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首 구양신침(九陽神針)
-병자를 돌보다
찾지 않아도 인연(因緣)은 이어진다
아침.
황금빛 아침 햇살이 안개를 뚫고 거미줄처럼 쏟아진다.
계곡은 하늘거리는 안개 속에 그 존재를 묻고 있다.
그 계곡 한쪽에 새벽 공기 속에서 자리한 바위 하나.
거기에 한 사람이 단좌(端坐)하여 있음이 보인다.
긴 머리는 뒤로 모아 질끈 묶었다. 손은 단정히 모아 가슴에 세웠는데, 한 손은 하늘을 향하게 하고 다른 한 손은 땅을 누르듯 고요히 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상체는 벗은 상태였다. 그 얼굴의 단아(端雅)한 모습과는 너무도 달리, 보기에도 끔찍한 상처들이 벗은 상체 여기저기를 지렁이와 같이 휘감고 있는데 딱지가 앉아 더욱 참혹했다.
그렇게 그는 아침 안개 속에서 새 아침을 맞으며 고요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한효월이었다.
그가 일주일이 지난 지금, 죽음의 손길에서 벗어나 스스로 운기조식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날, 진세를 고친 그는 그대로 무너져 버렸었다.
바깥이 더 이상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평소의 그라면 달랐겠지만 지금의 그는 그렇게 움직이는 자체가 자살 행위와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움직이지 않았다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렇게 억지로 움직였고 호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오죽하면 그를 모옥 안으로 옮긴 활염라가 고개를 저었었을까.
그러나 정작 정신을 차린 그의 회복 속도는 활염라의 고개를 다시 한 번 젓게 하기에 족하였었다.
거의 시체와 다름없었던 그의 몸은 이제 거의 정상이었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새벽 안개일까?
아니면 진을 봉쇄한 다음에 일어난 그 안개일까.
언제인가 모르게 한효월의 얼굴 부위에서는 희미한 안개가 감돈다. 그 안개는 점차 묘한 형체를 이루면서 그의 콧구멍으로 넘나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안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후우……."
한효월은 길게 한 숨을 내쉬면서 눈을 떴다.
정좌 운공에 든 지 거의 반나절 만이다.
그의 눈은 예전과 같이 투명하고 맑았다.
"정말 대단하군……."
문득 그의 뒤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한효월은 누가 말한 것인지 아는 듯 급하지 않게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았다.
활염라가 거기 서 있었다.
이미 온 지 오래된 듯 아침 이슬이 옷자락에 매달릴 지경.
"덕분입니다."
한효월은 그를 향해서 가벼이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 말이 맞겠지. 하지만 너에겐 맞지 않는 말이다. 우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너 혼자서라도 천천히 그 상처를 회복할 수 있었겠지. 비록 시일이 더 걸린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한효월의 대답에 활염라는 말을 돌렸다.
"네 사부가 누구냐?"
그는 물었다.
지난 며칠 간 참으로 묻고 싶었던 물음.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정말 저런 인재를 길러낼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경월선인이라고 하십니다."
"경월선인?"
활염라가 미간을 굳히며 그 말을 되뇌었다.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기에.
"하긴, 허명만 얻은 자들이라면 너와 같은 인물을 길러낼 수 없었겠지. 그래…… 알고 있느냐?"
그가 불쑥 물었다.
"……."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음미하는 듯 한효월은 잠시 말을 멈춘 채 활염라 조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안다고……?"
활염라가 미간을 찡그린 채 묵묵히 되뇌었다.
문득 찬 바람이 그의 얼굴을 쓸며 백발을 날렸다. 안개가 그 바람에 밀려 일렁거린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한효월의 모습은 미동도 없다.
침착하고 고요하여 도무지 그의 나이답지를 않았다.
"하긴 다른 방도가 없었겠지……."
묘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그는 문득 탄식하듯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가 막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이다.
"어, 어디 있는 거야? 조 염라! 이 백정, 어디 있어?"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활염라 조과의 안색이 달라져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일진 바람이 일면서 오불관언 종무연의 모습이 다급하게 나타났다.
"무슨 일이냐? 뭐가 그리 호들갑……."
"하아가, 하아가……!"
얼마나 다급한지 종무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더 듣지 않아도 그가 하려는 말이 무슨 뜻인지 활염라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루 이틀 겪는 일이 아니었기에.
두말없이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황급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종무연의 신형도 모습을 감추었다.
"……."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효월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곁에 벗어두었던 헐렁한 장삼을 집어 들었다. 그의 옷은 이미 걸레가 되어 종무연에게서 장삼 한 벌을 빌려 입었는데, 그야말로 볼품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괘념하는 그가 아닌지라 깨끗이 시내에 빨아 입는 것으로 족했다.
옷을 입는 그의 시선은 안개 속에 자리한 모옥을 향하고 있었다.
모옥은 아연 긴장에 휩싸여 있었다.
서문운하, 그들 세 노인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더 귀한 그녀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활염라는 굳은 얼굴로 그녀의 몸 위로 침을 놓고 있었다.
보통 침이 아니었다.
