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首 인생무궁(人生無窮)
-떠나는 인연
이제 우리 이별(離別)하니 삶이 끝나도 만나지 못하리
<미안하오.
변명 따위는 하지 않겠소.
나는 강호에 몸담은 몸이라, 나와 같이 있게 된다면 나를 찾는 사람들로 인해 소저는 편할 날이 없게 될 것이오. 비록 위험은 벗어났다고 하지만 아직 정상이 아니니, 조용한 곳을 찾아서 건강을 되찾도록 하시오.>
한효월이 남긴 편지는 간단했다.
말 그대로 용사비등하는 필체, 어둠 속에서 간단히 휘갈긴 듯한 글씨임에도 쓰는 사람의 품격이 살아 있는 행서(行書)였다. 그러나 어찌 보면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는 글이 아닐 수 없었다.
규중의 처녀.
비록 여염집의 여인은 아니라 할지라도, 처녀를 취하고 그냥 훌쩍 떠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얗게 질린 송옥교가 이놈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린다고 뛰쳐나간 게 무리도 아니었다.
은근히 한효월을 좋아해서 그를 편들던 종무연마저 분기탱천하여 눈앞에 그가 있으면 당장이라도 잡아 죽일 태세였다.
오직 활염라 조과만이 묵묵, 입을 다물고 있을 따름이다.
산들거리는 바람결이 제법 차갑다.
바람은 안개를 헤집고, 흐트러진 귀밑머리를 흔들어놓는다.
아침 햇살이 아직 아스라이 저 멀리 산속 어둠을 밀면서 부풀어 오르고 있다. 거대한 비석을 거꾸로 꽂아놓은 듯한 절벽에 가린 하늘이 동쪽으로부터 노을빛으로 물들어 마치 해가 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서문운하는 고요한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얼마 전까지 한효월이 운공을 하던 자리.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한효월이 써두고 간 편지.
고요한 듯한 그녀의 얼굴은 어찌 보면 무심해 보인다.
하지만 뿌옇게 움터오는 동녘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제아무리 기녀(奇女)라 하나, 지금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다면 거짓일 터이다.
<인생대대무궁기(人生代代無窮己)
강월년년망상사(江月年年望相似)
부지강월조하인(不知江月照何人)
단견장강송류수(但見長江送流水)…….>
그녀는 한효월이 남긴 편지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보았다.
편지의 마지막에 남겨진 한 수의 싯구는 뜬금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학식이 과인한 서문운하는 그것이 장약허(張若虛)의 춘강화월야(春江花月夜)의 뒷부분임을 보는 순간에 알았다. 그 시는 남녀의 이별, 그 한(恨)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효월이 단순히 그녀를 떠남이 아쉬워서, 남긴 글일 리는 없다.
서문운하는 길게 한숨 쉬었다.
총명절정한 그녀는 이미 거기에 담긴 뜻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대대로 영원함이 없으니, 강달은 해마다 바라보아도 같구나.
강달은 누구를 비쳐 왔는가, 강물은 전과 같이 흘러만 가는데…….
싯구의 뜻은 강물 위에서 빛나는 달은 여전하되, 사람은 이미 예전의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단순히 남녀의 상사가 아니라, 자신을 살아서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는 뜻을 표하고 있음을 알기에 서문운하는 가슴이 저며왔다.
한효월 또한 지극순양지체였다.
서문운하로서는 어떻게 된 것인지 명확히 알지 못하지만 그녀와 다른 점은 그가 자신의 지극순양지체를 눌러두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겉으로는 태양절맥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인요를 구하기 위해서 진을 깨뜨려야 하자 한효월이 전신의 잠력을 불러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구양신침의 힘을 빌었다. 구양신침이 그의 몸속에서 녹아버린 것은 바로 그의 몸이 지극순양지체였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그 폐해는 실로 적지 않았다.
체내의 잠력을 격발시키자 그가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급격히 단축되었던 것이다.
서문운하는 절세의 재지를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잠시 정신을 차렸던 상황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본 다음, 몇 가지 안배를 남기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 안배는 바로 한효월과의 합환(合歡)을 위한 것이었다.
