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首 개방지주(幇之主)
-동평후 도주하다.
드디어 개방의 방주(幇主)가 모습을 드러내다.
콰쾅!
돌연 들려온 일진 폭음.
사람들이 대경실색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폭음은 들려온 것이 앞쪽이 아니라, 그들의 뒤쪽이었기 때문이다.
황급히 뒤로 물러나면서 돌아본 사람들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십이지신상 중 하나인 돼지상이 산산조각 나 흩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피투성이가 된 거한 한 사람이 뛰쳐나왔다.
그는 앞에 있는 사람을 발견하자 대뜸 고함을 치면서 거대한 솥뚜껑 같은 손을 휘둘러 일권을 쳐냈다.
가공할 경풍이 권세를 따라 윙윙거리며 일어났다.
"적이다!"
공격을 받은 사람은 눈치 빠르게 가장 뒤쪽으로 물러나 있던 철면무정 곽자고였다. 뒤쪽으로 물러나 있으면 적과 부딪친다 하더라도 소리만 지르면서 힘은 쓰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뒤에서 적이 튀어나올 줄이야 누가 짐작이라도 했을까.
더구나 나타난 자의 힘은 무지막지하여 그 위세는 가히 배산도해(排山倒海)!
창졸간에 당한 일이다.
부서져 날아오는 돼지상의 돌 조각을 피하는 것만도 급급한 판에 갑자기 적이 공격해 오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옆에 있던 수신호위 둘이 일제히 강도(鋼刀)를 쳐냈다.
철면무정 곽자고도 손을 써 권세에 대항했다.
너무 가까운 데다 창졸간이라 어떻게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개자식들! 여기까지 매복을 하고 있었구나!"
인영은 이를 갈면서 잇달아 칠권(七拳)을 내질렀다.
고오오∼
엄청난 권세가 너울처럼 일어났다.
그것을 본 철면무정 곽자고가 놀라 소리쳤다.
"맙소사, 이산권(移山拳)이로구나!"
펑펑!
격렬한 굉음이 터지면서 철면무정 곽자고는 단 일 격에 피를 토하면서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 순간이다.
"관 대협, 손을 멈추십시오! 적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막강한 주먹을 휘둘러 대는 거한의 앞으로 날아들며 소리쳤다.
한효월이었다.
"응? 자네는?"
그를 알아본 거한이 눈을 꿈벅이더니 주먹을 거두었다.
퉁방울 같은 눈을 부릅뜬 그는 금포(錦袍)를 걸쳤다. 하지만 그 금포는 여기저기 찢기고 피칠을 하고 있어 도무지 형편이 무인지경이다. 게다가 그는 역시 덩치가 큰 한 사람을 부축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그런 위력을 발하니 그의 평소 무공이 어떤 것인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자네도 온 건가? 안 돼! 여긴 함정이야. 사방 천지가 모조리 함정일세. 절대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말게……."
소리치던 그는 한효월을 발견하자 긴장이 풀렸는지 비틀거렸다.
"관 대협!"
한효월이 그를 부축하려 하자 그는 손을 저었다.
"괜찮네. 이까짓 매복으로 나를 쓰러뜨릴 수야 없지! 그보다 내 못난 아들놈이나 좀 봐주게."
거한은 우렁한 음성으로 말하며 부축한 사람을 내밀었다.
탁탑천왕 관웅.
나타난 사람은 바로 얼마 전 한효월과 만난 적이 있었던 탁탑천왕 관웅이었다. 그도 경릉의 안으로 들어갔었던 모양이다.
"관 형제가 많이 다쳤습니까?"
"못난 놈이 함정에 빠지는 바람에……."
탁탑천왕 관웅이 일그러진 얼굴로 대꾸했다.
그가 빠져나온 통로에서 음산한 바람이 불어 나오는 듯했다.
귀를 기울이는 통로 저쪽에서 은은한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였다. 반쯤 허물어진 통로에는 탁탑천왕이 흘린 듯한 피가 묻어 있었다.
소패왕 관패의 전신은 피투성이였다.
"젠장! 면목이 없소. 볼 때마다 이 모양이라니……."
관패가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게 어찌 관 형제의 잘못이겠소? 워낙 상황이 험악하니……."
말하는 일방 그의 맥을 짚어본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렸다.
"내상이 심하군요. 관 형제의 몸으로 이런 상태라니……."
"빌어먹을……."
