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首 시황지궤(始皇之詭)
-동평후 나타나다.
몰려드는 군웅(群雄)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라.
한효월은 심각한 빛으로 장보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유성이 처음 몸을 숨겼던 나무 위에 올라와 있다.
사방이 탁 트인 곳이라 은신하기 좋았고, 이미 적들이 한번 발각했던 곳이라 다시 찾아올 염려도 별로 크지 않아 허허실실의 묘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유성은 심드렁한 빛으로 한효월을 힐끔 쳐다보았다.
장보도가 가리키는 곳이 어딘지를 먼저 알아내고, 가능하다면 그 내부 사정까지 알아보고 움직이겠다는 것이 한효월의 생각이었다.
결국 그들은 이 나무 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유성은 누가 오나 안 오나, 따분하게 망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으흐……."
문득 하품이 나온다.
상처 조금 입었다고 이런 상황에서 피곤하거나 하품을 할 그가 아니다. 그런데 하품이라니…….
그러고 보니 좀 노곤하기도 했다.
'망할! 그 요부에게 정기를 빼앗겨서 그러나?'
내심 이를 갈던 유성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그 기괴하던 경험이 뇌리에 떠오른 것이다.
춘약에 중독되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충격적인 첫경험이 쉽사리 뇌리에서 사라질 리가 없다. 여인의 나신이라고는 산속 마을에서 처녀가 목욕하는 걸 힐끔 한 번 본 게 다였다. 그나마도 하도 오래되어 기억에서조차 사라질 정도였는데…….
공연히 가슴이 다시 뛴다.
'빌어먹을, 춘약이 아직 남아 있는 건가?'
눈앞에 희뿌연 명부음희의 나신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자 유성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 모양을 묘한 표정으로 소백이 들여다본다.
머리를 흔들다가 그 눈과 마주친 유성은 픽, 웃었다.
"뭘 보냐?"
그리곤 대뜸 머리를 쥐어박았다.
"찍!"
소백이 인상을 팍 쓰면서 대들었다.
"어라, 이놈 봐라? 주인님에게 네가 덤벼서 어쩔 거냐?"
말과 함께 유성은 다시 소백의 머리를 쥐어박는다.
공연한 분풀이에 소백은 이를 드러내 보였다.
딴엔 위협을 한다고 하는 거지만 유성의 눈에 그게 겁날 리가 없다.
그러나 소백과 장난을 치던 유성의 눈에 돌연 긴장의 빛이 인다.
무엇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크으윽……."
비틀비틀, 한 사람이 신음을 흘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50대의 노인.
수중에 판관필(判官筆) 한 쌍을 들고 있다. 그러나 피 묻은 판관필은 힘없이 늘어져 있었고 그의 가슴팍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한효월과 유성이 은신하고 있는 아래에 이른 그는 인기척을 느끼고 흠칫 눈을 들다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소리를 치고자 하지만 소리가 제대로 입을 통해 나오지 않는다. 그의 손에서 판관필이 떨어졌다.
그의 가슴을 관통한 검을 쥔 자의 안색은 얼음과 같다.
흑의검수.
"흐으……."
낮은 신음을 흘리며 노인이 무너져 내렸다.
차가운 빛으로 그를 내려다본 흑의검수의 뒤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서너 명의 흑의인들이 숲 속 어둠 속에서 바람처럼 나타나 날아들었다.
"……."
흑의검수는 수중에 든 검을 흔들어 검에 맺힌 핏방울을 뿌려내면서 말없이 그들을 쓸어보았다.
"죄송합니다!"
"일대를 수색하고 있지만 흔적이 없습니다."
"멍청한 놈들."
흑의검수가 냉랭히 중얼거렸다.
그의 질타에 흑의인들이 묵묵히 머리를 숙였다.
"한낱 꼬마를 가지고, 이게 무슨 짓이야? 멍청한 계집……."
내뱉듯 중얼거리면서 흑의검수는 싸늘히 주위를 쓸어본다.
바로 그 순간이다.
"설마, 그것이 나를 말하는 건 아니겠죠, 옥형성주?"
영롱한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일진 향풍(香風)이 스치면서 한 사람이 표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흔들리는 풀잎을 밟으며 나타난 것은 여인이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용모, 궁장으로 틀어 올린 머리는 봉잠(鳳簪)으로 화려하지만, 놀랍게도 몸에 걸친 것은 검은 휘장과도 같은 망사 나의뿐이라 백옥과 같은 나신이 은은히 드러나 보인다.
실로 가슴이 떨리는 광경.
"낭랑께선 미처 옷을 입을 여가조차 없었던 모양이군요?"
그녀를 보자 흑의검수가 냉랭히 중얼거렸다.
그는 과연 제천교의 옥형성주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바로 명부곡의 명부음희였다.
한효월의 손에 일패도지(一敗塗地)하여 혼비백산 도주했던 그녀가 옷을 걸친 듯 만 듯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호호호…… 그런가? 그럼, 성주가 내 옷을 가져다 주겠어요?"
명부음희가 깔깔 웃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망사 나의 속에 자리한 풍만한 유방의 출렁거림이 옷 속으로 훤히 들여다보인다.
"낭랑. 이곳은 온유각(溫柔閣)이 아니오."
옥형성주가 미간을 찡그린 채로 말했다.
"여기는……."
그 말에 명부음희가 냉소를 쳤다.
"교중의 일을 함부로 입에 올리다니……."
그 말에 옥형성주는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뭣들 하는 게냐? 빨리 수색을 계속하지 않고!"
