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二首 혼세난정(混世亂情) (24/113)

第二首  혼세난정(混世亂情)

-내일을 기약하다.

단서의 행방(行方)은 의혹에 잠기다.

 밤새 타오른 불길 때문이었을까.

 하룻밤 새 폐허가 된 맹주부는 아침 해가 밝아오고 있음에도 짙은 안개에 휩싸여 깨어날 줄 모르고 있었다.

 잠들었던 모든 것들이 깨어나는 시점이다.

 하지만 무림맹주부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한효월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하였다.

 감천형과 좌백, 그리고 독고경은 조금의 거리를 두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앞서 간 한효월의 거처.

 그의 거처는 맹의 중심부가 아니라서 이번 참화를 비켜갔다.

 "아무리 그렇지만 이건 너무합니다."

 문득 감천형의 뒤에서 불만 섞인 음성이 터져 나왔다.

 좌백이 일그러진 얼굴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결정이다."

 그 뒤를 따라오고 있던 감천형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왜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곳은 사부님께서 지난 수십 년 간을 피땀으로 지켜온 맹주부입니다. 다른 문파들의 의견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맹주부를 화산으로 옮긴다는 것은……."

 "이 폐허를 맹주부라고, 무림맹주부라고 지키고 있는 것이 과연 옳겠느냐? 그게 사부님이 바라는 바일까? 그는 화산파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돌아간 다음에 너는 이 폐허를 지킬 자신이 있느냐?"

 "……."

 좌백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 표정은 참혹할 정도였다.

 그도 안다.

 사형인 감천형의 말이 옳은 것임을, 구구절절 옳은 것임을 머리로는 안다. 그런데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를 않는 것이다.

 "아버님이 바라는 게 뭐죠?"

 독고경이 코웃음 쳤다.

 "사부의 시신조차 지키지 못한 제자들에게 과연 무엇을 바라고 계실까요? 평생을 두고 일군 그 기업을 이렇게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그 제자들이 얼마나 대견하실까요?"

 "사매!"

 듣다 못한 좌백이 그녀를 불렀다.

 늘 침착하던 그였지만, 그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슴이 아픈 판에 정곡을 찔리자 참을 수가 없어진 것이다.

 "그만두어라."

 감천형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다툴 일이 아니다. 버틸 수 없다면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권토중래(捲土重來).

 그 말을 입 밖으로 내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한신(韓信)이 무뢰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던 때의 심정을 그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과연 한신과 같이 오늘의 이 치욕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것인지는 그도 알지 못한다.

 분위기가 무거워서인지 독고경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한효월의 거처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의 거처에는 두 명의 위사가 굳은 얼굴로 번을 서고 있다가 그들을 맞았다. 일원, 오당, 사개위대의 대부분이 붕괴된 지금, 그의 거처를 위사가 지키고 있다 함은 거기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뜻.

 감천형 등이 들어섰을 때, 한효월은 신중히 침상에 누운 사람의 맥을 짚고 있었다.

 바로 그가 구해온 신안금조 조건이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습니까?"

 좌백이 물었다.

 "좋지 않군……."

 맥을 짚고 있던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신안금조 조건 때문에 그는 대책 회의가 끝날 무렵, 먼저 자리를 떴다.

 "살릴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까?"

 좌백이 신음과 같은 음성을 흘려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다."

 좌백의 물음에 한효월이 말했다.

 "그럼……?"

 뭐가 문제냐는 듯 좌백이 한효월을 쳐다보았다.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한효월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침상의 신안금조 조건. 무림맹의 머리요, 눈이며 귀였던 그는 혼수상태로 시체와 같이 누워 있다.

 "머리를 다쳤다면?"

 "깨어나 봐야 알겠지만, 어쩌면 지난 일을 기억하지 못할런지도 모른다."

 "그, 그런!"

 좌백이 입을 벌렸다.

 "다른 방도가 없겠습니까?"

 감천형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가 생각하던 것이 모조리 어그러지는 느낌.

