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풍운연의 3
第一首 한매경세(寒梅驚世)
-죽음에서 돌아오다.
새로운 희망(希望)이 모습을 드러내다.
한효월은 흑의경장인을 부축하고서 몸을 날렸다.
마음이 급한 만큼 그는 전력을 다하고 있었고, 세찬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찢어지도록 펄럭이고 있었다.
그의 눈앞으로 검은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낙수(洛水)에서 십여 리.
수많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이 숲의 이름은 관림(關林)이라 한다.
전후로 수십, 수백 년 된 잣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는 이 숲이 낙양에서 유명한 까닭은 바로 여기가 오랜 옛날 관운장의 수급을 조조가 제사 지낸 곳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 관운장은 민간의 신장(神將) 중 하나가 되었으며 그를 기리는 곳을 높여 관제묘(關帝廟)라고 하였다. 여기 관림은 바로 그 관운장의 수급을 제사 지낸 관제총(關帝塚)이 있으며 묘(墓)의 앞에는 관제묘가 있다.
한효월이 도달한 곳은 바로 여기.
그는 흑의경장인을 부축한 채로 몸을 날려 그 관제묘의 뒤편으로 갔다.
어둠 속 하늘을 가린 관림은 그야말로 손가락을 내밀어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다.
그 어둠 속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그는 이미 거의 기식이 엄엄한 상태였다.
* * *
팡!
"크윽!"
폭음과 비명.
한 사람이 지푸라기처럼 튕겨졌다. 그는 뒤에 있던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잘도 숨어 있었군!"
음산한 중얼거림.
흑의인 하나가 냉랭히 웃으며 그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쓰러졌던 사람은 안간힘을 쓰면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방금 머리를 부딪치면서 머리가 깨진 것인지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핏줄기로 눈조차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목줄기를 흑의인이 움켜잡았다.
"좋아, 이제 끝이다."
흑의인이 어둠 속에서 흰 이를 드러내 보였다.
그것은 어린아이라도 느낄 수 있는 살기였다.
"이…… 이런 개죽음을……."
그는 버둥거렸지만 마음뿐,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숨이 막혀왔지만 전신의 진기는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한 올도 이끌어낼 수가 없다.
하긴, 이 정도로 버틴 것도 기적이 아닌가.
중년인, 신안금조 조건은 자신의 목뼈가 어긋나는 소리를 들었다.
지난 수십 년 간 천하의 움직임을 눈 아래 두었던 그로서는 정말 어이없고 한 많은 최후라고 할 수 있었다.
"크윽!"
단말마의 신음.
그리고 한 사람이 쓰러졌다.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신안금조 조건은 숨을 쉴 수 있음을 의식한다. 눈망울에 가득 찬 핏물로 시야가 흐려져 아무것도 볼 수가 없지만 그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은 없어졌다.
소매를 들어 눈을 씻자 뿌연 시야에 임풍옥수와 같은 생김의 청년 하나가 환상처럼 자리했다.
그가 한효월임을 그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구원의 손길이 닥친 것은 직감할 수 있었다.
"신안금조 조 당주이십니까?"
한효월이 물었다.
"내가…… 조건…… 이오. 당…… 신은?"
"당주님, 무사하셨군요!"
억눌린 환성이 들려온다.
"이정(李靖)…… 자넨가?"
그 음성을 듣자 피투성이의 사내, 신안금조 조건은 갑자기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긴장이 풀어지는 것이다.
그는 망연히 중얼거리며 정신을 놓았다.
"다행이군…… 다행이야……. 이 무서운 비밀을 알릴 수 있게 되었으니……."
"조 당주님!"
한효월이 쓰러지는 그를 부축했다.
청수했을 그의 모습은 피로 물들어 참혹했다.
나이는 50세 가량으로 보였지만 피로 물든 얼굴이 본래 어떠했었을 것인지는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미염(美髥)이라 불리웠을 가슴까지 늘어졌던 수염까지도 토해낸 피로 범벅이 되어 옷자락에 눌어붙어 있음은 그가 당한 고초를 웅변하고 남는다.
