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首 봉황지령(鳳凰之令)
-연적이 만나다.
지난날의 은구(恩仇)는 원한만이 가득하다.
긴 어둠이 지나고 저 멀리 동녘에서부터 어둠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짙었던 어둠이 스러지면서 햇살이 거미줄처럼 어둠의 장막으로 스며들기 시작할 때, 한효월은 눈을 떴다.
"야! 깨어났다! 깨어났어!"
그가 눈을 뜨자 누군가가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그의 앞에 활짝 웃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거지이긴 한데, 눈이 아름답게 반짝인다.
까치집을 지은 머리카락이긴 하지만 이목구비가 아름다운 거지. 바로 교호 심소옥이었다.
"넌?"
의아한 표정이었던 한효월은 문득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군! 방주를 따라온 거냐?"
"당연하지. 그런데 또 뭘 하느라고 그렇게 다친 거지? 쯧쯔…… 만날 때마다 죽을상이네에?"
심소옥이 연신 혀를 차며 고개를 냉큼 들이밀었다. 검은 눈동자가 장난스레 반짝인다.
여전히 거침없는 입심에 한효월은 쓴웃음을 지었다.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자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유성을 볼 수 있었다.
"괜찮으세요?"
유성이 물었다.
"물론이지. 너는?"
"저야 당연히……."
문득 한효월이 벌떡 일어섰다. 유성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어딜 가시려고?"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됐네요, 됐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방주께서 상황을 정리 중이니 걱정 푹 붙들어매 두고 쉬면 돼요. 여기서 푹 쉬다가……."
심소옥이 참견했다.
종알거리던 심소옥은 심상치 않은 유성의 눈초리를 발견한다.
아니나 다를까.
"넌 도대체 말버릇이 그게 뭐냐?"
유성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말버릇이라니?"
"거지인 것까지 상관은 않겠다만, 감히 계집애 주제에 우리 공자께 말끝마다 반말이잖아? 밤톨만한 게 버르장머리없이……."
심소옥이 피식, 웃었다.
"이봐. 난 네 주인과 형제의 의(義)를 맺은 몸이야! 알고나 까불어. 종놈 주제에 어디서 감히 버르장머리없이……."
그리곤 눈을 아래위로 부라린다.
그 말에 유성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정말 그렇다면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봐서 신분이 틀린 것이다.
그때 한효월이 입을 열었다.
"성아는 내 동생과 같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해라."
그 말에 유성은 냉소를 흘리며 심소옥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정도로 기가 죽을 심소옥일 리가 없다.
"쯧쯧…… 멍청하긴. 남녀는 유별한 거야. 왜인지 알아? 내가 네 주인에게 시집이라도 가게 되면 너 나중에 어떻게 할 거야?"
그 말에 유성은 어이가 없는 듯 입을 딱 벌렸다.
"네, 네가 우리 공자께 말이냐?"
얼마나 기가 막힌지 달변인 유성이 말을 더듬는다.
"왜? 안 될 거 같아?"
"당연히 안 되지! 우리 공자께는 이미 정혼자(定婚者)가 있어."
그 말에 그때까지 여유만만하던 심소옥의 안색이 돌변했다.
"저, 정혼자라니?"
"엉뚱한 생각일랑 꿈에라도 하지 마. 이 소저가 계시는 한, 너 따위는 어림도 없으니까. 백 마리가 있어도 어림도 없지."
"이 소저?"
심소옥의 눈빛이 묘하게 굳어졌다.
내가 찜한 물건을 감히 누가 먼저?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한 사람이 빠른 속도로 그들의 앞으로 들이닥쳤다.
"방주께서 한 공자를 청하십니다."
중년의 거지 한 사람이 한효월의 앞에서 포권하면서 말했다.
"방주께서는?"
"지금 경릉 앞에서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계십니다."
"좋소. 앞장서시오."
한효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걸개.
거지라는 말이 문헌으로 처음 보이는 것은 후한서(後漢書) 독행전(獨行傳)이다.
거기에는 향허라는 사람이 제멋대로 행동하기 좋아하여 사람들이 걸개라 불렀다 하는데, 좀 더 구체적인 형상은 후일 계신록(稽神錄)에서 독사를 잡아먹기를 즐기고 그 안주로 술을 마시며, 제노(齊魯) 지방을 거쳐 예장(豫章)에 이르며 뱀을 부리니 걸개의 생활이 이와 같았다라고 하여 좀 더 구체화된다.
이러한 거지의 형상은 당대(唐代)의 원결(元結)이 지은 개론으로 정리되어 오늘날 거지라고 일컫는 직업은 육조(六朝)에서 제일 처음 보였다고 하였다.
그러한 거지들의 모임.
천하제일의 대방이라 불리는 개방이 모습을 보인 것은 언제라고 한마디로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송원(宋元)대의 소설인 <금옥노봉타박정랑(金玉奴棒打薄情郞)>에서 항주(杭州) 걸개단의 두령인 금 노대(金老大)가 나오고 그가 성내의 거지들을 통솔하는 영수(領袖)를 상징하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음을 볼 때, 이미 송대에 개방의 기틀이 잡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개방이 천하를 통틀어 남칠성(南七省) 북육성(北六省)의 13개 성을 통괄하는 거대 조직으로 자리하게 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내홍(內訌)과 세월이 걸렸음을 짐작하기 어려울 까닭이 없다.
개방이 천하제일의 대방으로 인정받는 것은 단순히 방도의 숫자가 누만(累萬)이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의 조직력과 정보력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사혼잡(龍蛇混雜)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들의 구성이 힘을 발휘하게 된다면 크기만 천하제일이 아니라, 힘 또한 세상을 뒤엎을 수도 있을 터이다. 아직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그것은 뛰어난 영도자가 나타남으로써 언제라도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지난날 개방의 대란(大亂)은 바로 그러한 과정에서 일어났었고, 결과는 참담한 개방의 몰락이었었다.
