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第一首 온유지함(溫柔之陷) (33/113)

대풍운연의 4

第一首  온유지함(溫柔之陷)

-신비인과 재회하다

죽음의 망령(亡靈)이 지분함정을 휩쓸다

 "그만 해두지? 사생결단을 낼 셈인가?"

 음산한 음성이 다시 한 걸음을 내딛으려고 하는 요동권왕을 저지한다.

 그 순간, 마음악사들이 나직한 신음과 함께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다.

 그리고 귀왕여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끼끼끼…….

 괴기(怪奇)한 소리.

 귀를 갉아내는 듯 거북한 그 소리와 함께 귀왕여의 윗부분이 좌우로 갈라지고 있었다.

 뜻밖의 변화에 요동권왕 막풍은 다가서던 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는 미간을 찡그린 채 귀왕여를 쏘아보았다.

 그와 귀왕여와의 거리는 이제 불과 2장가웃 가량.

 보통 사람이라면 제법 되는 거리이겠지만 그와 같은 고수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손만 뻗으면 되는 지척인 거리다.

 끼끼…….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귀왕여는 계속 갈라지다가 묘한 형태로 변하고는 그 갈라짐을 멈추었다. 좌우로 갈라진 벽면은 옆으로 늘어서 연꽃 형태가 되고 위의 지붕은 뒤로 넘어가서 귀왕여의 윗부분은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놓은 듯 절묘하게 아름다운 연꽃형의 교자로 바뀌어져 버린 것이다.

 그 앞을 가린 것은 주렴이 아니라, 바람에 흩날리는 망사휘장.

 그 거대한 연꽃의 가운데에는 두 사람이 눕고도 남을 큰 침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 한 사람이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로 앉아 있다.

 전신에 용포(龍袍)를 걸쳤다.

 머리에는 면류관을 썼는데 얼굴은 청동빛으로 푸르러 사람의 얼굴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정작 팔자수염이 길게 늘어진 그의 얼굴은 수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이는 얼핏 보면 40대인 것 같은데, 다시 보면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어둠을 뚫고서 마치 형체가 있는 푸른 비수와 같이 번뜩이는 그의 안광은 누구도 감히 그를 함부로 쳐다볼 수 없게 했다.

 대체로 용포란 용이 그려진 것으로 황제와 그 일족만이 입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니 용포는커녕, 서민들은 그 색깔을 의미하는 황색조차 사용할 수가 없음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연꽃 교자 위의 중년인, 풍도귀왕은 누런빛에 푸른빛을 혼합하여 황포(黃袍)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더욱 이상했다. 용문(龍紋)도 마찬가지.

 용은 용이되, 황제가 사용하는 용과는 분명히 다른 모양의 용.

 그의 옆에는 경사로 전신을 휘감은 두 명의 여인이 그의 옆에서 단정히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 있었다.

 귀왕여라고 불리는 그 큰 상여가 한순간에 이렇듯 정치(情致)한 아름다움을 가진 가마로 화할 수 있을 줄이야.

 그때, 차가운 눈빛으로 요동권왕 막풍을 바라보고 있던 귀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나를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것이지? 그렇게 살아 숨 쉬기가 힘들던가?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건가?"

 "행패라구?"

 "그럼 아닌가?"

 "흥! 좋아, 그까짓 거 뭐가 어떻게 되든 좋다. 하지만……."

 막풍의 눈에서 갑자기 무서운 신광이 폭출되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겠다! 건곤무적 독고해의 시신은 어디 있나?"

 그의 질타에 그처럼 침착하던 귀왕의 미간에 미미한 떨림이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찰나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막풍과 같은 절세고수의 눈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지, 근래에 들어서 사방에서 무림고수들의 시체가 사라지고 있는데, 그 배후도 바로 귀왕, 너였다. 틀렸나?"

 나이 마흔이면 불혹(不惑)이라 한다 하였다.

 그 말은 나이가 들고 사회적으로 신분이 결정되면 사람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게 된다라는 의미다. 풍도귀왕쯤 되는 신분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말에는 책임을 져야 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 할지라도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신분이란 뜻이다.

 뭔가 변명을 할 수는 있어도 있는 사실을 없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틀렸다."

 귀왕은 차고 단호한 어조로 말을 자르는 것이 아닌가.

 너무 뜻밖으로 단호하고도 간략한 그의 대답에 일순 멍청해졌던 막풍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귀왕에게 되물었다.

 "정말……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건가?"

 "으하하하……!"

 요동권왕 막풍은 사나운 기세로 귀왕을 노려보다가 문득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웃음소리에는 진기가 실려 있어서 바로 귓전에다 대고 천둥벼락을 때리는 것 같았다.

