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首 명부음희(冥府陰姬)
-궁장미부를 만나다.
제천교의 음모(陰謀)는 천하를 떨게 하다.
한효월은 소백을 따라 망산에 이르렀다.
유성에게 무슨 일이 있지 않다면 결코 소백을 보냈을 리가 없다.
더더구나 아무런 전갈조차 없이.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발걸음은 더욱 급했다.
겉보기로는 여전히 망산의 모습은 절가(絶佳)하다.
하지만 망산으로 들어서는 순간에 한효월은 이미 무엇인가 모를 살기가 산 가득 감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간혹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긴장이 느껴졌다.
산중에 이르자 소백이 한효월의 품속에서 훌쩍 뛰쳐나가서 빛살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대낮임에도 울창한 숲은 저녁때처럼 어두컴컴했고, 소백은 그 가운데를 가로질러 달렸다.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엎어진 그에게서는 검붉은 피가 바닥으로 흘러나와 굳어 있다. 이미 죽은 지 한참 되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시체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숲 속으로 전진함에 따라 시신들의 모습이 계속 나타났다.
얼핏 봐도 줄잡아 대여섯 구의 시신이 숲에 쓰러져 있었다. 그처럼 달려가는 소백의 뒤를 따르는 한효월의 눈에 보인 시신의 숫자가 그러하니, 주위를 살펴본다면 더 있을런지도 몰랐다.
"으악!"
갑자기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소백이 사라진 숲 속.
한효월의 신형이 찰나간에 사라졌다.
질풍처럼 한 사람이 숲을 뚫고 사라졌다.
한효월이 그 자리에 당도했을 때는 그렇게 흔들린 나뭇가지의 남은 움직임을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대신 그가 본 것은 그 자리에 쓰러져 있는 시신.
40대로 보이는 흑의장한은 목뼈가 부러져 내동댕이쳐지듯이 거꾸러져 있었다. 타격으로 목이 부러졌는지, 어떤 힘에 의해 튕겨져 나가다가 목이 부러진 것인지 쓰러진 그의 목은 괴이한 각도로 꺾어져 있었다.
살펴보지 않아도 즉사임을 곧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소백!"
번개처럼 주위를 쓸어본 한효월이 소리쳤다.
"찍!"
소백의 대답은 뜻밖에도 한효월의 머리 위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소백은 하늘을 가리며 솟아 있는 거목의 무성한 가지 틈에서 한효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냐?"
4, 5장가량의 높이인 그곳으로 한효월은 구름처럼 신형을 날려 올라서면서 소백에게 물었다.
묘한 곳이었다.
10장 이상의 거목들이 줄줄이 늘어선 곳. 그 나뭇가지들이 엉긴 이곳은 마치 공중에 뜬 그물과 같아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을 뿐더러 사방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숨어서 사방을 감시하기에는 더 이상 적합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찍! 찍찍!"
소백이 다급히 머리를 흔들어댔다.
코를 쫑긋거리면서 당황스럽게 왔다 갔다 하는 품이 이곳에서 기다렸어야 할 유성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 당황하고 있음이 역력하다.
"성아가 여기 있었더냐?"
한효월은 다시 물었다.
"찍!"
소백이 머리를 끄덕였다.
잠시 주위를 살펴보자, 유성이 나무에 기대 있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묻어 있는 핏자국.
"상처를 입었던가?"
한효월의 안색이 굳어졌다.
하긴 움직일 수 있는 상태라면 굳이 소백을 보내지 않았으리라.
그날 나타났던 사명사자의 뒤를 따라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보고 오는 일이라면, 유성이 조심만 했다면 위험에 빠질 일은 없었을 터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심각한 상태임이 분명한 듯했다.
"성아를 찾아갈 수 있겠느냐?"
한효월이 사방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코를 쫑긋거리고 있는 소백을 보면서 물었다.
"찍!"
답변은 늘 같다.
하지만 그 답변의 의미를 보여주듯이 소백은 꼬리를 한바탕 휘둘러 보이더니 대뜸 아래로 신형을 날렸다.
아래로 뛴 소백의 모습은 신기했다.
꼬리를 쫙 펴자, 그 돌돌 말렸던 꼬리가 넓게 펴지면서 마치 공중을 유영하듯이 꼬리를 흔들어서 방향을 잡으며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 * *
"제기랄!"
유성은 신음했다.
이를 악물었지만 가슴이 찢어져 나가는 것만 같다.
목이 탔다. 억제하려고 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하긴 가슴에다 연달아 삼 장이나 얻어맞았으니 이 정도로도 가상했다. 그 빌어먹을 놈이 찌른 검이 오른쪽 어깨를 가르고 지나갔지만 뭐 팔이야 움직일 수 있었다. 피하는 것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어깨가 아예 날아갔을 테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그러나 위험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유성은 입가로 흘러내리는 핏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삼천(森天).