신음과 함께 관패는 정신을 놓아버렸다.
한효월을 본 순간에 마음이 놓이면서 그만 긴장의 끈이 풀어져 버린 것이다.
"아패(阿覇)! 이놈아!"
탁탑천왕 관웅이 놀라 그를 잡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잠시 정신을 잃은 것뿐입니다."
한효월이 관패의 몇 군데 혈도를 짚으면서 그를 안심시켰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의 얼굴이 납덩이가 되었다.
아직도 긴가민가하던 사람들도 간혹 있었는데, 그들도 안으로 들어갔다면 같은 신세가 되었을 것임을 이제야 실감하는 것이다.
둥둥두우∼웅∼
결단을 재촉하는 북소리는 여전히 고막을 울리고 있다.
침울한 어둠이 일대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둥둥∼ 재촉하듯 들려오는 북소리를 듣는 한효월을 비롯한 군웅들의 얼굴이 모두 납덩이와 같았다.
그처럼 당당하던 탁탑천왕도 경릉을 빠져나와서는 긴장이 풀린 것인지 한쪽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가 일신에 입은 상처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고, 더더구나 아들인 소패왕 관패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할지라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주위에 신경 쓸 여가가 있을 리 없다. 우선 아들을 돌봐야 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한효월이었다.
"저는 이곳을 뚫고 나갈 예정입니다. 다른 생각 있으신 분은?"
"뚫고 나가다니?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소?"
초조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던 철면무정 곽자고가 놀라 물었다.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여기 계신 군웅들은 거의 모두가 중독된 상황이고, 그 중독은 시시각각 깊어져 공력이 감퇴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대로 밤을 지샌다면 아예 그들에게 대항할 힘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겁니다. 어떻게 하든 지금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으음……."
신음이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왔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같이 가실 분은 뒤를 따라주십시오."
그때였다.
"저, 저거……!"
누군가의 경호성이 터졌다.
'저건?'
한효월의 눈에도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곡구의 숲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던 것이다.
"노, 놈들이 우릴 불에 태워 죽일 모양이군!"
"으으…… 악독한 놈들 같으니!"
군웅들이 이를 갈았다.
"그건 아닌 듯하군요. 저건 매복의 배후에서 일어난 불길인 것 같습니다. 불길이 저들의 뒤에서 타오르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인지?"
한효월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방중의 고수들이 온 건가?"
옥면무영이 눈을 빛냈다.
"개방의 고수들이 오기로 되어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제천교에서 흉계를 꾸밀 것을 짐작, 본 방에서는 이미 고수를 소집했었습니다. 저는 척후로서 미리 왔던 거지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군요."
말과 함께 한효월은 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신형을 날렸다.
옥면무영은 두말없이 그 뒤를 따랐고 나머지 개방의 고수들도 마찬가지, 소림, 무당 등의 군웅들이 일제히 밀물과 같이 그 뒤를 따랐다.
* * *
"얼마나 남았지?"
동평후는 앞에 선 곽수를 보며 물었다.
"한 시진이면 모두 반항할 능력을 상실케 될 겁니다. 경릉 주위에 뿌려둔 잠혼독(潛魂毒)은 공력을 쓰면 쓸수록 빨리 발작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공격하면서 뿌린 최혼향(催魂香)과 결합하면 발작이 더 빨라집니다."
"한 시진이라……."
동평후는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한참 남았다.
하지만 상황은 날이 밝기 전에 끝날 터이다.
한효월 일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막강하다 하더라도 오늘의 곤룡대진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나마 이 곤룡대진이 고수들을 사로잡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면 한효월 할아버지라도 이미 쓰러졌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변수가 초래된 것이다.
"무슨 일이야?"
뒤쪽에서 소란스러움이 일자 뒤를 돌아보던 동평후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들의 뒤쪽에서 불길이 일어 타 들어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불을 놓았습니다! 한 군데가 아닙니다!"
전령(傳令)이 날아와 그의 앞에서 부복하면서 소리쳤다.
"어떤 놈 짓이야?"
"그건 모릅니다. 지금 조사……."
"그걸 말이라고 해? 어떻게 곤룡대진 안에서 불이 일어날 수 있나? 당장 침입자를 찾아내!"
동평후가 노해 부르짖었다.
불길은 급속히 번졌다.
숲과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곤룡대진을 치고 있던 동평후 휘하의 고수들은 당황하여 불길을 잡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다.