그는 갑자기 발을 구르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녀와 상대하고 싶지 않은 듯한 모습.
"흥! 건방진……."
그가 사라지자 명부음희는 냉소를 흘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 그녀는 가슴을 부여잡는다.
"음……."
그녀의 입에서 흐르는 나직한 신음.
"정말 절옥장력(切玉掌力)…… 그가, 그 사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그녀는 괴이한 빛을 얼굴 가득 떠올린 채로 중얼거렸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었던 사람. 곁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던 사람. 그가 자신을 떠나면서 그녀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녀 자신마저도.
그녀는 문득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더 이상 생각하기 싫다는 듯.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조금 전, 옥형성주에게 죽임을 당한 노인뿐.
괴괴한 정적이 숲을 감돌았다.
"……."
그 광경을 지켜보는 한효월의 안색은 굳어 있었다.
그들이 이렇듯 마음대로 횡행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상황이 심상치 않은 상태에 이르러 있다는 말의 반증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실 거죠?"
명부음희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던 유성이 물었다.
"넌 여기서 조금 더 쉬도록 해라."
한효월의 말에 유성의 눈이 동그래졌다.
"뭔 말씀이세요? 저 혼자 여기 있으란 거예요?"
"지금 네 몸은 정상이 아니다. 그 몸으로 움직이면 저들의 표적이 될 뿐이다. 다행히 명부음희의 치료는 쓸 만했으니 원기 보전만 잘해주면 빨리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무리하게 움직이면 상처가 덧나게 될 테니 지금은 움직이지 않는 게 좋다."
"치료는 무슨……."
입이 툭 튀어나온 유성이 툴툴거렸다.
"이걸 한 시진마다 한 알씩 먹고, 기운이 회복되면 일단 이곳을 벗어나 있거라. 절대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자기병을 하나 꺼내 건네준 한효월의 모습이 나무에서 날아 사라졌다.
유성은 손에 들린 자기병을 들여다보았다. 작고 힘찬 글씨로 <고원단(固元丹)>이란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쩝, 아예 정력을 다 빨린 것처럼 생각하시나 베……!"
투덜거리던 유성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그 생각을 하자 불현듯 금방 나타났다 사라진 명부음희가 생각났고, 그러자 이내 그 풍만한 나신이 뇌리에 떠오른 것이다.
출렁이던 유방과 그 기이한 느낌.
"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유성은 소스라쳐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빌어먹을!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속물이었나?"
자신의 머리를 두어 대 쥐어박은 유성은 입술을 물었다.
"찍?"
옆에서 소백이 뭐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쏙 빼밀고 눈알을 깜박거리고 있는 폼이 뭐 하냐는 듯한 표정이다.
"네가 그건 알아서 뭐 하냐?"
대뜸 소백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은 유성은 자기병을 열고 그 안에서 세 알의 고원단을 꺼내서 한입에 털어 넣고는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너, 망 잘 봐."
한마디를 남겨두고서.
그 다음 말은 하지 않아도 자명했다.
기운 차린 담에도 내가 여기 박혀 있으면 유성이 아니지…….
* * *
한효월은 장보도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유성의 말대로 함정을 파기 위해서 만들어놓았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그 장보도는 단순히 위치만 표시된 것이 아니었다. 아주 자세한 것은 아니지만 장보가 있는 곳의 건축 내부 도면까지 그려져 있어 그 대강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도면대로라면 장보가 숨겨져 있다는 곳은 일이십 년의 노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과연 이 함정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그토록 오랜 시간을 투자했을까?
그럴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효월은 비운축전의 신법을 전개하여 옥형성주가 사라진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흑의인들, 제천교도의 모습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괴이하게도 정작 무림인들의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사이에 그들 모두가 횡액을 당했단 말인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효월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감천형의 부탁을 받아들여서 강호에 나온 것은 얼굴도 못 본 자신의 사형 대신에 무림의 겁난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의미에 다름이 아니다.
미지의 적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 그 일은 점점 어려워지는 듯했다. 적은 예상보다 더욱 강하고 거대한 듯하였다.
하긴 적의 실체조차 아직 알아내지 못하고 있지 않던가.
시간이 갈수록 그것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옥형성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멍청한 놈들……."
옥형성주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앞에는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 일대에는 이미 곤룡대진(困龍大陣)이 발동되어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다. 그런데도 그까짓 놈들의 종적 하나 찾지 못한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윽!"
고두(叩頭)하던 흑의인 하나가 옥형성주의 손짓에 거꾸러졌다.
"밥통들! 당장 흩어져서 찾아내!"
그의 고함에 흑의인들이 놀란 기러기처럼 흩어졌다.
"이 개자식, 이번에는 절대로 벗어나지 못한다. 반드시 잡아서……."
그들이 사라짐을 보고 중얼거리던 옥형성주는 문득 괴이한 느낌에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들려온 나직한 웃음소리.
"왜 더 계속하지 않나?"
"너, 너는!"
놀라 뒤를 돌아본 옥형성주는 자신과 채 일 장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서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한효월을 발견하고는 놀라 번개처럼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한효월은 그를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가 물러나는 순간에 바람과 같이 그에게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 서 있는 듯한데 이미 옥형성주의 코앞에 도달하는 놀라운 신법, 그것이 내가(內家)의 상승신법인 이형환위(移形換位)임을 옥형성주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늘 느긋하던 한효월이 자신과 마주 서자마자 득달같이 덮쳐 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의 무공이 어떤지 옥형성주는 너무도 잘 안다.