나무가 하늘을 가린 마당이니, 사방이 어두컴컴해 시야를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방금 그가 은신했던 곳으로 추적해 온 자들이 그 어둠 속에서 지금도 자신의 흔적을 따라 움직이고 있을 것임은 분명했다.
"징그러운 놈들…… 뭐 먹을 게 있다구 이 어르신을 그렇게 따라다녀?"
그 와중에도 투덜거리던 유성의 안색이 갑자기 돌변했다.
뒤를 돌아보면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던 그의 앞쪽으로 뭔가 괴이한 기운을 느꼈던 까닭이다.
섬뜩하다고나 할까?
자세를 낮추면서 신형을 튼 유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정말 한 사람이 그의 등 뒤에 바람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묘한 향기가 흐른다.
희다 못해 창백해 보이는 얼굴.
그러나 그 얼굴은 옥과 같이 맑아서 기이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몇 살이나 되었을까?
20대로 보이긴 하지만 묘하게도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여인이다, 그것도 아주 처염(悽艶)하게 아름다운 여인.
그녀는 이 숲과는 어울리지 않게 궁장(宮裝)을 했다. 일반 무림인이나 여염집 여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 옆으로는 두 명의 궁장 하녀가 따르고 있다.
하지만 산책이라도 한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깊은 산중이다.
그렇다고 이 부근에 참배할 만한 절이나 도관(道觀)이 있는 것도 아닌 바에야…….
유성이 그녀를 발견하고 주춤, 한 걸음 물러서는 순간에 그의 뒤쪽으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망할!"
한쪽 가슴을 움켜쥔 유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 걸음을 떼면서 그는 궁장미부인을 향해서 다급히 말했다.
"어서 여기에서 피하십시오. 흉악한 자들이 오고 있습니다."
말과 함께 그는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들에게 쫓기고 있나요?"
그를 붙든 것은 조용한 여인의 음성.
궁장미부인이 유성을 향해 입을 열어 묻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자, 귀에 걸린 귀걸이가 서로 부딪치면서 맑은 옥 소리를 울려냈다.
"그렇습니다만……."
궁장미부를 보는 유성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백옥처럼 흰 궁장미부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출렁거리며 피어났다.
"그들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걱정할 것 없어요. 감히 명부곡(冥府谷)에 허락도 없이 침입한다면 살아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요."
그녀가 웃음을 떠올리자, 나이 어린 유성조차도 가슴이 떨릴 풍정(風情)이 서린다. 한 여인의 얼굴이 저렇듯 웃음 한 번에 고혹스럽게 변할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할 일.
그러나 그것보다 유성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여인의 말이다.
"명부곡? 이곳이 말입니까?"
"그래요. 이곳이 어딘지 몰랐던 모양이군요?"
그녀의 말에서 유성은 일이 고약하게 되었음을 직감한다.
견문이 넓지 못해서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출입을 불허하는 강호상의 금지(禁地)에 들어섰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금지라는 곳은 각자가 정해놓은 금지 구역이니, 상대와 싸우기를 작정하지 않은 이상,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죄송합니다. 저는 쫓기느라고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유성의 얼굴에 당황이 떠오름을 보면서 궁장미부는 기품있게 웃었다.
"사냥꾼도 품으로 뛰어 들어온 사슴새끼는 잡지 않지요. 남에게 쫓겨 들어온 사람을 함부로 대할 경우없는 사람은 아니에요. 소혼(消魂), 나가서 저들을 쫓아버려라."
"예."
두 시녀가 날듯이 허리를 굽혔다.
그녀들이 움직이기 전이다.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함께 흑의인 두 사람이 질풍처럼 장내로 들이닥쳤다.
"으하하…… 이 쥐새끼 같은 놈! 겨우 여기까지 왔더냐?"
흑의인 하나가 음산하게 소리쳤다.
그의 신수가 평범하지 않음은 이미 나타날 때의 신법으로 증명이 된 바 있었다.
"원 망할, 정말 지겨운 놈들이네……."
일그러진 유성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침범한단 말인가?"
궁장미부가 차갑게 소리쳤던 까닭이다. 웃을 때는 그렇게 풍정 어리던 얼굴이 차가워지자 한 겹 살얼음이 낀 듯했다.
"낭랑(娘娘)! 저놈은 본 교의……!"
흑의인 하나가 궁장미부의 말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누구나 허락없이 명부곡에 침범하면 죽는다."
궁장미부가 내뱉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녀가 손을 쳐들자 돌연 흑의인 둘이 목을 움켜잡았다. 부릅뜬 눈이 퉁방울처럼 금방이라도 튕겨져 나올 듯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허공을 격하고 뻗어 나가 그들의 목을 움켜잡은 듯한 모양이었다.
"크, 크윽! 이런 짓을……."
"나, 나, 낭……."
