득 그가 궁금해졌다.

 강호에 나오면서 한 번도 그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한 적이 없었다. 있었다면 수괴(首魁)의 정체를 밝히는 차원에서 생각을 해보았을 따름. 그러나 이젠 정말 그가 누군지 궁금했다.

 할 수 있다면 그를 만나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 힘을 가지고 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정말 같이 가야 하겠어요?"

 요광성주의 음성이 한효월의 생각은 깨어졌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이렇듯 돌연히 삼환지령이 발동된 것은 무엇인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의미해요. 평소라면 대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추측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당신과 같이 그곳으로 간다는 것은 너무도 위험해요. 그러니……."

 "이젠 돌아간다면 더욱 당신이 위험할 수 있소."

 한효월의 말에 이번에는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지금까지 당신이 한 말대로 제천교가 그처럼 대단하다면, 당신과 같이 있던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그도 표나는 일이 될 수 있기에 하는 말이오."

 그의 말에 요광성주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까짓 거도 처리하지 못할 것 같아요? 아뇨. 관두죠! 어서 가기나 해요. 자칫 늦으면 문책을 받게 될 거예요."

 가볍게 탄식을 흘린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그녀가 혼자 갈 듯이 나무에서 뛰어내려 전력으로 신형을 날림을 보자 한효월은 내심 놀라서 신형을 날려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얼마 가지 않아 한효월은 그녀의 뒤에 따라붙을 수 있었다.

 '나 때문에 화가 났다면 미안하오.'

 "아뇨. 화난 거 없어요."

 간단한 대답.

 그녀는 더 이상 답하지 않았고 머쓱해진 한효월은 입을 닫고 그녀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입을 다물고 신형만 날리자 그들의 속도는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과 같았다.

『대풍운연의』 제5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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