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三首 용문기변(龍門奇變) (25/113)

第三首  용문기변(龍門奇變)

-의혹이 구름처럼 일다.

흑의녀의 신비(神秘)는 후일을 준비하다.

 날이 밝았다.

 스러졌던 황혼은 새벽빛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밤새 잠 못 이루고 새벽을 맞는 한효월은 상쾌한 기분으로 그 새벽을 맞이할 수가 없다.

 그의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여전히 조건이 중얼거렸던 단어들.

 과연 빈양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의 의문을 뒤로하고 시간은 새벽을 가르며 달린다.

 그렇게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지만 명쾌하게 답은 나오지 않았다.

 황혼녘부터 시작한 고민이 이 시간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거기!"

 문득 한효월의 발길이 멎었다.

 "비, 비인-양(貧陽)…… 거, 거기……!"

 조건이 한 말 중, 거기라는 말은 어딘가 장소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빈양이란 것은 오히려 간단한 의미일 수도 있었다. 어딘가 빈양이란 이름을 가진 장소가 있을런지도 몰랐다.

 당시의 상황을 미루어보아 먼 곳은 아닐 터였다.

 바로 그 순간이다.

 "사숙!"

 감천형의 음성이 들려왔다.

 한효월의 앞에 나타난 그의 얼굴은 초조한 빛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라도?"

 "사매가 사라졌습니다."

 "사라지다니? 조 당주의 곁에서 간호하고 있지 않……."

 "없어졌습니다."

 감천형이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좌 사제가 사모님을 모시고 외부로 나가려다가 사매를 찾았는데, 없어서 확인해 본 결과, 은밀히 맹주부에서 벗어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어젯밤에 나간 것 같습니다."

 "밤?"

 "삼경이 넘어서 나간 것 같습니다."

 "그런……!"

 한효월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 시간이라면 독고경이 자신을 찾아왔을 무렵이다.

 "이 마당에 사매가 그런 철없는 짓을 하다니……."

 감천형이 답답한 듯 발을 굴렀다.

 "어쩌면 철없는 짓이 아닌지도 몰라."

 "무슨?"

 한효월의 말에 감천형이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잠시 미간을 찡그렸던 한효월은 불쑥 감천형에게 물었다.

 "혹시 낙양 일대에 빈양이란 지명을 가진 곳이 있나?"

 "빈양이요?"

 "음."

 갑자기 감천형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는 부르짖었다.

 "빈양동(貧陽洞)?!"

 "거기가 어디지?"

 한효월의 물음도 급해졌다.

*   *   *

 낙양은 누대(累代)의 고도(古都)다.

 그 오랜 세월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고, 그 세월은 수많은 고적(古蹟)을 낙양성 주변에 이루어놓았다.

 용문 또한 그것 중 하나였다.

 이수(伊水)의 동서 양안(兩岸)에 위치한 용문석굴은 낙양성 남쪽 40리 지점에 위치한다. 무려 1,354개의 석굴과 785개의 석감(石龕)으로 이루어진 이 용문석굴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인공으로 거대한 석벽을 쪼아내어 만들어진 것이다. 북위(北魏) 태화(太和) 19년(A.D.495년)에 시작된 이 거대한 작업은 송초(宋初)까지 무려 500년 간이란 시간을 두고 이루어졌다. 불상만 대소 10만 존(尊)이라 알려지고, 사방에 널린 비문(碑文)이 3,600건이나 된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용문석굴은 운강(雲崗), 돈황(敦煌), 맥적산(麥積山)의 석굴과 함께 중국의 사대석굴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수의 양안에 위치한 이 용문석굴 내의 거의 모든 저명한 석굴들은 강 서안에 위치해 있었다.

 가장 오래된 고양동(古陽洞)을 비롯하여 만불동(萬佛洞), 마애삼불동(磨崖三佛洞), 혜간동(惠簡洞) 등이 모두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궐(伊闕)이라 이름된 이곳 이수의 양쪽 절벽은 사람을 압도하는 바가 있고, 특히 밤에 본다면 양쪽 절벽이 시야를 가로막아 거대한 문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 들 정도다. 그래서 이곳, 용문은 따로 이궐용문이란 이름으로도 불린다.

 쏴아아-

 강바람이 세차다.

 이수의 찬 기운을 등에 업은 바람은 한효월의 옷자락을 잡아 흔들어놓는다. 그와 같이 신형을 날리고 있는 감천형의 옷자락도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이 그렇게 펄럭이고 있었다.

 그들의 시야 저 멀리 이궐용문의 모습이 급속히 다가오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무수한 석굴 중 하나가 그들의 목표였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었나 모르겠군요. 관제총에 오기 전이라면 당연히 용문을 거쳤을 테니, 조 당주가 무엇을 남겼다면 용문의 빈양동에 남겼을 가능성이 제일 클 겁니다."

 감천형이 계속해 말했다.

 "말씀대로, 이 일대에 자주 왔었던 사매가 먼저 생각을 하고 이곳에 왔을런지도 모르겠군요. 만약 그렇다면 정말……."

 감천형은 머리를 저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중대한 일을 알리지도 않고 이런 상황에서 혼자 움직인 그녀가 답답했던 것이다.

 거대한 마애불(磨崖佛)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저곳을 지나면 그들이 목적하는 용문 빈양동이다.

 낮보다는 적지만, 이름난 곳인만큼 밤에도 곳곳에 불이 밝혀져 있고, 치성을 드리는 신도들과 불피풍우(不避風雨)하면서 용맹전진하고 있는 승려들의 모습도 끊이지 않는다.

 이런 새벽녘이라면 새롭게 찾아드는 사람들로 용문석굴은 새벽을 맞이하게 된다.

