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九首 봉황로현(鳳凰露現) (21/113)

第九首  봉황로현(鳳凰露現)

-봉황문 드러나다.

문곡과 천추가 만나 자웅(雌雄)을 겨루다.

 희끄무레한 어둠이 천지를 덮었다.

 맹주부 후원에 자리한 아취소축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모님께선 주무시느냐?"

 아취소축으로 들어서면서 감천형이 물었다.

 이 밤에 통보도 없이 그가 불쑥 찾아들자 봉설란의 시녀인 하란(夏蘭)은 조금 긴장된 빛으로 그를 맞았다.

 "아직……."

 "내가 지금 뵙겠다고 전해라."

 감천형의 말에 하란은 두말없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무슨 소리냐?"

 자면성모 봉설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이 아니면 찾아뵐 시간이 없을 듯하여 미리 찾아뵙고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녀의 앞에 선 채로 감천형이 말했다.

 침실에 면한 객청에서 그를 맞은 봉설란은 너무 뜻밖의 말에 말이 나오지 않는지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건 누구의 생각이냐?"

 봉설란은 정신을 가다듬은 듯 물었다.

 "제가 결정한 사안입니다."

 "회의도 없이 말이냐?"

 "지금은 비상시입니다. 모든 절차를 다 갖출 수는 없습니다."

 감천형의 말에 봉설란은 그린 듯 휘영청한 아미를 찡그렸다. 그렇지 않아도 어두웠던 얼굴에 더욱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성급한 것이 아니냐? 그분이 가신 지 얼마가 되었다고 그런 일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허장성세로 억지로 버티고 있기에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차라리 후일을 기약함이……."

 "아무리!"

 봉설란이 그 말을 끊었다.

 늘 고요하고 후덕한 웃음을 짓던 그녀의 얼굴이 납덩이와 같았다.

 "아무리, 급하다고 하나 무림맹의 문을 닫아걸고 숨어버린다면…… 그런다면 차후에 어떻게 세상을 볼 수 있겠느냐? 이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재고함이 좋을 것 같구나. 봉문(封門)이라니……."

 그녀가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감천형은 그녀에게 깊이 머리를 숙였다.

 아무리 바깥일을 모르는 그녀라 할지라도 그의 태도가 무슨 의미인지 모를 바보는 아니다. 봉설란은 뭔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도 뜻밖의 일에 어떻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

 감천형이 문을 나서고 나서도 봉설란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그럴 수는……."

 한참 만에야 그녀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   *   *

 한효월은 손에 쥔 비단 천을 만지작거렸다.

 그날 숲에서 만났던 신비인이 그에게 주고 간 것.

 그 비단 천은 특별히 제조되어 윤기가 흘렀고 매우 질겼다. 삼각형으로 만들어져서 작은 깃발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기에 그려진 것은 묘한 생김의 그림 한 자락.

 구름이 흩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새 깃털처럼 보이기도 했다.

 "언제 어디서라도 이걸 걸어두면 찾아온다는 건가?"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깊은 생각에 잠긴 중얼거림이었다.

 언제 어디서라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그만한 힘이 있다는 과시라고 봐도 좋을 터였다.

 누굴까?

 "누가 움직일 것인지 기다려 보지……."

 문득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그 비단 깃발을 다시 품에 간직한 한효월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구름이 달을 덮어오고 있었다.

*   *   *

 달빛이 가물거렸다.

 슬그머니 누각을 훑었던 달빛을 한달음에 거두어 버린 것은 북쪽 하늘에서 달려온 검은 구름이었다. 흰 구름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움직이던 검은 구름은 어느새인가 낙양과 무림맹을 덮었다.

 주위를 휘감은 어둠 속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은밀히 움직인다.

 낭창한 교구(嬌軀)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여인이었다.

 뭔가를 들고서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월동문이 위치한 담장으로 다가갔다. 그림자가 드리워 더욱 어두운 그곳에는 한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맹주부 위사의 복장을 한, 준수한 얼굴의 30대.

 반가운 듯 손을 잡은 그들은 낮게 뭔가를 속삭이더니, 여인은 그에게 가져온 것을 내밀었다.

 찬합(饌盒)이다. 그 속에 먹을 것이 들어 있는 듯 위사는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그것을 집어 먹었다.

 여인은 그것을 보면서 소리 죽여 웃었다.

 "돼지 같아."

 "밤새 번 서려면 배고프지……."