 그는 원래 맹을 화산의 진자양에게 맡기고는 신안금조가 알아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단신으로라도 적의 내부를 파헤쳐 볼 심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아무 말도 못할 수도 있다니…….

 "아직 속단은 이르다. 깨어나 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니까."

 "언제 깨어납니까?"

 "너무 지치고 너무 참혹하게 당했다. 어떤 사명감을 지니지 못했다면 아마 살아오기 힘들었을 상태……. 바꾸어 말하면 그가 우리에게 해줄 말이 있었다는 뜻이겠지."

 한효월이 맥을 잡고 있던 신안금조의 손을 놓으며 중얼거렸다.

 "제, 제천……."

 그때, 신음처럼 신안금조 조건이 입술을 떨었다.

 "조 당주! 정신이 듭니까?"

 "크으으…… 그, 그들을 막아야…… 그들을…… 크으윽! 맹주우……."

 신안금조 조건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마치 학질이라도 걸린 듯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이다.

 "사숙!"

 좌백이 한효월을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피투성이가 된 신안금조 조건이 그처럼 괴로워하고 있는데도 한효월은 미동도 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 걱정은 기우(杞憂)가 될런지도 모르겠군……."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한효월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왜 진 대행의 청을 거절하셨습니까?"

 먼저 입을 연 것은 감천형이었다.

 한효월과 감천형, 그리고 좌백은 집 앞을 거닐고 있었다.

 "내가 무슨 거절을 했다는 거지?"

 "그가 한 말은 사숙께서 맹에 남아 있으면서 도와달라는 뜻. 그런데 사숙께서 하신 말씀은……."

 "변화를 줄 때가 되었지?"

 문득 희미한 웃음이 한효월의 얼굴에 떠오른다.

 "지금 상태로서는 적의 의도를 알아낼 재간이 없다. 그런 면에서 내 생각은 감 사질과 같아. 맹을 떠나 적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

 "어떻게 아셨습니까?"

 감천형이 놀라 물었다.

 원래 그는 진자양에게 무림맹을 맡기고 나면 단신으로 움직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결심은 진자양이 나타난 다음, 그의 능력을 보고 한 것이라 아직까지 누구와도 의논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내심을 한효월이 이미 꿰뚫고 있다니 놀랄 수밖에.

 "내 생각도 같으니까!"

 한효월이 문득 미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나 난 몰라도 감 사질이 맹을 떠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군."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든 감천형과 좌백의 눈빛이 흔들렸다.

 안개를 헤치며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육합무적검 진자양이다.

 육합무적검 진자양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손은 힘없이 내던져진 신안금조 조건의 맥을 짚고 있었다.

 출혈이 심했던 것인지 조건의 얼굴은 물론, 손까지도 백지장과 같이 아예 핏기가 없었다. 예리한 감각으로 천하의 정세를 판단하고, 앞날을 예측했던 그는 참혹한 모습으로 정신을 놓은 채 깨어날 줄 모른다.

 "쉽게 깨어날 것 같지 않군……."

 진자양이 손을 떼면서 중얼거렸다.

 "내외상이 모두 심합니다."

 한효월이 조용하게 답했다.

 방 안에는 그와 감천형, 그리고 진자양이 굳은 얼굴로 침상에 누운 조건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입은 상처로 보건대, 그가 얼마나 흉험한 저지를 뚫고 여기까지 당도한 것인지 짐작이 갈 것 같군요. 한 공자의 생각으로는 그가 언제쯤 깨어날 것 같습니까?"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요? 조 당주께서 아무런 연락도 못하고 있다가 이처럼 전력을 기울여 돌아오려고 했다는 것은 그만큼 중대한 일이 있다는 뜻일 텐데……."

 한효월의 답에 진자양이 중얼거렸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뜨린 것은 진자양이었다.

 "암중의 적이 가진 힘은 실로 막강한 듯합니다."

 한효월과 감천형은 입을 열지 않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극비리에 화산을 떠났고, 화산파 내에서도 내가 개관(開關)한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인데…… 여기에 이르기까지 두 차례나 적의 기습을 받아야 했었습니다."

