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四首 강호삼괴(江湖三怪) (36/113)

第四首  강호삼괴(江湖三怪)

-구원이 당도하다

영웅과 기녀(奇女)는 처음 만나지만

 약 30년 전, 무림 중에 한 사람의 괴인이 나타났다.

 죽어가는 사람도 한번 손을 쓰면 숨이 돌아오는 의술의 대가.

 그러나 그의 이름은 이내 괴인으로 분류되고 그에게 치료를 받으려는 사람 또한 급속도로 사라졌다.

 이유는 너무도 간단했다.

 그에게 치료를 받는 사람은 모두가 죽어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보면 치료를 해주겠다고 덤벼들었다. 물론, 치료를 받은 뒤에 살아남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차라리 지옥의 염라를 만날지언정, 살아 있는 염라를 만나지 말라!

 그 한마디는 그를 표현하고도 남았다.

 활염라라는 이름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독수낭랑(毒手娘娘)이라는 이름 또한 마찬가지였다.

 선녀를 방불케 하는 용모를 지닌 묘령의 여인.

 그녀의 미모를 보고 강호의 뭇 영웅호걸들이 그녀의 뒤를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그들은 이내 머리를 싸매고 그녀의 주위에서 도망쳐야 했다. 그녀의 성정(性情)은 실로 희로(喜怒)가 무상(無常)하여 방금까지도 황홀하게 웃던 얼굴로 눈앞의 사람이 다시는 숨을 쉬지 못하게 하니, 어찌 그녀의 곁으로 갈 것인가.

 그렇게 해서 그녀의 외호는 날수독심이 되어버렸다.

 그런 그녀의 곁에 늘 붙어 있는 사람 하나가 있어 오불관언이라 했다.

 누가 자신을 건드리지 않으면 하늘이 무너져도 신경을 쓰지 않는 괴인. 그는 늘 독수낭랑의 주변에서 졸고 있었지만 괴이하게도 독수낭랑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게으른 그는 독수낭랑이 하루에 천 리를 이동해도 그녀의 곁에서 졸고 있었다. 그러한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시켜 준 것은 독수낭랑에게 아들을 잃고 복수를 하기 위해서 달려온 산동의 패자(覇者), 일자무적검(一字無敵劒) 진가기(陣家驥)였다. 그는 길에서 졸고 있는 그를 말발굽으로 짓밟아 버리려고 하다가 그가 이끌고 온 고수 삼십여 명과 함께 그 죄로 그 자리에 뼈를 묻어야 했다.

 강호가 발칵 뒤집어졌다.

 세상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런 그들이 같이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

 왜 그들이 같이 다니는지, 그 까닭을 알아내기도 전에 그들의 모습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세상을 뒤집어놓은 시기는 불과 4, 5년.

 그럼에도 그 이름은 아직 잊혀지지 않았다.

*   *   *

 밤 안개가 가득하다.

 계곡 전체는 안개로 잔잔히 덮여 반 장 앞을 보기 힘들다.

 하지만 조금 더 나아가면 눈앞이 트이기 시작한다.

 좌우로 병풍처럼 솟아오른 산세가 눈에 선연하며, 어디선가 물소리도 은은히 들린다. 여기저기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한 가운데 그 계곡 깊은 곳에는 한 채의 작은 모옥(茅屋)이 존재했다.

 대충 나무로 만든 그 모옥은 방이 두어 칸 정도 되어 보였다.

 암반에 자리한 그 모옥은 정남향으로 그 높은 절벽을 등지고서도 해가 떠오르면 바로 햇살 속에 파묻힐 수 있는 묘한 지형에 위치하고 있었다.

 안개를 헤치고 그 모옥에 가장 먼저 도달한 것은 바로 오불관언 종무연. 그는 한효월을 옆구리에 끼고서 바람처럼 모옥의 앞에 나타났다.

 그 뒤를 이어 날수독심 송옥교가 날아들었다.

 그녀는 나타나자마자 황급히, 정말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이 모옥의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태도는 급하지만 모옥 안으로 들어가는 움직임은 극히 조심스러워서 마치 누가 깰까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오불관언 종무연은 그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는?"

 천하의 오불관언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입을 뗀다.

 모옥의 안은 통나무 탁자 하나가 자리한 작은 규모의 대청이다. 그리고 방 하나가 자리했다. 그게 전부 다였다.