그 광경을 보며 씨익, 웃는 얼굴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웃고 있는 그 얼굴의 주인은 유성이었다.
"멍청한 놈들! 백날 뛰어봐라. 바람이 불어오는데 네놈들이 끌 재간 있는지……. 이 어르신네는 또 불을 붙여주……!"
중얼거리면서 신형을 돌리던 유성의 전신으로 긴장이 곤두섰다.
차가운 시선 한줄기가 그의 뒤에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흑의경장을 전신에 두르고 한 자루의 보검을 등에다 날렵히 멨다. 얼굴은 온통 검은 몽면으로 가린 여인. 몽면 속에서 눈빛만이 차디차게 유성을 쏘아보고 있다.
바로 요광성주였다.
그녀를 발견하자 유성은 문득 그녀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난 또 누구라고……."
찰나, 유성의 소매에서 한성(寒星)이 그녀를 향해 날았다.
그 행동은 비할 바 없이 빨라 소매가 펄럭이는 순간에 한성은 요광성주의 눈앞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와 유성과의 거리는 2장가량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팍!
그녀가 머리를 트는 순간, 한성은 그녀의 얼굴을 스치며 옆에 있던 나뭇등걸에 박혀들었다.
요광성주의 눈에서 한기(寒氣)가 일어났다.
유성이 그 틈에 이미 눈앞에 있던 나무 뒤로 사라지고 있음을 발견한 까닭이다. 거의 시야를 가린 어둠이라 저 뒤로 사라진다면 찾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이곳은 곤룡대진의 외곽 지역이라 경계 인력밖에 없다.
"흥!"
그녀가 냉소를 터뜨리면서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그녀가 유성이 사라진 나무 뒤로 막 돌아가는 순간,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바보. 걸렸다!"
동시에 뭔가가 그녀의 얼굴을 향해 세차게 날아들었다.
'함정!'
가슴이 철렁한 요광성주는 급히 나무 옆으로 신형을 틀었다.
하지만 날아든 것을 본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말았다.
소나무 줄기였던 것이다. 소나무 뒤로 돌아가 있던 유성은 소나무 가지를 잡아당겼다가 힘껏 공력을 놓아 튕겨냈고, 그 뒤를 따르다 암습이 있음을 경각한 요광성주는 다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잇달아 농락을 당한 꼴이 된 요광성주의 눈에 차가운 한망이 일었다.
눈앞에서 다시 불길이 피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조롱하듯이.
* * *
챙! 채앵…….
불똥이 튀면서 고막을 찌르는 금속성이 터져 나온다.
한효월의 장검이 가는 곳에 있던 철창들이 그 위력을 이기지 못하고 반 동강이 나는 소리였다.
그의 검이 어둠을 가르자 비명이 뒤를 이었다.
검끝에는 어둠 속에서도 뚜렷이 빛을 발하는 검광이 맺혀 있었다. 검 자체가 무슨 신검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정기신(精氣神)이 하나로 되어야 하는 검강이 연속으로 펼쳐져 길을 열고 있었다.
그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한효월의 뒤를 따른 군웅들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는 장창으로 인해서 곤욕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단순한 습격이 아니라, 일격에 이어 다시 이격 삼격이 연환공격으로 이어져 다치는 사람이 속출하는 판이다.
그러나 그들이 힘을 결집하여 앞으로 뚫고 나가자 역시 그 위력은 얕볼 수가 없어서 몇 차례의 접전을 치르게 되자 이미 곡구의 절반가량을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그렇게 되자 군웅들은 신바람이 났다.
"이놈들, 별거도 아닌 놈들이……."
그들이 기세가 등등해진 만큼 한효월의 표정은 굳어졌다.
'매복이 너무 쉽다. 더구나 이런 위치라니…….'
희미한 달빛에 드러난 일대를 일별한 한효월은 공연히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들이 힘을 다해 뚫고 들어온 이곳은 소위 병가에서 말하는 위험 지지였던 것이다.
그처럼 좌우에서 집요하게 날아들던 장창의 공격도 멎었다.
…….
일대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한효월만이 느낀 아주 찰나적인 순간이었다.
그가 주위를 살펴보면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순간에 느닷없이 후미에서 비명이 일었다.
군웅들 가운데에서 혼란이 일고 있었다.
"바, 바닥…… 땅속이다!"
누군가가 다급히 옆으로 튀면서 소리쳤다.
