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首 장계취계(將計就計)
-적진에 숨어들다
개방은 제천교의 기습(奇襲)에 궤멸 위기에 놓이지만…….
소림사(少林寺).
무림에 몸을 담은 자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달마(達摩)라는 이름을 모르는 자 또한 누가 있을 것인가.
숭산(嵩山) 소림사라는 이름은 무림의 태산으로 자리한 지 오래. 하지만 무림이 아닌 이름 그대로의 소림사 또한 불가의 거대한 도량으로서 우뚝하다.
바로 선종(禪宗)의 본산이라는.
한효월과 헤어진 대명은 바람처럼 몸을 날려 소림사에 당도하였다.
그의 신분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도 소림사 장문인의 사제이니 그 배분이라면 소림사에서 장배(長輩)에 속한다. 그러니 그의 출입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발길이 향하는 곳은 후원이다.
대[竹]가 우거지고 속세를 벗어난 청량함이 느껴진다. 인적이 드물어 고요가 감돌아 흐른다.
"돌아오셨습니까?"
문득 대명보다 나이가 많은 승려 하나가 그의 앞에 나타나 반장(半掌)의 예를 갖춘다. 장문인 대광 대사의 시자(侍者)인 덕조(德助). 그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이곳은 소림사 방장실 앞인 까닭이다.
"음, 장문 사형께선?"
"예, 지금 계시지 않습니다."
"계시지 않다니?"
"화산의 무림대회에 가셨습니다."
대명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무림대회? 화산에 무슨 무림대회가?"
"소승으로서는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장문인 이하, 혜원 사숙조 등 고수들과 같이 가신 걸로 압니다."
"으음……."
대명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이번에 산을 내려갔던 것은 난데없는 무림맹주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장문인이 급거 산을 내려갔다가 맹주부의 변고로 인해서 소리없이 돌아왔었다. 그리고는 장보도의 일로 다시 고수들을 파견했고 이제는 장문인이 다시 화산으로 움직였다.
역대로 이렇게 급박하게 소림사가 움직인 적은 없었다.
대명은 그러한 상황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원래 그런 쪽으로는 관심이 없었다. 이번 운수행(雲水行)은 운수가 주가 아니라 장문인의 부탁으로 강호의 동정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었다.
그런데 막상 돌아오니 장문인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혜원 사숙조께서도 같이 가셨단 말인가?"
"예."
대명의 얼굴이 묘해졌다.
혜원 사숙은 소림사 최고 배분을 자랑하는 사람 중 하나다. 평소에 장로원에서 기거하며 사내의 일에 상관하지 않은 지가 이미 십 년. 그런데 그런 그가 왜 무림대회에를 갔다는 것인가.
"으음, 혜도(慧濤) 사백께 가봐야겠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중얼거리자.
"저……."
"왜? 무슨 다른 할 말이라도 있나?"
"혜도 사백조께서도 안 계십니다."
"혜도 사백께서 안 계시다니? 어딜 가셨단 말이냐? 설마 사백께서도 화산에 같이 가셨다는 말이냐?"
대명은 얼떨떨한 빛으로 되물었다.
"그건 아닌 듯…… 소승은 잘 알지 못합니다."
"설마 날 속일 생각은 아니겠지?"
대명이 눈을 부라렸다.
흉광이 번뜩인다.
"아, 아닙니다. 소승이 어찌……."
그의 기색을 본 덕조가 황망히 손을 내저었다.
평소 규범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그의 성격을 잘 아는 까닭이다.
"그럼 말해 봐. 설마 혜도 사백께서 장문 사형과 아무런 의논도 없이 산을 떠나셨단 말이냐?"
"그건……."
"호오, 말을 못하겠다는 겐가?"
대명이 성큼 한 발자국 다가서자 덕조는 흠칫,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정말 알지 못합니다. 다만……."
"다만?"
"다만…… 혜도 사백조께서는 장문인과 뭔가 의논을 하신 다음에 나한전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먼저 떠나시고 장문인께서는 혜원 사숙조님과 같이 화산으로……."
"가만! 뭐라고? 나한전의 제자들이라고 했나?"
"예."
"혜도 사백께서 나한전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떠난 게 사실인가?"
"그, 그렇습니다만……."
덕조는 당황한 빛으로 말끝을 흐렸다.
"같이 가신 게 아니란 말이지……."
"소승은 더 이상 아는 게 없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
대명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가 더 아는 것이 없든 있든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혜원 사숙이 장문인 대광 대사와 같이 산을 떠난 것도 뜻밖이다. 그러나 혜도 사백까지, 더구나 나한전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떠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대명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한전의 제자들이라면 소림사의 정예 고수들을 의미한다. 장문인이 그들을 이끌고 나갔다면 또 그런대로 이해가 가능하다. 그런데 장로원에 틀어박혀 있어야 할 혜도 사백이 그들을 이끌고 갔다면 그걸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인가.
"망할!"
갑자기 대명이 발을 굴렀다.
덕조가 놀란 눈을 꿈벅거리는 순간에 대명의 얼굴이 무섭게 그의 눈앞으로 들이닥쳤다.
"사, 사숙……!"
덕조가 놀라 캑캑거렸다.
대명은 그의 멱살을 바짝 움켜잡은 채,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말해 봐. 이 일에 대해서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이 누구지?"
"그, 그걸 소승이 어찌……."
"모른다는 말만 하면 그 뒤는 나도 책임 못 져. 무슨 뜻인지 알지?"
대명이 고리눈을 부릅떴다.
덕조의 반질반질한 대머리에서 식은땀이 솟아났다.
일단 생각한 것은 무조건 밀고 나가는, 도무지 타협이라고는 알지 못하는 대명의 성품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의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기에 그는 불호를 욀 수밖에 없었다.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저 멀리서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風磬)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고 있었다.
* * *
객잔(客棧).
만화루(萬華樓)라는 이름이 붙은 이 객잔의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초라했다. 식사를 할 수 있는 작은 주루의 2층에 자리한 이곳은 주루의 계단을 올라와 그 복도에 자리한 작은 방 10여 개가 고작이었다. 문을 열고 나서면 바로 난간 아래로 주루가 내려다보이는 형태였다.
그 만화루 이층의 방 한 칸에서 한효월은 탁자 위에 놓인 주사위 두 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점 하나와 점 셋의 수를 보이고 있는 주사위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가 문득 나직이 중얼거렸다.
"창어지괘(蒼魚之卦)…… 고기가 푸른 물을 만났으나 그 푸른 물이 하늘을 의미하는지 물을 의미하는지 알기 어렵다. 푸른빛이라 길괘(吉卦)에 해당하지만 바로 결과를 얻기 어려우니 시간을 두고 일을 진행시켜야 한다는 의미."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성이 녀석에게 현재로서는 그리 큰 위험이 없다는 뜻인가?"
주사위를 내려다보던 한효월은 침상에 길게 누웠다.
대명과 헤어진 그는 길을 재촉하다가 100여 리 떨어진 이곳에서 오늘 밤을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투숙한 이 객잔 탁자에 마침 주사위가 놓인 것을 보고 간단히 운세를 본 것이다.
아마도 먼저 있었던 사람이 일행과 주사위 놀음을 한 듯하지만…… 개방의 일도 궁금하고 유성의 일도 궁금했던 그는 나타난 운세를 보자 일단 개방 쪽 일을 알아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시일이 지나 유성의 뒤를 따라갈 단서가 사라진지라 초조했지만 이 창어의 괘는 서둘면 오히려 해가 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 대상이었던 유성의 행방을 찾아가는 행로는 일단 뒤로 미루고 과연 개방과 제천교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의 해석이 맞다면 유성의 행방은 저절로 알아질 것이기에.
그는 보지 않았어도 개방과 제천교의 충돌이 왜 서하곡의 앞에서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을 찾아 개방에서 출동하였기에 일어난 일일 터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이상, 이 일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당금의 형세에 있어서 개방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으므로.
생각을 정리한 한효월은 침상에 길게 누웠다.
