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首 십왕지투(十王之鬪)
-십왕이 만나다.
절세고수의 대결(對決)은 하늘을 놀라게 하다.
홍 낭랑의 말은 오기(傲氣)였다.
한효월은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가 잠시 손을 써서 포위망을 돌려놓았지만 그들이 다시 이쪽으로 좁혀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인 것이다.
"그럼 가시지요."
한효월이 신형을 날렸다.
잠시 주춤하던 홍 낭랑은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는 이내 한효월의 뒤를 따랐다.
그 뒤를 따르듯 피리 소리의 여운이 일대를 은은히 울린다.
새 울음소리와 같은 그 피리 소리는 들릴 듯 말 듯 끊임없이 주위를 메아리치는 듯했다.
"아직도 찾지 못했단 말이냐?"
흑영이 차가운 어조로 질타했다.
그녀가 선 자리는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이다.
거기서 보면 얼마 전까지 그녀가 있던 용왕묘까지가 다 시야에 들어온다.
밤하늘에는 예의 달이 구름 사이로 힘겹게 얼굴을 디밀고 있는데, 강변의 구름은 자꾸만 짙어지고 있었다. 휙휙 세차게 바람이 일기 시작하는 가운데 검은 구름이 밀려와 하늘을 덮는다.
주위가 점점 더 어두워진다.
그녀의 뒤에는 예의 흑의복면인 두 사람이 서 있고, 얼마 전까지 없었던 흑의인 한 사람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보고 중이었다.
"누군가 고수가 그녀를 돕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이목을 흩뜨리는 바람에 딴 길로 가느라 일시지간 종적을 놓쳤습니다."
흑영의 눈빛이 침잠히 가라앉았다.
'그 계집의 휘하에 청풍이(聽風耳)의 이목을 속일 만한 능수(能手)가 있단 말인가?'
"멀리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게야. 상처를 입었을 테니…… 찾아."
"봉명(奉命)!"
흑의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어둠이 깃든 좁은 동굴 안.
한효월과 홍 낭랑은 그 동굴 안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높이는 4,5자[尺]가량에 너비는 두 사람이 겨우 마주 보고 앉을 수 있을 정도. 그나마도 그리 깊지 않아 3장가량 정도의 이 동굴은 늑대 두 마리가 살았던 곳이다. 그 두 마리의 늑대는 한효월에게 한 대씩을 얻어맞고 줄행랑을 치고 말아 이제 이 동굴은 그들이 주인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죠?"
앞쪽에 있던 한효월이 다시 안쪽으로 들어오자 운기조식을 하고 있던 홍 낭랑이 눈을 뜨면서 물었다.
"비가 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추적하기 어렵겠지요. 특히 이런 밤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몸은 괜찮습니까?"
"일단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아요."
홍 낭랑은 한숨을 쉬면서 한효월을 향해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였다.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해야 할는지……."
"별말씀을, 당연한 일이지요."
한효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쏴아아아-
빗소리가 제법 세차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지요?"
한참 만에 홍 낭랑이 입을 열었다.
한효월이 눈을 떴다.
그 눈은 언제나처럼 그렇게 조용하고도 고요하였다.
"뭘 물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맹주 부인이시라면…… 저로서는 모든 게 혼란스러워서요."
"하긴, 그렇겠군요. 내막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끝을 흐리던 그녀가 문득 한효월에게 물었다.
"혹, 그가 남긴 것에 아무런 말도 없었던가요? 봉황령의 행방이라던가, 지난날의 은원 같은 것들……."
"간략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가슴속에 묻어둬야만 할 말이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봉황령에 대한 말은 없었습니다. 봉황문은 자신이 창건했지만 은거하면서 자신과의 관계가 끊어졌노라는 말밖에는."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홍 낭랑이 입술을 물었다.
쏴아아아-
빗줄기 소리가 시원스럽다.
하지만 동굴 안의 분위기는 질식할 듯 무거웠다.
한참, 침묵을 지킨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한효월이었다.
"몇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물어보세요. 내가 아는 거라면 다 답하죠. 그가 그렇게 나를 기만했는데, 내가 더 이상 뭘 숨기고 말고 할 게 있겠어요?"
"그분, 그분이 독고 사형의 부인이 맞습니까?"