급히 그의 맥을 짚어본 한효월의 안색이 돌변했다.
급격히 전신의 기력이 사라지고 있었다.
손을 쓰지 않는다면 아마도 반 시진을 넘기지 못하리라.
품에서 중조산에서 그가 제련한 고원단(固元丹)을 두 알이나 꺼내 그에게 먹인 한효월은 다급히 조건의 가슴팍 대혈을 짚어 치솟아오르는 기혈을 눌렀다. 그리고 자신의 진기로 흩어진 그의 기혈을 모아 단전으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옆에서 호법(護法)을 서주어야 할 위험한 일이었지만, 상대가 당장 숨이 끊어질 판이니 그런 것을 따질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보낸 시각이 무려 한 시진.
겨우 한숨을 돌린 한효월은 고개를 들다가 안색이 돌변했다.
자신과 함께 이곳까지 온 그 흑의경장인.
그가 잣나무에 기대어 고개를 떨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호법을 서려는 듯 손에 검을 들고 있었지만 축 늘어진 전신은 그가 정상이 아님을 말하는 듯하다.
"내 잘못이다."
한효월이 길게 탄식했다.
그는 이미 죽었다.
한효월이 신안금조 조건을 살리기 위해서 애쓰는 동안, 그는 그 몸으로 두 사람을 호법하기 위해서 눈을 부라리고 있다가 기력이 소진하여 죽어간 것이다. 워낙 상처가 심하기도 했지만 미리 손을 썼다면 살릴 수도 있었으리라.
"죄송하오."
한효월은 부릅뜬 그의 눈을 감겨주면서 신음했다.
그는 죽음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완수했지만 과연 그로 인해서 그는 무엇을 얻은 것일까?
그 죽음은 그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한효월은 그의 눈을 감겨주고는 길게 한숨지었다.
조용히 살던 산속의 생활이 어느 순간인지 검끝에서 춤을 추는 삶으로 변해 버렸다. 나오자마자 칼을 휘둘러 사람을 해치는 것을 보통으로 삼았다. 과연 그들을 그렇게 해쳐야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그는 문득 자신의 손을 들여다본다.
글을 쓰고, 금을 타며, 화초를 가꾸던 손이었다.
꽃 향기에 취해 달빛 아래를 거닐며 시를 읊조리던 생활이 어제까지 자신의 삶이었었는데, 그 일이 이젠 그처럼 까마득한 옛일만 같다.
갑자기 얼굴 하나가 떠오른다.
화려한 치장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기품이 있는 얼굴이었다. 절세의 미인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고아(高雅)한 기품이 있었다. 그것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과 그녀의 배움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것이었다.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고른 치아는 어둠 속에서 흰 눈이 빛나는 것 같았다. 그나마 그 고른 치아를 제대로 본 적은 별로 없었다. 그녀는 언제라도 웃을 때는 손으로 입을 가렸기에.
"이 소저……."
중얼거리던 한효월은 뒤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신안금조 조건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괴로운지 전신을 틀며 신음을 흘리는 그의 몸에서는 아직도 여기저기 선혈이 내비친다. 외상도 가볍지 않았다.
잠시 지난날로 돌아갔던 한효월은 그 시간의 짧음에 길게 한숨을 쉬고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보다가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뒤로 넘어지면서 다친 것인지 뒷머리가 깨져 선혈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의 상처가 이 정도라면 자칫 잘못될 수도 있을 터이다.
상처를 대강 처맨 한효월은 일단 그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혹시라도 다른 자들이 더 쫓아오기 전에 맹주부로 돌아가서 그를 치료함이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리를 떠나 낙양성으로 돌아온 한효월은 대경실색한다.
저 멀리 어둠을 밝히며 타오르고 있는 불빛.
그것은 정말 장관(壯觀)이라 할 정도로 거창하게 암천(暗天)을 갈가리 찢으면서 치솟고 있는데, 그 방향이 다른 곳이 아닌 맹주부였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신음한 한효월은 다급히 땅을 박찼다.