 단숨에 찬합 속에 든 것을 다 쓸어버린 위사는 한쪽 볼이 불룩한 채로 웃어 보인다.

 "어맛!"

 그리고 다음 순간, 여인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어, 어쩌려고 이래? 여, 여기서……."

 여인이 당황하여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래 봐야 어차피 시늉에 불과한 몸짓이었다.

 위사는 그녀를 끌어안고는 웃었다.

 "누가 보나?"

 그러고 보니 이 담장 그늘은 매우 은밀했다.

 앞에는 얕으막한 정원수가 심어져 있고, 그 앞쪽으로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한껏 팔을 벌리고 있어서 누가 일부러 옆에 와서 보지 않는 한 그들을 발견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해 보였다.

 "미쳤나 봐! 지금이 어느 때인데……."

 여인은 다급하게 그를 때렸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담장으로 밀렸고 위사는 그녀의 치마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이내 뿌연 여인의 허벅지가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녀는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였다.

 위사가 낮게 웃었다.

 "좋아."

 뭐가 좋다는 것인지, 그렇게 말한 그는 바지를 조금 내리고는 그녀를 거세게 담장으로 밀어붙였다.

 "아……."

 숨 막히는 신음이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등을 두드리던 그녀의 손은 어느새 그의 목을 얼싸안고 그의 호흡에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가쁜 숨이 억제할 수 없게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위사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후둘거리는 다리로 자신을 버틸 수 없어서 겨우 등을 담장에 대고서 나른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여인.

 "힘도 좋아……."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를 벗어나지 못하는지도 몰랐다.

 문득 구름에 가렸던 달이 탈출하면서 빛을 뿌렸다.

 그녀의 얼굴이 나뭇잎 사이로 드러났다. 밝으레하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은 바로 아취소축의 시비 하란이었다.

*   *   *

 하란과 헤어진 강소국(江小國)은 태연하게 맹주부를 가로질렀다.

 몇몇 위사들이 그를 향해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그는 순찰당의 기찰위사라서 신분이 낮지 않았다. 그는 이내 맹주부의 작은 문을 통해서 맹주부를 벗어났다. 그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외부 순찰을 돌 시간인 까닭이다.

 맹주부를 벗어난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면서 성중을 누볐다. 이미 밤이 깊어 인적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처럼 많던 무림인들도 오늘은 한가했다. 아마도 망산의 일로 인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망산으로 몰려간 모양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 휘황한 빛과 왁자지껄한 소리가 뒤섞인 곳이 나타났다.

 <歡樂賭樓.>

 그렇게 이름된 여기는 말 그대로 도박을 하는 곳이다.

 양쪽으로 높게 걸린 기사풍등(氣死風燈)은 이 환락도루가 어떤 곳인지를 사방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

 강소국은 이곳이 처음이 아닌 듯 그가 들어서자 양쪽으로 웃통을 거의 벗어젖힌 채로 강철 같은 팔뚝을 드러내고 있던 자들이 허리를 굽혔다.

 안으로 들어서자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열기가 후끈하게 느껴진다.

 불빛 아래, 수십 명의 사내들이 탁자 앞에 앉아서 눈을 붉히고 있었다.

 주사위, 마작, 패구까지 각종 노름 기구들이 그 탁자에서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은자들이 패의 반복에 따라 이리저리 흐른다. 그때마다 탁자에 흐르는 것은 한숨과 탄성, 그리고 욕설.

 잠시 마작판을 살펴보던 강소국은 계산대로 가서 장방 관노구(官老九)를 찾았다.

 "별일없지?"

 "그럼요."

 맹주부의 권위가 추락했다고 하나, 이런 곳에서까지 얕볼 상태는 당연히 아니다. 일개 도박장의 관가라면 더 더욱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천하무림의 맹주부인 것이다.

 "예홍(藝紅)이는?"

 "하하, 당연히 강 위사님을 기다리고 있지요."

 느물하게 웃은 관노구는 옆에 있던 수하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그의 안내를 받아 강소국은 뒤쪽 통로를 통해서 전혀 다른 곳으로 나오게 되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강호영웅루(江湖英雄樓)였다.

 이름이야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술을 팔고 기녀가 웃음을 파는 기루가 그곳이다. 이미 한두 번 와본 것이 아닌 듯 그는 일사천리로 인도되어 2층 방으로 들어갔다.

 벌써 기별이 간 것인가?