가슴이 섬뜩해진 그는 물러서던 서슬에 옆으로 반 걸음 움직였다.
차아앙!
동시에 그의 허리에서 번갯불과 같은 검광이 폭사되어 한효월을 무찔러 갔다. 그 속도는 참으로 놀라워서 찰나간에 이미 삼검칠초가 그 가운데서 벼락처럼 일어나 한효월을 덮었다. 앞으로 찔러내는 일검에 그러한 변화가 순식간에 일어나니 그의 쾌검은 가히 일절이라 할 만했다.
"넌 속았다."
그러나 그 가운데 낭랑히 들려오는 한효월의 웃음소리.
여전히 크지 않은 음성이고, 태연한 모습.
검이 자신의 가슴을 찔러오는데도 조금도 겁을 내는 빛이 없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말에 코웃음을 쳤을 옥형성주다.
하나 그의 능력을 이미 알고 있는 옥형성주는 가슴이 섬뜩하여 앞으로 찔러가던 검을 비틀어 검광을 퍼뜨리려고 했다. 공격하던 초식이 방어를 겸하는 것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순간적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그가 이미 준비한 것이기도 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자신의 일초가 성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검초가 변하는 것과 같은 순간에 한효월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서 송곳처럼 날카로운 지력이 일어나 딩딩! 하는 소리와 함께 변화하는 옥형성주의 보검을 쳐 진동을 일으켰다. 검세가 채 변화하지 못하고 밀리며 빈틈이 드러났다.
팡!
일진 폭음이 일며 옥형성주에게서 묵직한 신음이 일었다.
한효월의 일격이 찰나간에 밤하늘을 달리는 번개와 같은 속도로 날아들어 그의 가슴을 친 까닭이다.
"크윽……."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옥형성주를 덮쳐 가면서 한효월이 다시 웃었다.
"겁쟁이, 넌 또 속았다!"
그의 일격이 여전히 옥형성주를 덮쳐 가자 옥형성주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그의 능력이라면 이렇듯 단 일 초에 일패도지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효월의 심계(心計)에 말려서 손도 써보지 못하고 일격을 당한 것이다. 이 마당에 열 내고 싸우고 할 정신이 있을 리가 없다.
번개처럼 몸을 굴리자, 옆에 있던 아름드리 나무가 폭음을 내면서 전신을 뒤흔든다. 나뭇잎이 미친 듯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틈을 타서 옥형성주는 죽어라 도주했다.
"어딜 가느냐? 목을 내놔라!"
한효월이 소리쳤다.
그러나 소리만 칠 뿐, 실제로 그의 움직임은 느긋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인 것이다.
"크으윽……."
옥형성주는 이를 악물었다.
호신진기가 몸을 보호했지만, 그럼에도 갈비뼈가 한두 대 정도는 부러진 것 같았다.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이런 정도라니…….
그가 한효월을 만나 손도 못 써보고 혼비백산, 도주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의 앞쪽으로 큰 무덤 하나가 보이고, 숲으로 둘러싸인 그 무덤 주변에 사당[廟] 하나가 존재했다. 퇴락한 사당은 어둠 속에서 괴물처럼 음침히 자리하고 있었다.
"누구냐?"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십여 명의 흑의인이 나타났다.
"동평후(東平侯)는 어디 계시냐?"
그들을 보면서 옥형성주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무슨 일이십니까?"
"비켜, 너희들이 알 일이 아니다!"
옥형성주가 앞을 막은 흑의인을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죄송하지만 통보없이 안으로 들어갈 순 없습니다."
한 흑의인이 나서며 앞을 가로막았다.
"뭐가 어째?"
옥형성주의 눈빛이 음침히 가라앉았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순간, 흑의인의 말끝이 잦아들었다.
옥형성주의 검끝이 그의 목젖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만 더 한다면 네놈의 목을 날려 버리고 말겠다. 그래도 네놈이 감히 본 성주의 앞을 가로막겠느냐?"
그가 음산히 말하는 순간,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절차를 밟지 않고 무슨 짓이에요?"
흑의인들의 뒤에서 십여 명의 옹위를 받으며 복면의 흑의인 한 사람이 나타났다. 차가운 눈빛의 요광성주였다.
"놈이 나타났다."
"놈이라니?"
옥형성주의 말에 요광성주의 눈에 의혹이 드러났다.
순간.
"누가 나타났다는 건가?"
침중한 음성과 함께 사당 속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로 이런 소란인가? 그놈을 잡았단 말인가?"
당당한 거구.
역시 복면을 하여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 눈 속에서 빛나는 눈동자는 화등잔과도 같다.
"그 꼬마가 아니라, 한효월이 나타났습니다. 놈이 장보도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복면거한의 음성은 이어진 옥형성주의 다급한 소리에 돌변하고 말았다.
"놈이? 지금 어디 있나?"
"제 뒤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이리로 유인해 왔는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평후라는 복면거한은 손을 저었고, 놀란 밤새와 같이 사방에서 흑의인들이 앞으로 밀려 나갔다. 동시에 숲을 타고 번지는 날카로운 호각 소리!
"성주(星主)는 곤룡대진의 북방을 맡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연락도 없이 무단으로 자리를 비웠다는 말인가? 설마,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동평후가 옥형성주를 돌아보면서 질책했다.
"놈이 장보도를 가지고 능으로 간다면 일이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 마당에 어떻게 한가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습니까? 저는 놈을 유인하기 위해서 놈과 싸우다 상처까지 입었습니다."
옥형성주가 일그러진 얼굴로 항변했다.
"……."