그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그가 물러선 자리, 땅바닥이 쩍 갈라지면서 황갈색의 옷을 입고 땅속에 동화되어 있던 자가 그 안에서 솟아 나왔다. 그보다 먼저 튀어나온 것은 손에 쥔 단검.
불의의 기습에 순식간에 칠팔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한차례 공격을 한 그들은 바람처럼, 마치 그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는 듯이 번개처럼 숲 속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던 것이다.
둥둥둥∼
다시 북소리가 들려왔다.
"허튼짓을 하는군. 모두 죽고 싶은가?"
냉랭한 음성이 어둠을 비집고 그 뒤를 이어 들려왔다.
거구의 흑의복면인 한 사람이 나타났다.
어둠 속이지만 복면 속의 눈빛이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동평후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곤룡대진은 아직 발동되지도 않았다."
팔짱을 낀 채로 그는 군웅들을 쓸어보면서 당당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정작 곤룡대진이 발동하면 누구도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 더 이상 반항한다면 아무도 살려두지 않겠다!"
"목적이 뭐요?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요?"
누군가가 노해 소리쳤다.
"목적? 간단하다. 살고 싶다면 본 교에 투항하라. 그럼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투항하려는 자는 무기를 버리고 숲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럼 맞아들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그때부터……."
"언제까지 그 헛소리를 계속할 작정이오?"
돌연한 음성에 말을 끊긴 동평후는 잡아먹을 듯 한효월을 쏘아보았다.
"원래 이 일은 간단히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네놈이 나타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그것이 잘한 일인 줄 아느냐?"
둥둥둥!
그의 말과 함께 그의 등 뒤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검은 두건을 덮어쓴 자들이 그의 뒤에 일렬로 나타났다. 길을 가로막는 형국. 얼핏 보기에 열두 명인 그들의 손에는 묘하게 생긴 원통이 들려 있어 그 원통의 끝은 군웅들을 겨누고 있었다.
"곤룡대진이 발동되면 처음 나서게 되는 것이 십이혈룡(十二血龍)이다. 한번 보겠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무서운 검광이 그를 엄습해 왔다.
한효월이 검과 함께 그를 덮쳐 온 것이다. 적을 치려면 적의 머리를 치라. 전장의 격언 그대로.
하지만 그가 찰나간에 3장을 가로지르는 순간에 동평후는 이미 그의 등 뒤에 나타난 흑의인들의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겨눈 흑의인들의 원통에서 착! 하는 소리와 함께 무서운 빛줄기가 일제히 한효월을 향해 날아들었다.
거리는 겨우 1장.
일장 호통과 함께 한효월은 검을 휘두르면서 위로 날아올랐다.
팅팅! 소리와 함께 그를 향해 날아들던 무수한 암기들이 사방으로 튕겨져 날았다. 한효월은 검을 휘둘러 암기를 막아내는 동시에 하늘로 떠올라 그들을 위에서 공격하고자 했다. 그 움직임은 놀랍도록 빨라서 그는 순간적으로 이미 흑의인들의 지척에 달해 있었다.
화악!
그러나 그는 좌우에서 무서운 불길이 그를 향해 쏟아짐을 경각한다.
한효월은 튕겨지듯이 옆으로 물러났다.
그 자리에는 바위가 있었다.
하지만 불길은 그 바위에 붙어서도 그냥 타올랐다.
이글거리는 불길 옆에 한효월이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한효월이 한 번의 부딪침에서 이미 부상을 입은 것이다. 더구나 흑의인의 손에 들린 원통들은 그를 겨누고만 있을 뿐, 더 이상 그를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언제라도 그를 죽일 수 있다는 듯이.
"으……."
그것을 본 군웅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한효월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정말 너무도 믿지 못할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가 채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런 모습이 된다면 다른 사람들은 불문가지였다.
가슴이 격하게 뛰는 소리들만 고요를 울린다.
"후후후…… 천심자(穿心刺)는 사람의 몸에 적중되면 바로 심장으로 공격해 들어간다. 공력으로 대항해도 소용없지. 게다가 음염독화(陰焰毒火)는 무엇이라도 붙게 되면 그것을 다 태울 때까지 절대로 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천왕통(天王筒)의 맛보기에 불과하다."
음산한 동평후의 웃음소리가 십이혈룡의 뒤에서 들려왔다.