 날수독심 송옥교는 그 방에 들어가 있었고, 오불관언이 한효월을 내려놓지도 않고 고개를 들이민 것도 바로 그 방 안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방에는 굳게 닫힌 창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역시 나무로 만들어진 침상.

 그 위에는 누군가가 이불을 덮은 채로 누워 있다.

 "괜찮군……."

 침상 위의 사람을 살펴본 날수독심 송옥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자상한 빛이 가득했다. 지금의 그녀를 보고 누가 날수독심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 있으랴.

 "무슨 짓이냐?"

 활염라 조과가 인상을 험악하게 긁었다.

 헐레벌떡 당도하여 문 안으로 들어서려는 그에게 오불관언 종무연이 들고 있던 한효월을 냅다 안겼던 것이다.

 "가서 이놈이나 살려. 넌 네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냐?"

 "너……."

 "하아는 괜찮아. 하지만 이놈이 죽으면 어떻게 되지? 얼핏 봐도 이놈은 웬만하면 살아날 가망성이 별로 없는 거 같은데?"

 오불관언의 말에 혼수상태에 빠진 한효월을 힐끗 바라본 활염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말 기식이 엄엄했던 것이다.

 치명상을 입고 물속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장시간 급류를 타고 흐르면서 여기저기 부딪힌 상처가 원래의 상처보다 더 심했다. 살이 찢어져서 뼈가 드러난 곳까지 있었다. 이러고 살아 있다는 게 기적이고 더더구나 스스로 정신을 차렸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빌어처먹을 놈……."

 활염라 조과는 눈이 찢어져라고 오불관언 종무연을 쏘아보고는 한효월을 낚아채서 옆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보니 목판 옆으로 작은 문이 또 하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선 활염라의 안색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심각히 굳어졌다.

 그는 한효월을 조심스럽게 안아 방구석에 마련된 침상에 뉘였다. 침상이 붙어 있는 이 방은 좁았지만 약 향(藥香)이 그윽했다. 그러고 보니 사방에 각종 약천지였다.

 "지독하군……."

 정식으로 한효월을 살펴본 활염라 조과가 중얼거렸다.

 정말로 상처가 너무 심했던 것이다.

 "대체 누가 이 나이에 이런 성취를 이룬 놈을 키워낸……!"

 한효월의 맥을 짚고 인상을 쓰고 있던 활염라 조과의 얼굴이 괴이하게 변했다.

 "이건 또 뭐냐?"

 황당한 빛으로 뜨악해 입을 벌린 그는 믿기지 않는 듯 다시금 한효월의 맥을 짚었다. 새로 맥을 짚는 그의 안색은 정말 침중했다.

 창백한 얼굴.

 파리한 안색에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그나마 그녀가 여인임을 말한다.

 잠든 듯 눈을 감은 얼굴에는 혈색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마에 흐른 몇 방울의 땀이 그녀가 살아 있음을 말할 뿐. 긴 속눈썹 아래 자리한 두 눈은 뜨기조차 힘든 듯 굳게 닫혀 있기만 하다. 하지만 말라 조금 솟아오른 광대뼈로 인해 더욱 핼쑥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건강했었다면 참으로 미인이라 불리웠을 모습이 분명하였다.

 그런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날수독심 송옥교는 길게 한숨을 쉬면서 자상스럽게 쓸어 넘기고 있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안타까운 빛이 가득했다.

 "어떻게 하든 너만은 살려주마. 너만은…… 절대로……."

 날수독심 송옥교는 뼈만 남은 그녀의 가냘픈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대고서 눈을 감았다. 뜨거운 눈물이 용솟음쳐 그녀의 눈에서 볼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누구도 그녀의 이런 모습을 믿지 못하리라.

 '망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오불관언 종무연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시간이 흘렀다.

 날이 밝고 다시 날이 어두워졌다.

 서산 너머로 찬란한 햇살이 구름 속에서 천천히 붉은 잔영(殘影)을 남기며 가라앉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맑은 날임에도 계곡에 고인 안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도 그저 고요하게 계곡을 덮고 있을 따름이다.

 "후우……."

 활염라 조과는 긴 한숨과 더불어 허리를 폈다.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하긴 제아무리 내가의 고수라 할지라도 밤을 샌 것도 모자라 다음날 저녁때까지 병자를 돌봤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어떻게 되었냐?"

 문득 그의 뒤에서 묻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서 제 아비가 죽어 나가도 신경 안 쓸 놈이 건 왜 물어?"