 "관계가 없다고? 정말 아무런 관계가 없다?"

 차갑게 중얼거린 요동권왕 막풍은 코웃음을 쳤다.

 "귀왕의 신분으로서 거짓말을 하다니, 세월이 흐른 다음에 귀왕이 스스로의 신분마저 망각한 파락호가 되고 말 줄이야 누가 상상이라도 했으랴. 허허, 이거 참……."

 그는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는 듯 연신 머리를 저어댔다.

 그때, 귀왕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요동권왕 막풍은 사납게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방금 네 입으로 아니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본왕에게 그 사태의 배후인가를 묻기에 아니라고 했을 뿐이다. 뭐가 잘못되었나?"

 "……!"

 그 말에 막풍은 얼떨떨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증거를 확보한 그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긴 했지만, 상대가 이렇듯 침착할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저 귀신이 뜻밖에도 세심하기 이를 데 없군. 당년에 강호상에서 활동할 때보다 더 교활해진 거 같은걸?'

 요동권왕 막풍은 암중에 생각을 굴리고는 겉으로는 태연히 말했다.

 "그렇군…… 이제 보니 천하의 풍도귀왕이 남의 지시에 따르는 존재로 전락한 다음임을 미처 알지 못했군 그래."

 "막풍, 당신이나 나나 이미 살 만큼 살았다. 그렇게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릴 필요는 없다. 자칫하여 머리에 쥐가 나면 그나마 몇 가닥 남은 머리카락마저 무사하지 못할런지도 모를 테니……."

 "네 말대로 쓰잘데없는 잡소리는 집어치우자! 사람들은 어디 있나?"

 "무슨 소리냐?"

 "네가 가져간 시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게다!"

 "모른다."

 "몰라?"

 다시금 어이없다는 빛이 요동권왕 막풍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리고 뒤를 이어 얼굴 가득 치밀어 오르는 노기(怒氣). 그가 이를 갈았다.

 "지금 나를 놀리자는 게냐?"

 그의 몸을 둘러싼 장포가 저절로 펄럭거리면서 다시 흙바람이 그의 주위로 일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보면서도 풍도귀왕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리곤 들리는 음성.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나? 본왕은 한 번도 시신을 가져간 적이 없다."

 그는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시신을 본 것이 또한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그 시신은 지금 본왕에게는 없다."

 "그럼 누구에게? 어디에…… 있는 거야?"

 "그건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순간이다.

 "제가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어둠을 뚫고 맑고 낭랑한 음성 하나가 일었다.

 뜻밖의 일인지라 장중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 그곳을 보았다.

 놀랍게도 백의유생 한 사람이 섭선(접는 부채) 한 자루를 들고서 천천히 그들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요동권왕과 귀왕은 이미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막상 나타난 것이 한효월임을 본 요동권왕의 얼굴에는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거기에 곁든 것은 반가움 한 자락.

 "너, 여긴…… 어쩐 일이냐?"

 한효월은 대답 대신 목례로써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귀왕을 보았다.

 "당대 무림 중에는 묘한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천하무림 중의 고수들의 시신을 끌어들여서 뭔가를 하려는 사람이죠. 하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깨닫고 귀왕을 찾습니다. 맞습니까?"

 잠시 한효월을 바라보던 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한효월의 말에 요동권왕 막풍은 아, 하는 빛이 되었다.

 귀왕은 그의 신분에 어울리게 과연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 괴이한 일의 배후는 아니지만, 그가 그 일과 관련된 것이 한효월의 질문으로 드러난 것이다.

 한효월의 질문은 다시 이어졌다.

 "그가 귀왕에게 원한 것이 구마회혼대법(九魔廻魂大法)이 맞습니까?"

 순간, 귀왕의 안색이 돌변했다.

 "……."

 귀왕은 서릿발 같은 신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한참 한효월을 쏘아보다가 말했다.

 "네가…… 한효월이란 꼬마인 게로구나."

 한효월의 입가에 담담한 웃음이 매달렸다.

 "대단치 않은 이름을 알고 계시다니 송구하군요."

 "듣자니, 네가 당년의 독고해가 강호 출도할 때보다 더 강하며, 지모(智謀)는 독고해가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하던데 맞느냐?"

 "강호의 소문은 종종 와전됩니다."

 그 말에 귀왕은 코웃음 쳤다.

 "내가 보기로는 오히려 강호상의 소문이 제대로 다 전하지 못한 것 같구나. 너의 재지나 무공은 이미 우리들과 비슷한 경지에 이르러 있는 것 같은데?"

 "과찬의 말씀……!"

 겸사의 말을 하려던 한효월은 돌연 안색을 굳혔다.