세 치나 되어 보이는 침의 색깔이 은은한 금빛을 띠우고 있는데, 그 침이 활염라의 손에 들리면 찬란한 금광을 뿜어냈다. 속이 비치는 엷은 속옷을 입은 서문운하의 몸에 침이 꽂힐 때마다 그녀의 몸에 잔 떨림이 일어났다.
"어때요?"
송옥교가 침을 놓고서 길게 한숨을 내쉬는 활염라에게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가득했다.
"침을 놓았으니 한잠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요."
"정말 그 침만으로 괜찮아진단 말이냐?"
"내가 허튼 말 한 적 있었더냐?"
믿기지 않는다는 오불관언 종무연의 말에 활염라 조과가 가볍게 냉소를 쳤다. 하지만 진기의 소모가 큰 듯 음성에는 힘이 없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는 모옥 밖으로 나오자 작은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머리를 감싸 쥐는 그의 얼굴빛은 납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방금 쓴 것이 혹 원양석(元陽石)을 갈아 만든 구양신침(九陽神針)입니까?"
그의 뒤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놀란 빛으로 활염라 조과가 뒤를 돌아보자 한효월이 서 있었다.
"네가 구양신침까지 안단 말이냐?"
"지극순음지체로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기적일 겁니다. 선배의 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요. 하지만 구양신침으로 원양(元陽)을 일으켜 체내의 음기를 누르는 것은 마지막 방법……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습니까?"
대답 대신 되묻는 한효월의 말에 활염라는 놀라 입을 벌렸다.
"넌…… 정말 아는구나!"
"진세가 풀리려면 49일이 지나야 하니 아직도 40일은 족히 있어야 합니다. 그때까지 버틸 수 있습니까?"
한효월이 다시 물었다.
"최선을 다한다면, 하지만……."
활염라 조과의 음성이 흐려졌다.
최선을 다한다면……
최선을 다하지 않을 리 없다.
그 이야기는 상황이 정말 어렵다는 의미.
언제라도 잘못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지극순음지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축복받은 몸을 일컫는다.
여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음(陰)의 성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아무리 여자라도 사람인 이상, 순수한 음의 성질만을 가질 수는 없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자체를 견딜 수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음양이 조화(調和)를 이루지 않고서는 사람이 살아갈 수가 없다. 남녀가 만나고 거기서 새 생명이 태어남은 단순히 생리적인 의미가 아니다. 음양의 조화에 의해서 또 다른 세상이 열리는 것이기에.
쉽게 말하면 개체로서는 너무 순수하기보다는 적당히 탁(濁)해야만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지극순음지체는 그렇지가 않다. 전신이 순수한 음의 기운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을 기반으로 하는 여인의 몸으로는 최상이다.
총명이 과인하고, 신체 구조 또한 여인으로서 갖출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천혜(天惠)의 축복을 받게 된다.
그러나 복(福)이 있으면 화(禍)가 있음이 천고의 진리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 신체를 지닌 여인은 나이 열일곱을 넘길 수 없다. 천생으로 지닌 그 음기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더 강해져서 결국 전신이 싸늘히 식어버리고 말게 되는 것이다.
서문운하가 바로 그 지극순음지체였다.
더구나 그녀는 그 몸을 가지고서도 이미 열일곱을 넘긴 지 이태나 되었다. 그것은 활염라라는 절세신의가 곁에 있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의술을 가지고도 그녀를 고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나마 이젠 그것도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
"미인요를 잡아와야만 하겠군요……."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진이 폐쇄되어 나갈 수가 없지 않으냐?"
"길이 있겠지요."
한효월은 말과 함께 신형을 돌렸다.
그가 도달한 곳은 지난번 그들이 같이 진세를 변형시켰던 그곳이었다. 한효월은 그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온 활염라를 쳐다보지 않고서 말했다.
"저 바위를 치울 수 있으면 이 진세의 봉쇄된 문호를 열 수가 있습니다."
"저 바위만 치우면 된다고?"
어이없는 듯 활염라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 까짓 게 뭐가 어렵다고……."
말끝을 흐린 활염라는 대뜸 그 바위를 향해 달려들었다.
무리가 아닌 것이 그 바위는 지난번에 그가 번쩍 들어서 가져다 놓은 것이니 다시 옮기는 것은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용을 써도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힘을 쓰는지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허연 김이 무럭무럭 그의 머리 위로 피어 올랐다.
"이, 이럴 수가?!"
활염라는 죽을힘을 다해도 바위가 꿈적도 하지 않자 마침내 기진맥진하여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너 지금 뭐 하는 게냐?"
그때서야 거기 당도한 오불관언 종무연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활염라는 대답 대신 한효월을 바라보면서 갈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그곳은 이 진세의 축입니다. 봉쇄되어서 누구도 움직일 수가 없는 금성철벽으로 변해 버렸지요. 밖에서도 안에서도 출입이 불가능하니, 보통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난 믿지 못하겠다!"
자존심이 상한 듯 활염라 조과는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그는 고함을 지르면서 바위를 향해서 일장을 쳐냈다. 가히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일장이었다.
하지만 펑! 소리와 함께 신음과 함께 물러난 것은 바로 그였다.
"으윽……!"