* * *
"무사하시오?"
그가 물었다.
"부맹주님……?"
감천형이 부지중에 중얼거렸다.
담장을 넘어가던 흑의인을 두 동강이 내면서 나타난 사람.
그는 청색의 도포(道袍)를 입었다. 푸른빛이 도는 작은 청옥관(靑玉冠)으로 머리를 묶은 그의 조금 마른 체구는 당당하다기보다는 가냘퍼 보인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 쏟아지는 신광은 쇠라도 부숴 버릴 듯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 빛을 뿌리는 한매신검(寒梅神劒)은 가공할 검기를 휘몰고서 그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 힘을 더하고 있었다.
가히 천신과도 같은 기태.
"가증한 자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눈을 부릅뜬 그가 불을 토하듯 소리쳤다.
그 위세에 어둠을 머금은 대기가 놀라 쩌러렁 진저리를 친다.
"부맹주라면, 네가 화산의 장문인 진자양이란 말이냐?"
미간을 찡그리고서 그를 노려보던 서정후가 놀란 빛으로 입을 열어 물었다.
"으하하하…… 제천교의 일개 후(侯) 따위가 감히 본 장문인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있단 말이냐?"
나타난 청색 도포의 중년인이 크게 웃었다.
그는 당당했다.
중기(中氣)가 충만한 웃음소리는 사방을 덮어 누르는 듯했다. 사방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그의 웃음소리를 따라 춤을 추는 듯하였다.
그는 혼자이되, 장중을 압도하는 힘을 보였다.
화산파의 장문인이자 무림맹의 부맹주인 진자양.
화산의 비전절학을 수련하기 위해서 폐관하고 있다던 그가 돌연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저자가 어떻게 이 자리에 나타난 건가?'
그의 출현에 암중에 미간을 찡그렸던 서정후는 이내 코웃음 쳤다.
"화산파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더라면 그나마 생을 유지하는 시간이 조금 더 길었을 터인데, 여기까지 쫓아왔더란 말인가?"
쿠쿠쿠쿠…….
불길에 휩싸인 누각의 한쪽이 무너졌다.
감천형이 다급히 소리쳤다.
"부맹주! 안쪽에 사모님이 계시……."
그런 그를 향해서 진자양은 웃어 보였다.
"후원의 적은 이미 내가 모두 처리했소! 자연히 부인께서도 무사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그런?"
감천형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후원에서 그처럼 요란하게 들리던 싸움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것을 이쪽 세력이 전멸한 것으로 생각했었더니 반대였더라는 것인가.
하긴 그가 나타난 것은 후원에서였다.
서정후의 생각도 그와 같았던 모양이다.
그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 말의 의미는 진자양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기에.
그 순간, 소리도 없이 푸른빛이 진자양을 향해 덮쳐 갔다.
예의 공포스러운 흑포괴인이었다.
"물러가지 못할까?"
그가 덮쳐 오자 진자양이 꾸짖듯 호통 치며 일검을 뻗어냈다.
그가 너무 흑포괴인을 가볍게 보는 듯하자 감천형이 놀라 외쳤다.
"부맹주, 마교의 천첩청령수요!"
그 말을 듣자 진자양의 눈에 갑자기 긴장의 빛이 흘렀다.
이어 그의 얼굴에 검붉은, 자색(紫色)이 마치 치밀듯이 쭈욱 올라오더니 그의 검끝에서 검화가 폭죽처럼 튕겨져 나왔다.
"자하신공(紫霞神功)?"
그것을 본 감천형이 외쳤다.
동시에 기괴한 폭음이 격돌의 현장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매화꽃 모양의 검광이 폭발하듯이 그곳에서 일어나면서 방원 칠팔 장을 온통 뒤덮었다. 가공할 검기였다. 그 검기에 휘말린 것은 모조리 산산조각으로 찢겨지고 부서져 흩어졌다.
감천형조차도 놀라 뒤로 물러나야 했다.