하지만 한효월은 오늘 다시 개방을 천하에 우뚝 세울 인물을 보게 되었다.
황엽(黃葉).
빛 바랜 황의를 입은 그의 체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침착한 그의 모습에서는 거지라기보다는 일대 영웅의 기상이 역연하다.
아직 어둠이 채 물러가지 않은 일대.
횃불이 여기저기 밝혀진 가운데 황엽은 경릉이 바라보이는 곡구에서 한효월을 맞았다.
지글지글…….
그의 앞 횃불에는 토끼 몇 마리가 불 속에 누워 구워지고 있다.
"몸은 좀 어떠시오?"
"도와주셔서 우선 급한 불은 끈 듯합니다."
한효월이 그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횃불 앞에 앉은 황엽은 잠시 한효월의 얼굴을 쳐다보는 듯하더니 미미하게 웃음지었다.
"한 공자는 이 시대를 책임져야 할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이오. 부디 자신의 몸을 너무 혹사하지 마시오."
"……."
한효월은 묵묵히 그를 본다.
"좀 드시겠소?"
황엽은 스스럼없이 토끼 다리 하나를 찢어 한효월에게 내밀었다.
"잘 먹겠습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고기를 뜯었다. 사방에서 고기 냄새가 진동함을 보면 모두 밤새 지친 몸을 잠시 쉬고 있는 듯했다. 유성도 뒤쪽으로 앉아 배를 채우고 있었다.
"탁주(濁酒)이지만 술도 있소."
황엽이 술잔을 내밀었다.
한효월은 사양하지 않고 술잔을 받았다.
"이런 때가 아니라면 한 공자와 천하를 논하며 밤을 새고 싶은데,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없으니 그것이 안타깝소이다."
"삶이 다하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기회야 있지 않겠습니까?"
한효월이 담담히 그 말을 받았다.
그 말에 황엽은 미소를 지었다.
"옳소. 오늘이 아니라도 기회야 있겠지. 다만, 내일은 이미 오늘이 아니라는 것이 다를 뿐……."
두 사람의 말은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암중에 적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들어 경릉을 보았다.
"제천교는 심혈을 기울여 군웅들을 저 릉 속으로 몰아넣었소. 그들을 구하고 싶지만…… 내부 구조를 알지 못하여 곤란하던 중, 장보도를 한 공자가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혹시 내부 구조를 기억하실 수 있겠는지?"
"아마 가능할 겁니다."
황엽이 손짓하자 그의 수신호위 중 하나가 바람처럼 지필묵을 대령했다.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
잠시 자신의 앞에 펼쳐져 있는 종이를 내려다보고 있던 한효월은 세필(細筆)을 들어 복잡한 도면을 그려냈다.
조금도 망설임없는 그의 행동을 보면서 황엽은 놀란 빛을 떠올렸다.
그가 그리는 도면은 문외한이 본다면 이해하기조차 어렵도록 복잡했다. 그런 도면을 조금도 망설임없이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인 까닭이다.
"이 도면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도 충분히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어차피 기억에 의지하여 그린 것이니……."
황엽의 말에 한효월은 머리를 저었다.
"제 기억에 의거하여 그린 것이긴 합니다만 원본과 다르진 않을 겁니다. 제가 완전치 않다고 한 것은 처음부터 그 도면에서 중심부의 기관은 삭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효월의 말이 의미함을 알아들은 황엽이 경악한 표정이 되었다.
"한 공자의 기억력만으로도 강호를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겠소."
"과찬을. 전에 건축지학에 대해서 잠시 공부한 적이 있어서 남보다 조금 쉽게 기억할 수가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보다……."
한효월은 황엽을 바라보았다.
"무슨 할 말이 있으시오?"
"정말 저 릉 안으로 들어가실 생각이십니까?"
"가능하다면……."
"제 생각으로는 그만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는 듯 황엽은 한효월을 쳐다보았다.
"저들은 오랫동안 이 일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렇듯 공을 들인 것은 군웅들을 몰살시키기 위해서가 아닐 겁니다."
"그렇소. 그들은 군웅들을 휘하로 끌어들일 예정이었소. 만약 한 공자가 적시에 막지 않았다면 군웅들은 모두 능 안으로 들어가서 저들에게 제압당하고 말았을 것이오."
"그것을 알면서도 안으로 들어가시겠다는 겁니까?"
한효월의 물음에 황엽의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 말의 의미는 묘했다.
"……."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잠시 그를 마주 보고 있던 한효월이 입을 열었다.
"군웅들을 구하기엔 이미 때가 늦은 듯합니다. 저들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모르는 판에 여기 오래 머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역시……."
황엽은 한효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 공자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들도 그렇게 생각하겠구료."
그 말에 한효월은 그를 쳐다보았다.
"설마…… 저들을 끌어들이고자 하십니까?"
"저들은 어둠 속에 숨어 있고, 우리는 늘 노출되어 있소. 매우 불공평한 싸움이지."
"……."
한효월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은 외부의 평가만으로 평가하기 힘들다. 보는 척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효월은 개방 방주인 황엽이 세상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물론이오."
황엽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햇살이 망산을 뒤덮었다.
그처럼 험악했던 밤이 갔다.
사방의 절경이 아름답게, 정말 언제 그런 변고가 있었느냐는 듯이 그렇게 다시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사방에서는 쾌활한 새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한효월은 유성과 함께 망산을 벗어났다.
