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十首 겁난재도(劫難再到) (22/113)

第十首  겁난재도(劫難再到)

-피보라가 다시 일다.

최후의 단서(端緖)가 당도하다.

 "미안하오."

 문곡은 한효월의 물음에 간단히 말을 맺었다.

 완곡하기는 하지만 답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문곡은 한효월에게 등을 보인 채로 난간 아래의 연꽃을 내려다본다.

 "본 문은 시비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이 없소."

 바람이 분다.

 물결이 치면서 연꽃잎이 파르르 떨렸다.

 나무는 고요히 있되, 부는 바람이 그냥 두지 않는다는 고사(故事)를 연상시키기라도 하듯이.

 "우리를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하늘하늘 김이 오르는 찻잔을 앞에 둔 채로 그를 보고 있던 한효월이 문득 나직이 웃었다.

 "가능하리라 생각합니까? 제천교가 이미 봉황문의 존재를 인지하고 경계하고 있는데도?"

 문곡은 신형을 돌려 한효월을 보았다.

 "왜 본 문이 봉황문이라고 생각하오?"

 "……!"

 그 말에 한효월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여기 대청에 봉황이 새겨져 있어서? 아니면 제천교에서 그렇게 불러서?"

 문곡은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봉황문의 군사(軍師)인 문곡이란 것은 또 누가 증명하겠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소. 그러나 이 점은 확실할 거요. 현재 제천교의 발호를 막고 있는 힘.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그 힘이 우리가 아니라는 점만은……."

 "그게 누굽니까?"

 "우리도 알지 못하오."

 그는 정색을 했다.

 "제천교는 오랜 세월을 두고 준비를 했소. 그리고 그것을 안 독고 맹주는 그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결과는 참혹한 패배! 그로 인해서 무림맹의 정예는 손상을 입어 그날 이후 무림맹은 종이호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그날의 결전에서 무림맹의 정예는 전몰(全歿)해 버렸으니까. 그들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독고 맹주의 시신을 미끼로 하여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을 무림맹으로 소집했소. 그들을 일망타진하면 그것으로 당대 무림을 구성하고 있던 축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니까."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독고 맹주의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지면서 상황이 바뀌었소. 예정에 없던 일에 의혹을 느낀 제천교에서 그 배후를 조사하느라 시간이 흘렀고…… 그 결과, 그들은 시신이 사라지고 있는 사례를 여러 군데서 발견하기에 이르렀소. 그런 가운데 한 공자가 나타났고, 일망타진을 위해서 무림맹으로 소집했던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자파로 돌아가고 말았지."

 문득 그는 미소를 머금고 한효월을 보았다.

 "그런데 말이오, 과연 그들이 무사히 돌아갔을 것 같소?"

 "……."

 한효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침착한 태도. 눈빛도 고요하여 변함이 없다.

 "한 공자의 계책은 강호초출답지 않게 교묘했소. 그런 상황에서 태연히 그들을 내보내고, 실제로는 하루가 지나서 구대문파의 영수(領袖)들을 변장까지 시켜서 비밀 통로를 통해 내보냈으니 말이오. 하지만 그 안배는 제천교의 이목을 벗어나지 못했소. 그렇게 해서 구대문파의 영수들은……."

 문곡의 말이 이에 이르자 어지간한 한효월의 안색도 굳어졌다.

 "그들이 변을 당했단 말입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은 정말로 극도로 은비(隱秘)하게 처리하여 그와 감천형을 제외한다면 맹주부 내에서 아는 사람은 두셋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한효월의 반응에 문곡은 머리를 저었다.

 "내가 아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나머지는 한 공자가 알아보시오. 하지만 제천교는 그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고수들을 파견했지만 별다른 득은 보지 못했다고 들었소. 누군가가 방해를 해서……."

 "방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둠은 더욱 깊어졌다.

 살랑거리던 밤바람은 무엇인가를 예고하듯이 점점 거세게 불고 있었다. 연못의 물이 파동 친다. 연꽃이 흔들리고 나뭇잎들이 세차게 전신을 흔들었다.

 "한 공자가 만약 제천교와 맞서보겠다면, 그들을 찾는 게 좋을 거요. 그게 그나마 가장 큰 가능성을 가진 일이니까."

 "제천교가 그만큼 강하다는 뜻입니까?"

 한효월의 물음에 문곡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내가 아는 것은 한정이 있지만 지금까지 그들이 보인 힘은 그들의 실력이 아니오. 그런 힘이라면 절대로 오늘날의 국면을 조성해 낼 수 없었을 테니까. 지금 우리가 보는 제천교의 힘은 어쩌면 빙산의 일각일런지도 모르오."

 그때 한효월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오. 내가 아는 것이라면……."

 "귀하는 적입니까? 친구입니까?"