얼마 만에 이렇게 누워보는지 생각이 나지 않을 지경이다.
눈을 감자 갖가지 생각들이 명멸했다.
그에게 있어 첫 여자인 서문운하.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선명하게 눈앞에서 피어 오른다.
그리고 다시 그 얼굴 위에 겹치는 또 다른 여인의 얼굴. 중조산 무우곡에 남겨두고 온 얼굴이다.
이심환(李尋環).
스스로의 한계를 잘 알기에 가까이 가기를 거부했던 여인이었다.
서문운하의 얼굴 위로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떠오름은 또 왜일까? 그녀가 행복을 찾아가기를 바라며 연락도 하지 않고 무우곡을 떠나왔었다. 그런데 서문운하와의 일로 10여 년을 지기(知己)로서 지낸 그녀에게 문득 죄책감이라도 들었던 것일까…….
나직이 한숨 쉬던 한효월은 문득 미간을 굳혔다.
"개방…… 복명(復命)……."
옆방에서 나직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가물가물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던 그의 정신이 번쩍 깨어났다.
공력을 운기하여 청력을 높였으나 더 이상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소리가 들린 옆방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투명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사물을 투과할 수 있는 천조신안이었다.
하지만 그가 천조신안을 운기하기 시작하자마자 가벼운 인기척이 일더니 그 방 쪽에서 사람의 기척이 사라졌다.
'창문?'
한효월은 급히 창문으로 다가섰다.
검은 그림자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어둠 속에서 지붕을 타고 사라지고 있었다.
한효월의 신형도 다급하게 창문을 빠져나갔다.
검은 그림자들의 신형은 매우 빠르게 마을을 벗어났다.
반 시진가량을 어둠 속에서 질주하자 그들의 앞으로 100호 정도의 촌락이 하나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은 그 촌락이 아니라 그 촌락 외곽에 자리한 커다란 도관(道觀)으로 향했다.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그 도관의 후전으로 스며들었다.
<무진궁(無眞宮).>
흑의인 두 사람이 당도한 도관의 이름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전원과 후원이 구분되어 있었고, 숲으로 둘러싸인 후원 쪽으로는 불도 켜 있지 않았다. 하나 그 후원의 어둠 속으로는 뜻밖에도 암중 경계가 삼엄했다.
한효월이 숲 속에 은신하자 그가 따라왔던 흑의인들 둘은 어둠 속에서 나타난 흑의인에게 신패(信牌)를 보이고는 후전으로 들어갔다.
조금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십여 명이 신패를 확인하고는 후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효월은 소리도 없이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채 반각이 지나지 않아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한효월은 불쑥, 그의 앞에 나타났다.
"누구요?"
그가 주춤 뒤로 물러서면서 경계 태세를 취했다.
"왜 이렇게 늦은 거요?"
한효월이 음성을 차갑게 바꾸어서 물었다.
"그, 그건……."
그의 물음에 당황해 대꾸하려던 흑의인은 놀란 빛으로 물러서려다가 그만 앞으로 쓰러졌다.
한효월이 소리도 없이 손을 써 그의 가슴팍 현기혈(玄機穴)을 찔러 버렸기 때문이다. 현기혈은 사람의 구대훈혈(九大暈穴) 가운데 하나로서 점혈이 되면 정신을 잃고 쓰러지게 된다.
그를 제압한 한효월은 그를 안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품속을 뒤져 보자, 몇 가지 물건과 함께 동패 하나가 나왔다. 거기에는 북벌동위구(北伐銅衛九)라고 새겨져 있었다.
"과연 제천교였군."
중얼거린 그는 흑의인의 현기혈을 풀어주었다.
그는 나이 마흔 정도였는데, 얼굴은 조금 긴 편이지만 평범한 용모로 장도(長刀) 하나를 차고 있음을 보아 도법을 수련한 것 같았다. 한효월의 기습을 알아차린 것으로 보아 무공은 그리 약하지 않을 터였다.
"끄응……."
정신을 차리던 그는 한효월을 발견하고 급히 일어나려고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음을 느끼자 굳은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당신은……."
"무진궁에서 누구를 만나기로 되어 있나?"
한효월이 물었다.
"그건……."
"긴말은 서로를 피곤하게 할 뿐이지."
한효월이 그를 노려보았다.
과아아∼
어둠 속에서 강렬한 눈빛이 전광과도 같이 그를 압도하며 일어났다. 그 눈빛에 어린 기세는 그 장한을 마치 살모사 앞에서 떨고 있는 개구리처럼 만들기에 족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심신을 압도당해서 입을 열지 않고 배길 수가 없도록 하는.
잠시 후, 한효월은 그의 옷을 벗겨 입고 장도까지 차고서 무진궁에 이르렀다.
그자는 2, 3일 후에나 깨어날 것이었다.
마침 그의 앞으로 흑의인 한 사람이 신패를 보이고 통과를 하던 중이라 그는 걸음을 조금 빨리해서 그의 뒤를 따르면서 신패를 내보였다.
아무 말 없이 좌우에서 나타났던 두 흑의인이 담장 그늘로 숨어들었다.
앞서가는 흑의인을 따르면서 한효월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무진궁의 내전은 전원과 담장으로 격리되어 있는데, 전원과 통하는 문은 닫혀 있었다.
그뿐, 주위는 어둠에 묻혀서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앞선 흑의인은 옆도 돌아보지 않고 내전의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한효월도 주위를 살펴보기보다는 안으로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겉보기로는 불도 꺼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창문에다 두터운 천을 드리운 것뿐, 내전의 안쪽으로는 등잔이 밝혀져 있어서 전혀 어둡지 않았다.
내전에는 열대여섯 명의 흑의인들이 숨소리도 내지 않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포단도 없는 바닥이었지만 누구 한 사람 불평은 없었고, 한효월의 앞서 들어온 흑의인도 들어온 순서대로 그 뒷자리에 그냥 앉았다.
그것을 본 한효월도 그 뒤에 따라 앉았다.
아무래도 앞자리보다야 뒷자리가 사방을 살펴보기에 편할 것이다.
한효월이 들어선 다음에 두어 명이 더 들어왔고 앞쪽에서 차고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모두 모였느냐?"
말소리와 함께 흑의몽면인 한 사람이 내전의 신상 옆에 달린 문에서 걸어 들어왔다.
등불이 사방 벽에 밝혀진 가운데, 어둠에 묻힌 곳에서 그가 걸어나오자 마치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듯 보여 괴이했다.
그의 뒤를 따라 흑의검수들 둘이 나타나 호위하듯 좌우로 벌려 섰다.
그 가운데 선 흑의몽면인은 한 자루 보검을 옆구리에 찼고 몽면 속에서는 음성만큼이나 차가운 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예, 모두 도착했습니다."
흑의인 한 사람이 일어나 그를 향해 복명했다.
노자신상 앞에 우뚝 선 흑의몽면인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싸늘히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본 성주가 너희들을 인솔한다. 모든 일은 내 지시를 따르되, 한 치라도 어긋난다면 법대로 처리할 것임을 명심하도록. 시간이 없으니 바로 출발하기로 하겠다."
흑의몽면인의 음성은 차고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의 왜소한 몸매는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
"누구 질문있나?"
그녀가 차가운 눈길로 사람들을 쓸어보았다.
"……."
조용했다.
아무도 시선을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묻는 사람도 없었다. 원래 제천교의 조직 자체가 상좌(上座)가 하는 일을 물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에 물을 이유도 없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이들이 자신의 직속 부하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광성주…….'
한효월은 그런 그를 보면서 내심 흠칫하여 중얼거렸다.
뜻밖에도 나타난 그 흑의몽면인은 요광성주였던 것이다.
그녀는 제천교 내의 제천칠성 중 하나다.
한효월이 알기로 제천교의 중심 세력인 오방후와 그 제천칠성들은 사이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오방후 중 한 사람인 북벌후의 부하들을 통솔하게 된 것은 실로 의외라 할 만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효월은 그녀가 내전을 벗어남을 보자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한효월은 그녀가 자신을 알아볼까 해서 고개를 숙인 채 감히 들지 못했었다.