"그분, 괜찮을까요?"
"대책이 있겠지. 무모하게 저들과 충돌할 사람이 아니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기인들이 계속 나타난다면 제천교도 곤란하게 되겠지."
먼저 그곳을 떠난 한효월은 맹주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공자!"
앞쪽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관 가주……."
그를 본 한효월이 뜻밖이란 듯 중얼거렸다.
나타난 사람은 정말 뜻밖에도 탁탑천왕 관웅이었다. 그의 곁에는 소패왕 관패도 서 있었다.
"여긴 어쩐 일로? 관 형제는 괜찮습니까?"
"거두어주십시오. 장부는 빚을 지고 살지 않는 법! 이미 두 번이나 목숨의 빚을 졌으니 어찌 그냥 지나갈 수 있으리까? 거두어주신다면 끓는 물, 타는 불 속이라도 사양치 않겠습니다!"
관패.
소패왕 관패가 갑자기 그의 아버지 앞으로 나서면서 소리쳤다.
타고난 체력이었다. 그처럼 심했던 상처였는데 이미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얼떨떨한 한효월은 억지로 미소를 떠올렸다.
"관 형. 괘념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대가를 바라고 그 일을 한 것이 아니……."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 무릎을 꿇으리까?"
관패가 고리눈을 부릅뜨고서 한효월을 쏘아보았다. 그리곤.
"좋소이다! 까짓거 꿇으면 되지 않겠소!"
관패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관 형제!"
한효월이 당황하여 그를 부축했다.
"받아주시오. 이놈은 황소고집이라서 일단 제가 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누구도 말릴 수가 없소. 못난 놈이긴 해도 잘 가르치면 짐이 되지는 않을 게요. 놈이 한 공자를 따라 견문을 넓힐 수 있다면 그도 좋은 일일 듯하오."
탁탑천왕 관패가 옆에서 거들었다.
"관 대협. 소생은 어디 한군데 정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맹주부조차 화산으로 자리를 옮겨 거처할 곳조차 없이 떠돌아다녀야 합니다. 더구나 소생은 이미 제천교의 주목을 받아 일신의 안녕을 점칠 수 없는……."
"음, 내 아들놈이 그처럼 모자란단 말이오?"
관패가 인상을 찡그렸다.
분위기가 묘해지자 한효월은 난감한 빛이 되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때.
'승낙해요! 산서관가의 힘은 간단치 않으니 해될 일은 없을 테니까. 더구나 탁탑천왕의 성격은 폭급하여 자칫 등을 돌린다면 머리 아픈 일이 생길런지도 몰라요.'
묘한 전음이 들려왔다.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아는 한효월은 잠시 생각하다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니?"
"관 형제의 몸은 지금 정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관 가주께서 관 형제를 잠시 돌보시면 소생이 따로 기별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관패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정말입니까?"
"쯧쯧…… 믿지도 못할 사람에게 무슨 의탁이고 나발이람?"
누군가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관도 옆 숲, 한 사람이 팔짱을 낀 채로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심소옥이었다.
"넌……."
그녀를 발견한 관패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감히 어떤 놈이…… 라고 하여 단숨에 박살을 낼 생각이었지만 얼마 전에 자신을 도와준 그녀임을 알아보자 그냥 사납게 노려볼 뿐이었다.
"안 그래? 믿지도 못……!"
심소옥이 뒷말을 흐렸다.
탁탑천왕 관웅, 그가 그녀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던 것이다.
"본왕은 계집이 가타부타하는 걸 두고 보질 못하는 성미다. 한 번만 더 입을 놀리면 그냥 두지 않겠다."
피식, 심소옥이 웃음을 흘렸다.
"내가 그런다고 겁……!"
그녀는 채 말도 끝내지 못하고 혼비백산 옆으로 몸을 날렸다.
쾅!
그녀가 있던 자리가 찰나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탁탑천왕 관패가 사정없이 일권을 질러내어 그 일권은 그녀가 있던 곳 주위 1장여를 한순간에 폐허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럼, 그렇게 알고 본가로 돌아가 기다리도록 하겠소."
관패는 그녀의 생사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한효월에게 포권을 해 보였다.
"예."
한효월도 그에게 포권을 했다.
"아버님! 전 이대로…… 으윽!"
뭔가 항변하려던 관패는 탁탑천왕 관웅에게 덜미를 끌려 그 자리를 떠나야 했다. 그 모습은 난감하기는 하지만 상당히 익숙해 보여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뭐 저따위가 다 있어!"
심소옥이 이를 갈면서 숲 속에서 튀어나왔다.
"어디서나 입을 함부로 놀리면 혼이 나는 법이지."
"뭐라고?"
유성의 말에 심소옥이 눈을 부릅떴다.
"낄 데 안 낄 데 함부로 좀 나서지 마. 계집애가 그러다 제명에 못 죽는 수가 있지……."
"뭐가 어째?"
심소옥이 눈에 쌍심지를 켜자 한효월이 만류한다.
"그만 해둬라. 넌 어떻게 온 거지?"
"어떻게 온 거라니? 오라버니 따라가려고 왔지. 보고도 몰라?"
"뭐라고?"
한효월은 어이가 없어졌다.
"그럼 어떡해? 싸가지없는 꼬마랑 철없는 오빠를 이 험악한 강호에 내놓고 내가 맘을 놓을 수가 있겠어?"
"이 계집애가 정말……."
유성이 눈을 부릅떴다.
그때였다. 침중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사매, 무례하게 굴지 마라."
"사형……?"
나타난 사람을 본 심소옥이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당장 돌아오라는 방주님의 명이시다. 어서 가서 대죄하지 못하겠느냐?"
