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首 기승대명(奇僧大鳴)
-기승을 만나다
죽음의 마수(魔手)는 개방을 피로 물들이다
대체 어디까지 흘러왔었던 것인지…….
한효월은 산을 내려와 작은 현(縣)에 들어간 다음 영빈루(迎賓樓)라는 작은 주루에 들어간 다음에서야 그가 숭산(嵩山) 경내에 있음을 알았다. 숨 가쁜 추격을 당하고 정신을 잃고, 미인요로 인해서 서문운하를 만나는 등 일련의 사태가 너무 긴박하여 장소에까지 신경을 쓰질 못했던 것이다.
말은 주루이지만 실제로는 길가에 겨우 형상만 갖추어놓은 주점이라 안주도 산채(山菜)이고, 술도 싸구려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한효월은 어차피 술을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간단한 요기로 충분했다.
술잔을 쥔 늘 고요하고 맑았던 그의 얼굴에는 어딘지 그늘이 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한 여인을 취한 다음이다.
어떻게 하든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했다.
비록 그것이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미 일이 벌어진 이상,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었다. 회피한다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 사정이 어떻든간에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무조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떠나왔다.
그것이 그를 괴롭게 했다.
지극순양지체.
그 축복(?)받은 신체로 인하여 그는 그 나이의 어느 누구도 성취할 수 없는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그로 인해 나타난 부작용은 수명의 단축. 스승인 경월선인이 그처럼 심혈을 기울여도 결국 그의 수명을 연장하는 것에 그쳤을 뿐, 고치지는 못했다. 그나마도 그가 어릴 때 만년빙어(萬年빙魚)라는 기물(奇物)을 복용했기에 가능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서문운하처럼 하루하루를 죽음과 입맞춤하면서 살아야 했을 터이다.
백 년을 가도 한 사람 보기 힘들다는 그 지극 체질의 두 사람이 만나 합환을 한 다음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속설에는 두 신체(神體)의 남녀가 만나서 결합한다면 음양상조(陰陽相助)로 인해 두 사람의 고질이 치료됨은 물론, 무한한 공능이 생긴다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같이 생활한다면 분명히 혼자 있는 것보다는 수명이 연장되고 그 지닌 바 능력도 향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뿐, 결국 시간을 받아놓은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미인요의 내단을 복용하고, 한효월의 순양지기를 받아들인 서문운하는 어쩌면 좀 더 오래 살아갈 수 있을런지도 몰랐다.
한효월의 경우는 달랐다.
원래 만년빙어를 복용하면서 경월선인이 다스린 그의 몸은 몇 년 간은 큰 무리를 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는 무리를 할 수 없었다. 높은 무공을 지니고 있지만 오랫동안 진력을 극한에 이르도록 운용할 수도 없다. 당장 문제가 생기는 까닭이다. 한효월이 다른 사람과 싸울 때, 급히 서두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몸은 심한 상처를 입으면서 전체적인 조화가 뒤틀린 상태였다. 그런 데다가 더해 봉해진 진세를 깨뜨리기 위해서 도전음양대법으로 전신의 잠력을 억지로 불러일으킨 다음인지라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그대로라면 이미 6개월을 견디기 어려울 상태였다.
대신 잠력이 격발되면서 지극순양지체의 힘이 발동하여 그의 능력은 전보다 가일층 높아졌다. 커다란 물동이에서 작은 구멍으로 물이 새면 물이 다하는 것이 오래간다. 그러나 큰 구멍으로 물이 새면 물줄기는 세차게 쏟아져 금방 물동이가 비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담담했다.
어차피 생사에 크게 마음을 두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 상황을 짐작한 서문운하가 그런 일을 벌일 줄이야.
그러나 어쨌든 그로 인해 그는 체내의 기혈을 안돈할 수 있게 되었다. 서문운하와의 그 상상을 절하는 정사로 내상을 다스리고 상처를 입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의미다. 음양이 상조한 것이다. 그러나 그뿐, 그것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정해진 순서일 뿐, 짧아졌던 생이 다시 전과 같이 조금 더 길어진 것이 그에게 무슨 큰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렇기에 그는 강호에 나왔었다.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니, 그 목숨을 바쳐서 강호의 평화를 지키고, 많은 사람들을 좋게 해줄 수 있다면 그 또한 보람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닦아왔던 학문이 과연 어디까지인지 궁금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서문운하의 일은 그런 범주가 아니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보다 좀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옆에 있으면서 그녀를 지켜줄 수 없는 바에야 그녀의 곁에 얼마간 더 있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더구나 시시각각 그를 노리는 자들이 있는 바에야.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녀의 곁을 빨리 떠나는 것이 오히려 그녀를 위하는 길이 아니랴.