 한효월의 돌연한 질문에 문곡은 뜻밖인 듯 멈칫했다.

 그리고 그는 이내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내가 친구라면 그렇게 믿겠소?"

 "그렇다고 한다면 믿어야겠지요."

 그의 말은 일반적이라면 그야말로 한심한 수준의 대답이다. 그러나 그 말을 한 사람이 한효월이었으므로 문곡은 그 말의 근저에 깔린 의미를 찾느라고 한참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리고 말.

 "한 공자가 우리를 적대하지 않는다면 친구일 거요."

 두 사람은 담담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흔들림이 없는 시선, 하지만 그 눈 깊은 곳에 깔린 심중이야 당사자가 아니면 누가 알 것인가.

 잠시 한효월이 사라진 담 쪽을 바라보고 있던 문곡은 중얼거렸다.

 "그를 따라가라. 그의 일거일동을 놓치지 않도록."

 답변은 없다.

 하지만 어디선가 미미한 움직임이 일었고, 그 움직임은 한효월이 사라진 쪽으로 멀어져 갔다.

 "역시 소문대로 뛰어나다. 하지만 아직 나이가 있으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미끼를 던진 이상, 기다리면 결과가 나타날 테지."

 그는 알지 못할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의미 모를 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영웅루 후원을 빠져나온 한효월은 바람처럼 어둠을 뚫고서 달렸다.

 지난 며칠 간 그는 많은 것을 생각했고, 이미 몇 가지는 행동에 옮겼다. 사실상의 무림맹 봉문 또한 그중 하나였다. 내 모든 것이 적에게 드러나 있는 이상, 뭔가 달라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문곡을 만난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와의 대화에서 별것을 얻어낼 수 없었겠지만 한효월은 그 대화에서 많은 단서를 찾아냈고 그것을 분석하면서 맹주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내가 그들을 찾아내기를 바란다는 건가?"

 생각에 잠겨 있던 한효월은 문득 의미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 말에는 실로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문곡은 무림맹과 제천교, 그리고 봉황문이 아니라 또 다른 힘이 있어서 제천교를 견제하고 있으니 그것을 네가 찾아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제삼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인가?

 영웅루는 낙양성 서편에 위치해 있었다.

 그가 일각가량 밤거리를 달렸을 때, 그는 담 너머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옷자락을 날리며 날아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람이 새처럼 날아 담장을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오직 무림인, 그것도 경공을 익힌 고수일 경우 외에는.

 지금의 낙양성이라면 그런 고수는 많고도 많을 터였다.

 그렇기에 한효월은 그것을 보고도 신경 쓰지 않고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 그림자가 사라지기 무섭게 십여 줄기의 흑영이 그 뒤를 쫓고 이내 그 앞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자 이젠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크윽!"

 흑의인은 눈을 부릅떴다.

 강력한 일격이 그의 쇄골(鎖骨)을 부수며 그를 날려 보냈다.

 하지만 그를 그 지경으로 만든 흑의경장인 또한 무사하지는 못했다.

 파풍도(破風刀) 하나가 그 흑의인의 등줄기를 갈라낸 것이다.

 그 흑의경장인은 신형을 틀어 그의 목으로 날아드는 오구검(吳鉤劒)을 피해내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은 이미 전과 같지 않았다.

 그의 눈에 절망이 떠올랐다.

 스팟!

 섬광이 어둠을 갈랐다.

 오구검은 갈고리와 같이 생긴 검이다. 거기에 걸리면 그 목이 어떻게 될지는 불문가지.

 하지만 오구검은 허탕을 쳤다.

 흑의경장인이 철퍼덕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기에.

 그는 앉으면서 신형을 틀어 일장을 앞으로 쳐냈다.

 일컬어 영원헌도(靈猿獻桃).

 원숭이가 복숭아를 바친다는 자세이니 이름이야 멋있다.

 하나 그 손에 적중된 검은 야행의를 입은 자는 배에서 핏줄기와 허연 내장을 한꺼번에 쏟아내면서 훌쩍 1장여 밖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크윽!"

 비명이 뒤늦게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야행인을 일장에 쳐 죽인 흑의경장인은 지독한 통증과 함께 자신의 가슴을 뚫고 솟아오르는 검극(劒極)을 볼 수 있었다.

 "여기까지다."

 차가운 음성이 그의 뒤에서 들렸다.

 검은 복면을 한 자, 그가 그의 등을 찌른 채 차갑게 중얼거렸다.

 순간,

 땅! 하는 맑은 음향과 함께 흑의경장인은 신형을 돌렸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가슴을 뚫고 솟아오른 검끝을 잡고서 신형을 돌려 그 검의 중동을 부러뜨려 버린 것이다.

 당연히 복면을 한 자의 눈에서도 경악이 떠올랐다.

 그가 아닌,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신형을 돌린 흑의경장인은 고함과 함께 양손을 일제히 쳐냈다.