 진자양의 굳은 표정.

 그의 말에 한효월과 감천형의 얼굴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적이 이미 천하를 눈 아래 두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막강한 전력을 가진 자들이라 할지라도 천하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알기는 힘들다. 더더구나 화산파 내에서도 극비에 붙여진 움직임을 미리 알고 그 앞길까지 막았다니…….

 천하무림의 맹주라는, 천하무림맹에서는 그가 당도할 때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음에도.

 그들의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진자양이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것이 제천교라는 것이 분명합니까?"

 "현재까지 드러난 정황을 볼 때, 맞는 듯합니다."

 감천형이 무겁게 대꾸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무엇을 기다린다는 말인가?"

 진자양은 미간을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무림대회…… 란 말입니까?"

 감천형은 놀라 입을 딱 벌렸다.

 "맹주의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소. 대행 체재로 가기에 지금의 상황은 너무 심각하오. 적의 힘이 과연 얼마인지조차 알기 힘든 상황. 구대문파를 비롯한 모든 힘을 모아야 적과 맞설 수 있을 터. 그러자면 무림대회를 열어 제대로 된 맹주를 뽑아야만……."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감천형이 물었다.

 "적이 방해할 것은 당연한 일. 나는 이곳으로 오면서 이미 각 파에 소식을 전했소. 우리가 화산으로 퇴각할 때 즈음이면 각 파에서 대표들이 화산에 도착해 있을 것이오."

 진자양이 침착히 대답했다.

 "그런……!"

 감천형은 놀란 눈으로 진자양을 다시 보았다.

 진자양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강호의 정세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소. 서둘러 폐관에 들어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그의 말은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까?"

 감천형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잠시 그와 한효월을 돌아본 진자양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소."

 너무도 뜻밖의 일.

 한효월과 감천형은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이 누군지는 알지 못했지만 이상한 기류가 암중에 준동하고 있음은 이미 느끼고 있었소.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빨리 발동할 줄은 몰랐소. 더더구나 독고 맹주가 변을 당하실 줄은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라……."

 진자양은 미간을 찡그렸다.

 잠시 말을 끊었던 그는 무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강호상에 나오면서 생각했던 계획들은 이미 모두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소. 그런 면에서…… 한 공자와 같은 분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 사실이외다."

 그의 시선을 받은 한효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움이 얕은 저를 그처럼 중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힘이 된다면 도와야겠지요."

 "고맙소!"

 진자양이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준비할 일이 너무 많소. 손은 너무 모자라고…… 한 공자가 감 당주와 같이 가준다면 정말 큰 힘이 될 거요!"

 그의 눈이 빛을 뿜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뜻밖에도 빨랐고, 거동 하나하나에 힘이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의 출현은 정말 새로운 변수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화산으로 가긴 곤란할 것 같습니다."

 "음, 그럼 언제 오실 수 있겠소?"

 "일의 상황을 봐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시간이 난다면,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소?"

 "말씀하십시오."

 한효월의 대답에 진자양은 미간을 굳혔다.

 "지금 무림을 흔들고 있는 진시황의 장보…… 한 공자도 알고 있겠지요?"

 "예. 대강 알고 있습니다."

 "그 진원지가 어딘지 한번 조사를 해봐주시오."

 "조사라면……?"

 한효월이 그를 바라보자 진자양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간 내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 배후에 제천교가 있을 가능성이 많은데, 만약 그것이 제천교의 음모라면 그들이 왜 그런 일을 하는지를 알아내야만 할 것 같소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그 일을 할 사람이 없으니……."

 "알겠습니다."

 한효월이 조용히 손을 맞잡아 보였다.

 "난세는 영웅을 부른다고 하더니 정말인 듯하군. 이 시점에서 진 장문인과 같은 사람이 나타날 줄이야."

 진자양을 전송한 한효월이 말했다.

 "하지만 적이 너무 강합니다."

 "강하다고 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잖나?"

 한효월의 말에 감천형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물러설 곳이 없었다.