 빈양동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용문석굴 중에서 빈양동이 차지하는 위치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석굴도 하나가 아니고 중동(中洞)과 남북이동을 합하여 모두 세 개나 되었다.

 "그럼!"

 감천형은 한효월과 눈짓을 교환하고 북동으로 신형을 날렸다.

 한효월은 미리 약속했던 대로 남동으로 달려갔다.

 좌우에서 조사를 시작하여 중동에서 만날 예정이었다.

 남동에 모셔진 것은 중동과 마찬가지로 석가여래본존이다.

 새벽녘이라고 해도 동굴 안은 어두웠다.

 그 안에서 한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 걸음을 안쪽으로 들어서자 그 기척을 느낀 것인지 그 사람이 눈을 들어 한효월을 쳐다본다. 회색의 승의를 걸친 노승(老僧)이었다. 나이는 고희가 넘어버린 듯하고 체구마저 작달막했다. 노승은 정성스레 불상들을 닦고 있는 중이었다.

 중얼중얼 불호를 외면서.

 훑어보았지만 별다른 것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긴 무엇을 남겼다 할지라도 그렇게 봐서 찾아낼 수 있도록 남겨두었을 리가 없을 터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가 어찌 천하무림맹의 눈과 귀였던 신기당주일 수가 있었을까.

 그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죄송하다는 듯 목례를 해 보인 한효월은 그대로 신형을 날려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빈양중동으로 날아간 것이다.

 그가 찰나간에 사라지자,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촛불 같은 노승이 허리를 펴고 손등으로 허리를 두드리면서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

 찰나간에 빈양중동에 도달해 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한효월의 발걸음이 문득 그 자리에 굳어졌다.

 그가 막 중동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좌우에서 삼엄(森嚴)한 검기가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뼈를 깎을 듯한 그 검기는 그가 앞으로 한 걸음만 더 나선다면 발동하겠다고 소리치는 듯했다.

 동구(洞口)의 좌우에 회의인 두 사람이 벽에 기대서 있었다. 그들의 나이는 얼핏 중년 정도로 보이는데 신색이 얼음처럼 찼다. 품에는 각기 한 자루의 검을 싸안다시피 하고 있는데 검기는 바로 그들에게서 발출되고 있었다.

 고요한 새벽.

 새벽의 대기를 뚫고서 어디선가 은은히 들려온 목탁 소리와 독경 소리가 어울린다.

 새벽 안개를 휘감고 자리한 수많은 불상들.

 그 불상에 떠오른 염화(拈花)의 미소들, 경건한 분위기다.

 하지만 이 빈양중동의 입구에는 그 경건함을 침묵으로 난도질하는 살벌한 검기가 날카롭게 숨 쉬고 있었다.

 회의중년인 둘은 무심한 듯한 눈빛으로 한효월을 쏘아본다.

 가슴에 싸안은 검은 한효월이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발동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검을 뽑기도 전에 이러한 기세를 발출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평범한 무인이 아님을 의미했다.

 한효월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을 뚫고 들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하나, 무력 행사가 능사는 아니다.

 그가 걸음을 멈춘 순간에 허물이 벗겨진 살갗을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던 검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이유가 한효월이 걸음을 멈추었기 때문이 아님은 이내 드러났다.

 한 사람이 빈양동에서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면사로 얼굴을 온통 가렸다.

 검은 비단으로 된 배자(褙子)를 걸친 그 사람은 일신에 온통 검은색 옷을 입었다. 심지어는 당혜(唐鞋)까지도 검다. 그리 크지 않은 키지만 왕가(王家)의 귀부인과 같은 귀티가 역력하다.

 그녀의 뒤에서는 그녀를 부축하듯 시녀 둘이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흑의귀부인은 그녀들의 부축을 받지 않고 스스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

 흑의 면사여인은 걸어나오다가 한효월을 발견하고는 잠시 주춤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것은 일순간,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효월을 향해 걸어나오는 꼴이다.

 그녀가 나오자 그림자처럼 회의중년인 둘이 그녀에 앞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움직이는 순간, 검기가 다시 한효월을 향해서 쏘아왔다. 이번에는 검의 손잡이[劒柄]를 잡은 상태라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일촉즉발(一觸卽發)!

 찰나가 영원 같은 순간, 한효월은 옆으로 물러났다.

 그녀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굳이 충돌을 자초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喪)을 입고 있는 듯한 그녀의 행색은 일반 강호인의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복식에 엄격한 제한이 있어서 평민은 결코 마음대로 아무런 옷이나 입을 수가 없었다.

 무림인으로서 굳이 관부와 충돌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금기였다. 산에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효월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굳이 그 앞을 가로막아야 할 만한 이유도 없는 것이다.

 회의중년인들은 한효월이 움직일 수 있는 방위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다. 흑의 면사여인이 시녀들과 함께 조금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는 사인교자(四人轎子)에 이를 때까지.

 그리고 그들은 훌훌 몸을 날려 교자와 함께 그곳을 떠나갔다.

 전혀 남의 눈을 거리끼지 않는 모습이다.

 "누굴까?"

 묘한 눈길로 아침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교자를 바라보고 있던 한효월의 안색이 찰나간에 급변했다.

 코끝을 스치는 피비린내!

 그의 신형이 거꾸로 곤두박질치듯이 회전하면서 방금 흑의 면사여인이 나온 빈양중동으로 날아 들어갔다.

 빈양중동에 모셔진 것도 석가모니 본존불이다.

 그런데 그 옆으로 어둠 속에 쓰러진 흑의인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나둘…… 얼핏 봐도 대여섯은 넘는 것 같았다.

 왕가의 귀부인으로 보인 여인이 떠나간 곳에서 시체라니!

 바로 그 순간, 한효월의 안색이 돌변했다.