"맞아요. 봉설란. 지난날 새봉황이라고 알려졌던 그녀죠."
"전혀 무공을 모르는 일반 가문의 딸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은 겁니까?"
"겉으로는 그래요. 그녀의 집안은 학사(學士) 출신이니 규중규수가 맞지만, 실제로는 무림중의 이인(異人)에게서 무공을 배워서 강호를 주유했었고 그래서 그 당시 나와도 친분을 맺게 되었던 거예요. 다만 활동하던 시기가 길지 않아서 세상 사람들이 모를 뿐이죠."
전혀 알지 못하던 사실들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공을 배운 뒤로 아무도 몰래 강호에 나와 돌아다니던 봉설란.
그녀는 사람들에게 새봉황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그만큼 아름다웠다는 이야기였지만 그녀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가문에서 그녀가 강호에 나온 것을 알면 큰일이라 그녀가 스스로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천기선생을 항주(杭州)에서 만나게 된 것은 운명의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천기선생 공일도(孔一都)는 임풍옥수와 같은 용모에 박학다식하여 그녀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인연이 맺어졌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들이 친해질 무렵,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이 독고해였다.
젊은 나이에 천하무림의 맹주로서 세상을 위진하는 일대 호남.
하지만 그는 이미 결혼을 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거기서 발생하였다.
만나자마자 그들은 하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사고로 인하여 기인한 일이었다.
천기선생 공일도는 원래 홍소군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봉설란이 나타나면서 천기선생 공일도의 사랑은 홍소군이 아니라 봉설란에게 옮겨가 버렸고, 더 어이없는 것은 봉설란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홍소군이라는 점이다.
홍소군은 절망에 빠졌지만 그래도 그를 잊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끼어든 것이 독고해였다.
그는 이미 기혼남이었음에도 그가 워낙 출중한 인물인지라 묘한 사각 관계가 형성이 되었지만, 그러한 사고가 터지기 전까지는 그 국면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홍소군은 천기선생을 원망하여 그를 따라다녔고, 미안함을 이기지 못한 천기선생은 늘 그녀를 피해 다녔다.
그런 와중에 그는 봉설란을 만나러 갔다가 정말 믿기 어려운 광경을 보게 된다. 그가 동생이라 부르는 독고해와 자신의 연인, 봉설란이 알몸으로 규방에서 뒤엉켜 있는 광경을 목도하고 만 것이다.
청천벽력(靑天霹靂)!
그는 그 자리에서 짐승 같은 두 연놈을 쳐 죽이려 했지만, 기혈이 들끓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독고해의 무공은 그를 뛰어넘어 정작 싸움이 시작되면 그가 이긴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그 처절한 배신감…….
미친 듯 사방을 헤매던 그는 마침내 주화입마하여 쓰러지고 만다.
그를 발견한 것은 그를 따라오던 홍소군.
천기선생의 그 참혹한 몰골에 놀란 홍소군은 영문을 알기 위해서 독고해를 찾았고, 마침내 모든 상황을 알기에 이른다.
그것은 사고였다.
적과 싸우던 독고해가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몸을 피한 곳이 공교롭게 봉설란이 있던 곳. 그런데 그녀는 자칫 잘못하여 호접랑군(胡蝶郞君)이란 강호의 치한에게 봉변을 당할 위기에 있었다. 호접랑군을 쫓아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봉설란은 물론 독고해마저 호접랑군이 뿌려놓은 춘약(春藥)에 중독이 되어버린 것이 문제의 발단.
혈기방장한 나이의 독고해.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난 다음이었다.
그의 아래에는 그에게 짓밟힌 봉설란의 나신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
아무리 후회해도 다시 담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불가항력이라고 치부하고 말기에는 너무 참혹한 결과.
일세의 풍운아 천기선생-당시 천기서생-은 그로 인해 충격을 받고 세상을 등졌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에 수련하던 공력이 그때의 충격으로 흐트러져 주화입마에 빠져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다.
독고해로서는 그야말로 황하에 뛰어들어도 잘못을 씻을 수가 없는 상황에 이른 셈이었다.