그들은 버둥대며 안간힘을 썼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두 명의 시녀가 나비처럼 날아들어 그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던 것이다. 비수는 정확하게 심장요혈을 파고들어 그들은 더 이상 고통을 느낄 여가도 없었다.
"그들을 흔적없이 처리하고 관문(關門)을 발동해라."
"예, 부인."
찰나간에 흑의인 둘을 쓰러뜨린 시녀 둘이 납신 허리를 굽혔다.
그녀들에게 명령을 내린 궁장미부는 유성을 돌아보았다.
"저들의 주인이 찾아온다면 박절하게 대할 수 없으니, 우선 이곳을 피하도록 해요."
"저, 저는……!"
유성이 어떻게 말을 하기 전에 궁장미부는 그 옥 같은 얼굴에 웃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손을 들어 유성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전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손을 잡자 유성은 당황해 말을 맺지 못했다.
"아무런 걱정 할 것 없어요. 해롭게 하지 않을 거니까."
그 말을 끝으로 유성은 갑자기 전신이 내려앉는 것을 깨달았다.
두 다리의 힘이 풀리고 정신이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무, 무슨 짓을……."
안간힘을 다해 앞으로 일장을 쳐내려고 했지만 그것은 마음뿐, 그는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코끝을 스치는 향기를 느끼면서 그것이 잘못된 원인임을 알았지만 이미 늦었다.
* * *
묘한 느낌이다.
전신이 둥둥 허공에 떠 있는 것 같고 한없이 편안하기도 했다.
그는 삼 일 밤낮을 쫓겼다.
악전의 연속이고 순간순간이 죽음과 맞닥뜨리는 위기였다. 자칫 잘못했더라면 이미 숨을 쉬지 못했으리라. 그만큼 중상을 입은 상태였었다.
그런데 이런 편안함이라니!
"내가 죽은 건가?"
생각을 굴리던 유성은 천근처럼 무거운 눈까풀을 밀어 올렸다.
몽롱한 가운데 사물이 희미하게 눈으로 밀려 들어온다.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은 뜻밖에도 화려했다.
무슨 궁중(宮中)에 들어와 있는 듯했고, 그가 누운 곳도 푹신한 침상. 유성이 한 번도 누워본 적이 없었을 만큼 푹신한 곳이었다. 좌우로 늘어진 매미 날개와 같은 경사 휘장…… 은은한 향(香)이 감도는 실내.
"정신을 차렸군요?"
영롱한 음성이 그의 귓전을 두드렸다.
앞서 봤던 두 시녀였다.
그녀들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는?"
유성이 일어나려고 하자 한 시녀가 그의 가슴을 눌렀다.
"아직. 아직 일어나지 말아요. 상처가 이제 겨우 아물었거든요?"
그녀의 손이 누르는 감촉이 이상함을 느낀 유성은 갑자기 안색이 돌변했다.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 그녀들의 앞에 누워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 무슨 짓이오?"
유성은 혼비백산해서 소리쳤다.
"뭐긴요? 상처 치료하느라 옷을 벗긴 거지요."
시녀 하나가 웃으며 눈을 흘겼다.
별로 햇볕을 보지 않은 듯 창백한 얼굴은 그늘져 보이지만 두 눈에 서린 풍정은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더구나 옥 같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누르고 있음에랴.
어지간한 유성이었지만, 여자와 별로 접하지 않은 그인지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움직이려고 하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닫자 더욱 당황했다.
바로 그 순간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버릇없이 무슨 짓들이냐?"
그 궁장의 미부(美婦)였다.
그녀가 나타나자 시녀들은 황급히 허리를 굽혀 보이고는 사라졌다.
미부는 천천히 유성을 향해 다가왔다.
무슨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희미한 시야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말 그대로 구름 속을 거니는 선녀와도 같이 보였다. 너울거리는 붉은빛 경사를 입고서 다가서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다는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했다.
그녀는 넋을 잃고 자신을 바라보는 유성의 머리맡에 살짝 기대앉았다.
기이한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본 곡의 요상대법(療傷大法)은 상처를 급속하게 낫게 하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어요.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피시술자가 몸을 움직이면 안 된다는 거죠. 그러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녀가 내려다보고 이야기하자 유성은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러나 이렇게 벗겨……."
"어차피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옷을 입는 건 아니죠. 상처 회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이런, 진땀이 나는군요?"
미부가 나직이 웃더니 부드러운 손을 들어 유성의 이마에 송골송골 돋은 땀방울을 닦아주었다.
"정히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내 옷이라도 덮어주죠."
말과 함께 그녀는 입고 있던 경사나의(輕紗羅衣)를 끌어내리듯 벗어 유성의 몸을 덮어주었다. 매미 날개와 같은 천 몇 겹으로 된 그 옷을 벗어버리자 놀랍게도 궁장미부의 전신은 알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믿을 수 없게도 그 옷 아래로는 가슴을 가린 붉은 천 조각 하나와 비소(秘所)를 가린 또 하나의 천 조각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육감적인 몸매를 가리는 것은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유성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오래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뜨거운 불길 같은 것이 자신의 입술을 눌러왔기 때문이다.