 주안상이 차려져 있고 분위기가 잡힌 그곳에는 녹의를 입은 미녀 하나가 다소곳이 앉아 있다가 그를 맞았다.

 그윽한 촛불 아래 자리한 미녀의 모습은 참으로 요염하였다. 풍정(風情)을 머금은 눈빛은 사내를 호리고도 남을 정도였고 몸에 착 달라붙는 녹의는 온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 숨이 가쁠 정도다.

 그녀는 웃음 띤 얼굴로 붉은 입술을 나풀거리며 그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다."

 하란과 이야기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강소국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는 하란이 가져다 준 찬합 속에서 꺼낸 쪽지를 녹의녀의 앞에다 내려놓으며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아이, 왜 이리 급하세요?"

 녹의녀는 허리를 비틀었다.

 "핫하…… 계집을 앞에 둔 사내가 급하지 않겠느냐?"

 강소국은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서 벗어라, 나는 다시 가봐야 한다."

 말은 그렇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그녀에게 붙어 있을 뿐, 더 이상의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녹의녀 또한 말로는 아양을 떨면서도 그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워 전혀 기녀답지 않았다.

 "호호호…… 그간 많이 굶으셨나 봐요?"

 그녀는 웃으면서 눈은 차갑게 강소국이 내놓은 쪽지를 훑었다.

 차가운 그녀의 눈에 파문이 일었다.

 "봉문? 이게 사실이에요?"

 그녀가 음성을 한껏 낮추어 물었다.

 "그렇소."

 "있을 수 없는 일…… 이 시기에 말인가요? 강호의 손가락질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나도 모르겠소. 하지만 내일부터는 모든 사람들의 맹주부 출입이 봉쇄될 거요. 물론 맹주부 내의 사람들까지 출입이 통제될 것이니 나도 나올 수 없게 될 것 같소. 아, 그리고……."

 그는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천 교두가 사라졌소."

 "천 교두라니? 독고해의 셋째 제자 말인가요?"

 "그렇소."

 이미 이경(二更)이 넘어 삼경을 바라보는 시각.

 거리에 넘치던 사람들의 물결이 잦아들고 인적이 끊어지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하지만 밤이 깊어갈수록 활기를 띠는 곳이 있다.

 웃음소리, 탄식 소리는 닫힌 문을 뚫고서 거리를 흐른다.

 강소국은 침착한 표정으로 환락도루를 빠져나와 거리를 둘러보았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 강소국은 침착하게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발길이 굳어졌다.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야경(夜警) 도는 소리가 이따금 들리는 가운데 그가 가고 있던 앞쪽에 누군가가 서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 동화된 그 사람은 담장에 붙어 있어서 가까이 이르기 전에는 미처 발견할 수가 없었다.

 더더구나 이곳은 대로가 아니라서 더욱 어둡고 조용했다.

 "누구……?"

 허리에 건 장도의 손잡이를 잡던 강소국의 안색이 달라졌다.

 어둠 속에서 그 사람이 몸을 돌려 빛나는 눈길로 그를 보았기 때문이다.

 "당주님?"

 강소국이 얼떨떨한 빛으로 중얼거렸다.

 나타난 사람이 순찰당의 당주인 좌백이었기에.

 "어딜 다녀오는 겐가?"

 "순찰을 도는 중입니다. 몇 군데 들러서 이상한 점은 없는지 확인하고……."

 "혼자 다니지 말라는 지침을 잊었나?"

 "죄송합니다. 제게 조금 일이 있어서 순찰대가 먼저 갔습니다. 지금 합류하러 가는 길입니다."

 "볼일을 다 봤다는 뜻인가?"

 차가운 좌백의 말에 강소국의 안색이 돌변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 계집의 이름이 예홍이던가?"

 냉랭한 좌백의 중얼거림과 함께 강소국은 소매를 휘둘렀다.

 차가운 빛이 좌백에게로 날아감과 동시에 그는 좌백과 반대로 몸을 날렸다. 그는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던 듯 비도(飛刀) 두 자루를 던져 내자마자 찰나간에 두 번의 도약을 통해서 뒤에 있던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실력으로 좌백을 이길 수 없음을 잘 아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가 채 모퉁이를 돌기 전에 강력한 충격이 그의 가슴을 쳤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가 피분수를 뿜어내면서 훌쩍 나가떨어졌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나면서 몇 명의 흑의인이 바람처럼 나타나더니 강소국을 제압해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바람처럼 강소국을 가로막고서 그를 쓰러뜨린 좌백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이렇게 할 이유가 있었을까?'