 화산파는 구대문파 중에서 역대로 늘 중상위권에 위치하고 있었다.

 소림과 무당이 늘 수위를 다투고 곤륜과 청성, 종남, 화산, 아미 등이 그 서열을 나란히 하다시피 했었다. 그러나 육합무적검 진자양의 출현 이후, 화산의 위상이 급격히 격상되고 있음을 강호상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구대공봉 중 하나였어야 할 그가 무림맹의 부맹주가 되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2년 전에 보았던 그에 비해서 지금의 그는 또 달라 보였다.

 그것이 감천형으로 하여금 더욱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가보겠습니다."

 "말씀을 잘 드리도록……. 많이 놀라셨을 테니."

 "……."

 감천형은 쓴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자리를 떴다.

 사모인 봉설란에게 가는 것이다.

 이 폐허가 된 무림맹을 버리고 화산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

 그의 너른 등이 쓸쓸하게 보이는 것은 한효월의 착각이 아니었다. 어깨마저 축 처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언제까지 이렇게 마냥 당하기만 하지는 않겠지……."

 한효월은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한효월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정신을 잃고 있는 조건의 옆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바로 독고경이었다.

 엉망이던 그녀의 옷은 말끔해졌다. 그러나 겨우 옷을 갈아입은 것에 불과한 듯 차림새는 여전히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빛도 창백한 채였다.

 "조 당주의 간호는 제가 하겠어요."

 한효월이 묻기 전에 독고경이 싸늘하고 야멸차게 말했다.

 "그건……."

 "조 당주가 단서를 알고 있다면 나도 알아야 해요. 누구보다도 먼저! 그가 깨어날 때까지 단 한 순간도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어요."

 "……."

 한효월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눈을 빛내면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이. 막기만 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역력하다.

 한효월은 그녀를 향해 미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말과 함께 그는 미련없이 신형을 돌렸다.

 그가 이렇게 순순히 허락할 줄은 몰랐던 듯 독고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그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갑자기 소리쳤다.

 "멈춰요!"

 문고리를 잡았던 한효월이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왜 안 막는 거죠?"

 "막았어야 했느냐? 그렇다면 돌아가 쉬도록 해라. 조 당주는 내가 간호하마."

 그의 말에 독고경의 얼굴은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울그락붉으락 몇 번이나 얼굴빛이 변하던 그녀는 돌연 세차게 바닥을 구르며 소리쳤다.

 "대체 뭐가 그렇게 잘났어요? 나보다 몇 살이나 더 먹었다고 사사건건 나를 어린애 취급을 하는 거예요?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고……."

 "너는 나의 사질녀(師姪女)다."

 한효월이 조용히 그녀의 말을 받았다.

 "……!"

 발작하듯 소리치던 독고경이 움찔했다.

 "나이 차이가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 맹주부는 투정을 받아줄 만한 처지가 아니다. 불가에서 가르치는 것은 첫째도 둘째도 정(定)이다. 너는 지난 세월 동안 보타암에서 무엇을 배우고 왔느냐?"

 "그……."

 독고경은 말문이 막혔다.

 "잇단 변고를 당해서 마음을 다잡기 힘들 줄 안다. 하지만 너의 잘못된 처신 하나로써 사형(=독고해)께 누가 된다면 무슨 낯으로 지하에 계신 아버지를 볼 수 있겠느냐? 나는 괜찮다만, 다른 사람의 앞에서 마음대로 하는 것은 너를 위해서도 옳지 않은 일이다."

 독고경의 얼굴이 참혹할 정도로 굳어졌다.

 한효월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그녀의 낭창한 전신에 가는 떨림이 조용히 번져 간다.

 한효월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급히 생각지 말고 조용히 스스로를 관조하여 마음을 가라앉혀 보려므나. 나는 한 번도 뵙지 못했지만, 사형은 위대했던 분이셨다. 그 위대했던 아버지의 딸로서 부끄럽지 않아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왜?"

 갑자기 독고경이 한효월의 손을 뿌리쳤다.