크게 눈을 뜬 그의 눈에 자신을 바라보면서 웃고 있는 궁장미부의 눈이 들어왔다. 그녀는 그의 입에다 입술을 맞추고 있었다.
그녀는 풍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의 눈을 내려보면서 웃음 지었다.
"이제부터 당신의 상처를 치료하겠어요……."
말과 함께 그녀는 유성의 입술을 탐닉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유성의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으윽!"
유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손이 그의 배를 타고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손은 유성의 중심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이, 이 파렴치한…… 당장 손을 치우지 못해!"
유성이 고개를 도리질하면서 소리쳤다.
진땀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은 홍시와 같이 붉어져 있었다. 다급하고 당황하여 가슴이 벌떡벌떡 뛰었다.
궁장미부가 깔깔 웃어댔다.
"정말 싫은가?"
그녀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유성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정말 싫다면 네 손으로 나를 밀어내 봐. 그럼 요상(療傷)은 여기서 끝내는 것으로 하지."
"이, 요부(妖婦),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나를 움직이지……!"
소리치던 유성은 문득 자신의 손이 움직일 수 있음을 느꼈다.
"사랑스런 동생, 넌 자유야! 이제부터 뭐든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나까지도 말이야……."
그녀가 유성을 내려다보면서 교태롭게 눈웃음쳤다.
"이 더러운!"
격노한 유성은 움직일 수 있음을 느끼자 격렬하게 손을 휘둘러 미부를 쳤다.
미부는 그의 일장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그의 일장을 가슴으로 맞았다.
유성의 일장은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쳤다.
부지간에 그녀의 가슴을 친 유성은 형용하기 힘든 기괴한 느낌에 전신이 떨렸다. 그녀가 피하지 않을 것은 의외였다. 하지만 그 순간에 자신이 진기를 끌어올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진기가 실리지 않은 그의 일장은 허공을 휘저어 그녀의 가슴을 치면서 그녀의 가슴 가리개를 풀어냈을 뿐이다. 출렁, 풍만한 젖무덤이 물결치면서 그의 눈앞에 아낌없이 드러났다.
"이, 이……!"
유성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녀의 가슴을 친 유성은 그 순간, 가슴속에서 용광로와도 같은 열기가 들끓어 오름을 느꼈다. 억제하려고 해도 억제할 수 없는 가공할 불길.
그것은 욕정(欲情)이었다.
혈기방장한 열일곱의 나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동정의 소년이지만, 본능은 고함지르고 있었다. 알려주지 않아도 그의 본능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느끼고 있는 듯했다.
유성은 움켜쥐었던 주먹으로 그녀를 치는 대신, 그녀의 몸을 얼싸 안았다.
깔깔깔…….
요기로운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녀가 그에게 안겨들었다.
전신이 함몰되는 듯했다.
여체가 그처럼 부드럽고, 그처럼 놀라운 위력을 가지고 있음을 유성은 미처 알지 못했다.
움켜쥔 손아귀에 넘쳐흐르는 젖가슴의 탄력…….
백옥처럼 빛나는 나신에 부서지는 희미한 빛줄기.
마치 어린아이처럼 여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유성은 전신을 여인에게 밀착했다. 그러나 여인은 다리를 벌리지 않았다. 육체의 문을 모조리 열어놓고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유성은 허겁지겁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마지막 보루를 벗겨내려고 했다.
그 손을 여인이 잡았다.
"당신은 누구죠?"
"나, 난…… 유성."
유성은 허겁지겁 대꾸하고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틀어 손을 빼고는 그녀의 마지막 보루를 잡아당겼다.
급한 마음이니 제대로 벗겨질 리가 없다.
그녀는 풍만한 둔부를 움직여 그 손길에 응하면서 다시 물었다.
"누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그, 그건……."
유성이 주춤했다.
그 와중에도 유성이 주춤거림을 보자 그녀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천하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지금 상황에서는 발정한 미친개와 같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방 안을 흐르는 향기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복용시킨 환락단(歡樂丹)은 방 안에 흐르는 인혼향(引魂香)과 어우러져 제아무리 성인군자라 할지라도 색마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더구나, 그녀는 눈짓 하나로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미공(眉功)을 익힌 몸이었다.
그런데, 이 새파란 어린애가…….
궁장미부는 놀람을 뒤로하고 손을 움직여 유성의 입술을 살며시 물었다. 그녀의 입에서 진한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그녀는 옥과 같은 다리를 움직여 유성의 건장한 다리를 감았다.
그 바람에 마지막 한 겹의 헝겊이 벗겨져 나가자 유성은 거의 미칠 지경이 되어버렸다.
"어맛, 뭐가 그리 급해?"
선불 맞은 황소처럼 그가 달려들자, 궁장미부는 깔깔 웃었다.