"크악!"
단말마의 괴성.
흑포괴인의 모습이 한줄기 검은 연기와도 같이 불빛을 가르며 담을 넘어 사라지고 있었다.
"목을 내놓아라!"
숨을 쉴 틈도 없이 매화꽃의 검광이 쭈욱 뻗어나더니 전광석화와 같이 서정후를 향해서 덮쳐 갔다.
다급한 부르짖음과 함께 진자양의 좌우에서 검광이 덮쳐 왔다.
서정후의 수신호위가 그를 막아선 것이다.
쨍! 쨍그렁.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비명!
피를 뿌리며 막아섰던 흑의인 둘이 피를 뒤집어쓴 채로 거꾸러졌다.
검은 무서운 검광을 동반한 채로 여전히 서정후를 향해서 날아가고 있었다. 그 검을 쥐고 있는 것은 진자양이었다. 그의 전신에는 검붉은 자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며, 그의 움직임을 따라 바닥의 대리석이 풀풀 흙먼지로 화해 날아올랐고, 그를 따라 궤적을 그었다.
"어검술(御劒術)이군……."
그 모습을 보면서 감천형이 신음했다.
그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진자양의 일격이 서정후를 덮쳤다.
"흐윽?"
그 가공할 검세를 본 서정후의 안색도 돌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검도 최강이라는 어검술이기 때문이다.
어검술이 화경(化境)에 달하면 십 리 밖에 있는 사람의 목도 주머니 속의 물건 꺼내듯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만큼 그것은 이미 무공이면서 무공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었다.
한마디로 다른 차원의 무공.
자색의 검광은 한 마리의 자룡(紫龍)과 같이 서정후를 덮쳐들었고, 서정후는 그 기세를 보고 놀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처럼 쉽게 피할 수 있다면 누가 어검술을 두려워하랴.
자색의 검광은 가공할 기세로 날아오르는 서정후를 휘감았다.
쩡! 쩌러렁∼!!
용이 울고 범이 신음하는 굉음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검기장풍이 일대를 뒤덮었다. 누구도 그들의 싸움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감천형도 경악한 얼굴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자양이 역대 화산파의 그 어느 장문인보다 뛰어난 사람임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무림맹의 부맹주로 추대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렇듯 가공할 고수가 되어 나타날 줄은 누구도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대결은 오래가지 않았다.
천지를 진동하는 격돌음이 연이어 일어나더니 그림자 하나가 유성과 같이 맹주부의 문 쪽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 뒤를 자색 검광이 따랐다.
콰쾅!
맹주부의 대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처럼 단단한, 강철과 같은 단목으로 이루어진 문이 문풍지가 찢겨져 나가듯 그렇게 흩어져 버렸다.
그것이 끝이었다.
부서진 문.
그 문루(門樓)에 한 사람이 검을 빗겨든 채로 우뚝 서 있었다.
그의 검에서는 다시금 불이 뿜어질 것만 같았다.
타오르는 불빛을 받으면서 우뚝 선 그는 그 존재 자체로써 당당하였다.
화산 장문.
화산 백 년 래 제일고수.
그렇게 불리는 그는 육합무적검(六合無敵劒) 진자양이었다.
모든 적을 몰아내고서 그 소임을 다했다는 듯이 신형을 돌려 장내를 돌아보는 그.
와아아-!
거의 전멸의 위기에 몰렸던 맹주부의 위사들이 환성을 터뜨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지리멸렬(支離滅裂).
건곤무적 독고해가 쓰러진 후에 그처럼 기를 펴지 못하던 그들의 눈에 비친 진자양의 모습이야말로 새로운 희망에 다름이 아니었다.
순간, 진자양이 검으로 바닥에 짚으며 신형을 비틀 했다.
"부맹주!"
감천형이 놀라 그에게 달려왔다.
"괜찮소."
진자양이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청수한 그의 얼굴은 조금 창백했고, 입가에는 미세한 핏줄기가 비친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조금 기혈이 뒤틀렸을 뿐이오. 잠시 쉬면 괜찮아질 거요."