사흘 밤낮을 두고 그가 은거한 피진거의 앞에서 잘못을 빌었으되, 그는 끝내 피진거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통에 잠긴 봉설란이 그 자리에서 자결을 하고자 하였으나, 독고해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홍 낭랑의 안색은 상기되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가 입술을 깨무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난 알아요. 그 모든 것이 그 파렴치한 계집의 술수였음을……."
"……?"
한효월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시 독고해는 출범한 지 얼마 안 된 천하무림맹의 초대 맹주로서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세상을 질타하는 기린아(麒麟兒)였어요. 능력은 있으되, 세상에 별로 뜻이 없었던 천기선생과는 달랐죠. 비록 결혼을 했다고는 하지만 상처(喪妻)하였으니 걸릴 게 없었죠. 상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거야 아무런 상관도 없었어요. 그 요부는 그렇게 양대 기재를 오가면서 두 사람을 농락했던 거예요."
"……."
너무 엄청난 말이라서 한효월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천기선생이 남긴 글에도 이 부분에 대해서 몇 가지 간단한 언급이 되어 있었다. 비교적 담담히 서술된 글이긴 하였지만, 그 근저에는 삭일 수 없는 앙금이 가라앉아 있음을 한효월은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글이 담긴 천기단서를 한효월은 없애 버렸다.
사형, 독고해의 일세영명(一世英名)이 그 글로 인해서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까 우려해서였다.
의형(義兄)의 여자를 취했다면, 용납될 수 없는 일.
"내 말이 믿어지지 않죠?"
홍 낭랑은 차가운 웃음을 떠올렸다.
"그렇겠죠. 세상에 자면성모라는 말까지 돌게 만들 정도로 무서운 여자이니, 어떻게 쉽게 믿어지겠어요? 그러나 그 사람을 해치고 독고해까지 해친 여자이니 두 사람이 없는 마당에 뭐가 두렵겠어요?"
그녀의 눈에서 원독의 빛이 이글거린다.
"……."
한효월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뭐라고 답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사안(事案)이었다.
"낭랑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그분은 지금부터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요? 복수?"
한참 만에 입을 연 한효월의 물음에 홍 낭랑은 코웃음 쳤다.
"복수? 그녀가 말인가요? 시간이 증명할 거예요. 그 여자가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인지……."
그녀의 마지막 음성이 여운을 남겼다.
빗줄기가 조금 약해졌다.
하지만 아직 밤이 물러가려면 한참 남은 시각.
한효월은 수중에 든 옥패 하나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너비가 한 치가량에 길이가 한 치 반 정도의 타원형인 옥패에는 정교한 솜씨로 구름을 탄 비천옥녀상(飛天玉女像)이 조각되어 있었다.
홍 낭랑이 그에게 주고 간 물건이다.
나를 찾으려면 개봉으로 오라는 말과 함께.
그녀가 사라진 어둠 속을 바라보던 한효월은 옥패를 갈무리하면서 신형을 날렸다.
그가 목적하는 곳은 처음에 갔던 봉설란의 거처.
거기에는 아직 유성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이다.
곳곳에 아직도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한효월을 위협할 정도의 매복은 아니었다.
그는 그들의 눈을 피해서 원래의 자리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한효월의 안색이 굳어졌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유성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명랑 쾌활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경솔한 아이는 아니다. 다른 일이 있었다면 뭔가 표기(表記)라도 남겨두었을 터. 없어졌다면 필유곡절(必有曲折).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어둠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효월은 유성이 있었던 자리에 미미한 움직임의 흔적을 발견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일 다경은 지났을 무렵.
한효월은 신형을 날려 처음 그가 갔던 후원 2층 누각에 도달했다. 그가 처음 갔을 때 불이 꺼져 있었던 후원 누각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효월은 모습을 드러내어 성큼성큼 후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직한 경호성이 들려왔다. 갑자기 사람이 불쑥 나타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효월이 부인을 뵙기 위하여 찾아왔다고 전해주시오."
한효월은 망설이지 않고 조금 소리를 높여 말했다.
말을 한 사람도, 말을 전달할 사람도 그 뒤로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효월은 후원의 화원을 바라볼 뿐, 태연하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누각의 문이 열리고 흰옷을 차려입은 시비(侍婢) 하나가 걸어나왔다.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녀가 한효월의 앞에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누각은 생각보다 별로 크지 않았다.