그녀가 자신의 앞으로 스쳐 지났기 때문이다.
* * *
내전을 벗어난 그녀가 앞서 신형을 날리자 다른 사람들은 일제히 그 뒤를 따랐다.
상당히 훈련이 잘된 고수들이었다.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가고 있음에도 인기척은 전혀 나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빠른 속도로 달림으로 인해서 이는 옷자락 나부끼는 소리뿐.
그들은 어둠 속을 뚫고서 밤을 도와 숲을 가로질렀다.
그들이 걸음을 멈춘 것은 거의 100여 리를 주파한 다음이었다.
어둠은 여전히 세상을 덮고 있었다.
저 멀리 여명이 쫓아오고 있겠지만 아직은 어둠을 밀어낼 힘을 가지지 못했다.
"잠시 쉰다."
그들을 앞서 이끌던 흑의인이 요광성주의 명에 따라 말했다.
흑의인들이 모두 숲 속에, 바위에 기대앉아 휴식에 들어갔다. 사람에 따라서는 품속에서 건량을 꺼내서 씹는 사람도 있었다.
한효월은 되도록 요광성주에게서 떨어진 곳에 앉아서 운기조식하는 척, 눈을 감고 있었다.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는 것이기에 이렇게 밤을 도와 가는 것일까?'
한효월은 앞선 몇 사람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것을 보고 내심 생각했다.
그렇게 급하게 달려오다가 여기서 쉰다는 것은 목적지가 멀지 않다는 것을 의미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의 그런 생각은 과연 어김이 없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그곳에서 10여 리가량 떨어진 농원(農園)이었다.
어스름한 어둠 속에 자리한 농원은 십여 채의 농가가 모여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창고로 보이는 서너 채의 건물이 있고, 바람을 막는 잡목 숲을 등지고 서너 채의 농가가 보인다. 그중 가운데 있는 농가는 다른 곳보다 조금 규모가 컸다.
요광성주 일행은 농가가 바라보이는 언덕배기 숲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일행과 합류하게 되었다.
어둠 속인지라 얼마나 되는 인원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사방에서 은밀히 움직이고 있는 자들을 느낄 수 있었다.
얼핏 보이는 인원만 해도 적지 않았다.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일까?'
굳이 생각을 굴려보지 않아도 그들의 목표가 눈앞에 내려다보이는 농가임을 알 수는 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이렇게 은밀히 움직이면서 치려는 대상이 누군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요광성주를 맞이한 것은 숲 속에서 나온 흑의인이었다.
그는 깍듯한 예를 갖추며 그녀를 앞쪽으로 안내했다.
한효월 등은 그 자리에서 몸을 숨긴 채로 명령을 기다리게 되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지만 그들은 그것이 당연한 듯 흩어져 숲 속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흐트러진 움직임도 잡담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옆 사람을 상관하지도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혹은 눈을 뜬 채로 그들이 배당받은 자리에서 묵묵히 명령을 기다릴 따름이었다.
그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중간에 끼어든 한효월은 스스로를 숨길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광성주가 안내된 곳은 그들과 4, 5장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그런 정도의 거리라면 한효월의 능력으로 충분히 동정을 엿볼 수가 있었다.
한효월은 가늘게 눈을 뜨고서 요광성주가 간 쪽을 바라보았다.
"예상보다 늦었군."
침착한 음성이 그녀를 맞았다.
녹삼을 걸친 문사였다.
매부리코에 길고 날카로운 눈매. 짧은 팔자수염. 전형적인 모사의 생김을 가진 그는 제천교의 오방후 중 북벌후였다.
그가 있는 자리에는 요광성주보다 먼저 온 몇 사람의 흑의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앞쪽,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관목 숲 언덕 아래쪽으로는 바로 어둠 속에 자리한 그 농장이 내려다보인다. 이를테면 이 자리는 그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요지인 셈이었다.
"동위(銅衛)를 인솔해 오느라고 늦었어요. 그 명령을 내린 사람은 후야(侯爺)가 아니던가요?"
요광성주가 말을 받았다.
"곧 날이 밝을 거요."
옆에서 한 사람이 낮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마치 장작개비처럼 마른 사람이었다.
그는 흑포(黑袍)에다가 풍덩한 흑건을 뒤집어써 전신에 드러난 것은 흑건 속에서 빛나는 음산한 두 눈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마치 늑대의 것처럼 빛을 발하는 그의 두 눈은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고 남음이 있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흑포가 펄럭거리니 마치 허수아비에다 옷을 걸쳐 놓은 듯하여 더욱 괴기하였다.
"이제 모두 도착했으니 정확히 일각 후에 공격을 시작하도록 합시다."
북벌후가 말했다.
"그가 저 농원에 정말 있는 건가요?"
시선을 돌려 어둠 속에서 자리한 농원을 힐끗 내려다본 요광성주가 물었다.
"물론."
"그는 행적이 표홀한 자예요. 그간 수없이 우리 일을 방해했지만 한 번도 능동적으로 그를 잡을 수가 없었는데, 어떻게 그가 은신하고 있는 곳을 알아낸 거죠?"
음산한 웃음이 북벌후의 얼굴에 떠올랐다.
"한번 당했다고 계속 당한다면 말이 안 되지! 제아무리 개방이라고 해도 어찌 본 교의 이목을 벗어날 수야 있을까? 준비하시오."
그가 손에 들었던 섭선을 탁, 치고는 시선을 돌렸다.
오늘의 일을 계획한 것은 그였고 이 일의 책임자도 그였다.
일단 일이 시작되면 그의 말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요광성주가 자신의 곁을 따르는 수신호위에게 나직이 명을 내렸다.
저 멀리서 어둠이 새벽에 쫓겨 흩어지고 있었다.
원래 이 농원 주변에는 경계가 있었다.
특히 농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이 산등성이에는 당연히 주위를 감시하는 척후가 있기 마련이다. 이곳이 단순한 농원이 아니라면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그래서 제천교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척후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외부로 통하는 연락망을 차단하고, 그들이 의도한 대로 공격을 한다면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 꼴이라 결코 요행을 바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오늘을 위해서 제천교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오던 차였다.
첫 번째로 명령을 받은 것은 한효월 등이 속한 동위였다.
그들은 중간 책임자인 동령(銅令)의 명령 일하에 최대한 은밀히, 또한 가장 빠르게 농장을 향해서 달려갔다.
마치 검은 물결이 아래로 쏟아져 내려가는 것 같았다.
한효월도 예외가 될 수 없어 거기에 묻혀 같이 달려가야 했다.
그 와중에 한효월은 요광성주가 북벌후와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습격당하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건가요?"
요광성주의 물음에 북벌후가 나직이 웃었다.
"개방의 황엽은 결코 간단한 자가 아니지. 바보가 아닌 바에야 그들도 이미 준비를 하고 있을 거요. 하지만 저들 동위의 타초경사(打草驚蛇) 일격에 그들의 반응이 어떨지 한번 두고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 거기에 신경을 빼앗기는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후후후……."
그 말에 한효월은 내심 놀라 하마터면 뒤를 돌아볼 뻔했다.
이제 보니 그들은 개방을, 그것도 개방 방주를 막다른 곳에 몰아넣고 그를 사냥을 하기 위해서 병력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개봉으로 개방총단을 찾아갔었더라면 허탕을 치고 말 뻔했다.
한효월은 조금 신형을 빨리해서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추면서 마침 옆을 스치는 나무를 이용, 슬쩍 북벌후 등이 있는 자리를 쳐다보았다.
방금까지 있었던 그 흑포괴인이 찰나간에 보이지 않았다.
'타초경사라…….'
한효월은 그 말을 되뇌었다.
말 그대로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한다는 뜻이다.
병가(兵家)에서는 가장 바보 같은 짓으로 여겨지는 그 말을 저자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한효월이 생각을 굴리고 있는 사이에 그들 스무 명은 이미 목표인 농가에 도달하고 있었다.