불길이 어둠을 밝히자, 그들의 가슴에 붉은빛의 룡이 새겨져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붉은빛이 검은 옷에 새겨져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의미하듯 놀랍게도 천왕통이란 것에서 뿜어져 나간 불길은 바위에 붙은 채로 정말로 바위를 태울 듯, 그렇게 푸른빛을 내면서 타오르고 있었다.
한효월은 부상이 가볍지 않은 듯 그 푸른 불길을 받으며 묵묵히 동평후를 바라보고 있는데, 내심 운기조식이라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옥면무영과 일진자, 대조 대사 등이 그를 호위하려는 듯 그의 곁으로 다가서고 있었고 나머지 군웅들도 은연중에 그 옆으로 늘어서는 양상.
그 모습을 본 동평후의 눈빛이 음침해졌다.
분명히 짧은 시간이었고, 대화를 나눌 시간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군웅들이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한효월이 그 짧은 시간 내에 그들의 지휘자로 인정받고 있다는 뜻. 그것은 정말 간단하게 봐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살려두면 후환이 될 자가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에 돌연 그의 뒤쪽에서 일진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격렬하게 들리는 금속성.
동평후의 뒤쪽, 배후에서 싸움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을 느낀 동평후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이 북망산 일대는 특히 이 일대는 그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누가 접근해 왔다면 이렇듯 전혀 몰랐을 리가 없음에도 갑자기 싸움 소리라니?
그러나 그 생각을 오래 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거의 운신을 못할 것처럼 보이던 한효월의 신형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번개처럼 날아올라 다시금 십이혈룡을 향해 덮쳐 가고, 아니, 그보다 그의 손에서 뻗어 나간 검세가 더 빨리 십이혈룡을 덮쳤다.
쏴아앙-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여기도 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옥면무영과 대조 대사, 일진자 등이 일제히 그 뒤를 따랐다.
움직인 것은 거의 동시.
뿐만 아니라 그 뒤를 따르고 있던 탁탑천왕도 같은 순간에 움직여 십이혈룡을 공격했다.
그러한 움직임은 결코 그냥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효월은 운기조식을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움직임을 지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과연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었는지는 당시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고수 칠팔 명이 일제히 날아오르고 그 뒤를 따라 그 말을 전달받았던 나머지 군웅들이 한꺼번에 날아가자, 그 기세는 노도와 같았다.
그 선봉은 당연히 한효월의 이기어검(以ッ馭劒).
검광으로 화한 검이 날아가서 앞에 서 있던 자 둘을 찰나간에 두 쪽을 내버렸고 한효월은 그 검을 따라 그대로 동평후에게로 돌진해 갔다.
그 뒤를 따른 나머지 사람들의 공격이 뜻밖의 공세에 놀라 흩어진 십이혈룡에게로 향했다.
"이, 이럴 수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듯 보이던 한효월의 검이 십이혈룡을 격파하고 눈앞에 이름을 보자 동평후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지금까지 그가 보인 능력은 정말 발군인지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뒤로 숲을 밝히며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 불길 속에서 은은히 비명 소리가 들린다.
급전직하(急轉直下)!
상황은 너무도 돌변해 버렸다.
등 뒤에서 들린 갑작스러운 싸움 소리와 함께 치명상을 당해 움직이지 못할 것으로 보았던 한효월이 갑자기 움직이면서 사태는 완전히 달라져 버린 것이다.
동평후의 눈빛이 달라졌다.
한효월의 공격이 너무 격렬해서 몸을 빼낼 수조차 없었다.
검이 폭풍처럼 들이닥쳤다.
이렇듯 무서운 공격은 정말 처음이었다.
도저히 부상당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공격.
게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격렬한 싸움 소리는 그가 전심전력으로 한효월을 상대할 수 없도록 하기에 족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배후를 맞을 줄이야!
이대로라면 그대로 피를 뿌리고 쓰러질 수밖에 없다.
팡!
갑자기 동평후와 한효월 사이에서 폭음이 일었다.
그리고 나직한 비명과 함께 동평후가 훌쩍 뛰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얼굴을 감싸 쥐고 있는데 복면이 어둠 속에서 너울거림이 보였다. 질풍과 같이 전진하면서 그를 공격하던 한효월이 주춤 그 자리에 섰다.
"다쳤소?"
탁탑천왕이 한효월의 옆으로 날아오면서 외쳐 물었다.
대답 대신 한효월은 십이혈룡이 있던 자리를 일별(一瞥)했다.