그러나 그를 밀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감싸 안아버리니 유성은 이미 불기둥과 같이 되어버렸다.
"누구지? 누가 너를 움직이고 있는 거야?"
허둥거리는 유성의 몸짓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미부가 다시 물었다.
그녀의 입에서는 사향 내음이 났다.
그것은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어서 한효월의 아래에서 훈도(訓導)를 받아 심지견정(心志堅定)한 유성조차도 이제 더 이상은 저항할 수가 없었다.
"고, 공자…… 우리 공자를 따라서!"
다급히 부르짖은 그는 사납게 미부를 덮쳤다.
그 힘이 하도 강렬하여 미부는 그만 그를 놓치고 말았다.
"아!"
나직한 비음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한몸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그렇게 미친 듯 허덕이는 유성의 귀에 은근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물건은 어디 있지?"
"무, 무슨 물건……."
미부가 가쁜 숨을 그의 귀에다 불어넣으며 다시 물었다.
"네가 가져간 것…… 그 장보도 말이야."
"그, 그건……!"
문득 유성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굳은 얼굴.
검미가 찡그려진 것을 보자 미부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나이에 이런 정력(定力)이라니 대단하군……. 하지만 네가 어찌 나의 품을 벗어날 수 있겠느냐?'
미부는 냉소를 떠올리며 미끈한 다리로 유성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녀의 움직임에 유성의 뇌리는 하얗게 비어버리고 말았다. 아무것도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어디 있지? 너의 공자에게 가져간 건가? 그는 어디 있어?"
미부가 훈풍처럼 속삭였다.
"그건, 그건……."
그때였다.
갑자기 바깥에서 놀람에 찬 비명과 앙칼진 고함 소리, 이어 펑펑! 하는 굉음이 잇달아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나, 낭랑!"
다급한 외침과 함께 소혼이란 시녀가 달려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미부가 미간을 찡그렸다.
유성과 정사를 나누고 있음에도 그녀는 태연했다.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는 듯이.
그러나 그 답은 시녀가 하지 않았다.
"나를 막는 자는 모두 죽는다!"
낭랑한 음성이 바로 뒤이어 들려왔던 것이다.
동시에 비명과 함께 몇 사람이 한꺼번에 날아들어 시녀 소혼과 함께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흰빛이 무서운 기세로 정사를 벌이고 있는 미부에게로 덮쳐 갔다.
"감히!"
날카로운 질타와 더불어 유성의 밑에 깔려 있던 미부가 유성을 밀어 던지면서 은어와 같은 손을 들어 일격을 쳐냈다.
뼈도 없어 보이는 손에서 한줄기 음유(陰柔)한 경력이 일었다.
"캬악!"
백광에서 기성이 터지며 흰빛이 번개처럼 뒤로 물러났다.
그토록 빠르게 물러난 것을 본 미부의 얼굴이 괴이하게 변했다.
자신을 덮친 것이 겨우 한 마리의 흰 다람쥐임을 발견한 까닭이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백의유생 한 사람이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음을 발각한 미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으며 그를 쏘아보았다. 전라임에도, 그 드러난 풍만한 가슴을 출렁이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 태도였다.
"옷을 입는 게 어떻겠소?"
유생, 한효월이 미간을 찡그리면서 입을 열었다.
침착한 태도였지만, 그녀의 나신을 정시(正視)하지는 못했다.
그 모습을 보자 미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웃음을 떠올렸다.
"내 모습이 보기 싫은가요?"
그녀의 나신은 눈부셨다.
풍만하면서도 흰 그녀의 나신은 더할 곳도, 뺄 곳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도 아름답게 만년등 아래에서 뿌연 빛을 뿜고 있었다.
그녀의 나신을 차마 볼 수 없는 듯 외면했던 한효월은 그녀가 그처럼 뻔뻔하게 나오자, 미간을 찡그렸다.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할 일. 명부음희(冥府陰姬)가 이런 탕부(蕩婦)라니…… 정말 당신이 그 명부음희란 말이오?"
그의 중얼거림에 꽃이 만발한 화원처럼 활짝 피었던 미부의 얼굴이 찬 서리가 내린 듯 서늘하게 굳어졌다.
순식간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모습.
"나를 아나?"
"당신이 지난날의 명부음희라면……."
그러자, 미부는 문득 다시 웃음을 떠올리면서 한쪽 다리를 천천히 세웠다. 미끈한 동체가 흔들리면서 만년등의 불빛을 받아 더욱 육감적으로 빛난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자세를 바꾸자 내밀한 곳이 은은히 드러나 가슴이 떨릴 유혹이 인다.
"나를 안다면……."
"당신은 늘, 그렇게 옷을 벗고 사는 거요?"
잠시 그녀의 나신을 바라보던 한효월이 침착히 입을 열어 그녀의 말꼬리를 잘랐다.
