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首 장보풍운(藏寶風雲)
-장보가 나타나다.
보물을 찾아 풍운(風雲)이 일다.
은은히 전해지는 진동이 아니었다.
천정에서 돌 부스러기가 그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우수수 떨어질 정도의 격렬한 진동!
땅속, 그것도 지하에 이토록 견고하게 지어진 지하 대전이 울릴 정도의 진동이라면 무엇인가 변고가 일어난 것에 틀림이 없었다.
귀왕의 안색이 돌변했다.
"너희들 말고 또 누가 같이 왔느냐?"
"혼자 들어왔소."
한효월의 대답에 귀왕은 무서운 눈빛으로 한효월을 노려보다가 냉소를 터뜨렸다.
"흥!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모두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
그가 격노하여 발을 굴렀다.
한데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가 발을 구르자 일진 질풍이 대청을 회오리치면서 대청을 밝히고 있던 벽의 불들이 일제히 꺼져 버렸던 것이다.
삽시간에 대청 안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겼다.
"어딜 가는가!"
한효월의 낭랑한 외침이 터졌다.
콰쾅!
한쪽에서 일진 폭음이 터져 나왔다.
격한 싸움 소리.
착착 소리가 들리면서 이내 불이 밝혀졌다.
심소옥이 손에 불을 밝혀 들고 있었다. 묘하게 생긴 화통인데 밝은 빛은 아니지만 칠흑 같은 어둠은 충분히 물리칠 만했다.
하지만 장내가 밝아지자 군웅들의 안색이 달라졌다.
귀왕을 비롯하여 대청에 있던 그의 수하들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효월에게 집중되었다.
그가 굳은 얼굴로 대청의 옥좌, 처음에 귀왕이 앉아 있었던 그 앞에 서 있음을 발견한 까닭이다.
"어떻게 된 거냐?"
독행신개가 그의 옆으로 날아갔다.
"기관을 발동하고는 비밀 통로로 사라졌습니다."
"괴이하군? 귀왕이 난데없이 도주라니? 그의 신분으로 보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그는 귀왕이 아닙니다."
"뭐라고?"
"말 그대로입니다. 그는 귀왕 본인이 아닙니다. 화신(化身)이거나, 아니라면 좀 전에 나타났던 유명진군이 가장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독행신개가 믿기 힘들다는 듯 머리를 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본 것은 분명히 그가 기억하고 있던 귀왕이었기에.
"이런 상황에서 가장하는 건 쉬운 일이지요. 하지만 그가 귀왕이라면 천하십왕의 명성은 전설로 전해 내려오지 못했을 겁니다."
한효월의 말뜻을 알아들은 탁탑천왕이 발끈했다.
"무슨 소린가? 놈의 무공은……."
"저는 얼마 전에 요동권왕과 한번 겨루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무공은 유명진군과 격(格)이 다릅니다. 그런데 귀왕의 무공이 요동권왕과 얼마간 차이가 난다 해도…… 그렇게 격이 다를 수는 없을 겁니다."
"요동권왕을 만났다는 겐가?"
탁탑천왕이 눈을 크게 떴다.
"그렇습니다."
"싸워봤다고?"
"맞습니다."
"그의 무공이 그렇게 강하다고? 정말 귀왕…… 좀 전의 그 귀왕보다 강하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한효월의 말에 탁탑천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난 세월의 공들인 탑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느낌이었기에.
"어, 어디냐? 놈이 어디로 사라진 거야?"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소리쳤다.
한효월이 옥좌를 가리켰다.
"이 뒤에 비밀 통로가……."
순간 다짜고짜 괴성과 함께 탁탑천왕이 그 옥좌를 향해서 일권을 내질렀다.
"안 됩니다! 그걸 부수면……."
한효월의 다급한 외침이 폭음 속에 묻혔다.
콰쾅!
옥좌는 탁탑천왕의 일격이 과연 대단함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분풀이라도 하듯이 일격으로 옥좌를 날려 버린 탁탑천왕은 그 옥좌가 날아간 곳 바닥에 시커먼 구멍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밀 통로였다.