그를 바라보던 동평후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이내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회색장삼의 문사를 보았다.
"계획은 차질이 없겠나?"
"군웅들이 이미 거의 모두 경릉(景陵)에 모여들었습니다. 그 외곽으로 곤룡대진이 포설 중에 있으니,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장보도가 누출되었다 할지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회의문사가 조금 갈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능은 언제 열리나?"
동평후가 뒤의 문사에게 물었다.
창백한 얼굴의 회의문사는 나이가 50대 후반으로 보였다.
팔자수염을 기른 그는 매부리코에 가늘게 자리한 눈을 가졌다. 그 눈빛은 음침하면서도 안정되어 전형적인 모사(謀士)의 형상. 동평후의 측근에서 모든 계획을 세우고 집행하는 지낭(智囊)인 곽수(郭秀)가 바로 그다.
동평후의 질문에 그는 침착한 어조로 답했다.
"이미 군웅들이 풍음곡(楓吟谷)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장보도를 잃어버렸으므로, 말썽이 나기 전에 계획을 앞당겨 경릉을 개방할 겁니다. 이미 사람을 파견하여 앞 다투어 들어가도록 해두었으니, 그걸 본 자들이 조급한 마음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겁니다. 그럼 그때 곤룡대진이 발동하면 될 것입니다."
"음……."
고개를 끄덕이던 동평후는 옥형성주를 보았다.
"상처가 심하오?"
"견딜 만합니다."
약세를 보이기 싫은 옥형성주가 냉정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좋아. 그럼 지금 바로 요광성주와 함께 출발하시오. 나는 곤룡대진의 포설을 끝내고 뒤따라갈 테니까."
말은 부탁인 듯하지만, 오늘의 주장(主將)은 그이므로 그 말은 명령에 다름이 아니다.
요광성주가 앞서고 옥형성주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막 자리를 뜨는 순간에 흑의인 하나가 바람처럼 날아들어 동평후의 앞에 부복했다.
"어떻게 되었나?"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오지 않았다는 것이냐?"
"이 일대를 이 잡듯 수색했지만……."
"계속해서 찾아보도록 해라."
"예!"
짧은 대답과 함께 그가 사라졌고 이내 예의 호각 소리가 뒤를 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 흑의인이 사라진 숲을 바라보면서 동평후가 말했다.
"생각하신 대로일 수도 있겠습니다."
"역시…… 일부러 쫓아보내고 뒤를 따라왔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의 종적을 확인하기 위한……."
"끝내 놈이 말썽이군! 잡을 수 있을까?"
동평후가 발을 구르며 눈에서 불길 같은 신광을 쏟아냈다.
"장보도를 가졌다면 갈 곳은 한 군데뿐이겠지요."
"경릉?"
"그렇습니다."
그 말에 동평후의 눈빛이 음침하게 가라앉았다.
"제 발로 무덤으로 간단 말이지? 흐흐흐……."
그의 입에서 절로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그들이 마련한 함정이 그만큼 무섭다는 것을 의미했다.
* * *
한효월은 과연 그들의 예측대로 적정탐모(賊情探摸)를 위해서 옥형성주를 쫓아왔었다.
그러나 천청대법(天聽大法)으로 그들의 대화를 대강 들은 그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의 수색을 피하기도 힘들었지만, 사람들이 떼죽음을 하게 된 마당에 나몰라라 할 수가 없어서 그쪽으로 달려가야 했던 것이다.
풍음곡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했다.
단풍을 음미한다는 말 그대로 이곳의 경치는 절가(絶佳)하였다.
거대한 산자락을 병풍처럼 두르고 아늑하게 자리한 골짜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올 절경에다, 천하의 명당으로 보인다. 그런 자리이니 그냥 버려져 있을 리가 없다.
동산과 같은 능묘(陵墓)는 그 풍음곡 안에 자리한다.
십이지신상의 석물(石物)이 묘를 지키며, 사당이 마련되어 영혼을 진(鎭)했다. 경릉이라 불리는 이 능묘는 지난날 제후의 묘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세월이 너무 오래 흘러 제사를 지내는 사람마저 없고, 사당은 물론이고 석물조차 제 형상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늘 고요하기만 하던 이곳.
하지만 며칠 전부터 어딘지 모르게 긴장이 감돌던 이곳에서 피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얼마 전부터였다.
한두 명씩 근처에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 것이 시작이다.
그것이 어제부터는 능묘를 중심으로 부쩍 사람들이 많아졌고, 반 시진 전부터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다툼이 일더니 격렬한 싸움이 일어났다.
검도가 난무하는 곳이라면 필연적으로 피보라가 인다.
더구나 그들이 노리는 것이 모두 하나라면 더 더욱.
산새가 울고, 싱그러운 산들바람이 불던 곳.
그러나 이제 이 능묘에 가득 찬 것은 검광과 거기서 풍겨 나오는 삼엄한 살기(殺氣)뿐.
<경릉(景陵)…….>
이곳이 어딘가를 알리는 석비(石碑) 하나가 우뚝 했다.
높이가 일 장이나 되어 보이는 그 석비는 이 무덤의 주인이 생전 영화가 예사롭지 않음을 말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돌 거북의 등에 올려진 그 석비, 풍화에 시달려 마모된 석비는 원래 있던 자리에 있지 않았다.
능묘의 앞을 지키고 있던 그 석비는 거대한 손에 밀리기라도 한 듯이 뒤로 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있던 자리에는 검은 구멍이 보인다.
단순히 석비가 뽑혀 생긴 구멍이 아니었다.