 나타난 것이 오불관언 종무연임을 아는 활염라 조과는 쳐다보지도 않고 내뱉듯 말했다.

 그의 눈앞 침상에는 한효월이 잠자듯 누워 있었고, 거의 벌거벗은 그의 전신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검은 약물로 덮여 있었다. 그나마 고슴도치처럼 전신에 꽂혀 있던 금침을 지금 막 뽑아낸 참이라 한참 모양새가 나은 셈이었다.

 "살아나긴 한 거냐?"

 활염라가 사납게 오불관언을 노려보았다.

 "똥물에 튀겨 죽일 놈 같으니…… 내가 손을 댔는데……."

 "흐흐…… 그놈의 손은 산 사람도 죽이는데, 죽어가는 사람이야 콧김만 스쳐도 살아남을 수가 없으니 하는 말이다."

 말하던 오불관언 종무연은 갑자기 미간을 찡그리더니 그 자리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촐싹거리긴……."

 중얼거린 활염라 조과는 문득 한효월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이 나이에 어떻게 그런 성취를 이루었는가 했더니…… 역시 미인박명이라 재주가 승하면 하늘의 시기를 받는 모양이로군. 겨우 살리긴 했다만, 어차피 그건 임시변통에 불과하니……."

 활염라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한효월은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고른 숨소리를 내는 걸 보면 그의 말대로 위험한 고비는 넘긴 듯했다. 과연 활염라의 의술은 대단한 것이 분명하였다. 그는 왜 그런 의술을 가지고서도 살아 있는 염라가 되었던 것일까.

 방금 모옥에서 떠나온 오불관언 종무연은 질풍과 같이 곡구에 도달했다. 그 놀라운 신법을 보고 누가 그의 게으른 모습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곡구는 여전히 짙은 안개로 휘감겨 있었다.

 하지만 그 안개에는 뭔가 모르게 변동이 있는 듯 보였다.

 그 안개 속을 헤치고 기척도 없이 앞으로 나간 오불관언 종무연은 곡구 밖을 내다보고는 안색이 달라졌다.

 "무슨 소리야? 어떤 놈들이 진을 파괴할 수가 있어?"

 활염라 조과는 놀라 눈을 부릅떴다.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나다가 들어오려는 놈들이 아닌 건 분명하다. 어쩌면 저놈을 쫓아서 온 건지도 모르겠다."

 오불관언 종무연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운무금쇄미종진(雲霧禁鎖迷綜陣)은 상고기진인데…… 그걸 파해하는 놈들이 있단 말인가?"

 활염라 조과가 신음했다.

 원래 이 골짜기의 안개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병든 소녀의 병구완을 위해 이곳에 머물렀고, 그것을 위해 진세를 설치하면서부터 일어나 골짜기가 안개로 뒤덮인 것이었다.

 운무금쇄미종진세의 위력은 놀라워서 누구도 그 안개를 뚫고 계곡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걷다가 보면 다시 골짜기 밖으로 나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환각이 아니라, 아예 골짜기로 들어오는 통로가 진세로 인해 막혀 버려 생기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진세를 깨뜨리면서 누군가가 안으로 진입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지?"

 오불관언 종무연이 물었다.

 "이런, 그렇다고 여기 들어와서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하냐? 당장 나가서 놈들을 막든지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게 아니냐!"

 활염라 조과가 열을 받는지 얼굴이 벌게져서 소리쳤다.

 "그렇긴 하다만 우리가 여기 있는 게 알려져서 만약 싸움이라도 나면……."

 오불관언 종무연이 그들의 뒤에 있는 병든 소녀를 건너다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요! 어서 가서……."

 날수독심 송옥교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반오행(反五行)을 정(正)의 위치로…… 대신, 건곤(乾坤)을 상(傷)과 두문(杜門)으로 옮기세요……."

 나직한 음성이 그들의 뒤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병든 소녀.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그녀가 눈을 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병든 사람, 아니, 방금까지 혼수상태로 잠들어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도록 참으로 맑고 투명하였다.

 "하아(霞兒), 정신이 드느냐?"

 날수독심 송옥교는 반색을 했다.

 소녀는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미간을 가볍게 찡그리며 말했다.

 "어서 가세요…… 나타난 사람이 진세를 뚫고 들어오고 있다면 그는…… 전문가일 테니 금방 진세가 파훼될런지도 몰라요……."

 "아, 알았다!"

 일진 바람이 일면서 오불관언 종무연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모모…… 날 좀 일으켜 주세요."