군웅들 몇이 쓰러져 있고 불길이 난무하긴 했지만 십이혈룡 중 남아 있는 것은 겨우 두 명뿐이었다.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갑시다!"
한효월이 낮게 소리치면서 다시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런데 그 순간이다.
쾅! 콰쾅!!
지축을 울리는 굉장한 폭음이 일면서 앞쪽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한차례가 아니라 연달아 울린 그 폭발로 아름드리 나무와 바위들이 지푸라기처럼 날아 이리저리 흩어졌다.
무슨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불길과는 아예 차원이 틀린 폭발이었다.
"진천뢰(震天雷)로군!"
옥면무영이 흥분한 음성으로 외쳤다.
격렬한 싸움 소리가 일면서 한 떼의 사람들이 앞쪽에서 달려오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흑의인들이 그들을 저지하는 듯했지만 파죽지세로 밀리고 있었다.
결정적인 것은 방금 좌우에서 터진 진천뢰의 폭발 때문인 듯했다. 곡구의 절반가량이 그 폭발에 날아가 버렸으니 그 위력이야 말해 무엇 할 것인가.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잇달아 급박하게 들리더니 이내 그들을 저지하던 흑의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들과 싸우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옥면무영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가 거지 차림을 한 개방의 고수들이었다.
어둠 속에 드러난 그들의 모습은 얼핏 봐도 7, 80명가량.
그 거지 떼들은 겉모습과는 달리 질서 정연한 모습으로 대오를 형성한 채로 물밀듯이 달려오고 있는데 전혀 빈틈이 없고 상호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어 그 움직임은 감탄할 만했다.
"한 당주(韓堂主)! 방주께서는?"
앞서 달려오는 60대 후반의 거지를 보자 옥면무영이 소리쳤다.
"방주께선 적당의 수괴(首魁)를 쫓아가셨네!"
그 거지가 소리치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를 따르던 거지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져 수색을 시작했다.
날렵한 데다 절도가 있어서 평소 얼마나 엄격한 훈련을 받았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바로 그때.
"방주께서 납시오……."
긴 외침 소리가 들리면서 7, 8명가량의 거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당한 체구를 지닌 그들이 좌우로 갈라서자 한 사람의 중년 거지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그의 출현은 매우 갑작스러워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보일 정도였다. 나타난 그는 침착한 얼굴로 주위를 쓸어보다가 군웅들의 앞에 선 한효월과 눈이 마주쳤다.
한효월도 그를 보고 있었다.
각진 얼굴.
널찍한 그 얼굴에 팔자수염이 보기 좋게 뻗었다.
눈은 굵으면서도 길어 강인한 빛이 갈무리되어 있다.
입은 옷은 오의, 거지가 입는 옷이긴 해도 말 그대로 백결(百結)의 엉망인 옷이 아니라 나름대로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어 그의 기태(氣態)는 어딘지 모르게 당당해 보인다.
"한 대협, 본 방의 방주이시오!"
옥면무영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방주! 이분이 바로 독고 맹주의 사제이신……."
"이름, 익히 듣고 있었소이다. 개방의 황엽(黃燁)이오."
중년의 거지가 한효월을 향해 손을 맞잡아 보였다. 이른바 포권(抱拳)의 예.
개방.
못 사는 사람이 많은 세상.
그렇게 되어 천하를 유리걸식(遊離乞食)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거지의 숫자는 늘어난다. 아무리 잘 살아도 거지는 있기 마련. 언제인가부터 그렇게 거지들의 조직이 하나하나 통합되더니 개방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천하제일의 대방이라 함은 그 힘의 강대함도 있지만 수만에 이르는 실로 엄청난 방도들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날 한차례 혈겁 이후, 개방이 강호상에서 그 모습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할지라도 개방이란 이름은 전혀 쇠퇴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제 한효월도 안다.
개방에 황엽이라 하는 걸출한 주인이 출현하였기 때문임을.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앞에 이렇듯 나타난 것이다.
"과분한 말씀을, 이렇게 구원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한효월도 그를 향해 정중히 포권하였다.
"죄송하오. 예측을 잘못하여 시간에 맞추지 못했소이다. 그 바람에 많은 분들이 피해를 입었으니 모두 이 황 모의 잘못. 여기서 불길이 치솟지 않았더라면 그나마 실기(失機)할 뻔하였습니다."
그 말에 옥면무영이 놀란 눈으로 개방의 방주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 불길이 방주님 때문이 아니었다는 겁니까?"