 "내가 왜? 내가 아닌, 아버지의 딸로서 살아야 하죠? 아버지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기에? 나는 어릴 때부터 한 번도 아버지의 손길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나와 놀아주었던 사람들은 사형들이고, 아저씨들이었어요. 그나마 조금 크자 아버지는 나를 남해의 고도(孤島)로 보내 버렸어요! 그런 아버지를 위해서 내가 왜……!"

 "그분이 네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한효월의 조용한 음성에 독고경은 허를 찔린 듯 그만 말을 멈추었다.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그분은 네 아버지다. 나는 아버지가 되지 않아서 모르겠다만, 자신의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효월은 길게 한숨 쉬었다.

 "너는 왜 여기에 와 있는 것이냐?"

 "그건……."

 "아버지를 죽인 자들에 대한 것이 궁금해서겠지?"

 "……."

 독고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뭐라고 부인해도 그녀는 독고해의 딸이었다.

 그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비록 자신보다는 세상을 위해 살았던 아버지라고 할지라도.

 "스스로를 속이려 하지 마라. 그를 잘 돌봐다오. 그가 깨어난다면, 어쩜 우리는 반격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한효월은 그녀의 어깨를 조용히 두드려 주고는 다시 한 번 혼수상태인 신안금조 조건의 맥을 짚어보았다.

 "……."

 독고경은 묘한 표정으로 한효월의 등을 바라본다.

 형용하기 힘든 묘한 눈빛이었다.

*   *   *

 "죄송합니다."

 감천형은 깊게 머리를 숙였다.

 단순한 예의가 아니었다.

 정말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사부가 가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맹주부조차 지키지 못하고 불태웠다. 그도 모자라 이젠 이사를 가야 한다고 사모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어찌 너의 잘못이겠느냐?"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봉설란은 평정을 잃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도 창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일단은 제가 사모님을 모시고 화산까지 가겠습니다. 그리고……."

 "아니다."

 무슨 소리냐는 듯 주춤, 감천형은 봉설란을 쳐다보았다.

 "아니라면……?"

 "어차피 여기에 더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문득 봉설란은 정색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화산으로 몸을 피한다면, 그분께 누가 될 것 같구나. 그래서 나는 금릉의 친정에 가 있고자 한다."

 "사모님!"

 "걱정하지 말아라. 본가는 무림과 관련이 없는 곳이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들은 사모님을 그냥 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모님의 친정조차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런지도 모릅니다."

 감천형의 얼굴은 완강했다.

 정말 그럴 수는 없었다.

 적들 중 그 어떤 자가 달려들더라도 선비의 집안인 봉설란의 가문은 한순간에 피바다가 되고 말 터이다.

 잠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봉설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그것은 겉보기일 뿐, 나는 집으로 가지 않는다."

 "무슨……?"

 뜻밖의 말에 감천형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밖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교외에 조그마한 장원(莊園) 하나를 마련해 두었다. 내게 연락할 일이 있다면 그리 하면 될 것이다. 적들도 내가 설마 낙양에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할 터이니……."

 "너무 위험합니다!"

 "더 이상은 나를 막지 말아다오."

 "사모님!"

 "그만 물러가거라."

 봉설란은 조용히 눈을 내려감았다.

 "……."

 감천형은 입을 다물었다.

 늘 조용하고 자상하기만 하던 사모였다.

 그런데 언제 그런 대비를 해두었단 말인가. 더구나 저렇듯 단호한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   *

 아침 이슬이 풀잎에 매달려 대롱거린다.

 지금쯤 아침 햇살을 영롱히 반사하고 있어야 할 터이지만, 아침 해는 아직까지도 안개에 휩싸여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한효월은 굳은 얼굴로 자신의 거처 앞을 서성인다.

 '그 정도라면 깨어날 수 있어야 한다…….'

 신안금조 조건의 맥은 미약했다.

 하지만 그런 정도라면 그처럼 혼수상태에 빠져 있지는 않아야 했다. 더구나, 그는 일반인이 아니라 내공을 겸수(兼修)한 무림고수인 것이다.