 "그래."

 송옥교가 그녀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침의를 입은 그녀의 몸은 검불과 같이 가냘프고 가벼웠다.

 "바깥을…… 곡구(谷口)를 볼 수 있게 해주세요."

 "바깥? 안 된다. 찬 바람을 쐬면 자칫……."

 그러자 그녀는 머리를 기며 파리한 미소를 머금었다.

 "누가 들어올지 모르지만…… 운무금쇄미종진을 아는 사람이라면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그가 우리에게 좋은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전 찬 바람만 쐬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

 한 점 기운도 찾아볼 수 없는 음성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과 음성은 맑고 청랑(晴朗)했다. 거의 종일, 어떨 때는 며칠씩 혼수상태에서 지내는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녀의 말에 송옥교는 어쩌면 좋겠냐는 듯 활염라 조과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하여 창밖을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진세는 그녀, 서문운하(西門雲霞)가 알려주어 설치한 것으로 그들 세 사람은 겨우 출입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안개가 가득한 곡구.

 그 절곡의 하늘 저쪽으로는 노을이 붉게 타올라 곡을 물들이고 있다.

 가히 절경이었다.

 서하곡(棲霞谷)이라 그녀가 이름 붙인 이 계곡에 온 것은 이미 반년이나 되었지만, 그녀가 눈을 뜨고 이 노을을 제대로 본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이 근래에 들어서 그녀가 혼수상태에 빠지는 일이 점점 더 잦아졌고, 그 기간도 더욱 길어졌기에.

 홀린 듯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소녀.

 서문운하는 암암리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노을이 지듯이 나도 곧 지겠지…….

 과연 다음에 눈을 뜨고서 저 노을을 볼 수 있을까?

 꿈 많을 나이.

 땅바닥에 구르는 낙엽만 봐도 웃음을 터뜨린다는 나이를 병으로 지샌 그녀의 가슴은 또래와는 비교할 수 없이 깊었다. 그래서 자신이 한숨을 내쉬면 그 소리에 송옥교의 가슴이 무너질 것을 알고 그나마 암중으로 삭이고 마는 것이다.

 문득 서늘한 바람 한줄기가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흔든다.

 선뜻한 느낌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괜찮으냐?"

 그녀의 가냘픈 몸에 가는 떨림이 임을 보고 송옥교가 걱정스러운 듯 이불을 덮어주면서 물었다.

 정신을 차린 서문운하는 가벼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시선을 들어 안개가 가득한 곡구를 바라보았다. 전과는 달리 안개가 가볍게 계속해서 일렁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살펴보는 그녀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누군지 대단한 사람이 온 것 같군요……."

 "무슨 소리냐?"

 그녀의 중얼거림에 송옥교가 물었다.

 "종 할아버지로서는 온 사람을 막을 수가 없겠어요. 제가 가야 해요."

 그녀의 말에 송옥교가 입을 딱 벌렸다.

 "말도 안 된다! 넌 지금……."

 "내가 종 할아버지에게 알려 보낸 것은 방향을 틀어 상대의 이목을 혼란시키려는 것이었어요. 하아…… 하, 하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거기에 속지 않고 있어요. 이대로 간다면…… 반 시진 내에 진세는 무너지게 될 거예요. 더 지체할 수 없어요."

 그녀가 가쁜 숨을 토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개의 출렁거림이 조금씩 더 커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

 어쩌면 좋겠느냐는 듯 송옥교는 다시 활염라 조과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움직임에 있어 그의 결정이 모든 걸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녀를 치료하는 사람이 그이기에.

 "안 된다. 어떤 놈이 들어오려는지 모르지만, 감히 이곳으로 함부로 들어오는 놈들은 사그리 아작을 내버릴 테니 넌 걱정하지 말거라."

 활염라가 옆으로 다가오면서 창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들이 누군지 모르지만 싸우는 건 옳지 못해요."

 그의 손을 잡으며 서문운하가 말했다.

 그녀의 찬 손에 활염라 조과는 쓰게 웃었다.

 이 병든 소녀는 그야말로 천사와 같았다. 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걸 너무도 잘 아는 그인지라 그녀의 앞에서는 흉악한 내색을 할 수가 없다.

 "알았다. 그럼 이 할아비가 가서 놈들을 멀리 쫓아버리고 오마. 망할! 그러게 놈을 왜 데려와서 쓸데없이……."