 줄곧 생각해 봤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배신을 했다면 어차피 맹주부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 그를 처리해도 좋을 터였다.

 그런데 아무리 은밀하게 처리한다고 해도 굳이 인원을 동원하여 돌아오는 그를 바깥에서 잡아들인다는 건가?

 소문이라도 내고 싶은 것일까?

 하지만 불만은 없었다.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숙이지만 이 일을 주재하는 그의 능력이 자신보다 뛰어남을 그가 이미 인정하고 있는 까닭이다.

*   *   *

 영웅루(英雄樓)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걸고 환락도루와 등을 맞대고 영업하는 이 주루는 아름다운 꽃이 많다 하여 장안에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그중 예홍은 일급으로 알려진 십이연화(十二蓮花) 중 하나로서 손님을 골라 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강소국이 나갔음에도 손님을 받았다는 표시인 홍등(紅燈)을 끄지 않은 그녀는 휘장이 쳐진 창밖을 슬쩍 살핀 다음, 벽에 붙은 봉황 장식을 비틀었다.

 그러자 장식장이 옆으로 물러나면서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암문(暗門)이 하나 드러났다. 일개 기녀의 방에 이런 장치가 되어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암문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좁은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계단을 뛰어내렸다.

 그녀는 일신에 무공을 지니고 있는 듯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가볍게 1장 반가량의 높이를 날아 내렸다.

 통로가 어둠 속에서 뻗어 있다.

 그녀는 통로가 익숙한 듯 어둠 속이지만 서슴없이 몸을 날려 앞으로 전진했다.

 통로는 길지 않았다.

 5장가량 통로를 걸어가자 문이 나타났고 그 문밖은 영웅루의 후원 가산(假山)이었다. 이 후원은 제법 높은 담이 둘러싸고 있어서 외부의 시선을 차단했다. 그녀가 가산으로 나온 것을 볼 수 있는 사람도 당연히 없었다.

 가산은 제법 큰 규모였다.

 언덕도 있고 산을 타고 흐르는 시내도 있었으며, 천연의 커다란 바위들도 한몫을 했다. 시냇물은 가산을 감아 흘러 그 앞에 있는 연못으로 흘러들었고 연못은 활짝 핀 연꽃으로 가득 덮여 있었다. 그 연못가에는 한 채의 화려한 누각이 서 있는데 2층의 누각은 세 채의 누각이 낭하(廊下)로 연결되어 그 낭하에서 연못을 가득 덮은 연꽃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통로를 나선 그녀는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는 땅을 박찼다.

 그녀의 신형은 어둠을 가르며 단숨에 누각의 낭하로 날아들었다.

 이어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가운데 있는 누각으로 들어갔다.

 딩∼! 디디딩…….

 조용히 흐르는 음률이 있다.

 춤추듯 움직이는 은어와 같은 손가락의 흔들림에 따라 칠현금(七絃琴)의 현은 학의 울음을 토해낸다. 학이 날갯짓하듯 손가락이 현을 튕겨 올리면 금은 갑자기 천둥벼락과도 같은 굉음으로 변해 광풍(狂風)을 휘몬다.

 일신에 걸친 것은 깨끗한 백의.

 학창의에 동파건(東坡巾)을 쓴 40대의 선비.

 그는 고요한 모습으로 연못을 바라보면서 그의 모습 그대로 낮고 조용하게 여자의 손처럼 고운 손으로 금을 타고 있었다.

 예홍은 그의 뒤에 섰다.

 그녀는 방금 보고받은 것을 그에게 모두 말한 다음이다.

 "잠시 조사해 봤습니다만, 사실인 듯합니다. 이미 맹주부의 외곽 경비대까지 모두 맹주부 내로 철수하고 있습니다."

 따앙!

 갑자기 현이 비명을 지르며 탄주가 멎었다.

 "봉문이라……."

 등을 보인 채 금을 타던 중년 유생이 중얼거렸다.

 "묘한 일을 하는군.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건가?"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그가 있는 이곳은 누각의 대청이었다.

 두 개의 객청(客廳)이 붙어 있는 이곳은 이 후원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었다. 바닥에는 붉은 주단(綢緞)이 깔려 있었고 대청의 가운데에는 정교하고 작은 가산이 하나 자리했다.