 흑의인 한 사람이 그 석가상의 뒤에 우뚝 서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창백한 얼굴의 그녀는, 바로 그가 찾고 있던 독고경이었다.

 "사질녀!"

 한효월의 외침에 독고경은 희미한 눈빛으로 그를 보는 듯했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녀의 신형이 허물어지듯이 쓰러졌다.

 "어떻게 된 일이냐?"

 몸을 날려 쓰러지는 그녀를 부축한 한효월이 소리쳐 물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무너지듯 내리깔리는 눈까풀을 들어 한효월을 쳐다볼 뿐, 백납처럼 창백한 얼굴에 형용키 어려운 흔들림이 보이는 눈빛.

 그러고는 그만이었다.

 한효월의 팔에 축 늘어진 그녀의 몸무게만 눌려올 뿐. 그녀는 더 이상 눈을 뜨지 않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의 뒤에서 일진 격투 소리가 들려왔다.

 한효월이 굳은 표정으로 바깥을 쳐다보는 순간에 한 사람이 석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질?"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나타난 것은 감천형이었다.

 그의 손에는 선혈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는 그의 패도가 들려 있었다.

 "경아입니까?"

 감천형이 바람처럼 그의 곁으로 날아왔다.

 "괜찮아. 조금 다치긴 했지만 별문제는 없어 보이는군. 그런데……?"

 한효월의 말에 감천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바닥에 쓰러진 흑의인들을 발견한 것이다.

 "놈들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에도……?"

 "아니, 그들은 내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잠시 맡아주게."

 말과 함께 한효월은 그녀를 감천형에게 넘겨주고는 번개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새벽 안개는 여전하다.

 시력을 집중하여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가 찾는, 좀 전에 떠난 사인교자의 모습은 그새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그의 안력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였을까?"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고귀(高貴)한 신분의 여인일 수도 있었다.

 얼핏 본 것이지만 그녀의 옷차림은 일반인이 하기 힘든 것이었다. 명대에는 복식(服飾)에 관한 규제가 대단히 엄격하여 평민은 허락된 것 외에는 색깔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가 없었고, 차림새는 더 더욱 그러했었다.

 그렇기에 고귀한 신분을 지닌 여인이 호위 무사를 대동하여 기도를 하거나, 고인(故人)의 명복을 빌러 온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막상 빈양동 내부에서 벌어진 일은 그의 상상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기에 족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들.

 거기 벌어진 참경(慘景)은 일개 부녀자가 태연히 볼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침착했고, 게다가 한효월의 판단에 따르면 빈양동 내의 일은 그를 가로막았던 중년검수들이 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잠시 마주쳤던 그 눈빛.

 비록 면사를 가운데 두고 있긴 했지만 조용하고 침착한 그 눈빛은 결코 평범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만약 저 흑의인들을 쓰러뜨린 것이 그녀의 짓이라면…….

 "사숙!"

 뒤에서 감천형의 음성이 들려왔다.

 독고경을 안은 그가 서 있었다.

 "안에 있는 자들은 제천교도가 맞습니다. 놈들의 신패(信牌)가 있었습니다. 모두 가공할 내경(內勁)에 내부가 으스러져 즉사했군요. 사매의 솜씨가 아닙니다."

 "경아는?"

 "한바탕 악전을 벌이다가 뭔가 심한 충격을 받고 혼절한 것 같은데, 괴이하게도 깨어나질 않습니다. 지난번과 비슷한 증상인 듯합니다."

 한효월은 그녀의 맥을 짚었다.

 기혈의 움직임이 난마(亂麻)와 같다.

 "혼수상태로군……."

 한효월이 미간을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그들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러나 주위에서 은은히 들리는 목탁 소리와 독경 소리는 경건하기만 했다.

 격렬한 악전(惡戰).

 그리고 어떤 구원의 손길?

 아니면 심한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한효월을 보자 그간의 긴장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럼 그 충격을 준 사람은, 그녀에게 상처가 아니라 혼수상태에 빠질 만하게 충격을 준 사람은 누구일까. 지금으로써는 좀 전에 떠나간 흑의귀부인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저 혼자 돌아가란 말씀이십니까?"

 감천형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그럼 어쩔 수 없잖나. 기혈의 움직임으로 봐서 금방 깨어날 상태는 아니야. 그리고 조금쯤은 쉬게 해주는 게 그녀를 위해서 좋을 테고. 언제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마당에 혼수상태인 사람을 그대로 데리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한효월의 말은 구구절절이 옳다.

 "하지만 경아가 뭘 알아냈다면……."

 "그럼 다시 찾아오면 되겠지. 그동안 나는 여기서 조 당주의 흔적을 조사하고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감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경이 남자라면 품속을 뒤져서라도 뭔가를 찾아보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니 일단 그녀를 이곳에서 떠나게 하는 게 옳았다.

 그가 떠난 다음에 한효월은 신중하게 빈양동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독고경이 있던 그 중동에서부터 조사는 시작되었다.

 신중하게 살펴보자, 여러 곳에서 치열한 격전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곳곳에 묻어 있는 핏자국.

 그 흔적으로 미루어보아 싸움은 밖에서부터 안으로 이어진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독고경이 세불리하여 안으로 쫓겨 들어온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그렇게 이어졌던 흔적에 돌연 변화가 일었다. 독고경이 있던 불상을 중심으로 다가서던 발자국들이 어지러워지는가 싶더니 다시 입구 쪽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발자국들은 별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끝이었다.

 새로 나타난 적을 감당하지 못하고 단숨에 괴멸되어 버렸다는 의미다.

 그것을 증명하듯, 그 발자국의 주인들은 비칠거리며 뒤로 넘어간 모습이 역력하다. 그리고 그중 몇은 강력한 충격에 날아가 맞은편 벽에 패대기쳐지듯이 부딪쳤다가 떨어져 내려 널브러져 있었다.