"이까짓 게 뭐라고……."
코웃음을 치던 탁탑천왕의 입에서 갑자기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폭음이 일면서 그가 있던 바닥이 그대로 함몰해 버렸던 것이다.
"아버님!"
소패왕 관패가 놀라 달려갔다.
"위험해!"
한효월이 소리쳤다.
동시에 꽈르릉! 하는 요란한 굉음이 대청 안을 뒤흔들었다.
"맙소사! 대청이 무너진다!"
독행신개가 안색이 흙빛이 되어 부르짖었다.
정말이었다.
대청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붕괴되는 게 아니었다.
여기저기에서 벽이 밀려 나오고 천정이 아래를 향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윽! 이게 무슨 냄새……."
신음과 함께 개방의 고수 한 사람이 그 자리에 픽,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독향(毒香)이다! 숨을 멈춰!"
심소옥이 소리쳤다.
"흐흐흐…… 스스로 죽고자 귀부로 찾아들었으니 어찌 무사하기를 바라겠느냐? 이제 너희들을 귀부의 명부(名簿)에 귀신으로 등재해 주마."
음산한 웃음소리가 벽을 타고 흘러들었다.
쿠쿠쿠…….
돌과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암흑이 온통 지하를 뒤덮었다.
* * *
머지않아 어둠이 물러갈 터이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덮였다. 빗방울은 이미 멎었지만 그로 인해서 어둠은 아직 밀려나지 않고 희미한 빛줄기만 군데군데 밀려들고 있을 따름이다.
자욱한 안개.
감천형은 다급히 그 안개 속을 달리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은 그의 사제인 천수단혼 좌백. 그리고 믿을 만한 고수들.
그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사숙이 없어진 것조차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날아든 연락.
긴급 구조 요청이라니…….
그제서야 놀라 달려간 감천형은 정말로 사숙이 자리에 없음을 발견하고 급히 고수들을 소집하여 이곳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그러나 막상 오긴 했으되, 안개가 너무 짙어서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게 그가 이곳에 도달한 다음 헤매고 있는 가장 큰 이유였다.
"개방의 사람들도 보이지 않느냐?"
감천형이 2, 3장 밖에서 주위를 수색하고 있는 좌백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좌백의 답변에 감천형은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연락을 보내온 것은 개방의 전령(傳令)이었다. 전과는 달리 특별한 신분을 가진 고수가 아니라, 보통의 거지. 그것도 소년거지였다. 캐물어봤지만 아는 것이 없었다.
다급히 이곳으로 가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한효월이 보이지 않았다면 그의 말만 믿고는 움직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너도 들었느냐, 사제?"
감천형이 물었다.
"예, 들립니다."
좌백이 긴장된 표정으로 감천형과 마주 보더니 앞으로 쏘아 나갔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풍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심금을 훑어내리는 듯한 묘한 여운을 담은 소리, 평범한 소리가 아님은 분명했다. 더더구나 이런 곳에서 들리는 소리라면…….
짙은 안개가 솜이불처럼 깔렸다.
발 밑에도 깔리고 풀잎도 덮고 나무도 덮었다.
숲 속의 안개는 더욱 심해서 숲 속으로 들어오자 정말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안개를 헤치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천천히 전진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천천히인 듯하지만 느릿하게 보이는 그 행렬의 움직임은 실제로는 대단히 빨랐다.
은은한 풍악 소리는 거기에서 들리고 있었다.
행렬은 기괴(奇怪)했다.
상여(喪輿)인 듯한 가마의 크기는 보통의 상여보다 두 배는 컸다. 그 상여를 메고 있는 것은 여덟 명의 장한들. 칠흑처럼 검은 흑포를 걸치고 머리까지 두건을 뒤집어써 그들의 모습 또한 기괴하다. 그런 그들의 앞에는 여덟 명의 악사(樂士)가 선도하고 있는데,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그 괴기한 음악 소리는 이미 한효월이 여러 번 들은 소리였고, 방금 감천형이 들은 소리이기도 했다. 죽음의 너울처럼 검은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그들은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안개를 가르며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행렬이 전진함에 따라서 긴장감은 격하게 증폭되어 피어 오른다.