넘어진 석비가 있던 그 자리에 생긴 구멍의 아래로는 길게 돌 계단이 뻗어 있는 것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그 자리를 둘러싸고 수십 명의 무림인들이 각기 긴장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핀다.
그중 앞선 몇 사람의 앞, 넘어진 석비의 주위에는 이미 서너 명의 무림인들이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음이 보인다.
"대체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 것이오?"
문득 한 사람이 소리친다.
훌쩍한 큰 키를 가진 70대 청의노인이다.
"지주귀도는 이미 안으로 들어갔다는데, 여기서 이렇게 서로 노려보고 있으면 뭘 어쩌겠다는 게요? 어차피 보물은 덕있는 사람만 차지하게 될 터인데 더 이상 이렇게 있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소."
말과 함께 그는 성큼성큼 걸어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 그의 앞을 중년의 승려 한 사람이 막아섰다.
"아미타불…… 시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십시오."
그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아 서자 청의노인은 돌연 음산한 웃음을 머금었다.
"소림의 고승께서 무슨 일이신가?"
"고죽 노사(枯竹老師)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만, 아직 논의가 끝나지 않은 마당에……."
"큭큭큭…… 의논은 무슨 의논? 소림무당이 작당을 해서 안으로 먼저 들어갈 의논 말인가? 다른 사람이 들어가려면 무조건 가로막으면서 무슨 얼어죽을 의논이야."
"아미타불, 그건 오해입니다. 우리들은……!"
"으악!"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한 사람이 피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군 그는 40대의 도사(道士)였는데 석비의 주위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의 목에서는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살아남을 수 없는 상처였다.
"무, 무슨 일이오?"
사람들이 놀라서 허둥거렸다.
바로 그 순간이다.
한 사람이 군웅들의 틈에서 튀어나오더니 바람처럼 사람들 틈을 통과하여 구멍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뭐, 뭐야?"
"저거 어떤 놈이야?"
순간, 한 사람이 다시 득달처럼 그 구멍을 향해 내달았다.
"멈추시오!"
서너 명의 도인들이 일제히 발검하여 그 사람을 공격했다.
"이런 빌어먹을! 무당파가 이 망산의 주인인가? 누구 맘대로 멈추라 마라야? 당장 비키지 못할까?"
60대의 그 회포노인은 도인들의 검에 의해 저지를 받자 노해 소리쳤다.
그 말이 신호가 되기라도 하듯이 칠팔 명의 인영이 날아 나왔다.
"여러분, 무슨 짓입니까? 처음 약속대로 조사를 해본 다음에……."
"조사는 당신들이나 해!"
"우린 안으로 들어가 봐야겠소."
"설마, 소림, 무당…… 구대문파가 보물을 독차지하겠다는 속셈인가?"
고함 소리와 함께 2, 30명의 무림인들이 떼거지로 몰려나왔다.
군웅들의 기세는 흉흉했다.
무림을 질타하는 그들의 움직임은 단순한 데가 있었다.
군중 심리에 휩쓸리기 쉽다는 것.
입구를 지키던 사람들의 안색이 달라졌다.
십여 명이 앞으로 내달리자, 뒤질세라 군웅들이 일제히 그 뒤를 따르는데 얼핏 봐도 백여 명은 넘어 보이는 것이다. 그 뒤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도 형(道兄)?"
초로의 승려 한 사람이 옆에 있던 도인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무조건 싸울 수야 없지 않겠소?"
그들은 머리를 흔들며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사람들이 노도와 같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입구는 좁아서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자연히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먼저 들어가겠다고 밀고 당기는 접전이 벌어졌다.
"으악!"
그 와중에 터지는 비명 소리.
"감히 어떤 놈이 노부 앞에서 설치는 게냐?"
음산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소한 체격의 녹포노인이 입구에서 사방을 둘러보고 있다.
대머리에 염소수염을 길렀다. 쥐눈에다 체구도 작아 생김새 자체로는 전혀 겁나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의 앞에 쓰러진 사람은 강서의 거효(巨梟)라고 하는 음혼귀수(陰魂鬼手). 그러한 고수를 쓰러뜨린 그가 평범한 사람일 리 없다.
"귀마(鬼魔)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사람들이 놀라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귀마라는 별호가 그만큼 힘을 가진 까닭이다.
너무 평범한 모습이라 사람들의 눈에 오히려 잘 띄지 않는 존재. 그러나 그의 심성은 너무도 잔혹해서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누구도 살려둔 적이 없다. 그러한 그를 귀마라고 부르는 이유는, 낮에는 거의 출입을 하지 않고 밤에만 움직이는 까닭이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는 그의 위세를 자랑하기 위한 곳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되지 못하게 설치는 음혼귀수의 목을 꺾어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하 통로 속으로 사라졌다.
주춤거리던 사람들이 그가 사라지자 밀물처럼 그 뒤를 따랐다.
"우리도 들어가야 하지 않겠소?"
소림사의 고수들을 이끌고 있는 대조 대사(大照大師)가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무당파의 일진자(一眞子)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하오만……."
일진자가 미간을 찡그렸다.
바로 그 순간이다.
저 멀리서 우렁찬 장소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가 처음 들려온 곳은 매우 먼 듯했지만 그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한 사람의 모습이 풍음곡 안으로 들어서고 있음이 목도되었다.
놀라운 신법이었다.
경릉의 지하 통로 안으로 들어가던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순간.
"모두 멈추시오!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 인영이 질풍노도와 같이 장내로 들이닥치면서 고함쳤다.