 "이런 정도라면 대단한 고수로군……."

 상황을 판단해 낸 한효월이 부지중에 신음을 흘렸다.

 독고경을 포위 공격하던 자들은 새로 나타난 사람에게 제대로 반항도 하지 못하고 괴멸되었다.

 그러한 위력을 보인 사람이 방금 한효월과 만났던 여인이라면, 더욱 그 정체가 궁금했다.

 …….

 시간이 흘렀다.

 주변은 물론, 빈틈 하나하나를 세심히 조사했지만 잡다한 것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발견해 낼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효월의 안색이 점점 더 굳어졌다.

 설마, 누군가가 이미 그것을 찾아갔다는 것인가?

 자꾸만 그 흑의의 면사녀가 떠오르는 것은 공연한 생각일까.

 마침내 더 이상 찾기를 포기한 한효월은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한 사람이 입구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미타불…… 죄업(罪業)이로군, 업이야……."

 목을 빼밀고 안을 살펴보던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이내 주절주절 독경을 시작한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면서.

 "나무동방(南無東方) 해탈주세계(解脫主世界) 허공공덕(虛空功德) 청정미진(淸淨微塵) 등목단정(等目端正) 공덕상(功德相)이라……."

 조금 전에 한효월이 옆의 빈양북동에서 보았던 그 노승이었다.

 "쯧쯔…… 이렇듯 갈 것을 무에 그리 할 일이 많다고 칼들을 들고 설친단 말인고? 아미타불, 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노승은 한효월이 보이지도 않는 듯 죽어 있는 흑의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부릅뜬 눈을 감겨주었다.

 조용하고도 정성스러운 손길이었다.

 그 모습을 한효월은 묘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

 해가 떠오르는 중이라고는 하지만 석굴 안은 아직도 어두웠다.

 그 어스름 속에 피비린내가 번지는 빈양동 내부의 정경(情景)은 자못 참혹했다. 그러나 노승에게서 겁을 내거나 저어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연신 불호를 외면서 죽은 흑의인들의 눈을 감겨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는 흑의인들을 석실 바닥에 가지런히 정돈했다.

 석실 안에서 들리는 것은 그의 독경음과 흑의인들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

 한효월은 조용히 서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보기완 다르게 무정하군……."

 무서운 타격을 받고 날아가 보살입상에 뒷머리를 받고 즉사한 마지막 흑의인을 질질 끌고 나와 다른 흑의인들과 함께 뉘어놓은 노승이 손등으로 툭툭,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나면서 한 말이다.

 그가 눈을 꿈벅거리면서 한효월을 보고 있었다.

 "그들을 죽인 것은 제가 아닙니다."

 한효월의 대답에 노승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가 죽였든, 사람이 죽고 나면 모든 은원은 사라지는 법. 이들의 마지막 가는 길에 손을 나누어준다고 해서 무에 잘못될 일이 있을꼬?"

 그의 말에 한효월은 미미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음이 넉넉하질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러자 노승은 한효월을 보면서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조급하다 하여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삶이니, 둘러가는 길이 오히려 더 빠를 수도 있을게요. 아미타불……. 이 늙은이를 잠시 도와주지 않겠소? 시신들을 여기에 이대로 버려둘 수는 없으니……."

 한효월은 노승에게 포권하여 보였다.

 "도와드렸으면 좋겠지만 화급한 일이 있어서…… 대신 아래로 내려가서 사람들을 올려보내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신형을 돌리던 한효월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노승을 본다.

 "혹시 좀 전의 그 부인을 아십니까?"

 한효월의 물음에, 노승은 눈썹을 꿈틀하더니 피식, 웃었다.

 "석굴을 지키며 사는 늙은 중이니 많은 시주들을 볼 수밖에. 하나 방금 본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판에, 그 많은 사람들을 어찌 다 기억할 수가 있겠소? 쯧쯧……."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한효월이 다시 물었다.

 "대사의 명호(名號)는 어찌 되십니까?"

 그의 물음에 노승은 가벼이 웃었다. 그에 따라 깊게 패이는 주름이 세월의 무게로써 그의 얼굴을 자애하게 만든다.

 "이 늙은 중의 이름을 알아 뭘 하겠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며, 또한 내일의 내가 아닐진대……. 전생의 나는 뱀이었을 수도 있고, 나비였을 수도 있소. 아니, 지금 소시주의 앞에 서 있는 나는 어쩌면 소시주의 꿈속에 나타난 것일 수도 있겠지. 이 늙은이가 과연 내일 무엇이 될지 누가 알겠소? 그런 허울을 알아봤댔자 무슨 의미가 있겠소?"

 휘황한 말인 듯하지만 그 말속에는 묘한 현기(玄機)가 서려 있는 듯했다. 마치 장자(莊子)의 한 구절을 읊조리는 듯하다.

 한효월은 여전히 침착한 어조로 대꾸했다.

 "사람이 바뀐다 한들, 어찌 그 본신(本身)이 바뀌겠습니까?"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노승은 문득 파안대소했다.

 "본신, 본신이라……. 과연 언제의 내가 본신일꼬? 굳이 그렇게 알고 싶다면 그냥 무명(無明)이라 부르면 되겠구료."

 무명이란 진여(眞如)가 한결같이 평등함을 알지 못하고 현상의 차별적인 모습에 미혹되어 온갖 번뇌와 망상의 근본이 됨을 의미한다.

 하필이면 왜 그런 이름일까.

 "무명?"

 한효월은 부지중에 그 이름을 되뇌었다.

 무명(無名), 이름없음도 아니라…… 무명(無明)이란 건가?

 묘한 느낌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가능한 빨리 맹주부로 돌아가 봐야 했다. 독고경이 그렇게 된 것에는 까닭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분명히 신안금조 조건이 남긴 물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기에.