 그의 검에서 피 묻은 반 토막의 검과 함께 강력한 장세가 쏟아져 나갔다.

 누구라도 이러한 상황에 처해서는 주춤 물러날 수밖에 없다.

 산발된 머리카락에 전신이 피투성이로 변해서 그처럼 달려드는 상대를 두고 더 이상 어찌할 것인가.

 복면을 한 자도 예외는 아니라서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선불 맞은 멧돼지와 같이 미친 듯 달려들던 흑의경장인은 그렇게 그를 돌파해 지나갔다.

 질풍과도 같은 몸놀림.

 그러나 그는 채 1장을 벗어나지 않아 눈앞을 가로막는 사람 하나를 느끼게 되었다.

 이미 거의 제정신이 아닌 그였다.

 그가 버티는 것은 버틸 수 있어서 버티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

 그것이 그를 지탱하고 있을 따름이라, 그는 앞을 가로막는 것이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고함과 함께 피투성이의 손을 휘둘렀다. 핏방울이 손바람과 함께 일었다.

 "크윽?"

 하지만 그는 이내 신음했다.

 그처럼 전력을 다한 일격을 상대가 간단히 막아버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손의 손목을 움켜잡기까지 하였다.

 "노, 놓지 못하겠느냐!"

 그는 미친 듯 발버둥치면서 고함쳤다.

 "진정하시오. 난 적이 아니오."

 조용한 음성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 말에는 묘한 힘이 깃들어 있어 흑의경장인은 핏물로 붉어진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서 그를 보았다.

 백색 유삼.

 그리고 스물을 넘긴 듯한 단아한 얼굴.

 그는 고요한 눈을 들어 그를 보고 있었다.

 백의유생은 흑의경장인이 자신을 바라보자 그의 손을 놓아주면서 말했다.

 "나는 지나가던 사람이오. 적이 아니라……."

 순간, 흑의경장인은 피 묻은 손으로 덥썩, 한효월의 손을 잡았다.

 "부, 부탁하오. 나를 맹주부로……."

 그 말을 들은 백의유생, 한효월의 안색이 달라졌다.

 "맹주부라니, 귀하는?"

 그때였다.

 "쓸데없는 간섭은 화를 자초하지. 어서 이 자리에서 꺼져라."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흑의경장인이 포위된 이곳은 민가였다.

 그것도 길가가 아니라, 한 민가의 좁은 담장 안.

 도주하던 그가 흑의인들에게 가로막히자 쫓겨 들어온 곳이다.

 한효월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포위한 흑의인들을 쳐다보는 순간,

 "어, 어떤 놈들이 여기서, 지랄 지……!"

 집주인인 듯싶은, 뚱뚱한 자가 소리치면서 문을 열고 나타났다. 집 안에서 몽둥이를 들고 나오던 그는 흑의인들의 손에 들려 빛을 뿌리고 있는 섬뜩한 무기를 보자 혼비백산, 번개처럼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한효월의 앞에 있는 흑의인들은 모두 여덟 명.

 방금 말을 한 것은 그중 앞선 자였다. 차가운 눈빛이 뱀처럼 빛나고 있었다.

 "당신들은 제천교도인가?"

 한효월이 그들의 옷차림을 보고 물었다.

 "너는?"

 일순 한효월을 보는 흑의인의 눈에 긴장이 묻어 나왔다. 어둠 속임에도 그들은 흑의에 복면을 해서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한눈에 알아보니 아연 긴장할 수밖에.

 "마, 맞소! 그들은 제천교도요. 어서 이곳을……."

 한효월에게 부축받은 사람이 쥐어짜듯이 신음을 토해냈다.

 한효월은 그의 상태가 상당히 심한 것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그 순간, 좌우에서 두 명의 흑의인이 판관필(判官筆)과 거치도(鉅齒刀)를 휘두르면서 덮쳐 왔다. 찌름과 휘두르는 각자의 장점이 조화된 공격.

 더구나 한효월은 부상자를 부축하고 있어서 그 움직임이 쉽지 않았다.

 피할 곳은 뒤였지만 그 뒤는 담장이 가로막고 있다.

 거의 같은 순간에 앞에서도 흑의인들이 날아올랐다.

 한효월이 공중으로 날아오르거나 앞으로 뛰쳐나오는 것을 미리 감안하여 그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그들도 이미 한효월이 간단하지 않은 존재임을 짐작하고 있기에.

 그러나 사태는 그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한효월은 처음부터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예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으악!"

 두 마디의 비명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거치도와 판관필이 튕겨져 오르며 흑의인들이 뒤로 거꾸러졌다.