그는 팔목을 움켜쥔 채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철벽을 친 듯했던 것이다. 힘없는 노인이 철벽을 쳤을 때 그런 고통을 느낄 것인가.
손목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활염라 조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신음했다.
그가 믿을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그의 무공은 이미 노화순청의 경지에 달해서 일장으로 바위를 쪼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는 수십 년 전부터 모종의 일로 세상을 등졌었다. 하지만 무공은 더욱 깊어져 지난날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였던 것이다.
"쯧쯔…… 저리 비켜봐. 그까짓 걸……."
지켜보고 있던 종무연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뭐 이런 게 다 있지?"
종무연은 혀를 내두르다가 눈이 커졌다.
그 앞에 한효월이 우뚝 서 있는데,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람이 별로 없음에도 그 옷자락이 절로 펄럭이고 주위의 안개들이 어떤 힘에 휘말려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다.
"뭐, 뭘 하려는 거냐?"
그가 물었지만 한효월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서 일어나는 기세가 점점 강해져서 이젠 정말 거의 몸에서 폭풍이 불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 옆에 서 있는 종무연의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옷자락까지 펄럭거릴 정도였다.
그때, 한효월이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 강렬한 신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바라보는 활염라 조과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구양신침을 빌려주시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구양신침은 활염라가 자신의 목숨보다 아끼는 물건이었다.
구양신침의 양화지력(陽和之力)은 쓰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만년온옥(萬年溫玉)보다 더한 효력을 보일 수도 있고, 암기로 쓴다면 그 자체로 호신강기까지 녹여 버릴 가공할 힘을 보일 수도 있는 무가(武家)의 무가지보(無價之寶)이자 의가(醫家)의 무가지보일 수 있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활염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한효월에게 구양신침이 든 침통을 꺼내 건네주었다.
침통 속에는 모두 아홉 개의 구양신침이 들어 있었다.
한효월은 신광이 흘러나오는 눈빛으로 그 구양신침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암중에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구양신침 하나를 든 그가 잠시 그것을 들고 운기하자 금빛이던 구양신침은 점점 붉어져 나중에는 아예 핏빛처럼 붉어져 열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한효월은 그 침을 그대로 자신의 가슴에다 박았다.
그것은 찔렀다가 아니라 정말 박았다는 말이 정확했다.
세 치 길이의 구양신침은 거의 침 머리가 보이지 않게 한효월의 가슴팍 신봉(神封)을 파고들었다. 왼쪽 가슴 신봉혈에 구양신침을 박아 넣은 한효월은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다시 한 개의 구양신침을 들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구양신침은 다시 피처럼 붉게 변했고, 이번에는 그의 오른쪽 가슴에 박혀들었다.
그리곤 세 번째 구양신침이 그의 거궐혈(巨闕穴)에 박히자, 그의 얼굴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침과 마찬가지로 붉게 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네 번째 침이 그의 아랫배 기해(氣海)에 파고들자, 그의 얼굴은 붉다 못해서 홍시와 같았다. 누가 슬쩍 건드리기만 하면 그냥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홍광(紅光)이 너무 강렬하여 마치 빛을 내는 붉은 옥을 보는 것 같을 정도였다.
다섯 번째 침을 집어 드는 것을 보자 활염라가 소리쳤다.
"더 이상 무리를 하면 전신이 터져 버릴 거야!"
한효월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다섯 번째의 침을 자신의 천부(天府)에다 놓았다. 천부란 어깨 근육 조금 아래 팔뚝에 있는 혈도를 이른다.
여섯 번째 침도 오른쪽 어깨의 천부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한효월의 전신은 이제 이글거리는 붉은빛으로 가득했다.
그런 상태에서 한효월은 활염라를 쳐다보았다.
활염라의 귓전에 그의 말이 들려왔다.
'명문혈에 침을 놓아주십시오.'
활염라의 얼굴이 아연실색, 굳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명문혈이란 등에 있는 인체 내의 가장 중요한 구대사혈(九大死穴) 중 하나인 것이다.
'시간을 놓치면 안 됩니다.'
한효월이 침중하게 소리쳤다.
말이라곤 하지만 실제로는 입을 열지 않았고 전음지술로써 활염라에게 전달이 되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활염라가 모를 리 없다.
한효월의 지금 저 상태는 당연히 정상이 아니었다.
그의 상처는 아직도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었고, 체내의 중독도 겨우 해독을 한 상태. 제대로 힘을 쓰려면 아직도 보름은 있어야 했다. 전신의 상처도 다 아문 것이 아니다. 힘을 쓸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저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그의 무공이 갑자기 대증(大增)한 것이 아니라, 무리를 해서라도 진세를 뚫고 나가기 위해서 전신의 잠력(潛力)을 불러일으키려고 하기에 생긴 일이었다.
저 상태에서 전신잠력을 쓰면 어떻게 될는지 활염라는 잘 안다.
하지만 일단 잠력을 일으킨 이상, 멈출 수도 없다. 더 위험해지는 것이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진력을 일으켰다.
구양신침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침은 한효월의 등 뒤 치명적인 사혈이라는 명문혈에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그 순간, 한효월의 전신이 폭풍을 만난 조각배처럼 격렬하게 떨렸다.