나타난 옥면무영 호일랑이 호통을 쳤다.
"사숙께서 널 잡으러 오실 게다. 이번에 잡히면 그냥 두지 않고 타구동(打狗洞)에다 가둬 버린다고 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이번에 갇히면 최소 10년은 거기 있어야 할 거다."
"마, 말도 안 돼……. 그럼 시집도 못 갈 거야!"
심소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죄송합니다. 사매가 아직 어려 철이 없습니다.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옥면무영 호일랑이 한효월을 향해 포권했다.
'망할…… 사형의 경공이 나보다 월등하니 도망갈 수도 없고…….'
심소옥은 열심히 눈을 굴렸지만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다.
어쩔 수 없이 한효월을 향해 눈짓을 했지만 한효월이 미소만 지은 채 못 본 척, 그들을 향해 포권해 보이고 훌훌 떠나 버리자 심소옥은 노해 귀가 새빨개졌다.
그러나 감히 방주의 명을 거역할 담량은 없는지라 앙앙불락 속만 끓일 따름이다.
* * *
한효월과 유성이 맹주부에 도착해 보니, 그곳은 이미 비어 있었다.
감천형 등이 모두 화산으로 출발한 것이다.
그들이 맹주부에 도달하여 주위를 살펴보고 있을 때, 그들의 앞에는 한 사람이 나타났다. 맹주부에서 남겨두고 간 위사였다. 그는 밤새 한효월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던지 이슬을 맞은 모습.
그가 건네준 서신을 받아본 한효월은 유성과 함께 성내에 있는 객잔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죠?"
객잔에 여장을 푼 유성이 한효월에게 물었다.
"우선 너와 내가 정상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겠지?"
유성이 눈알을 굴렸다.
"정상이라뇨? 아직도 안 좋으신가요?"
"나도 그렇지만 너도 정상을 회복하려면 조금 더 조섭이 필요할 거다. 한 번 더 그런 일을 당해도 견디려면 미리……."
"무,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유성은 당황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모습에 한효월은 미소를 지었다.
'젠장……!'
문을 닫고 등을 문에다 기댄 유성이 입맛을 다셨다.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지 모르겠다.
말만 들어도 공연히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진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 풍만한 나신.
출렁이는 유방에 백옥 같던 그 몸매, 더구나 교합에 이르러 전신을 꿰뚫던 그 상상조차 못했던 여체의 가공할 마력이 찰나간에 눈앞에서 명멸하는 것이다.
"망할! 내가 겨우 이런 정도라니……."
머리가 떨어져 나가라 흔들어대던 유성은 침상으로 뛰어가 앉아 심법(心法)을 운행했다. 마음이 격해지고 심장이 벌렁거린다. 눈을 감았으되, 생생하게 떠오르는 여인의 나신으로 인해 진정이 쉽게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서야 비로소 유성은 마음을 다잡고 운기조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효월과 유성은 그렇게 객방에 틀어박혀서 꼼짝도 하지 않고 진기를 다스렸다.
식사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모두 안에서 해결했다.
하긴 그래 봐야 한나절에 불과한 날들이지만.
간단한 요기를 하고 나니 이미 바깥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창밖으로 노을이 깜박 스러지고 있음을 보자 한효월은 문득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듯 쉬어본 것이 언제인지, 까마득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하산한 이래, 한순간도 마음 놓고 쉬어본 적이 없었다.
산을 내려올 때는 내심 호기만장(豪氣萬丈)하여 사형과 사부가 하지 못한 일을 이루고 조용히 물러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젠 그 일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절감한다.
산을 떠나온 뒤, 그의 생각대로 이루어진 일은 거의 없다.
계속해서 저들과 부딪치기는 했지만, 실제로 저들에 대해서 알아낸 것도 별로 없는 판이니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달라져야 할 때였다.
한효월은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어 보았다.
힘이 실린 주먹이다.
운기(運氣)가 깃들자 은은한 기류의 소용돌이가 그 주먹의 주위에서 일어난다. 그가 수련한 내공은 선도지류(仙道之流)다. 이름하여 주천무애신공(週天無涯神功). 그 무공은 그의 성품과 잘 맞아 그의 나이로써는 이미 오르기 힘든 최상승의 경지에 올라 있는 상태였다. 그의 담백한 성품 또한 그 신공의 영향이 클 터이다.
건곤무적 독고해는 이 주천무애신공에서 따로 건곤신공(乾坤神功)을 창조하여 천하제일이라는 고수의 반열에 올랐었다.
이 주천무애신공이 강한 위력보다는 사람의 성품을 도야(陶冶)하고 심신을 안정시키며 기혈을 안돈하는 데 주력하는 까닭이다. 실전에서는 아무래도 강력한 힘을 기반으로 하는 무공에 손색이 있었기에 건곤무적 독고해는 새로운 무공을 창조해 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무공은 모두 패도적이고 일거수일투족에서 모두 경천동지의 가공할 힘을 몰아내는 위력을 가졌다.
그러나 한효월은 굳이 그러한 무공이 필요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젠 달랐다.
적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아니, 아직까지 적의 수뇌는 만나지도 못했었다.
그럼에도 적을 힘으로 누를 수 있다는 확신은 절대로 할 수가 없다.
사형과 같은 길을 가야 하는지 고민스럽다.
"무공이 예상보다 더 빨리 진전된다. 산을 떠나올 때 나의 신공화후는 8, 9성. 하지만 이제는 십성을 바라본다……."
응당 기뻐할 일이건만 자신의 손에서 일어나는 기파(氣波)를 보면서 중얼거리는 한효월의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때다.
탁!
뭔가가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놀란 한효월이 바람처럼 창밖으로 솟아 나갔다.