 어떻게 당한 것인지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튕겨져 나감과 동시에 한효월은 앞으로 나서면서 날아오른 자들에게 손을 밀어냈다. 그의 손짓에 따라 튕겨졌던 판관필과 거치도가 고막을 찌르는 매서운 바람 소리를 일으키면서 그들에게 날아갔다.

 "크악!"

 비명이 다시 터졌다.

 앞선 자들이 판관필과 거치도에 가슴이 꿰뚫려 땅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나마 그것이 어깨 쪽이 아니었다면 즉사하였을 터였다. 날아오른 자 중 횡액을 면한 것은 그 우두머리 흑의인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무사하지 못했다.

 이미 그의 앞에 도달한 한효월이 그를 향해 일장을 쳐낸 까닭이다.

 졸지에 날아든 판관필을 쳐냈던 그는 흐트러진 자세로 허공에서 한효월의 일장을 받아내야 했던 것이다.

 폭음이 터지며 허공에서 핏방울이 뿌려졌다.

 그는 한효월의 일장을 견디지 못하고 팔랑개비와 같이 튕겨져 나갔다. 그가 부딪친 담장 위쪽이 허물어짐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담 밖으로 사라졌다.

 뒤이어 터져 나오는 다급한 호각 소리.

 나머지 흑의인들이 황급히 그 뒤를 따라 사라졌다.

 "저들을 모두 죽여야……!"

 그 광경을 보고 소리치던 흑의경장인이 피를 토해냈다.

 "소리치지 마시오. 내상이 악화되면 구할 수 없소."

 한효월이 그의 가슴 혈도를 누르며 침중히 말하자, 그는 머리를 마구 저어댔다.

 "나, 나보다 그분을 구해야 하오! 무, 무림맹의 신기당주우……!"

 그 말에 한효월의 안색이 달라졌다.

 "무슨 소리요? 설마 무림맹의 신기당주인 신안금조 조건, 조 당주를 말하는 것이오?"

 "그, 그렇소. 어서 무림맹으로 가서…… 쿨럭! 고수를 이끌고 가 그분을 구해야…… 이미 변을 당했을 수도…… 부, 부탁하……."

 흑의경장인은 피를 토하며 한효월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어디요? 거기가?"

 한효월의 음성이 다급해졌다.

 신기당주.

 무림맹의 신기당주인 신안금조 조건이 누구던가.

 사형인 독고해가 실종되자 그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 신기당의 정예를 끌고 강호로 나갔던 무림맹의 눈과 귀였던 사람이 아니던가.

 감천형은 늘 말했었다.

 그가 있었다면 이처럼 무력하게 적에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그가 없었기에 무림맹은 정보망이 붕괴되어 지금처럼 적암아명(敵暗我明)의 상태가 되었었다. 지금이라도 그가 돌아온다면…….

 더구나 그가 돌아온다면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닐 터였다.

 독고해의 사인(死因), 그 과정.

 그게 아니라면 제천교…….

 어쩌면 현 무림의 정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어떤 단서를 가지고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쏴아아-

 흙먼지를 불러일으키며 세찬 바람이 일었다.

 영웅루에서부터 불던 바람이 점점 힘을 더하고 있었다.

*   *   *

 무림맹의 육중한 대문은 굳게 닫혔다.

 문밖의 활활 타오르는 횃불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이지만 늘 있던 숙위무사도 문 앞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무림맹이 정말 봉문 상태로 들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세찬 바람은 돌풍과도 같이 무림맹을 휘감았다.

 커다란 관솔불임에도 그 불빛이 꺼질 듯 잦아들 정도의 바람이다.

 그렇게 깜박이던 불빛이 겨우 숨을 돌이켰을 때, 문득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훤칠한 키다.

 흑포(黑袍)에 검은 버선, 신발도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하였고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푸르스름하게 빛을 뿜어낸다. 옷과 너무 대조적인 그의 얼굴을 가린 것은 산발한 그의 긴 머리. 제대로 묶지도 않은 그 머리카락은 어깨를 덮고 허리까지 늘어져 바람에 제멋대로 휘날리고 있다. 그로 인해서 그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는 것은 물론 나이조차 알 수가 없다.

 천천히 걸어오는 듯했지만 세찬 바람 속을 뚫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맹주부의 돌사자를 스쳐 지난 흑포괴인은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자신의 앞에 당당히 버티고 선 문루를 쳐다보는 것이다.

 <天下武林盟總陀.>

 한때, 세상을 위진하였던 그 이름이 거기에 있었다.

 흑포괴인은 아무런 말 없이 그 거대한 현판을 향해 손을 쳐들었다.

 와드득!

 놀랍게도 문루에 걸린 현판이 그 손짓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뜯겨졌다. 그리고 허공을 날아 그에게로 빨려들었다. 날아든 현판을 향해 그가 손을 휘두르자 현판은 허공에서 편평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흑포의 산발괴인은 그 현판 위로 몸을 날렸다.