 그의 뒷말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는 것이 부지간에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누굴…… 데려왔다는 거예요?"

 서문운하가 큰 눈으로 그를 보면서 물었다.

 그 말에 활염라 조과는 아차, 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들의 보배인 이 병든 소녀는 비할 바 없이 총명하여 결코 속일 수가 없음을 그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건……."

 그때였다.

 "심상치 않아!"

 다급한 음성과 함께 일진 미풍이 일더니 오불관언 종무연이 다시 나타났다.

 "놈들이 진세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밖에서 쥐새끼처럼 생긴 유생 한 놈이 지휘를 하고 있는데…… 이미 십여 명이 진세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다급히 말을 잇자, 서문운하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렇게나 빨리? 제가 말한 대로 진세를 바꾸었나요?"

 그녀의 말에 오불관언 종무연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반오행은 정오행으로 바꾸었는데, 건곤 전이(轉移)를 미처 하지 못했다. 그놈이 밖에서 수를 쓰자 진세에 변화가 일어나서……."

 "이런 육시랄 놈 같으니! 그것도 하나 못해?"

 활염라 조과가 분통을 터뜨렸다.

 "모모, 절 일으켜 주세요. 제가 가야 해요."

 서문운하가 침상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불을 젖히며 침상 아래로 내려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나직한 신음과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하아야!"

 송옥교가 놀라서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저, 전 괜찮아요. 그보다 저를 어서……."

 "안 된다! 넌 지금 움직일 수 없다. 우리가 너를 보호할 테니 넌 걱정 말고 여기 누워 있거라. 하아를 부탁하오."

 활염라 조과가 굳은 표정으로 송옥교를 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옆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반오행을 정오행으로 바꾸고, 건곤전이(乾坤轉移)하여 두전성이(斗轉星移)하려 함은 운무금쇄미종진의 문호(門戶)를 폐쇄하려는 것이오?"

 놀라 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니 옆방 문틀을 잡고 한 사람이 위태한 모습으로 기대어 있음이 눈에 들어온다.

 거의 벗은 몸에 전신에는 검은 고약을 발라 기괴한 몰골.

 그에게서 눈에 띄는 것은 그 와중에도 침착하고 깊게 반짝이는 맑은 두 눈. 바로 한효월이었다.

 "너는……?"

 그가 나타나자 활염라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효월이 아직 깨어날 때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

 한효월과 서문운하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갑작스레 나타난 그로 인해 놀란 빛이었던 서문운하는 잠시 그의 눈을 마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가능하다면……."

 "그렇게 되면 사십구 일 간 안쪽에 있는 사람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도 알고 있소?"

 한효월이 물었다.

 "알아요."

 서문운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

 "……?"

 세 노인은 눈을 멀뚱거리고 서로를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저놈이 말하는 소리를 좀 들어보라.

 둘이 뭐라고 하긴 하는데, 이건 도무지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이해가 되질 않는 말이 아닌가.

 "그럼 좋소."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한효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어이가 없는 듯 입을 열던 오불관언 종무연은 그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한효월이 그의 말을 자르는 것도 모자라 말과 함께 이미 앞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비틀거리는 신형.

 하지만 그는 이미 그들에게 등을 보인 채로 앞서 가고 있었다.

 "……?"

 어쩌면 좋겠냐는 듯 오불관언 종무연이 활염라 조과를 쳐다보았다.

 "보긴 뭘 보냐? 다른 방법이 없는데!"

 말과 함께 활염라 조과가 바람같이 그 자리를 박차며 곡구 쪽으로 날아갔다.

 그것과 함께 오불관언의 모습도 사라졌다.

 한효월과 함께였다.

 창문을 통해서 그들이 이미 곡구 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오불관언의 신법은 과연 대단하여 한효월을 안고 감에도 활염라와 거의 동시에 곡구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

 그 모습을 서문운하는 묘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곡구에 이른 한효월은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일대에 포성된 것은 정말 상고기진인 운무금쇄미종진이었다.

 하지만 몇 가지를 살펴보자, 진세가 완벽하게 설치되지 않은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이러니 그처럼 쉽게 진세가 파탄을 드러내었을 터이다. 운무금쇄미종진은 팔괘구궁수를 따라 제대로 설치가 되어 있었다면 제아무리 대단한 전문가라 할지라도 설치한 사람을 제외하면 함부로 드나들 수가 없었다. 아예 길이 바뀌기 때문이다.