그들의 앞에 한 사람이 있었다.
자포(紫袍)를 입었다.
노인인 듯하지만 커다란 도(刀) 한 자루를 들고 우뚝 선 그 모습에서는 산악과 같은 기도가 당당하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서 있었고, 상여와 같은 그 기괴한 행렬도 앞에 선 그를 보지 못한 듯 계속해서 전진하고 있을 따름이다.
결국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
"도대체 무슨……."
먼저 당도한 좌백이 그 광경을 보고는 괴이함을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뒤에 선 감천형도 마찬가지다.
그 순간, 아침 안개를 헤치며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삼가 귀왕여(鬼王輿)를 맞이합니다!"
말과 함께 안개 속에서 좌우로 십여 명의 대한이 나타나 다가오는 행렬을 향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귀왕여라니? 설마!'
그 소리를 들은 감천형의 안색이 대변했다.
찰나, 행렬의 선두와 자포의 노인은 그 순간에 맞닥뜨렸다.
안개를 가르며 한순간, 눈부신 금광(金光)이 폭출되는가 싶더니 가공할 위세로 일시지간 일대의 안개를 쓸어냈다.
안개가 놀라 흩어졌다.
그 서슬에 나뭇잎에 매달렸던 이슬들이 땅바닥으로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후두둑 비 오듯이 떨어졌다.
쨍쨍!
맹렬한 음향.
다음 순간에 자포의 노인은 소리도 없이 반 장가량을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번개처럼 뽑아냈던 그의 금도는 이미 도초에 들어가 있고, 여전히 당당한 모습의 그는 상여의 진로를 그대로 막고 있는 상태였다. 무표정한 얼굴에 서린 기도는 이미 충일했고 조금 전과 달리 눈에도 신광이 깃들어 강하게 빛을 뿜고 있었다.
상여가 멎었다.
앞서 그와 부딪쳤던 여덟 명의 악사들은 조금 손해를 본 듯했지만 흐트러진 기색은 아니었다.
순간.
"금도대협(金刀大俠) 장풍람(張風嵐), 맞나?"
차갑고도 오만한 음성 하나가 상여 쪽에서 들려왔다. 이제 보니 보통 상여가 아니었다. 보통의 상여보다 두 배나 큰 그 상여는 실제로는 호화롭기 이를 데 없었다.
"보잘것없는 이름은 이미 풍진에 묻힌 지 오래외다. 기억해 주시니 감사하오."
자포노인이 가볍게 공수하여 예를 표했다.
"좋아, 세월이 흘렀다고 감히 본왕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건가?"
냉랭한 웃음소리가 상여, 귀왕여에서 흘러나왔다.
그 웃음소리에 실린 위력은 막강해서 주변 4, 5장 이내의 나뭇가지들이 일제히 전신을 떨었고, 안개들이 세찬 바람을 만난 듯 출렁거렸다.
음성.
한갓 음성에 깃든 위력은 가히 세상을 놀라게 하고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위력 앞에서도 자포노인, 스스로를 금도대협 장풍람이라고 인정한 그는 침착히 입을 열고 있을 따름이다.
"어찌 감히……."
그는 빛나는 눈으로 귀왕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하좌(下座)는 폐상(弊上)의 명을 받고 귀왕 각하를 초청하기 위해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을 따름이외다."
말을 마치자 그는 완강히 입을 닫았다.
…….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마치 대치하기라도 하는 듯 귀왕여도, 금도대협 장풍람도 그 자리에 서 있을 따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내뱉은 폐상, 나의 주인이라는 말은 그런 상황을 초래케 할 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대체 누가 금도대협을 부릴 수 있단 말인가?'
그 광경에 감천형도 참지 못하고 좌백과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금도대협 장풍람.
그는 이미 30년 전에 대협의 칭호를 받은 사람이다. 나이는 칠순을 바라볼 터이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그의 성정(性情)은 고오(孤傲)하여 홀로 움직이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의 금도가 적수를 찾지 못했음은 세상이 다 알고 있다.