 '역시 뒷머리가 깨진 것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그가 알던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처럼 힘들여, 사선(死線)을 넘어왔던 그의 모든 것이 허사가 되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는다면 모험을 해볼 수밖에."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길게 한숨 쉬면서 중얼거렸다.

 문득 기척을 느낀 한효월이 시선을 돌리자, 굳은 얼굴의 감천형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그의 기색이 무거운 것을 보자 한효월이 물었다.

 "그게……."

 감천형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게 더 안전할런지도 모르지……."

 감천형에게서 말을 전해 들은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럴 수 있지 않겠나? 비밀만 지켜진다면……. 비슷한 사람을 분장시켜서 화산으로 같이 가도록 하면 이곳에 계시는 게 오히려 더 안전할 수도 있을 것 같군."

 "그럴까요?"

 힘없이 중얼거리던 감천형이 머리를 저었다.

 "요즘 같으면 과연 지난 세월 뭘 했는지 회의만 듭니다. 집안에만 계시던 사모님이 외부에 은신처를 마련하시도록 몰랐다니, 도무지 이건……."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지. 여자들의 일이니 그런 것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나? 저들도 그럴 테니 그런 면에서 이 일은 나빠 보이지만은 않는군."

 "일단 알겠습니다."

 감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효월의 말에 조금쯤은 가벼워진 기분인 듯했다.

*   *   *

 불탄 맹주부의 소식은 이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리고 맹주부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는 불길이 잡혔음에도 그날 내내 그치지 않았다.

 충천했던 해가 힘을 다해서 서산으로 넘어갈 때까지 그 연기는 세상에다 무림맹주부의 몰락을 알리는 듯 그렇게 끊임없이 피어 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담장은 성했기에, 밖에서는 맹주부의 참경(慘景)이 제대로 다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 하지만 고루거각으로 불끈 솟아 있던 취의청 등이 앙상한 잔해로 남아 있는 것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그것을 아는 데에는 충분했다.

 하루 종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황혼이 드리울 때까지도 바쁘긴 마찬가지.

 죽은 사람들을 처리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봉문하고 화산으로 떠나기 위한 준비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맹주의 집무청이었던 대한각이 어느 정도 정비되어 맹주 대행 진자양은 거기에 자리 잡고서 모든 것을 지휘했다. 대국을 장악하는 것에서도 그는 유감없이 능력을 발휘하여, 누가 봐도 삼사 일은 걸릴 듯하던 준비를 그날로 끝내는 것으로 그가 무공만 강한 것이 아님을 증명해 냈다.

 창문으로 붉은 노을 빛이 스며든다.

 그럼에도 신안금조 조건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효월은 굳은 얼굴로 신안금조 조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노을 빛에 빛나는 금침(金針)이 하나 들려 있다.

 그의 눈 아래에는 신안금조 조건이 엎드려 있는데, 그 금침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바로 신안금조 조건의 뇌호(腦戶)였다.

 뇌호라고 하는 혈도는 바로 인체의 가장 치명적인 구개사혈(九個死穴) 중 하나로써 조금만 건드린다면 뇌를 진동케 하여 바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곳이다.

 뇌호는 따로 뇌해(腦海)라고 불린다.

 뒷머리의 튀어나온 침골(枕骨)의 바로 아래에 위치한 이 뇌호는 그 이름만큼이나 치명적인 혈도인데, 한효월은 지금 그 자리를 침으로 찌르려는 중이었다.

 금침충혈지법(金針衝血之法)!

 한효월이 산에서 의학을 연구하면서 만들어냈던 이 금침지술은 침으로 기혈을 조장(助長), 기혈을 충돌케 하여 기사회생(起死回生)의 묘(妙)를 이끌어내는 데 그 근간(根幹)이 있다.

 아직은 완성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적용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는 입장.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이던 조건의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었던 것이다. 진자양과 한효월의 진단 결과는 응혈(凝血)이 조건의 뇌를 누르고 있다는 것. 그대로 두면 아예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더구나 맹주부는 화산으로 옮겨가야 했다.