앞선 두 사람이 조금도 망설임없이 농가의 문을 박차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농가의 문은 제법 튼튼했지만 무림고수의 발길질을 견딜 만큼 튼튼할 수는 없었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안쪽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들 둘은 날듯이 장도를 휘두르면서 안으로 덮쳐 갔다.
쨍쨍!
날카로운 금속성이 안에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비명도 무엇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달려 들어감과 동시에 뒤를 이어 두 명이 바닥으로 몸을 굴려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들에게서는 금속성마저 들리지 않았다. 그저 깊은 물에 조약돌이 빠져 버린 듯이 고요할 따름.
농가는 세 채가 연결되어 있었다.
앞에 한 채는 정문처럼 자리했고, 뒤의 두 채는 앞채에 연결된 담장 안에 같이 있었다.
다시 말해 앞의 한 채는 대문과도 같은 곳이고, 뒤의 농가들은 본가의 가족이 사는 후원이라 할 수 있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첫 농가를 돌파하여 농가의 마당을 지나야만 했다.
그러니 습격은 당연히 첫 번째 농가에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예측과는 달리 전개되고 있었다.
북벌후는 이런 상황도 이미 계산에 둔 듯했다.
그가 신호를 보내자 동위가 첫 번째 농가를 덮치고 있는 동안에 좌우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담장을 넘어 뒤쪽 농가로 밀려 들어갔다. 그 숫자는 실로 적지 않아서 4, 50명이나 되었다. 검은 물결이 노도와 같이 어둠을 타고서 밀려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상대방에게서는 아무런 대응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집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만 사라질 따름이었다.
괴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뒤쪽에 있던 한효월은 다시 두 명의 동위가 문 안으로 덮쳐 들어가는 순간에 그들의 뒤를 따라 바람처럼 첫 번째 농가의 안으로 들어갔다.
짙은 어둠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농가의 안은 불빛 한 점 없었다.
창문까지 모두 봉해서 전혀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은 밝은 곳에서 암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일시지간 시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 상태에서 공격을 당하니 실제로는 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습격을 당하는 것과 같았다.
한효월은 앞선 동위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에 그가 쓰러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직도(直刀)를 휘두르며 안으로 덮쳐 들어갔던 두 명의 동위는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에 앞에 쓰러진 동료의 시체에 발이 걸려 주춤하다가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한효월은 그것이 어둠 속에서 날아드는 암기로 인한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비도(飛刀) 따위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소리도 없이 날아드는 암기를 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겨우 암기를 피한 다른 동위는 채 신형을 가누기도 전에 억눌린 신음과 함께 전신을 격렬히 떨었다.
그의 심장을 깊숙이 찌르는 검으로 인해서였다.
쨍!
한효월은 자신의 목젖을 향해 날아드는 암기를 쳐냈다.
그 순간, 다시 옆에서 검이 날아들었다.
놀라울 정도로 잘 훈련된 연수합격(聯手合擊)이었다.
암기를 날리고, 그 틈에 다시 쾌검(快劒)이 공격하고…… 어떤 고수라도 순간적으로 어둠이 찾아든 이런 상황에서는 정말 피하기 어려운 공격이었지만 이미 무공이 한 단계 달라진 한효월에게까지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슬쩍 신형을 이동하면서 수중의 장도로 상대의 검을 막아냈다.
그리고 그가 뭐라고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윽……!"
갑자기 그를 공격하던 검수(劒手)가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뿐만 아니라 약간 앞쪽에서 연신 암기를 날리던 자도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한효월이 주춤하는 사이에 제천교도를 공격하던 세 명의 개방고수가 속절없이 쓰러져 죽었다. 한효월은 이미 이 집 안에서 그들을 공격하던 개방고수가 모두 네 명임을 알아본 상태였다.
셋이 쓰러지자, 결국 한 명만 남은 셈이었다.
자리를 잡고 공격하던 네 명의 고수 중 세 명이 한꺼번에 쓰러져 버리자 상황은 돌변하여 동위들은 찰나간에 집 안을 장악하면서 안으로 몰려들었다.
"손을 멈춰."
동위 대여섯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홀로 남은 개방고수가 나직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누가 그 말을 들을 것인가.
그러나…….
"그만둬. 그는 한편이다. 공격하지 마라!"
차가운 음성이 들려오자 동위들은 모두 무기를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그 집의 뒤쪽 문이 열리며 수신흑의대의 호위를 받으며 한 사람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좋아, 좋아…… 아주 좋군!"
그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나직이 웃었다.
그야말로 바로 북벌후였다.
이제 보니 그는 뒤쪽에서 지시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움직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점은 한효월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의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더욱 그러하였다.
"황엽은 안에 있나?"
북벌후가 앞에 선 개방고수에게 물었다.
"그렇…… 소."
개방고수가 잠시 침음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을 본 한효월은 하마터면 신음을 흘릴 뻔했다.
그 개방고수는 다른 사람이 아닌 개방의 옥면무영 호일랑이었던 것이다.
'설마…….'
한효월은 눈앞의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옥면무영 호일랑, 개방의 방주 황엽의 사제인 그가 개방을 배신하다니……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보면서도 자신의 눈을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집 안의 개방고수들을 쓰러뜨린 사람은 정말 옥면무영 호일랑이었다. 그가 뒤에서 손을 쓰자 나머지 고수 셋은 영문도 모르고 쓰러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 대 개방의 방주로까지 지목되던 옥면무영 호일랑.
그가 개방을 팔고, 사형인 개방주 황엽까지 제천교에 넘길 위인일 줄이야!
"좋아, 오늘 황엽을 잡는다면 네 공이 크니, 반드시 교중에 중용(重用)될 수 있을 것이다."
북벌후가 그를 칭찬했다.
그 말에 옥면무영 호일랑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나는……."
뭔가 말을 하려던 그는 길게 한숨 쉬고는 북벌후를 쳐다보았다.
"그보다…… 나와의 약속을 잊지 마시오."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일그러져 있는 듯했다.
"물론이지, 자 그럼 가보기로 할까? 앞장서 길을 열도록 하지!"
북벌후가 음침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라는 의미다.
그의 턱짓에 따라 옥면무영 호일랑은 한차례 발을 구르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빨리 그의 뒤를 추격해라!"
북벌후가 차갑게 소리쳤다.
엉거주춤해 있던 동위들이 그 명령에 몸을 돌려 방금 나간 옥면무영 호일랑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효월도 거기에 속해 있었다. 막 신형을 돌리던 그는 바닥에 쓰러진 회의인, 개방의 고수 하나의 손이 미미하게 움직이는 것을 얼핏 보게 되었다.
'배신을 했으되, 아직 정리(情理)는 남아 있었던가?'
한효월이 내심 신음하였다.
개방고수는 즉사하지 않은 듯했다.
아마도 마지막 순간에 손에 사정을 남겨둔 듯하지만 그가 살아 있음이 발각되는 즉시 죽음을 면치 못할 터였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매우 긴박하여 어쩌면 그가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한효월이 동위와 함께 앞서 가는 옥면무영 호일랑의 뒤를 추격하여 첫 번째 농가를 빠져나가는 순간에 북벌후의 뒤쪽으로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요광성주였다.
"언제 그를 포섭한 거죠?"
그녀는 고함을 지르면서 앞을 가로막는 흑의인들을 돌파하고 있는 옥면무영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본 교가 하고자 한다면 무슨 일은 못하겠소?"
북벌후는 음산히 웃었다.
"오늘 황엽은 결코 내 손을 벗어나지 못할 거요. 그는 가장 믿었던 사제에게 배신을 당하면서 뼈저리게 후회를 하게 되겠지. 감히 본 교에 대항하려 들었던 것을…… 흐흐흐……."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그는 바깥을 내다볼 뿐,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늘 이 농원으로는 모두 오로(五路)의 인마가 당도했는데, 현재 모습을 드러내고 공격하고 있는 것은 불과 이로(二路)의 인마일 뿐이니……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 거지?'
요광성주는 오방후 중에서 가장 심기가 뛰어나다는 북벌후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교중의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서 그녀의 위치는 전과 같지 않았다.