 "알아보긴 하겠느냐?"

 오불관언 종무연이 말했다.

 그 순간, 한효월은 한 사람의 녹삼문사(綠衫文士)가 유생건(儒生巾)을 쓴 채로 천천히 안개 속으로 진입해 들어오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손에 섭선 한 자루를 든 그는 대한 두 명의 호위를 받으며 침착한 걸음걸이로 전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거리는 7, 8장가량에 불과했다.

 만약 진세의 묘용이 아니라면 그들은 이미 그 녹삼문사의 일행에게 발각이 되었을 터였다.

 "……!"

 한효월은 그에게 머리를 흔들어 보이면서 입에다 손을 댔다.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주먹만한 돌멩이 다섯 개를 집어 들었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그가 그 돌을 원형으로 늘어놓자, 갑자기 그들의 주위에서 짙은 안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오불관언은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이놈 뭘 알긴 아는 놈인가 본데?'

 그때 한효월이 앞에 있던 커다란 바위를 밀어내는 것을 보자 활염라가 바람처럼 달려들어 그를 도왔다. 그는 누구보다 한효월의 상태를 잘 알아서 그가 지금 힘을 쓸 처지가 아님을 알고 있는 것이다.

 높이가 1장이나 되는 바위를 석 자가량 옮겨놓자 한효월은 거기에 기대 가쁜 숨을 내쉬며 옆에 있던 바위 두 개를 손가락질했다.

 '옮기란 거냐?'

 오불관언 종무연이 전음으로 물었다.

 안개가 가득한 진세를 헤치고 나가던 녹삼문사는 미간을 찡그렸다.

 갑자기 눈앞을 막고 선 거대한 절벽을 봤기 때문이다.

 얼마나 높은지 하늘을 가릴 듯했다.

 하긴 안개로 인해서 시야가 가려 있으니 그 높이를 제대로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였다.

 "이게 뭐야?"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절벽이 아니라, 이제부터 안개가 걷히고 진세가 끝이 나야 했다.

 그런데 까마득히 하늘을 찌르는 절벽이라니?

 잠시 주위를 살펴보던 그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이런 장난으로 내 눈을 속일 작정이란 건가?"

 한심하다는 듯 웃음을 떠올린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옆으로 몇 걸음을 옮겼다.

 안개가 조금 사라지면서 시야가 맑아졌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그는 조금도 망설임없이 눈앞에 보이는 바위를 향해 걸음을 옮겨놓았다. 마치 바위에 머리를 찧으려고 덤비는 듯한 무모한 모습이었지만 진세의 변화를 이미 읽어낸 그로서는 전혀 무모한 일이 아니었다.

 퍽!

 눈앞에 불똥이 튀었다.

 "윽!"

 나직한 신음과 함께 그 녹삼문사가 뒤로 물러났다.

 그의 앞에는 정말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니, 그냥 바위가 아니라 절벽이었다. 자신있게 앞으로 전진하던 그는 그 바위에다가 그냥 이마를 부딪치고 말았던 것이다. 만에 하나, 그가 진기를 유포시킨 채 조심스럽게 앞으로 전진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마가 터지고 말았을 터였다.

 좌우에서 그를 호위하고 있는 두 명의 대한은 그 광경을 보고 경악의 빛을 떠올렸다. 그들이 모시고 있는 사람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통증에 녹삼문사가 이마를 움켜쥔 채로 신음했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눈앞의 절벽으로 손을 내밀었다.

 딱딱한 감촉.

 정말 바위였다.

 환상이 아니었다.

 그를 속일 수 있는 환상은 없었다.

 손을 내민 그는 천천히 바위를 더듬었다.

 아무래도 눈앞의 광경이 믿을 수가 없는 듯했다.

 이대로라면 진세가 끝이 났다는 의미고, 진세의 안에 이런 절벽만 있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인 까닭이다.

 바로 그 순간이다.

 진 바깥에서 다급한 호각 소리가 급박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에 녹삼문사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한차례 발을 구르곤 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놈이 밖으로 기어나간다.'

 바위 뒤 안개에 숨어서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오불관언 종무연이 전음지술로 한효월에게 알렸다.

 바위 뒤에 기대어 숨을 죽이고 있던 한효월은 이를 악문 채 앞에 있던 바위를 손가락질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활염라 종무연이 높이가 3장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를 번쩍 들어서 옆으로 옮겨놓았다. 한효월의 지시에 따라 오불관언 종무연도 신형을 날려 다른 바위 하나를 굴려 반 장쯤 옮겼다.