그때였다.
담을 타고, 부서진 담을 넘고, 또 문을 통해서 불타는 후원에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화산파의 고수들이다. 얼마 전 이곳을 떠났던 화산우사 육기도 있었다.
그들의 옹위를 받고 있는 여인을 본 좌백이 소리쳤다.
"사모님!"
봉설란이 거기에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다.
"누구냐?"
진자양이 호통 치면서 벼락처럼 신형을 회전했다.
동시에 그의 한매신검이 땅에서 튕겨져 오르듯 날아 검광으로 화해 맹주부의 문을 통해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쏴아악!
무서운 속도로 누군가가 날아들었다.
그 신법은 표홀하고도 빨라 진자양이 그것을 느낀 순간에 이미 그와 채 일 장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도달해 있을 정도였다.
진자양은 신형을 돌림과 동시에, 검으로 그를 공격해 갔다.
비록 고수들과의 연이은 격전을 벌였다고 하더라도 그의 일격은 여전히 산천을 떨게 만들 만한 위력이 있었다.
"흥!"
덮쳐 오던 사람은 냉소를 터뜨리면서 훌훌 날아올라 그 검세를 피해냈다.
그리고 허공에서 신형을 뒤집는 것과 함께 잇달아 삼장이권을 격출하여 진자양을 공격했다.
폭풍과도 같은 강기가 일어났다.
"맙소사, 멈추십시오!"
나타난 사람을 본 감천형은 대경실색하여 소리치면서 몸을 날렸다.
그가 마구잡이로 장중으로 날아들자, 진자양과 나타난 사람은 놀라 황급히 손을 거두면서 뒤로 물러났다.
"감 사질, 괜찮나?"
나타난 사람이 물었다.
나타난 사람, 그는 바로 한효월이었다.
불길을 보고 다급히 달려오던 그와 진자양이 격돌한 것이다.
* * *
불길은 잡혔다.
하지만 남은 것은 없었다.
그처럼 위풍당당하던 맹주부는 이제 없었다.
맹주부의 상징과도 같았던 취의청에서부터 다른 수십 채의 누각들이 모두 한줌의 재로 화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아직도 채 꺼지지 않고 남은 불길은 날름거리며 잔해 속에서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불길은 잡혔다고 하지만 검은 연기는 여전히 밤하늘을 덮으며 피어 오르고 있어 검은 그을음이 맹주부를 뒤덮는다.
그 속에 선 사람들의 심정이야 말해 무엇하랴.
오직 한마디, 참담(慘憺).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한효월과 감천형, 그리고 진자양 등 남은 맹주부의 핵심 인원들이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회의할 곳조차 마땅치 않아서 불타다 남은 후원 아취소축의 일층이 그 임시 대책 회의장이었다.
그나마 격전을 말해 주듯이 아취소축의 일층조차도 성하지는 않았다. 그곳도 반쯤은 불타 그 무너진 곳으로 밤하늘의 별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 자리에는 봉설란도 독고경도 같이 자리했다.
봉설란은 다행히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았다. 놀란 빛은 얼굴 가득했고 머리카락도 흩어졌지만 실제로 피해는 없는 셈이고, 독고경은 격전의 와중에 상처를 입었으나 크게 중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맹주부가 받은 피해는 실로 막대(莫大)하였다.
그 수많던 위사들이 이제 제대로 움직일 만한 자는 열이 겨우 넘을 정도에 불과하니, 그 피해를 말해 무엇할 것이며, 고수라고 할 수 있는 사람도 이번 공격에 거의 죽어 넘어졌으니 실제로 맹주부는 붕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라도 진자양이 그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살아 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지금 사방에 번을 서고 있는 경장(輕裝)을 차려입은 사람들은 진자양이 데리고 온 화산파의 고수들이었다. 그들 중 열둘은 진자양이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화산십이룡(華山十二龍)으로서, 진자양과 함께 폐관수련에 들었던 그들의 힘은 맹주부를 공격해 왔던 제천교를 격퇴한 것에서 이미 증명이 된 바 있었다.