 음산한 기운 한 가닥이 소리도 없이 그에게 밀려오고 있음을 경각한 것이다. 귀왕이 암중에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 손을 쓴 것이다. 이러한 시험은 상대의 능력을 가늠해 보기 위한 것이라 원래는 크게 위험하지 않다. 하지만 귀왕과 같은 초절정고수라면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상대를 격살할 수 있는 까닭이다.

 한효월은 밀려오는 암경(暗勁)을 향해 왼손 다섯손가락을 활짝 펴서 잡아끄는 시늉을 했다. 동시에 그는 미미하게 어깨를 떨면서 옆으로 반 걸음쯤 신형을 흔들었다.

 그러자 한효월을 공격하던 암경은 한효월의 찰나적인 응변에 이끌려 한효월의 뒤쪽 3장 밖에 있던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쳤다. 암경인만큼 쾅! 하는 폭음은 들리지 않았지만, 다음 순간에 장정 둘이 끌어안아야 할 그 거대한 은행나무가 마치 태풍을 만난 듯 정신없이 전신을 흔들리게 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떨어지는 나뭇잎이 비 오듯 했다.

 "왜 맞받지 않느냐?"

 한효월이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힘을 흘려보냄을 알아본 귀왕이 물었다.

 "능력이 모자랍니다."

 그의 물음에 한효월이 침착히 답했다.

 "능력이 모자란다? 글쎄……."

 중얼거리던 귀왕의 눈빛이 음침히 가라앉았다.

 그의 주위로 괴이한 기세가 어림을 보자 한효월은 암암리에 미간을 찡그리고서는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과 싸우기 위해서 나타난 게 아닙니다. 몇 가지 알아볼 일이 있어서 왔을 뿐입니다."

 "본왕이 알려줄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필요하다면 네 스스로 알아갈 수밖에."

 "천하십왕은 천하무림 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런 신분으로서 굳이 욕되이 제천교의 주구(走狗)가 되신 이유는 어디 있습니까?"

 한효월은 안색을 싸늘히 굳히고서 귀왕을 꾸짖듯 말했다.

 "제천교의 주구라니?"

 "소생은 이미 당신의 따님이신 명부음희가 제천교 중에서 명을 받들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부인할 수 있습니까?"

 "그 계집애가 내 딸이란 걸 넌 어떻게 아느냐?"

 "그게 중요합니까?"

 "건방진 놈! 감히 네가 본왕을 추궁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갑자기 귀왕이 고함치면서 한 손을 치켜들더니 한효월을 향해 밀어냈다.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일단 발동하자 한효월은 자신의 주변 일대가 모조리 그의 손바닥의 공제 하에 놓이게 됨을 직감하고 암중에 크게 놀랐다.

 "내 입을 막는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한효월이 낭랑히 소리쳤다.

 천하십왕이란 이름은 과연 허명이 아니었다.

 그가 손을 쳐들자, 거대한 너울과 같은 검은 그림자가 일어났다. 그 일장은 그가 전력을 다한 듯 가공할 위력으로 한효월을 향해 밀려들었다.

 천지간에 오직 귀왕의 손바닥 하나만이 보일 뿐이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사방의 모든 물체들이 그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것.

 "물러나라! 귀왕음부인이다!"

 요동권왕 막풍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가공할 권력이 옆에서 날아들었다.

 콰콰쾅!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흙먼지가 하늘을 가리며 피어 올라 거대한 회오리 기둥을 형성하면서 사방을 맴돌았다. 마치 태풍이 일대를 휩쓸고 있는 것 같아서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한효월은 우뚝 서 있었다.

 옷자락이 금방이라도 찢겨져 나갈 듯 펄럭이고 있지만 그의 신형은 흔들림없이 당당히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괜찮으냐?"

 권왕 막풍의 음성이 들려왔다.

 한효월이 고개를 들자 1장가량 떨어진 곳에 막풍의 모습이 보인다.

 "도와주신 덕분에……."

 "쓸데없는 간섭을 한 것 같군……."

 한효월의 모습을 바라본 막풍은 가볍게 혀를 차곤 방금까지 풍도귀왕이 있던 자리를 일별(一瞥)했다.

 "저 귀신의 무공은 당년보다 더 높아졌군. 귀문(鬼門)의 역대 어느 누구도 귀왕음부인을 그런 경지까지 수련하지는 못했다고 들었는데……."

 딩, 디디잉…….

 어둠 속에서 괴기한 음향이 전해져 온다.

 귀왕이 움직이면 연주된다는 음혼귀조지악(陰魂歸曺之樂)이다.

 귀왕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난 것이다.

 "네 말대로 본왕에게 구마회혼대법을 부탁한 사람은 따로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부탁으로 그 신분은 밝힐 수 없다. 굳이 알고 싶다면, 풍도로 와서 본왕을 찾도록 해라……."