그것이 그녀를 떠나온 그의 생각이었다.
"후우……."
한효월은 부지중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에서 달관했다고 스스로 자부했었건만,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정말이야?"
곁에서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다니까 그러네! 오면서 못 봤나? 거지라곤 씨를 찾아볼 수가 없잖던가? 어디든 거지 모습만 나타나면 그 순간 다 뒈진다니까 그러네……."
"대체 누가 요즘 그렇게 성세(盛勢)를 자랑하고 있는 개방을 건드린다는 건가?"
숙덕거리던 음성들이 놀란 탓인지 커졌다.
한효월이 고개를 들어보자 영빈루에 자리한 다섯 개의 탁자 중 두 개를 차지한 7, 8명의 장한들이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20대에서 40대까지 연령층은 다양하지만, 제각기 병장기를 가지고 있다. 바깥쪽에 표차가 있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아마도 그들은 표행에 나선 표사들일 터이다.
표사란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표물이라 불리는 물건들을 일정 장소까지 운반해 주고 그 대가를 받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사방으로 다니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니 자연히 보고 들은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나눈 이야기는 가벼이 들어 넘길 것이 아니었다.
개방이라니…….
"뉘시오?"
중년의 표사가 경계의 빛으로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쪽에 앉아 있던 서생 차림의 그가 난데없이 다가와 물어볼 것이 있다니 그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한효월은 이 양가구(楊家口)에 들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옷을 갈아입는 일이었다. 그의 옷이 너무 낡아 오히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화려한 옷이 아니라, 전과는 달리 평범한 회색 문사복을 하나 사 입었을 따름이다. 늠연한 모습이라기보다는 자리를 정하지 못한 낙척서생(落拓書生)의 모습.
그러나 그의 천생 기품은 여전하여 자세히 그를 눈여겨보면 조용한 태도가 역시 남달라 보였다.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결례임은 압니다만 제가 개방에 볼일이 있어 그쪽으로 가던 차라……."
한효월의 말에 중년인 일행은 비로소 그들의 눈앞에 있는 이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어 보이는 젊은 서생이 무림 중의 일원임을 의심하게 되었다.
"무림인이오?"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한효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효월은 굳은 얼굴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그의 예측대로 중년인은 금사표국이라는 하남 일대에서는 그런대로 이름을 얻고 있는 표국의 표사였다. 그들은 낙양에서 개봉까지 표물을 호송해 주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 와중에 중년 표사는 심상찮은 소문을 듣게 되었다고 하였다.
결국 그가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도 소문을 들은 것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간단했다.
근처에 있는 개방분타로 가보는 것.
그래서 그는 지금 점원에게 근처의 개방분타를 수소문한 다음에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양가구는 양씨 일족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 개방의 분타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가장 가까운 곳은 숭산경 내의 등봉현(登封縣)의 지타(支陀)였다.
숭산 일대에는 소림사의 힘이 미치는 곳이다.
천여 년을 이어온 그들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비록 산문(山門) 밖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소림권(少林拳)을 배운 속가의 제자들이 그 수를 더해서 은연중 숭산 일대에서 그들이 가지는 영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니 그 숭산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등봉현 내에 마련된 개방의 지타에 무슨 일이 생겼을 리는 없을 터이다.
그러나, 한효월이 등봉현에 도달하여 개방의 지타라는 낡은 이랑묘(二郞廟)에 당도했을 때에 그를 맞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체로 개방의 분타나 그 분타 하부 조직인 지타에는 문턱에서 옷을 벗어 들고 이를 잡는 거지들이 있기 마련이다. 겉보기야 이를 잡는 것이지만 그들이 바로 손님을 맞고 주변을 감시하는 눈이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아무도 없다니?
한효월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이랑묘의 담장을 날아 넘었다.
이랑묘의 규모는 제법 그럴듯했다.