"감히…… 비키지 못하겠느냐!"
옥면무영 호일랑은 고함과 함께 수중의 타구봉을 휘둘러 앞을 가로막는 흑의인들을 공격했다.
그의 공력은 이미 경지에 올라 그가 전력을 다하자 땡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앞을 가로막던 흑의인의 검이 뚝 부러져 나갔다. 흑의인들이 피를 뿌리며 튕겨졌다.
수십 명의 흑의인들 사이를 헤치며 달려가는 그의 무공은 가히 신위라 불리울 만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흑의인들은 그를 죽이지 않도록 명령받고 있었기에.
그렇게 해서 옥면무영 호일랑은 삽시간에 뒤쪽에 자리한 농가에 도달하게 되었다.
"문을!"
농가에 당도한 그가 소리쳤다.
옥면무영 호일랑이 가히 인해(人海)의 숲을 헤치면서 당도하자 굳게 닫혀 있던 농가의 문이 열리면서 그를 맞아들였다. 맞아들였을 뿐 아니라, 두 명의 회의인이 나와서 그가 무사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엄호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허장성세로 장도를 휘두르며 그 뒤를 따르는 한효월은 내심 다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말 그대로 늑대를 집 안으로 들여놓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어야 할지 아닐지 순간적인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를 드러내어 안으로 치고 들어가면 지금 상황에서는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고, 옥면무영 호일랑의 배신을 응징할 수도 있을 터였다.
와장창!
흑의인 하나가 창문을 깨고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것을 본 한효월은 바람처럼 그 뒤를 따라 농가 안으로 들어갔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 저들의 눈을 피하면서 대처를 할 생각인 것이다.
두 채의 집이 연결된 농가는 예상보다 넓었다.
농가의 안에는 이미 10여 명의 흑의인들이 난입하여 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7, 8명의 회의인들이 그들을 맞아 싸우고 있었다.
어둠 속이지만 그들이 바로 방주를 호위하는 수신구룡 중 몇과 개방의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안으로 진입한 흑의인들이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었다. 무공에 현격한 차이가 나서라기보다는 뭔가 이상한 향기가 농가 내에 가득 차 있는 듯했다.
한효월 또한 그 향기를 맡는 순간, 그것이 미혼향의 일종임을 깨닫고 급히 숨을 멈추었다.
어둠 속에서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에 이런 향기를 맡고 아찔해지면 그 다음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흑의인들이 힘을 쓰지 못하고 쓰러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쨍쨍! 무기 부딪는 소리와 비명이 뒤섞여 급박하게 들리는 가운데 차가운 빛이 번뜩이면서 막 안으로 들어선 한효월을 향해 날아들었다.
한효월은 날아든 대도를 자신의 장도로 슬쩍 밀어내고는 옥면무영을 찾았다.
그는 이미 개방의 고수들 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조심하시오!"
한효월이 소리치면서 그쪽으로 덮쳐 갔다.
순간이다.
"농가 안에 미혼향이 가득 차 있다! 숨을 쉬지 마라!"
어디선가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와장창!
회의인들이 막고 있던 문짝이 부서지면서 흑의인들 10여 명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들의 숫자가 급증하자 개방의 고수들은 이미 약속한 바가 있는 듯 일제히 안쪽으로 물러섰다.
'황 방주는 어디 있는 걸까?'
한효월은 주위를 둘러봐도 그가 보이지 않자 괴이했다. 그의 성품이나 무공으로 보아 이렇듯 수하들의 뒤에 숨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옥면무영이 그들과 같이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한효월은 다급하게 그 뒤를 쫓았다.
휙휙- 좌우에서 도검이 날아들었다.
"비키시오."
그들이 수신구룡 중 두 사람임을 알아본 한효월은 나직이 소리치면서 수중의 장도를 쳐냈다.
"윽?"
쨍, 쨍! 도광이 번뜩이는 가운데 두 사람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 뒤로 물러나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한효월의 일도에 실린 힘이 가공하여 하마터면 그 충격으로 들고 있던 도검을 떨어뜨릴 뻔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물리친 한효월은 다른 흑의인들보다 가장 먼저 안쪽으로 진입할 수가 있었다.
그곳은 일종의 객청(客廳)으로써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청보다 규모는 작지만 그 농가를 지킬 수 있는 요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효월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순간, 펑! 하는 굉음과 함께 객청의 한쪽 벽이 터져 나가면서 한 무리의 흑영이 질풍처럼 쇄도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으악!"
마침 그쪽으로 물러나 있던 개방고수가 다급히 수중의 철곤을 휘둘렀지만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단말마의 비명.
미처 상상치 못했던 일.
이 농가의 벽은 상당히 두터워서 무림고수라고 할지라도 쉽사리 돌파할 수 없는 것이라 흑영의 출현은 그만큼 갑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허를 찔린 형태이고, 앞을 경계하면서 뒤로 물러서던 개방의 고수들은 뒤를 공격당한 셈이라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으아악!"
또 다른 개방고수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머리가 마치 깨진 수박처럼 앞선 흑의인의 손에 의해 터져 나갔다.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북벌후와 같이 있다가 사라진 그 흑포인이었다.
그 흑포인은 검은 유령과도 같이 달려들고 있는데 한효월과 같이 움직이고 있는 동위와는 차원이 다른 고수였다. 더구나 그의 뒤에는 그와 같이 움직이는 흑포인이 다섯이나 더 있었다.
"물러나!"
옥면무영이 수중의 검을 앞선 그 흑포인에게로 던지면서 소리쳤다.
"흥!"
흑포인이 코웃음 치면서 날아든 검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옥면무영이 날려 보낸 검에는 진기가 실려 고막을 찢는 파공성이 울려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흑포인은 마치 수수깡 막대를 잡듯 그 검을 잡았고, 놀랍게도 그의 손에 잡힌 검은 깨진 얼음 조각처럼 부서져 내렸다.
자신을 향해 날아든 옥면무영의 검을 그렇게 부수면서도 그는 앞으로 덮쳐 가는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마치 검은 파도가 사납게 덮쳐 가는 것 같은 기세였다.
그의 등장은 확실히 의표를 찔렀다. 균형을 이룬 형세가 삽시간에 큰물에 방죽이 허물어지듯이 무너져 버렸다. 서너 명의 동료가 쓰러지는 가운데 전세가 기울자 개방고수들은 망설이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크크크……."
그것을 보자 음산한 웃음이 흑포괴인에게서 흘러나왔다.
그 웃음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는 이미 문 쪽으로 물러선 개방의 고수를 덮쳐 가 그 손을 내밀고 있었다.
괴이한 경력이 그 손에서 소용돌이치면서 일어났다.
'으윽!'
개방의 고수들은 방주의 수신호위인지라 무공이 약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에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흑포괴인의 무공은 괴기하기 이를 데 없어서 어떻게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뒤로 물러날 수조차 없었다. 괴이한 흡력이 흑포괴인의 손에서 일어나 그를 잡아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다해서 양손을 연달아 쳐냈다.
찰나.
흑포괴인의 눈빛이 흉포히 일그러졌다.
갑자기 개방고수의 뒤에서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나 그를 향해서 일장을 쳐왔던 것이다. 그 위세는 실로 간단치 않아서 흑포괴인도 쉽사리 볼 수가 없었다.
"크와악!'
흑포괴인은 괴성과 함께 갈고리처럼 뻗어냈던 양손을 끌어 잡아당겼다.
콰쾅!
폭음이 터져 나왔다.
맹렬한 경기가 소용돌이치며 일었다.
하지만 흑포괴인은 한바탕 어깨를 부르르 떨었을 뿐, 여전히 앞으로 덮쳐 갔다.
놀라운 무공을 지닌 자였다.
"제천교 천마각(天魔閣)에 귀신들이 산다더니 네놈도 그 귀신 중 한 놈인 게로구나. 옜다! 이거나 먹고 뒈져라!"
그런데 문 안에서 그를 막은 사람이 껄껄 웃더니 갑자기 검은 공 같은 것을 밖으로 던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흑포괴인을 향해서가 아니라, 방바닥을 향해서.