그가 지붕 위로 올라가 주위를 돌아보고 있을 때, 유성도 날아 나왔다.
"무슨 일이지요?"
"아무것도 아니다."
한효월은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을 내려다보았다.
손수건.
그것도 비단으로 된 것이다.
향기가 배어 있음을 감안한다면, 그 화사한 빛깔에 수놓인 난초를 본다면 이 손수건이 남자의 것일 리가 없다.
거기에 글이 남아 있었다.
<제천교는 이미 당신에게 추살령(追殺令)을 발동했어요.
누구를 막론하고 당신을 발견하면 최우선으로 당신을 죽이라는 명령이 본 교에서 내려와 당신을 찾기 위해서 사방에 고수들이 깔렸는데도 감히 객잔에서 한가하게 노닥거린다는 건가요?>
서명도 없다.
그러나 그 손수건에 쓰인 글은 간단한 것은 아니다.
"누가 이런 글을?"
한효월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객잔의 어둠 속에서 바라보고 있는 눈길이 있었다.
그 눈길의 주인은 맑고 영롱한 눈빛으로 한효월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직이 한숨 쉬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 그는 깜짝 놀랐다.
손수건을 내려다보고 있던 한효월이 시선을 들어 자신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 누구요?"
한효월의 물음이 뒤를 이었다.
어둠 속에서 기척이 바람처럼 일었다.
거기 숨어 있던 누군가가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어딜 가는 거냐?"
유성이 그것을 알아채고 냉소를 터뜨리면서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돌아오너라."
그는 한효월의 음성에 몸을 틀어 되돌아와야 했다.
"왜 부르신 겁니까? 적일지도 모르는데……."
"적이 아니다. 적이라면 이런 식으로 소식을 전하지 않지."
한효월은 조용히 답했다.
그는 그사이에 다시 한 번 손수건의 글을 일별했고, 그 글이 여자들이 쓰는 눈썹 그리는 먹으로 쓰여진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여자라는 건가?'
그에게 이런 소식을 전할 여자라니?
"주위가 좀 더 어두워지면 바로 떠난다. 준비를 해두도록 해라."
한효월은 묘한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면서 나직이 말했다.
"그러죠 뭐. 준비할 거나 있나요? 숙박비나 치러주면 끝이지."
영문을 모르는 유성은 투덜거리면서도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 * *
한효월이 그 객잔을 떠난 것은 그날 밤 이경이 끝나갈 무렵이다.
유성과 함께 아무도 모르게 그 객잔을 빠져나온 한효월은 성문을 넘어 교외로 치달렸다.
그는 이미 목적한 바가 있는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고 반 시진가량을 질주하자 그들의 앞에는 일단의 마을이 나타났다. 황하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법 큰 마을이었다.
한효월이 목적한 곳은 그 마을의 끝 부분에 자리한 한 채의 장원. 그리 크지 않지만 토호(土豪)의 집인 듯 그 마을에서는 제일 큰 곳이었다.
"여긴 어딥니까?"
유성이 의아한 듯 물었다.
"잠시 다녀올 테니 너는 혹시 누가 우리 뒤를 따르지 않는지 살펴보도록 해라."
한효월은 대답을 미루고 그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정식으로 절차를 갖춰서 안으로 들어가려는 듯 보였지만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던 그는 신형을 날려 장원의 후원 쪽으로 스며들었다.
밤이 늦어서인지 장원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별일없이 계시다면 굳이 경동시킬 필요는 없다.'
내심 중얼거리던 한효월의 눈빛이 돌연 굳어졌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은밀하게 후원의 어둠을 가로지르고 있음을 발견했던 까닭이다.
짙은 어둠.
그 속에서 인영은 은밀하고도 빠르게 움직여 후원 담을 넘었다.
그리고 주위를 살핀 인영은 빠른 신법을 전개하여 사라졌다.
'누구지?'
인영을 발견한 한효월은 후원 누각의 불이 꺼져 있음을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을 하고는 그 인영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인영은 담을 넘자 어둠 속에서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의 인영의 신법은 이미 상승의 경지에 있어서 반 각가량을 달리게 되자 물소리가 들리는 황하변에 이르렀다.
쏴쏴아…….
하늘에는 달이 휘영청하고 사람의 키를 넘는 무성한 갈대들은 강물의 철석임에 몸을 맡긴 채로 건들거리고 있다.
한 수 시정(詩情)이 솟아남직한 풍경.
그 갈대밭 근처에 퇴락한 용왕묘(龍王廟)가 하나 있는데, 인영은 바로 거기에 도달하자 걸음을 멈추었다.
걸음을 멈춘 인영은 얼굴에 검은 두건을 둘러 본색을 가린 상태였다.
흑영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은은히 처량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차갑게 빛나는 눈길로 주위를 쓸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람을 불러놓고 나타나지 않는 건 무슨 짓이지?"
음성마저 날카롭고도 싸늘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피리 소리가 그치더니 한소리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매(小妹)는 이미 와서 기다린 지 오래되었어요."
말과 함께 용왕묘 안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버들가지가 휘청거리는 듯한 걸음.
미태를 자랑하는 그 모습을 본 한효월은 암중에 신음해야 했다.
'홍 낭랑?!'
그러했다.
인영의 뒤를 따른 한효월의 눈에 든 그 사람은 바로 홍 낭랑이었다.
천기선생의 사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던 그 홍 낭랑이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흥! 그 천박한 태도는 여전하군."
복면의 인영이 그녀의 모습에 냉소를 흘렸다.
그러자 홍 낭랑은 깔깔 웃었다.