 어디선가에서 귀왕의 음성이 끊어질 듯 말 듯 은은히 들려왔다.

 "이런 망할! 누굴 데리고 장난하자는 겐가!"

 요동권왕 막풍은 한바탕 발을 구르더니 코웃음 쳤다.

 "누구 맘대로 간다는 게냐! 그놈이 누군지 밝히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할 게다!"

 그가 발을 구르자 일대가 지진을 만난 듯 뒤흔들렸다.

 "다시 귀찮게 한다면 사정을 보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아무리 변방의 오랑캐라고 할지라도 앞뒤는 재보면서 덤비는 게 좋을 게야."

 차가운 웃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그 말을 듣자, 권왕 막풍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건방진 귀신 떨거지 같으니! 겁나서 꼬리를 말고 도주하는 주제에 감히 뭐가 어쩌고 어째? 변방 오랑캐? 어떤 놈이냐? 당장 튀어나오지 못할까!"

 이를 갈던 그는 돌연 고함과 함께 앞쪽 숲에다 일권을 내질렀다.

 그의 일권은 가히 천둥벼락이 치는 듯 가공할 위력이 있었다.

 콰쾅! 와자자작…….

 폭음과 함께 대여섯 그루의 아름드리 나무가 거인이 수수깡을 부수듯이 그냥 꺾어져 날아가 버렸다.

 "으아악! 사, 살려주세요!"

 그리고 뒤이어 다급하게 터져 나오는 비명.

 그림자 하나가 아름드리 거목들이 좌충우돌 쓰러지는 가운데, 죽을힘을 다해서 하늘로 솟구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흥, 제법인데?"

 막풍은 코웃음 치더니 다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가 재차 일격을 가하려는 모습에 한효월은 황급히 말했다.

 "제가 데리고 다니는 아이입니다. 사정을……!"

 그의 말에 다시 일격을 가하려던 막풍은 손을 거두고는 코웃음 쳤다.

 "진작 이야기하지…… 잠시 기다리거라!"

 말과 함께 그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이구우……."

 한 사람이 한효월의 앞에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신음을 해댔다.

 뜻밖의 상황에 나타난 사람은 유성이었다.

 유성은 요동권왕 막풍의 일권 하에서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기고는 혼비백산하여 안색이 창백했다.

 "저 할아버지가 누구래요? 세상에……."

 아직도 놀람이 가시지 않는지 유성은 막풍이 사라진 방향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대체 어딜 갔었던 거냐?"

 그 말에 대한 대답보다 한효월은 오히려 되물었다.

 그의 종적을 따라오다가 여기서 막풍과 풍도귀왕의 조우(遭遇)를 보게 되었던 것이니, 그 와중에 나타난 유성에게 행방을 묻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말을 하자면 길어서요……."

 유성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다면 나중에 듣기로 하자!"

 말과 함께 한효월은 신형을 날렸다.

 "어딜 가시는 거예요?"

 "따라오너라."

 "나원……!"

 유성은 이미 저만치 사라지고 있는 한효월을 보면서 다급히 그 뒤를 따라야 했다.

 쏴, 쏴아아-

 요동권왕 막풍은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우뚝 서 있었다.

 강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세차게 펄럭이지만 그는 마치 태산처럼 우뚝 서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서 있을 따름이었다.

 "놓치셨습니까?"

 "음."

 막풍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그의 뒤에는 한효월이 언제 나타났는지 서 있었다.

 "놈이 교활하게 배를 대기시켜 놓고 있을 줄은……."

 "귀문(鬼門)은 어차피 강호상에서 이름있는 문파입니다. 그 정도야 마음만 먹으면 쉬운 일이겠지요."

 "너는 어쩔 작정이냐?"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는 한효월을 향해 막풍이 말했다.

 "강호고수들의 시체를 가지고 뭔가 획책하는 자가 저 귀신두목과 손을 잡고 있음을 안 이상,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풍도까지라도 따라가서 반드시 그게 누군지 알아낼 작정이다. 너는……."

 "저는 여기서 조금 더 알아봐야 할 일이 있습니다."

 순간, 막풍은 큼직한 손을 턱하니 한효월의 어깨에다 얹었다.

 "네가 알아볼 일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그간 내가 조사한 바로는 암중의 세력들은 너를 매우 귀찮게 여기고 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게다. 누구든 보이지 않는 창을 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효월은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저를 찾아내기는 그렇게 쉽지 않을 겁니다."

 "흠…… 뭔가 생각이 있다는 뜻이로구나?"

 한효월의 눈빛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막풍은 툭툭 그의 어깨를 쳤다.