서너 간의 묘당(廟堂)에다가 퇴락했지만 담장이 묘당 사이를 잇고 있어서 지금이라도 잘 보수한다면 다시 묘(廟)로써의 기능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담을 넘어 채 십여 걸음도 가지 않아 한효월은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계단에 돋아난 풀, 그 풀 위에 엎어진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허름한 옷차림은 그가 개방의 소속 제자임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했다.
피가 그의 몸에서 계단을 타고 흘러내려 굳어 있어 이미 죽은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모양이었다.
일별한 순간에 그것을 깨달은 한효월은 다급히 내원의 담을 넘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피바다가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부서진 문짝, 허물어진 담장에 무너진 벽 등 엉망이 된 격투의 현장에는 얼핏 봐도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거지들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죽어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신음을 흘리던 한효월의 안색이 달라졌다.
무슨 기척을 느낀 것이다.
'신음 소리?'
그 소리가 들린 것은 묘당의 안쪽이었다.
한효월의 신형이 묘당 안으로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낡고 벽 여기저기가 부서져 하늘이 보이는 그 묘당의 안에는 한 폭의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붉은 선혈이 사방으로 흩뿌려진 가운데, 엎어지고 포갠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죽은 형상은 바깥쪽보다 더욱 참혹했다. 머리가 터지고 가슴이 뭉개지고, 팔이 꺾어져 거대한 쇠절구를 휘둘러 사람을 쳐 죽인 듯 그렇게 거지들이 끔찍하게 죽어 있었다.
그 숫자는 모두 일곱 명.
굳은 표정으로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한효월은 앞에 있는 거지 한 사람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나이는 서른 남짓?
강력한 타격을 받은 듯 가슴이 뭉개져 갈비뼈가 완전히 안으로 함몰되어 있었다. 입에서 토해낸 선혈이 말해 주듯 타격을 받는 순간 훌쩍 날아갔다가 벽에 부딪친 다음에 앞으로 거꾸러져 죽은 모습이었다. 앞으로 쓰러졌다가 그 충격으로 반쯤 하늘을 바라보는 상태로 죽은 그는 공포와 분노가 함께 어우러진 눈을 감지 못한 채 부릅뜨고 있었다.
다 마찬가지였다.
밖에서 쫓겨 들어왔다가 더 이상 피할 곳을 찾지 못하고 대항하다가 항거 불능의 상대에게 맞아 죽은, 그런 형태였다.
그것을 말해 주듯이 시체들 대부분이 묘당의 끝 부분에 몰려 있었다.
한효월은 그 시체들 중 하나를 옆으로 옮겼다.
그 중년 거지의 시체 밑에 깔린 다른 하나의 시체. 그 시체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한효월은 그의 가슴을 눌렀다.
뜨거운 진기가 그의 가슴으로 스며들자, 그가 쿨럭, 기침과 함께 검붉은 피를 토해내면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좀 전에 그가 들었던 소리는 바로 그가 흘려낸 신음인 듯했다.
한효월의 진기가 내부로 스며 들어가자 그 거지는 눈을 떴다.
심맥을 잇는 한 가닥 진기가 남아 있을 뿐, 숨이 끊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가 살아 있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행운이라서가 아니라, 그의 내공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보다 강했기 때문이었다.
"크으으…… 어, 어서 피하……."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피를 토하면서도 손을 휘저으려 했다.
마음뿐,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젠 괜찮습니다. 그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
한효월의 말소리가 들리자 그는 눈을 꿈벅이면서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듯했다.
"쿨럭쿨럭…… 뉘시오? 크윽……."
그의 입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
"한효월이라고 합니다."
"한효…… 월……?!"
그 이름을 되뇌이던 그의 눈에 갑자기 빛이 일었다.
"설마, 하, 한 공자…… 망산의 그 한 공자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인지?"
"그, 그들이…… 크윽!"
한효월의 물음에 갑자기 중년 거지의 눈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심중의 격동을 말하듯 입에서 핏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검붉은 피였다. 피를 토해낼 기력도 없어서 흘러나온다는 것은 이미 마지막이라는 뜻. 그 핏속에는 내장 토막까지 섞여 있었다.
"진정하고 말을 해보십시오. 누가 이런 일을 한 것인지?"
한효월이 다시 진기를 배가하면서 다급히 말했다.