 그 대청의 중앙 벽에는 정교한 솜씨로 커다란 봉황이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그 벽화의 아래에는 호화로운 교의(交椅)가 놓여 있었으며 좌우로는 십여 개의 의자가 놓여 있어 평소 이곳이 사람들이 대화하는 곳임을 알 수 있게 했다.

 "너는 그만 물러가 봐라."

 중년인의 말에 예홍은 그의 등을 향해 허리를 굽혀 보이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녀가 물러나자 중년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뭔가 곤혹스러운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나이는 40대 후반, 미목이 청수한 편인데 얼굴은 길고 눈꼬리가 긴 데다 날카로운 빛이 서려 있어서 생각이 깊은 사람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생김이었다.

 그는 탄주를 멈춘 채 길게 난 검은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당수(唐秀), 가서 알아보라. 제천교 쪽의 움직임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모든 경로를 동원해야 한다."

 "존명(尊命)!"

 대답과 함께 한 사람이 사라졌다.

 …….

 밤바람이 조금 거세졌다.

 연꽃잎이 일어나는 파고에 출렁거린다.

 문득 그가 얼굴을 들었다.

 "어떤 고인(高人)이 오셨는지 미처 마중치 못했구료."

 그는 침착히 가라앉은 눈빛으로 가산을 쏘아보았다.

 "하하하하……."

 일진 웃음소리가 밤하늘을 치며 날아올랐다.

 전혀 아무것도 거리낌이 없는 방약무인(傍若無人)한 빛이 역력한 웃음소리.

 그 웃음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 전에 한 사람이 가산의 바위 그늘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당당한 체구. 전신은 검은빛 경장을 했으며 복면을 해 진면목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허리에는 묘한 형태로 검이 하나 매달려 있다. 특이한 것은 손이 상당히 길다는 것. 복면 속에서 드러난 눈빛은 말 그대로 무정(無情)했다. 아무런 감정도 그 눈에서는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만한 기도는 역력했다.

 "봉황문(鳳凰門)의 문곡(文曲)이 보통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더니, 과연 보통이 아니군! 본 성주(星主)가 나타났음을 그렇게 쉽게 알아내다니."

 그 말에 중년인은 태연히 웃었다.

 "미안하오. 실은 느낌이 이상하여 그저 물어본 것뿐, 실제로는 누가 나타났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소. 그런데 이렇게 제천교의 천추성주가 나타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

 그 말에 흑의복면인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결국 상대의 말에 속아 넘어갔다는 뜻이 아닌가.

 그 사람이야말로 다름 아닌, 제천교의 제천칠성 중 대사형이라 불리던 천추성주였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중년인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벼락 치듯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좋아……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그의 웃음소리를 따라 그의 앞쪽에 있던 연못이 세차게 파동 치면서 연꽃들이 회오리바람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에 있던 나무에서 나뭇잎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을 보자 문곡이라 불린 중년인은 가볍게 웃었다.

 "듣건대 천추성주는 제천칠성 중 발군이라 하더니 과연 대단하오. 그런데 늘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시오?"

 음성은 크지 않다.

 조용하지만 그 음성은 천추성주의 웃음소리 속에서 또렷하게 들렸다.

 그 말과 동시에 천추성주의 웃음소리가 가위로 줄을 자른 듯 그쳤다.

 "……."

 그는 냉전(冷電)이 이는 눈빛으로 잡아먹을 듯 중년인을 쏘아본다. 상대는 그를 가볍게 움직인다고 풍자(諷刺)하는 것이다.

 "……."

 문곡은 그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그를 보면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잠시 그를 노려보고 있던 천추성주는 문득 픽, 웃음을 흘렸다.

 "듣던 바대로 천생의 모사(謀士)로군. 귀하가 뛰어남을 인정하지."

 그의 말에 문곡은 껄껄 웃었다.

 "어려운 순간에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으니, 과연 제천칠성의 수좌답소이다그려. 그런데 이 밤에 수고로이 이곳까지 찾아온 까닭은? 그렇지 않아도 망산에서의 일로 바쁠 터인데?"

 "봉황문의 의중은 무엇이오?"

 "의중?"

 "천기선생이 은거한 후, 봉황문 또한 세상에서 사라졌었소. 그런데…… 그가 죽자 봉황문이 다시 나타났으니 의도가 있을 것이 아니오?"