 "좋아, 다시 보자꾸나. 내 이놈들이 과연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겠다."

 말과 함께 그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마치 일진 태풍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듯이 그렇게 그는 그 자리에서 멀어져 갔다.

 "누구예요? 대체 누구길래 저렇게 대단하죠?"

 그의 신법을 보고 있던 유성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권왕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다. 천하십왕 중 한 분이지……."

 중얼거리듯 답한 한효월은 막풍이 사라진 쪽에서 시선을 돌려 유성을 보았다.

 "그래, 이제 네 말을 들어볼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보나마나, 골치 아픈 일이 있었죠."

 "골치 아픈 일?"

 "그렇다니까요."

 말을 하면서도 유성은 미간을 찡그렸다.

*   *   *

 관제묘(關帝廟)는 삼국연의(三國演義)에 나오는 관운장을 전쟁의 신으로 숭상하여 그를 받드는 사당이다. 따로 관제(關帝)라고 부르는 그의 사당은 중원천하 어디를 가도 없는 곳이 없다고 할 정도로 기림을 받았다.

 도교(道敎)에서조차 그를 신 중의 하나로 받들었다.

 비는 그쳤지만 아직 하늘을 가린 구름으로 인해 사위는 칠흑처럼 어둡다. 송림(松林) 가운데 자리한 이 관제묘 또한 그 어둠을 벗어날 수 없다.

 한효월과 유성은 어둠 속에 자리한 그 관제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우들이 저기 있습니다.'

 유성이 전음지성을 이용하여 말했다.

 한효월과 헤어져 그를 기다리게 된 유성은 느긋하게 큰 나무 위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았다. 산속에서 생활하던 그인지라 나무를 타거나 아예 그 나무에서 자는 건 일도 아니었다. 성격도 느긋한지라 편안히 자리를 잡고서 한효월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참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자였는데, 바람과 같은 신법을 가진 그녀는 괴이하게도 옷을 거의 반쯤 벗고는 숲 속에서 나와 유성이 다시 보지 않을 수 없게끔 했다.

 어둠 속에서 수밀도와 같은 유방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옷을 입으며 숲 속에서 나오는 묘령의 여인을 보게 된다면 누구든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게다가 유성은 숲 속에서 나오던 그녀가 또 다른 여인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잠시 엿들은 그들의 대화는 더욱 괴이했다.

 "망할, 개자식이 그렇게 힘이 없어……."

 "호호, 난 괜찮은 놈 하나 잡았지…… 운이 좋았다니까."

 두어 마디를 서로 주고받은 그녀들은 쌍쌍이 신형을 날려 그 자리를 떠났다.

 괴이함을 느낀 유성은 그녀가 나온 숲 속으로 들어갔다가 시체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시체.

 알몸의 사내.

 뼈에다 말라빠진 가죽만 겨우 걸쳐 놓은 듯한 시체였다.

 "그 요녀(妖女)가 그 남자의 정혈(精血)를 다 빨아먹은 거였어요."

 유성은 이를 갈았다.

 하마터면 같은 신세가 될 뻔한 적이 있었으니 그 일을 혐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발견한 유성은 이를 갈면서 조금 전에 그 자리를 떠난 여인들의 뒤를 따라 그 자리를 떠났다. 급해서 한효월을 찾지 못했지만, 찾았더라도 그때 한효월은 이미 그 자리에 없을 때였다.

 그렇게 해서 당도한 곳이 바로 이 퇴락한 관제묘였다.

 송림에 자리한 관제묘는 규모가 제법 컸다. 비록 지금은 퇴락했지만 그래도 돌보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다. 그것을 증명하듯 관제묘 안에는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이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경계가 삼엄하여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요녀들이 하나둘씩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공자님을 찾으러 돌아갔던 거예요.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닌 거 같아서……."

 유성의 말대로라면 채양보음(採陽補陰)을 하는 음녀(淫女)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소리고, 저 관제묘가 저들의 소굴이라는 뜻이다.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지금요?"

 "그래."

 "그냥 막 들어간다구요?"

 유성은 눈이 동그래서 한효월을 쳐다보았다.

 "겁나면 넌 여기 있거라. 나 혼자 가보마."

 "거, 겁은 누가 겁이 난다고 그래요? 그게 아니라……."

 "됐다. 넌 여기 있거라. 내가 안을 한번 살펴보고 올 테니까, 혹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신호하도록 해라."

 한효월은 당황한 얼굴인 유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는 관제묘를 향해서 신형을 날렸다.

 어둠 속에 잠긴 관제묘는 생각보다 더 컸다.

 그러나 괴이했다.