"크, 크윽! 그들, 그들……!"
중년 거지는 안간힘을 다해 말을 하다가 눈을 부릅떴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한효월이 진기로 도왔지만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올 수는 없었다.
결국 누군가가 정말 개방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는 셈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아미타불! 참으로 악독한 심사로다!"
그의 뒤에서 천둥과도 같은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난데없이 들려온 소리에 놀란 한효월이 고개를 들었다.
한 사람이 눈을 부릅뜬 채로 한효월을 노려보고 있었다.
서른이나 되었을까?
민대머리와 몸에 걸친 승복은 그가 승려임을 말한다.
하지만 부릅뜬 고리눈과 얼굴을 온통 뒤덮은 고슴도치와 같은 수염, 족히 7척에 이르는 당당한 체구에다 우뚝 짚고 있는 쇠고리가 철렁거리는 철환장(鐵環杖)은 수도승이라기보다는 마치 수호전의 노지심(魯智深)의 환생을 보는 것만 같았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것도 모자라 아예 숨을 끊어놓는다는 건가? 그러고도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 가증한 악도(惡徒)로다!"
우락부락한 청년 승은 고함과 함께 수중의 선장을 휘둘러 한효월을 쳐왔다.
휘잉-
가공할 바람 소리가 그 장세(杖勢)에서 일었다.
원래 선장(禪杖)이라는 것은 중병(重兵)에 속한다. 더더구나 얼핏 봐도 쇳빛이 번쩍이는 저런 선장이라면, 정말 저것이 빈철선장(븝鐵禪杖)이라면 슬쩍 스치기만 해도 뼈가 부러지고 피가 튀리라.
더구나 그의 팔힘은 놀라울 정도라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면서 선장을 휘두르자, 철환장은 단숨에 일진 광풍을 동반한 채로 한효월의 지척에 이르렀다. 마치 폭풍이 갑자기 몰아닥치는 것만 같았다.
"멈추시오!"
그가 그렇게 다짜고짜 손을 쓸 것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한효월은 놀라 소리치면서 왼쪽 발로 바닥을 슬쩍 미는 탄력으로 몸을 쭉 펴서 금리도천파의 일식으로 찰나간에 1장가량이나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미타불! 악도! 그럴 줄 알았느니."
그런데, 그 청년 승은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껄껄 웃으면서 쳐오던 선장을 뒤집어 반대로 쳐가는 것이 아닌가. 길이가 8척이나 되는 빈철선장을 수수깡 막대를 휘두르듯이 하고 있었다.
한효월은 자신의 응변이 빨랐음에도 자신이 오히려 그의 공세 안으로 뛰쳐든 꼴이 되었음을 알고는 상대의 무공이 평범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의 신형이 선풍전(旋風轉)의 수법으로 빙글 반 바퀴 도는 순간 그는 손에서 부드러운 경력을 발출해서 선장을 밀면서 다시 소리쳤다.
"멈추시오, 난 범인이 아니오!"
그의 무공은 이미 한차례 대진(大進)하여 이 한 수라면 충분히 그 청년 승을 물러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예측대로 되지 않았다.
원래 생각대로라면 청년 승은 한효월의 밀침에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청년 승의 선장은 조금도 흔들림없이 빙글 원을 그려 그 힘을 해소하더니 수없는 동그라미를 만들면서 한효월을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닌가.
찰나간에 한효월의 신형은 그 동그라미 안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한효월의 안색이 돌변했다.
선장이 미미하게 떨림에 따라 철환장에 달린 쇠고리가 떨리면서 작은 원을 그리고, 그 원들은 다시 선장의 끝이 흔들리면서 만들어내는 경력의 원과 하나가 되어 가공할 힘으로 증폭되어 그에게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한효월이었기에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지, 다른 사람이라면 그것조차 알아볼 수 없었으리라.
윙윙!
가공할 경풍이 한효월을 휘감았다.
"이렇듯 무경우하다니!"
한효월이 침중한 안색으로 꾸짖으며 일장을 쳐냈다.
꽝!
장세(掌勢)와 장세(杖勢)가 부딪치자 폭음이 일며 일진 광풍이 묘당안을 휩쓸었다.
"복마장(伏魔杖)…… 소림사에서 오셨소?"