 바로 그 순간, 한효월은 노승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오름을 보았다.

 "소시주! 조심하시오……!"

 노승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가 채 소리치기도 전에 무서운 힘 한줄기가 한효월의 등 뒤에 도달했다.

 그것은 기척도 없다가 돌연 나타나 한효월을 덮쳤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보이지 않는 창(槍)이다.

 암습(暗襲)은 느끼기 전에 날아든다.

 그리고 그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다음이기에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게 된다. 더구나 지금 한효월의 등 뒤에서 다가온 암격(暗擊)은 가장 무서워 그의 등 뒤에 이르기 전까지는 살기조차 일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상대를 죽이고자 한다면 살기(殺氣)가 일어난다.

 그렇기에 고수는 위험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러나 살기조차 감추는 암습자라면 그 무서움은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효월을 공격해 온 것이 바로 그러한 자였다.

 그를 공격한 것은 두 자 한 치가량의 묘한 생김을 한 검이다.

 공기의 파동조차 느껴지지 않게 조용하고도 빠르게 다가온 그 필살의 일검은 한효월에게서 묘한 움직임이 일자 돌연, 무섭게 빨라졌다.

 그 속도는 말 그대로 전광석화(電光石火)!

 노승이 위험이라고 소리치는 순간에 이미 한효월의 등을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

 하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한효월은 위기의 순간에 격렬하게 앞으로 엎어졌다.

 뒤를 돌아보거나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면 그는 그 놀라운 속도의 일검을 결코 피할 수가 없었을 터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검이 그의 등을 꿰뚫는 대신 허공을 찌르는 그 순간에 그는 거의 땅에 처박히던 신형을 뒤집었다. 등이 거의 땅바닥에 닿을 지경이다.

 그러자 암습자를 볼 수 있었다.

 검은 복면을 한 자.

 전신을 온통 검은빛으로 휘감은 자.

 신발까지도 검은빛이었다.

 그는 필살의 일검이 허탕을 치자 경악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과연 대단하여 검이 허공을 찌르는 순간에 이미 손목을 움직여 그 검으로 아래를 갈라냈다. 그의 검은 그렇게 빨리 움직이기 위하여 그렇듯 짧았던 것이다.

 스파앗!

 한효월의 몸이 그대로 두 쪽이 나고 말았다.

 하나 그 또한 착각.

 한효월의 신형은 이미 그 자리에서 한 자가량을 이동하여 벌떡 일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복면괴인의 일검이 변초(變招)하여 땅바닥을 가른 것과 거의 동시라 해도 좋았다.

 검이 석굴의 바닥을 찌르기 직전, 복면괴인은 급격히 숨을 들이키면서 이미 검을 회수하면서 일어서는 한효월을 전광과도 같이 베어갔다.

 정말 놀라운 운검(運劒)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찰나, 한효월이 한 손을 쳐들었다.

 쏴악!

 그에게서 질풍신뢰와도 같은 일장이 쏟아져 나갔다.

 그 일장은 놀랍게도 자신을 베어오던 괴검(怪劒)을 땅!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내버리면서 그대로 뻗어 나가 흑의복면인의 가슴을 쳤다.

 펑!

 "으와악!"

 흑의복면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의 신형이 태풍에 휘말린 가랑잎과 같이 훌쩍 날아올랐다 석굴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한효월은 조금도 쉬지 않고 바람처럼 그를 쫓아 밖으로 날아갔다.

 정말 놀랍기 이를 데 없는 움직임.

 모든 일은 긴 듯했지만 실제로 암습한 흑의복면인이 한효월의 일장에 날아가 버린 것은 노승이 소리친 것과 거의 같은 순간일 정도로 신속무비하였다.

 밖으로 날아 나온 한효월은 땅바닥에 쓰러진 흑의복면인을 살펴보았다.

 그는 널브러진 채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효월의 일격에 이미 심맥이 끊어져 즉사한 다음이었다.

 "손을 너무 과하게 썼구나."

 한효월이 신음했다.

 강도를 조절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아미타불……."

 그를 따라 나온 노승이 그 광경을 보면서 연신 불호를 외었다.

 또 하나의 주검이 늘었다.

 그 주검을 바라보고 있던 한효월은 무거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가 벗긴 복면 속에서 드러난 것은 사십 대 장한의 얼굴.

 그러나 푸르스름한 빛을 띤 그의 얼굴은 방금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닌 듯 섬뜩해 보였다. 아직 가슴에 온기가 남아 있지만 그를 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품속을 뒤졌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망각의 저편에서 불쑥 뛰쳐나온 사람인 양, 그의 품속에서 그가 누구인지를 유추할 만한 것은 철저하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 복면인의 수중에는 반 토막의 검이 쥐어져 아침 햇살에 빛을 뿌린다.

 "역시 그들이란 건가?"

 한효월은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뇌리에는 지난번에 그를 공격했던 복면인이 떠오르고 있었다.

 요광성주와 함께 나타났던 자, 가마 속에 있다가 그를 공격했던 그 복면인. 그의 움직임도 이자와 유사했었다.

 이 복면인이 제천교도라면, 그들이 이미 이 일대에 퍼져 있다는 뜻.

 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여기에 온 것일까?

 문득 한효월의 안색이 굳어졌다.

 "설마?!"

 설마 그들도 신안금조가 남긴 것을 찾아서 여기에 온 것이란 말인가?

 한효월은 연신 불호를 외는 노승을 향해 가벼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절정에 달한 신법. 그의 사문에서 전하는 경공 절기(絶技)인 비운축전이었다.

 쏴아아…….

 독경 소리에 어우러져 저 멀리 이수의 물소리가 들려온다.

 "아미타불……."