1층은 대청이었고 객청(客廳)이 따로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비가 한효월을 안내한 곳은 뜻밖에도 누각 2층의 침실이었다.
간결한 치장을 한 침실에는 휘장이 드리워진 침대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옆으로 화장대와 의자가 있다. 침실의 중앙에는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굵은 대황초가 밝혀진 침실, 그 창가에는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등을 보인 채 서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밖으로 빗소리가 고즈넉하게 들린다.
"결례임을 알면서도 야심한 시각에 찾아뵈었습니다."
한효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바깥을 내다보고 있던 흑의여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봉설란이었다.
촛불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우수에 젖은 듯 안색은 어두워 보였다.
"별말씀을, 앉으세요."
시비가 차를 가져다 놓고 물러났다.
탁자에 한효월이 앉자 봉설란은 창가에서 서성이다 길게 탄식했다.
"그분의 평생 업적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고 그나마도 화산으로 옮아가 버렸으니 후일 그분을 어떻게 뵈어야 할는지……."
"저희들의 잘못이 큽니다."
"무슨…… 이 미망인의 신세 한탄일 따름입니다."
봉설란이 머리를 저었다.
봉차가 불빛을 받아 반짝인다.
"감 사질이 가끔 들러 어떻게 계시는지 알아봐 달라는 말도 있었습니다만, 제가 오늘 온 것은 달리 여쭤볼 것이 있어서입니다."
"제게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무슨?"
봉설란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어렸다.
"지금 봉황문을 부인께서 움직이고 계십니까?"
순간, 봉설란의 전신에 일진 진동이 일었다.
그녀는 놀란 눈빛으로 한효월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가 그러던가요?"
"좀 전에 홍 낭랑과 다투실 때, 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
봉설란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아연 긴장의 빛이 방 안을 내리누르는 듯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둠이 길게 대황촉의 불빛에 따라 일렁거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봉설란이었다.
"그렇군요. 누가 그녀를 도왔나 했더니 한 공자이셨군요……."
그녀의 말에 한효월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그래, 그녀가 뭐라던가요? 내가 봉황문의 문주라고 하던가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봉황령이 부인께 있다고만……."
"바보 같은! 하긴 그러니까 내게 억지를 썼겠죠.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하던가요?"
"옛날 일을 조금 들려주신 것뿐입니다."
"옛날 일이라…… 그분과 제가 어떻게 만났는지도 말했겠군요?"
"조금 들었습니다."
"조금이라?"
봉설란의 눈빛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그녀의 말이 다 사실은 아니에요. 더구나 난 그분의 아내가 된 다음,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그분만을 위해서 살았어요. 소군은 누구의 사랑도 얻지 못했었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강요하여 스스로 욕됨을 자초하였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나를……."
그녀는 격앙된 어조로 말하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만 해두죠. 어차피 지난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말끝을 흐린 그녀는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한 공자께서 나를 찾아오신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그녀의 말에는 묘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한효월은 그녀의 말에 정색을 했다.
"봉황령이 부인께 없다면, 혹시 누가 가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
봉설란은 한효월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겠죠. 당대의 봉황문주예요. 그는 지난 십수 년 간 봉황문을 막강하게 만들어놓은 실력자이죠. 물론 천기선생에게서 봉황령을 건네받은 당사자이기도 하구요. 물론 저는 아니에요."
"그가 누군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건 말해 드릴 수가 없겠군요. 이미 다른 사람에게는 누설하지 않기로 약속을 한 다음이라서……."
"부인께선 그 봉황문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계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관련이라, 글쎄요. 일단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은 말씀드릴 수가 있겠군요. 복수를 하려면 큰 힘이 필요하니까……."
"복수……."
한효월이 그 말을 되뇌었다.
그러자 봉설란이 힘있게 머리를 끄떡이며 말했다.
"내가 굳이 고집을 부려 이곳에 남은 것은 복수를 하기 위함이에요. 도저히 더 이상은 참고 볼 수가 없어서…… 그것을 위하여 저는 이미 옛날에 알던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중이에요."
그녀 스스로 인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강호인(江湖人)임을.
"그렇게 말씀하시니 면목이 없습니다만, 부인께서 직접 나서신다면 저희들이 참으로 난감합니다. 돌아가신 분께 뭐라고 드릴 말씀도 없고…… 재고하여 주시면 어떨는지……."