휙휙-!
그의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이면서 강렬한 기운이 회오리치면서 일어났다. 붉은빛이 그의 전신을 온통 휘감았다. 붉은 폭풍이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머리카락까지 붉어지는 듯 보였다.
"저, 저건 도대체?"
그 괴이한 현상에 오불관언 종무연이 입을 딱 벌렸다.
하지만 그 놀람은 활염라 조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서, 설마? 태양절맥(太陽絶脈)이…… 아니었단 말인가?"
한효월을 쳐다보는 그의 눈은 커지다 못해서 퉁방울처럼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잠시 숨을 고르듯 한효월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눈빛마저 붉은 듯했다.
그의 전신이 붉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용광로 속에서 뛰쳐나온 사람과 같았다.
이어, 그는 나직한 기합과 함께 양손을 앞으로 쳐냈다.
파팡!
그의 손짓에 따라 그 거대한 바위 양쪽에 있던 조금 작은 바위들이 크게 흔들리면서 약간 밀려났다. 그러자 강렬한 폭풍이 안개를 휘몰면서 일어났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하던지 활염라마저 그 자리에 서 있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 순간에 한효월은 이미 그 거대한 바위에 달려들어서 그 바위를 밀어내고 있었다.
쿠쿠쿠…….
그가 바위를 밀어대자 그 좌우의 계곡이 지진을 만난 듯 크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을 뜨기 힘들게 안개와 폭풍이 일었다. 그 위세는 심히 가공하여 주먹만한 돌멩이가 그 바람에 둥둥 떠 날아다닐 정도였다.
콰쾅!
어느 순간, 맹렬한 폭음이 일면서 갑자기 광풍이 일었다.
"으윽!"
긴장된 표정으로 한효월 쪽을 쳐다보고 있던 종무연은 그 광풍에 휘말려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머리에서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넘어지면서 바위에다 뒷머리를 찧었던 것이다. 그것은 활염라 조과도 마찬가지라 그도 광풍에 휘감겨 뒤로 나가떨어진 상태였다.
그 위세는 실로 대단하여 한동안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 광풍이 자면서 주위에 자욱히 깔렸던 안개가 걷혔다.
그때서야 활염라 등 두 사람은 두 자가량, 바위를 밀어내고서 그 바위에 양손을 짚고 우뚝 선 한효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옷자락이 갈기갈기 찢겨져 거의 걸레 몇 조각을 걸친 듯한 모습이었다.
"무, 무슨 일이지?"
그 소동에 놀라 서문운하를 돌보던 송옥교가 달려왔다.
"괘, 괜찮으냐?"
종무연이 물었다.
천천히 한효월이 손을 내렸다.
동시에 그는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한효월은 무릎을 꿇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펄럭이던 옷자락도 늘어졌고 그처럼 전신을 불태울 듯 타오르던 붉은 광채도 살 속으로 가라앉았다. 은은한 붉은빛이 잔적(殘迹)처럼 남아 있을 따름이다.
휘몰아친 광풍은 한참 만에야 가라앉았다.
"……?"
오불관언 종무연은 다시 활염라를 쳐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된 셈인지 궁금했지만 계속해서 활염라가 인상을 긁으며 눈총을 주었기 때문에 입도 열지 못하고 기다렸었다. 그런데 이미 반 시진이나 흘러갔는데도 여전히 변화가 없자 참지 못하고 대답을 재촉한 것이다.
"아직 건드리면 안 돼. 체내의 기혈을 다스리지 못하면 바로 주화입마에 빠진다. 그냥 두고 보는 것밖에 할 일이 없다."
"도대체 이런 일은 보다가……!"
중얼거리던 종무연의 입이 벌어졌다.
한효월의 등, 그 명문혈에 활염라가 찔러 넣었던 그 구양신침이 저절로 밀려 나오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밀려 나온 침이 땅에 떨어졌다.
"저거……."
종무연이 또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땅에 떨어진 구양신침.
일진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그 땅에 떨어진 구양신침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은은한 금광이 번뜩여 밤에도 스스로 빛을 발한다던 구양신침이 거무튀튀한 빛깔의 폐물처럼 보였다.
스으…….
소리도 없이 그 구양신침이 활염라의 손으로 빨려들었다.
"영기(靈氣)가 사라졌군……."
격공흡물(隔空吸物)로써 허공을 격하고 구양신침을 빨아들여 묵묵히 그것을 살펴본 활염라가 신음을 흘렸다.
과연이었다.
천지간에 가장 뛰어난 양화지력을 가진 원양석을 갈아 만든 구양신침은 이미 그 기운을 잃고 그저 평범한 침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증명하듯 활염라가 가볍게 힘을 주자 그 구양신침은 퍼석! 소리와 함께 그 손 안에서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그때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침착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이 서하곡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음성의 주인공이 누군지 안다. 늘 침착하고 조용한 그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한효월이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괜찮으냐?"
활염라가 물었다.
"불러일으킨 진기의 대부분을 진세를 깨뜨리는 데 썼으니 별무리는 없습니다."
"단순히 그렇지는 않을 텐데……?"
활염라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그를 보았다.