충격으로 전신을 부르르 떤 한효월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대답 대신 청년 승이 중얼거렸다.
"과연 독고 맹주의 절옥장력은 명불허전……."
독고해의 독문 절옥장력은 금석을 잘라 버릴 정도로 날카롭고도 강력한 것이었지만, 그의 철환장은 끄떡도 없었다. 그리고 한효월과 정면으로 격돌했음에도 그는 채 반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귀하가 한효월, 한 시주이시오?"
그가 한효월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난데없이 나타나서 자신을 공격한 청년 승, 우락부락하여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던 산도적 같은 형상을 한 그가 단번에 자신을 알아보자 한효월은 놀라 다시 한 번 그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생김새는 여전하다.
그 모습이 어디 갈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보니 달랐다. 그의 우락부락한 눈 깊은 곳에는 침착한 빛이 갈무리되어 있어 보이는 것과는 달리 조급한 성품이 아닌 듯했다.
"저를 아십니까?"
한효월이 되물었다.
스스로의 신분을 시인하면서 상대의 신분을 묻는 의미다.
"대조 사형으로부터 한 시주에 대해서 귀가 닳도록 들었소이다. 핫하하하…… 과연 명불허전! 인중지룡(人中之龍)이란 사형의 말씀이 틀리지 않았구료, 반갑소이다! 나는 소림의 대명(大鳴)이외다."
청년 승은 껄껄 웃으며 한효월의 어깨를 쳤다.
그의 힘은 대단하여 웬만한 사람은 그대로 엎어지고 말 정도였다. 어깨를 한번 휘청한 한효월은 어리둥절한 빛이 되어 그를 보았다.
그가 생각하는 수도자는 고요하고 부드러운 산바람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런 승려라니!
더구나 대(大) 자를 쓰는 것을 본다면 당대 소림방장인 대광 대사와 동배(同輩)라는 의미였다. 그 문파의 일대제자(一代弟子)라면 아무리 나이가 적어도 쉰은 넘었을 터였다. 현 소림 장문인의 나이가 칠순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이 청년 승의 나이는 자세히 보니 서른이 아니라 그보다 더 젊은 듯하지 않은가.
하지만 한효월이 입을 열 틈은 없었다.
스스로 대명이라 밝힌 청년 승은 한효월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짙은 눈썹을 찡그린 채로 주위를 돌아보면서 물었기 때문이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인지 짐작이 가시오?"
한효월은 얼떨떨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소생을 의심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대명은 머리를 저었다.
"이 상황을 보고도 한 시주를 의심할 리가 있겠소? 아무래도 그들이 개방을 목표로 정한 것 같소이다."
"그들이라면 제천교의 짓이라는 겁니까?"
"그들이 아니라면 당대 무림에서 누가 개방을 이렇듯 정면으로 공격하겠소? 그들은 개방에 의해서 연이어 좌절을 겪었으니 결코 그냥 있을 리가 없겠지……."
화라락-
세찬 불길이 인다.
그 불길에 몸을 맡긴 채 수십 구의 시신들은 말이 없다.
사람이 불이 타고 고기 익는 냄새가 난다. 그것은 참으로 역겨운 경험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효월은 대명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로 그 광경을 본다.
그들 둘은 시체들의 사인을 조사한 다음, 따로 무덤을 만들지 않고 이랑묘의 뜰에서 화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망산의 대참변 이후, 개방과 제천교는 곳곳에서 충돌했었소. 얼마 전에는 본 산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웅이산(熊耳山) 경내에서 양 파가 격돌했는데, 그 싸움에서 제천교의 오방후(五方侯) 가운데 북벌후는 심한 타격을 받고 구사일생 도주했다고 하오. 개방의 황엽, 황 방주가 직접 나서서 일구어낸 결과였다고 하는데, 그 이후 강호는 갑자기 괴이할 정도로 조용했었소. 그리고 얼마 전부터 사방에서 개방이 공격받기 시작했소."
대명의 설명에 한효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북벌후와 황엽이 싸웠다는 곳이 웅이산 경내라면 아마도 자신이 있던 서하곡 밖에서 일어난 싸움인 듯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말만으로도 그는 당시의 상황을 거의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또 빚을 졌군…….'
한효월은 내심 황엽에게 다시 미안했다.
"대사는 강호의 사정을 매우 잘 알고 있군요."