30년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다.
죽으면 죽었지 남에게 꺾일 사람이 아닌 것이 바로 금도대협 장풍람이기에, 그리고 그럴 만한 자격을 가진 것이 그이기에 감천형마저 놀라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귀왕여에서 물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누군가?"
"죄송하나, 가서 보시면 알게 될 것이외다."
"우후후후후……."
그 말에 음산한 웃음소리가 귀왕여 안에서 흘러나왔다.
팍팍!
금도대협의 발 밑에서 일진 경기가 피어 올랐다.
은연중에 일진의 암경(暗勁)이 그를 공습(攻襲)한 것이다. 그러나 금도대협 장풍람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깨를 잠시 떨었을 따름이다.
그는 조금도 흔들림없이 눈앞의 귀왕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히 누가 본왕을 오라 가라 한단 말이냐? 당장 돌아가 전하라. 필요하면 네가 오라고 하더라고."
"하좌는 폐상의 명을 받았으니, 이행할 따름."
전혀 망설임없이 금도대협 장풍람이 말을 받았다.
"으핫하하하…… 좋아, 좋아! 오늘에서야 지난날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금도대협의 금도십구식(金刀十九式)이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볼 수가 있을 것 같구나……."
음산한 웃음소리가 일대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귀왕여가 천천히 혼자서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일대 격전이 벌어질 듯한 순간.
"한마디만 들어주시길."
금도대협 장풍람이 그를 향해 손을 마주 잡았다.
"폐상은 귀왕 각하께 이 말을 전하라 하셨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갑자기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함에 있어서 그의 입술이 달싹이고 있음은 그가 암중에 귀왕에게 그 말을 전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다시 장내에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떠올랐던 귀왕여가 천천히 다시 내려섰다.
"안내하라."
침잠하게 가라앉은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감사하외다."
금도대협 장풍람이 귀왕여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귀왕여의 앞을 가로막았던 대한들이 일제히 선도하듯 앞으로 달려가고 귀왕여가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금도대협 장풍람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의 눈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감천형 등이 은신하고 있는 숲 속이었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번거로움을 자초한다. 목숨을 담보로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지."
그 말을 남겨두고 금도대협 장풍람은 등을 돌렸다. 그가 사라지자,
"우리가 여기서 보고 있음을 알았던 모양이군요."
좌백이 말했다.
그와 함께 숲 속을 나선 감천형은 고개를 끄떡였다.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
그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뒤에는 무림맹의 고수들까지 있다. 그 기척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따라오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는데, 따라간다면 예가 아니겠지?"
감천형의 답변에 좌백은 어이없는 빛이 되었다.
"그 따위 위협에 놀라서 그냥 이대로……."
"위협이 아니다. 금도대협을 수하로 거느릴 사람이라면 평범할 리가 없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결코 귀왕과 같은 사람을 불러갈 수가 없을 테고……."
감천형은 정색을 했다.
"평소라면 그냥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숙을 찾아야 하지 않느냐? 힘을 분산시킬 수는 없다……."
그는 말끝을 흐렸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귀왕이 나타난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일 리가 없다. 더구나 금도대협을 수하로 부리는 사람이라니…… 그런데도 그 일을 그냥 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은 실로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
좌백은 미련이 남는 눈빛으로 금도대협이 사라진 곳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아무나 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나 다른 고수가 간다면 필연적으로 전력의 약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것을 알기에 그도 속만 끓였다.
천하를 위진(威震)하던 천하무림맹이 이렇게 무력하게 변하다니…….
그때였다.
전혀 뜻밖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내가 가보면 어떨까?"
나지막하고 침착한 음성.
설마 하고 시선을 돌린 감천형과 좌백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사숙?"
한효월이다.
그가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그들의 앞에 서 있었다. 가슴팍을 붉은 피로 물들인 채로.
"어, 어떻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상처는?"
감천형과 좌백이 놀라 달려갔다.
* * *
절대절명!