"잠력을 썼으니, 기력이 탈진됨은 당연한 일. 며칠 쉬면서 진기를 보충하면 됩니다."
한효월은 여전히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얼굴은 참으로 묘하였다.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한 가운데 그 피부 밑으로 붉은빛이 은은히 어려 있어, 창백한 것인지 혈색이 도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의 코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린 흔적이 남아 있고 눈에 띄게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 지금 그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말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 * *
사흘이 지났다.
한효월은 그 시간 동안 탈진했던 몸을 추스르는 데 진력했다.
그가 전개했던 것은 도전음양대법(倒顚陰陽大法)으로써 마도(魔道)의 역천자혈지법(逆天刺穴之法)처럼 전신의 잠력을 일으켜 그 충돌로써 전신의 진기를 일시에 폭증시켜서 평소보다 수 배, 혹은 수십 배의 힘을 내는 방법이다. 그 후유증은 대단하여 심하면 죽을 수도 있고, 자칫 잘못하면 평생을 폐인으로 보낼 수도 있었다.
아무리 구양신침의 도움을 받았다 할지라도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그렇게 무리를 했으니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활염라가 곁에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뛰어난 의술을 지닌 사람이었으므로, 한효월의 상태를 잘 알고 그가 회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었다. 아마도 지난 수십 년 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손을 쓰는 것은 외부 사람으로서는 한효월이 유일할 터였다.
석양이 드리운다.
은은한 안개가 깔린 서하곡. 바위에 반사된 노을의 붉은빛이 계곡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한효월은 그 노을을 받으며 편평한 바위에 올라앉아 운기조식에 들어 있었다. 지난 3일 간 그는 요기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운기조식만 했다.
덕분에 창백했던 얼굴은 혈색을 되찾았다.
석양이 짙어질 때, 운기조식에 들어 있던 한효월은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전과 같이 고요했다.
아니, 고요한 가운데 어딘지 모르게 흔들림이 있어 보였다.
눈을 뜬 그는 묵묵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펼쳐진 손.
그 손가락을 천천히 움켜잡아 주먹을 만드는 그의 눈빛이 일렁인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도전음양대법으로 전신의 잠력을 일으켰다. 하지만 뜻밖에도 부작용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일신 공력은 한 단계 진보했다…….'
미미한, 아니, 씁쓸해 보이는 웃음이 그의 얼굴을 스친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냥 두지 않는다고 하더니…… 어쩔 수 없이 무공을 더 수련해야 한다는 것인가?'
주먹을 움켜쥐었던 그는 갑자기 손바닥을 뒤집었다.
다섯 손가락이 차례로 부채살처럼 펴지면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파파팍!
4, 5장가량 떨어진 곳에 있던 바위에서 가벼운 음향이 일었다. 그것이 다였다. 더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인지력(燧人指力)…… 쇠라 할지라도 이 연환수인지력을 견딜 수는 없을 터이다……."
그가 다시 주먹을 움켜쥐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그가 상처 입기 전까지는 수련한 적이 없는 무공이었다. 아니, 이 서하곡에 들기 전까지는.
그때였다.
한 가닥 바람이 일면서 활염라 조과가 황급하게 나타났다.
"나를 도와줘야겠다!"
"무슨……?"
한효월이 그를 쳐다보자 활염라 조과가 다급히 소리쳤다.
"하아가 위험하다. 구양신침이 없는 지금, 네가 아니면 그 아이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제가 말입니까?"
활염라가 발을 굴렀다.
"이런 빌어먹을! 몰라서 묻는단 말이냐? 네가 구양신침의 영기를 모두 체내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구양신침은 이제 폐품에 불과하다. 더구나 네 몸은 그 자체로 이미 태양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라……."
"제가 필요하다면 가보지요."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한효월은 몸을 일으켰다.
"빨리!"
활염라 조과의 신형이 번개처럼 사라졌다.
한효월도 그 뒤를 따랐다.
…….
정적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평소라면 활염라 조과는 한효월의 수인지력을 받은 바위의 형상을 발견했었을런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음이 급한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바위에 남겨진 다섯 개의 지공(指孔)을. 그것은 마치 진흙 위에 새긴 듯 정교하기까지 했다.
* * *
"정말 괜찮을까?"
문을 닫고 나온 송옥교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
활염라 조과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방금 닫고 나온 그 방문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뭐라고 말을 좀 해봐라, 이 돌팔이야! 네가 아니라, 너도 못하는데, 저 녀석이 정말 하아를 돌볼 수 있단 말이냐?"
곡의 입구를 살피는 것이 임무가 된 오불관언 종무연이 언제 왔는지 다그쳐 물었다. 근래에 보인 그의 태도를 보자면, 과연 그가 세상이 망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그 사람인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
활염라의 답은 간단했다.
으스름한 어둠이 희미하게 방 안에 내려앉아 있다.
석양의 붉은빛은 창문을 통과하면서 흐려져 벌써 켜놓은 등잔빛에 힘을 잃는다.
그 불빛 아래 서문운하는 누워 있었다.
침상에 누운 그녀의 모습은 참혹하였다.