"부맹주께서 적시에 나타나시지 않았더라면, 정말 저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겁니다."
침묵을 깨뜨린 것은 감천형이었다.
"정말 다행이오. 강호의 상황이 급박하다는 바람에 무리를 하여 연공을 앞당겨 출관(出關)을 했었는데……."
"무리가 가지는 않으셨습니까? 화산의 비전 자하신공은 속성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위험한 고비는 있었지만 간신히 극복할 수 있었소."
진자양이 미미하게 웃어 보였다.
이 자리에서는 그의 웃음만이 빛나 보였다.
명문대파(名門大派)는 전통이라는 것이 있다.
그 전통은 세월이 더해서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전통이란 것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고수능인(高手能人)이 대를 이어서 초식을 가다듬고 절학을 연마하며, 창출해 낸 것들이 그 전통 속에 숨 쉬고 있는 것이다.
화산파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중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자하신공은 선천기공(先天氣功)이다.
선천기공이란 후천(後天)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후천이란 사람이 태어나서 그 지닌 바 체력을 길러가는 무공을 이른다. 보통 수련하는 외공(外功)이 바로 그 범주에 속한다. 손을 단련하기 위해서 뜨거운 모래에 손을 파묻고, 바위를 치는 것이 바로 이 외공을 단련하는 것이다. 자질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외공은 누구나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하나, 내공은 다르다.
입문 단계라면 누구라도 어느 정도 성과를 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전혀 다르게 된다.
십 년을 한 사람이라도 일 년을 한 사람보다 성취가 떨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저 꾸준히 토납운기(吐納運氣)를 연습하여 공력을 쌓는 일은 시일이 지나면 가능하지만 어느 정도의 경지에 달하게 되면 반드시 깨달음이 필요하게 되는 법이기에.
그러한 일은 천부적인 자질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더더구나 그중 최상승이라고 할 선천기공은 단순히 공력을 쌓는 것이 아니라, 천지중의 기운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므로 천지와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반드시 깨달음을 얻어야만 한다.
자하신공이 바로 그러한 공부였다.
진자양이 그 자하신공을 대성했다면 그의 무공은 건곤무적 독고해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화산의 경사일 뿐 아니라, 전 무림의 복이로군요. 이 시기에 부맹주께서 출관을 하셨으니……."
감천형이 치하하자, 진자양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급한 김에 출관을 하긴 했지만……."
말꼬리를 흐리던 그는 문득 정색을 했다.
"그간 정말 많은 고생을 했다고 들었는데, 명색이 부맹주라는 자가 폐관에 들어 어려울 때 아무것도 돕질 못했으니 죄만하기 그지없소, 감 대행."
"별말씀을, 이렇게 와주신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답을 하던 감천형은 문득 입술을 깨물었다.
"부맹주께서 적시에 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오늘 이 맹주부는 잿더미도 남지 않았을 겁니다. 감 모는…… 감 모는……."
깨문 입술에 피가 맺힌다.
"능력의 부족을 통감합니다."
그는 치미는 격동을 참지 못하는 듯 얼굴을 숙였다.
그의 삶 30년 동안 좌절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하니 그 속내가 어떠하랴.
…….
침중한 분위기가 좌중을 짓눌렀다.
별빛이 차다.
겨울도 아닌데, 밤하늘에 보이는 별빛이 문득 서늘하게 느껴짐은 왜인가.
한효월은 암중에 길게 탄식해 마지않았다.
진자양도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오늘의 일이 어찌 감 대행……."
그의 말에 감천형은 얼굴을 들었다.
"오늘부로 저는 대행 직을 내놓겠습니다. 부맹주께서 맹주 직을 맡아주십시오."
"감 대행! 이 일은 그렇게 결정할 수……."
"맹 내에 변고가 있다면, 그 승계는 부맹주가 우선입니다. 제가 그동안 맹주 대행을 했던 것은 부맹주께서 자리에 없었기에 가능했었지요. 더 이상 저를 욕되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감천형의 말은 완강했다.