"그런가요? 언니의 모습도 지난날에 비해 전혀 달라진 것 같지 않군요. 호호…… 지금의 그 모습을 본다면 누가 당신을 자면성모라고 믿을 수 있겠어요?"
'설마…….'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한효월은 홍 낭랑의 말에 놀라 흑영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흑영이 차게 말끝을 잘랐다.
"기껏 그 말을 하려고 나를 불러냈단 말이냐?"
"아니죠. 아니죠……. 그럴 리가. 너무 오랜만에 언니를 만나게 되니…… 기뻐서 회포나 풀고 옛일이나 회상해 볼까 하고……."
"너와 나 사이에 회상할 옛일이 어디 있을까?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고 나를 불러낸 용건이나 말해 봐라. 다른 할 말이 없다면 나는 그만 돌아가 보겠다."
"성격이 많이 급해졌군요? 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확실히 세월이 많이 흐르긴 한 모양이네요. 천하무림맹주의 부인으로 지낸 지난 세월이 당신을 그렇게 변하게 만들었나요?"
홍 낭랑이 피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흥! 정말 세월이 흐르긴 한 모양이구나. 네가 내 앞에서 감히 이렇듯 큰소리를 치다니……."
흑영이 코웃음을 쳤다.
"그때와 지금은 당연히 사정이 틀리죠."
홍 낭랑은 정색을 하더니 흑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오늘 소매(小妹)가 언니를 보자고 한 것은 봉황령(鳳凰令)을 빌리기 위해서예요."
그녀의 말에 흑영의 가슴에 가벼운 기복이 일었다.
"봉황령이라고?"
"그래요. 난 지금 그게 필요해요."
"말도 안 돼……. 그걸 왜 나에게 와서 찾는 거지?"
흑영이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흥! 그걸 몰라서 묻는단 말인가요?"
홍 낭랑이 냉소를 터뜨렸다.
"그걸 내가 왜 알아야 하지?"
"그는 평생을 두고 당신을 그리워했어요. 만약 그날 밤의 일로 당신이 독고해에게 가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로 당신을 놓치지 않았겠죠."
"닥쳐! 지금에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냐?"
차갑게 말을 자른 흑영은 싸늘하게 내쏘았다.
"그것이 필요하면 그에게 가서 달라고 하지 왜 나에게 와서……."
"흥! 그는 이미 죽었어요. 설마 그걸 모르고 있다고 할 참인가요?"
"주, 죽다니?"
흑영의 복면 속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럼…… 그가 죽었단 것이 정말이란 건가……?"
"호호…… 믿기지 않는군요. 당신이 그걸 모르고 있다니? 하긴 뭐라고 해도 좋아요. 알았든 몰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 더 이상 긴 이야기는 그만두고, 답변만 해줘요. 봉황령은 지금 어디 있어요?"
"어이가 없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홍 낭랑의 얼굴이 싸늘히 굳어졌다.
"당신이 모른다면 누가 알죠? 그는 죽기 전에 분명히 내게 말했었어요. 봉황령을 누군가에게 맡겼다고, 그것도 은거 전에."
그녀는 냉소를 흘리며 계속해 따지듯이 말했다.
"그는 성정이 냉오(冷傲)하여 평생 어느 누구와도 잘 사귀지 않았죠. 친인(親人)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고 당신이 그를 떠난 후에는 더 더욱 그랬어요. 그가 봉황령을 맡길 만한 사람이 누구죠? 당신 외에는 누구도 그럴 만한 사람이 없어요. 더구나 그가 봉황문을 누구 때문에 만들었는데, 그가 봉황문을 만든 것은 봉황우비의 고사(故事)를 따서 새봉황(賽鳳凰), 바로 당신을 위해 만든 것임을 내가 꼭 말해야겠어요?"
"지난 일이야."
"내겐 지난 일이 아니에요!"
갑자기 홍 낭랑이 사납게 소리쳤다.
"당신이 있었으므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독고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고, 그도 그랬어요. 당신은 마음 놓고 그와 독고해를 농락했죠! 바보 같은 독고해는 당신의 정체는 알지도 못하고……."
"닥치지 못할까!"
돌연 흑영이 날카롭게 외쳤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에서 차디찬 살기가 번뜩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한마디만 더 지껄인다면 널 그냥 두지 않겠다!"
홍 낭랑은 움찔했지만 이내 냉소를 떠올렸다. 그녀는 비웃듯 흑영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그냥 두지 않으면 어쩔 거죠? 당신은 내가 아직도 지난날의 그 홍소군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로군요?"
"……."
흑영은 싸늘히 홍 낭랑을 노려보고 있다가 싸늘히 중얼거렸다.
"그렇군. 네가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걸 보니 세월이 흐르긴 흐른 모양이구나?"
말과 함께 흑영은 신형을 돌렸다.
흑영이 그 말을 끝으로 그곳을 떠날 듯하자 홍 낭랑은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노하여 소리쳤다.
"멈춰요!"
흑영은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그녀는 신형을 돌리지는 않고 그대로 선 채로 말했다.
"더 할 말이 남았느냐?"
"난 대답을 듣지 못했어요."
"몇 번을 말해야겠니? 내겐 봉황령이 없다."
"난 믿을 수 없어요!"
"네게 믿으라고 애원할 이유가 내겐 없다."
말과 함께 흑영은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은 앞으로 채 서너 걸음을 떼어놓기 전에 멎었다.
그 앞에 담장처럼 버티고 선 검은 인영들을 발견한 까닭이다. 하나, 둘…… 모두 12명이나 되는 인원이다.
"이게 무슨 뜻이지?"
흑영이 홍 낭랑을 돌아보면서 싸늘히 물었다.