그가 대명을 바라보면서 묻자 그는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이 나이에 대사는 무슨. 그냥 대명이라고 부르시오. 어차피 부르라고 있는 이름이 아니겠소? 어떤 잡종이냐?"
대답하던 그는 갑자기 고함치면서 수중의 선장을 뒤쪽으로 집어 던졌다.
쏴아앙!
맹렬한 바람 소리를 일으키면서 선장이 묘당의 담장에 자리한 거송(巨松)을 향해 날아갔다.
콰앙!
우렛소리를 동반한 채로 날아간 선장이 담장을 산산조각 냈다.
폭음과 함께 장정이 품고도 모자랄 소나무의 밑동이 뚝 부러져 굉음을 내지르면서 담장과 함께 넘어갔다. 솔잎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일진 질풍이 이는 가운데 거기서 희뿌연 그림자 하나가 날아올랐다.
그가 날아오를 것을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선장을 집어 던진 순간에 대명은 이미 그곳에 당도하고 있었다.
"게 섰거라!"
그리고 그는 날아오르는 회영(灰影)을 향해서 호통을 치면서 일권을 내질렀다.
그의 호통은 천둥과도 같았다.
게다가 그의 호통에 못지 않게 그의 일권 또한 강력무비했다. 그 권력은 강력한 돌풍을 일으키면서 막 날아오르는 회영에게 당도하고 있어 회영은 내려서거나 그 권력을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하든 내려설 수밖에 없도록 계산된 한 수인 것이다.
그러나 상대의 대응은 전혀 뜻밖.
회영은 빙글 몸을 돌리는 사이에 대명의 일권, 천하에 이름 높은 소림사의 72종 절예(絶藝) 중 하나인 백보신권을 등판으로 그대로 맞아버린 것이다.
펑!
일진 폭음이 이는 순간, 회영이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이 단숨에 10장을 가로질러 날아가 버렸다.
그 바람에 뒤이어 몸을 날린 한효월도 허탕을 치고 말았다.
"이럴 수가?"
자신의 일격이 어떤 위력을 가진 것인지 너무도 잘 아는 대명은 어이가 없는지 일순 그 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하지만 한효월은 넘어지는 그 거송의 나뭇가지를 차고는 날아올라 바람과 같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찰나적인 순간에 이미 추운축전의 경공을 발휘하여 회영의 뒤를 따라간 것이다.
"명불허전이군!"
붕새와 같이 사라지는 그 모습을 보고 대명은 감탄을 했다.
하지만 그가 손을 떨치자 일격에 소나무와 담장을 무너뜨린 그의 철환장이 살아 있는 것처럼 그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그의 철환장은 다른 선장과는 달라 전체가 빈철이다. 그런 무게를 능공섭물(凌空攝物)로 빨아들일 수 있는 그의 공력은 실로 놀랍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환장을 빨아들인 그는 그 철환장으로 거세게 땅바닥을 한 번 찍었다. 그리고 그 반동과 발구름을 이용하여 신형을 날렸다.
그 움직임은 줄에 꿴 듯 자연스럽기 이를 데 없다. 승포 자락이 거세게 펄럭이는 가운데 그는 훌훌 담장을 넘어 한효월의 뒤를 따랐다. 말로는 긴 듯하지만 실제로는 한효월이 사라지자마자 그의 뒤를 따른 셈이다.
하나 그렇듯 빨랐음에도 회영은커녕, 한효월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명은 길게 심호흡을 하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으면서 빛을 발했다.
마치 천지가 그의 전신으로 폭풍과 같이 달려드는 것 같았다. 빛과 소리들이 있는 그대로 그에게 보이고 들렸다. 좁쌀이 바위와 같이 커지고 개미의 움직임이 지축을 울린다. 바로 달마역근경(達摩易筋經)상에 기재된 천시지청(天視地聽)이라는 최상승의 내가공부였다.
그의 나이를 감안한다면 실로 믿기지 않는 경지.
쏴아아-
그의 신형이 방향을 잡고 날기 시작했다.
그는 채 20여 장을 가지 않아 숲 속에 우뚝 서 있는 한효월을 발견했다. 숲으로 가려 있어서 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놓쳤소?"
대명이 물었다.
한효월이 그를 돌아보았다.