 순간, 쉬아앙!

 맹렬한 음향을 일으키면서 그가 올라선 그 현판이 굳게 닫힌 무림맹의 대문을 향해서 돌진해 갔다.

 콰콰쾅!

 일진 폭음.

 서역의 자단목(紫檀木)으로 겹쳐 만들어, 성문을 공격하는 공성용 당차(撞車)가 와서 받아도 손상하지 못한다는 그 무림맹의 대문이 단 한 번의 충돌로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그것도 그가 통과하는 가운데 부분만이 마치 거대한 망치로 친 듯이 뚫어지면서 그가 대문을 통과했으니 그 놀라움을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으랴!

 "누, 누구냐?"

 "뭐, 뭐야? 무슨 일이냐?"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무림맹의 위사들이 달려나왔다.

 "크으으……."

 신음이 참으려 해도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다.

 강소국은 전신을 뒤틀었다. 그래도 뼛속으로 파고드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더욱 치가 떨릴 따름.

 천수단혼 좌백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강소국의 전신은 이미 피투성이에 파김치. 고문 형틀로 고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분근착골(分筋錯骨).

 근육이 갈라지고 뼈가 어긋나는 고통을 주는 내가의 고문법이니 그것은 어떤 고통보다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누가 네 뒤에 있느냐?"

 "크, 크으윽……."

 대답 대신 괴로운 신음이 강소국의 입에서 흐른다.

 핏물이 입에서 게워지고 코에서도 귀에서도 핏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는데도 강소국은 말하지 않았다. 전신의 근육이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퍼덕거리고 있음에도.

 "독사찬심(毒蛇鑽心)의 고통마저 견딜 수 있다면, 네가 대단하다고 해주지."

 천수단혼 좌백이 냉랭히 중얼거렸다.

 쓰러진 강소국의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은 그런 방면에서는 전문가라 할 수 있었고, 그들의 손에서 입을 다물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보기 힘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다.

 밖에서 요란한 소리와 비명이 꼬리를 물고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소리야?'

 좌백은 부지중에 신형을 벌떡 일으켰다.

 일대 혼란.

 그럴 수밖에 없다.

 무림맹의 상징과도 같은 대문을 박살 내면서 나타난 괴인. 더구나 그가 밟고 있는 것이 무림맹의 얼굴인 현판이라니.

 변고에 뛰쳐나온 위사들의 안색은 흙빛이 되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덮쳐 갔던 위사들은 피떡이 되어 튕겨져 나갔다.

 뒤를 잇는 비명…….

 흑포괴인은 현판을 딪고 선 채로 우뚝 서 있었다.

 그가 선 곳은 대문에서 십여 장이나 들어선 안쪽.

 그 주위로는 맹주부의 위사들이 이미 20여 명이나 피를 뒤집어쓴 채로 죽어 넘어져 있었다.

 숙위하고 있던 위사들이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흑포괴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주위를 쓸어보았다.

 "당장 그 더러운 발을 비키지 못하겠느냐?"

 고함과 함께 위사 하나가 그에게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흑포괴인은 그것을 보면서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캉!

 폭풍처럼 날아든 검이 그의 가슴을 찔렀지만 뜻밖에도 그의 가슴에서 들린 것은 쇳소리. 그것은 사람과 쇠로 된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었다.

 "케엑!"

 신음이 들렸다.

 그 위사의 목줄기가 흑포괴인의 손아귀에 잡혔다.

 목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위사가 미친 듯 버둥거렸다.

 "당장 멈추지 못할까!"

 일성 호통과 함께 한 사람이 그에게로 날아들었다.

 그것과 동시에 흑포괴인은 목줄기를 움켜쥐었던 위사를 패대기치듯이 그에게 집어 던졌다.

 "조 향주!"

 그 위사를 받아 든 흑영, 천수단혼 좌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목은 이미 불가능한 각도로 꺾여서 흔들거린다. 이미 목이 부러져 죽은 것이다. 부릅뜬 두 눈…….

 좌백은 그가 순찰당의 향주인 것을 안다. 그리고 무림맹의 모욕을 죽어도 그냥 볼 수 없는 성질을 가졌음을.

 "너, 너는 누구냐?"

 좌백이 노해 격렬히 고함쳤다.

 흑포괴인은 음산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면서 돌연 발을 걷어찼다.

 쏴아앙!

 발 밑의 현판이 세찬 바람을 휘몰고서 좌백을 향해 날아갔다.

 날아드는 것이 무림맹의 현판임을 보자 좌백의 안색은 돌변했다.

 바로 그 순간이다.

 갑자기 좌우에서 비명과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어둠을 찢으며 사방에서 치솟는 불길.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 같다.

 날아드는 것이 무림맹의 현판임을 경각한 좌백은 대경실색하여 주춤 한 걸음 물러나면서 손을 쳐들었다.