엷은 침의(寢衣)만을 입은 그녀의 온몸은 거의 벌거벗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슴을 뛰게 만드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지금의 그녀에게서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오랜 세월의 투병 생활로 인해서 그녀의 온몸은 거의 뼈만 남도록 말라 있었다. 얼굴도 말라 광대뼈가 은은히 튀어나왔다. 아마도 안아본다면 검불처럼 가벼울 터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지닌 아름다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얼굴의 윤곽도, 오똑한 콧날도, 창백하다 못해서 푸르른 빛을 띤 입술마저도 그 선의 선명한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감았지만 그 긴 속눈썹의 흔들림도 그것을 증명한다. 핏기를 찾아볼 수 없고,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마르지 않았다면 세상에 보기 드문 절세의 미인임에 분명하였을 터이다.
그 오랜 세월의 고난도 그녀의 타고난 아름다움을 죽여 버리진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아름다움은 영원히 스러질 위기에 있었다.
한효월이 이 서하곡에 든 이후, 그녀가 제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 것은 거의 없었다.
첫날 그녀를 잠시 본 후부터 그녀는 심각한 상태에 빠졌다.
어쩌다 잠시 정신을 차린 것을 제외한다면 그녀는 오로지 활염라의 의술에 의지하여 겨우겨우 숨결을 이어오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달해 있었다.
거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고, 가슴의 기복도 보이지 않는다.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한효월은 긴 숨을 내쉬고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맥을 짚어보았다.
맥놀이가 보통 사람과 전혀 달랐다.
마치 얼음 덩이를 쥔 듯하여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한순간이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도록 위독한 상태였다.
한효월은 깊게 숨을 들이키고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가슴에다 댔다.
치익…….
기이한 음향이 그의 손과 그녀의 가슴 사이에서 일었다.
그의 손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붉은 무지개와 같은 기운이 그의 손에 어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기묘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은은히 푸른빛까지 드러나 있던 서문운하의 전신, 거기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처음은 당연히 한효월이 손을 댄 가슴팍에서부터였다. 흡사 봄을 만난 대지와 같이 그녀의 굳어 있던 몸이 서서히 한효월의 손바닥이 있는 가슴팍에서부터 풀리기 시작하였다.
그처럼 창백하던 얼굴에도 핏기가 돌아왔다.
대신 한효월의 얼굴에는 붉은빛이 어린 가운데 굵은 땀방울이 맺히더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그녀의 몸에 일단 생기를 심어준 한효월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그녀의 침의 아래로 손을 넣어 그녀의 단전에다 댔다.
그곳은 아직 얼음과 같았다.
미묘한 느낌이 전해졌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상태가 아니었다.
반 시진가량이 흐르자 방 안은 등잔불 빛 외에는 빛을 찾을 수 없도록 어두워졌다. 칙칙, 하는 마치 단 쇠 젓가락을 물속에 넣는 듯한 괴이한 소리도 이젠 사라졌다. 한효월의 힘겨운 숨소리만 정적을 깨뜨릴 따름.
뚝.
한효월의 땀방울이 흘러내려 서문운하의 이마를 쳤다.
파르르…… 그녀의 눈까풀에 가는 떨림이 일었다.
그녀가 눈을 떴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그녀는 한효월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내 다른 한 손이 자신의 아랫배, 단전에 닿아 있는 것을 느끼고 눈빛이 흔들렸다.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명한 그녀는 한효월의 얼굴에서 연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음을 보자 이내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한효월이 눈을 떴다.
두 사람의 눈이 그렇게 서로 마주치게 되었다.
사람이 아프면 정신적으로 피폐(疲弊)해진다.
그러면 몸도 마음도 찌들어 무너지게 된다. 그것이 하루 이틀이 아닌 수 년이라면 어떤 사람이라고 해도 견딜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서문운하는 달랐다.
그녀의 눈은 맑았다. 그리고 깊고 고요했다. 다만 그 눈 깊은 곳에 고통의 빛이 있을 따름이다.
하긴 그것이 정상일 터이다.
지금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은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더구나 하루 이틀이 아닌 바에야 어찌 고통의 빛조차 나타나지 않을 수 있으랴.
정신을 차린 그녀는 한효월의 얼굴을 지척에서 마주하자 잠시 당황하는 빛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댄 것을 느끼게 되자 더욱 그러했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치료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한효월은 나직이 말했다.
"……."
서문운하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을 감았을 뿐이다.
한효월은 그러고도 얼마 동안 운기를 계속하여 강한 열기로 그녀의 전신을 덮고 있는 한기(寒氣)를 몰아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몸이 녹기 시작하자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한효월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얼굴 위로 계속 떨어지는 것도 알지 못하고…….
얼마나 시간이 더 지났을까.
마침내 한효월은 길게 숨을 내쉬면서 손을 거두었다.
그의 손이 닿아 있던 가슴팍, 봉긋한 그녀의 가슴을 덮은 침의는 그녀가 흘린 땀으로 젖어 그 젖가슴의 굴곡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오랜 투병으로 이십 대의 그 풍만함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굴곡은 뚜렷했다. 게다가 도발하듯 곤두선 유실(乳實)의 선명함은 엷은 침의를 뚫고 튀어나올 듯하였다.