"그럴 수는 없어요. 저는, 한 공자께서 저를 많이 도와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백만대군을 얻은 것보다 더 기쁠 거예요."
"부인을 돕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한 공자."
"예."
"전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한 장부의 아낙으로서 평생을 마치길 원했어요. 무공조차도 놓아두었었죠. 전 시집간 이후로 이따금 내공을 연마한 것을 제외한다면 무공도 버렸었어요. 하지만 지아비가 적의 손에 비명에 가시고 시신마저 도적맞았어요. 그분의 평생 업적이 그들의 손에 유린되어 잿더미가 되는 걸 봤어요. 그걸 보고도 어떻게 그냥 있을 수 있겠어요? 싸우다 죽는다 할지라도 절대로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어요."
봉설란이 빨래판에다 물을 쏟아 붓듯이 그렇게 말했다.
격렬한 어조였다.
구구절절이 피를 토하듯 한이 서린 음성.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그녀의 말에 한효월은 말을 잃었다.
그녀의 도도한 언변에 누가 말을 붙일 수 있을 것인가?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는 독고해의 부인. 세상이 다 아는 맹주의 부인인 것이다. 그녀가 복수를 하겠다고 나선다면 누구도 그 말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 수는 없다.
할 수 있다면 위험하다고 말리는 것이 고작.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말린다고 과연 그녀가 물러설 것인가?
잠시 침음하던 한효월은 입을 열어 물었다.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봉황문주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봉황문주를?"
"그렇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
봉설란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연락은 해보겠어요. 시간이 조금 필요할 테니 사흘 후쯤 다시 와주실 수 있겠어요?"
"물론입니다."
"그럼 사흘 후에 뵙도록 하지요."
그녀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축객(逐客)에 다름이 아니다.
한효월은 암암리에 고소를 머금으면서 그녀에게 손을 맞잡아 포권하여 보였다.
"그럼 삼 일 후, 저녁 무렵해서 찾아뵙겠습니다."
"멀리 나가지는 않겠어요. 오늘은 몹시 피곤해서……."
"별말씀을, 이렇게 찾아뵈어 죄송천만입니다."
봉설란은 문밖으로 나서는 한효월의 등 뒤에다 대고 나직이 말했다.
'홍소군은 너무 믿지 마세요. 그녀는 언제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말을 지어낼 수 있는 사람이니까, 반쯤은 경계하면서 대해야 할 거예요.'
음성은 나직했지만, 전음입밀로 발출된 것이라 한효월의 귓전에다 대고 말하듯이 또렷하게 들렸다. 전음입밀이란 소리를 자신의 진기로서 남에게 보내는 것이니 고심한 내공이 없다면 결코 시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효월을 배웅하고 난 봉설란은 문득 안색을 싸늘히 굳혔다.
'봉황령이 손에 없는 상황에서 사방에 소문이 나면 안 될 텐데…….'
그녀는 한참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뭔가 결심이 선 듯 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침상 옆에 있던 줄을 잡아당겼다.
맑은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린다.
"부르셨습니까?"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예의 흑의인이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지금 가용 인원이 얼마나 되지?"
"아직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수색에 많은 인원이 투입되어…… 열흘 정도는 있어야 어느 정도 힘을 갖출 수 있습니다."
"너무 늦다. 사흘 뒤까지 모든 걸 완료할 수 있게 서둘러야 한다."
"사흘이라면……."
복면흑의인의 눈에 곤혹의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수색에 나갔던 자들에게 일러서 수색 범위를 넓히라고 해. 어쩌면 이미 포위망을 빠져나갔을런지도 모르니까."
봉설란은 예리하게 날이 선 칼처럼 말을 잘라 버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봉명(奉命)!"
말과 함께 복면인이 사라졌다.
봉설란은 창가에서 하늘을 쳐다본다.
밤하늘의 어둠이 천지를 휘감고 있다. 새벽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 * *
밖으로 나온 한효월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가 굳이 유성의 행방을 그녀에게 묻지 않은 것은 그녀에게서 아무런 기색을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가르친 유성의 무공은 약하지 않아 어떤 고수라도 싸운 흔적도 없이 그를 제압해 갈 수는 없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싸움의 흔적이 없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해서 유성이 무사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한효월은 잠시 시간을 두어볼 참이었다.