 "아직은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소."

 대꾸한 문곡은 문득 희미하게 웃었다.

 "누가 본 문의 전대 문주를 암해한 것인지를 밝혀내기 전까지는."

 "그럼, 천기선생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서 나타난 거란 말이오?"

 "어떻게 생각해도 좋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니까."

 말한 문곡은 문득 칠현금을 다시 잡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나는 다시 금이나 탈까 하오만."

 천추성주의 눈빛이 싸늘히 굳어갔다.

 "축객령(逐客令)인가?"

 "무엇이건 좋소…… 본 문은 아직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

 "한 가지만 더 묻지. 봉황문의 당대 문주는 누구요?"

 그 말에 문곡은 희미하게 웃으며 오히려 되물었다.

 "제천교의 교주는 누구요?"

 그 말에 천추성주의 눈빛이 차갑게 일그러졌다.

 "내가 이곳을 피바다로 만들 수 없을 것 같은가?"

 "으하하하하……!"

 문곡이 낭랑히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밤하늘을 울려 퍼졌다.

 밤바람이 물 위에 뜬 연꽃잎을 가볍게 흔들었다.

 천추성주는 미동도 없이 서서 그 연못을 격한 채 문곡이라 불린 중년인을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본다.

 연못은 좌우가 8, 9장이나 되었지만 가산과 면한 곳은 4, 5장가량으로 비교적 좁았다. 그의 능력이라면 한 번 도약으로 도달하고 남음이 있는 곳이고 설사 직접 날아가지 않아도 일격을 가하기에 불가능한 거리는 아니다.

 "피바다라…… 그럴 만한 능력이 있으신가?"

 웃음을 그친 문곡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그 말에 천추성주는 냉소를 쳤다.

 "한번 시험해 보고 싶은가?"

 "별로."

 "겁이 나는 모양인가? 실망이군, 봉황문은……."

 천추성주의 말을 문곡이 태연히 잘랐다.

 "지금은 시기가 아니지. 당신을 찾아갈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인데 본문이 굳이 앞설 필요가 어디 있을까?"

 '따로 있다고?'

 천추성주는 암중에 미간을 찡그렸다.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 거요. 귀왕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지. 그는 제천교가 망산별부를 무너뜨린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테니까."

 그 말에 천추성주의 가슴에 일진(一陳) 진동이 일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 그것도 연못 하나를 건넌 그의 눈빛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알아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본 교가 귀왕의 망산별부를 무너뜨렸다고? 누가 그런……."

 천추성주는 냉소했다.

 하지만 변함없는 문곡의 말소리는 다시 그의 말을 잘랐다.

 "하긴, 천추성주가 아는 것은 한계가 있을 테니 모를런지도……."

 문득 문곡은 미미하게 소리내 웃었다.

 "천하무림맹의 맹주인, 중원무왕 독고해를 처리한 마당에 그보다는 한 수 떨어진다는 귀왕쯤이야 제천교에서 안중에 둘 리가 있었겠나? 그렇지 않고서야 그를 망산에서 폭사시키려 하진 않았을 테지. 후환이 두렵다면 그런 일은……."

 그는 말을 멈추었다.

 천추성주가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음을 본 까닭이다.

 일단 발동하자 그는 정말 폭풍과도 같이 5장의 거리를 한숨에 가로질렀다.

 그러나 그는 문곡의 앞까지 이르지 못했다.

 촤아악!

 문곡의 앞쪽, 정확히 말해서 문곡이 앉아 있는 난간 앞 연못 속에서 검은 그림자 둘이 좌우로 치솟아오르면서 천추성주를 공격했던 것이다. 음산한 빛이 독아(毒牙)와 같이 천추성주를 향해 엄습한다.

 "흥!"

 한소리 냉소성.

 동시에 천추성주의 허리춤에서 눈부신 백광(白光)이 섬전처럼 뿜어져 나왔다. 용이 신음하는 듯한 긴 울음을 토해내면서.

 쨍! 쨍그렁…….

 날카로운 금속성이 터져 나오면서 섬광이 사방으로 튕겨났다.

 물속에서 솟아난 자들은 기이하게 생긴 쌍도(雙刀)를 들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신속무쌍하여 마치 한쌍의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물속에서 솟구치는 듯했다.

 그들은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적절하게 천추성주가 그들의 위를 통과하는 시점에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천추성주는 발검하여 그들을 공격함과 동시에 그 반동을 이용하여 반 장가량 튕겨져 올라 그들의 머리 위를 넘어갔다.