그 말이 이 상황에 가장 적절한 표현이리라.
천정이 무너지듯 무섭게 내려 꽂힌다.
좌우의 벽이 밀려들고 대청 안을 가득 채운 것은 독향이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독향.
힘을 쓰자니 숨을 참을 수가 없다. 숨을 참고서는 아무리 무공의 고수라 할지라도 힘을 쓸 수가 없음이 정상이다.
생각을 굴릴 틈도 없다.
사방은 암흑 천지이고 독향이 가득 찬 대전은 시시각각으로 좁아진다. 이런 속도라면 숨을 쉬지 않고 견딘다 할지라도 채 반 각이 지나지 않아 대전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살아남지 못할 터이다.
"이 개자식들이 정말……."
독행신개가 벽을 치면서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뿐, 힘을 써볼 방법이 없었다.
한효월도 다급하기만 했다.
탁탑천왕이 기관을 발동시킨 바람에 일시지간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관이 발동되면서 모든 통로가 봉쇄된 까닭이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상황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끽끽…….
기관이 마찰되는 소리와 함께 불빛이 스며든 것이다.
"캑? 이게 뭐야?"
불빛이 스며들면서 괴이한 음성이 들려왔다.
한 사람이 천리화통을 들고서 눈을 꿈벅거린다.
그는 대전 한쪽 벽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사람의 상반신이 드나들 만한 틈. 그 틈새를 따라 불빛이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그곳으로 머리를 내밀다가 독향이 왈칵, 풍겨 나오자 순간적으로 놀라 숨을 멈추고 다급하게 뭔가를 입에다 털어넣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이런 빌어먹을, 이건……."
그런데 그때다.
"이게 누구냐? 귀도(鬼盜) 신가 도둑놈이로구나!"
한 사람이 소리치면서 날아들었다.
"뭐, 뭐야?"
뒤로 물러났던 사람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갈포를 걸친 그는 아주 왜소한 체구를 가졌다. 그러나 팔과 다리는 매우 길고 손도 컸다. 쥐눈에 염소수염 등 그 모습은 매우 우스꽝스러워 마치 거미를 보는 듯했다.
느닷없이 사람의 소리가 들리자 놀란 그는 쥐눈을 신속하게 굴려 방금 자신이 뚫어놓은 구멍에 나타난 사람을 보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독행신개? 이런 우라질, 저 귀신이 왜 여기 있는겨?"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줄행랑을 쳤다.
"음? 괴이하군 어디로 간 거야?"
독행신개가 중얼거리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가 선 곳은 방금 전의 대청과는 전혀 다른 통로였다.
귀도라 불린 갈포인이 만든 통로는 십여 장이나 되게 길었는데 거미줄이 잔뜩 붙어 있는 데다가 좁고 길게 이어진 그 통로의 끝에는 십여 명이 서 있을 수 있는 석실이 있었다.
그런데 그 통로가 끝이었다.
나갈 곳이 없었다.
"통로가 있겠지요."
한효월이 말했다.
"빨리 찾아보게. 놈을 찾아야 해."
독행신개가 다급히 말했다.
한효월의 눈에 의문이 떠오름을 본 그가 뭐라고 하려는 순간에 심소옥이 참견하였다.
"전에 말했자나? 장보도 이야기! 그가 장보도를 가졌다고 소문이 났어. 군웅들이 모두 눈에 불을 켜고 그를 찾아다니고 있는데 그가 여기에 있을 줄은……."
"놈은 단순히 몸을 피하기 위해서 여기 온 게 아닐런지도 몰라. 어쩌면 귀왕과 무슨 관계가 있을런지도 모르고 그러면 당금의 정세……."
독행신개가 말했다.
"그건 아닐 거 같군요."
한효월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건축 양식으로 볼 때…… 이곳은 귀왕의 지부(地府)와 형태가 조금 다릅니다. 소문대로라면 그는 장보도를 따라 이곳에 온 것인지도 모르지요."
"장보도?"
독행신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럼 여기에 진시황의 장보가 있단 말인가? 여기 북망산에?"