그리고 그는 2층 누각 쪽을 한 번 더 바라본 다음에 그곳을 벗어났다.
바로 그때였다.
'저게 뭐지?'
한효월은 조금 굳은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빗줄기를 뿌려내고 있는 밤하늘 저쪽에서 무엇인가 반짝이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너무 찰나적이라서 그가 때마침 그쪽을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발견하지 못했을 뻔했을 정도로 그것은 순간적이었다.
한효월의 신형이 망설임없이 그쪽으로 사라졌다.
하늘을 가르는 유성(流星)일 리는 없으리라.
이런 밤에 유성이 보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터이니.
게다가 방금의 반짝임은 분명히 인공적이었다.
그렇다면 연관될 수 있는 가장 큰 가능성은 바로 유성(柳星).
* * *
쏴아아-
쏟아 붓는 빗줄기가 아니지만, 세찬 강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니 옷이란 게 아예 존재 의미가 없다.
그 가운데 거대한 가마 한 채가 빗속을 뚫고서 전진하고 있었다.
여덟 명의 교꾼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자세히 본다면 가마가 아니라 상여(喪輿)임을 알 수 있었고, 대단히 컸다. 하지만 그 움직이는 속도는 실로 놀랍도록 빨라서 마차가 달리는 것보다 더한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속도를 내지 못하고 멈춘 상태였다.
거대한 상여의 앞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樂士)가 여덟 명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하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고, 나머지들도 경악한 눈빛으로 앞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강적을 만난 기색이 역력했다. 바로 귀왕여를 선도(先導)하는 마음악사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는 갈의노인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전광과도 같이 번뜩이는 눈을 들어 방금 자신이 격퇴시킨 마음악사들을 쏘아보면서 코웃음 쳤다.
"아직도 조무래기들만 믿고 상여 안에서 유유자적인가?"
그는 다시금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마음악사들을 보자 싸늘히 고함질렀다.
"다시 한 번 더 움직인다면 더 이상 네 주인의 체면을 돌보지 않겠노라!"
곱추인 갈의노인이 노해 부르짖자, 마음악사들은 심령상으로 충격을 받아 부지중에 가슴을 부여잡으며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나야 했다.
공력의 차이가 너무 나는 것이다.
촤, 촤아아-
강변의 물소리가 요란하다.
그만큼 그가 내지른 한소리에 실린 경력은 막강했던 것이다. 강물이 출렁일 만큼.
"결국, 주인을 나오게 만들려면 개를 때려잡아야 한다는 건가?"
갈의노인이 냉소를 터뜨렸다.
동시에 그는 원숭이의 팔과 같이 긴 손을 치켜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다.
"불같은 성미는 여전하군……. 추운 지방에서 살다 온 자들은 다 그런가?"
귀왕여 안에서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호오, 이제야 나오신 건가? 과연…… 귀하신 분이라 목소리 한번 듣기 힘들군 그래."
"왜 나를 찾아온 거지? 우리 사이에 서로 만날 일은 없을 텐데?"
"그건 내가 결정하지, 귀신이 간섭할 일은 아니지."
지, 라고 하는 말이 그의 입을 떠나는 순간에 그는 괴이한 형태로 주먹을 말아 쥐고는 귀왕여를 향해 일권을 쳐갔다.
"감히!"
꾸짖는 소리와 함께 마음악사와 교꾼들이 일제히 그 장세를 막아가려고 했다.
찰나,
"모두 물러나라! 너희들로서 막을 상대가 아니다. 그건 바로 요동 땅의 귀신 막풍이 자랑하는 무적패권이다!"
음산한 외침이 다급함을 담고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귀왕여 안에서 음산한 기운 한줄기가 쏘아져 나갔다. 그 형상은 실로 기괴하여 사람의 해골을 방불케 하였다.
츠읏- 콰쾅!!
뒤이어 물속에 불길이 들어가는 듯한 음향이 일더니, 이내 고막을 떨어 울리는 굉음이 폭발하듯이 그렇게 터져 나왔다. 그 위력이 얼마나 가공한지 사방 10여 장이 그 범위에 들었다. 귀왕여를 호송하던 자들은 싸움에 끼어들기는커녕, 그 가공할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강물이 출렁이고, 갈대들이 태풍에 무너지듯이 이리저리 쓰러졌다.