세상에는 잘못 알려진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지극순양지체와 지극순음지체가 만나 합환한다면, 둘 사이의 천형(天刑)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변한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은 일일까마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둘의 합환은 순양(純陽)과 순음(純陰)의 만남이라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바로 한효월과 서문운하가 거의 하루 동안 정사를 나눈 일 등을 의미한다. 자석의 음양극이 만나듯 둘이 만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서로를 원하게 된다. 거기에 약간의 충동만 가해진다면 견딜 수가 없게 되는 것은 필연.
한효월이 최음제에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덮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서문운하는 결코 음탕한 여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가 한효월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기에 그런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조금만 더 생각을 할 여유가 있었다면 상황은 다르게 진행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각, 심하면 반 각 만에 다시 정신을 놓고 혼수상태에 들어가는 그녀인지라 자포자기의 심정이 절반쯤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한효월이 약속 때문에 생면부지의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생의 단축까지 무릅쓴 것을 알게 되자, 그녀로서는 무엇인가 보답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을 하지 않았다.
부드럽고, 착해 보이는 그녀였지만 실제로 그녀의 성격은 매우 굴강했고, 천재들이 다 그렇듯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고는 견디지를 못했다. 그렇게 해서 두 천재의 우연이자 필연인 합환은 성사되었다.
아침 안개가 점점 짙어졌다.
싸아한 아침 바람이 안개를 보듬으며 그녀에게로 밀려왔다.
귀밑머리가 흩날린다.
어제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밖에 나와서 이런 바람을, 이 시간에 맞는다면 큰일이 났을 것이기에.
그러나 이젠 그 바람이 싱그럽다. 그 바람을 맞으며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렇게 살아날 수 없었을 거예요. 설사, 다시는 당신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할 거예요, 결코…….'
첫 남자를 어찌 잊으랴.
더구나, 그 격렬한 정사의 의미는 단순히 그녀를 처녀에서 여인으로 만들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극순음지체의 여인은 평범한 남자를 맞아들일 수 없다. 지극순양지체의 남자를 만나지 않는다면, 설사 결혼은 할지라도 아이는 가질 수 없는 것이 그 예정된 운명이다.
"바람이 차구나. 들어가자."
문득 자애한 음성이 들려왔다.
송옥교였다.
그녀가 두툼한 외투를 그녀의 어깨에다가 걸쳐 주면서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몇 년 만에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
"무리하면 안 된다. 넌 아직도 환자다."
"알았어요."
서문운하는 그녀를 향해 가벼이 웃어 보였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지금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다.
"아!"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키던 서문운하는 나직한 신음과 함께 신형을 비틀거렸다. 아랫배가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냐?"
놀란 송옥교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서문운하가 미미하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 기색을 보자 송옥교는 대강 상황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너무 격렬한 정사로 인해서 제대로 움직이기가 거북한 것이다.
"그 죽일 놈이 널…… 그러고도 말도 없이 떠나다니, 어디 다시 만나기만 해봐라!"
그녀가 이를 갈았다. 앞에 한효월이 있다면 금방이라도 패 죽일 듯한 기세였다.
바로 그때, 그녀들의 앞에 한 사람이 별안간 나타났다.
"무슨 일예요?"
송옥교가 서문운하를 부축한 채로 물었다.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활염라 조과였다.
"수상한 놈들이 곡구에 나타났소! 넌 어서 안으로 들어가거라."
활염라 조과가 서문운하를 보면서 말했다.
"수상한 자들이라니?"
"나도 잘 모르겠소. 하지만 전에 나타났던 그놈들 같아 보이는데……."
"그 자들이 다시 나타났단 말예요?"
송옥교가 놀라 소리쳤다.
"그들이 곡구로 진입했나요?"
서문운하가 활염라를 보면서 물었다.
"주변에서 얼쩡거리는데, 이미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폐쇄되었던 진은 이미 한효월이 깨뜨린 상태다.
적이 난입해 온다면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다.
적을 막는 진세가 남아 있긴 하지만 봉쇄된 상태가 아닌지라 진도지학에 조예가 있는 자라면 진세를 뚫고 들어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직 몸도 추스르지 못한 서문운하를 보호하면서 그들을 막아야 할 것이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종 할아버지가 바깥을 살피고 있나요?"
서문운하가 물었다.
"그래, 나더러 널 안으로 피신시키라고 보냈다."
"절 그곳으로 데려다 주세요."
"무슨 소리냐?"
활염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침녘이면서도 안개는 여전히 자욱하다.