 한효월이 사라지고 잠시 시간이 흐른 어느 순간인가, 노승은 길게 불호를 흘려낸다.

 그의 자애했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굳어져 있는 듯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겁난(劫亂)이로고. 겁난이야……."

 그의 무겁고도 긴 탄식이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이수의 물소리에 묻혀 사라져 갔다.

*   *   *

 "흐으윽……."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 지독한 공포, 그 끔찍한 기억들.

 앙다문 이. 턱이 부서져라 꽉 다문 이빨 사이를 비집고서 다시금 신음이 흘러나온다.

 "주, 죽일 놈들……."

 조건, 신안금조 조건은 이를 갈았다.

 진땀이 전신을 적신다. 그보다 더한 소름이 온몸 구석구석을 전율로 떨리게 한다.

 이 처절한 배신감을 무엇으로 가라앉힐 수가 있단 말인가.

 뿌연 기억 저 멀리 거대한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아련히 드러난다.

 평생을 통해 유일하게 존경했던 존재.

 점차 뚜렷이 드러나는 그 모습은 건곤무적 독고해.

 건곤무적 독고해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무거운 얼굴로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곤 그에게 등을 보이며 천천히 멀어져 간다.

 희뿌연 안개가 그를 감싸며 흐려진다.

 "매, 맹주님……. 맹주……!"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본 신안금조 조건은 안간힘을 쓰면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는 무정히 사라져 버렸다.

 돌아보지조차 않고.

 "맹……!"

 안간힘을 쓰던 신안금조 조건은 번쩍 눈을 떴다.

 희뿌연 어둠이 눈으로 쏘아 들어온다.

 어딘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그는 벌떡이는 가슴을 조용히 가라앉히며 이내 자신을 수습했다.

 무림맹의 신기당주는 그냥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냉철하고 지적인 사람이었다. 강인한 정신력과 판단력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러한 자리에서 수십 년을 지내면서 천하무림의 동태를 파악할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상황이 정리된다.

 한 사람을 만나 구원을 받았던 것까지 기억이 되살아났다.

 '여기는…….'

 그는 자신이 움직이기 거북한 상태임을 경각하고는 누운 채로 조용히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다.

 비몽사몽간에 감천형을 본 것도 같다.

 그렇다면 여기는 맹주부란 말일까?

 그때 한 사람이 소리도 없이 안으로 스며 들어오는 것을 그는 보게 되었다. 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천장에서 한 덩이 솜처럼 조용히 떨어져 내리는 것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그가 복면을 하고 있음을 본 신안금조 조건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객?!'

*   *   *

 "빌어먹을!"

 침착하고 냉정하여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다는 좌백.

 그가 참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참고자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남의 눈을 피해 사모님을 호송해야 하다니. 가는 길도 가슴이 터질 듯했다. 그러나 이렇게 터덜터덜 돌아가는 길은 침착한 그의 성격으로서도 미칠 것만 같아 참기가 힘들었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봉설란을 호송한 그는 치미는 격정을 참지 못하고 미친 듯 달려서 맹주부로 향했다.

 경공에 뛰어난 점이 있는 그가 전력을 다하자 바람이 사납게 갈라졌고 이내 맹주부가 그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어차피 은밀히 떠난 맹주부였다.

 그는 소리없이 담을 넘었다.

 미리 약속해 둔 곳이라서 그곳을 경비하고 있던 호맹위사는 좌백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그의 통과를 묵인했다.

 맹주부로 돌아온 그는 급히 한효월의 거처로 향했다.

 사매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사숙도, 사형도 없었다.

 사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란 말인가?'

 가슴이 답답해 깊이 심호흡을 하면서 서성이던 그의 신형이 문득 뚝, 멎었다.

 무엇인가 이상한 소리가 한효월의 거처 안에서 난 듯했기 때문이다.

 좌백의 눈빛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발끝이 땅을 누르는 순간에 그의 신형이 무섭게 문으로 날아갔다. 밖의 경비에도 이상이 없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생겼을 리는 없겠지만 설마…….

 혹시라도 몰라서 문을 걷어차는 일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내력으로 문을 슬쩍 밀자 문고리가 찰나간에 뚝, 부러지면서 문이 활짝 열렸다.

 "……!"

 그렇게 안으로 들어선 좌백의 안색이 흙빛으로 굳어졌다.

 놀랍게도 복면을 한 자객 하나가 신안금조 조건을 향해 덮쳐 가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의 눈을 의심케 한 것은 신안금조 조건이 정신을 차리고 그 자객을 향해 베고 있던 베개를 집어 던졌다는 것. 그가 들었던 소리는 바로 그 던진 베개를 자객이 쳐낸 것이었으니 좌백이 안으로 달려 들어온 것이 얼마나 빨랐던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감히!"

 좌백이 노호하면서 손을 휘둘렀다.

 섬광이 벼락처럼 날았다.

 그가 느닷없이 나타나자 복면의 자객은 움찔했다.

 그 찰나간에 섬광이 그에게 날아들었고, 좌백은 이미 그의 눈앞에 날아들고 있었다. 놀랍도록 빨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신안금조 조건을 공격함을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의 일장은 신안금조 조건을 쳤다…….

*   *   *

 맹주부, 한효월의 거처.

 사람들은 맹주부 전체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한효월의 침상에 누운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신안금조 조건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납덩이처럼 굳은 채였다.

 호전되어 가던 조건의 안색은 백지장과 같았고, 그의 입에서 흘러내린 핏자국은 아직 역력했다.

 "자결을?"

 "그렇습니다."

 좌백이 한효월의 물음에 일그러진 얼굴로 답했다.