미부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그냥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지난 십여 년 간을 고련한 명부환희공(冥府歡喜功)의 정수(精髓)가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에 녹아 있었다. 평범한 자라면 이미 제정신을 잃고 달려들었어야 할 가공할 미태(媚態)가 거기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 말은…….
"당신은 당신을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소?"
한효월은 머리를 저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추악한 탕부에 불과하오. 당신이 그처럼 자부하는 그 몸뚱이는 더러운 고깃덩이일 뿐이오. 영혼을 잃어버린 몸뚱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소?"
미부의 눈가에 살기가 일기 시작한다.
"호호호…… 그런가? 그렇다면 이 고깃덩이를 어떻게 할 거죠?"
그녀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옥각을 뻗어 한 발을 침상 아래로 내려놓자, 인상을 쓰고 그녀를 노려보던 소백은 훌쩍 몸을 날려 정신을 잃고 있는 유성에게로 달려갔다.
출렁거리는 풍만한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미부는 한효월에게로 다가왔다.
조금도 망설임없는 태도.
깎아내린 듯 아름다운 배와 잘록한 허리, 풍만하게 벌어진 둔부와 눈처럼 희디흰 허벅지가 만나는 그 신비로운 그늘까지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나 있음에도 그녀는 한효월에게 보라는 듯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한효월의 얼굴에 일순, 당황한 빛이 드러났다.
그의 수양이 아무리 높다고 할지라도 아직 약관의 나이. 여자가 이렇게 나오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칠 테면 쳐보라는 듯 그 풍만한 가슴을 내밀고 다가오니 어찌할 것인가.
바로 그때, 한효월의 뒤쪽에서 음풍(陰風)이 휘몰아쳐 왔다.
"암습인가?"
짧은 중얼거림.
한효월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손을 뒤로 쳐내면서 몸을 살짝 틀었다.
펑!
일진 폭음과 함께 그를 공격했던 자 둘이 피를 토하면서 튕겨져 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에 한효월의 가슴으로는 소리도 없이 음경(陰勁)이 직격해 왔다. 그녀가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해 온 것이다.
가느다란 손가락이지만 그 손가락 다섯이 활짝 펼쳐진 그 공세는 결코 간단히 볼 것이 아니었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서릿발과 같이 한효월을 향해서 날아들고 있었다.
찰나, 미부는 한효월의 서늘한 눈을 보았다.
동시에 한효월의 일장은 불가사의하게 그녀의 공세를 뚫고 들어와 그녀의 가슴을 쳤다.
펑!
"아악!"
일진 폭음과 함께 참혹한 비명이 뒤를 이었다.
나신의 미부는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정말 수혼지(搜魂指)……."
그 모습을 보면서 한효월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명부음희.
그녀의 신분은 특별났다.
천하십왕(天下十王).
그 가공할 신분을 가진 천하십왕 중 하나인 풍도귀왕의 딸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 그녀다. 20여 년 전 그녀의 이름은 강호상에서 매우 높았었다. 미모와 염문(艶聞).
차가운 성정(性情)과 무서운 손 씀씀이.
하지만 당시 그녀는 결코 탕부가 아니었었다.
만약 그런 탕녀였다면 어찌 그녀가 한효월의 사형인 독고해와 관련된 염문을 뿌릴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런데 어느 날 그녀의 모습은 강호상에서 사라졌다.
만약, 그녀가 정말 지난날의 명부음희라면, 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가 그처럼 변한 것일까.
바닥에 뿌려진 핏자국.
우뚝 선 한효월의 앞에 이미 나신의 미부는 사라지고 없었다.
"당신의 이름이 천기단서에 있지 않았더라면 결코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았을 것이오……."
그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이런……."
문득, 제정신을 차라지 못하고 아직도 헐떡거리고 있는 유성을 본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렸다.
소백이 유성의 얼굴을 핥고 있다가 난감한 눈으로 한효월을 올려다본다.
이거 어떻게 해?
하는 듯한 표정이다.
유성의 남성은 분을 못 이겨 여전히 전신을 곤두세운 채였다.
뿐만 아니라, 전신이 벌벌 떨리고 있는데, 전신기혈이 심하게 날뛰고 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춘약의 기운이 아직도 팽배한 것이다.
상황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정혈(精血)를 빨렸다는 건가……."
그의 붉은 가운데에서도 창백한 얼굴빛을 본 한효월이 신음했다.
정말이었다.
그가 조금만 더 늦게 당도했더라면, 유성은 그녀에게 정혈을 모두 섭취당하고 뼈와 가죽만 남아 죽고 말았을 것이었다.
"정말 믿기지 않는군."
중얼거리던 한효월은 문득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처럼 도도했다던 명부음희가 그런 탕부가 되어 나타나다니…….
이대로 그냥 둔다면 유성은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전신의 혈관이 터져 죽고 말 것이 분명했다. 교접을 하다가 말았기 때문이다. 하긴 그대로 두었다면 혈관이 터지는 게 아니라 기혈이 고갈되어 죽고 말았을 테지만.