 순간, 그는 이미 문곡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검이 문곡을 향해 무섭게 뻗어갔다.

 눈앞으로 검이 뻗어옴을 보면서도 문곡은 태연히 웃으며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 광경에 천추성주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찰나, 소리도 없이 가공할 빛줄기가 천추성주를 향해 위에서 폭사되어 내리꽂혔다. 그 신속함은 방금 전 물속에서 뛰쳐나온 자들의 공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챙강!

 불똥이 튀었다. 핏줄기를 끌면서 천추성주가 번개처럼 뒤로 튕겨졌다.

 그렇게 물러서는 그를 향해서 날아드는 섬광!

 방금 그가 물리쳤던 연못에서 솟아나온 자들이었고, 그들의 숫자는 어느새 둘이 아니라 넷으로 불어 있었다.

 물속에서 날아든 자들의 공격을 쳐내고 문곡을 향해 날아들던 그를 공격한 것은 기관 장치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쇠창살. 난간의 천장에 장치되어 있던 그 쇠창살이 그물처럼 폭사된 시기는 너무도 적절하여 그가 막 난간에 이르는 순간이었다.

 천추성주의 신속한 신법을 감안한다면 그가 그 자리를 통과하는 순간에 기관이 발동했다면 그가 난간을 지나가 버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발동은 반 박자가 빨랐다. 그것은 절묘하여 난간을 통과하던 천추성주의 등을 산적(散炙)처럼 꿰고도 남음이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문곡이 그를 향해 의미있게 웃어 보이지 않았다면 그는 횡액을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그가 몸을 틀고 검을 휘둘러 떨어지는 쇠창살을 치면서 뒤로 튕겨난 것은 거의 한순간이라 해도 좋았다. 아니, 앞서 두 명의 쌍도를 상대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그것은 한 동작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를 공격해 오는 자들과의 격돌.

 쨍쨍!

 섬광과 불똥이 검과 도가 맞부딪치는 순간에 튕겨 나왔다.

 나직한 비명과 피보라가 벼락처럼 피어 오르는 가운데 천추성주는 연못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 그는 연못 위의 연잎을 밟으며 바람처럼 빠르고도 가볍게 뒤로 물러났다.

 "등평도수(登萍渡水)…… 좋은 경공이군."

 그 광경을 보면서 문곡이 칭찬했다.

 얼음처럼 굳은 천추성주의 눈빛.

 그의 앞쪽 연못에서는 붉은 핏물이 번져 가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를 공격했던 자들은 그의 단혼참(斷魂斬) 일격에 상처를 입고서도 연못 속으로 잠적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도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상대는 더 공격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물러나자 다시금 물속으로 은신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언제라도, 아니, 방금 그의 발 밑에서라도 튀어 오를 수 있음을 의미했다.

 "명불허전이군. 이들이 봉황문의 무영도객(無影刀客)들인가?"

 연잎을 밟으며 물러나 제자리로 돌아간 천추성주가 중얼거렸다.

 그의 어깨와 가슴 쪽에서 핏물이 번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디딩! 딩딩…….

 귀에 거슬리는 묘한 음악이 들려왔다.

 그것을 듣자 천추성주의 안색이 돌변했다.

 "귀왕의 음혼귀조지악(陰魂歸曺之樂)이군. 기왕 온 것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굳이 나와 싸우지 않더라도 그가 당신을 찾아올 것 같으니……."

 문곡이 낭랑히 웃었다.

 그리고 그는 천추성주는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금을 타기 시작하였다.

 마치 합주라도 하는 듯했고, 어떻게 보면 이곳으로 오라고 소리 내어 누구를 부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천추성주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그는 잡아먹을 듯 문곡을 노려보더니 한바탕 발을 구르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아무리 막강하다 한들 봉황문의 정예와, 더더구나 귀왕까지 한꺼번에 적으로 두고 싸울 수는 없었다. 그는 물론 혼자 온 것이 아니었지만 천하십왕이란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결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닌 까닭이다.

 문곡의 맑은 웃음소리가 그 뒤를 따라 낭랑히 울려 퍼졌다.

 그 속에 서린 통쾌한 빛은 천추성주를 치욕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일순간 사나워졌던 연못가는 다시 정적을 되찾았다.