 "순찰을 돌던 제가 이상을 발견하고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 놈은 조 당주를 죽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발각된 자객은 조건을 공격했고, 그 공격을 좌백이 막아냈지만 그는 결국 도주하다가 막히게 되자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처럼 경계를 하고 있었음에도 맹주부에 자객이 마음대로 든다는 것은 정말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쉽게 깨어나기 힘들 것 같습니다."

 한효월이 굳은 얼굴로 진맥하는 것을 지켜보던 감천형이 입을 열었다.

 "그렇군……."

 한효월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손을 떼었다.

 감천형의 말은 틀림없었다.

 신안금조 조건의 상태는 아주 위중했다.

 이제 누구도 그가 다시 깨어날 수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그 말은 그의 입을 통해서 그가 알리고자 했던 말을 다시 들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사질녀는?"

 생각에 잠겨 있던 한효월이 물었다.

 "사모님의 거처에 있습니다."

 좌백이 대답했다.

 "사모님께서는 안가로 옮기셨습니다."

 감천형이 말했다.

 그 말은 봉설란의 거처가 비었다는 뜻이다.

 "기어코 가셨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사모님을 호송하기 위해서 좌 사제가 자리를 비웠다가 이런 변이……."

 감천형이 신음을 흘렸다.

*   *   *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오늘 맹주부를 떠나 화산으로 간다.

 바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얼굴은 무겁고도 긴장이 된 상태였다.

 그러나, 아취소축에 당도한 그들은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진자양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 있어야 할 독고경.

 침상에 고이 누워 있어야 할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한효월과 감천형의 눈길에 진자양은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면목이 없소."

 그의 뒤로는 서너 명의 화산 제자들이 창백한 안색으로 머리를 떨군 채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영애(令愛)가 사라졌소."

 내심 불길했던 감천형의 안색이 돌변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사라지다니? 사매가 말입니까?"

 "그렇소. 나도 방금 보고를 받고 달려왔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영애가 감쪽같이 사라졌소."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일……!"

 감천형은 진자양을 밀어젖히듯이 황급하게 침상으로 달려갔다.

 그녀를 덮어주었던 이불이 흐트러져 있었다.

 "조사를 해봤는데, 납치가 된 것 같지는 않소."

 그의 뒤에서 진자양이 말했다.

 "납치가 아니라면 스스로 나갔다는 겁니까?"

 "장담은 할 수 없소. 하지만 바깥을 지키고 있던 제자들의 말로는 누구도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없었소. 이곳에 비밀 통로가 없다면 흔적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서, 더더구나 사람을 납치해서 사라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

 한효월과 감천형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잇단 변고.

 뭐라고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밀어젖혀진 이불.

 그 이불의 흐트러진 모습은 분명히 침상에 누웠던 사람이 이불을 젖히면서 일어날 때의 것으로 보였다. 다른 사람이 이불을 젖히고 늘어진 사람을 안아 일으키려면 결코 저런 형태는 아닐 터이다.

 "다른 통로가 있나?"

 한효월이 감천형에게 물었다.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

 무거운 침묵이 강물처럼 방 안을 흘렀다.

 "정신을 차렸었던가?"

 문득 한효월이 물었다.

 "아닙니다. 혼수상태에 빠져서 아무리 해도 깨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사매를 안치하고 장내의 일을 처리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뭣들 하느냐? 당장 나가서 찾아보지 않고!"

 진자양이 눈을 부릅뜨고서 냉엄히 소리쳤다.

 맹주부가 발칵 뒤집혔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올라 있는 듯했다.

 한효월은 봉설란의 거처인 아취소축의 화단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 아름다웠던 화단도 몇 차례의 변고를 겪으면서 엉망이 되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그냥 답답하니까라고 생각할 터이지만, 지금 그는 천기(天機)를 짚어보는 중이었다. 천기라면 거창하지만 이 손가락으로 짚어가는 천간지지(天干地支)는 간단한 예측에는 의외로 신통한 효력을 발휘한다.

 "놀람은 있되, 화(禍)는 없을 것 같군……."

 한참 만에 그가 중얼거린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기이한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 흰빛이 번개처럼 한효월을 향하여 날아들었다.

 놀란 빛이 한효월의 얼굴에 떠올랐다.

 느닷없이 한효월에게 날아든 것은 어떤 습격이 아니었다.

 "찍찍……!"

 한효월의 품으로 날아들어 묘한 울음을 토하는 것은 작은 다람쥐였다. 아니,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람쥐가 아니었다. 꼬리가 조금 더 넓게 퍼졌고 몸체가 더 작은 데다가 약간 길었고 얼굴 생김도 달랐다. 게다가 전신이 백설처럼 흰 데다 검은 선 두 가닥이 머리에서부터 꼬리까지 길게 뻗어 있어, 그야말로 귀엽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다.

 "소백(小白)?"

 품에 파고든 그놈을 본 한효월이 놀라 중얼거렸다.

 한효월이 아는 척하자 놈은 코끝을 찡긋거리면서 그의 가슴에다 얼굴을 비벼댄다. 착착 감기는 것이 귀엽고 앙증맞기 이를 데 없다.

 "아니, 성아는 어디 가고 너 혼자 온 거냐?"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이 소백이라 불린 놈은 발딱 고개를 들었다. 그 흑요석 같은 눈에 다급한 빛이 떠올랐다.

 "찍찍!"

 소백은 입으로 한효월의 가슴팍 옷을 잡아당기더니 폴짝, 뛰어 바람처럼 앞으로 쏘아갔다.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아서 흰 그림자가 번뜩인 듯하더니 이내 종적이 사라져 버릴 정도였다.

 놀랍도록 빨랐다.

 "어딜 가려는 거냐? 돌아와!"

 한효월이 소리쳤다.

 다시 바람처럼 소백이 한효월에게로 돌아왔다.