"그렇다. 그 불길이 아니었더라면……."
바로 그때, 문득 한효월이 미간을 찡그렸다.
"잠시 실례합니다."
말과 함께 그는 그 자리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가 몸을 날림을 바라보던 옥면무영 호일랑은 괴이한 빛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무공은 정말 고절(高絶)하군. 지금도 중상을 입은 듯하더니 금세 아무렇지도 않다니……."
"별로 좋지 않군."
한효월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던 개방주 황엽이 미미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옥면무영이 황엽을 바라보았다.
"그가 상처를 입은 듯 보이는 게 혹, 여러 번이었더냐?"
황엽은 대답 대신 물었고, 옥면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 왜 그렇게 몸을 혹사한단 말인가?"
개방주 황엽은 그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면서 미간을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 * *
한효월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가슴이 세차게 뛴다. 눈앞에서 별이 번쩍인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 띄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구나 그가 방금 들은 소리는 분명히 유성의 비명이다.
그 장난꾸러기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 분명할 터이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무리하게 운기를 하여 경공을 전개.
비명이 들려온 곳으로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원래 그는 동평후를 급습하여 완벽한 승기를 잡은 상태였었다.
그런데 동평후가 마지막에 괴기한 일장을 공격해 온 바람에 거의 양패구상의 형국으로 서로 멈추게 되었었다. 한효월은 충격을 받았고, 동평후는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일검을 맞았다.
그 충격은 오히려 한효월이 더 컸을 정도로 그 일장은 괴기무쌍(怪奇無雙)했다.
체내에 침투한 힘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어 진기를 쓰기가 거북할 정도였다.
가슴을 누르고 크게 심호흡을 하자 다시 기혈이 조금 진정된다.
그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흥! 또 어디로 갈 거냐?"
냉랭한 코웃음 소리.
어딘지 귀에 익은 음성이다.
"쳇, 찰거머리로군……. 여자가 그렇게 남자를 밝히면 이크!"
투덜거리던 음성이 기겁을 한다.
나뭇가지들이 여기저기 부러진 가운데, 8, 9장가량 되어 보이는 바위벽이 우뚝 서 앞을 가로막는다. 좌우로도 움직일 공간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유성이 낭패한 모습으로 등을 붙인 채 앞을 노려본다.
그의 눈앞에는 복면의 요광성주가 유성을 향해서 검을 겨누고 있었다.
유성은 잔뜩 웅크린 채로 한쪽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데, 그 손가락 사이로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핏자국이 보이는 걸 보면 다시 상처가 터졌든지 그도 아니면 요광성주에게 심하게 당한 것이 분명했다.
"한 번만 더 입을 놀리면 혀를 파내 버릴 테다. 잡아라!"
요광성주는 검을 겨눈 채로 싸늘히 외쳤다.
요광성주의 양쪽에 있던 두 명의 흑의인이 좌우에서 유성에게 날아들었다.
요광성주의 검에 공제(控制)당한 유성은 뻔히 그것을 보면서 피할 방도가 없다.
"망할! 그 요부에게 당하지만 않았더라도……."
유성이 일그러진 얼굴로 이를 갈았다.
"으악!"
그런데 그 순간 유성을 향해 달려들던 두 명의 흑의인이 비명을 지르면서 화살에 맞은 기러기처럼 옆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
놀란 요광성주는 갑자기 서늘한 느낌에 전신이 굳어졌다.
검.
한 자루의 서릿발 같은 검이 핏빛을 머금은 채로 그녀의 등 뒤에 다가와 있었다.
그 노림은 요광성주의 목.
놀랍게도 그 검은 그녀와 반 장이나 떨어져 있음에도 가공할 검기가 거미줄처럼 뿜어져 나와 그녀는 감히 반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기만 하면 그 검이 그대로 목을 칠 것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 표표(飄飄)히 옷자락을 날리며 한 사람이 검을 겨누고 서 있었다. 그의 검끝으로는 하늘 저쪽에서 흘러내리는 달빛 한줄기가 아스라이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진다.
정말 멋들어진 광경이지만 불행히도 그 묘한 느낌의 검이 자신을 겨누고 있어 그런 생각은 해볼 엄두도 내지 못한다.
어딘지 창백한 얼굴을 한 그 사람의 모습은 나이를 넘어 표홀(飄忽)하기까지 했다.
"오랜만이오."