 어둠 속에 괴물처럼 웅크린 그 큰 관제묘는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던 것이다. 적당이 모여 있다면 그렇게 조용할 리가 없었다. 괴이함을 느낀 한효월은 공력을 끌어올리고 암중에 관제묘를 살폈다.

 그러나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단 말인가?'

 신법을 전개하여 관제묘 담장가 큰 느티나무에 날아오른 한효월의 미간이 좁혀졌다.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뿐, 정말 사람의 기척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도 없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공력을 끌어올린 한효월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그대로 관제묘의 담장을 날아 넘었다.

 '맙소사! 어쩌려고 저러시냐?'

 암중에 숨어서 보고 있던 유성이 아연실색 입을 벌렸다.

 "이럴 수가……!"

 관제묘 안으로 들어선 한효월은 경악으로 굳어졌다.

 관제묘 안으로 날아들자 피비린내가 느껴졌던 것이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관제묘는 대문에서 본전(本殿)을 향해서 두어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수 있는, 10장가량의 조약돌을 깐 길이 뻗어 있다. 그리고 그 좌우로 전각과 거처들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 전각 여기저기에 희끄무레한 것들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들이 사람의 시신임을 알아보는 데는 결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게다가 그 시신은 거의가 다 여자였다.

 그것도 반라(半裸), 내지는 거의 옷을 걸치지 않은 여인들.

 믿기지 않는 일에 한효월은 눈앞에 쓰러진 여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를 살펴보았다.

 부릅뜬 눈.

 거의 직각으로 꺾어진 목. 그렇게 목이 꺾어지면 부러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목이 꺾어져 죽은 그녀의 나이는 20세 전후. 눈을 부릅뜨고 입에서는 선혈이 흘러 목을 타고 가슴을 적시고 있다. 그래도 천생의 아름다움을 숨기긴 힘들다. 그러나 그 미목(眉目)은 경악과 공포로 얼룩져 아름답다기보다는 섬뜩했다.

 일부러 찢어낸 것은 아닌 듯하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랫도리만 겨우 가렸다.

 풍만한 젖가슴은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놀라 곤두선 유실도 남김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백설과 같은 옥부(玉膚)가 남김없이 드러나 있었고 백옥과도 같은 허벅지와 종아리까지 말이 그렇지, 거의 벗은 것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녀는 죽어 있었다.

 그렇게 죽어 있는 여인들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죽은 여인의 숫자는 더 많아졌다.

 얼핏 계산해도 이미 스무 명이 넘었다.

 게다가 한쪽 문이 부서진 관제묘의 본전 앞에서 피투성이로 쓰러져 죽은 여인들 셋은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죽은 모습은 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경악해 부릅뜬 눈에 서린 것은 공포의 빛.

 마치 죽음의 저주가 이 관제묘를 뒤덮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죠?"

 한효월의 뒤를 따라 들어온 유성이 놀라 중얼거리는 음성이 한효월의 뒤에서 들려왔다.

 한효월이라고 답할 말이 있을 리 없다.

 그때였다.

 "으으……."

 아주 미약한 신음이 한효월의 귓전에 들려왔다.

 관제묘 본전의 안이었다.

 주위를 살피고 있던 한효월은 바람처럼 그 안으로 날아들었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엉망으로 부서진 관제묘 내부. 거기에도 예외없이 여인들의 시신이 있었다. 분홍의 경사나의(輕紗羅衣).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나의 하나만을 걸친 듯 만 듯 걸친 여인들…….

 신음은 그중 한 여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둠 속이다.

 그러나 희미한 촛불 하나가 꺼지지 않고 남아 있어서 내부의 상황이 어렴풋이 드러나 있다. 한효월과 같은 내가고수라면 상황을 알아보기 어렵지 않다는 뜻이다.

 공탁에 엎드린 여인의 몸을 가린 것은 매미 날개와 같은 경사 한 벌. 그나마 반은 찢겨져 있어서 있으나마나 했다. 뿌우연 나신은 그 경사 외에는 아무것도 가린 것이 없다. 풍만한 둔부와 백설 같은 등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물론 그 아래 허드러진 허벅지와 종아리 등도 가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인은 다리를 묘하게 벌리고 공탁에 엎어져 있어서 뒤임에도 여인의 비밀스러운 곳이 은은히 드러나 보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몸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내 말이 들립니까?"

 한효월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방금의 신음을 토하지 않은 듯 여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 말이 들리지 않습니까?"

 잠시 기다려도 여인에게서 전혀 움직임이 없자 한효월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대었다. 그녀를 흔들어보려는 것이다.

 찰나,

 "조심해요!"

 유성의 고함이 들렸다.