 현판이 날아오는 기세로 봐서 자신이 그것을 피해 버린다면 현판이 산산조각나 버릴 것이다. 그럴 수는 없는 일.

 하지만 현판을 손으로 막는 순간, 좌백은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기운이 거기 실려 있음을 깨닫는다. 이런 경우에는 던진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더 힘이 들게 된다. 더더구나 좌백은 현판이 손상되게 할 수 없는 입장이라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현판을 받아 든 그의 발 밑에서 흙먼지가 구름처럼 일었다.

 그리고 그가 두어 걸음을 물러나면서 겨우 그 현판을 받아 드는 순간, 주위에서 놀란 외침이 터졌다.

 좌백의 눈에서도 긴장의 빛이 튕겨 올랐다.

 흑포괴인이 이미 유령과도 같이 그의 눈앞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콰쾅!!

 폭음이 일며 그처럼 힘들여 받았던 현판이 박살이 나 흩어졌다.

 그 와중에 한 가닥 신음과 함께 좌백이 연달아 뒤로 물러서고 있음이 보인다.

 흑포괴인은 괴이한 부르짖음과 함께 좌백을 추격해 가고 있었다.

 소매가 펄럭이는 가운데 가공할 위력을 가진 장세가 벼락치듯이 그의 손에서 발출되어 쏟아졌다. 그것은 그가 처음 덮쳐 올 때의 기세 그대로인지라 미처 신형을 안정시키지 못한 좌백으로서는 감히 맞설 수가 없었다. 상대는 그에 조금도 못지지 않은 고수인 까닭에 선기를 잃어버린 채 무모하게 맞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좌백은 이를 갈면서 땅바닥에 뒹굴듯 몸을 날려 그 공세를 피하며 소매를 휘둘렀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빛이 폭포수처럼 흑포괴인에게로 날아갔다.

 그의 장기인 암기가 발사된 것이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은침에서 수리검과 나한전 따위의 암기들이 꼬리를 물고 날아갔다.

 상대는 그 암기를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럼 그는 바닥을 치고 날아올라 오히려 그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너무 뜻밖으로 전개되었다.

 흑포괴인은 그의 가공할 암기 공격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암기가 날아오고 있음을 전혀 보지 못한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서 여전히 그를 덮쳐 오고 있었던 것이다.

 "죽으려고 환장을……!"

 중얼거리던 좌백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처럼 무섭게 날아간 암기가 흑포괴인의 몸에 부딪치자 맥없이 튕겨져 나가 버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콰쾅!

 찰나, 흑포괴인은 이미 좌백의 앞에 당도했고, 좌백은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그의 일격에 가슴을 얻어맞고서 휴지 조각처럼 날아가 처박혀야 했다. 좌백과 같은 고수가 제대로 대항도 하지 못하고 당하다니, 흑포괴인의 무공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으악!"

 "으아아……."

 비명 소리는 더욱 커졌고, 불길은 점점 거세게 맹주부를 태우며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맹주부 전체가 화염지옥에 빠진 듯한 광경.

 맹주부의 핵심중추인 취의청마저 어둠을 밝히며 타오르는 불길에 휘감겨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비명이 꼬리를 물고 들리는 가운데 불빛 속에서 검은 인영들이 설치고 있음이 보였다.

 "제…… 천교냐?"

 좌백이 비틀거리며 신형을 일으켰다.

 흑포괴인은 차가운 눈길로 피를 흘리고 있는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런 감정이 깃들지 않은 눈이다.

 무릇 인간이라면 어떤 경우에라도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눈은 정말 그러했다. 그리고 그 무감정한 눈에 갑자기 한 가닥 살기가 떠오른 것을 좌백은 볼 수 있었다.

 그것이 공격의 전조(前兆)임은 삼척동자도 알 일.

 콰쾅!

 폭음과 함께 담장이 산산조각났다.

 맹렬한 경풍(勁風)이 잔해와 풀 포기를 휘감아 올렸다.

 흑포괴인의 일장은 가공할 위력으로 일장 이내의 모든 것을 허물었다.

 찰나간에 한 바퀴를 굴러 그의 공격을 피해낸 좌백은 땅바닥에서 누가 쳐 올린 듯이 그렇게 튕겨져 오르면서 흑포괴인에게 일장을 쳐갔다. 사문의 절학인 만뢰구산수 중 신뢰참마(迅雷斬魔)의 일격이었다. 암기에 정성을 들인 그는 도검류보다 권장(拳掌)에 더 큰 힘을 기울여서 이 만뢰구산수에 곁들인 암기는 일절(一絶)이라 불릴 만했다.

 신뢰, 빠른 번개라는 말 그대로 신뢰참마의 일격은 가공할 속도로 1장의 거리를 가로지르면서 흑포괴인의 가슴으로 날아갔다.