불가일세(不可一世)!
당대에는 누구도 그를 어찌할 수 없는 존재를 의미한다.
개개인이 그렇게 불리는 요동의 권왕 막풍과 어둠의 제왕이라고 일컬어지는 풍도귀왕의 대결은 가히 경천동지의 것이었다.
비록 단 한 번의 대결이라고는 하지만 그 격돌로 인하여 초래된 결과는 실로 상상을 불허했다.
요동권왕 막풍의 일권(一拳)과 풍도귀왕의 일경(一勁)이 맞부딪친 자리는 화약이 폭발한 듯 폐허가 되어버렸고, 그 파장에 아직도 강물이 태풍을 만난 듯 출렁거리고 있었다.
힘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뿌리째 뽑혀 버린 갈대들이 어지러이 여풍(餘風)을 따라 흩어지고 있으니 도무지 시야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흥! 지난 세월 동안 놀고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로군……."
요동권왕은 화등잔 같은 신광을 눈에서 쏟아내면서 냉소했다.
그의 얼굴은 대춧빛으로 붉었고, 그처럼 가공하게 퍼져 나가는 경력도 그의 신형만은 건드릴 수 없는 듯 옷자락 하나 펄럭이지 않는다.
형편은 귀왕여도 비슷한 듯했다.
귀왕여에 매달린 만장(輓章)이나 칠성번(七星幡)들이 찢어질 듯 펄럭이긴 하지만 그 귀왕여의 앞을 가리고 있는 주렴(珠簾)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주렴의 가운데 부분에서 안광(眼光)이라고 짐작되는 푸른빛이 어둠을 뚫고서 빛나고 있음이 더욱 공포스러울 뿐.
"깃발은 조용히 있고자 하지만 부는 바람이 그냥 두지 않으니 어찌 그것이 깃발의 잘못인가? 본왕이 손을 놓고 있었다면 이미 허접쓰레기들이 본왕의 신성(神聖)을 모독하였을 테니……."
"좋아, 좋아! 그렇다면 그 귀왕음부인이 그간 얼마나 대단해졌는지 한번 알아봐도 좋겠군."
요동권왕 막풍은 껄껄 대소를 터뜨리면서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그의 갈의장삼이 갑자기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결(訣)을 짚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강대무비한 기세가 그 한 걸음에서 일어났다.
느닷없이 거대한 해일이 요동권왕의 등 뒤에서 일어나 앞으로 밀려 나오는 것만 같은 기세…….
그가 한 걸음을 더 내딛자 그 기세는 더욱 가공해졌다.
그 순간, 마음악사들이 환영처럼 날아들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가장 앞섰던 자의 입에서 구슬픈 비명 소리가 이는 듯하더니 그의 신형이 피모래로 화하여 무너져 내렸다.
우두둑!
요동권왕이 주먹을 움켜쥐자 손아귀에서 강렬한 음향이 인다.
"허수아비들로 나를 가로막을 셈이냐?"
그의 머리카락이 불타듯이 서서히 위로 솟구치기 시작한다.
쿠쿵!
그가 앞으로 다시 한 걸음을 내딛자, 지축을 울리는 진동이 인다. 동시에 갈대밭의 갈대들이 허공에서 누가 잡아당기듯이 뿌리째 뽑혀 올라갔다.
고오오-
고막을 울리는 거대한 어떤 울림이 요동권왕의 한 걸음마다에서 일고 있었다.
방금 죽어 나간 마음악사의 옆에 있던 두 명의 악사가 들고 있는 비파의 줄이 끊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줄이 끊어지고 비파가 부서지는 것과 함께 마음악사도 외마디 비명과 함께 피를 토해내면서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가공할 신위로구나!'
암중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효월은 혀를 내둘렀다.
저것이 그의 원래 무공 수준이라면 지난날 청룡보에서 자신과 싸울 때에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저러한 무공의 가장 무서운 점은 아예 손을 쓰지도 않고서 기세(氣勢)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이고, 그 능력이 계속 높아진다면 바로 전설상으로 알려진 의형살인(意形殺人)의 경지에 이르게 될 터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때였다.
『대풍운연의』 제4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