"넌 뭣 하는 놈이야!"
좌우에서 돌연 검은 인영 몇이 날아올라 그를 맞았다.
퍼펑!
터져 나오는 폭음과 함께 그들은 날아올랐던 것보다 더욱 빠르게 튕겨져 나갔다.
단숨에 그들을 격퇴시킨 백영은 허공에서 재주를 넘으며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듯이 쭉쭉 뻗어 나가 칠팔 장을 나아가더니 넘어진 석비의 옆에 있는 십이지신상 중, 호랑이 상의 위에 내려섰다.
펄럭이는 흰 유삼에 별빛 같은 눈동자를 가진 청년.
바로 한효월이었다.
그는 손에 든 양피지를 사람들에게 들어 보이면서 소리쳤다.
"이것은 진시황릉의 장보도입니다!"
침묵…….
소란스러웠던, 그처럼 격렬했던 능의 주변에는 돌연 정적이 찾아왔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 위력을 보일 수 없을 터이다.
단 한 마디로 그처럼 시끄러웠던 장내를 쥐 죽은 듯 가라앉혀 버릴 수는.
서로 앞 다투어 안으로 들어가려던 자들을 비롯,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한호월을 쳐다보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의 손에 들린 양피지를 보았다.
그가 나타나면서 외친 말은, 충분히 그들을 놀라게 할 만했다.
장보도라니!
하지만 다음 순간,
"그까짓 장보도가 무슨 소용이냐? 이미 장보지지(藏寶之地)가 밝혀졌는데……!"
한 사람이 코웃음 쳤다.
다시금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장보도라는 것은 보물이 감추어진 곳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미 그곳이 밝혀진 이상, 그 장보도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한효월은 굳은 얼굴로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여러분은 여기가 진시황의 장보가 묻힌 곳으로 생각하십니까?"
그의 음성은 크지 않았지만 장내의 어느 누구도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음성에는 중기(中氣)가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는 답변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시황의 능은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즉위 초부터 섬서의 려산(驪山)에다가 자신의 능을 만들게 했습니다. 이곳에 진시황의 능이 존재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의 말에 몇몇 사람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일에 대해서는 이미 해명에 가까운 그럴듯한 소문이 퍼진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진시황릉은 가장 거대한 능묘로서 건축되었다.
약 70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만들어진 이 황릉은 려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다. 후일 병마용갱(兵馬俑坑)이 발견되어(1975년) 그 전설이 실재함을 증명하지만, 그 이전부터 저 거대한 구릉이 진시황의 능일 것이라는 소문은 세간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나 지주귀도가 진시황릉의 장보도를 가지고 다니면서 뒤를 따른 소문은 귀를 솔깃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세상에 알려진 그 려산능이 후일 도굴될 것을 염려한 진시황은 자신이 모았던 재보(財寶)의 정화(精華)를 은밀히 빼돌려, 북망산 능묘에다 따로 매장하였다는 그 소문은 정말 그럴듯했던 것이다.
그런 마당에 한효월의 원론적인 말이 먹힐 리가 없었다.
"원, 별……."
누군가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흘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능묘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것을 보자 다른 사람들이 또 그냥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뒤이은 한효월의 날벼락 같은 외침에 그들은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그냥 들어가도 좋습니다!"
주춤하는 사람들에게 한효월은 다시 소리쳤다.
"여러분의 생각대로 시황이 장보를 여기에다 묻었다고 한다면, 그냥 묻어두었겠습니까? 자신의 사후, 그 보물을 가져가려는 자들을 그냥 두고 보려고 했을까요?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여러분을 기다리는 것은 잔혹무비한 기관매복이겠지요."
한효월은 수중의 장보도를 들어 보였다.
"이 장보도에는 바로 그러한 매복을 피해갈 수 있는 통과 방법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말과 함께 한효월은 자신이 밟고 서 있던 호랑이 상의 머리를 발로 굴렀다. 장난처럼 한 행동이다.
하지만 뒤이어 일어난 일은 장난이 아니었다.
끌끌끌…… 하는 돌 끌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그가 서 있는 호랑이 상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듯이 호랑이 석조상은 그렇게 천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저럴 수가?"
사람들의 눈에 악연(愕然)한 놀람의 빛이 인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한효월을 태운, 그 호랑이 석상.
풍상(風霜)에 시달려 코도 사라지고 왼쪽 귀도 반쯤 부서져 나간 그 호랑이 상이 한효월을 태우고서 줄줄 미끄러져 나가면서, 그 자리에 커다란 구멍 하나가 뻥 뚫어진 것이다.
그냥 구멍이 아니었다.
호랑이 상이 자리했던 기단(基壇)이 물러간 그 자리에는 밑으로 내려가는 돌 계단이 선명했다.
누가 봐도 아래로 통하는 통로임이 불문가지.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아귀다툼을 하던 통로가 아닌, 다른 통로가 나타난 것이다. 그 통로의 입구는 처음의 것보다는 좁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
"아직도 제 말을 의심하는 분이 계십니까?"
뒤로 물러난 호랑이 상 위에서 한효월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소리쳤다.
이 마당에 의심이 난다고 할 사람은 없다.
굳은 얼굴로 서로를 돌아볼 뿐.
바로 그 순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너 명의 사람들이 신형을 솟구쳐 한효월을 향해 덮쳐 갔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한효월의 손에 들린 장보도.
선후가 있었지만 그 기세는 흉흉했다.