비록 봉쇄되었던 진세가 깨어졌다고는 하더라도 그 운무를 생성하고 있던 진세는 그대로 있어서 안개가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서하곡의 입구, 안개 속에서 흑의인들이 소리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숫자는 대략 열은 넘는 듯한데, 계곡에 가리워 명확하지 않았다.
서문운하는 바위에 기댄 채로 그들의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옆에는 마땅찮은 빛이 역력한 종무연과 외투를 덮어주느라 정신없는 송옥교, 그리고 조과 등의 모습이 보였다.
"저들은 이미 진세를 뚫고 들어오고 있군요. 누군가 진세를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잠시 그들을 살펴본 서문운하가 말했다.
"그때 그놈들 같은데, 어디서 또 기어나온 거지?"
밖을 내다보던 활염라가 중얼거렸다.
"아마, 뚫고 들어올 방도가 없으니까 척후만 남기고 떠났다가 미인요 때문에 조 숙부님들이 출곡하는 걸 보고는 사람들을 불러온 걸 거예요."
"놈들이 여기까지 오는 시간이 걸렸다는 거로군……."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활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이놈 들고 서 있냐?"
그때, 서문운하의 등 뒤에 서 있던 종무연이 툴툴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는 손에다 자기 키만한 돌덩이를 들고 있었다.
"지금요."
서문운하가 손가락을 들어 간방(艮方)을 가리켰다.
그러자 종무연은 들고 있던 돌덩이를 던졌다.
쾅!
어른이 품에 안을 만한 그 돌덩이는 4, 5장을 날아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에 믿기 힘든 굉음을 일으켰다. 단순히 무게로 인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다음 순간, 계곡이 크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안개가 하늘을 가리며 피어났다. 거의 눈앞의 사람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진세 안으로 들어왔던 자들에게서 당황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된 거냐?"
아예 햇빛마저 가릴 듯 안개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종무연이 참지 못하고서 물었다. 자신이 던진 돌덩이 하나가 그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다시 진을 봉쇄한 거예요."
서문운하의 말에 세 노인은 과연…… 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선을 돌린 서문운하는 그늘진 눈길로 안개 속에서 움터오는 새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것은 여기에 사람이 있음을 알리는 미련한 짓…… 하지만 그 사이에 당신은 조금 더 안전하게 멀어질 수 있겠죠…….'
* * *
"윽!"
흑의인 하나가 눈을 부릅떴다.
격렬한 충격에 입에서는 피분수가 튀어나갔다.
그리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팔랑개비처럼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거대한 고목에 머리를 부딪고는 늘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 옆에는 또 한 사람의 흑의인이 그 모습으로 늘어져 있었다.
한효월은 방금 그가 쓰러뜨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품속을 뒤지자 생각했던 대로 예의 동패(銅牌)가 나타났다. 서정동위십이(西征銅衛十二). 제천교의 서정후 휘하 동위 12호라는 소리일 터이다.
서하곡을 떠난 뒤, 은밀히 그를 따르는 기척을 느끼고 그들을 쓰러뜨린 것이다. 하나는 그를 유인하고 다른 하나는 그사이에 도주하려 했지만 그의 손을 피할 수는 없었다.
퍽!
그가 손을 흔들자 그 동패가 옆에 있던 바위 속으로 절반쯤 박혀들었다.
그것과 함께 그는 신형을 날려 그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나자 죽은 듯 늘어져 있던 자들 중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크으……."
그는 가슴을 움켜쥔 채로 일어나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그 자리에는 전혀 뜻밖에 한효월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흑의인이 피를 흘리며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들어 저 멀리 보이는 선하곡을 보았다.
'내가 종적을 드러낸 이상, 더 이상 서하곡을 찾지는 않겠지.'
그 생각을 끝으로 그는 정말 그 자리를 떠났다.
서하곡의 봉쇄를 풀고 미인요를 잡아오는 과정에서 그들의 눈을 피할 순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는 서하곡을 떠나면서 일부러 종적을 드러냈던 것이다.
과연 그의 생각대로 저들은 그를 발견하고 따라왔다.
그 뒤는 바로 지금과 같이 자신의 행적을 명확히 알려주는 일.
그렇게 되면 서하곡에 남은 서문운하 일행은 안전하게 정양을 하고서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하없는 그일지라도 서문운하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할 줄은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떠날 수밖에 없음을 용서하시오."
한효월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 움직임은 지난날보다 훨씬 더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