"아무런 뜻도 없어요. 봉황령을 빌려주기만 한다면, 우리 관계는 지난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을 거예요."
흑영의 물음에 홍 낭랑은 태연히 웃었다.
일순, 싸늘한 살기가 두 여인의 가운데를 황하의 물이 둑을 범람하듯 용솟음치는 것 같았다.
"흥, 우리의 관계? 우리의 관계가 어땠길래? 네가 감히 이제 와서 나를 위협하겠다는 거냐?"
이윽고 흑영이 코웃음 쳤다.
홍 낭랑은 그녀의 힐책(詰責)에도 태연했다.
"그들을 얕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들은 내가 지난 세월, 친히 훈련시킨 고수들이니까……."
"그런가? 네가 훈련시킨 고수들과 내가 훈련시킨 고수들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겠구나."
흑영이 냉랭히 코웃음 치자 홍 낭랑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럼……."
"넌 아직 멀었다. 네가 나를 부르는데 그럼 설마 내가 혼자 이곳에 왔을 것으로 생각한단 말이냐?"
문득 홍 낭랑이 깔깔 웃었다.
"좋아, 좋아! 결국 당신도 나를 믿지 않았으니, 우린 영원히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이로군……. 쳐라!"
돌연 홍 낭랑이 소리쳤다.
그녀의 말과 함께 열두 명의 흑의인들이 신형을 날려 흑영에게로 덮쳐 갔다. 그 움직임은 바람과 같았다. 게다가 그들과 흑영과의 거리는 1장여에 불과하니 한 번의 도약으로 그들은 흑영을 덮칠 수 있었다.
하지만 흑영은 그들을 맞아 싸우지 않았다.
채 무릎을 구부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녀가 슬쩍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그녀의 좌우에서 검은 그림자 둘이 날아들었다. 붕새와 같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든 그 인영들은 일제히 양손을 휘저었고, 그 손짓에 따라 이내 처절한 비명이 일었다.
"저럴 수가!"
그 광경에 홍 낭랑의 안색이 돌변했다.
나타난 두 명의 복면인.
그들의 무공이 상상을 초월하도록 고강했던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복면인들은 다시 손을 쓰면서 그녀가 데려온 고수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으악!"
뒤를 잇는 비명…….
오히려 기습을 당한 꼴이 된 흑의인들은 단숨에 4명의 동료를 잃어버렸지만 당황하지 않고 수중의 장도(長刀)를 휘둘러 일제히 그 두 복면인들을 공격해 갔다.
그들의 반격에 복면인들은 일순 주춤하는 듯했지만 이내 그들 흑의인들의 도진(刀陣) 속으로 뛰쳐들어 손을 썼다. 괴이한 손 그림자가 귀신의 호곡성과 같이 일면서 도광을 튕겨냈다.
"으아악……."
그리고 뒤를 잇는 비명!
열두 명의 흑의인들이 모두 쓰러지는 데는 정말 채 일각이 걸리지 않았다.
상대가 겨우 두 명임에도 그들 열두 명은 그들을 당하기는커녕, 맹수 앞에 선 양 떼처럼 그렇게 안간힘을 다했지만 모두 피를 뿌리고 쓰러졌을 뿐이다. 실력 차이가 현격했다.
뚝!
마지막 흑의인의 목뼈가 복면인의 손아귀에서 부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장내의 비명도 멎었다.
"또 뭐가 남았지?"
흑영이 신형을 틀어 홍 낭랑을 보면서 물었다.
"이, 이건……."
홍 낭랑이 믿을 수 없는 듯 주춤거렸다.
믿을 수 없음이 당연했다.
그녀와 같이 온 12명의 무공은 모두 강호의 일류. 그런데 그런 그들이 저렇듯 허무하게 쓰러질 수가…….
흑영은 차게 웃었다.
"다시 한 번 말해 보지? 뭐가 필요하다고?"
"봉황령!"
홍 낭랑이 지지 않고 소리쳤다.
흑영의 눈빛이 음산히 가라앉았다.
"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큰소리를 칠 수 있는지 두고 보자……."
그녀의 음성이 여운을 두고 깔렸다.
쏴, 쏴아아…….
삼엄하고도 스산한 강바람이 일대를 휘몬다.
갈대밭의 갈대들이 서로 부딪쳐 스산한 분위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효월은 그 갈대밭에 몸을 숨긴 채로 상황을 보고 있었다.
보고 듣느니 놀라운 사실들.
지금까지 들은 대로라면 저 흑영은 다른 사람이 아닌 맹주 부인, 세상에 무공이라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알려진 자면성모 봉설란이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 어디에 지금까지 알고 있던 그녀의 그 현숙하고도 자애(慈愛)한 기품이 있단 말인가.
신비롭고도 차가운 분위기.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세찬 바람에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인다.
홍 낭랑은 굳은 얼굴로 자신의 좌우에서 다가서고 있는 두 명의 복면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흑영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짓눌린 음성.
"혹시나 했더니…… 역시 봉황령은 당신에게 있었군요?"
"네 마음대로 생각하렴, 어차피 내 말은 믿지 않을 테니……."
전신에 흑의를 두르고 복면을 한 두 명의 복면인, 그들의 덩치는 매우 컸다. 그리고 복면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한광(寒光)은 차다 못해서 푸르러 보였다. 무엇인가 특별한 공력을 연수(練修)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자신에게 점점 다가옴을 보자 홍 낭랑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면서 물었다.
"나를 어쩔 생각이죠? 여기서 죽일 작정인가요?"
"글쎄? 네 생각에는 어쩌면 좋을 것 같으냐?"