한효월은 나직이 한숨 쉬곤 이불을 끌어 올려 그녀의 가슴을 덮어 주었다. 그리곤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고는 맥을 짚었다. 잠시 그녀의 맥을 살피던 한효월은 길게 숨을 쉬고 그녀의 팔을 내려놓았다.
그가 침상을 떠나 문을 닫고 사라지자, 잠들었던 것으로 보였던 서문운하가 눈을 떴다. 한효월이 나간 방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여전히 깊고 맑았지만 묘한 흔들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설마…….'
그녀는 어떤 생각을 떠올리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의 병세는 총명절세한 그녀의 모든 것을 무력케 만들기에 족하였다.
"어, 어떻게 되었느냐?"
한효월이 나오는 것을 보고 송옥교가 다급히 물었다.
"잠이 들었습니다. 상태가 좋지 않아 잠시 쉰 다음에, 추궁과혈(追宮過穴)을 한 번 더 하고 내일 날이 밝기 전에 한 번 더 한다면 잠시 동안은 별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한효월의 말에 송옥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 안으로 쫓아 들어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활염라 조과가 물었다.
"넌, 괜찮겠느냐?"
"괜찮습니다. 미인요를 잡는 것은 모레 만월이 되면 가도록 하지요."
말과 함께 한효월은 모옥을 벗어났다.
다시 밖으로 나온 그는 자리를 잡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녀를 위해 쓴 힘은 막대하여, 다시 추궁과혈을 하기 위해서는 진기의 보충이 절실했다. 한효월은 품 안을 더듬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산할 때 가지고 왔던 단약들은 모두 이번 겁난에 잃어버렸다. 그런데도 부지간에 그것을 찾는 것이다.
운기조식에 들었던 한효월이 깨어난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
그의 앞에는 활염라 조과가 우뚝 서서 그를 보고 있었다.
"괜찮겠나? 연달아 진기를 과도하게 소모하면 탈진할 수도 있다."
"그런다고 죽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서문 소저는 제가 나서지 않으면 죽을 겁니다."
말과 함께 한효월은 몸을 일으켰다.
저 앞, 어둠 속에 모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한효월은 본신의 진기를 일으켜 그녀의 전신에서 일어나는 한기를 몰아내고자 힘썼다. 지극순음지체에서 일어나는 한기는 참으로 순수한 선천(先天)의 음기(陰氣)였다. 그런 만큼 단순히 공력으로 누른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외부에서 침입한 기운은 몰아내면 끝이지만 이것은 끊임없이 내부에서, 서문운하의 몸 자체가 생성해 내고 있는 것이라 몰아내도 몰아내도 끝을 보기 힘들었다.
지난밤에 다시 한 번 추궁과혈하여 한기를 눌렀지만 이 새벽에 보니 다시 그녀의 전신은 하얗게 변하다시피 되어 있었다. 한기가 심해서 서리가 한 겹 서린 듯 그렇게 그녀의 전신이 다시금 얼음 덩어리처럼 변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처음보단 나았지만 실제로는 낫다고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녀의 맥을 짚어본 한효월의 얼굴은 절로 굳어졌다.
예상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그녀의 체내에서 생성되는 한기는 일단 그녀의 체내로 숨어들어야 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끊임없이 진기를 주입하여 한기를 눌러야 한다.
"순양과혈지법(純陽過穴之法)이 효과가 없단 말인가?"
그의 입에서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이미 늦었기 때문입니다……."
미약한 음성이 그 말에 답하듯 들려왔다.
놀라 보니 서문운하가 눈을 뜨고서 그를 보고 있었다.
"소저……?"
한효월의 놀란 얼굴에 그녀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긴 얼굴도 몰랐던 외간 남자에게 거의 벗은 듯한 침의 차림으로 몸을 내맡기고 있으니 처녀인 그녀가 어떻게 표정을 지어야 할 것인가. 어색하고 참담할 따름일 터이다. 하지만 그녀는 과연 평범하지 않아 비록 한효월에게 몸을 맡기고 누워 있어도 그 태도는 의연했다.
"저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하시니 죄송하기 이를 데 없군요."
그녀의 말에 한효월은 가벼이 머리를 흔들었다.
"별말씀을, 그런데 아까 그 말은……."
한효월은 일부러 말머리를 돌렸다.
이런 마당에 말을 잘못하면 공연히 어색해지거니와, 또 다른 소리를 하고 있을 만큼 한가한 상황도 아니었다.
"제 몸은 이미 한계를 넘어갔습니다. 조 숙부와 다른 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겠지요. 어떤 방법도 잠시 유예 조치일 뿐, 치료를 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체내의 음기가 자생자행(自生自行)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하고는 힘든 듯 가쁜 숨을 토해냈다.
"제가 미인요를 구해올 동안만 참으시면 됩니다."
한효월의 말에 서문운하는 미미하게 웃을 뿐 답하지 않았다. 힘겨운 듯 눈을 감았던 그녀는 문득 다시 눈을 뜨면서 물었다.
"혹시 혈행보사지법(血行補瀉之法)을 아십니까?"
"조금 압니다."