 그 와중에 혼수상태인 그를 덜컹거리는 마차로 화산까지 옮겨간다면, 그건 죽으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해서 한효월은 금침충혈지법을 시도하게 되었다.

 실제로 사용해 본 적도 없는 방법이라 위험하긴 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조건의 상태가 시시각각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맹주부 내에서 한효월을 제외하고는 손을 쓸 사람이 없었다.

 의도에 조예가 있던 사람들이 이미 모두 변을 당한 데다가, 그들이 살아 있다고 해서 한효월보다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던 것이다.

 이미 몇 개의 금침이 신안금조 조건의 머리에 꽂혀 있었다. 하나같이 건드리기 힘든 대혈들이었다. 경외기혈(經外奇穴)까지 모두가 정말 믿기 힘든 곳.

 그 광경을 감천형과 독고경 등이 굳은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한효월은 조금 굳은 얼굴로 그들을 한번 바라보고는 망설임없이 그 금침을 신안금조 조건의 뇌호에다 꽂았다.

 "지금!"

 한효월이 나직이 소리쳤다.

 순간, 이미 조건의 명문(命門)에 손을 대고 있던 감천형이 공력을 운기하여 조건의 내부기혈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기가 물결처럼 조건의 머리로, 뇌호로 몰려갔다.

 혼수상태인 조건의 몸이 꿈틀하면서 신음을 흘린다.

 찰나, 조건의 머리에 꽂혀 있던 금침 다섯 개 중 각손혈(角孫穴)에 꽂혀 있던 금침이 저절로 솟아 나왔다. 뒤이어 양쪽 천주(天柱) 옆의 경외기혈에 박혀 있던 금침까지 빠져나왔다. 뒤이어 뇌호에 찌른 금침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찰나가 영원 같은 순간.

 금침이 격하게 흔들리다가 마치 누가 뿜어내듯이 뇌호에서 튕겨져 나왔다. 뒤이어 그 금침이 찔렸던 자리에서 검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분수와 같은 핏줄기는 반 각가량이 지나서야 원래의 붉은빛을 되찾았다.

 "그만!"

 긴장된 빛으로 주시하고 있던 한효월이 소리쳤다.

 운기하여 기혈을 조건의 머리로 밀어내고 있던 감천형이 손을 거두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한효월.

 그가 혈을 짚자, 흘러나오던 피가 마치 거짓말처럼 멎었다.

 한효월은 암암리에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준비된 수건으로 흘러나온 피를 닦았다. 검게 맺힌 응혈이 그 수건에 묻어 나왔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얼핏 간단해 보이던 일이 의외로 매우 힘들고 긴장된 순간이었던 모양.

 "어떻게 된 것 같습니까?"

 한효월이 손을 떼자 감천형이 물었다.

 그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일단 머리에 고여 있던 응혈은 제거가 된……."

 한효월의 말이 채 끝나기 전이었다.

 "으으……."

 신음이 조건에게서 흘러나왔다.

 "조 당주!"

 감천형이 소리쳤다.

 사람들의 눈길이 조건에게 쏟아졌다.

 그가 눈을 떴다.

 마치 거짓말처럼.

 "……."

 조건은 눈을 뜨고서도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았다.

 "조 당주, 정신이 듭니까? 나를 알아보겠습니까?"

 감천형이 다시 소리쳐 물었다.

 "비, 비인-비인……."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던 조건이 갑자기 안간힘을 다해 중얼거렸다.

 "조 당주! 납니다. 감천형입니다! 내 말이 들립니까? 제 얼굴이 보입니까? 천천히, 천천히 말해 보십시오! 조 당주!"

 감천형이 그의 앞에다 얼굴을 들이밀고서 소리쳤다.

 "비, 비인-양(貧陽)…… 거, 거기……!"

 조건이 안간힘을 쓰면서 손을 허우적거렸다.

 눈을 부릅뜨고는 있는데, 감천형이 보이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마에서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전신에서 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한효월이 급히 손을 써 그의 혈도를 눌렀다.