그녀가 돌아보자 한효월이 조용히 말했다.
"다, 당신은……?"
"그 아이는 나의 시종이오. 나는 그 아이가 다치는 걸 볼 수가 없소. 그리고 곤룡대진은 이미 파괴되어 당신들이 획책한 오늘의 일은 실패했소."
"그……."
"가시오."
'가라고?'
한효월의 말에 요광성주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고, 공자! 놓아주다뇨? 이 불여우가 얼마나 성아를 괴롭혔는지……."
"지난번의 빚도 있으니 당신을 놓아주겠소. 어서 가시오."
한효월이 다시 조용히 말했다.
"……."
묘한 몸짓으로 한효월을 쳐다보던 요광성주는 갑자기 코웃음 치면서 발을 굴렀다.
일진 바람이 일면서 그녀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공자! 저 여자를 놓아주면……."
문득 한효월이 소리쳤다.
"그렇게 숨어 있지 말고 용기있게 나서는 게 어떤가?"
동시에 폭죽 같은 검광을 일으키면서 그의 손에서 검이 옆의 숲 속으로 날아들었다.
섬광일순(閃光一瞬)!
콰콰콰-
검이 날아들고 거대한 굉음이 일면서 숲의 아름드리 나무들이 이리저리 무너졌다.
"어떤 놈이야?"
유성이 그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쫓아가지 마라, 그는 이미 갔다."
등 뒤에서 한효월의 음성이 들려왔다.
"공자!"
그 음성이 어딘지 이상함을 느낀 유성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다가 놀라 소리쳤다.
한효월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마치 무너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상했다.
이기어검술은 기(氣)로써 검을 조종하여 수십 장 밖에 있는 사람의 목도 취할 수가 있다. 그러한 검도(劒道)는 최상승이라 검은 시전자의 손에서 떠날 수가 없다. 그런데 날아갔던 검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은 한효월이 검을 쳐내기는 했어도 검을 회수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뜻.
어느새 쫓아간 건지 소백이 한효월의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공자, 이게 어떻게 된……!"
"그를 건드리지 말거라."
침중한 음성이 옆에서 들려왔다.
빛 바랜 황의를 입은 중년인이 어느새 나타난 건지 유성의 뒤에 우뚝 서 있었다. 각진 얼굴에 팔자수염이 위엄있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가 나타나면서 거지 차림의 장한들이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나는 개방의 방주인 황엽이다."
유성이 경계하며 한효월의 앞을 막아서자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개, 개방의 방주?"
유성의 눈이 커졌다.
그는 강호에 나와 소식을 알아보는 역할을 했었다.
자연히 여기저기 귀동냥을 제법 했으니, 강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개방을 부흥시켰다는 그 신비로운 개방 방주에 대해서도 이미 들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앞에 나타날 줄은 상상 밖.
그러니 놀랄 수밖에 없다.
"네 주인은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기를 사용하여 기력을 소진했다. 더구나 진원지기(眞元之氣)의 소모까지 무릅썼으니 무엇 때문에 이런 무모한 짓을 했는지 모르겠구나. 지금 그를 건드리면 자칫 주화입마에 빠질 우려가 있을 것이다."
개방의 방주 황엽은 한효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일룡(一龍)."
"예, 방주님!"
"그를 지켜라. 누구도 그를 다치지 못하게."
"존명!"
말과 함께 그를 따라왔던 9명의 거지 장한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분명히 금방 달려가는 것을 봤는데도 금세 종적이 묘연하다. 절묘하게 몸을 숨기고 주위를 감시하기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나의 수신구룡(隨身九龍)이 지켜줄 것이니, 네 주인을 잘 지키도록 해라. 나는 처리할 일이 있어서 잠시 안쪽으로 가봐야겠다."
"감사합니다, 방주!"
유성이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였다.
그 모습에 황엽은 미미하게 웃었다.
"감사는 무슨. 네 주인은 보호받아 마땅한 분이다."
말과 함께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짐과 동시에 인기척이 소리없이 빠져나가는 것을 유성은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보니 그는 수신구룡 외에도 다른 사람들을 거느리고 온 모양이었다.
"강호상에서 말하길 당금 개방의 방주가 신룡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니 정말 소문은 명불허전이로구나……."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면서 유성이 감탄을 흘려냈다.
저 멀리 하늘 저쪽으로 서서히 어둠이 물러가고 있음이 보인다.
악몽의 밤이 물러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