한효월의 나이가 별로 많지 않은 데다가 생긴 모습은 그야말로 백면서생, 얕잡아 본 고수 중 몇 사람들이 일제히 장보도 탈취를 위해서 그를 덮쳐 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손에 들린 장보도가 진짜임을 믿는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 일은 이미 한효월이 예측한 바였다.
"당장 물러나지 못할까!"
그는 벼락같은 사자후를 터뜨리면서 가장 먼저 덮쳐 오는 흑의노인에게 일장을 쳐냈다. 그 움직임은 전광석화와 같았고, 발동할 때까지는 전혀 움직임이 없다가 눈앞으로 다가온 그를 향해 쏟아낸 일격인지라 흑의노인은 덮쳐 오던 기세 그대로 한효월과 맞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쾅!
그의 공력도 만만치 않아 두 사람이 격돌하자 일진 폭음이 터져 나왔다.
찰나, 답답한 신음이 터지면서 흑의노인이 철벽에 부딪친 고무공과 같이 튕겨져 나갔다.
그 순간에 한효월을 공격했던 자들 중 둘이 한효월의 앞에 당도했다.
하나는 한효월의 손에 들린 장보도를 노리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아예 수중의 만자탈(卍字奪)을 휘둘러 한효월의 목을 베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한효월이 방금 힘쓰는 것을 보았으므로 자신의 일격이 충분히 성공할 것으로 자신했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임을 아는 데는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한효월은 흑의노인을 격퇴시킴과 동시에 장보도를 노리는 자의 손목을 수도로 내려쳤다. 그 속도는 유성과 같아서 습격한 청의대한은 어떻게 변화를 부릴 여지도 없이 그대로 손목을 얻어맞고 손목이 부러져 비명과 함께 튕겨져 나갔다.
그것과 함께 한효월은 수중의 양피지를 휘둘러 자신의 앞에 도달한 회삼노인의 만자탈을 후려쳤다.
여전히 전광석화와도 같은 속도.
땅!
둘둘 말린 양피지가 만자탈과 부딪치자 놀랍게도 회삼노인의 강철로 된 만자탈이 산산조각 나버리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그 양피지는 튕겨지듯이 튀어 올라서 회삼노인의 얼굴을 쳤다.
"으아악!"
단말마의 비명.
선연한 붉은 피를 뿌리며 회삼노인이 훌훌 날아갔다.
뭐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누가 봐도 고수가 분명했던 세 사람이 손도 쓰지 못하고 모조리 거꾸러져 버리자 뒤를 따라가던 사람들이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더구나 한효월이 내지른 호통 소리에 실린 경력은 천둥과 같아 내공이 약한 사람은 그 소리만으로 충격을 받고 비틀거리면서 신형을 멈추어야 했다.
…….
갑자기 일대에 정적이 찾아왔다.
한순간 한효월의 보인 신위에 모든 사람이 압도된 것이다.
사람들을 더욱 경악시킨 것은 그 다음이다.
한효월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장보도를 갈가리 찢어버린 것이다.
공력을 운용하여 찢어버리자 그 장보도는 순식간에 솜털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저, 저……!"
"무, 무슨 짓을……."
사람들이 채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딱 벌렸다.
"여러분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래도 알지 못하겠습니까?"
한효월은 그들을 둘러보면서 낭랑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이 장보도는 가짜입니다. 여러분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만들어낸 가짜란 말입니다. 저 안에서 여러분을 기다리는 것은 장보가 아니라, 여러분을 잡기 위해서 마련된 함정일 뿐입니다."
그의 음성이 일대를 울렸다.
"뭐라고?"
"함정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웅성거림이 사방에서 일었다.
그때다.
갑자기 한 사람이 목청을 높여 외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가? 그걸 어떻게 믿어?"
30대 후반의 장년.
눈빛이 날카롭고 양손에는 판관필을 나눠 들었다.
"맞소. 난데없이 나타나서 하는 소리를 누가 믿을 수 있단 말이오? 모르지, 우리 모두를 속여 따돌리고 저 혼자 들어가려고 하는 건지도!"
한 사람이 나서면서 동조했다.
한효월은 그들을 일별하면서 침착하게 말을 계속하였다.
"믿지 않는 분은 들어가도 좋습니다. 제가 여기 온 것은, 여러분께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이 저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쳐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만약 그 장보도가 귀하의 말대로 함정이라면, 누가 그런 짓을 한다는 거요? 뭘 바라고?"
문득 누군가의 물음이 들려왔다.
백포에 녹색배자를 걸치고 영웅건을 쓴 40대의 중년인.
등에 보검을 멘 그의 눈에서는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운강 대협(雲崗大俠)의 말씀이 맞소. 누가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겠소? 이런 짓을 해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또 한 사람이 나서서 그의 말을 지지했다.
"그들은 독고 맹주를 해쳤고, 무림맹을 습격하여 맹을 괴멸시키다시피 했습니다.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효월의 음성이 그들의 말을 누르며 일대를 울렸다.
"독고 맹주를 해치다니?"
"그건……."
술렁임이 인다.
"대체 당신은 누구요?"
"맞아, 누구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무슨 증거로?"
"제 이름은 한효월이라고 합니다."
"한효월?"
"한효월이 누구지?"
바로 그 순간이다.
"그, 그럼 시주께서 독고 맹주의 사제이신 한효월, 한 공자란 말씀이시오?"
놀란 소리가 들려왔다.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소림사의 대조 대사가 한효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한효월이 신분을 시인하자, 군웅들에게서 술렁거림이 크게 일었다.
-건곤무적 독고해!
그의 이름이 가지는 위력은 아직도 생생하고도 거대했다.