침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대단한 자로군요. 숲 속으로 들어선 순간에 종적이 묘연해져 버렸습니다."
"어떤 자인지 모르겠군. 나의 백보신권은 설사 금종조를 연성했다 할지라도 몸으로 견디기 힘들 텐데, 그걸 얻어 맞은 채로 유유히 사라질 수가 있다니……."
대명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들 두 사람의 앞에서 몸을 빼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스스…….
한 가닥 바람이 숲 속을 휘몰고 흙먼지를 말아 올린다.
한효월과 대명은 굳은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중 한효월이 살펴보고 있는 것은 그들이 있던 곳에서 5장가량 떨어진 측백나무 옆에 있는 바위.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불피풍우(不避風雨)하여 이끼가 잔뜩 낀 바위에는 마치 누가 새긴 듯한 발자국이 하나 선명했다. 깊이는 반 푼이나 되는데, 주변의 돌이 부서져 있음으로 보아 그 발자국의 주인공이 바위를 밟을 때 신형이 안정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발자국의 주인공이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임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대단한 내력이로군……."
그 발자국을 살펴보던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충격을 받긴 한 모양이군! 난 또 하늘에서 내려온 금강역사(金剛力士)나 되는 줄 알았더니…… 하지만 묘하군? 그런 수준이라면 아무리 충격을 받았더라도 그렇게 깊게 발자국을 남기진 않았을 텐데……."
대명이 괴이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백번을 양보하여 충격을 받고 이런 흔적을 남겼다 할지라도, 바위를 딛고 그 탄력으로 신형을 날리는 디딤돌로 썼을 터이다.
그런데 마치 쇳덩이로 내려찍듯이 이렇게 무식하게 바위에다 발자국을 만들다니?
신형을 조절할 수 없을 정도의 내상을 입었다면 여기에 발자국을 남기면서 그대로 밑으로 굴러 떨어져야 했겠지만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몸이 쇳덩이로 만들어졌을 리는 없을 텐데……."
한효월도 그 말에 덧붙이듯 중얼거렸다.
그 말에 대명은 부지중에 괴이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상대의 몸을 쳤을 때, 마치 철벽을 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던 것이다. 생각할수록 묘한 일. 그런 정도의 능력을 지닌 자가 발각되자마자 그렇게 죽어라고 꽁무니를 뺀 것도 괴이쩍었다.
"어쩌면…… 보통 사람이 아닐런지도 모르지요."
생각에 잠겨 있던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괴인이 사라질 때 어디선가 다급한, 묘한 음향을 들려왔던 것 같기도 했다.
"아미타불, 설마 그가 귀신이라도 된다는 거요?"
"귀신은 아니지만 특별한 연체(練體)를 거친 사람일 수는 있겠지요.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떤……."
"흐음……."
생각에 잠겨 있던 대명이 불쑥 물었다.
"혹시 그자가 누군지도 알 수 있겠소?"
한효월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그것까지야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가? 핫하……."
너털웃음을 터뜨린 대명은 문득 정색을 했다.
"나는 이제부터 사문으로 잠시 돌아갈 예정인데, 한 시주는 어디로 갈 생각이시오?"
"상황이 심상치 않은 듯하니, 개방으로 가볼까 합니다."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보게 되겠지! 아미타불, 보중(保重)하시오."
합장을 해 보인 그는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
한효월은 묘한 눈길로 등을 보이며 사라지고 있는 대명을 바라보았다. 선장을 어깨에다 처억 걸치고는 휘적휘적 걸어가는 모습이 그야말로 노지심이고 무송이다.
대명(大鳴), 고함 소리라는 법호부터 좀 괴이하지만 그의 행색은 참으로 묘한 데가 있었다. 소림사의 승려라기보다는 강호의 호걸과도 같은 기풍이 절절했던 것이다.
'특별한 사람이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한효월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명은 당대 소림사 장문인의 막내 사제로서 무공 부분에서 지난 백여 년 이래 최고로 손꼽히는 기재였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 아예 무공광(武功狂)이라고 불릴 정도로 무공에 미쳤다고 전해졌다. 소림 나한전(羅漢殿)에서의 무공 수련이 가장 빨랐던 사람이 그였으며, 목인방(木人房)을 최단시간 내에 통과해서 세상에 나온 사람이 또한 그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