 어떤 절정고수의 신법에 못지 않게 빨랐다. 빠를 뿐만 아니라 도약력도 놀라워서 한효월의 품으로 뛰어오르는 게 아주 간단했다.

 "성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냐?"

 그 말을 알아듣는 듯 소백은 다시 고개를 급하게 끄덕인다.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폼이 누가 봐도 뭔가 급한 일이 있음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원래 이 소백이란 놈은 담비[貂]의 일종이다.

 하지만 풍초(風貂)라고 하는 아주 희귀한 혈통을 이어받아 몸체는 작지만 움직임이 바람처럼 빨랐다. 거기에 발톱과 이빨이 날카로워 호랑이라 할지라도 당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뿐인가?

 영리하기 짝이 없으니 산속에서 한효월과 살면서 외로웠던 유성은 이 소백을 가족처럼 사랑해서 늘 품고 다녔었다. 놈의 유일한 단점은 지독하게 게으르다는 것인데, 이처럼 다급한 것은 그 주인인 유성에게 무엇인가 심각한 일이 일어났다는 뜻에 다름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유성의 연락이 너무 늦어서 걱정하고 있던 한효월이다.

 "성아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느냐?"

 "찍!"

 뭔 잔말이 그렇게 많냐는 듯, 소백이 코끝을 찡그렸다.

 그가 미적거리는 게 슬슬 열받는 듯 작은 코끝 주변의 수염이 연신 실룩거리는 게 귀엽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놈이 한번 화나면 단숨에 호랑이라도 눈알을 뽑아버릴 정도로 성질이 더러운 걸 누가 알랴.

 "알았다! 먼저 할 일이 있으니 이리 오너라."

 한효월은 다시 몸을 날리려는 소백의 등덜미를 잡아채서 아취소축으로 돌아갔다.

 찍, 찍!!

 소백이 놓으라는 듯 전신을 바둥거리며 앙탈을 했다.

 "알았지? 거기 누워 있던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찾아봐."

 한효월은 독고경이 누워 있던 자리의 냄새를 소백에게 맡게 했다.

 코끝을 쫑긋거리면서 한효월과 침상을 바라보던 소백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찍, 하는 소리와 함께 침상 위로 올라갔다.

 놈은 잠시 냄새를 맡아보더니 이내 창문을 통해서 바람처럼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는 직선으로 뒤편에 자리한 가산(假山)을 향해 달렸다.

 가산에는 초목이 무성했다.

 규모도 그리 작지는 않지만 이미 한 번 수색을 한 곳이다.

 그러나 한효월은 가산에 들어서자 순간적으로 소백의 종적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소백? 어디 있느냐?"

 한효월이 소리쳤다.

 "찍! 찌……."

 커다란 고목(古木), 하늘을 가릴 듯 높다란 그 나무 뒤에서 소백이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한 사람의 어깨에 자랑스러이 앉아서.

 "경아!"

 한효월은 독고경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를 불렀다.

 정말이었다.

 하늘을 가릴 듯 거대한 가지를 벌리며 자리한 그 고송(古松)의 밑둥에 기대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는 것은 사라졌던 독고경이었다. 장정 둘이 팔을 벌려야 맞잡을 수 있는 둘레를 가진 고송의 아래 부분에는 제법 큼직한 구멍이 나 있고, 그것은 무성한 수풀에 가리워 있어서 그 풀을 헤치지 않는다면 볼 수가 없는 구조였다.

 게다가 가산의 조경을 위한 바위들까지 주변에 널려 있으니 수색을 했다고 해도 발견하기 힘들었던 것이 당연해 보였다.

 한효월의 부름에도 독고경은 눈을 뜨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녀는 여전히 혼수상태였던 것이다.

 손을 내밀어 그녀의 맥을 짚은 한효월은 그녀의 기혈이 혼란스럽기만 할 뿐,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임을 알고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다음에 그가 한 일은 그녀의 발을 보는 것이었다.

 신발을 신지 않은 그녀의 작은 발은 흙투성이였다.

 그것은, 그녀가 납치당한 것이 아님을 의미했다.

 납치되지 않았다는 것은 스스로 걸어나왔다는 것.

 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그때, 한효월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았던 것인지 감천형이 다시 달려왔다.

 자는 듯 누워 있는 독고경을 본 감천형은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별 이상은 없는 듯하니, 데려다 안정을 취하게 하고 잘 돌봐주도록 해. 깨어나는 대로 상황을 알아보고……."

 "어디 가시려고?"

 "급히 가봐야 할 것 같아."

 한효월은 간단하게 유성의 일을 감천형에게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혼자 가셔서는……."

 "아니, 나 혼자 가겠네. 화산으로 출발은 언제하지?"

 "곧 할 것 같습니다. 원래는 사모님을 호송한 다음, 바로 할 예정이었는데 사매 때문에 늦어진 거지요. 하지만 사매를 찾은 이상 더 늦출 이유가 없겠지요. 그러나……."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 없어. 출발하게. 필요하면 내가 연락하지. 뭔가를 알아내면 내가 가든지 아니면 사람을 시켜서라도 화산으로 연락을 할 테니까. 아, 그리고 혹시 깨어나거든 상황을 잘 알아보게. 지금 현재로서는 조 당주가 알아낸 일을 아는 건 사질녀뿐일런지도 몰라."

 "알겠습니다."

 더 이상 다른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다.

 감천형은 황급히 떠나는 한효월을 전송해야 했다.

 대체 왜 그녀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몽유병 환자처럼 자리를 떠나 여기에 이렇게 숨어 있는지 첩첩이 의문은 남았다.

 이제부터 그것을 알아봐야만 할 터이다.

 하지만 감천형은 한효월을 전송하느라고 미처 보지 못했다.

 독고경.

 그녀가 눈을 뜨고 떠나는 한효월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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