한효월은 유성을 안아 들고는 몸을 날렸다.
방 안의 은은한 향기에 코를 쫑긋거리던 소백이 그 뒤를 따랐다.
* * *
바람이 싱그럽다.
아직 밤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산중의 어둠은 이미 빠르게 밀려오고 있었다.
한효월은 아직 명부곡에 있었다.
그와 유성은 그 명부곡 높은 거목의 위에서 찬바람을 맞고 있다.
유성은 이미 정신을 차린 다음이다.
창백한 그의 얼굴에는 계면쩍은 빛이 얼굴 가득했다.
"괜찮으냐?"
"멀쩡해요. 망할……."
유성이 투덜거렸다.
도무지 걸리는 것 없이 활달한 그였지만, 이번에는 왠지 모르게 한효월의 눈치를 보는 것이 역력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한효월이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좋더냐?"
"으……!"
한효월의 물음에 유성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이를 악물었다.
"그 똥물에 튀겨 버릴 요부, 다시 만나면 가랑이를 찢어버릴 거야."
"하하…… 옛정을 못 잊어서 그럴 수 있겠느냐?"
"대체 왜 그러세요? 그 망할 게 절 죽이려고 했는데, 무슨……."
당황한 유성이 어쩔 줄 모르고 손을 벌벌 떨었다.
그가 당황해 쩔쩔매는 것을 보면서 한효월은 정색을 했다.
"다행히 내가 너무 늦지는 않아서 원정(元精)이 크게 손상되지는 않았지만 당분간은 조심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효월의 말에 유성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그까짓 거 갖고 무슨 조심씩이나 해요? 그……."
순간, 유성은 입을 다물었다.
한효월이 머리를 흔들어 보였던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 유성이다.
과연 어둠 속에서 은밀한 움직임이 밀려들고 있었다.
"놈들이군요."
미간을 찡그린 유성이 문득 중얼거렸다.
"놈들이 너를 쫓아야 할 만한 일을 저지른 거냐?"
한효월이 나직이 물었다.
"사생결단 덤비는 걸 보니 무척 열받았나 보네요……."
유성의 의미심장한 답에 한효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우선 자리를 피하고 보자."
그들의 신형이 나무를 타고 조용히 사라졌다.
유성의 흔적을 따라 이곳에 당도한 한효월은 전광석화와 같이 쳐들어가서 유성을 구해냈다. 그가 전력을 다한다면 현 무림에서 그와 맞설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더구나 기습을 한 바에야.
하지만 춘약(春藥)에 중독된 유성을 데리고 움직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다른 것과는 달리 춘약은 해소하기가 까다로운 것이다. 그 때문에 한효월은 유성을 데리고 명부곡의 뒤쪽 숲으로 숨어들었었다.
그들이 사라진 다음, 명부곡으로 한 무리의 인영들이 날아들었다.
"여기 있군요!"
유성이 바위틈에 숨겨둔 것을 꺼냈다.
흙 속에 묻혀 있던 그것은 천으로 둘둘 말린 길쭉한 것이었다.
"……?"
이게 뭐냐는 듯 묻는 표정인 한효월을 향해 유성이 씨익, 웃었다.
"장보도예요."
"장보도?"
"예! 장보도. 지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진시황의 장보(藏寶)가 묻힌 장보도가 그겁니다."
"이게 어떻게 네 손에?"
한효월이 얼떨떨한 빛으로 그 천을 풀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빛 바랜 양피지였다.
"그게 원래는 옥합 속에 들어 있었던 거지요. 그 망할 요부에게 잡히면서 옥합은 잃어버렸는데…… 그걸 대비해서 알맹이는 여기다 숨겨뒀던 겁니다."
유성이 의기양양하여 말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명부곡에서 한참 떨어진 숲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성이 처음 한효월을 기다리던 그 숲 바로 아래였다.
그 아래 바위틈에 두 사람은 무릎을 맞대고 앉아 있는 중이었다.
"무슨 소리냐? 이게……."
한효월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걸 탈취하질 않았죠. 놈들도 그렇게 미친 듯이 눈에 불을 켜고 저를 쫓지 않았을 거구요."
"그런……."
한효월이 신음했다.
유성이 한 말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는 한효월의 명을 받고 제천교 사명사자의 뒤를 따랐다.
유성은 영리한 데다 임기응변에 능해서 귀신도 모르게 사명사자의 뒤를 따를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그는 제천교의 내부에 대해서 조금씩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유성은 실로 놀라운 일을 목도하게 된다.
사명사자가 북망산에 있는 제천교도에게 명을 전하는 것을 보는 와중에, 지금 천하무림을 뒤흔들다시피 하고 있는 이 일. 이 진시황의 장보도가 제천교에서 꾸민 음모임을 알게 된 것이다.