잠시 그의 얼굴을 보고 있던 진자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렇다면 중론을 모을 때까지 잠시 내가 대행을 하기로 하겠소."
"감사합니다."
감천형이 고개를 숙였다.
무림맹의 권한이 화산파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 * *
악몽의 밤은 갔다.
새벽이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움트는 새벽빛은 아스라한 안개를 몰고서 그렇게 어둠을 쫓아내고 있지만, 밤새 대책 회의를 치른 중인들의 얼굴은 납덩이와 같았다.
"감 당주가 반대한다면 강행하지는 않겠소."
진자양이 침착히 말했다.
잠시, 좌중에 침묵이 깔렸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흥!"
냉랭한 코웃음 소리.
침묵을 깬 것은 독고경이었다.
"누가? 누구 마음대로 맹주부를 화산으로 옮긴다는 건가요? 당신은 맹주 대행이지, 아직 무림맹주가 아니에요! 이곳은 아버님이……."
"경아, 말이 과하다. 그만 해둬라."
감천형이 말을 막았다.
"사형!"
"그만 해두라고 하지 않았느냐!"
감천형이 눈을 부릅떴다.
그 눈에서는 불길이 일고 있었다.
늘 자상하고, 아버지 대신 그녀에게 있어서는 한없이 너그럽기만 하던 사형이었다. 그가 자신을 이렇게 공개 리에 꾸짖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누구라도 이런 경우에는 주춤할 수밖에 없다.
독고경은 입을 다물었다.
불복의 기색이 역력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진 대행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감천형이 입을 열었다.
"사형!"
이번에는 좌백이 일어났다.
감천형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저지하며 침중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서는 각 파의 반발이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총론을 모을 때까지의 임시 조치에 불과한 일이니까."
대꾸한 진자양의 얼굴이 격동을 참느라고 미미하게 떨렸다.
"독고 맹주께서 이곳에 맹주부를 설치하고 전 무림의 은원을 해결하기 시작할 때, 나는 화산파의 장문인이 아니었고 차기 장문으로 내정된 장문제자(掌門弟子)였었소. 그분은 나의 선망, 아니, 전 무림의 선망이고 희망이었었소……. 그리고 오늘, 그분의 뒤를 이어 나는 이 자리에 섰소."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눈에서 신광이 일었다.
"그분이 이루었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었소. 그리고 적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강하오. 독고 맹주의 영광이 깃들었던 이 무림맹의 총단은 이 순간에는 참혹한 치욕의 현장일 뿐이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폐허를 지키고 있을 수는 없소. 재정비를 해서 돌아올 때까지! 이 일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오."
…….
침묵이 무겁고도 무겁게 좌중을 짓눌렀다.
감천형은 물론 좌백, 독고경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구도 진자양이 맹주 대행을 맡자마자 맹주부를 화산파로 옮길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한효월은 조용히 상황의 추이를 지켜볼 뿐, 처음부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아 그가 과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주위를 돌아보던 진자양은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한 공자의 고견은 어떠십니까?"
한효월은 어색한 웃음을 머금었다.
"저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무림맹의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슨 그런 말씀을! 한 공자께서는 독고 맹주의 사제이십니다. 누구보다 더 확실한 무림맹의 주축일 수밖에 없는……."
"죄송합니다."
한효월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진자양의 말을 끊었다.
"저는 감 사질의 요청에 따라 사형의 죽음을 조사하러 나왔을 뿐입니다. 혹시 필요한 일이 있을 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의 음성은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그러나 그 말에 서린 뜻은 완고(頑固)하여 진자양은 더 이상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아쉽군요. 그럼 도움이 필요할 때 부탁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 걸음 후퇴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여지는 남겨둔다.
두 사람은 한차례 문답을 한 셈이었다.
진자양은 한효월을 무림맹의 일원으로 묶어둘 요량이었고, 한효월은 무림맹의 일원이기보다는 자유롭게 움직이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