 "사람을 알아보는 게 아니야. 그의 뇌를 누르고 있던 울혈(鬱血)이 사라지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려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발동한 것이지."

 조건이 다시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한효월이 말했다.

 "언제 다시 깨어나겠습니까?"

 "그건 나도 모르겠군……."

 바로 그때, 문밖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한 공자의 생각으로는 그가 깨어날 수 있을 것 같으시오?"

 진자양이 들어서고 있었다.

 "위험한 고비는 넘긴 듯합니다만……."

 한효월이 말끝을 흐렸다.

 "내일 중으로 출발을 할 예정인데……."

 진자양도 말끝을 흐렸다.

 맹주부 참화의 소식은 이미 낙양성을 뒤흔들고, 천하무림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각대문파는 이번 진시황의 장보에 관심이 없을 수 없었다. 구대문파에서도 장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 고수들을 파견했었고, 그들 중 몇몇은 이미 참화의 소식을 듣고 맹주부로 달려오기도 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일이었다.

 한시가 급한 상태.

*   *   *

 달빛이 맑다.

 그러나 그 달빛 아래 서성이는 한효월은 결코 맑은 기분일 리가 없다.

 그의 뇌리를 가득 채운 것은 조건이 중얼거렸던 단어들.

 "빈양, 빈양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부족한 빛, 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곳이라는 뜻일까.

 그렇다면 그곳이 어디란 말인가?

 시간이 달빛을 가르며 달린다.

 구름이 밀려들어 그 달을 가린다.

 그렇게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지만 명쾌하게 답은 나오지 않았다.

 황혼녘부터 시작한 고민이 이 시간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문득 인기척을 느낀 한효월이 뒤를 돌아보았다.

 독고경이 밤이슬 맺힌 풀잎을 밟으면서 그의 뒤에 서 있다.

 달빛을 받은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냉오(冷傲)한 모습의 그녀는 그처럼 흑의경장을 하면 더 돋보였다. 겨울 밤, 달빛 아래 핀 눈 덮인 매화[雪梅]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아직 자지 않았더냐?"

 한효월이 그녀를 보자 굳었던 표정을 풀면서 웃었다.

 그의 웃음을 보면서 독고경은 뭔가 말할 듯하다가 입을 다문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아니에요."

 그녀는 신형을 돌렸다.

 몸을 돌리던 그녀는 문득 등을 돌린 채로 물었다.

 "조 당주님은 언제 정신을 차릴 수 있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금침지술로는 위험을 덜었을 뿐이다. 상태가 좋으면 내일이라도 정신을 차릴 수 있겠지만……."

 "알았어요."

 그녀는 걷기 시작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긴 머리카락을 날리며 그 자리를 떠났다.

 사박사박, 낮은 발자국 소리가 그녀의 흔적을 따라 멀어져 간다.

 "후우……."

 그렇게 사라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한효월은 홀연 의미 모를 긴 한숨을 불어낸다.

 쏴아아-

 한줄기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달빛은 아직도 맑기만 했다.

*   *   *

 "바보……."

 독고경은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누구에게 하고 싶은 말인지 모른다.

 그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입술을 물었을 따름이다.

 어릴 때부터 혼자였었다.

 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어린 자신을 돌보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홀로 있던 그녀는 남해고도로 가서 바다를 벗삼으면서 검을 만졌다.

 그렇게 해서 신검상화(神劒霜花)라는 이름을 얻었다.

 서리꽃이라는 말 그대로 그녀는 냉정했고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정을 준 적이 없었다. 사부와 사저들이 그녀를 잘 돌봐주었지만 그것뿐 냉오한 그녀의 성정은 여전했다.

 그런데 갑자기 흔들리는 마음은 주체할 길이 없다.

 그가 자신의 사숙임을 알면서도,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만 감으면 그의 모습이 뇌리에서 환영처럼 떠오른다.

 그러나 그의 앞에 서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길게 탄식을 흘린 그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담을 넘었다.

 단서는 자신의 손으로 찾고 싶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아니,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담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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