 그것을 보자 한효월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마치 무너지듯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넌……?"

 오불관언 종무연이 바람처럼 그의 곁으로 날아왔다.

 "괜찮습니다. 이제 돌아가도 됩니다."

 한효월은 말과 함께 힘겹게 눈을 내리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세의 축을 바꾸는 마지막 작업을 하려는 순간에 그 바위 건너에는 그 녹삼문사가 서 있었다. 그가 본 절벽은 바로 그 바위였기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척을 낸다면 바로 진세를 깨뜨릴 수 있는 상황.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두 노인의 무공이 놀라워 한바탕 싸울 수야 있겠지만 그건 그들이 여기 있음을 광고하는 일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무슨 일이냐?"

 진세의 밖으로 나온 녹삼문사가 물었다.

 "일단의 무리들이 저지를 뚫고 안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녹삼문사가 미간을 찡그렸다.

 "어떤 자들이기에 막지 못하고 긴급 신호를 발한단 말이냐?"

 그 순간, 숲 저쪽에서 싸우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것 같더니 이내 처절한 비명 소리가 석양을 뒤흔들면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격렬하게 싸우는 소리가 뒤를 잇더니 그 소리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흑의인 하나가 급하게 그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나타난 것은 개방의 고수들입니다."

 그 보고에 녹삼문사는 어이없는 빛을 떠올렸다.

 "한낱 개방에 이렇게 밀린단 말이냐?"

 "으하하…… 한낱 개방에 밀리는 주제에 큰소리란 말이냐?"

 천둥치는 듯한 웃음소리가 그 말에 대꾸라도 하듯이 들려왔다.

 그리고 장대한 체구의 대한 하나가 장내에 나타났다.

 흑의인들이 일제히 검을 떨치며 그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흥! 반딧불이 명월과 밝음을 다투려 한단 말인가?"

 대한은 코웃음을 치면서 수중의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가 몽둥이를 휘두르자 마치 폭풍과 같은 기세가 몽둥이에서 일어나면서 달려드는 흑의인들을 휘감아갔다.

 쨍! 쨍∼ 쨍그렁∼!

 날카로운 금속성이 고막을 찌르면서 몽둥이가 흑의인들의 도검을 쳐냈고 도검은 몽둥이의 기세에 밀려서 서로 부딪치면서 튕겨졌다. 그의 앞에 있던 흑의인은 피를 뿌리면서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뿐만 아니라, 그 대한의 좌우에서 십여 명의 거지들이 바람처럼 나타나면서 흐트러진 그들을 공격했다.

 "으악……."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일시에 앞을 막고 있던 전열이 흐트러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대한은 질풍과 같이 녹삼문사를 향해서 쏘아왔다.

 그런 그를 향해서 소리도 없이 차가운 검광이 그 대한을 향해 양쪽에서 날아들었다. 녹삼문사의 좌우에서 그를 호위하던 흑의인 둘이 발검(拔劒)하여 그 대한을 공격한 것이다.

 검광이 나는 수레바퀴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그 대한을 공격했다.

 검기가 삼엄하게 일어남을 보자 8척 장신의 그 대한도 감히 경시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함을 치면서 몽둥이를 연신 휘둘러 태풍과도 같은 경기를 일으켜 두 흑의인의 검기를 쳐내려 했다.

 뚱! 뚜다당!

 검기와 그의 몽둥이라기보다는 곤(棍)에 가까운 길다란 몽둥이가 격돌하여 폭음을 토해냈다.

 흑의인 두 사람의 검술은 놀라워 그의 힘에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막 앞으로 나서려던 대한은 갑자기 나직한 신음과 함께 급급히 뒤로 후퇴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녹삼문사는 차갑게 말했다.

 "개방에 용호십팔개가 있고, 그중 곤룡곤(困龍棍)이란 우두머리가 있어서 일절(一絶)이라 하더니 바로 너를 두고 이르는 말인 모양이군……."

 대한은 이를 악물고서 그를 노려보았다.

 "비겁한 놈…… 암습을 하다니……."

 "핫하…… 싸움터에서 군자연(君子然)하려 하다니, 그러고도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용하군."

 대한의 말에 녹삼문사는 껄껄 웃으며 한 걸음을 나섰다.