바보가 아니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다. 더더구나 흑포괴인처럼 놀라운 고수 앞에서…….
거기에 더해 코끝을 스치는 화약 냄새.
"망할! 화기(火器)다! 피햇!"
앞으로 덮쳐 가던 흑포괴인이 고함치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의 좌우에 있던 흑포괴인들이 바람처럼 흩어졌다.
그 뒤를 따르다시피 하고 있던 한효월도 번개처럼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화약은 터지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것은 화탄(火彈)이 아니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둥근 공 같은 것이었는데 떨어지자마자 화약 냄새를 풍기면서 깨져 버리고 말았다. 화약 냄새가 진동을 하긴 했지만 화약이란 게 던진다고 터지는 건 아니다.
황급히 뒤로 날아갔던 우두머리 흑포괴인은 찰나간에 속았음을 깨닫고 불같이 노했다.
그사이에 개방고수들은 이미 문을 닫고 안으로 사라진 다음이었다.
"으흐흐흐……."
괴기한 웃음소리가 무서운 살기를 담고 흑포괴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는 깡마른 손을 들어 닫힌 문을 쳐갔다.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가운데 그의 손은 찰나간에 허공을 가로질러 그 문을 치고 있었다.
콰작!
채 손이 닿지 않은 상태에서 무형의 경력에 의해 문짝이 맥없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나갔다.
그가 안으로 쳐들어가자 나머지 흑의인들도 뒤따랐다.
이 농가는 이 지방의 토호(土豪)인 듯 농가의 규모는 실로 작지 않았다. 흑의인들이 날아 들어가면서 동위들도 뒤를 따라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때, 같이 들어가려던 한효월은 갑자기 멈칫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거의 독 안에 든 쥐 꼴이 된 개방의 방주 황엽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에서 기인한 의혹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때 요광성주가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전세는 제천교에 완전히 장악된 상태인 듯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다른 쪽에서 수신호위들의 옹위를 받으며 북벌후가 여유만만하게 안으로 들어서고 있음이 보였다.
바로 그 순간, 쾅!
안쪽에서 폭음이 터지며 격렬한 음향이 들려왔다.
'위험!'
본능적으로 외친 한효월은 뒤로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 거대한 파장과 함께 집 안 전체가 한꺼번에 화염에 휩싸였다.
쾅! 콰콰쾅!!
폭음이 연달아 터지면서 집 안이 온통 불덩어리로 변해 버렸다.
"으으……."
"크으으……."
신음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인다.
불길이 널름거리면서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 연기가 하늘을 가릴 듯 피어 오른다. 금방까지도 흑의인들의 살기등등함에 짓밟히던 농가는 한순간에 불바다가 되어버렸다.
그들 모두를 삼키면서…….
가장 동작이 빨랐을 한효월도 완전히 무사할 수는 없었다.
뒤로 몸을 날리면서 호신강기를 일으킨 덕에 다행히 전신이 타버리는 횡액은 면할 수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도 무사할 수는 없었을 정도로 폭발은 강력했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당신은?"
그의 밑에서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요광성주였다.
그녀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한효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폭발에서 그녀는 한효월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가 몸을 날리면서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그녀를 낚아채면서 밖으로 뛰쳐나갔기에.
그렇게 되어 폭발에 휘감긴 그와 그녀는 한 덩이로 구르게 되었고 지금은 한효월의 밑에 깔려 있게 된 것이다.
"……."
한효월은 아무런 말 없이 머리를 흔들어 보이며 몸을 일으켰다.
"……."
요광성주는 믿기지 않는 듯 그를 쳐다보면서 그녀도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더 이상 그를 향해 말은 하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북벌후의 신음이 들려왔기에.
옷자락 군데군데가 불타고 머리카락과 수염까지 그슬린 상태. 형편없이 낭패한 모습인 그는 망연자실(茫然自失), 불길에 휩싸인 농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중의 격동을 말하듯 불빛에 드러난 그의 창백해진 얼굴은 연신 경련을 일으킨다.
어둠을 밝히면서 농가는 타오르고 있었다.
악마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불길은 폭발에도 굳건히 버티고 선 농가의 기둥을 휘감으면서 시커먼 연기를 뿜어낸다. 사방 여기저기에서 폭발에 날아간 흑의인들이 꿈틀거리고 있어 농원은 갑자기 한 폭의 지옥도로 화하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믿기지 않는 듯 북벌후가 수염을 떨었다.
그가 농가로 투입한 인원은 거의 전멸을 면치 못했다.
그때였다.
콰다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길에 휩싸인 농가에서 불길에 휩싸인 흑의인 하나가 뛰쳐나왔다. 알아보기 힘든 형상이었지만 그가 바로 흉흉한 기세를 보였던 그 흑포인임은 금방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는 폭발의 중심에 있었으면서도 살아난 것이다.
"크으으…… 이게 어떻게 된 거요?"
흑포가 누더기가 되어 거의 걸친 것이 없게 된 흑포인이 북벌후의 앞에서 사납게 소리쳤다.
"놈들이…… 이미 준비를 했던 것 같소……."
북벌후가 신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그럼, 그것도 모르고 무조건 공격하여 당했단 말이오? 황엽은? 개방의 두목은 어디 있는 거요?"
소리치던 흑포인은 사나운 표정으로 불길에 휘감긴 농가를 쏘아보았다.
"저기! 저 속에서 우리와 같이 죽겠다고 숨어 있었던 거요?"
"그건……."
대답이 궁한 북벌후가 신음을 흘렸다.
콰콰쾅!
그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흑포인은 허공을 되짚어 날아가서 불타는 농가를 향해 잇달아 사나운 장세를 쏟아냈다. 그의 공력은 실로 놀라운 바가 있어서 쾅, 쾅! 연신 폭음이 터지는 가운데 불길에 휘감긴 잿더미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와 같이 있었던 다섯 명의 수하들은 하나도 요행을 바라지 못했다.
그리고 그 또한 정상이 아니었다.
음산한 눈빛을 뿜어내던 그 눈도 한쪽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고 전신은 온통 불길에 그을린 상태. 그가 정말 놀라운 공력을 지녀 전신을 도검으로도 상처를 낼 수 없는 신체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살아 나올 수는 없었을 터였다.
일그러진 얼굴로 그가 광분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북벌후는 문득 사납게 소리쳤다.
"모두 대오를 정돈하고 자리를 잡아라!"
그의 고함에 여기저기 흩어져 어쩔 줄 모르고 있던 흑의인들이 삼삼오오 소속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효월도 그 움직임을 따르려고 하자 요광성주가 차갑게 소리쳤다.
"너는 나를 호위하도록 해라."
그녀의 호위는 이번 폭발에 모두 날아가 버린 상태였다.
한효월이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따르자 그의 귓전에 그녀의 전음성이 들려왔다.
'정말 대담하군요? 여기가 어디라고…….'
'못 본 척해 주시오.'
한효월이 주위를 살피면서 암중에 전음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할 기회는 별로 많지 않았다.
쿠당탕, 탕!
흑포인이 미친 듯 손을 쓰자 그 경력을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불기둥이 날았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여 사방으로 용암을 분출하는 것 같은 형상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으핫핫하하…… 아주 미친놈일세그려. 제천교의 천마각에는 다 저런 미친놈만 있나 보지? 뭘 하려고 불 더미를 뒤지는 게지? 아예 거기서 불고기가 되고 싶은 게냐?"
걸걸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 웃음소리에는 중기가 충만하여 사방의 어둠을 춤추게 하는 듯했다.
놀라 웃음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거지노인 한 사람이 농가의 담장 위에 우뚝 서서 가가대소(呵呵大笑)를 터뜨리고 있었다.
"저놈……."
그를 본 흑포괴인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 사람이야말로 가짜 화기를 던졌던 바로 그 거지였기에.
흑포괴인이 불 더미를 향해 미친 듯 장세를 쏟아내는 것은 단순한 분풀이가 아니었다.