 동시에, 죽은 듯 엎어져 있던 여인이 벼락 치듯이 신형을 틀면서 양손을 휘둘러 한효월의 눈을 찔러왔다.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수법이었다. 그 일격은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 듯 악랄하고도 신속무비하였다.

 "사납군!"

 한효월은 흠칫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상대의 공격이 너무 사나워서 그걸로는 공격을 피해낼 수가 없었다.

 이미 제이의 공격이 날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멈추시오! 난 적이 아니오!"

 외침과 함께 한효월은 일장을 쳐내 여인의 사나운 일격을 막아냈다.

 팡!

 여인의 손과 그의 손이 마주치자 일진 폭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한효월을 공격했던 여인은 누가 밀어버린 듯 벌렁,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핏줄기.

 풍만한 가슴이 흔들린다거나, 여인의 비밀스러운 곳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 따위가 눈에 들어올 계제가 아니었다.

 한효월은 황급히 그녀의 가슴을 향해 한 가닥 지력을 날렸다.

 "정신 차리시오!"

 "크, 끄윽…… 이, 귀신…… 귀신드을……!"

 그녀는 공포스러운 빛으로 전신을 부들부들 떨더니 다시금 입에서 선혈을 토해냈다. 토막 난 내장이 거기 섞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피에서 거품이 인다. 저래서는 도저히 살아날 방도가 없다.

 풍만한 가슴이 격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잦아들었다.

 부릅뜬 눈에서 빛이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죽었어요?"

 뒤에서 유성이 물었다.

 "죽었다……."

 한효월이 신음하듯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나신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죽어 넘어진 그녀의 나이는 갓 30대 정도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신분이 무엇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다만, 방금의 일격으로 감안하건대 그녀의 무공이 결코 간단하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죽었다.

 더구나 하나둘도 아니고 수십 명의 여인들이, 거의 같은 모습으로…….

 "대체 이 여인들의 신분은……!"

 중얼거리던 한효월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거기 얼마나 더 오래 숨어 있을 작정이오?"

 그는 빛나는 눈빛으로 관제의 신상을 노려보았다.

 …….

 갑자기 질식할 듯한 침묵이 주위를 짓눌러 온다.

 한효월은 냉소했다.

 "내가 손을 써야만 나타날 작정인가?"

 순간,

 "흥!"

 차가운 냉소가 들리며 한 사람이 관제의 신상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나타난 사람을 본 한효월의 얼굴에 뜻밖이란 빛이 떠오른다.

 나타난 것이 요광성주였기 때문이다.

 복면의 요광성주는 차가운 눈빛으로 한효월을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이들이 당신을 노렸다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야……."

 그녀의 말에 한효월은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부인할 작정인가요? 이들을 죽인걸?"

 "지금 내가 이들을 죽였다는 거요?"

 한효월의 어이없다는 표정에 요광성주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아니라는 건가요?"

 "난 이 여자들이 누군지도 모르오. 그런데……."

 말을 끊었던 한효월은 문득 요광성주를 바라보면서 되물었다.

 "당신의 말은, 이들이 제천교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인 것 같군?"

 "맞아요. 당신 때문에 본 교의 총단에서 나온 고수들이었죠. 이렇게 어이없이 전멸을 당하긴 했지만……."

 요광성주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정말 참혹했다. 여기저기에 쓰러져 죽은 여인들의 모습은 마치 무슨 재앙이 휩쓸고 간 것만 같았다.

 "총단에서? 나 때문에 말이오?"

 "맞아요. 본 교에서는 이미 당신에게 추살령(追殺令)을 발동했어요."

 "흠…… 이들이 나 때문에 일부러 나올 정도라면 결코 간단한 존재가 아닐 텐데, 이들이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줄 수 있겠소?"

 "내가 왜 그런 걸 알려줘야 하죠?"

 그녀의 말에 한효월은 미미하게 웃음을 떠올렸다.

 "비밀이라면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좋소."

 요광성주는 한효월을 쏘아보더니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녀들은 총단 온유향(溫柔鄕) 소속이에요."

 "온유향? 아주 아늑한 이름이긴 하지만 이들의 모습을 보건대, 보나마나 남자들의 무덤을 의미하는 곳인 것 같군……."

 "남자들의 무덤? 그럴지도 모르죠. 따로 영웅총(英雄塚)이라고도 하니까……."

 피잉…….

 낮은 음향이 어둠 저 멀리에서 길게 꼬리를 끌며 들려왔다.

 문득 그녀의 안색이 달라졌다.

 "이들과 정말 관련이 없다면 어서 여길 떠나요."

 그녀의 음성이 조금 조급하게 변했다.

 하지만 한효월의 태도는 침착하다 못해서 태연하다.

 "내가 왜 여길 떠나야 하오?"

 피잉…….