 쾅!

 그리고 흑포괴인이 미처 피하기도 전에 좌백의 일격은 흑포괴인의 가슴을 쳤다. 그러나 그 순간, 좌백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상대의 가슴을 친 손이 마치 철판을 친 듯했던 것이다.

 찰나, 흑포괴인은 음랭한 웃음소리와 함께 반 걸음 신형을 틀면서 손을 들어 좌백을 쳐왔다. 그 속도는 그처럼 강호의 일절이라 자부하던 신뢰참마보다 더욱 빨랐다.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좌백은 양손을 교차하면서 비틀어 그 일격을 막아내려 했다.

 폭음이 다시 터지면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좌백은 막강한 충격에 술 취한 듯 비틀거리면서 물러났다.

 그런 그를 향해 숨 쉴 틈도 없이 흑포괴인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좌백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흑포괴인이 쳐오는 손은 볼 수 있지만 그걸 막을 만한 힘도,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흑포괴인은 마치 괴물과도 같았다. 아무리 강력한 자도 그를 이렇게 한순간에 일패도지 시킬 수는 없었다.

 바로 그 순간이다.

 "멈춰라!"

 일성 호통이 터지면서 가공할 도기(刀氣)가 흑포괴인의 배후를 엄습했다.

 대기가 몸부림치면서 갈라지는 것 같았다.

 어떤 공격이 있어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던 흑포괴인도 그 도기는 무시할 수 없었다. 흑포가 암흑의 나래와 같이 펄럭이는 가운데 흑포괴인은 신형을 풍차처럼 돌렸다. 그리고 그 손이 부챗살처럼 퍼지며 풍차와도 같은 일장을 앞으로 쳐내면서 옆으로 물러났다.

 파파파!

 삼엄한 도기가 2장 밖에 있던 석등(石燈)을 두부처럼 잘라냈다.

 도기는 유룡(游龍)과 같이 꿈틀거리면서 물러나는 흑포괴인을 엄습해 갔다. 그 속도는 질풍과 같아서 제아무리 신법이 고강한 자라 할지라도 피해낼 수가 없었고, 흑포괴인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섬광이 불칼로 화해서 흑포괴인을 덮치는 것만 같았다.

 "뇌정도!"

 담벽에 등을 기댄 좌백이 그것을 보고 소리쳤다.

 순간, 흑포괴인이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그러자 회오리바람과 같은 기세가 일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거대한 흡력을 일으켰다. 그의 손바닥에서 음산한 푸른 광채가 소용돌이치며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쿠쿠쿠쿠…….

 도기와 강풍이 맞닥뜨리자 거대한 진동이 일었다.

 찰나, 벼락치는 굉음이 터지면서 바닥에 깔았던 대리석들이 부서져 허공으로 튕겨져 올랐다. 흙먼지가 경기에 휘감겨 하늘을 가렸다. 일시지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좌백은 그 가운데에서 섬광과 고함이 진동함을 보았다.

 "사형……."

 그가 부지중에 중얼거렸다.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그를 구한 것은 감천형이었다.

 문득 주위가 조용해지는 듯했다.

 불길과 고함 소리, 비명 소리는 여전했지만 눈앞의 싸움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든 것이다.

 흑포괴인은 흑포를 휘날리며 여전히 우뚝 서 있었다.

 그 앞에는 한 사람이 당당히 서 가슴 앞에 장도를 세운 채 흑포괴인을 쏘아보고 있는데, 그는 바로 감천형이었다.

 "귀하는 누군가?"

 그를 쏘아보던 감천형이 무겁게 물었다.

 "……."

 하지만 흑포괴인은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자신의 손을 바라볼 뿐.

 그 손에는 손바닥에서 손목으로 미미한 흔적이 길게 나 있었다. 방금 감천형이 시전한 뇌정도와 맞닥뜨린 결과였다.

 문득 시선을 드는 그의 눈에서는 음산한 살기가 섬광처럼 인다. 흩어진 산발에 가렸던 창백한 얼굴이 반쯤 드러났다. 흑포가 살아 있는 것처럼 펄럭거린다.

 "사람을 죽이는 것밖에 모르나?"

 감천형이 꾸짖었다.

 그가 손에 쥔 패도로 그를 겨누었다.

 도광이 삼엄하게 패도의 전신에서 인다.

 "후후후…… 당연하지. 그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존재하니까. 다른 말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지."

 차가운 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불길 속에서 한 사람이 후원의 그 불길을 등지고 담장 위에 우뚝 서 있었다.

 흑의에 복면.

 바로 제천교의 옥형성주였다.

 "너는 제천교의 칠성 중 한놈이로구나!"

 감천형이 신음했다.

 "핫하하…… 이렇게 알아봐 주니 영광이로군!"