개방의 고수들이 스스로 폭사했을 리는 만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무조건 후퇴를 하다가 자폭할 리가 없었다. 개방이 그렇게 간단한 존재였다면 그들이 이렇게 신경을 쓸 이유도 없었을 터였다. 게다가 화약이란 물건은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 화약을 때맞춰 폭발시키려면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해두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는 일.
그렇다면 그 농가에 비밀 통로가 있을 것은 누구라도 생각해 낼 수 있는 일, 그래서 그는 그 폐허를 뒤집었던 것이다.
그러한 추측은 바로 사실로 증명이 되었다.
나타난 저 늙은 거지야말로 그에게 화기를 던졌던 그자였기에.
"캐애새애키이……!"
거지노인을 발견한 흑포괴인은 이를 갈면서 훌훌 허공을 날아 그 거지노인에게로 덮쳐 갔다. 폭발에 휩쓸려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도 그의 움직임은 여전히 바람과 같았다.
쏴, 쏴아아-
10여 장의 거리를 찰나간에 가로질렀다.
그가 거지노인이 우뚝 선 담장 위로 도약해 날아오르는 순간이었다. 공기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담장 좌우의 어둠 속에서 섬광이 날카로운 기세로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클클클…… 이 어르신은 미친놈을 상대할 맘이 없으니 애들하고 놀아보거라."
거지노인이 흑포괴인이 덮쳐 옴을 보자 껄껄 웃으며 바람처럼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흑포괴인은 대노하여 자신을 향해 날아오르는 검은 그림자들과 격돌했다.
그러나 그의 무공은 정말 대단하여 그들과 부딪치는 순간에 그 탄력을 이용하여 오히려 더욱 높이 날아올라 담장을 넘어 거지노인을 추격해 갔다. 그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그를 잡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핫하하…… 흑괴(黑怪)! 넌 우리와 놀아야겠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담장을 넘어가는 순간에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그 담장 너머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우후죽순과 같이 날아올랐다.
그 기세는 정말 간단히 볼 수가 없어서 일진 격돌과 함께 흑포괴인은 그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가 땅으로 내려서는 순간에 먼저 그를 공격했던 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공격해 왔다.
그것은 우연히가 아니었다.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대비하고 자리를 잡고서 공격하지 않으면 그렇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용호십팔개로군……."
그것을 보자 북벌후가 신음했다.
그들은 개방의 정예였다.
그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들은 지금 모종의 일로 이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이곳에 나타났다면…….
흑포괴인과 개방 용호십팔개는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흑포괴인의 무공은 정말 기고(奇高)하였다.
그를 상대하는 용호십팔개 개개인은 결코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연수합격을 하자 흑포괴인의 무공으로서도 연달아 위기 상황을 맞아야 했다.
"이곳을 벗어난다. 모두 물러나라!"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본 북벌후가 소리쳤다.
그리고 그는 미련없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니, 그렇게 하려고 했지만 사정을 그렇지 못하였다. 폭발에서 화를 면한 그의 수하들이 그의 명령에 일제히 썰물과 같이 그 농가를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펑펑!
소리가 들리면서 달려가던 수하들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요소요소, 어둠 속에 검은 그림자들이 숨어 있다가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황엽! 어디 있느냐?"
그 광경에 북벌후가 이를 갈면서 소리쳤다.
"하하…… 감히 방주의 함자를 함부로 부르다니?"
낭랑한 웃음소리가 대답처럼 밤하늘을 울리면서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 얼굴은 북벌후가 너무도 익히 잘 아는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너, 너는!"
나타난 사람을 본 북벌후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불타는 농가의 일렁이는 불빛을 받으며 웃고 서 있는 사람은 바로 그에게 협박을 받고 있었던 옥면무영 호일랑이었다.
그는 오방후 중에서도 지모가 출중한 이름난 사람이다.
스스로를 새와룡(賽臥龍)이라 자호(自號)하여 지난날 촉의 제갈무후에 견주는 사람이니,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러하여 강호출도에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였던지라 황엽과의 일전에서 한 번 고배를 마시자 절치부심, 그를 꺾기 위해서 일을 꾸몄다.
그런데 일이 틀어졌다.
더더구나 부정하고 싶었지만 내심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던 상태에서 호일랑이 자신의 앞에 나타나자 아무리 냉정한 그라도 격한 분노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네놈이 감히 배신을 하다니……."
음산한 눈빛의 그가 신음을 흘렸다.
꽉, 움켜쥔 주먹이 손바닥을 파고들 것만 같다.
"하하하…… 배신이라고? 내가 누구를 배신했다는 것이냐? 설마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실망인걸? 그런 대가리를 가지고 오방후 중의 수좌가 되겠다는 야심을 꿈꾸다니…… 핫하하! 오방후 모두가 그런 돌머리라면 제천교는 그냥 붕천교(崩天敎)라고 이름 바꾸고 끝내는 게 어떨까 싶은데?"
껄껄 웃던 옥면무영 호일랑은 다시 북벌후의 약을 올렸다.
"어때? 넌 아예 이 자리에서 끝장을 내줄까 하는데? 어차피 돌아가 봐야 살아남기도 힘들 테고……."
"이러고도 네놈이 무사할 줄 아느냐? 네놈의 가족……."
북벌후의 위협은 옥면무영 호일랑의 차가운 질타로서 끊어졌다.
"닥쳐라! 이 더러운 놈."
느물느물하던 옥면무영 호일랑이 돌연 눈을 부릅떴다.
관옥 같던 얼굴에 위엄이 당당하다.
"나에게는 가족이 없다. 어릴 때 고아로서 개방에 거두어진 내게 무슨 가족이 있단 말이냐? 그리고, 설사 내게 가족이 있다 할지라도 내 가족 때문에 내가 명예를 팔 것 같으냐? 그렇게 생각했으니 네놈이 한심한 새대가리라는 거야! 무슨 새제갈? 이거야말로 지나던 개가 웃을 소리가 아닌가?"
그의 꾸짖음에 북벌후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네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스스로의 중독조차 돌보지 않겠다니……."
"하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나보다 네놈이 먼저 뒈질걸?"
"놈을 죽여!"
북벌후가 소리쳤다.
그의 명령에 그의 부하들이 물밀듯이 옥면무영을 향해서 덮쳐 갔다.
굳은 표정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요광성주의 귓전에 가느다란 음성이 들려왔다.
'물러나시오.'
한효월이 그녀의 뒤에서 전음으로 말을 전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예요?'
'개방주 황엽이 오늘의 일을 계획했다면 아마 이 자리를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오. 혼란이 일어난다면 그 틈을 타서 빠져나가야 할 거요.'
한효월이 말을 하는 순간 옥면무영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사람이 선불 맞은 멧돼지와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지!"
쉭! 쉬쉬쉭!!
그말과 함께 세찬 파공성이 소낙비처럼 야공을 꿰뚫었다.
"윽!"
"으윽!"
여기저기에서 앞으로 내닫던 제천교 북벌후 휘하의 고수들이 쓰러졌다.
"연노(連弩)로구나! 흩어져서 공격해라!"
그 광경을 보고 북벌후가 소리쳤다.
노(弩)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당기는 활과는 달리 활을 기판에 달아서 쏘아내는 장치를 의미한다.
근거리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지만 일반 강호에서는 휴대성과 기동성 면에서 떨어지므로 잘 쓰지 않았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무기라는 뜻이다. 지난날 촉의 제갈무후가 이것을 개량하여 위력을 떨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연노라니!
강호인에게, 특히 무림고수들에게 화살은 별로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일반인들과 비교할 수 없게 몸이 날렵하고 반응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어스름한 어둠을 뚫고 가까운, 지근 거리에서 날아오는 연노의 위력은 제아무리 무림고수라고 해도 위협일 수밖에 없다.
노(弩)가 활과 다른 점은 강력한 위력에 연사(連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두 번은 피할 수 있더라도 가까운 거리에서 쉼없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한다는 것이 쉬울 리가 없는 것이다.
"으악……."