 다시금 예의 음향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다른 쪽이었는데, 좀 전보다 상당히 가까웠다. 누군가가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알고 싶다면 그냥 있으면 되겠군요!"

 말과 함께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신형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 앞을 한효월이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무슨 짓이죠? 나를……."

 "내일, 낮에 용문사에서 기다리겠소."

 "그건……."

 너무도 뜻밖의 말에 놀란 그녀가 채 말을 하기도 전에 한효월은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올 때까지 기다리겠소. 그럼……."

 말과 함께 그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엉거주춤하고 있던 유성도 장난스레 그녀를 향해서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쏜살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멍청한 빛의 요광성주뿐.

 "도대체……."

 한참 만에 그녀의 입을 비집고 나온 음성이다.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는 이미 제천교의 생사대적(生死大敵)이다. 그런데 그런 그를 도대체 왜 만난 것일까? 한 번도 아니고…….

 "무엇 때문에……?"

 묵묵히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요광성주는 문득 중얼거렸다.

 비 온 뒤, 여전히 걷히지 않은 구름으로 인해 검푸른 하늘이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인지, 그녀 자신조차도 알지 못할 일. 그저 망연히 하늘을 쳐다보다가 세찬 바람이 얼굴을 쳐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저 어두운 하늘 가득 웃고 있는 것은 괴이하게도 조금 전 그 자리를 떠난 한효월의 맑은 얼굴이다.

 때로 문득문득 그의 웃는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말도 안 돼."

 요광성주는 머리를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교중에서는 남녀 간의 관계를 금하지 않는다.

 하지만 추살령이 발동된 적을 생각하다니? 만에 하나라도 이 일이 상부에 알려진다면 그녀는 지난 세월 쌓아온 모든 것을 단숨에 잃고 말 터이다. 비록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게 즈려 물었다.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

 피잉…….

 눈앞에서 예의 음향이 들리더니 찰나간에 한 사람이 전각을 날아 넘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과 함께 여기저기에서 묘한 음향이 일며 검은 그림자들이 차례로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장내의 상황에 경악한 빛이다가 그 가운데 요광성주가 서 있음을 보자 그녀의 앞으로 몇 사람이 다가왔다.

 비할 바 없이 빠른 움직임이었다.

 그러한 경공을 가졌다는 것은 일신의 무공이 간단치 않다는 반증과도 같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보는 바 대로예요."

 요광성주의 망연했던 눈빛, 음성은 다시 차갑게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누가 이런 짓을…… 설마, 정말로 온유향의 이혼당(離魂堂) 고수 전체가 몰살했단 말이오?"

 주위를 돌아보던 흑의인 한 사람이 신음하듯 물었다.

 "나도 방금 와서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여기 살아남은 사람은 없는 것 같군요. 믿기 힘들긴 하지만……."

 "말도 안 돼…… 당금 무림에서 누가 이런 능력을……."

 "말이 안 되죠. 온유향의 이혼당이 가진 능력이라면 일개 대문파를 피로 씻을 수 있을 정도인데, 이들이 이렇게 전멸을 당하도록 부천각(扶天閣)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음을 총단에서 안다면 결코 그냥 넘어가진 않겠지요."

 흑의인의 안색이 돌변했다.

 "지금 본 당주에게 책임을 전가할 생각이오?"

 요광성주는 머리를 저었다.

 "어찌 그런 일을!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분명히 무엇인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교중의 눈과 귀인 부천각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면, 그건 그렇게 환영받을 일은 아니겠죠?"

 흑의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본 각이 하는 일은 다대(多大)하오. 본 당주가 맡은 것은 그중 일부분이니, 성주는 일을 어렵게 끌고 가지 마시오. 그보다 성주가 우리보다 먼저 왔으면서도 아무런 신호를 보내지 않은 이유는 어디 있소?"

 요광성주는 그 말에 내심 움찔했다가 침착히 대꾸했다.

 "너무 엄청난 일이라…… 주변을 살펴보느라고 그랬어요."

 "정말이오?"

 흑의인의 눈빛이 음침히 가라앉았다.

 "그렇게 묻는 이유가 뭐죠?"

 요광성주의 음성에 날이 섰다.

 "아무것도 아니오. 성주의 말대로 일이 생기면 조사하여 총단에 보고함이 바로 우리 부천각의 일이니 자연히 상황을 조사할 수밖에."

 그의 말대로 신속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한효월이 내린 것과 거의 유사하였다.

 가공할 힘을 가진 누군가가 이들을 전멸시켰다는 것. 그것은 거의 반항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가공할 힘을 의미했다. 온유향의 주력 중 하나인 이혼당의 힘을 생각해 본다면 그 의미는 더욱 가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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