"진시황의 장보라?"
한효월은 말을 하면서 갑자기 한쪽 벽을 쳤다.
끼긱!
돌연 벽이 빙글 돌면서 그 안쪽 벽이 바깥으로 돌아 나왔다.
"엇? 넌?!"
그 벽의 뒤에서 놀란 눈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본 독행신개가 놀라 소리쳤다.
그가 찾고 있던 귀도였던 까닭이다.
벽 뒤에 붙어 숨을 죽이고 있던 귀도는 한효월이 기관을 발동해서 자신을 찾아내자 기겁을 하고 황급히 문 안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그는 채 1마장을 가지 못하고 급급히 신형을 멈추고 말았다.
한효월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비켯!"
그가 고함치면서 일장을 쳐냈다.
콰쾅!
그 순간, 폭음이 통로를 뒤흔들었다.
부서진 돌무더기가 우박처럼 그들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쿠쿠쿠콰콰…….
통로가 무너진 것은 폭발로 인해서였다.
한효월과 귀도의 격돌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난데없는 폭발로 인해서 한효월 등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 생매장되고 말 뻔했다. 더더구나 폭발은 한군데가 아니었다.
폭발은 연달아 일어났다.
처음, 진동이 일었던 것 자체가 폭발이었다.
누군가가 강력한 화기를 터뜨려 무덤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것이 누군지 알게 된 것은 무너진 무덤 벽의 틈으로 드러난 통로를 통해서 한효월 등이 간신히 그 자리를 벗어난 다음이었다.
귀도를 쫓던 자 중 산서 벽력당(霹靂堂)의 고수가 통로를 발견하지 못하자 아예 가지고 있던 벽력탄(霹靂彈)을 터뜨려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벽력탄이 강력하다고 해도, 돌로 축조된 지하의 견고한 무덤이 지상에서 벽력탄을 터뜨린다고 해서 그처럼 무너질 리는 없었다.
의혹을 가졌던 한효월은 그 자리를 벗어난 다음에서야 비로소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외곽에서 벽력탄을 터뜨린 것은 화기로 유명한 벽력당이었다. 하나 실제로 이 북망산 별부의 내부로 들어와서 귀왕의 화신(化身)을 놀라 후퇴하게 만들고 그도 모자라 폭발물로 귀왕의 망산별부를 무너뜨린 자들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귀도를 쫓던 자들과는 달리 망산별부의 붕괴였다.
그들이 누군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망산별부에서 연제되고 있던 시신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그 시신들을 망가뜨리는 것이었다.
* * *
사방은 여전히 짙은 안개로 가득했다.
안개 저 멀리서 아침 햇살이 이는 듯도 하지만 안개 탓인지 사위는 아직도 어둡기만 하였다.
그 어둠과 안개를 두르고서 싸리로 담장을 두른 한 채의 모옥(茅屋)이 산속에 위치한다.
한효월과 감천형, 그리고 좌백은 숲에 몸을 숨긴 채 그 모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서너 간의 모옥.
아침을 바라고 일찍 일어난 새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 외에는 참으로 조용했다.
그야말로 숨 쉬는 소리조차 없다.
산이 아침을 맞으며 깨어나는 소리를 제외하면 인기척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농가는 아닌 듯싶고 나무꾼의 집인가 싶은 그 모옥은 그렇게 아침 고요 속에 묻혀서 존재하고 있다.
'잘못 찾은 게 아닐까요?'
한참 숨을 죽이고 주위를 살피던 좌백이 물었다.
같이 온 감천형도 의혹이 이는 듯했다.
너무 조용했던 것이다.
그들이 찾는 귀왕의 그 특징있는 귀왕여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인지도 모르지…….'
한효월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들은 귀왕여의 종적을 따라 이곳까지 도착했다.
그러나 안개가 너무 짙어서 그 종적을 찾아내는 것이 의외로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이곳에 온 사람은 한효월과 감천형, 좌백 등 세 사람이었다. 나머지 고수들은 그들과 백 장가량 떨어진 곳에서 감천형의 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개방의 고수들, 독행신개를 비롯한 심소옥 등은 귀도의 종적을 따라 그들과 헤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폭발 당시에 한효월과 헤어진 것이었지만…….