비명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담장으로 둘러진 농가의 마당은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그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북벌후 휘하의 고수들에게 화살이 쏟아지니 그야말로 병가에서 말하는 사지(死地)에 다름이 아니었다.
치가 떨린다.
그 말의 뜻을 북벌후는 정말 실감하고 있었다.
오늘의 습격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흑포괴인 등의 고수들은 농가가 폭발하는 바람에 거의 한꺼번에 몰살을 당했다.
앞에서 공격을 하던 고수들은 그의 말대로 허장성세, 적의 이목을 끌기 위한 미끼였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들 중 고수라고 할 수 있는 인원은 별로 많지 않았다.
주력은 바로 뒤에서 공격해 들어가던 흑포괴인 등이었다.
그들은 총교(總敎)에서 나온 고수들이라 가히 막강한 위력을 가졌다.
그러나 두 갈래였던 그 고수들은 모두 폭사하고 그중 한 갈래의 우두머리였던 흑포괴인 하나만 겨우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또한 개방의 용호십팔개의 연수합격에 쩔쩔매고 있는 중이었다.
참혹한 패배였다.
"이쪽으로!"
한효월이 요광성주를 잡아끌었다.
사방에서 비명이 일고 고함 소리와 격투 소리가 어우러져 가히 혼란의 극을 달린다. 그런 와중이니 누가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신경을 쓸 재간이 없다. 제각기 알아서 살아 나갈 수밖에.
요광성주는 한효월이 잡아끌자 잠시 멈칫거리다가 그를 따랐다.
"어디로 가려는 거예요?"
"우선 이곳을 벗어나야 하니까."
"왜 나를 돕는 거죠?"
그녀의 물음에 한효월은 미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너무 새삼스러운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그 말에 요광성주는 얼핏 답변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긴 했다.
그들은 이미 여러 차례 만났다. 그리고 그 만남은 모두 생사간두에서 이루어져 적인지 아닌지조차 애매했다.
하지만 그것을 깊이 탐구할 만한 시간은 없었다.
한효월과 그녀가 격전지를 피해 담장에 접근하자 그들을 향해서도 연노가 날아들었던 것이다. 뒤에서 볼 때보다 직접 당해보자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한효월에게 가장 난점(難點)은 그의 무공을 다 드러낼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되면 바로 주목을 받게 될 것이기에.
한효월은 장도를 흔들어 날아드는 연노를 쳐내면서 쏜살같이 담장으로 접근했다. 그 뒤를 요광성주가 그림자처럼 따랐다.
그들이 담장에 근접하자 이미 연노의 사정 거리가 아니었다.
연노는 4, 50장. 가깝게는 2, 30장의 거리를 두고 위력을 발하는 것이었기에 거리가 너무 가깝다면 화살을 한 번 피하는 사이에 적이 궁수의 앞에 도달하니 목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갑자기 연노의 사격이 멎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담장 앞에 당도한 한효월은 돌연 앞에 쓰러진 흑의인의 시체를 담장 밖으로 집어 던졌다. 그리곤 그 흑의인의 시체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그의 그러한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이미 짐작한 요광성주도 틈을 주지 않고 따라붙었다.
흑의인이 담장 밖으로 날아가자 담장 뒤에서 매서운 파공음과 함께 섬광이 솟구쳐 올라 그를 꿰뚫었다.
그 틈을 타서 한효월은 담장 밖으로 날아갔다.
그럼에도 그를 향해서 도검이 날아들었다. 철저하게 훈련된 자들이었다.
"대단하군!"
탄성이 한효월에게서 터져 나왔다.
허를 찔러, 그것도 질풍 같은 신법으로 담장을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공격하는 개방고수들의 움직임은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절도가 있었다. 그럴 수 없음에도.
그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한효월을 공격하는 순간에 이미 그가 내려설 자리로 이동하는 움직임이 보였다.
한효월이 감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누구라도 쉽게 그들의 포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상대할 이유가 한효월에게 있을 리 없다.
한효월은 빙글, 몸을 차돌리는 순간에 발끝으로 개방고수의 검신을 찼다. 그 반동으로 그의 신형이 뒤로 훌쩍 날아갔다. 그리곤 그는 뒤에서 날아오던 요광성주의 손을 휘감아서 그녀를 앞쪽으로 던져 냈다.
휘이익!
세찬 바람을 일으키면서 그녀의 신형이 삽시간에 10여 장을 쏘아갔다.
찰나간에 포위망을 벗어나 버린 것이다.
경악의 탄성이 어디선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정작 한효월은 그 순간에 개방의 포위망에 빠졌다.
사방에서 검도(劒刀)와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앞서 보았던 일종의 연수합격에 의한 공격이었다. 저 공격과 맞서게 된다면 쉽사리 벗어나기 어려울 터이다.
순간, 한효월은 자신의 앞으로 날아드는 직도(直刀)를 손끝으로 탁 쳐 그 직도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동시에 그는 신형을 옆으로 비스듬히 돌려 버렸으므로 상대는 중심을 잃고 앞으로 쫓아 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는 한효월 대신에 뒤와 좌우에서 공격하던 사람들에게 불쑥 뛰쳐나간 꼴이 되어서 크게 당황했고, 그것은 공격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틈을 타서 한효월은 땅을 박차면서 질풍처럼 앞으로 내달았다.
무공의 수준이 달랐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개방에 피해를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그의 뒤를 따라 담장을 벗어나던 두 사람의 흑의인들이 한효월의 손짓에 신음을 흘리며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한효월이 포위망을 벗어나는 순간에 그곳으로 진입한 자들인지라 그대로 두었다면 개방고수들에게 피해를 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그처럼 잘 훈련된 개방고수들조차 괴이한 신색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한효월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핫하하…… 네가 요광이란 여우더냐?"
껄껄 웃는 웃음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이미 포위망을 벗어난 줄 알았더니 늙은 거지 한 사람이 요광성주를 막아서서 찢어진 옷소매를 펄럭이면서 그녀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흥!"
요광성주는 그에게 연달아 몰리게 되자 화가 나서 코웃음을 쳤다.
동시에 그녀의 검법이 일변했다.
날카롭고도 기괴하여 검빛이 번뜩이는 사이에 그녀는 무섭게 늙은 거지를 향해 진격해 나갔다.
"과연 악독한 검법이로구나!"
놀란 음성과 함께 늙은 거지는 수중의 청죽장을 빙글 돌려 그녀의 공세를 막으며 껄껄 웃었다.
"으하하…… 어디 마음대로 재주를 부려봐라! 여우 꼬리가 몇 개나 있는지 어디 보자!"
그 순간 막대한 경력이 날아들어 그의 청죽장을 밀어냈다.
어느새 흑의인 하나가 나타나 요광성주를 막아서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또 어떤 물건이지?"
말은 험악하지만 실제로 늙은 거지는 크게 놀라 안색이 달라졌다.
동시에 그의 청죽장이 일대 변화를 일으키면서 나타난 상대를 맞아갔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그는 찰나간에 일생일대의 강적을 만난 것임을 직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정을 봐주십시오!'
그의 귓전을 스치는 다급한 음성.
"도대체 이건……?"
늙은 거지는 멍청하게 선 채로 저만치 멀어져 가는 흑의인, 한효월의 뒷모습을 무엇에 홀린 듯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틀림없이 그놈인 것 같은데……."
늙은 거지가 우뚝 선 채로 괴이한 신색으로 중얼거렸다.
어둠 속을 바라보며 그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얼핏 스쳐 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인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여기에 나타난다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기에 곤혹스러운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늙은 거지야말로 개방의 독행신개인 까닭이다.
그까지 여기에 나타났다는 것은 오늘 개방이 여기에 전력을 기울였음을 의미했다.
한효월의 신형은 어둠 속으로 묻혀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매복은 아직도 더 남아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펼쳐진 것은 가히 천라지망이었기에.
여기에 나타난 제천교도는 아무도 도망갈 수 없다. 라는 것이 이 한판 승부의 의미였다. 그러나 그 또한 겉으로 드러난 의미인지라 이 일을 계획한 사람의 심중이 어떤지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