 조용히 금을 고르던 문곡은 문득 금현에서 손을 놓으며 웃었다.

 "언제까지 무엇을 더 보고 싶으시오?"

 그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구경거리가 더 있나 해서…… 실례가 되었다면 용서를."

 모습을 드러낸 그가 문곡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웃어 보였다.

 백의를 입은 그는 놀랍게도 한효월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걸어나왔고, 그가 있던 곳은 천추성주가 있던 곳에서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다. 예홍이 나왔던 가산의 비밀 통로에서 근접한 위치라 그가 어떻게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있었는가를 말하는 듯했다.

 그는 예홍의 뒤를 밟아 이 자리에 이른 것이다.

 '듣던 대로군.'

 그 모습을 보고 문곡이 암암리에 중얼거렸다.

 …….

 연못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잠시 침묵.

 문득 한 가닥 웃음기가 문곡의 입가로 번져 갔다.

 그는 금을 거두면서 입을 열었다.

 "이리 건너 오실 수 있겠소?"

 "하하, 불청객을 나무라지 않고 초청까지 해주신다니."

 낭랑한 웃음과 함께 한효월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신형을 날려 허공을 가로질러서 그 대청으로 들어섰다. 그가 백의를 펄럭이며 그 자리에 서는 모습은 침착하고도 태연하여 누가 봐도 멋이 있었다.

 그의 나이는 많지 않지만 바로 그런 점이 그를 비범케 하는 것이다.

 그가 이처럼 조금도 망설이지 않을 것임은 의외였던 듯, 일순 당황했던 문곡은 일어서서 그를 맞이하면서 웃었다.

 "듣기에 근자에 혜성과 같이 강호상에 나타난 기인(奇人)이 있다고 하던데 그것이 아마 귀하이겠지요? 독고 맹주의 사제이신……."

 "기인이라니, 과찬입니다."

 한효월이 태연히 말을 받았다.

 뒷짐을 진 채로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태도는 마치 친구의 집에 방문하러 온 사람과 같았다.

 대청의 중앙 벽에 벽 전체를 채우다시피 봉황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정치(精緻)한 솜씨는 예사롭지 않아서 봉황은 금방이라도 나래를 치면서 벽에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멋진 그림이군요."

 "이 집 주인이 봉황을 좋아했던 모양이오. 본인은 치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묘하여 한효월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보자 문곡은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지요."

 눈에 띄는 아름다움을 지닌 미녀 둘이 공손히 두 사람의 앞에다 찻잔을 내려놓고 물러갔다.

 다기(茶器) 하나도 범상치 않았다.

 평소라면 그런 다기에 관한 소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시기도 그렇고, 사람도 달랐다.

 "듣던 대로 임풍옥수(臨風玉樹)와 같은 면목이시오. 장차 얼마나 많은 강호의 여인들이 공자로 인해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게 될는지……."

 문곡이 웃으며 입을 열자, 한효월이 말을 잘랐다.

 "그를 음악소리 하나로 쫓아 보낸 것은 확실히 고명합니다. 하지만 그가 거기에 오랫동안 속을 것 같지는 않군요. 말을 간단히 하면 어떨지?"

 한효월의 말에 문곡은 안색이 달라졌다.

 "어떻게 알았소?"

 "간단한 일 아닙니까? 귀왕이 그렇게 쉽게 움직일 수 있다면, 아니, 그보다는 지금은 아마 이곳에 올 시간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설사, 망산별부가 무너졌다고 할지라도 그 배후가 제천교임을 그리 쉽게 알아낼 수도 없었을 겁니다. 누가 알려주기 전에는."

 "고명한 식견이오."

 문곡은 고개를 끄떡였다.

 "하지만 말이오. 만약 내가 수를 쓴 것이 아니라면? 정말 귀왕이 제천교를 찾고 있다면 어쩌겠소?"

 "나를 부른 것이 그 대답을 얻기 위해서입니까?"

 그 말에 문곡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봉황문은 천기선생의 은거와 더불어 강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천하무림맹에 간세를 심어서 그 동태를 감시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한효월은 틈을 주지 않고 다그쳤다.

 "감시는 아니오. 무림맹 내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 그걸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니까."

 "지켜보기 위해서?"

 "그렇소. 본 문은 아직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오. 한 가지 일이 있어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무림맹을 바라보고 있을 뿐, 다른 뜻은 아무것도 없소."

 "그게 뭡니까?"

 한효월이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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