"빈집은 아닙니다."
좌백이 낮게 중얼거렸다.
숨을 죽이고 기척을 살펴본 결과, 모옥 주위로 낮은 숨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은신하고 있는 기척으로 보아 평범한 자들은 분명 아니었다. 그런 자들이 공연히 있을 리는 만무.
그때였다.
모옥의 뒤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금도대협 장풍람이었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주위를 쓸어 보다가 감천형이 있는 곳을 보면서 냉랭히 입을 열었다.
"이리 나오너라!"
후두둑…….
나뭇잎에 힘겹게 매달려 있던 이슬 방울들이 금도대협 장풍람의 음성에 놀라 요란하게 곤두박질쳤다.
상대가 자신을 알고 있음에도 더 이상 숨어서 주위를 살필 수는 없는 일.
감천형과 좌백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음, 경고를 했을 텐데?"
금도대협 장풍람이 그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면서 말했다.
"무슨 소린지 알지 못하겠군. 나는 지나다가 이곳을 보게 되었는데 경고라니?"
좌백이 말을 받았다.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귀하가 본인보다 연배가 높음을 감안하여 양보함을 알고 말하면 좋겠소. 이 망산은 개인의 것이 아니니 누가 어디로 가든 귀하가 참견할 문제는 아니오."
좌백이 강경하게 맞섰다.
금도대협 장풍람은 눈을 돌려 감천형을 보았다.
"귀하가 무림맹의 감 대행이오?"
"……."
감천형은 흠칫했다.
상대가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강호에서 사라진 때를 감안한다면 그가 자신을 알 리가 없기에.
"독고 맹주의 얼굴을 봐서 참을 테니, 수하를 이끌고 돌아가시게. 쓸데없이 충돌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감천형이 입을 열었다.
상대는 사부와 동배분, 나이는 그보다 많은 무림의 원로급이었다.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아직 적아난분(敵我難分)의 상황이다.
"무엇이오?"
"좀 전에 같이 온 사람을 잠시 만나고 싶소."
감천형의 질문에 금도대협 장풍람의 안색이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분수를 모르는군……."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세상을 위진시킨 바 있었던 금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문득 공기가 경직된다.
감천형과 좌백의 전신에 긴장이 엄습했다.
금도대협 장풍람의 눈에서 강렬한 신광이 뿜어져 나오면서 살기가 일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독고 맹주의 무공이 중원일절(中原一絶)임을 들었었지. 오늘 과연 그 제자가 얼마나 제대로 진전(眞傳)을 이었는지 알아볼 수 있겠군."
금도대협 장풍람은 금도를 쥔 채로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말끝, 군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수중에서 심산의 맹호가 포효하고 구름 위의 용이 신음하는 듯한 음향이 일며 찬란한 금광(金光)이 감천형에게로 엄습해 갔다.
한효월은 소리도 없이 모옥의 뒤로 돌아가 있었다.
숲으로 둘러싸인 모옥을 가두고 있는 싸리담은 엉성하지만 제법 두터웠다.
숨소리.
낮은 숨소리가 서너 군데에서 들려왔다.
'모두 셋, 넷…… 다섯 명이군.'
잠시 숨소리를 가늠한 한효월은 안으로 스며들 틈을 엿보다가 문득 숨을 죽였다.
모옥에서 한 사람이 소리도 없이 모옥을 빠져나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헐렁한 회포(灰袍)를 입고 있는데 움직임은 신속하기 이를 데 없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모옥을 빠져나오자 모옥 주변에 잠복해 있던 인원들이 썰물처럼 그를 따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귀왕은 이곳을 떠난 것인가?'
그들의 종적을 찾느라 시간을 보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짧은 시간에 만남이 끝났다는 것인가?
모옥의 안에 이미 아무도 없음을 알게 된 한효월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나무에 기호 하나를 새겨두고는 신형을 날려 그 뒤를 따랐다.