천하의 고수들을 끌어들여서 서로 죽고 죽이게 하려는 음모.
놀랍게도 세상의 주목을 받으면서 도주하고 있던 지주귀도 신부재조차도 제천교의 일당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북망산으로 끌어들이는 바람잡이에 불과했다.
"그런 일이……."
한효월이 나직이 신음했다.
뭔가 명확하지 않다.
무엇인가 의심스럽다는 생각은 이미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맹주부가 화산으로 간다고 해도 그는 여기에 남아서 그것을 조사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모두가 일장 사기극이었다는 건가?
"지독한 계책이군."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그렇긴 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술수임에는 틀림없었다.
재물은 인간을 유혹하는 가장 큰 도구다.
그러나 무림이란 특수한 집단은 재물만 가지고 사람을 유혹할 수는 없다. 그 재물이란 것이 힘을 가진 사람에게는 쉽게 따라가는 것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체면을 목숨처럼 내세우는 무림인들에게 있어 재물이란 신외지물(身外之物)이라는 강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재물뿐만 아니라 무공비급(武功秘쳥), 영약(靈藥)에다가 보검 등의 신병이기(神兵利器)가 같이 있다면 문제가 다르다.
한 자루의 보검을 차지하기 위해서 피 바람이 부는 곳이 무림.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갖추어진 진시황릉.
당연히 사람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그곳에 묻혀 있다는 장보를 차지한다면 단숨에 무림의 패권을 한 손에 거머쥘 수도 있는 까닭이다.
명예, 천하를 오시(傲視)할 수 있는 힘이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사람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 괴물이기에.
천하를 지탱하던 기둥인 건곤무적 독고해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혼란에 빠진 무림에 진시황릉의 출현…….
사람들이 몰려들 것은 당연한 이치.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린다면 무림은 무주공산(無主空山)이다.
"결국,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예정이었던 것인가……."
중얼거리던 한효월이 유성을 보면서 물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훼방을 놓으시게요?"
유성의 말에 한효월은 미미하게 웃었다.
"네가 동정(童貞)을 바쳐 가져온 건데, 헛되게 할 수야 없는 일이지."
"윽!"
그 말에 유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구 땜에 그 봉변을 당한 건데……."
금세 유성의 입이 퉁퉁 불었다.
하지만 그 불만은 한효월이 손을 드는 순간에 사라졌다.
"우리가 찾아갈 필요 없이 그들이 우릴 찾아온 모양이구나."
한효월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유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동시에 그들의 머리 위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날아 내렸다.
가히 번개 같은 움직임.
차가운 섬광이 유성이 내리꽂히듯이 한효월을 엄습했다.
그것은 장보도가 들린 한효월의 손을 노리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넘겨주지 못할 물건이군."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태연한 듯한 모습이나 행동은 그렇지 않아 장보도가 든 손을 거둬들이는 동시에 오른손을 빙글 돌려 습격한 자의 손목을 쳤다.
아주 미미한 움직임, 그러나 습격한 자는 그 번개 같은 일격을 피하지 못하고 함께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렸다. 찰나 한효월은 장보도를 든 손으로 그의 가슴을 쳤고, 그는 비명과 함께 날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이었다.
좌우에서 날아든 검은 그림자.
그들의 공격은 차원이 달랐다.
무섭도록 빠른 공격.
검광이 어둠을 가르고 장지(掌指)가 경풍을 휘몬다.
"너희들과 시간을 보내는 건 의미가 없겠지?"
한효월이 다시 중얼거렸다.
찰나, 그는 방금 습격한 자가 떨어뜨린 검을 잡으며 횡으로 쓸어냈다. 가공할 검기가 노도와 같이 일었다.
쨍쨍, 하는 금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찔렀다.
동시에 그 뒤를 잇는 단말마의 비명 소리.
"으악!"
놀랍게도 한효월을 습격해 달려들었던 자 둘이 피보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처음 나무 위에서 암습했던 자가 떨어뜨렸던 검.
그 검이 채 땅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한효월은 그 검을 잡았다.
그리고 그 검으로 다른 자들을 베어낸 것이다.
그 검세는 놀랍도록 가공하여 그들은 검을 들어 한효월의 검세를 막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한효월이 쓸어낸 검과 맞닥뜨리자, 그들의 검은 비명을 지르며 부러졌고 한효월의 검이 그들을 양단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를 따라오너라."
한효월은 말과 함께 바람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무섭게 단호해지셨네……."
반쪽이 되어 죽어 넘어진 그들을 보자 유성은 신음했다.
말이 좋아 단호지, 실은 잔인(殘忍)해졌다 싶었다.
찍!
앞에서 소백이 뭐 하냐는 듯 소리를 질렀다.
이미 저만큼 앞서 나가 나무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간다! 가면 될 거 아니냐?"
유성은 투덜거리면서 급히 한효월의 뒤를 따랐다.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한 듯이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대단히 빠르게 번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