 그러자 그의 신형은 이미 2장의 거리를 찰나간에 가로질러 대한, 바로 용호십팔개의 대형인 곤룡권의 앞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물러서거라. 그는 제천교의 북벌후(北伐侯)로서 네가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맑은 음성이 장내로 날아들었다.

 그 음성에 대한은 물러섰고, 녹삼문사 또한 걸음을 멈추었다. 멈추고 싶어 멈춘 것이 아니라, 들려온 음성에 강력한 내공이 깃들어 그를 공격했기에 놀라 신형을 멈춘 것이다.

 한 사람이 몇 사람 거지의 호위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개방주?"

 그를 본 녹삼문사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나타난 사람은 과연 개방의 방주인 황엽이었다.

 그는 그림자처럼 그를 따르며 호위하는 수신구룡의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장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황혼이 짙다 못해서 이제 검어지고 있다.

 곧 산속의 밤이 찾아오리라.

 황엽은 장내를 한번 쓸어보고는 미미하게 웃었다.

 "수하가 귀하에게 무례했다면 용서하시오. 본 방주가 그들을 잘못 가르쳐 귀하에게 암습을 하지 않았으니…… 그러나 오늘 일을 교훈 삼아서 쥐새끼들에게는 굳이 강호상의 도의를 찾지 말도록 가르치도록 하겠소. 죄송하오. 정말 죄송하오!"

 황엽은 정말 미안한 듯 두 손까지 맞잡아 포권을 해 보였다.

 그 모습에 녹삼문사, 제천교의 북벌후인 그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말투는 점잖았지만 실제로 그의 말은 지독한 욕에 다름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이미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음은 결코 간단한 일일 수 없었다.

 하나 그는 과연 보통 사람이 아니라서 이내 음산히 웃을 수 있었다.

 "개방의 방주 황엽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니, 오늘 보니 과연 철구신공은 개세의 절학이라 감히 함부로 맞설 수 없을 것 같군……."

 그는 이내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개방은 사사건건 본 교의 일에 간섭을 하는데, 그러고도 개방이 무사할 것 같소?"

 그 말에 황엽은 빙긋이 웃었다.

 "제천교는 강호상의 모든 일에 사사건건 간섭을 하는데, 그러고도 강호동도의 분노에서 무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흥!"

 북벌후의 안색이 음침히 가라앉았다.

 "과연 개방의 방주에게 어떤 능력이 있기에 그처럼 광오한지, 오늘 본후가 견식하여 봐야겠군."

 말은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은 채 황엽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를 따르는 흑의인들의 숫자는 모두 서른쯤이었다.

 하지만 개방의 방주를 따르는 숫자는 그보다 훨씬 많아서 근 50을 헤아린다. 단순히 숫자만을 따져도 상대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용호십팔개와 방주의 수신구룡 등 모두 개방의 최정예들이다.

 필승을 장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황엽은 평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금 전, 연리각(連理角)이 울리는 걸 들었지. 하지만 여기에 후원군이 왔을 때, 살아남은 자를 과연 이 자리에서 볼 수 있을까."

 그의 말에 북벌후의 얼굴이 굳어졌다.

 "본 교에 대해서 아는 게 많군."

 황엽이 껄껄 웃었다.

 "적을 알지 못하면 이기기 힘들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 핫하하…… 제천교의 오방후 중, 북벌후가 가장 교활하여 다루기 힘들다고 하더니 오늘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군."

 말을 하면서도 그의 눈은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그날 이후, 계속 제천교의 동태를 감시하면서 그들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것은 실종된 한효월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제천교의 종적을 따라 여기까지 이른 그인지라, 혹시 한효월의 흔적을 이들이 발견했는가 하여 주위를 살피는 것이다.

 눈앞에 안개에 덮인 계곡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살피는 것은 눈앞의 적을 없앤 다음이라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일일 터이다.

 더구나, 이곳에서 오래 시간을 끌면 적의 원군이 도달할 것이었다.

 연리각이라고 하는 것은 제천교에서 서로 연락하여 원군을 청하는 신호다. 그 신호가 발출되면 근처에서 그 신호를 들은 자는 무조건 신호가 발출된 곳으로 달려가야 했다. 그 신호는 수뇌부가 아니면 발출할 수 없는 것인 까닭이다.

 황엽은 이곳으로 오면서 그 신호를 들었다.

 적의 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북벌후를 처리해야 했다.

 만약 그를 잡을 수만 있다면 정말 큰 성과를 올린 셈이 된다.

 피를 부르는 싸움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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