 옥형성주가 어깨를 들썩이면서 크게 웃었다.

 "언제까지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을 참인가?"

 차가운 음성이 날아들었다.

 감천형은 작달막한 키의 50대 중늙은이가 금포(錦袍)를 입고서 부서진 맹주부의 대문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는데, 마치 유람이라도 나온 듯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여기가 무림맹주부? 맹주부라…… 흥! 맹주가 없으니 무주부(無主府)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나? 주인도 없는 곳이 더 이상 존재하는 것은 의미가 없겠지?"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중얼거리던 그는 돌연 싸늘히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일각 이내에 이곳에서 숨 쉬는 자를 하나라도 발견하게 된다면 모두에게 책임을 묻겠다!"

 그의 외침과 더불어 20여 명의 흑의인들이 그의 뒤에서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움직임은 신속하기 이를 데 없어서 일진의 검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그들이 출현하자 남아 있던 위사들이 이를 악물고 그들에게 맞서갔다.

 하지만 질풍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흑의인들의 기세는 이미 위사들이 맞설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으악……."

 비명이 일면서 대번에 피가 튀었다.

 "멈추지 못할까!"

 감천형이 패도를 휘두르면서 고함쳤다.

 가공할 도기가 일면서 앞선 자 하나가 검과 함께 반 토막이 되어 피를 뿌렸다.

 "흥! 스스로나 잘 돌보는 게 좋을걸?"

 새로이 나타난 자, 서정후가 냉소를 터뜨렸다.

 그것과 동시에 예의 흑포괴인이 감천형에게로 날아들었다.

 그의 손에서 음산한 푸른 광채가 소용돌이치면서 감천형을 덮쳤다.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덮쳐 가던 감천형이 허리를 꺾으면서 패도를 되짚어 쳐냈다.

 뼈를 깎을 듯 가공할 도기가 산더미처럼 겹겹이 일어나며 흑포괴인을 휘감았다.

 "우우우우∼!"

 흑포괴인이 나타난 이래, 처음으로 괴이한 장소(長嘯)를 터뜨리면서 날아드는 감천형의 패도를 향해 양손을 쳐냈다.

 콰콰쾅!

 두 사람의 공세가 정면으로 격돌했다.

 가공할 소용돌이와 장풍 도기가 일대를 휘몰았다.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찰나간에 7, 8장 사방의 모든 것이 허물어졌다. 담장도, 아름드리 나무까지도 중동이 부러져 나가고 말았다.

 "천첩청령수(千疊靑靈手)?"

 그 소용돌이의 가운데에서 감천형의 경악한 외침이 들려왔다.

 "크크……."

 흑포괴인이 괴이한 음성을 흘렸다.

 그의 가슴팍 옷자락은 길게 찢어져 있었다.

 가슴팍도 당연히 갈라지고 붉은 피가 쏟아져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가슴은 미미한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피도 나오지 않았다.

 흑포괴인은 음산한 눈을 들어 감천형을 쏘아보았다.

 감천형의 얼굴은 납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그 얼굴은 창백했지만, 그보다는 놀람과 참혹함이 더했다.

 "천첩청령수라니…… 마교(魔敎)의 인물이냐?"

 "크크크……."

 대답 대신 흑포괴인은 다시 손을 들었다.

 음산하고도 푸른 기운이 다시금 그 손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으악!"

 "으아아……."

 비명은 끊임이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불길은 이미 충천하여 맹주부 전체가 대낮과 같이 밝아졌다.

 전원은 물론이고 후원까지도 불길에 휩싸였고, 비명 소리는 전, 후원을 가리지 않고 꼬리를 물었다.

 감천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음은 다급했지만, 스스로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장담을 할 수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적이 이처럼 빠르고 갑작스럽게 침공해 올 것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렇기에 한효월도 이 자리에 없는 것이다.

 "사숙……."

 감천형은 입술을 깨물며 패도의 도신을 꽉 움켜쥐었다.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서 뼈를 묻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지만, 적은 너무도 강했다. 터무니없이 그렇게 강했다.

 "오너라!"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서 서정후와 앞의 흑포괴인을 노려보았다.

 '사제! 너는 어떻게든 후원으로 가서 사모님을 모시고 이곳을 탈출해라!'

 동시에 그는 좌백에게로 전음을 보냈다.

 좌백 혼자서도 탈출하기 힘든 것은 잘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당하고 말 수는 없는 일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크아악!"

 담장을 넘어가던 흑의인 하나가 비명과 함께 튕겨져 나갔다.

 가공할 검기가 그를 휘감으면서 그를 단숨에 두 쪽으로 갈라 버린 것이다. 피보라가 쏟아진 내장과 함께, 그가 땅바닥으로 처박히는 궤적을 타고 뿌려졌다.

 그렇게 그는 나타났다.

『대풍운연의』 제3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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