흑영은 싸늘히 웃으며 되물었다.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하는 탐욕(貪慾)한 성품을 가진 것이 당신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하겠죠? 독고해도 없고, 그도 없는 마당이니 당신이 무엇을 꺼리겠어요?"
홍 낭랑은 지지 않고 냉소를 흘렸다.
흑영은 암암리에 미간을 찡그렸다.
'저 여우가 무엇을 믿고 저렇게 뻣뻣한 것일까?'
그녀는 암중에 주위를 살폈지만 다른 특별한 무엇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잡아."
흑영이 소리쳤다.
말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복면인들이 질풍과 같이 홍 낭랑에게로 덮쳐 갔다. 그들의 움직임은 숙련되어 한 사람은 앞에서 달려들고 다른 한 사람은 그녀의 뒷면으로 날아들었다. 퇴로를 차단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것은 흑영의 외침과 더불어 홍 낭랑이 소매를 휘두른 것이고, 그로 인한 결과였다.
펑!
일진 폭음과 함께 그녀의 주위가 찰나간에 먹장구름과 같은 연기로 뒤덮이고 말았던 것이다.
가뜩이나 어두운 밤에 그런 연기가 피어 오르자 일대는 순식간에 자신의 손가락도 알아보기 힘든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 순간에 흑영은 소리도 없이 싸늘한 기척이 자신에게로 날아듦을 경각하고 슬쩍 신형을 옆으로 물렸다. 신형을 물림과 동시에 그녀의 귓전을 스치며 은광(銀光)이 지나갔다.
검은 연막 속에서 노한 고함과 더불어 연달아 펑펑! 격돌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복면인이 뛰쳐나왔다.
"놓쳤나?"
대답 대신 두 복면인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양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일진 광풍이 일며 그 일대를 휘감고 있던 연막을 삽시간에 흩어버렸다. 그들의 일신 내공은 정말 보기 드물게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홍 낭랑의 모습은 없었다.
거기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오늘은 내가 졌다고 해두지……."
어디선가 홍 낭랑의 음성이 은은히 들려왔다.
그 말을 들은 흑영의 안색이 싸늘히 굳어졌다.
"그렇게 쉽게 네 마음대로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녀가 코웃음을 치는 순간, 용왕묘의 뒤쪽 갈대밭에서 놀란 외침과 비명이 연달아 꼬리를 물고 터져 나왔다.
흑영은 바람과 같이 신형을 날려 용왕묘의 뒤쪽으로 날아들었다.
갈대밭 한쪽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엉망이 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거기 도달했을 때, 엉망이 된 갈대밭을 볼 수 있었을 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피비린내가 은은히 바람에 실려 떠도는 것을 보면 이 자리에서 한바탕 격돌이 있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자세히 살피자 서너 명이 싸운 듯한 흔적을 볼 수 있었고, 그중 누군가가 상처를 입은 듯 핏자국이 선연하다.
흑영은 주위를 돌아보다가 돌연 신형을 불끈 잡아 올려 갈대 위로 올라섰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그 위에 태연히 올라서 주위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절고(絶高)한 경신술(輕身術)을 익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
마침 달이 구름 밖으로 나와서 일대를 돌아보는 데 도움을 준다.
십여 장 밖의 갈대가 심하게 요동하고 있었다.
단순한 바람일 리가 없는 움직임.
그녀의 신형이 바람을 차고 날기 시작했다.
휘이잉-
스산한 바람이 갈대밭을 휘몰았다.
남은 것은 이리저리 쓰러진 갈대밭의 상흔뿐.
그런데 흑영이 신형을 날려 사라진 다음, 갈대 숲 속에서 한 사람이 머리를 들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바로 홍 낭랑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에는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매복까지 숨겨두었다니……."
신음을 흘린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대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누군지를 이 자리에서 알아볼 방도가 없었기에, 우선은 자리를 피해야 했던 것이다.
"헉헉……."
가쁜 숨이 턱에 차 오른다.
홍 낭랑은 비틀거리며 커다란 수양버들의 등걸에 등을 기댔다.
이렇게 하면 추적자에게 흔적을 남기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돌볼 수가 없을 정도로 그녀는 지쳤다.
은은히 주위에 퍼지는 묘한 피리 소리.
아이들이 장난으로 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 소리가 아이들이 부는 것일 리가 없음은 그녀가 익히 아는 바다. 그 소리에 따라 일단의 복면인들이 출몰함을 이미 경험했던 것이다.
그 소리는 자신을 따라오는 포위망이었다.
이미 입은 내상이 계속 무리를 하자 계속 악화되어 이젠 움직이기도 힘이 들었다.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기혈이 끊임없이 울렁거렸다.
"이, 이럴 수는 없어……. 어떻게 이럴 수가? 아무리 봉황문을 장악했다고 할지라도 그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무서운 힘을 보일 수가 있는 거지? 이럴 수는…… 정말 이럴 수는……!"
실성한 듯 중얼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다물며 손을 치켜들었다.
한망이 날카로운 음향을 동반한 채로 앞으로 직사(直射)되어 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 나타난 인영은 그녀의 공격을 어깨를 슬쩍 흔드는 사이에 피해냈다. 그 유연한 신법에 놀란 홍 낭랑이 재차 손을 쓰려고 하자 인영이 낮게 소리쳤다.
'접니다. 기억하지 못하시겠습니까?'
그 소리는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전달되어 경황 중에도 홍 낭랑은 또렷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신은?"
그를 본 홍 낭랑은 눈을 크게 떴다.
한효월이었다.
천만 뜻밖에도 그녀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한효월이었던 것이다.
"우선 이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포위망이 대단합니다."
한효월은 말하다 말고 그녀를 보았다.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에요."
홍 낭랑은 창백한 낯으로 입술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