"그럼 지금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에서 음기를 빼내실[瀉]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렸다.
"족궐음간경은 다혈소기(多血少氣)한 혈맥인데, 거기서 음기를 빼버리면 기가 사라져 전신에 퍼진 음기를 몰아낼 방법이 없어질 겁니다."
미미한 웃음이 서문운하의 얼굴에 스쳐 갔다.
"대신 공자의 원양진력(元陽眞力)을 넣어주시면 됩니다. 그럼 제가 사흘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그럴 수가 있는지……."
그녀의 말에 한효월은 굳은 표정이 되었다.
그 말에 일리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느냐는 말도 의미가 있었다. 그녀의 혈맥에 깃든 음기를 뽑아내고 자신의 원양진력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말은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절고한 공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그의 원양진력이 그녀의 체내를 돌면서 음기를 해소하면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며칠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이라면 해볼 만합니다."
한효월은 말과 함께 그녀의 다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인의 다리는 남자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가 있다.
미끈하게 뻗어 내린 다리를 보면 가슴이 뛰게 된다. 아무렇지도 않다면 남자가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잘록한 종아리에서 굴곡이 생기는 장단지를 지나 허벅지로 가게 되는 그 선은 그렇듯 의미가 특별하다.
하지만 지금 한효월의 눈 아래 드러난 서문운하의 다리는 그렇지 않았다. 제대로 걷지 못한 지 몇 년에다, 끝없이 시달리는 고통으로 인해 장작개비처럼 말라 뼈에 가죽을 씌운 듯한 다리를 보고 어떻게 가슴이 뛰랴.
그의 시선을 느낀 서문운하는 눈을 감았다.
중국에서 여인의 발은 정조대와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전족(纏足)이 보편화되면서 더욱 심해졌었다.
서문운하는 비록 전족을 하진 않았지만 발이 큰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발을 외간 남자에게 드러내고, 이제 그 다리까지 그에게 맡기고 있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간단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무는 것이다.
족궐음간경은 발가락의 대돈(大敦)에서 시작하여 복부의 위쪽 기문(期門)에서 끝이 난다. 모두 14개의 혈도로 구성되며 양쪽이라 28개의 혈이 있는 셈이다. 경맥의 성질은 을목(乙木)이라 음에 가깝다. 다혈소기하여 피의 양을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 오행(五行)으로 보자면 이제부터 한효월이 만져야 할 둘째 발가락에 자리한 행간(行間)이 화(火)에 속하며 무릎 옆의 곡천(曲泉)이 수(水)에 속하여 족궐음간경의 보혈(補穴)이다.
잠시 숨을 들이킨 한효월은 그녀의 이불을 들추고 침의를 걷어 올렸다.
종아리가 드러나고 허벅지가 드러났다.
뜻밖에도 침의를 걷어 올리자 그녀의 다리는 아직 탄력을 가지고서 그의 눈 속으로 뛰쳐 들어왔다.
뿌연 빛이 등잔 불빛 아래 차게 빛난다.
가슴이 뛰고 할 상황이 아니었고, 한효월 또한 그렇게 범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발가락을 움켜잡았다.
사람의 몸속 경맥에는 유주(流注)라고 하는 것이 있다.
정해진 시간에는 기와 혈이 그 경맥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6자 5치의 이 족궐음간경은 축시에 기혈이 지나게 된다.
흡자결을 운용하자 행간혈을 통해서 한효월의 체내로 그녀의 음기가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원래 자침(刺針)이라 하여 침이나 뜸으로 보(補)와 사(瀉)를 행해야 하지만 지금은 강력한 힘으로 그녀의 기를 통제할 필요가 있는 데다가 그런 힘을 가졌던 구양신침을 한효월이 못쓰게 만들어 버려서 그가 직접 진기를 운용할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가 기를 빨아들이자, 그 기혈의 움직임으로 같이 흘러가던 혈기(血氣)가 정체되기 시작했다.
혈(血)!
피란 정체될 수 없다.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에. 한효월은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기가 사라진 그 위쪽 곡천혈을 통해서 자신의 원양진력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단순히 밀어 넣기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기혈을 움직이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음기를 빼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양기를 불어넣고…… 한효월의 안색이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 효과를 말하듯 서문운하의 안색은 홍조가 돌기 시작하였다.
한효월의 손이 곡천에서 천천히 족궐음간경의 혈도를 따라 올라오기 시작한다.
음포(陰包), 오리(五里), 음렴(陰廉)을 지나자 한효월의 손길이 조금 주춤해졌다. 음렴혈은 치부의 바로 곁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냥 스치고 지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혈도에다 진기를 밀어 넣고 그 진기를 다시 경맥으로 흐르게 해줘야 하므로 쉴 새 없이 미미한 마찰이 일어나야 한다. 내공이 딸리는 사람은 손바닥을 비벼서 열을 낸 다음에 이런 일을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한심한 수준의 사람들이 하는 일에 불과하니 논외의 일이다.
…….
서문운하는 참으로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은은한 홍조가 도는 것을 바라보던 한효월은 문득 그녀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그랬다.
창백했던 얼굴에 핏기가 돌자,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아름다움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잠든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한효월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녀의 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