그때, 한 사람이 코웃음을 터뜨렸다.
"흥! 나는 독고 맹주에게 사제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소."
덩치가 커다란 사내였다.
나이는 30대 중반. 덩치며, 굳은살이 박힌 큰 주먹 등이 외공을 수련한 자임을 쉽게 알게 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한효월은 머리를 저었다.
"우선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합니다. 지체한다면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게 될 겁니다."
"아미타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한효월의 말에 놀란 소림의 대조 대사가 물었다.
"제천교에서 이 일대에 천라지망을 깔고 있습니다. 시간이 늦으면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이미……."
그 순간이다.
"으아악-!"
좀 전에 군웅이 들어갔던 통로 안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들려온 그 비명은 한효월의 말을 끊은 것은 물론이고, 일대를 조용하게 만들기에 족했다.
다음 순간, 그 통로 안에서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뛰쳐나왔다.
구레나룻이 무성한 털보장한.
"광 형(匡兄)!"
한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크으으……."
통로에서 나온 장한은 피투성이였다. 전신은 피투성이고 금포(錦袍)는 피로 물들어 혈의(血衣)와 같았다. 그는 가슴을 움켜잡은 채 비틀거리며 몇 걸음 걸어나오다가 그만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손에서 빛을 뿌리는 물건이 굴러 나왔다.
"그, 그거……!"
털보장한은 그 물건을 향해 피 묻은 손을 뻗어내며 안간힘을 썼다.
빛나는 물건.
그것은 용안(龍眼)만한 구슬 두 개였다.
"명주(明珠)로군……."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러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명주.
그런 크기의 구슬이라면 천금을 쉽게 받을 수 있을 터이다.
"광 형! 어떻게 된 일이오? 이 명주가 안에 있었소?"
한 사람이 그의 앞에서 외쳐 물었다.
한쪽 팔마저 없는 그 털보장한은 소리친 사람을 쳐다보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소. 안에……."
"이런 명주가 안에 있단 말이오?"
누군가가 물었다.
"이런 건…… 널려 있소. 비교할 수도 없는 보물들…… 눈부신 보물들…… 기진이보(奇珍異寶)뿐만 아니라, 신병이기(神兵利器)들……."
털보장한은 안간힘을 써서 말하다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서로 먼저 차지하려는 고수들이……."
그는 참극(慘劇)이 회상되는 듯 전신을 떨더니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진천일극(震天一戟) 광제(匡濟)가 그의 이름이다.
한 자루의 극으로 강호를 종횡하던 고수. 나이는 아직 마흔이 되지 않았지만 그는 전대의 고수들과 견주어 조금도 뒤지지 않는 위명을 얻었고, 실제로 그러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가 능 안으로 들어간 것은 지주귀도가 능의 문을 열고 들어간 직후. 능 안으로 들어간 사람의 숫자는 이미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이렇듯 죽어가자 사람들은 능의 내부가 이미 험악한 절지(絶地)로 변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진천일극 광도의 출현으로 그들은 능 안에 절세기보가 숨겨져 있음을 믿게 되었다.
사람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동작 빠른 사람들이 일제히 방금 광도가 나온 능의 통로 안으로 몸을 날려 사라져 갔다.
"멈추시오! 안은 함정이오!"
한효월이 발을 구르며 소리쳤지만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질풍처럼 몸을 날려 방금 그와 말을 나눴던 대조 대사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사람들과 함께 이 자리를 떠나가 주십시오."
"한 시주께서는?"
"저는 안으로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안으로 말씀이오?"
대조 대사와 그 옆에 있던 일진자가 놀라 물었다.
"그렇습니다!"
한효월의 답변에 대조 대사가 다시 물었다.
"저 안은 함정이라고 하지 않았소?"
"하지만 군웅들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함정인 줄 알면서도 간단 말씀이오?"
"다른 방안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답하는 한효월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투명히 빛나는 듯했다.
불현듯 그가 달라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뭐라고 말을 하고자 했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대조 대사는 입을 다물고 만다.
그것은 옆의 일진자도 마찬가지였다.
태연한, 너무도 당연한 듯한 한효월의 말에 일시지간 말문이 막혔던 것이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십시오. 떠나실 때까지 지켜보겠습니다."
한효월은 그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정말 안으로 들어갈 작정이시오."
그 물음에 한효월은 답하지 않았다.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다.
하지만 대조 대사는 바로 떠나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로서는 명령을 받고 온 처지인지라 그냥 떠나기가 뭐했고, 그런 처지는 무당의 일진자나 다른 몇 개 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한효월은 암암리에 한숨 쉬면서 말했다.
"가십시오. 만약, 앞을 가로막는 자들이 없다면…… 다시 돌아오셔서 하회를 보실 수도 있습니다. 대사께서 해주시지 않는다면 누구도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겁니다."
"아미타불, 좋소."
잠시 망설이던 대조 대사가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자 무당의 일진자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있던 한효월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저와 함께 능 안으로 들어가실 분, 계십니까?"
신형을 돌린 한효월은 망설이고 있는 군웅들을 보면서 물었다.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이오?"
한 사람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저분들이 무사히 이곳을 떠난다면…… 안으로 들어간 분들을 구하기 위해서 들어갈 작정입니다."
"장보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사람이 물었다.
"그렇습……!"
한효월의 대답은 채 끝나지 않았다.
갑자기 앞쪽에서 격렬하게 싸우는 소리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바로 대조 대사 등이 간 입구 쪽이다.
순간, 한효월은 바람처럼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